- 서두 1 본문으로
서문의 quatuor libris는 이 책에 앞서 쓴 네 권을, hoc libro quinto는 현재의 다섯째 권을 가리킨다.
지식의 참됨을 문제 삼는 falso cognominatae agnitionis를 “거짓으로 지식이라 불리는 것”으로 옮겼다. 이 표현은 저술 전체의 목적을 설명한다.
끝 문장은 말씀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신 일과, 우리를 그분과 같은 존재로 완성하시는 일을 연결한다. esse quod et ipse는 그분과 같이 된다는 관계를 직접 표현한다.
- 1.1 본문으로
initium facturae는 피조물의 시작 또는 첫 열매를 뜻한다. 인쇄314쪽 각주5가 야고보서1:18과 연결하여 제시하는 첫 열매의 뜻을 따랐다.
accepimus는 받았다는 동사만 있고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앞의 썩지 않음의 선물과 이어 읽어 “선물을 받았다”로 옮겼다.
apostasia는 배교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제자로 삼는다는 의인화된 주어이다. 뒤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지배에 맞서는 별도 주어이다.
secundum suadelam은 설득의 방식이다. 의로움과 옛 지으심을 함께 보전한다는 마지막 목적절이 이 방식을 설명한다.
- 1.2 본문으로
animam suam pro nostra anima는 자신의 혼과 우리의 혼을 대응시킨다. 이어지는 자신의 육신과 우리의 육신도 같은 구조이다.
perseveravit Spiritus Dei는 그분이 하나님의 영으로 머무는 관계를 말한다. 병렬 그리스어도 그분이 참으로 계셨던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한다.
putative와 in substantia veritatis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참된 실재를 대조한다. 이어지는 예언적 환상의 예는 실제 성육신을 설명하는 논거이다.
recapitulasset는 아담의 옛 지으심을 그분 자신 안에 총괄한다는 뜻이다. 이 총괄과 그분의 참된 피와 육신을 연결한다. per quam은 앞의 여성명사 carnem을 받아 그 육신을 통한 속량을 표현한다.
- 1.3 본문으로
옛 출생과 새로운 출생은 각각 죽음과 생명의 상속에 연결된다. 성육신의 주체인 아들과 그것을 이루시는 아버지가 구분되어 있다.
하늘의 포도주와 세상의 물은 결합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인쇄316쪽 각주4는 잔에 물을 섞는 관행 및 물만 사용하는 집단과 이 표현을 연결한다.
in animali와 in spiritali는 혼에 속한 이와 영에 속한 이를 대조한다. 두 표현 모두 안에서 죽거나 살아난다는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의 손은 복수이다. 아버지가 그 손들을 향해 창세기1:26을 말씀하시며, 그 손들이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완성한다.
- 2.1 본문으로
aliena와 sua propria는 남의 것과 자신의 것을 대조한다. 피조물을 지으신 분과 구원하시는 분의 관계가 이 대조의 중심이다.
성찬의 잔과 빵에 관한 세 부정문은 육신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가정에 달려 있다. 구원과 실제 피와 몸을 연결하는 반문이다.
318쪽의 별표 둘은 시리아어 단편의 범위를 표시한다. 범위는 Vani autem omnimodo에서 communicatio corporis ejus est까지이다.
qua vere factum의 qua는 앞의 인간 실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 실체가 되셨다는 문장이다.
- 2.2 본문으로
319쪽 라틴어는 잔을 자신의 흘려진 피라 부르고 auget로 피의 성장을 말한다. 병렬 그리스어에는 피라고 고백하셨다는 동사와 적신다는 동사가 있다.
320쪽 라틴어 성찬 표현에는 피와 몸이 함께 나온다. 그리스어 병렬문의 같은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적는다.
섞은 잔의 mixtus는 잔 안의 혼합을 뜻한다. 이어지는 factus panis는 만들어진 빵이다.
에베소서 인용에는 “그분의 살과 뼈에서”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321쪽 각주4는 이 구절의 전승 차이를 설명한다.
nervi는 몸을 이루는 힘줄을 뜻한다. 참된 사람의 경륜을 살, 힘줄, 뼈로 이루어진 몸과 연결한다.
- 2.3 본문으로
포도나무 줄기와 밀알의 성장, 성찬, 몸의 부활이 한 비유의 흐름을 이룬다. 이 본문의 Spiritus Dei는 식물이 다시 자라는 과정의 주체이다.
라틴어는 썩을 것에 썩지 않음을 “거저” 주신다고 한다. gratuito에 대응하는 한국어는 하나님의 선물이 값없이 주어짐을 표현한다.
resolutio는 몸이 풀어지는 해체이다. 마지막 질문은 이 해체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배우는 일을 설명한다.
- 3.1 본문으로
고린도후서12장 인용에서 육신의 가시와 사탄의 사자는 같은 대상을 설명한다. 주님께 드린 간청의 횟수는 세 번이다.
능력이 약함에서 완성된다는 인용문에는 라틴어 mea가 없다. 앞의 은혜에는 mea가 있어 “내 은혜”라고 한다.
325쪽 각주5에 실린 Grabe의 교정문은 교만이 진리와 창조주를 향한 사랑을 빼앗는다는 뜻이다. 인쇄문의 nec와 ab eo 뒤의 et가 삭제되어 있다.
두 가지의 경험은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 경험이 지식과 사랑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 3.2 본문으로
처음의 창조와 이미 지어진 몸의 회복을 비교한다. 뼈와 힘줄과 핏줄이 없던 데서 사람을 만드는 일이 비교문의 더 어려운 항목이다.
동맥과 정맥을 피와 숨의 통로라고 부르는 표현은 이 문헌의 신체 설명이다. spiritus는 여기서 혈관과 연결된 숨 또는 기운을 가리킨다.
inviscera는 인쇄된 내장 명칭이고, copulatio animae et corporis는 피를 혼과 몸의 연결로 설명한다.
- 3.3 본문으로
해면과 횃불의 비유는 이미 물과 불을 머금은 물건을 들고서 그것을 담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나타낸다.
현재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육신을 살리는 능력으로 비교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동안 산다는 조건이 반복된다.
끝의 라틴어 longa et sine fine는 “길고 끝없는” 생명이다. 그리스어 병렬문은 μακαρία를 사용하여 복된 생명이라 표현한다.
- 4장 본문으로
Demiurgus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이 장의 논쟁 상대는 창조주와 그보다 높은 아버지를 구분한다.
영과 혼이 본성상 불멸한다는 주장은 논쟁 상대가 내세우는 전제다. 이레나이오스는 그 전제로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몸을 살리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obtinentem benignitatem ejus는 선의를 지배하거나 억누르는 원인을 가리킨다. 329쪽 주9는 그리스어 ἐπικρατοῦντα와 비교한다.
Harvey판에는 이 장의 절 번호가 없다. 통상 4장 1-2절이 이 한 단위에 들어 있다.
- 5.1 본문으로
라틴어 patrum은 조상들을 뜻한다. 병렬 그리스어 πνευματικῶν은 영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330쪽 주4는 두 독법을 대조한다.
translatio와 assumtio를 각각 옮겨짐과 들려 올라감으로 옮겼다. 에녹과 엘리야의 몸이 함께 보존된다는 논지다.
장로들은 사도들의 제자들로 소개된다. 옮겨진 이들이 낙원에 머문다는 전승의 전달자다.
coauspicantes incorruptelam은 썩지 않을 삶을 함께 시작한다는 표현이다. 병렬 그리스어 προοιμιαζομένους는 서막을 연다는 뜻을 지닌다.
낙원에 관한 괄호는 장로들의 전승을 설명한다. 말로 전할 수 없다는 제한은 현재 우리의 처지에 관한 것이다.
- 5.2 본문으로
아나니아, 아자리아, 미사엘은 다니엘서 세 인물의 이름이다. 본문은 바빌로니아식 이름 대신 이 이름들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손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밝혀진다. 같은 손이 창조와 보존에 관여한다는 논지다.
넷째 인물을 가리키는 인용문은 Filio Dei,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절과 다음 절이 통상 5장 2절을 이룬다. Harvey판은 Neque igitur에서 3절을 시작한다.
- 5.3 본문으로
fidem Dei는 여기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뜻한다. 사람들의 incredulitas, 곧 불신과 마주 놓인다.
dispositio는 하나님이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경륜을 가리킨다.
영원한 존속의 대상은 다시 일으켜진 몸이다. 라틴어 corpora와 eis가 이 관계를 연결한다.
- 6.1 본문으로
puer는 아이 또는 종을 뜻하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333쪽 난외에는 이사야 42:1과 마태복음 12:18이 제시되어 있다.
imago와 similitudo를 형상과 닮음으로 구분했다. 이 대목은 빚어진 몸의 형상과 영을 통해 받는 닮음을 함께 논한다.
animalis는 anima에서 나온 말로 혼에 속함을 뜻한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논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라틴어 audivimus는 우리가 들었다는 완료형이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5.7로 표시된 그리스어 병렬문에는 현재형 ἀκούομεν이 있다.
Spiritus는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가리키며 문맥에 따라 수식어가 달라진다. 아버지의 영이 혼과 육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결합한다는 것이 이 단락의 설명이다.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인용문은 영, 혼, 몸을 열거한다. 뒤의 논증은 이 셋이 함께 보존되고 같은 구원을 받는다는 데 집중한다.
- 6.2 본문으로
템플룸 크리스티(templum Christi)는 그리스도의 성전이다. 이어지는 성경 인용에서는 몸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부른다.
살아 있는 몸을 가리키는 corpus와 육신을 가리키는 caro가 이 단락에서 서로 설명한다.
자기 실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표현은 몸을 일으키는 능력의 근원을 설명한다.
- 7.1 본문으로
anima, spiritus, caro를 각각 혼, 영, 육신으로 옮겼다. 죽을 몸과 대비되는 혼의 비물질성에는 quantum ad comparationem mortalium corporum이라는 비교의 한정이 붙는다.
창세기 인용은 생명의 숨을 사람의 얼굴(in faciem hominis)에 불어 넣으셨다고 한다. 시편 인용의 illi vivet는 그분을 위하여 살 것이라는 미래형이다.
337쪽 본문은 immobilem과 neque spiritus를 채택한다. 각주에는 immemorabilem 및 neque spiritus의 탈락이나 et spiritus 독법이 실려 있다.
- 7.2 본문으로
corpus animale는 혼에 참여하는 몸, corpus spiritale는 영을 통해 일어나 생명을 얻는 몸으로 풀이된다. 혼과 영의 구별에 따라 혼에 속한 몸과 영에 속한 몸으로 옮겼다.
semper permanentem은 Spiritum을 수식한다. 언제나 머무시는 영을 통해 몸이 생명을 얻는다는 문장이다.
베드로전서 인용에는 exultabitis라는 미래형이 있다. 마지막 suum gaudium은 주님의 얼굴을 보는 기쁨을 이어받아 자신의 기쁨이신 분으로 옮겼다.
- 8.1 본문으로
pignus는 장차 받을 상속을 미리 확증하는 보증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예의 일부라고 풀이한다.
339쪽 본문의 voluntate Patris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라는 표현이다. 같은 쪽 각주 9는 voluntatem에 해당하는 독법을 제안한다.
340쪽 병렬 그리스어는 판본이 바실레이오스의 성령론 29장(다른 구분 72장)에 귀속시키는 인용문이다. 라틴어의 aspirationem은 이 병렬문의 ἐπιθυμίαν과 이어져 갈망으로 옮겼다.
라틴어 본문은 animae et carnis adunatio, 곧 혼과 육신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 결합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영에 속한 사람을 이룬다.
- 8.2 본문으로
갈라진 굽은 아버지와 아들을 향한 믿음의 굳건함에, 되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각각 대응한다.
secundum suam causam은 340쪽 각주 5에서 자신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짐승과 같아지는 원인을 그 사람의 삶에 연결하는 표현이다.
341쪽의 ejiciunt se vivificans Verbum은 생명을 주는 말씀을 자기에게서 내쫓는다는 구문으로 옮겼다. 같은 쪽 각주 4에는 vivificantes 독법과 자신들을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부터 내쫓는다는 그리스어 구문이 함께 제시된다.
- 9.1 본문으로
342쪽에는 psalmationem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문맥의 plasma 및 판본 각주의 plasmationem과 연결되는 말로, 하나님께서 빚으신 것으로 옮겼다.
혼은 영과 육신 사이에 놓인다. 영을 따르면 높이 들리고 육신에 동조하면 땅의 욕망으로 떨어진다는 두 방향을 설명한다.
juste homines dicentur의 juste는 불린다는 동사를 수식한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불린다는 뜻보다 마땅히 사람들이라고 불린다는 뜻에 가깝다.
- 9.2 본문으로
promptus와 promptum은 기꺼이 하려는 태도와 힘을 가리킨다. 이레나이우스는 육신의 약함을 이기는 영의 힘과 순교자들의 증언을 연결한다.
sanguis rationalis와 sanguis irrationalis를 각각 이성 있는 피와 이성 없는 피로 옮겼다. 피에 붙는 이 표현은 영에 참여하는 사람과 영이 없는 사람의 대비 안에 있다.
고린도전서 인용의 portemus는 권유형이다. 하늘에서 오신 이의 형상도 지니자는 뜻으로 옮겼다.
- 9.3 본문으로
possidet와 possidetur는 차지하다와 차지되다의 능동·수동 대조이다. 육신은 영이 상속받는 재산이라는 다음 절의 비유로 이어진다.
343쪽에는 판본이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바실레이오스에게 귀속시키는 그리스어 병렬문이 실려 있다. 그리스어 본문의 θεῖον πνεῦμα와 라틴어의 sanctus Spiritus는 각각 하나님의 영과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이다.
- 9.4 본문으로
상속받는 영과 상속재산이 되는 육신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살아 있는 상속자와 죽은 이의 재산에 빗댄다.
testamentum Evangelii는 이 문맥에서 복음의 유언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죽음, 유언의 공개, 종들의 해방, 상속자의 지위가 한 문장에 이어진다.
344쪽 병렬 그리스어의 시작에는 생략 표시가 있다. 그 인용은 신부의 비유에서 시작하여 사람의 지체가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문장까지 이어진다.
- 10.1 본문으로
접붙임(insertionem)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일을 올리브나무의 접붙이기에 빗댄 말이다. 믿음을 통해 나아짐, 영을 받아들임, 그 열매를 맺음이 함께 이어진다.
육신과 피(caro et sanguis)는 여기서 영을 거부하고 이전 상태에 머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단락은 접붙임 뒤에도 육신의 실체가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왕의 동산(paradisus regis)과 하나님의 동산(paradisus Dei)이 차례로 나온다. 왕의 동산에 심긴 열매 맺는 나무가 영을 받은 사람의 비유가 된다.
- 10.2 본문으로
자기 잘못으로(secundum suam causam)는 방치된 나무에 빗댄 사람의 책임을 나타낸다. 346쪽 각주 3은 causam을 culpam으로 풀이한다.
나무와 육신의 실체(substantia)는 유지되고 열매의 성질(qualitas)이 달라진다는 구조가 두 번 반복된다. 사람의 경우 그 열매는 행위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imaginem et similitudinem)에 따라 지어진 본성이 사람의 처음 상태로 제시된다. 영의 접붙임으로 이 본성에 돌아온다고 설명한다.
- 10.3 본문으로
로마서 인용의 incipietis mori는 미래를 나타내며 여기서는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347쪽 각주 2는 시작을 뜻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μέλλετε ἀποθνήσκειν의 관계를 설명한다.
로마서 8장 인용은 죽을 몸도 살아난다는 문장까지 이어진다. 인용에서 예수를 일으키신 분과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분은 동일한 주체이다.
육신 안의 생활(conversatio in carne)과 사람을 죽이는 육신의 욕망(concupiscentiae carnis)을 구별한다. 바울 자신이 육신 안에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그 설명의 근거이다.
- 11.1 본문으로
갈라티아서의 악덕 목록에는 경쟁심(aemulationes), 격분(animositates), 자극하는 말(irritationes)이 각각 실려 있다. 347쪽 각주 5는 irritationes를 분쟁을 일으키는 언어와 관련해 풀이한다.
영의 열매 목록은 절제(continentia) 다음에 순결(castitas)을 덧붙여 열 항목을 제시한다. 348쪽 각주 1은 castitas의 전승 문제를 논한다.
유약한 자(molles)는 문자적으로 부드럽거나 연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성적 악덕을 열거하는 문맥에 있으며, 뒤의 masculorum concubitores는 남자와 동침하는 자를 뜻한다.
씻음, 거룩해짐, 의롭게 됨은 세 개의 수동형으로 나열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이 구원의 근거로 함께 제시된다.
- 11.2 본문으로
하늘에서 오신 분의 형상을 지닙시다(portemus)는 권유형이다. 앞의 지녔다(portavimus)와 시제 및 문장 기능이 다르다.
우리가 씻어낸 것은 이전의 헛된 생활이라는 문장에서 abluti sumus는 뒤의 목적어들과 연결된다. 349쪽 각주 2도 그리스어 중간태와 타동적 용법을 설명한다.
- 12.1 본문으로
첫 문장은 통상 5권 11장 2절의 끝에 해당한다. 같은 지체들로 썩음의 일을 하던 사람이 영의 일을 하며 살아난다는 설명이다.
이사야 인용의 Devoravit mors potens는 죽음이 주어인 문장이다. 350쪽의 그리스어 병렬문도 강해진 죽음이 삼켰다는 형태로 전한다.
생명이 사람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restituet는 미래형이다. 죽음이 생명을 쫓아냈다는 앞의 과거 서술과 대비된다.
- 12.2 본문으로
숨(afflatus), 혼(anima), 영(spiritus)이 구별된다. 생명의 숨을 받은 사람은 혼에 속하고,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땅을 밟는 이들(calcant illam)이라는 이사야의 표현이 이어지는 해석에서는 땅의 욕망을 짓밟는 이들(conculcant terrenas concupiscentias)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adoptio filiorum)은 영이 인류에게 부어진 경로와 연결된다. 본문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셨다고 말한다.
첫 아담과 둘째 아담(secundus Adam)이 대조된다. 먼저 빚어지고 혼을 받은 사람이 뒤에 영에 참여한다는 순서가 설명의 중심이다.
그리스어 병렬문은 창세기 카테나와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 연결된 인용을 나누어 싣는다. 카테나 인용 뒤의 생명을 주는 영을 받는 문장은 별도의 다마스쿠스 요한 표제 아래 이어진다.
- 12.3 본문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육신은 생명의 숨을 잃었던 바로 그 육신이다. 잃어버린 바로 그 양을 찾는다는 비유가 이 동일성을 설명한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골로새서 인용은 음행과 욕망과 탐욕을 벗는 일에 연결된다. 혼이 땅에 속한 욕망으로 내려가 그 욕망과 같은 이름을 얻는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그리스어 병렬문의 ἀποβαλοῦσα는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352쪽 각주 1은 전승의 ἀπολαβοῦσα를 이 독법으로 바로잡았다고 설명한다.
- 12.4 본문으로
영이 일하신 열매는 육신의 구원이라는 설명과 필리피서의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인용이 연결된다. 353쪽 각주 1에는 두 문장의 순서를 바꾸는 Grabe의 제안이 실려 있다.
다시 하나로 모으심(recapitulatio)은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바로 그 사람의 회복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새로워진다는 설명에 이어진다.
마른 손을 고친 이를 말하는 라틴어 curavit는 능동형이다. 354쪽 각주 3은 curatus와 그리스어 치유받은 자를 제시한다. 번역의 손이 말랐다가 치유받은 사람은 이 구문 설명에 따른다.
모태에서 태어난 바울과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는 바울, 보지 못하던 눈과 치유된 눈의 동일성이 나란히 설명된다. 처음의 육신과 지체를 그대로 건강하게 되찾는다는 논증이다.
- 12.5 본문으로
손상된(labefactatum)은 354쪽 본문과 각주 4의 채택 독법이다. 같은 각주는 다른 판본의 labefactum을 함께 기록한다.
치유, 생명, 썩지 않음이 차례로 이어진다. 각 지체의 치유와 사람 전체의 회복은 부활을 위해 사람을 온전하게 준비시키는 일로 연결된다.
- 13.1 본문으로
라틴어 summi Sacerdotis는 대제사장이다. 이 대목은 야이로의 딸을 가리키며, Harvey판 355쪽 주석 2는 마가복음의 회당장 표현을 함께 제시한다.
죽은 사람의 손을 잡음,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명함,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함, 어머니에게 돌려줌이 하나의 인용 안에 이어진다. Harvey판 355쪽 주석 6은 회당장 딸과 과부 아들의 소생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인자의 음성은 라틴어 Filii Hominis에 따른 표현이다. 356쪽 주석 1은 이 인용에 죽은 이들과 인자의 명칭이 들어온 경위를 논한다.
치유와 소생은 이전과 같은 지체와 몸에 일어난다. 이 동일성이 마지막 부활에 관한 논증의 근거이다.
- 13.2 본문으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한 비극 속 인물이다. 이어지는 씨름 비유는 상대의 한 지체만 붙들고 넘어지면서도 승리했다고 여기는 모습을 묘사한다.
두 표현은 인용문의 육과 피를 가리킨다. 표현의 뜻과 사도의 논지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356쪽에는 이 문단의 그리스어 병렬문이 실려 있다. 판본은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병행구 모음과 Halloix의 이레네우스 전기 496쪽을 출처로 적는다.
- 13.3 본문으로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은 각각 incorruptela와 immortalitas이다. 육의 실체가 자체 능력으로 불멸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작용으로 변화한다는 문맥이다.
고린도전서 인용은 죽음아를 두 번 부르며 독침과 승리를 묻는다. 빌립보서 인용의 ita ut possit secundum operationem virtutis suae는 그분의 권능이 작용하는 대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옮겼다.
라틴어 conversatio는 삶의 방식과 공동체적 생활을 나타낸다.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번역은 이 빌립보서 인용의 시민적 소속을 표현한다.
357-358쪽 그리스어 병렬문은 육의 변화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목까지 이어진다. 라틴어 본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라는 인용 위치도 덧붙인다.
영혼과 영은 죽을 것이 아니라는 문장은 죽음에 사로잡힌 육이 생명을 받는다는 논증 속에 있다.
- 13.4 본문으로
고린도후서 인용은 Si enim으로 조건을 세운다. Harvey판 358쪽 주석 5는 이 독법과 다른 판본의 semper를 비교한다.
하나님을 고백하여 죽임당하는 몸과 부활할 몸의 동일성이 강조된다. 고린도전서 인용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음의 관계를 반복해 논한다.
359쪽 주석 3에 따르면 Clermont와 Voss 사본에는 potest에서 다음 장의 vocalis est까지 긴 결락이 있다. 채택 판본은 다른 사본 증거를 바탕으로 해당 본문을 싣는다.
- 13.5 본문으로
한 말씀과 많은 말씀의 대비는 육과 피에 관한 한 문장을 읽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육의 부활을 말하는 다른 구절들의 뜻도 함께 보존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14.1 본문으로
피에 대한 책임을 묻다는 inquirere와 exquirere를 옮긴 말이다. 처음에는 카인의 살인과 의인들의 피를 가리키며, 뒤에서는 그 피의 구원과 연결된다.
요약하여 하나로 모음은 recapitulationem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흘려진 의인과 예언자의 피가 그리스도 안에 모이고, 그분을 통해 책임을 묻는다는 뜻이다.
창세기 인용 pro sanguine ejus effundetur는 흘린 피에 대한 응보를 말한다. 360쪽 주석 8은 일부 사본이 생략된 주어 sanguis를 넣는다고 기록한다.
- 14.2 본문으로
육은 최초에 진흙으로 빚어진 사람을 이어받는 것으로 설명된다. conspersio는 물질을 섞어 만든 반죽을 뜻한다.
말씀께서 잃어버린 사람이 지녔던 그것이 되셨다는 문장은 성육신과 구원을 연결한다. salutare는 구원하는 성격을 나타내며, 뒤의 교통과 구원의 찾음이 그 작용을 풀어 준다.
골로새서 인용의 cogitationi ejus는 그분의 뜻에 적대하였다는 표현이다. 362쪽 주석 2에는 cogitationis라는 다른 사본 독법도 실려 있다.
- 14.3 본문으로
이 문단은 죄의 유무에 따른 차이와 육의 실체에 따른 차이를 구별한다. 그리스도의 죄 없는 육이 죄에 붙들린 우리의 육을 화해시킨다는 논증이다.
그분의 영혼에 속임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표현은 라틴어 in anima ejus에 따른 것이다.
교통은 communicatio를 옮긴 말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육을 함께하시는 관계를 가리킨다. 에페소서 인용은 피를 통한 속량과 용서, 가까워짐을 잇는다.
- 14.4 본문으로
육적인 행위는 사람을 죄로 돌이켜 생명을 빼앗는 행위들이다. 같은 몸의 지체가 죄의 도구에서 의의 도구로 쓰인다는 로마서 인용이 이어진다.
피로 되돌려졌다는 redhibitus를 옮긴 것이다. 363쪽 주석 3은 이 단어를 회복과 반환의 뜻으로 설명한다.
머리를 붙든다는 권면에서 머리는 육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킨다. 그분이 하나님이심과 사람이심을 함께 받아들이라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 15.1 본문으로
다시 태어남은 secunda generatio이다. 이 대목에서는 땅으로 돌아간 몸이 부활하는 일을 가리킨다.
위로하다로 옮긴 advocare는 부르다와 권면하다의 뜻도 지닌다. 이사야 인용에서는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며 회복되는 문맥에 놓인다.
에제키엘 인용의 spiritus는 하나님의 영, 생명을 주는 숨, 사방의 바람을 함께 가리킨다. 각 문장의 생명과 호흡 문맥에 따라 영, 숨, 바람으로 옮겼다.
이것들을 만드신 주님께서 아십니다에는 qui fecisti haec가 포함된다. Harvey판 364쪽 주석 4는 이 표현이 저자나 번역자를 통해 인용에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생명나무의 날과 같다는 이사야 인용에서 lignum vitae는 생명나무이다. 364쪽 주석 8은 이 표현의 칠십인역과 히브리어 본문 차이를 논한다.
- 15.2 본문으로
하나님의 손은 처음 사람을 빚으시고 모태에서도 빚으시는 말씀을 가리킨다. 진흙으로 눈을 고치신 행위가 창세기의 사람 창조와 연결된다.
모태에서 빚지 않은 채 두셨던 것은 praetermisit plasmare를 옮긴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창조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치유가 이어진다.
생명의 무리는 cohortem vitae이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어 되찾는 목자의 장면으로 구원을 묘사한다.
- 15.3 본문으로
부분으로 전체를 드러낸다는 말에서 부분은 시력의 형성이며, 전체는 사람 전체의 창조이다.
다시 태어나는 씻음은 lavacrum regenerationis이다. 실로암에서 씻고 보게 된 사건을 몸의 회복과 새로 남에 연결한다.
갈라디아서 인용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ei와 그분을 전한다는 eum으로 이어진다. 인용문은 때에 해당하는 종속절 형태로 끝난다.
- 15.4 본문으로
흘러 퍼지는 물질은 fluida materia et effusa이다. 이레네우스는 눈과 몸이 같은 땅의 흙에서 빚어졌다는 논거로 발렌티누스 계열의 인간 창조 설명에 답한다.
아담으로부터 눈멀어 있던 사람은 ab Adam caecus를 옮긴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의 치유를 아담에게서 이어진 인류의 회복과 연결하는 표현이다.
처음에 아담을 찾으신 하나님과 마지막 때 그의 후손을 찾으신 말씀이 같은 음성으로 연결된다. 저녁이라는 시간 표현도 두 장면을 잇는다.
- 16.1 본문으로
plasma와 plasmatio는 흙을 재료로 빚는 행위와 그 결과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어 돌아가는 땅과 창조 때 몸의 재료가 된 땅의 동일성을 논한다.
imago는 형상, similitudo는 닮음이다. 말씀의 성육신은 형상이 눈에 드러나는 사건이며,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아버지를 닮게 되는 사건으로 서술된다.
ipse hoc fiens, quod erat imago ejus는 말씀이 자신의 형상이었던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368쪽 각주 4에는 fiens 대신 faciens가 있는 사본도 제시되어 있다.
368쪽의 그리스어 병렬문은 참되게라는 부사 ἀληθῶς를 쓰고, 라틴어 본문은 참된 형상이라는 imaginem veram을 쓴다.
- 16.2 본문으로
나무를 뜻하는 lignum은 아담의 불순종이 일어난 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연결한다. 죽음까지 순종했다는 문구는 빌립보서 2:8의 인용이다.
per eandem의 지시 대상은 문장 안에 명사로 반복되지 않는다. 368쪽 각주 6은 앞 절의 형상, 곧 εἰκών을 지시 대상으로 설명한다.
첫 아담 안에서 범죄하고 둘째 아담 안에서 화해한 주어는 우리다. 여기서 빚을 진 대상은 처음에 계명을 주신 창조주다.
- 17.1 본문으로
Demiurgus는 만들고 빚는 이를 뜻하는 창조주다. 이어지는 문장은 같은 분을 사랑의 관점에서 아버지, 능력의 관점에서 주님, 지혜의 관점에서 제작자와 조형자로 부른다.
consolatus는 달래거나 위로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순종으로 인간의 불순종을 바로잡아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문맥이다.
conversationem은 함께 지내거나 사귀는 관계를 가리킨다. 이 문장의 다른 선물인 subjectio는 창조주에게 복종함이다.
빚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마태복음 6:12와 연결된다. 이어지는 죄의 용서와 같은 채무의 비유를 이룬다.
- 17.2 본문으로
in sensu는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방식을 가리킨다. 중풍병자의 치유라는 눈에 보이는 표징과 죄의 용서에 관한 권능이 연결된다.
ex peccatis enim paralysis subsecuta est는 죄 뒤에 마비가 따랐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이 문장의 마비는 앞서 등장한 중풍병자의 상태를 가리킨다.
두 아버지를 가정하는 질문은 치유를 보내신 분과 영광을 받는 분을 분리할 때 생기는 모순을 묻는다.
- 17.3 본문으로
compassus est nobis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었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겪은 고통과 하나님으로 베푸는 자비가 이어진다.
빚 문서라는 chirographum은 채무를 적은 증서다. 골로새서 2:14의 문구를 나무에서 생긴 채무와 나무에서 이루어진 용서에 연결한다.
- 17.4 본문으로
tabernaculum은 예언자들이 지으려는 거처를 가리킨다. 도끼의 쇠가 떠오른 이야기는 열왕기하 6장의 엘리사 이야기다.
예레미야 인용의 bipennis는 양날 도끼다. 본문의 도끼 비유는 요한의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와 엘리사의 쇠도끼를 이어 준다.
372쪽 라틴어 본문은 높이, 길이, 넓이 세 가지를 열거한다. 그리스어 병렬문에는 깊이를 뜻하는 βάθος도 있다.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은 quidam de senioribus의 번역이다. 이 인용의 인물 이름은 본문에 없다. 펼친 두 손은 두 백성을 한 하나님께 모으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 18.1 본문으로
피조물이 말씀을 떠받친다는 portare는 성육신하신 말씀이 나무에 달리셨다는 앞 문장과 이어진다. 피조물 자체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아버지께 떠받쳐진다.
플레로마는 상대 학설의 충만한 신적 영역을 일컫는다. 무지와 결함에서 피조물이 나왔다는 설명도 여기서 검토하는 상대 학설이다.
373쪽의 quod est conditionis, quod est factum은 피조물에 속한 것과 만들어진 것을 나란히 둔다. 다음 문장의 ex Deo와 generatio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과 태어남을 나란히 둔다.
Spiritus는 영이다. 이 단락은 만물 위의 아버지, 만물을 통한 말씀, 우리 안의 영을 차례로 서술하며 영을 살아 있는 물과 연결한다.
et hoc est verum은 이는 참되다는 뜻으로 옮겼다. 373쪽 각주 4는 hoc를 앞의 Verbum과 연결하여 그 말씀이 참되시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 18.2 본문으로
요한복음의 자기 것들인 sua propria와 자기 사람들인 sui가 구별된다. 저자는 이 차이를 창조된 세계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관계에 적용한다.
374쪽 본문의 invisibiliter는 보이지 않게라는 뜻이다. 같은 쪽 각주 4는 보이게라는 visibiliter를 교정 독법으로 제시한다. 번역은 인쇄 본문의 invisibiliter에 따른다.
신명기 28:66의 달려 있는 생명은 이 문맥에서 나무에 달리신 말씀과 연결된다. 모세의 말을 소개하는 인용과 저자의 십자가 해석이 이어진다.
participans rationabiliter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이성의 방식으로 교통함을 뜻한다. sensuabiliter는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방식을 가리킨다. 375쪽 각주 5에는 이 두 낱말의 다른 판본 독법이 제시되어 있다.
recapitulari는 여러 것을 하나로 총괄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육신이 되어 나무에 달리신 말씀이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모으는 일을 가리킨다.
- 19.1 본문으로
bajulante conditione는 피조물이 주님을 떠받드는 관계이고, quae bajulatur ab ipso는 그 피조물이 주님께 떠받쳐지는 관계이다. 두 동사의 행위 주체가 서로 바뀐다.
advocata는 하와를 위한 마리아의 변호자 역할을 가리킨다. 불순종과 순종을 같은 저울에 놓는 비유가 이 관계를 설명한다.
protoplastus는 처음 지음 받은 아담이고 primogenitus는 맏아들이다. correptio를 바로잡음으로 옮겨, 아담의 죄가 맏아들을 통해 고쳐진다는 문장을 이었다.
뱀의 prudentia는 영리함, 비둘기의 simplicitas는 순박함이다. 본문은 이 둘을 맞세우고 죽음의 사슬이 풀리는 일로 문단을 마친다.
- 19.2 본문으로
porro et longe는 멀리 떨어짐을 나타내는 채택 독법이다. 377쪽 각주 1은 porro 자리에 per Horum을 제안하며 경계자 호로스를 거론한다.
substantia는 앞 문장의 세상과 그 실체를 잇는다. 뒤따르는 여러 설명은 이레나이오스가 열거하는 이단자들의 우주 기원설이다.
속사람을 지성(sensus)과 동일시하고 그것만 완전한 것(ad perfectum)에 오른다는 주장은 이단자들의 견해로 소개된다.
- 20.1 본문으로
praecipientibus는 가르치는 행위로 읽었다. 378쪽 각주 3에는 recipientibus라는 독법도 실려 있다.
ordinatio는 교회를 세우는 질서로 옮겼다. 이어지는 문장은 같은 신앙, 성육신의 경륜, 성령의 선물, 계명과 구원에 대한 기대를 함께 열거한다.
totius hominis는 온 인간이다. 저자는 곧바로 영혼과 몸이라고 풀어 쓴다.
- 20.2 본문으로
ἑπτάμυχος는 일곱 불구멍을 가진 등잔을 수식하는 그리스어이다. 379쪽 본문은 이 단어를 그리스 문자로 싣고, 각주 1은 라틴 문자로 전해진 형태들을 설명한다.
idiota religiosus는 전문적인 수사 교육과 대비되는 경건한 평범한 신자를 가리킨다. sophista는 문맥상 궤변가로 옮겼다.
낙원에서 먹는다는 표현은 주님의 성경을 읽고 양육받는 일로 풀이된다. 선악의 지식을 내세우는 이단자들의 주장도 같은 낙원 비유 안에 놓인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리스도는 영의 머리가 되시고 영은 인간의 머리가 된다. 라틴어 spiritus를 영으로 옮겼으며, 보고 듣고 말하는 일은 per illum, 곧 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읽었다.
- 21.1 본문으로
창세기 인용의 observabit는 노리다로 옮겼다. 이 인용 직전에는 머리를 밟는다는 calcans가 별도로 나온다.
갈라디아서 인용의 채택 본문은 Legem factorum, 곧 행위의 율법이다. 381쪽 각주 4가 이 독특한 독법을 논한다.
principalem hominem은 여자가 빚어져 나온 처음 인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인자를 자칭하는 일과 아담을 자신 안에 하나로 모으는 일이 연결된다.
palma는 승리자에게 주는 종려가지를 뜻한다. 죽음이 얻은 승리와 인간이 얻을 승리를 같은 낱말로 맞세운다.
- 21.2 본문으로
dissuadere는 어떤 일을 하지 않도록 설득한다는 뜻이다. 대적은 굶주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양식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게 하지 못했다.
repletio는 배부름이고 duplex gustatio는 두 사람의 맛봄으로 읽었다. 낙원의 배부름과 그리스도의 굶주림을 대응시키는 채택 라틴어 본문이다. 382쪽 각주 4는 repletio의 번역 전승을 논한다.
“아래로 몸을 던져라”와 천사들이 받든다는 성경 구절은 서로 다른 발화이다. 본문은 악마가 자기 권유를 성경 인용과 이어 붙였다고 설명한다.
quantum autem ad illum 이하는 대적을 향한 적용으로 읽었다. 그가 눈앞의 인간 안에서 자기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본문은 사탄을 히브리어로 배교자라고 풀이한다. 이 어원 풀이는 저자의 논증에 속한다.
세 차례의 시험은 빵, 성전 꼭대기, 세상 나라들의 순서이다. 마지막 시험의 대사는 누가를 언급하면서 엎드려 경배하라는 표현도 함께 싣는다.
- 21.3 본문으로
Homo ejus와 Verbum이 이어진다. 하나님께 속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씀으로서 도망자를 묶으시는 논증이다. 384쪽 각주 3도 두 표현의 관계를 논한다.
강한 자의 물건들(vasa)은 악마에게 붙잡힌 사람들로 곧바로 풀이된다.
incorruptela는 썩지 않음이다. 인간이 경험으로 배울 내용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이다.
- 22.1 본문으로
diabolica ignorantia는 385쪽의 채택 표기이다. 같은 쪽 각주 2는 Grabe의 diabolicam ignorantiam도 제시한다. 번역에서는 악마의 무지를 없애는 문맥으로 읽었다.
신명기 인용의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ex tota anima tua, 곧 네 영혼을 다하여가 실려 있다.
labes는 여기서 결핍으로 옮겼다. 창조주와 율법이 결핍과 무지에서 나왔다는 반대자들의 설명을 전제로 반문하는 문장이다.
- 22.2 본문으로
높은 은사, 의로운 행위에 대한 자신감, 뛰어난 봉사가 교만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이다. 셋 모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계명에 연결된다.
cadere는 엎드림과 떨어짐을 이어 주는 동사이다. 악마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지는 일로 풀이된다.
386쪽 요한복음 인용은 mendax, 곧 거짓말쟁이를 태초부터라고 수식한다. 뒤의 23장 말미에서는 homicida, 곧 살인자가 같은 자리에 나온다.
- 23.1 본문으로
창세기 인용은 처음에는 단수 명령 manducabis를 쓰고, 금지와 죽음의 예고에서는 복수형 manducabitis와 moriemini를 쓴다.
하와가 전한 금지에는 먹는 일뿐 아니라 만지는 일도 포함된다. 본문의 인용은 하와의 발화 속에 하나님의 발화를 넣는 형태이다.
tertium mendacium은 세 번째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 낙원에 안 계신 듯 논한 일과 죽음의 예고를 뒤집은 일이 이어서 설명된다.
- 23.2 본문으로
저자는 먹은 날과 죽은 날의 관계를 불순종, 죽음에 대한 빚, 창조의 한 날, 주간의 순환, 천 년의 기간으로 차례로 설명한다.
Parasceve는 준비일이다. 본문은 이를 coena pura, 곧 정결한 만찬이라고 부르고, 다시 sexta feria, 곧 주간의 여섯째 날로 풀이한다.
secunda plasmatio는 두 번째 빚어짐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간에게 주는 죽음에서의 새 빚어짐을 가리킨다.
아담의 죽음을 천 년과 연결하는 해석은 Quidam, 곧 어떤 이들의 해석으로 소개된다. 주님의 하루와 천 년을 비교한 뒤 아담이 그 기간 안에 죽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 24.1 본문으로
잠언 인용의 tyranni는 여기서 왕들과 지도자들에 병행되는 통치자들로 옮겼다. 이어지는 more tyrannico는 폭군처럼 행한다는 부정적 표현이다.
로마서 13장의 권세들은 세금 징수와 연결되는 인간 통치 권세들로 해석된다.
주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낸 일은 앞의 악마의 요구와 대비된다. 주님께서 세금 징수자들의 직무를 인정하셨다는 논증이다.
- 24.2 본문으로
관리들의 책임은 행위에 따라 갈린다. 정의롭고 합법적인 행위와 폭정으로 정의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구별된다.
물고기처럼 서로 잡아먹는다는 비유는 인간 통치와 법이 억제할 폭력을 가리킨다.
gentiles는 이 문단에서 민족들로 옮겼다. 지상의 통치가 사람들의 평온과 정의에 주는 유익을 논한다.
- 24.3 본문으로
correptio는 백성을 바로잡는 일이다. 왕이 주어지는 목적은 유익과 정의의 보전, 두려움과 형벌과 책망, 기만과 모욕과 교만으로 나뉘어 열거된다.
악마의 능력은 인간의 마음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하는 일로 설명된다. 하나님을 잊는 것과 악마를 하나님처럼 경배하는 것이 그 결과로 이어진다.
- 24.4 본문으로
같은 apostata를 영토를 빼앗은 자의 비유에서는 반역자, 하나님의 법을 떠난 천사에게서는 배교자로 옮겼다.
examinatio sententiae ejus, homo factus est는 인간이 악마의 생각을 밝혀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으로 읽었다. 이 문장의 homo는 인간이며, 직후에도 악마가 인간을 적대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에베소서에 대한 설명에는 공중의 영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천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복수 표현이 실려 있다. 누가복음 인용에서는 그 악마의 권세를 밟는 일이 이어진다.
- 25.1 본문으로
적그리스도는 여러 우상을 치우고 자신을 하나의 우상으로 높이는 자로 묘사된다. 여러 우상에 흩어졌던 오류가 그 안에 모인다는 논증이다.
데살로니가후서 인용은 Quoniam nisi로 시작하는 생략된 조건문이다. 번역에서는 배교와 죄의 사람이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선행 조건을 드러냈다.
homo peccati와 filius perditionis는 각각 죄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 이 인물을 적그리스도와 연결한다.
- 25.2 본문으로
다니엘의 열 뿔과 작은 뿔, 뽑힌 세 뿔은 마지막 왕국과 왕들에 대응된다. 이레나이오스는 마태복음과 다니엘과 데살로니가후서를 같은 적그리스도 논증에 잇는다.
본문의 기간 표현은 tempus temporum et dimidium tempus이다. 이를 때들의 한 때와 반 때로 옮겼으며, 저자는 곧바로 삼 년 육 개월로 풀이한다.
주 예수의 spiritus oris는 입의 숨으로 옮겼다. 불법자를 죽이는 행위와 자신이 오셔서 나타나심으로 멸하는 행위가 병행된다.
mittet는 보내실 것이다라는 미래형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을 거절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미혹의 활동을 보내시는 것으로 서술된다.
- 25.3 본문으로
하나님을 잊은 과부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불의한 재판관은 적그리스도로 풀이된다. 이는 저자가 누가복음의 비유에 붙인 해석이다.
다니엘 인용의 datum est in sacrificium peccatum은 죄가 제물로 주어졌다는 형태이다. 이어지는 justitia는 정의로 옮겼다.
jugum torquis ejus는 그의 목테의 멍에라는 표현이다. 393쪽 각주 5는 멍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구문과 동사의 연결을 논한다.
달걀처럼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비유가 인용문에 포함된다. 같은 문단 끝의 한 이레의 절반은 저자 자신이 삼 년 육 개월로 풀이한다.
- 25.4 본문으로
praemisit는 먼저 보내셨다는 채택 독법이다. 393쪽 각주 9는 promisit, 곧 약속하셨다는 교정을 제안한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환상을 해석하고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린 동일한 천사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예언자들을 보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같은 분이라는 논증을 마친다.
- 26.1 본문으로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Domini discipulis를 옮긴 말이다. 이 문장에서 요한은 묵시록으로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의 일을 알려 주는 주어다.
열 왕, 그 가운데 죽임당할 셋, 여덟째가 될 자를 구별한다. 한 시간은 계시록 인용의 una hora에 해당한다.
손으로 깎지 않은 돌을 그리스도로 읽는 다니엘 해석이 이어진다. 다니엘 인용에는 쇠의 뿌리, 구운 진흙, 사람의 씨를 통한 혼합이라는 표현이 있다.
구운 진흙은 testo와 testum을 옮긴 말이다. 395쪽 주석 4는 사본의 다른 형태와 편집 본문의 독법을 설명한다.
- 26.2 본문으로
영원한 나라에 이어 의인들의 부활이 설명으로 붙는다. 일시적인 나라들과 영원한 나라를 대조하는 문맥이다.
창조주는 Demiurgus, 권능들은 virtutes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권능들에서 예언들이 나왔다는 주장은 이레나이오스가 비판하는 이들의 견해다.
뜻을 뒤집어서라는 말은 secundum eversionem sententiae를 옮겼다. 마르키온 추종자들의 명시적인 모독과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의 의미 변형을 구별한다.
뱀을 통한 유혹과 후대의 사람들을 통한 모독에는 사탄이 다른 행위자를 도구로 삼는다는 연결이 있다.
- 26.3 본문으로
유스티누스의 발언은 그가 쓴 정확한 저작명이 제시되지 않은 인용이다. 396쪽 주석 4에는 그라베와 마수에의 서로 다른 저작 추정이 나온다.
라틴어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말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적는다. 병렬 그리스어에는 그분과 사도들의 말씀, 주님을 모독한다는 독법이 있다.
생명의 영은 Spiritum vitae를 옮긴 말이다. 창조주가 생명을 주고 법을 세운 분이라는 서술에 이어 하나님의 심판을 논한다.
아버지가 심판하지 않는다면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두 문장은 통상 27장 1절의 시작이다. Harvey판에서는 26장 3절에 속한다.
- 27.1 본문으로
이 절은 가족의 분열, 두 사람의 분리, 가라지와 밀, 어린양과 염소를 함께 열거한다. 꺼지지 않는 불과 영원한 불을 각각 구별한다.
불순종하는 자들은 indicto audientes에 해당한다. 398쪽 주석 3에는 inobedientes라는 사본 독법이 제시된다.
자신의 선택은 ex sua sententia, 자유로운 생각은 sensus liber를 옮긴 말이다. 믿음과 불순종 모두 각자의 선택과 연결된다.
- 27.2 본문으로
교제는 communio, 떨어져 나감은 separatio를 옮긴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명과 빛, 죽음과 어둠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직접 벌하신다는 설명과 좋은 것을 잃은 데서 형벌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구별하는 문장이다. principaliter는 여기서 먼저라는 말로 옮겼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과 그것들의 상실에 모두 영원하며 끝이 없다는 표현이 붙는다.
빛의 비유에서 라틴어 immenso는 한없이 넓게 퍼지는 빛을, 병렬 그리스어 διηνεκοῦς는 계속되는 빛을 가리킨다.
마지막 요한복음 인용의 라틴어 est operatus는 그 사람이 행했다는 단수형이다. 399쪽 주석 5에는 행위들을 가리키는 복수형 그리스어가 제시된다.
- 28.1 본문으로
말씀의 도래를 나타내는 라틴어 venit에 그리스어 병렬문은 ἐκδέχεται를 쓴다. 400쪽 각주 1에는 ἔρχεται라는 독법도 제시된다.
라틴어의 regnum Patris는 아버지의 나라이다. 병렬 그리스어는 하늘들의 나라라고 표현한다.
빛이나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각각 알맞은 거처가 주어진다. 마지막 문장의 semetipsos는 좋은 것들을 잃도록 스스로 만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 28.2 본문으로
데살로니가후서 인용은 dilectionem Dei,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 있다. 400쪽 각주 6은 진리를 뜻하는 veritatis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recapitulare는 여러 시대의 배교를 한 존재 안에 모아 총괄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본문은 그의 결정과 의지와 판단을 거듭 명시한다.
요한계시록 인용은 과거형과 현재형과 미래형이 이어진다. 마흔두 달의 권세, 형상의 말함, 매매를 제한하는 표가 차례로 나온다.
a constitutione mundi는 세상이 세워질 때부터라는 뜻이다. 바로 앞의 occisi와 연결하면 어린양이 죽임당한 때를 나타낸다.
armiger는 무기를 들고 따르는 자이며, 같은 인물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른다. 형상에 주는 spiritus는 숨, 곧 생기를 나타낸다.
육백육십육은 백 여섯, 십 여섯, 일 여섯으로 풀어 쓴다. 이어지는 육천 년은 이 수로 총괄되는 배교의 기간이다.
- 28.3 본문으로
Harvey판 28장 3절은 통상 28장 3-4절에 해당한다. Et propter hoc in omni tempore부터 통상 4절이다.
창세기 인용은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일을 마치셨다고 적는다. 이레나이우스는 엿새와 육천 년을 대응시킨다.
하나님의 두 손은 본문 자체가 아들과 영으로 풀어 쓴다. 이어지는 겨와 밀의 비유에서는 각각 배교와 믿음으로 열매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contriti, attenuati, conspersi, igniti는 빻고 곱게 만들고 반죽하고 굽는 과정을 잇는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겪는 환난을 왕의 잔치에 올릴 빵에 비유한다.
이그나티우스 인용의 라틴어는 그리스도의 밀과 하나님의 빵이다. 이 페이지의 그리스어 병렬문은 하나님의 밀과 깨끗한 빵으로 적는다. 인쇄본의 난외 표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을 가리킨다.
- 29.1 본문으로
sui arbitrii와 suae potestatis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권한을 지닌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이를 불멸에 이르도록 성숙하게 하신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conditio는 이 대목에서 창조 세계이다. insumitur는 사람을 위해 쓰인다는 뜻이며, 다음 문장은 창조 세계가 사람을 위해 지어졌다고 설명한다.
물동이의 물방울과 저울의 작은 무게는 이사야서 인용에 속한다. 줄기와 겨의 비유는 의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를 설명한다.
assumetur는 들어 올려질 것이라는 미래 수동형이다. 이 문장은 교회가 여기에서 들어 올려지는 일, 환난, 의인들의 마지막 싸움을 차례로 말한다.
- 29.2 본문으로
육백육십육은 노아의 나이 육백, 형상의 높이 육십 큐빗과 너비 육 큐빗에 연결된다. 육천 년은 그 자 안에 총괄되는 배교의 기간이다.
인쇄된 inresurrectionem terrae의 표기는 이례적이며, 이 문맥에서는 땅의 반란을 가리킨다. 405쪽 각주 2는 ἐπανάστασιν과 insurrectionem을 제안하고, 병렬 그리스어는 죄를 뜻하는 ἁμαρτίας를 쓴다.
a diluvio는 홍수 이후이며, 각주에는 홍수 이전이라는 다른 독법도 있다. 본문은 홍수 이전의 천사들의 배교와 이후의 우상 제작을 이어 다룬다.
Ananias, Azarias, Misael은 하나냐, 아사랴, 미사엘이다. succensio는 불태움을 가리키며, 세 사람이 겪은 불가마의 일을 마지막 의인들의 고난과 연결한다.
그리스어 병렬문에는 여러 생략 구간이 있다. 라틴어는 예언자 살해, 의인들을 불태움, 거짓 예언과 속임수를 포함하여 논의를 이어 간다.
- 30.1 본문으로
육백육십육의 각 자리에는 육이 되풀이된다. hecatontasin과 monasin은 각각 백과 일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계열 표현이다.
육십에서 오십을 빼면 십이 된다. 이레나이오스가 비판하는 수는 육백십육이다.
필사자의 실수에 관한 대괄호 문장은 라틴어 편집 본문에 있으며 그리스어 병렬 인용에는 빠져 있다. Harvey는 407쪽 주석 3에서 이를 삽입문으로 설명한다.
이오타로 늘여 썼다는 라틴어 표현은 문자 변형을 설명한다. 407쪽 주석 3은 이를 Ξ가 EI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사본이라는 번역의 대본 표현은 antiquis et probatissimis et veteribus scripturis이다. 이어지는 증언자는 요한을 직접 보았던 이들이다.
- 30.2 본문으로
단 지파와 장차 올 자를 연결하는 논증은 예레미야 8:16의 단이라는 지명과 묵시록의 지파 목록을 함께 읽은 것이다.
보장은 munitio의 번역이다. 408쪽 주석 3은 데살로니가전서 5:3 인용의 여러 역본 표현을 비교한다.
Harvey판 2절 후반의 예언 성취를 기다리라는 문장은 통상 30장 3절의 시작에 해당한다.
- 30.3 본문으로
에우안타스와 라테이노스는 인쇄본의 그리스 철자 ΕΥΑΝΘΑΣ와 ΛΑΤΕΙΝΟΣ에 대응한다. 숫자 계산에는 철자가 중요하다.
첫 음절을 ε와 ι로 적는다는 대괄호 설명은 인쇄본 409쪽에 있다. Harvey는 같은 쪽 주석 4에서 이 설명을 삽입문으로 표시한다.
이름의 수는 그리스 문자 수가를 합한 것이다. 라테이노스는 30+1+300+5+10+50+70+200, 테이탄은 300+5+10+300+1+50으로 각각 666이 된다.
그것이 보였다는 라틴어 visum est는 중성형이다. 앞의 묵시록을 보았다는 진술에 이어진다. 그리스어 병렬문은 ἑωράθη라고 적혀 있다.
그 환상을 본 때는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엽으로 서술된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병렬문 옆에는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5.8이 표기되어 있다.
- 30.4 본문으로
삼 년 육 개월의 통치와 예루살렘 성전에 앉음 뒤에 주님의 도래가 이어진다. 인쇄본의 regnabit와 sedebit는 미래형이다.
일곱째 날은 왕국의 때와 안식을 풀어 설명하는 표현이다. 아브라함의 상속 약속과 동서에서 오는 이들의 잔치가 같은 문맥에 놓인다.
- 31.1 본문으로
promotionis와 meditationis는 의인들이 단계적으로 나아가며 썩지 않음에 이르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다.
ceti는 큰 바다짐승을 가리킨다. 요나 인용은 이 문헌에 적힌 사흘 낮과 사흘 밤의 순서를 따른다.
죽은 성도들을 기억하고 내려오셨다는 인용의 예언자 이름은 이 대목에 적혀 있지 않다.
inferno inferiori는 죽은 이들의 아래 깊은 거처를 가리켜 음부로 옮겼다.
- 31.2 본문으로
invisibilem locum은 하나님께서 영혼들에게 정하신 보이지 않는 장소이다. 바로 아래의 그리스어 병렬문은 해당 형용사가 빠진 자리에 생략점을 찍는다.
perfecte resurgentes에 이어 hoc est corporaliter가 붙어 온전한 부활을 몸의 부활로 풀이한다.
413쪽의 Cod. Arund. explicit 표시는 아룬델 사본의 끝이다. Harvey판 본문은 이어지는 32-36장을 싣는다. 편집 주석은 그 사본 끝에 빈 칸이 있다고 설명한다.
fixuras clavorum은 못이 박힌 자국이다. 412쪽 주석 5는 figuras라는 다른 독법도 기록한다.
- 32.1 본문으로
capere Deum은 하나님을 받아들임이다. 이어지는 assuescunt와 paulatim은 그 수용에 점차 익숙해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conditione는 의인들이 수고하고 박해받던 창조 세계를 가리킨다. 같은 곳에서 인내의 열매를 받고 왕 노릇 한다는 반복이 이어진다.
로마서 8장 인용은 피조물의 해방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연결한다.
414쪽의 sive afflicti sunt는 편집 주석 1에서 방주로 설명하는 어구이며 인쇄 본문에 실려 있다.
- 32.2 본문으로
창세기 인용의 Mare는 바다 쪽인 서쪽을 가리킨다.
quadringentas didrachmas argenti는 은 사백 디드라크마이다. 디드라크마는 두 드라크마짜리 단위이며 414쪽 주석 3은 사백이라는 독법을 설명한다.
아브라함의 씨를 교회와 연결한 뒤, 갈라티아서 인용에서 복수 seminibus와 단수 semini를 대비하여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갈라티아서 4장 인용은 Vos와 estis로 너희를 가리킨다. 415쪽 주석 1은 우리를 가리키는 다른 전승도 기록한다.
- 33.1 본문으로
잔을 들고 감사드린 다음 그 잔을 마셨다는 bibisset ab eo가 본문에 있다.
nova resurgit caro와 novum percepit poculum은 새롭게 일어나는 육신과 이미 받았던 새 잔을 연결한다.
포도나무의 소출이라는 generatione vitis는 뒤에서 육신으로 마시는 행위와 땅의 상속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 33.2 본문으로
이 인용에는 잔치에 부르지 말라는 대상 가운데 divites, 부자들도 들어 있다.
일곱째 날과 의인들의 참된 안식일을 그 나라의 때와 연결한다. 백 배의 보상과 잔치도 그때의 일로 설명한다.
prandium과 coena는 각각 점심과 저녁 식사이다. 이 문맥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잔치를 가리킨다.
- 33.3 본문으로
창세기 27장 인용은 fratris tui와 filii patris tui, 곧 네 형제와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독법이다.
장로들의 증언은 주님의 제자 요한을 보았고 그에게 들었다는 두 관계를 명시한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나타내는 palmes가 두 번 나온다. 뒤의 vero palmite는 인쇄 본문의 참된 가지라는 표현이며 417쪽 주석 4는 이 반복과 시리아어 어형의 관계를 논한다.
포도알 하나의 포도주는 vigintiquinque metretas, 이십오 메트레테스이다. 고대 용량 단위의 이름을 보존했다.
quinque bilibres는 두 리브라짜리 다섯 몫, 곧 십 리브라이다. simila는 고운 밀가루이며 clarae와 mundae 두 수식어가 붙는다.
417-418쪽의 별표는 이 풍요 묘사에 대응하는 아르메니아어 단편을 부록 448쪽에서 참조하게 한다.
- 33.4 본문으로
파피아스는 요한에게 들은 사람, 폴리카르포스의 동료, 옛사람으로 소개된다. 해당 증언의 위치는 그의 다섯 책 가운데 넷째 책이다.
418쪽의 그리스어 병렬문은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39에서 인용한 파피아스 증언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사야 11장 인용은 사자와 소가 짚을 먹는다고 함께 열거한다. 418쪽 주석 4는 소처럼 먹는다는 다른 독법을 제안한다.
저자는 여러 민족의 신앙적 화합에 이 말을 적용하는 해석을 언급한 뒤, 부활 때 짐승들에게도 이루어질 회복을 설명한다.
- 34.1 본문으로
Harvey판 419쪽에 CAP. XXXIV와 1절 시작이 인쇄되어 있다.
에제키엘 인용은 in spe, 희망 가운데 산다는 어구를 두 번 사용한다.
in novo Testamento a veteri의 연결은 420쪽 주석 1에서 새 경륜을 옛적부터 정하셨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qui 대신 quae, a 대신 ac라는 다른 독법도 함께 기록된다.
예레미야 인용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다는 구절과 이어지는 대조문 일부가 빠진 형태이다. 420쪽 주석 2는 반복된 Israel 때문에 빠진 어구로 e terra Aegypti: sed, Vivit Dominus, qui eduxit et adduxit semen domus Israel을 제시한다.
- 34.2 본문으로
이사야 30장 인용은 달빛, 햇빛, 낮빛의 일곱 배를 짧게 연결한다.
상처의 아픔을 아담의 불순종으로 닥친 죽음으로 풀이하고, 부활을 그 치유와 연결한다.
종들이 기다리는 때는 저녁 경점과 둘째 경점, 셋째 경점으로 나뉜다. 421쪽 주석 1은 저녁 경점 어구의 전승을 설명한다.
longe nos faciet Deus homines에는 nos가 있어 우리 사람들을 멀리 떠나게 하신다는 표현이 된다.
- 34.3 본문으로
교회들을 섬, 항구, 피난처로 묘사한다. altitudinem과 Bythum은 높은 곳과 깊은 구렁을 대비한다.
Bythum 뒤에는 id est profundum, 곧 깊은 곳이라는 풀이가 붙는다.
ventilabit는 흩으실 것이라는 미래형이다. 421쪽 주석 6은 qui ventilavit라는 다른 독법을 제안한다.
주님의 모든 제자를 레위인과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논의는 앞선 책을 가리킨다. 422쪽 주석 3의 인쇄본 참조 위치는 168쪽이다.
- 34.4 본문으로
도성의 재료는 붉은 보석, 사파이어, 벽옥, 수정, 고른 보석들로 열거된다.
docibiles Dei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인용은 백 살 된 이를 젊은이라고 부르고, 백 살에 죽는 죄인이 저주받는다고 말한다.
in te는 네 안에 있는 백성을 가리킨다. 422쪽 주석 4는 meae라는 교정안을 제시한다.
opera laborum eorum veterascent는 수고의 결과물이 오래 지속됨을 나타내며, 앞의 직접 집에 살고 수확을 먹는 약속과 이어진다.
- 35.1 본문으로
알레고리로 해석한다는 allegorisare는 예언된 땅과 예루살렘을 다른 차원의 실재로 풀어 읽는 것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논증은 부활한 의인들의 지상 왕국과 그 뒤의 새 예루살렘을 구별한다.
“돌이킬 수 없는”은 insanabilis에 해당한다. 인용된 이사야 13:9의 문구는 주님의 날을 치유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날로 묘사한다.
“예언자 예레미야”라는 소개 뒤의 긴 인용은 바룩 4:36-5:9에 해당한다. Harvey판 424쪽 난외와 각주 1도 바룩서를 가리킨다.
“의의 겹옷”은 amictum duplicem justitiae를 옮긴 말이다. “영원한 영광의 관”의 mitra는 머리에 두르는 관을 뜻한다.
예루살렘의 이름에는 pax justitiae et gloriae colenti Deo라는 라틴어가 쓰인다. colenti Deo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에게 향하는 표현이다. 424쪽 각주 2에 인용된 그리스어는 καὶ δόξα θεοσεβείας, 곧 하나님을 경외함의 영광이다.
“영광스럽게 실어”의 대본은 portatus cum gloria이다. portatus는 인쇄본의 단수형이며, 앞의 illos는 돌아오는 자녀들을 가리키는 복수형이다. 한국어에서는 자녀들을 데려오는 문맥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심”의 Dei recordationem은 하나님의 기억을 기뻐하는 표현이다. 본문의 숲과 향기로운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구절은 과거형 intexuerunt로 되어 있다.
- 35.2 본문으로
“땅을 회복하시고”의 revocata terra는 땅을 다시 불러 회복한다는 표현이다. 425쪽 각주 1에는 Grabe가 제안한 renovata, 곧 새로워진이라는 독법도 실려 있다.
“내 손에 네 성벽들을 그려 놓았다”는 이사야 49:16의 인용 형태이다. 이 인용에서는 성벽들이 손에 그려진 대상으로 직접 제시된다.
아이온, 플레로마, 프루니코스는 앞 권들에서 다룬 영지주의적 우주론의 용어들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설명하면서 이 용어들을 다시 거론한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인용은 “보좌에서” 나온 음성이라고 하며, populi라는 복수형으로 “그분의 백성들”이라고 한다. 425쪽 각주 2는 음성이 나오는 위치에 관한 다른 독법도 소개한다.
“썩지 않을 삶을 미리 익힌다”의 praemeditantur는 앞으로 누릴 불멸을 미리 훈련하고 익힌다는 뜻이다. 426쪽 각주 1은 그리스어 προμελετῶνται를 함께 제시한다.
426쪽 난외에는 사람의 실제 부활을 말하는 문장과 만물이 새로워진 뒤 하나님의 도성에 거한다는 문장에 시리아어 단편 참조가 붙어 있다. 판본 내 참조 위치는 각각 451쪽과 451-452쪽이다.
마지막 “이는 이치에도 맞는다”는 Et secundum rationem이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다음 장의 실제 인간과 그들의 실제 거처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 36.1 본문으로
plantatio는 심어서 뿌리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서는 부활한 사람들이 실제로 자리 잡을 터전을 뜻하므로 “뿌리내릴 자리”로 옮겼다.
substantia와 materia는 각각 “실체”와 “질료”, figura는 “형태”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창조 세계의 존속과 그 형태의 변화를 구별한다.
semper nova confabulans Deo는 하나님과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나눈다는 표현이다. 사람의 새로워짐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어진다.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에 붙은 tute는 “안전하게”이다. 428쪽 주석 3은 그리스어 사본들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고 설명한다.
어디에서나 보게 될 분을 라틴어는 Deus(하나님), 그리스어 병렬문은 Σωτήρ(구원자)라고 부른다. 한국어는 라틴어의 Deus를 따른다.
장로들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와 하늘, 낙원, 도성의 거처를 연결한다. triclinium은 식사하는 이들이 기대앉는 잔칫자리이다.
Verbum ejus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을 가리킨다. 각 사람의 몫을 나눈다는 말씀의 정확한 성경 위치는 428쪽 주석 5에서도 여러 후보와 함께 논의된다.
mixtionem calicis novam은 잔에 새롭게 섞는 것을 가리킨다. 포도주와 물을 섞은 잔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이며, 이 문장에는 섞는 재료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
eduxit illam의 illam은 여성 단수이다. 앞의 땅의 상속이나 피조물을 가리킬 수 있어 한국어에서는 “그것”으로 옮겼다. 동사 eduxit는 완료형이다.
in Filii sui regnum은 “그분 아들의 왕국을 향하여”라는 목적격 표현이다. 429쪽 주석 3은 왕국 안에서를 뜻하는 in regno도 이문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천사들이 보기를 바라는 대상을 가리키는 quem은 남성 단수로 인쇄되어 있다. 한국어의 “그분”은 앞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마지막 부분은 말씀이 피조물 안에 받아들여지고 피조물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호 관계를 반복한다. capiatur와 capiat를 모두 “받아들이다”로 연결했다.
본문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로 끝난다. 이어지는 다섯 책의 종결문은 별도의 전승 정보이다.
conformatum et concorporatum Filio는 아들을 닮게 빚어지고 아들과 한 몸이 됨을 함께 나타낸다. 두 분사는 모두 Filio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