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본문으로
1.1 “이 소품을 고쳐 쓰게 된 계기”는 1권 1장 서문에서 밝힌 사정, 곧 초판은 급히 쓴 것이었고 고쳐 쓴 2판은 완성되기 전에 한 형제가 베껴 가 잘못된 형태로 유포되어 3판을 새로 쓰게 된 사정을 가리킨다.
1.1 “폰투스 사람”(Ponticus)은 흑해 연안 폰투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1장의 문장들은 서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van der Vliet와 Kroymann은 테르툴리아누스가 3판에서 한 권을 두 권으로 나누면서 1권의 끝과 2권의 첫머리를 덧붙였기 때문으로 본다. Kroymann은 1.3의 oportuerat autem이 본래 2.1의 at nunc와 짝을 이루는 oportuerat quidem이었으리라고 보며, 덧붙은 부분을 빼면 “참 하나님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 시비를 당하고 있다”라는 원래의 연결이 드러난다.
1.3 superducitur는 자녀가 있는 집에 새 아내(계모)를 들이는 데 쓰이는 동사로, 마르키온이 창조주 위에 다른 신을 덧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nemo sit deus ille는 “그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로 옮겼다.
1.3 demerendum은 섬김과 공경으로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섬겨서 호의를 얻어야 할 분”으로 옮겼다.
1.4 대괄호 안의 uel quam timendum ob seueritatem은 van der Vliet가 삽입구로 보아 괄호 친 구절이다.
1.4-1.5 라틴어로는 한 의문문(“다른 신이 없었기에 사람이 맞닥뜨린 참 하나님을 향한 관심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이다. 1.5의 inciderat의 주어는 문맥상 사람이다.
- 2 본문으로
2.1 negotium patitur는 마르키온파에게서 시비를 당한다는 뜻이다(Kroymann 주).
2.2 로물루스는 로마의 전설적 건국자이다. 티베리우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본 티베리우스 황제 15년(눅 3:1; 『마르키온 반박』 1.19)을 가리킨다.
2.3 quem uideat non uidet(“자기가 보는 해를 보지 못한다”)는 사본의 읽기이며, Kroymann은 quem uidet non uideat를 가능성으로 든다. Kroymann은 사본의 aliqui proinde atque si caecus를 proinde atque si caecus aliqui로 고쳐 읽었다.
2.6 <in>은 R의 읽기를 따른 보충이며 “<을 향해서>”로 표시했다. 문두의 nam을 Kroymann은 손상된 것으로 보아 item을, 엥엘브레히트는 iam을 제안했으나, 번역은 전해진 nam을 “사실”로 옮겼다. “더 낮은 신”은 마르키온파가 열등하다고 보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은 고전 13:9, 12를 반영한다.
2.7 qua uoluit ipse?는 앞 문장의 ex parte를 받아 “그분 자신이 원한 부분만큼”으로 읽었다. 통상 판본은 ipse 뒤에 마침표를 찍는다.
2.8 magnitudinem은 Latinius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magnitudinis이다. 대괄호 안의 quae deus dicitur는 Kroymann이 1권의 구절에서 끼어든 삽입으로 보아 괄호 쳤다.
2.9 사본 MR은 ipse만, Latinius는 Esaias를 읽는다. Kroymann은 ipse <Esaias>로 보충하고, 2.11의 apostolus와 겹치는 apostolus를 괄호 쳤다. 2.9-2.10의 인용은 사 40:13-14의 칠십인역 계열 본문이다. 개역개정 사 40:13-14는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로 시작하여 표현이 다르며, 처음 두 질문은 롬 11: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와 같다.
2.11 롬 11:33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다. ininuestigabilia/ininuestigabiles는 R의 읽기이고 MF는 inuestigabilia/inuestigabiles이다. Kroymann이 보충한 부정 접두사 in-을 “<없으며>”, “<없는가>”로 표시했다. “심판자 하나님의 판단”, “깨달음과 지식의 길”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에 덧붙인 해설로, 길은 2.10의 “깨달음과 지식의 길”을 받는다. condicet(MF, “같은 말을 한다”)를 따라 “화답한다”로 옮겼다. R은 contradicet이다.
2.12 고전 2:11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를 반영한다.
2.13 고전 2:12(세상의 영),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3:19, 1:18을 엮은 문장이다. in sapientia는 Pamelius의 교정이며 M은 insipientia, R은 insipientiam이다.
2.14 고전 1:25 인용이다.
2.16 homo animalis는 고전 2:14의 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이다. 개역개정은 “육에 속한 사람”이지만 caro(육)와 구별하려고 “혼에 속한 사람”으로 옮겼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것까지 빼앗겼다”는 눅 8:18(마 13:12 참조), “자기 재료로 되돌려지고”는 창 3:19, 23을 반영한다. redhibere는 하자 있는 물건을 판 사람에게 되돌려 보내는 법률 용어이다. dumtaxat animali et haeretico는 세상의 영이 전해지는 범위를 혼에 속하고 이단적인 이들로 한정하는 말로 읽었다.
2.17 haeresis는 그리스어 hairesis(선택)에서 온 말이어서 per electionem(선택함으로써)과 말놀이를 이룬다. electionem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lectionem이다.
2.18 사 45:9; 롬 9:20의 토기장이 비유를 반영한다.
2.19 창 3:12-13. 아담은 여자가 준 열매를 먹었다고 말하여 꾐을 고백하고 꾀어낸 이를 드러냈다.
2.20 마지막의 a primordio는 Kroymann이 앞의 a primordio sui와 겹치는 중복으로 보아 괄호 쳤고, Junius는 다음 문장과 연결하려 했다. “어쩌면 그분을 심판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다”는 아담의 범죄가 창조주로 하여금 심판자로 행하게 했다는 뜻이다.
- 3 본문으로
3.1 “알려진 하나님”(deus notus)은 1권에서 다룬 마르키온의 “알려지지 않은 신”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3.2 “그들의 신에게서 그 선함이 합당하지 않음을 보여 준 바로 그 항목들”은 1권 22-27장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본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대목들을 가리킨다.
3.3 자신을 알게 하는 재료는 세계를 가리킨다. 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자기 피조물이 없어 창조주의 세계에 기대야 한다고 논박한 것과 대조된다.
3.4 id est-cognosceretur는 Kroymann이 3.5의 “그것이 드러날 대상이 아직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와 겹친다고 보아 삭제 가능성을 제시한 구절이다. 번역은 전해진 대로 옮겼다.
3.6 대괄호 안의 bonitatis는 Kroymann이 괄호 친 낱말이다. animatio는 Kroymann의 주대로 그리스어 prothymia(의욕, 열의)에 해당한다. “갑작스럽고 우연하며 자극받아 생긴” 선함은 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티베리우스 시대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비판한 논점을 받는다.
3.8 <ab ea>는 Kroymann이 사본의 ab ea 뒤에 한 번 더 보충한 것이어서 “<그 선함에게서>”로 표시했다.
3.8-3.9 창 1:14. 개역개정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때와 달과 해를 위하여”이다.
3.10 <est>는 Kroymann의 보충이며 R3은 et를 덧붙인다. suffundens는 얼굴을 붉히게 한다는 뜻이어서 “부끄럽게 한다”로 옮겼다. 마지막 조건문 si tamen malitia potuit a bonitate committi는 창조주가 선함으로 행한 일을 마르키온이 악함이라 부르는 것을 비꼬는 말로, 창조주의 일은 선함에서 나왔으므로 악함일 수 없다는 뜻이다. committi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committere이다.
- 4 본문으로
4.1 대괄호 안의 postmodum은 Kroymann이 다음 구의 postmodum과 겹친다고 보아 괄호 쳤으며, F에는 postmodum molem maximam이 없다. Kroymann은 maximam을 magnam(큰)의 뜻으로 보므로 이어지는 “더 큰 것”, “큰 것에서 ... 더 큰 거처로”와 짝을 이룬다. dei ipsius의 dei도 Kroymann은 삭제 가능성을 든다.
4.2 시 45:1(불가타 44:2)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이지만, 라틴어는 sermo(말씀)로 읽어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창조에 참여한 말씀을 가리키는 증언으로 쓴다. R1은 uerbum sermonem이다.
4.3-4.4 눅 6:43-44의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비유를 받는다. 마르키온은 이 비유로 악을 낳는 창조주와 선을 낳는 신을 구분했다(1권 2장). “나쁜 나무를 좋은 나무에”는 Kroymann의 교정 malam in bonam을 따른 것이고, 사본 MR은 in malam bonam(좋은 나무를 나쁜 나무에)이다. 4.4의 surculus(접순)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sarculus(괭이)이다.
4.5 창 1:3-4 인용이다. dispungens는 회계를 검산하여 승인한다는 뜻이어서 “검증했다”로 옮겼다.
4.6-4.7 benedicere(축복하다, 좋게 말하다)와 benefacere(좋게 만들다), maledicere(저주하다)와 malefacere(해롭게 행하다)의 말놀이이다. 4.6은 이를 살리려고 “좋게 말하기도, 곧 축복하기도”로 옮겼다. 하나님의 저주는 창 3:14-19에서 처음 나온다.
4.9-4.11 창 1:26(“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과 창 2:7(흙으로 사람을 지으심)을 받는다.
4.12 창 2:7(“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1:28, 2:19-20을 받는다. inflauit in animam은 사본 MR의 읽기이며, Pamelius는 animam, Junius는 in <eum> animam으로 읽었다.
4.13 창 2:8, 15. 낙원으로 옮겨진 일을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진 일의 예표로 읽는 삽입구이며, 엥엘브레히트가 괄호로 구분했다.
4.14 창 2:18 인용이다.
4.15 sexum은 여성을 가리킨다. 돕는 이로 지어진 여자(하와)의 성이 장차 마리아와 교회에서 유익을 낳으리라는 예표론이다. irrogauit(부과했다)는 엥엘브레히트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erogauit, Oehler는 rogauit, 호페는 eructauit를 제안했다. ex fastidio liberis는 하나님이 율법을 줄 만큼 여기지 않아 풀어 둔 상태를 말하며, Gelenius는 fastigio로 읽었다. 마지막 구절은 시 8:6; 고전 15:27의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를 반영한다.
4.16 창 2:17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로 단수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복수 ederitis이다. morte moriemini는 히브리어의 강조 어법을 옮긴 표현이어서 “반드시 죽으리라”로 옮겼다.
4.16-4.17 Kroymann은 cuius legis-obsequii가 2판에서 덧붙은 부분이라고 보는데, 4.18의 porro si가 4.15에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4.19 praemonitionibus(미리 준 경고)는 Gelenius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praemunitionibus(방비)이다.
- 5 본문으로
5.1 문장에 본동사가 없고 omnes 앞에서 본문이 손상되었다. 전해진 낱말을 그대로 옮기고 † 를 같은 자리에 두었다. Kroymann은 omnes 대신 hominis(“사람에 관한 질문들로”)를 추정으로 제시한다. o canes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canes이다. “사도가 밖으로 내쫓는 개들”은 계 22:15(“개들 ... 은 다 성 밖에 있으리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사도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이다.
5.2 obroditis는 뼈를 갉아먹는다는 뜻으로 앞의 “개들”을 이어받는다. “영혼의 유래로 보아 자기 실체이기도 한”(per animae censum)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숨에서 왔다는 창 2:7 해석에 근거한다. 5.2-5.5의 따옴표는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5.3 qui(세 차례)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qua, 엥엘브레히트는 quae이다. Kroymann은 si 뒤에 esset를 보충할 가능성도 든다.
5.6 species는 “속성들”로, praescientia는 “예지”로, potentia는 “능력”으로 옮겼다.
5.7 요 10:25, 38(“내가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을 가리킨다.
5.9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선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지었다고 주장한 이들로,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르모게네스 반박』에서 이 견해를 반박한다.
5.10 omnia(모든 것)와 omnipotens(전능하다)의 말놀이이다.
5.12 <et>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이어지는 et와 짝을 이루는 “한편으로”로 표시했다. 라틴어로는 한 의문문이다.
5.13 창 2:17의 경고를 가리킨다.
5.14-5.15 5.14의 조건절(“... 일어났다면”)의 귀결이 5.15의 “사람의 조건도 살펴보자”이다.
5.17 anima는 MR1의 읽기이고 R3은 animae이다. spondentis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Latinius는 respondentis이다. libertatem et potestatem은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은 탈격 libertate et potestate이다. Kroymann 본문을 따라 spondentis는 dei에, sui는 하나님에게 걸리는 것으로 옮겼다. Latinius의 respondentis와 사본의 탈격을 따르면 “자기 의지의 자유와 권능으로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형태로 읽힌다.
5.20 신 30:15, 19(“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를 가리킨다.
5.21 dispositum은 Kroymann의 주대로 5.20의 inuenias(그대는 발견할 것이다)에 걸린다. a uocante(부르는)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auocante(불러내는)이다. et hortante는 엥엘브레히트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exhortante이다.
- 6 본문으로
6.3의 “마르키온의 신에게서처럼 비이성적으로 선한 것”은 제1권(특히 I.23)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이성 없는 선함이라고 논박한 대목을 가리킨다.
6.7의 “하나님의 숨”(adflatus dei)은 창 2:7을 가리킨다. liberi et suae potestatis는 dei에 걸리므로 “자유롭고 자기 권능을 지닌 하나님”으로 옮겼다.
6.11의 “본성으로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은 막 10:18; 눅 18:19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반영한다.
6.11의 in eiusmodi institutionem은 사본(MR)의 읽기이며, Kroymann은 이를 institutionem in eiusmodi (statum), 곧 인간을 그러한 상태로 지은 일로 풀이했고 Engelbrecht는 id est eiusmodi institutionem으로 고쳤다.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옮겼다.
institutio는 이 장에서 인간을 특정한 상태로 지어 세운 일을 뜻하므로 “지음”으로, institutor는 “지은 이”로, natura와 대비되는 경우에는 “지음으로/본성으로”로 옮겼다.
6.14의 emancipatum, libripens는 로마법의 해방·양도 절차(mancipatio)에서 저울을 드는 증인(libripens)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선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법적으로 양도되어 인간의 고유한 소유(proprietas)가 되고,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그 양도를 성립시키는 증인 역할을 한다는 비유이다. 사본 MR1은 libripense mancipati로 읽는다.
6.14-6.15의 줄표 구간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6.15의 non fauente institutioni non seruiente는 Rigaltius의 수정(institutioni, 사본 institutionis)을 따른 본문이며, Ursinus는 첫 non의 삭제를 제안했다. 본문대로 “지음에 영합하지도 않고 예속되지도 않은 채”로 옮겼다.
6.16의 careret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caperet로 읽는다.
6.20의 <로부터>는 Kroymann이 보충한 전치사 e(“~로부터”)의 번역이다.
- 7 본문으로
7.2-7.3의 grauitas는 한번 정한 것을 가볍게 뒤집지 않는 무게와 일관성을 뜻하므로 “진중함”으로, fides는 자기가 세운 것에 대한 신실함으로 옮겼다.
7.3의 bonis et rationalibus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boni sed로 읽는다.
7.8은 창 2:16-17(나무에 대한 금령)과 창 3:1-6(뱀과 여자의 대화)을 가리킨다.
7.9-7.11의 인용은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정하여 마르키온의 입에 넣은 말이다. 7.11의 <에서>는 Gelenius가 보충한 전치사 in을 옮긴 것이다.
Kroymann은 7.12-7.15(nonne tunc ... impleri)를 이전 판의 잔재로 보았다. 7.16의 peroraturus in creatorem이 7.9의 마르키온의 외침 바로 뒤에 이어질 때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7.15의 dispunxisset는 Rigaltius의 수정(사본 depinxisset, depunxisset)으로, 장부를 결산하다는 회계 용어이므로 “결산하다”로 옮겼다. 같은 절의 non <deus.> au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non ut로 읽는다.
7.16의 qua exigis는 Kroymann의 수정(사본 quas)이다. [인내와]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et patientiam이며, <에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이다.
- 8 본문으로
8.1의 첫 낱말 usque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neque로 읽는다. Kroymann은 이 문장을 “하나님은 인간을 살 수 있는 데까지만 존재하게 했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8.2의 “살아 있는 영혼”(anima uiua)은 창 2:7을 가리키며, 개역개정은 “생령이 되니라”로 옮긴다.
8.3은 겔 18:23; 33:11(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함)과 벧후 3:9를 반영한다. <도>는 Kroymann이 보충한 et이다.
8.5의 인용은 시 104:4(불가타 103:4)이며 히 1:7에도 인용된다. 개역개정 시 104:4는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고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며”로 옮기나, 테르툴리아누스는 spiritus를 천사들이 이루어진 물질적 영으로 읽어 논증에 사용하므로 라틴 본문대로 “영”으로 옮겼다.
8.5의 “만물을 복종시키다”는 창 1:26, 28과 시 8:6의 인간 통치권을 가리킨다.
8.7의 eum은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cum으로 읽는다. Kroymann은 끝 문장의 어순을 sed potius defectione earum fecisset infirmum으로 바꾸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 9 본문으로
9.1의 quoquo tamen modo를 Engelbrecht는 aliquo tamen modo(“어떤 식으로든”)로 풀었고, Kroymann은 그 앞에 탈문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번역은 전해진 본문을 따랐다.
9.2-9.3의 “헬라어 성경”은 창 2:7 칠십인역의 πνοὴ ζωῆς(생명의 숨)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πνοή를 adflatus(숨)로, πνεῦμα를 spiritus(영)로 구별하며, 일부 라틴어 번역이 πνοή를 spiritus로 옮겨 하나님의 영 자체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비판한다.
9.5의 어순은 Kroymann이 고친 것이다(사본: etsi de spiritu accidit ut aurulam eius). aurula는 aura(미풍)의 지소형이므로 “작은 미풍”으로 옮겼다.
9.7의 [미풍.]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aura이다. capit는 테르툴리아누스에서 “~할 수 있다, ~가 허용된다”(licet)의 뜻으로 쓰인다.
9.8의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이다”는 요 4:24를 반영한다. 9.8-9.13의 ueritas는 형상(imago)과 대비되는 원본, 곧 실물을 뜻하므로 “실재”로 옮겼다.
9.10은 Kroymann의 재구성이다. 사본 MR은 ideo et adflatus id est imago로 읽으며, Kroymann이 ideo et imago, id est adflatus, <id est homo,>로 고쳤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가리키며, Ciacconius는 comparare 대신 compariare를 제안했다.
9.11의 [영혼이]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anima이다.
9.13의 felicitas는 사본의 읽기이며 Pamelius는 facultatem(능력)으로 고쳤다. 사본대로 “복된 상태”로 옮겼다.
9.17은 창 2:7(“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과 고전 15:45(“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를 대비한다.
9.19의 토기장이와 그릇 비유는 사 29:16; 45:9; 롬 9:20-21을 떠올리게 한다.
9.21의 “앞에서 부정한 연약함”은 8.4에서 인간이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한 진술을 가리킨다.
9.22의 “천사들이 섬기고 있다”는 히 1:14, “천사들까지 심판할 것이다”는 고전 6:3을 가리킨다.
9.24의 “죽으리라는 위협”은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를 가리킨다.
9.28의 habet은 레오폴트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habent로 읽는다.
- 10 본문으로
10.1의 삽입구는 시 104:4를 인용한다. 칠십인역(103:4)과 라틴어 역본은 “천사들을 영으로 삼으시는 이”로 읽고, 개역개정은 히브리어를 따라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며”로 옮긴다. inquit는 Kroymann의 보충이므로 <라고 그는 말한다>로 표시했다.
10.1의 [non]은 사본 M과 R1에 있고 R3에는 없으며,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non을 빼면 “옮겨 적는다 해도”가 되어 이어지는 논증과 맞는다. 번역에서는 부정 부분을 [지 않]으로 표시했다. Junius는 etsi nunc로 읽었다.
10.2의 “고발자”는 delator이다. diabolus는 그리스어 diabolos(중상하는 자, 고발자)에서 온 말이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마귀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으로 고발한 행위에서 생겼고 따라서 그가 스스로 마귀가 되었다고 논증한다.
10.3의 세 가지 거짓 고발은 창 3:1, 4, 5의 뱀의 말을 따른다.
10.6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겔 28:3, 12를 가리킨다. Kroymann은 denique를 nam의 뜻으로 보며, “실로”로 옮겼다.
10.8-10.16은 겔 28:11-16을 칠십인역에 가까운 라틴어 본문으로 인용하므로 개역개정과 문구가 다른 곳은 라틴어대로 옮겼다. princeps Sor는 개역개정을 따라 “두로 왕”으로 옮기되, 10.16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인간 군주와 천사를 대비하는 대목에서는 “군주”로 옮겼다. 줄표 사이의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이다.
10.10의 resignaculum similitudinis는 칠십인역 겔 28:12의 aposphragisma homoiōseōs(모양의 인장)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resignare(봉인을 뜯다)의 뜻을 살려 마귀를 창 1:26의 형상과 모양의 온전함을 깨뜨린 자로 풀이하므로, 해설 부분을 “봉인을 뜯듯 깨뜨린 자”로 옮겼다.
10.12의 “생물의 형태를 두 번째로 빚을 때”(in secunda animalium figurae formatione)는 창 2:19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짐승과 새를 빚는 장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천사의 창조를 낙원과 그 시점에 연결한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10.13-10.14의 열두 보석 목록은 칠십인역 겔 28:13을 따른다. 히브리어 본문과 개역개정에는 아홉 보석이 나온다. lyncurium은 Rigaltius의 교정이며 사본 M은 lycirium, R은 ligurium으로 읽는다.
10.14와 10.16의 cum Cherub imposui te, cum Cherub impositus는 Oehler의 교정이고, 사본 M과 R은 cherubin posui, cherubin positus로 읽는다. Engelbrecht는 테르툴리아누스가 Cherubin을 단수로 썼다고 보아 사본 독법을 지지한다. 칠십인역 겔 28:14은 “그룹과 함께 내가 너를 두었다”로 읽으며, 이에 따라 옮겼다.
10.15와 10.18의 laesurae는 칠십인역 겔 28:15의 adikēmata(불의한 행위들)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laedere(해치다)와 연결하여 마귀가 인간에게 입힌 해로 풀이하므로(10.18 laesit hominem) “상해들”로 옮겼다.
10.16의 promae(창고들)는 칠십인역 겔 28:16의 tameia에 해당한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졌다는 말은 눅 10:18이다.
10.18의 electum은 사본 독법이며 Kroymann은 elicitum(꾀어낸)의 뜻으로 본다. Ciacconius는 eiectum(내쫓긴)으로 고쳤다.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꾀어낸”으로 옮겼다.
10.19의 delictorum censum은 Oehler의 교정이며 사본 M과 R은 scilicet et censuum으로 읽는다. census를 재산으로 보아 앞의 negotiatio(장사)와 이어지도록 “범죄들의 재산을 불렸다”로 옮겼다.
10.20의 praedamnando는 사본 M과 R의 독법이고 F는 non praedamnando로 읽는다. 하나님이 마귀를 미리 정죄한 일은 창 3:14-15의 뱀에 대한 저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0.23의 sustinens는 Kroymann의 설명대로 expectans(기다리다)의 뜻으로 옮겼다. de uita는 지상의 생에서 떠나 낙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이 생에서”로 옮겼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허락은 창 3:22-24와 계 2:7을 배경으로 한다.
- 11 본문으로
11.2-11.7은 창 3:16-19, 21의 벌을 범죄 이전의 복과 대조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인간에게 한 복인 창 1:28이며(Kroymann은 1:22를 표시한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자로 정한 것은 창 2:18, 모든 나무에서 얻는 먹을거리는 창 1:29; 2:16이다.
11.2의 tantum(“만을”)은 여자가 범죄 전에 들은 말이 출산의 고통이 아닌 번성의 복뿐이었다는 뜻으로 보아 “그 말만을 들었던”으로 옮겼다.
11.4의 arborum fructuosa는 Engelbrecht의 설명대로 arbores fructuosae(열매 맺는 나무들)로 옮겼다.
11.6의 exinde-terra 부분은 사본 M에 빠져 있다.
11.8의 seueritas posterior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seuerior posteritas로 읽는다.
11.12에서 “우리는 보여 주었다”는 제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계율이 헛되다고 논증한 대목(I.26-27)을 가리킨다. 첫 aut는 Kroymann이 사본의 ut를 고친 것이다.
11.13은 Engelbrecht의 풀이대로 심판하지 않는 신을 인정한다고 해서 심판하는 하나님이 제거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옮겼다.
11.14의 † 자리는 사본 M의 aut da eam이다. R1은 aut det eam, R3은 aut et eam, Engelbrecht는 aut eandem으로 읽는다. Kroymann은 “악의 종류에 셈해 넣는 것”이 앞의 “고발하다”와 내용상 다르지 않은데 aut로 대등하게 이어지는 점을 문제로 보고, aut를 빼고 aude eam(감히 그것을 셈해 넣어 보라)으로 고칠 가능성을 제시한다. 번역은 전해진 da를 명령으로 보아 “셈해 넣어 보라”로 옮기고 †를 그 앞에 두었다.
- 12 본문으로
12.1의 non potest capere는 Kroymann이 Latinius를 따른 독법이며, 사본 M과 R은 non potest carere, Oehler는 non potes cauere로 읽는다. 사본 M은 earum 대신 eorum으로 쓰고 여백에 earum을 적었다.
12.3의 [quia]는 Kroymann이 삭제한 말로 [왜냐하면]으로 표시했다. dum은 사본 독법이고 Gelenius는 tum으로 읽었다.
12.4는 창조의 분리들을 열거한다. 빛과 어둠(창 1:4), 낮과 밤(1:5), 하늘과 땅, 위의 물과 아래의 물(1:6-8), 바다와 뭍(1:9-10), 큰 광명과 작은 광명(1:16), 남자와 여자(1:27), 지식의 나무와 생명나무(2:9), 세상과 낙원(2:8), 물의 생물과 땅의 생물(1:20-25)이다. [그리고]로 옮긴 et는 Gelenius를 따라 Kroymann이 의심한 말이고(사본 M과 R은 feminam et), [죽음의]로 옮긴 mortis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다.
12.6의 elementorum은 사본에서 habitus 뒤에 있으나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ne는 M의 독법이고 R은 nec로 읽는다.
- 13 본문으로
13.1의 aduersationem은 Engelbrecht의 독법이며(제1권의 같은 표현 참조), 사본 M과 R은 aduersionem, 스칼리게르는 auersionem으로 읽는다. seposita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se possit a로 쓴다.
13.2의 “그대들의 말대로 잔혹하게 구는 것”은 11.1에서 마르키온파가 창조주를 saeuus(잔혹하다)라고 부른 것을 받는다.
13.7의 넓고 붐비는 악의 길은 마 7:13이다. 사본 F에는 quis-amitteret가 빠져 있다.
13.10의 prospicit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non prospicit로 읽는다. Engelbrecht는 oportet를 oporteret로 고칠 것을 제안했다.
13.11의 malis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은 males, R은 malles, Oehler는 malle로 읽는다. malis를 여격 복수로 보아 “악인들에게 유리할 하나님인가”로 옮겼다. malles를 따르면 “그대는 어떤 하나님을 더 원하겠는가”가 되고, 통용본은 expediret 뒤에서 문장을 끊는다.
13.16은 omnipotens(전능하다)를 iuuandi et laedendi potens(도울 능력도 해칠 능력도 있다)로 풀어 potens의 말놀이를 살린다.
13.18은 innocentia(무죄함)와 nocentia(죄 있음)를 맞세운다. spectem은 R3의 독법이고 M, G, R1은 speciem으로 읽는다. remuneret는 M의 독법이며 R과 통용본은 remuneretur로 읽는다.
13.19의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호 6:6(잠 21:3 참조),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한다”는 겔 33:11을 반영한다. 개역개정은 겔 33:11에서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로 옮긴다. 둘째 dominum은 R의 독법이고 M은 deum으로 읽는다.
13.20의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 6:5(마 22:37; 막 12:30; 눅 10:27),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레 19:14, 32이다. 개역개정은 레 19:14, 32를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로 옮긴다.
- 14 본문으로
14.1은 신 32:39, 삼상 2:6-7, 사 45:7을 엮었다. 전자 원문에는 humilians sed et mans로 되어 있으나, Kroymann 1906의 353쪽 마지막 행 끝에 subli-가 있고 354쪽 첫 행이 mans로 이어진다. 인쇄면대로 sublimans(높이다)로 교정해 “높이기도 하고”로 옮겼다. 삼상 2:7의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와 같은 대구다.
14.1의 et hic는 사본 독법이며 Engelbrecht는 “이 점에서도”로 풀이한다. Kroymann은 etiam et가 달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Rigaltius의 et hinc를 고려한다.
14.1-14.5의 condens mala, conditor malorum은 사 45:7 “나는 악을 짓는 자다”(ego sum qui condo mala)를 따른다. 개역개정은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로 옮긴다. mala가 도덕적 악과 재앙(형벌)을 모두 가리키고 14.3-14.7의 논증이 이 이중 의미에 달려 있으므로 일관되게 “악”으로 옮겼다.
14.4의 delicti ... supplicii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delictis ... suppliciis로 읽는다. iudicii는 미뉴판(van der Vliet)의 독법이며 사본 M과 R은 iudicia로 읽는다.
14.8의 noluit는 M과 R1의 독법이고 R3과 통용본은 uoluit로 읽는다. 사본대로 “없이 지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을 돌려받았다”로 옮겼다. 인간이 금지된 열매로 얻으려던 것의 대가로 죽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비로, 그 뒤에는 불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창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창 19:24)을 가리킨다.
14.9의 “손님으로 머문 백성”(hospes populus)은 애굽에 거류한 이스라엘이다. 열 겹의 징계는 출 7-12장의 열 재앙,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함은 출 4:21; 10:20, 사절들을 쫓아냄은 출 5:1-4, 노역을 더함은 출 5:5-14이다. sed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et로 읽으며, Engelbrecht는 indurat 대신 indurarat를 선호한다.
14.10의 따오기와 악어는 고대 애굽에서 신성한 동물로 숭배되었다.
14.11의 impendit et ipsum populum은 하나님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벌에 내어 준 일(민 14:29-35; 고전 10:5 참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내어 주었다”로 옮겼다. 예언자를 조롱한 아이들에게 곰을 보낸 일은 왕하 2:23-24이다.
- 15 본문으로
15.2의 ceteras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 ]로 묶었으므로 ‘[다른]’으로 옮기고 괄호를 유지했다. adserere causas는 피고인의 사건을 변호한다는 법정 용어로 보아 ‘사건들도 변호해 보고’로 옮겼다.
15.3의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에게서 받아 냈다’는 출 20:5; 34:7; 신 5:9의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갚되’를 가리킨다.
15.4의 [sicut gratia, ita et offensa]는 Kroymann이 문장 연결을 흐트러뜨리는 구절로 보고 [ ]로 묶었다. 그는 이것을 다른 판본에서 들어온 수정, 곧 ‘ut per totum genus sicut gratia ita et offensa decurreret’로 읽으라는 수정으로 설명한다. 번역에서는 ‘[은혜와 마찬가지로 노여움도]’로 옮겨 괄호를 유지했다.
15.5의 신 포도 격언은 렘 31:29-30(Kroymann은 칠십인역 장절에 따라 Hier. 38,29로 표기)과 겔 18:2-4, 20에서 온다. 개역개정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로 옮긴다.
15.5의 post duritiam populi duritia legis edomita는 duritia legis edomita를 탈격 독립구로 읽어 ‘백성의 완고함이 있은 뒤에 율법의 엄함이 길들여져’로 옮겼다. 일부 번역은 ‘백성의 완고함이 율법의 엄함으로 길들여진 뒤에’로 옮기는데, 이는 edomitam을 전제하는 읽기다.
15.6의 ‘진리의 복음’(euangelium ueritatis)은 마르키온이 손질한 누가복음과 대비되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온전한 복음서를 가리킨다. 15.7의 인용은 마 27:25(개역개정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이며, 마태복음은 마르키온의 정경에 없다.
15.7의 homini는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omnis를 전한다. quod iam audierat의 주어는 섭리(섭리가 백성의 외침을 이미 미리 들었다)로도, 사람(사람이 율법에서 이미 그 판결을 들었다)으로도 읽을 수 있어, 번역에서는 주어를 드러내지 않았다.
Kroymann의 15장 난외 증언 가운데 출 32:35와 왕하 2:23-24(Kroymann의 IIII Reg.)는 앞 장 끝부분에 해당한다.
- 16 본문으로
16.3 뒤에 사본 MR에는 ‘uindicanda erat procacitas aetatis uerecundiam debentis’(수치를 알아야 할 나이의 방자함은 벌받아야 했다)라는 문장이 있다. van der Vliet은 이것을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 이야기(왕하 2:23-24)를 다루는 14장 끝으로 옮겼고 Kroymann도 이를 따랐다. 이 문장은 14장 끝의 번역에 있다. 16.3의 seueritatis는 Jun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seueritati다.
16.5의 ‘베고 지지고’(secent et inurant)는 R의 교정자(R3)의 읽기를 따른 것이다. M과 F는 secent tensuram, R1은 secent tonsuram을 전한다.
16.7과 16.19의 motus et sensus는 ‘움직임과 감정’으로 통일했다. motus는 마음의 격동, sensus는 정서와 감정을 가리킨다.
16.8-16.9는 신들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신관을 겨냥한다. ‘인간 모습의 비천함을 취했다’는 성육신을 말한다.
16.11의 ‘죽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aeua aeuor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aeuo다.
16.13-16.14에서 nam부터 sociantur까지를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했으므로 앞뒤에 ‘-’를 두었다. 주문장은 16.14의 quanta erit와 16.15의 tanta erit의 상관 구문으로 이어진다.
16.18의 ‘숨을 받아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고’는 창 2:7(개역개정 ‘생령이 되니라’)을 가리킨다. 같은 절의 deo(하나님에게 입힌다)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eum이다.
16.21의 ‘분노와 격분’(irae dico et exasperationis)은 R3의 읽기다. M과 R1은 praedico를 전한다. feliciter와 felix는 손상 없이 복된 상태를 가리키므로 ‘복되게’, ‘복되다’로 옮겼다.
16.22에는 Kroymann이 결락을 표시했다. 그는 conturbabitur 또는 Engelbrecht의 exturbabitur(혼란에 빠지다, 내쫓기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므로 ‘분노하겠지만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번역에서는 ‘**’로 표시했다.
16.24의 bilem(울분)은 M과 R1의 읽기다. R3와 Gelenius는 exacerbabilem을 전한다.
16.25의 † non respicientes는 사본 MR의 읽기를 그대로 옮겨 ‘† 돌아보지 않는 자들’로 했다. Pamelius는 non resipiscentes(뉘우치지 않는 자들)로 고쳤다. Kroymann은 non을 지우고 respicere를 눅 9:62(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에 따라 이해하자고 제안하는데, 그렇게 읽으면 ‘뒤를 돌아보는 자들 때문에 인내를’이 된다. praestantia는 그리스어 προστασία(보호, 돌봄)에 대응하는 말로 보아 ‘보살핌’으로 옮겼다.
- 17 본문으로
17.1의 <ut>는 Kroymann의 보충으로 ‘<으로서>’로 옮겼다. pluente, faciente는 사본의 pluentem, facientem을 Kroymann이 deo와 일치하도록 고친 것이다. 비와 해에 관한 말씀은 마 5:45다. catholicae는 모든 이에게 미친다는 뜻에서 ‘보편적’으로 옮겼다.
17.2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없다는 사실을 마르키온의 삭제로 다룬다. 마르키온이 사용한 누가복음의 평행 본문(눅 6:35)에는 비와 해의 말씀이 없다. Kroymann은 inscriptus 앞에 <eo>(그 증언으로)를 보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17.3의 인유: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겔 18:23; 33:11), 제사보다 자비(호 6:6; 잠 21:3), 니느웨(욘 3:10), 히스기야의 눈물과 연장된 생명(왕하 20:3-6), 회복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단 4:33-37). ‘마르키온에 대한 판결’(in iudicium Marcionis)은 마르키온에게 불리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17.4의 인유: 사울의 맹세로 죽게 되었으나 백성이 구해 낸 요나단(삼상 14:39, 45), 우리아의 일로 죄를 고백한 다윗(삼하 12:13). populo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populi다.
17.5의 optimus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에게 붙이는 칭호인데, 여기서는 창조주에게 적용하여 ‘지극히 선한 분’으로 옮겼다. 19.13의 dei optimi도 같다.
17.6의 quod(그대가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되는 그것)는 Ursin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quem이다. 그것은 마르키온이 다른 신에게 돌리는 선함을 가리킨다.
17.8의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솔론은 아테네의 입법자다.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 입법자들보다 오래되었다는 논증은 『호교론』 19장 등에서도 쓰인다.
17.9는 출 20:12-17과 레 19:18을 인용한다. 17.10의 innocentiae et pudicitiae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innocentiae pudicitiae et로 et의 위치가 다르다. Kroymann에 따르면 innocentia(무죄함)는 ‘살인하지 말라’에 대응한다.
17.10의 인유: 일곱째 해의 종 해방(출 21:2; 신 15:12), 안식년의 밭(레 25:4; 출 23:10-11),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음(신 25:4). <cum>은 Kroymann의 보충으로 ‘<또>’로 옮겼다. humanitas는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을 뜻하여 ‘인정’으로 옮겼다.
- 18 본문으로
18.1의 concu<tere concu>piit는 Kroymann의 보충이고 사본은 concupiit(탐냈다)만 전한다. 보충된 부분을 ‘<흔들어 놓기를>’로 옮겼다. Kroymann의 주에 따라 bona는 서술어로 보아 ‘더 좋은 것으로 변호하겠는가’로 옮겼다.
18.2의 동해 보복 규정은 출 21:24-25를 가리킨다. liuor는 맞아서 생긴 멍으로, 개역개정은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라고 옮긴다.
18.3-18.4의 defensa는 원수 갚음, 신원을 뜻한다. 18.4의 인용은 신 32:35(롬 12:19; 히 10:30에 인용, 개역개정 롬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이다. ‘예언자’는 신명기의 노래를 전한 모세를 가리킨다.
18.4의 repastinaretur는 땅을 다시 파 뒤집는다는 농사 용어로, ‘뿌리 뽑고’로 옮겼다.
18.5의 a se tuta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G와 R3는 astuta, R은 aestuata, Oehler는 extincta를 제안했다. a se tuta를 따라 ‘스스로에게서 안전하게’로 옮겼는데, 악행이 실제 보복을 겪지 않고도 그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같은 절의 eiusde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eundem이다.
18.6의 ‘한때 복을 받았던 짐승들’은 창 1:22; 9:3을, 부정한 짐승의 규정은 레 11장과 신 14장을 가리킨다. 18.7의 ‘천사들의 떡’은 시 78:25(칠십인역과 라틴어역 77:25 ‘panem angelorum’, 개역개정 ‘힘센 자의 떡’)이고, 오이와 참외는 민 11:5다.
18.9의 삽입구는 출 32:6(개역개정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이며 Engelbrecht가 삽입구로 표시했다. 같은 절의 est(제거되었다)는 Kroymann의 수정으로 사본은 et, van der Vliet은 ut를 제안했다.
18.11은 반어다. 마르키온파는 혼인과 특정 음식을 금하는 금욕을 실천했으므로, 창조주가 음식을 금한 일을 비난하는 그들의 태도를 꼬집는다.
18.13은 사 1:11-12를 인용한다. 18.14의 faciendo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faciendis다. religioni suae는 그분에 대한 예배, 경신 행위를 뜻하여 ‘자기 예배’로 옮겼다.
- 19 본문으로
19.1의 ‘작은 그릇들을 돌보는 일’은 부정한 것이 닿은 그릇에 관한 규정(레 11:32-35; 민 19:15)을 가리킨다. nec는 Kroymann이 ‘ne quidem’(한순간도)의 뜻으로 고친 것이고 사본은 ne다. ullo momento는 Rigaltius의 수정이다.
19.2는 시 1:2를 인용한다. uoluntas는 개역개정에서 ‘즐거움’으로 옮겨지나 라틴어 그대로 ‘뜻’으로 옮겼다.
19.3의 benignitas는 bonitas(선함)와 구별하여 ‘자애’로 옮겼다. ‘예표로 짜인’(figuratae)은 율법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미리 보여 주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을 가리킨다.
19.6의 인유: 사 1:16-18(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며 공의를 구하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신 10:18, 사 58:6-7(흉악의 결박을 풀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시 34:13-14, 시 4:4(칠십인역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 엡 4:26 참조), 시 1:1. diligere quaestiones는 사 1:18의 ‘변론’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여 ‘변론을 사랑하고’로 옮겼고, Harris는 dirigere를 제안했다. integram은 R의 읽기이고 M은 in integram, Engelbrecht는 in integrum을 제안했다. pestilentium은 라틴어역 시 1:1의 표현으로 ‘해독을 끼치는 자들’로 옮겼으며 개역개정은 ‘오만한 자들’이다.
19.7의 인용은 시 133:1(라틴어역 132:1)과 시 118:8-9(라틴어역 117:8-9)이다. Pamelius는 iocundum 앞에 <quam>을 보충했다. bonum ... quam은 히브리어식 비교 구문으로 ‘...보다 좋다’로 옮겼다.
19.8은 시 1:3, 19.9는 시 24:4-5(라틴어역 23:4-5)를 인용한다. 19.9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자기 영혼을 헛되이 받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받지 않고’(출 20:7 참조)로 인용한다. iurabi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iurauit다. 19.9의 첫 문장은 동사 없는 표제구로 되어 있어 그대로 옮겼다.
19.10은 시 33:18-19(라틴어역 32:18-19)를 인용하고, ‘곧 영원한 죽음에서’, ‘곧 영원한 생명의 굶주림 속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풀이이므로 인용부호 밖에 두었다. deliberandas는 liberandas(건지다)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19.11은 시 34:19, 19.12는 시 116:15와 시 34:20, 19.13의 인용은 시 34:22다(라틴어역에서는 각각 33:20, 115:15, 33:21, 33:23).
- 20 본문으로
20.1 sepia는 위협을 받으면 먹물을 뿜어 몸을 감추는 갑오징어다. 레 11:10과 신 14:10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속 생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금지를 먹물로 추적을 따돌리는 마르키온파의 표상으로 읽는다. <in>은 Engelbrecht의 보충이다(사본 figura).
20.2 intentionem uniuscuiusque iam proximam dispargunt를 Kroymann은 ‘이미 아주 가까이 다가온 각 추적자의 노력을 무위로 만든다’로 풀이하며,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20.3 금은 그릇을 요구하라는 명령은 출 3:21-22; 11:2; 12:35-36에 나온다.
20.5 벽돌과 성읍 건축의 노역은 출 1:11-14; 5:6-19를 가리킨다. lateris는 M의 독법(= lateribus)이고, R과 이전 판본은 laterinis로 읽는다. instrumentum은 법정 증거 문서를 뜻하는 법률 용어로, 여기서는 성경을 가리킨다.
20.6, 20.8 compensatio는 서로의 채권을 맞비기는 로마법의 상계(相計)를 뜻한다.
20.7 aiunt가 전하는 소송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서 애굽 사람들이 금은 그릇을 돌려 달라고 하자 게비하 벤 페시사가 60만 명의 430년 노역 삯으로 맞섰다는 유대 전승(바벨론 탈무드 산헤드린 91a)과 같은 계통이다.
20.8 has iniustitia ... Aegyptiis는 Kroymann의 추정이다(M hasi iustitia ... Aegyptii, R has iustitia; Rigaltius uasis istis).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그들(유대인)이 이 노역에 대한 권리를 부당하게도 애굽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포기했다’로 옮겼다. <si>는 R3의 보충으로, ‘<하더라도>’로 옮겼다. 60만 명은 출 12:37의 장정 수다.
20.10 iniuriarum iudicium은 신체와 명예에 대한 모욕을 다루는 로마법의 모욕 소송(actio iniuriarum)이다. 매를 맞은 기록원들(scribae)은 출 5:14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다.
20.11 sed totis ubique와 pronuntiassent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ubique, sed totis; pronuntiasset). 판결의 주어는 원문에 명시되지 않았다.
20.12 gratos fecit는 하나님이 백성으로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했다는 출 3:21; 11:3; 12:36을 반영한다. expungere는 장부의 항목을 지워 셈을 끝낸다는 회계 용어다.
20.13 minus는 Kroymann에 따라 parum(너무 적게)의 뜻으로 옮겼다. 돌려주어야 할 아들들은 출 1:16, 22에서 죽임을 당한 히브리 남자아이들이다.
- 21 본문으로
21.1-2 여리고 성 주위를 궤를 메고 돈 일은 수 6:3-4, 14-15에 나온다. 성경 본문에서는 엿새 동안 하루 한 번, 일곱째 날에 일곱 번 돌아 모두 이레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여드레’(per dies octo)라고 쓴다. prohibenti ... iubenti는 레오폴트의 수정이다(MR prohibentis ... iubentis).
21.3-4 출 20:9-10. 개역개정은 ‘일곱째 날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네 모든 일’(opera tua)의 소유격을 근거로 안식일 금지가 인간의 일에 한정된다고 논증한다.
21.7 ipsum은 Kroymann의 수정이다(MR ipse). nisi는 M의 독법이고 R은 nimis로 읽는다. argumenta는 창조주가 행한 사건이나 일을 가리킨다.
21.10 민 15:32-36. ligna tum legerat는 Kroymann의 추정이다(M lignatum egerat, R lignatum ierat). 이전 판본의 lignatum ierat를 따르면 ‘나무하러 나갔던 사람’이 된다.
21.11 sed dei opus는 M의 어순이다(R과 이전 판본 opus, sed dei).
- 22 본문으로
22.1-2 출 20:4-5. similitudo는 창 1:26의 ‘모양’과 같은 말이므로 ‘모양’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출 20:4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로 옮긴다.
22.2 [idolatriae scilicet substantiam cohibentes]는 Kroymann이 삽입구로 보고 괄호에 넣었다. 우상숭배를 억제하는 것은 ‘이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 그의 근거다. 번역은 괄호 안의 말을 앞의 ‘이유들’에 연결하여 옮겼다.
22.3 놋뱀은 민 21:8-9에 나온다. 22.4에서 말하지 않겠다는 ‘치료의 예표’는 요 3:14에서 놋뱀을 인자의 들림과 연결하는 해석을 가리킨다.
22.4 금 그룹은 출 25:18-22에서 속죄소 양 끝에 놓이지만, 스랍은 사 6:2에 나오며 궤의 장식에는 없다. Kroymann은 Cherubin et Seraphin aurea를 중성 복수로 보고, in arcae figuratum exemplum 뒤에 erant를 보충하여 ‘궤의 예표적 본보기로 있었다’(εἰς τυπικὸν παράδειγμα)로 풀이한다.
22.5 suggestus는 그룹이 붙어 있는 속죄소의 판(출 25:17-21)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받침’으로 옮겼다.
22.6 희생 제사가 백성을 우상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리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설명은 이 권 18장에 있다. auocante는 Pamelius의 수정이다(M auocantis, R auocanti).
22.7 사 1:11. 개역개정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로 옮긴다.
22.8 사 1:11 후반과 시 50: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을 함께 반영한 인용이다.
22.9 사 40:28. 칠십인역은 οὐ πεινάσει(주리지 않는다)로 읽고, 개역개정은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곤비하지 아니하시며’로 옮긴다. 아벨의 제물은 창 4:4, 노아의 번제 향기는 창 8:21이다. berbicinorum는 ueruecinorum(거세한 숫양의)의 후기 철자다.
22.10 exigentem은 van der Vliet의 수정이다(MR exigentis).
22.11 cliens는 로마 사회에서 보호자(patronus)에게 예속되어 의례적 봉사와 선물을 바치는 피호민이다.
22.12 <uel>은 Engelbrecht의 보충으로, ‘-든 ... -든’ 구문의 첫 ‘든’을 < > 안에 두었다. indicta는 Kroymann의 추정(M dicta, R dicto), obsequio는 van der Vliet의 수정(MR obsequia)이다.
22.13 Kroymann은 비유를 실제 사안에 적용하는 문장(‘그러므로 하나님도 자기 백성의 섬김을 거부한다’ 같은 내용)이 빠졌다고 보고 탈문 표시를 했으며,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plenus sum은 사 1:11(‘배불렀고’), sollemnitates et dies festos et uestra sabbata는 사 1:13-14다. Pamelius는 dicendo 앞에 <odit anima mea, uestra>를 보충했다. celebrando는 R3의 독법이다(MR1 celebrabant deo).
22.14 condicionalis는 제사의 거부가 바치는 이들의 상태라는 조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fecerant 뒤에서 문장을 끊는 구두점은 van der Vliet를 따른 것이다.
- 23 본문으로
23.1 aut leuem은 Kroymann의 추정(M aut legem, R1 legem), <et>는 van der Vliet의 보충이다. 번역에서는 ‘선한 이에게<도> 재판관에게도’의 첫 ‘도’를 < > 안에 두었다.
23.2 사울의 선택은 삼상 9:16; 10:1, 사무엘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은 삼상 13:8-14; 15:1-23에 나온다. 솔로몬의 이방 여인들과 모압 사람들(그모스), 시돈 사람들(아스다롯)의 우상은 왕상 11:1-8에 나온다. 라틴 성경의 1-2 Regum은 사무엘상하에 해당한다.
23.9 Kroymann은 si 뒤에 non semper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같은 사람이 늘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탈문 표시를 했고,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Engelbrecht는 homo est in으로 읽어 탈문이 없다고 본다. dispungere는 장부를 정산한다는 회계 용어다.
- 24 본문으로
24.2 삼상 15:11. 개역개정은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로 옮기고, 15:35도 ‘후회하셨더라’로 옮긴다. paenitentia/paenitere는 일관되게 ‘뉘우침/뉘우치다’로 옮겼다. praescribere는 상대의 주장을 미리 차단하는 법정 항변을 뜻하는 말로, ‘미리 못 박다’로 옮겼다.
24.3 <et>는 van der Vliet의 보충이다.
24.4 onerandam은 Kroymann의 추정이다(MR honorandam, ‘사울을 높이려고’). 사울에게 영이 임한 일은 삼상 10:6, 10에 나온다.
24.5 삼상 9:2. 개역개정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로 옮긴다.
24.7 inuidiosa와 criminosa를 대비시킨다. inuidiosa는 뉘우침의 공언이 사울에게 비난을 돌리는 경우이고, criminosa는 뉘우치는 자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경우다. 각각 ‘책망을 돌리는’, ‘죄책을 드러내는’으로 옮겼다.
24.9 욘 3:10. 개역개정은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로 옮긴다. malitia(칠십인역 κακία)는 도덕적 악과 재앙을 모두 뜻하며, 24.14-20의 논증이 이 이중 의미에 기대고 있으므로 이 장 전체에서 ‘악’으로 옮겼다.
24.10-11 욘 4:2. 개역개정은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로 옮긴다. Tharsos는 개역개정의 ‘다시스’로 옮겼다. 24.11의 optimi dei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에게 돌리는 칭호이므로 ‘지극히 선한 하나님’으로 옮겼다.
24.13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는 눅 6:43(마 7:18)의 말씀으로, 마르키온이 두 신을 구별하는 근거로 쓴 본문이다(1권 2장). et Marcion은 사본의 독법이다(Pamelius Marcion). Kroymann은 nominauit 뒤에 ‘창조주가 니느웨 사람들에게서 받아 내려던 형벌’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 탈문 표시를 했고,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nominauit의 주어는 문맥상 창조주(또는 그를 기록한 성경)로 보인다.
24.15 사 45:7(개역개정 ‘나는 ...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과 렘 18:11(개역개정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두 본문을 이 권 14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peccatoria와 ultoria는 각각 죄에 속한 악과 보복에 속한 악을 뜻한다.
24.17 그리스어 κακία는 악의뿐 아니라 해악과 괴로움도 뜻한다. 예컨대 마 6:34의 ‘한 날의 괴로움’이 κακία다.
24.18 creaturam, iudicandae, atquin은 모두 Kroymann의 추정이다(MR creaturae, uindicandae, atqui). quasi creaturam은 창조주가 그 악을 자기가 만든 것처럼 뉘우쳤다는 뜻으로 옮겼다.
24.20 passionis는 R3의 독법이다(MR1 et passionis).
24.26 삼상 15:28-29.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질 것이다’는 칠십인역(καὶ διαιρεθήσεται Ἰσραὴλ εἰς δύο)에 있고 마소라 본문과 개역개정에는 없다. 개역개정 29절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로 옮긴다. 사무엘의 말이므로 인용문 안에서는 높임말을 썼다.
24.29 conuersio sententiae는 판결이나 결정을 바꾼다는 법정 용어로 ‘판결을 바꾸는 것’으로 옮겼다.
24.30 그리스어 μετάνοια는 μετά(바뀜)와 νοῦς(마음, 생각)로 이루어진 말이다. occursu fieri는 Ursinus의 수정이다(MR1 occursu rei).
- 25 본문으로
25.2 창 3:9-11. 원문에 인용 부호가 있는 마르키온 측의 반론이다.
25.4-5 첫 Adam, ubi es는 M의 어순이다(R ubi es, Adam). 두 번째 ubi es의 느낌표는 Engelbrecht의 구두점이며, 위치를 묻는 말이 아니라 아담이 처한 상태를 탄식하는 말로 읽으라는 뜻이다.
25.7 사 10:14(새 둥지를 움켜쥠)와 사 66:1(하늘은 보좌, 땅은 발판)을 반영한다. 문장 전체가 반어이며, <e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25.8 lepus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 lupus, ‘늑대’).
25.9 <et> deum puta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MR deum puto, ‘나는 생각한다’). <et>는 ‘<그러니>’로 옮겼다.
25.10 naso agere는 코웃음 치며 업신여긴다는 관용 표현이다.
25.11 가인에게 동생의 행방을 묻는 장면과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은 창 4:9-10이다. [sed]는 Engelbrecht가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었다. probans는 R3의 독법이다(MR1 inprobans). 아담에게는 고백의 기회, 가인에게는 부인의 기회가 같은 자유 의지에서 주어졌다는 대구다.
25.12 마 12:37. 개역개정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로 옮긴다. status legis는 창 2:17의 금지 규정을 가리킨다.
25.13-14 창 3:22. 개역개정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우리 중 하나처럼 되었다’를 장차 인간이 신성으로 받아들여질 일에 대한 예고로 읽는다.
25.16 창 3:14-19에서 저주는 뱀과 땅에 내려지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직접 내려지지 않는다. 가인에 대한 저주와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한 표는 창 4:11-15다. 가인이 죽음으로 죄를 갚기를 바랐다는 말은 창 4:13-14를 그렇게 읽은 것이다.
25.18 창 18:20-21. 개역개정은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로 옮긴다. 원문에는 인용 부호가 없지만 25.2처럼 반론의 요지를 전하는 문장이다.
25.20-21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티베리우스 15년에 하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왔다는 말로 시작한다(눅 3:1; 4:31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내려옴’을 들어 창조주의 내려감을 비웃는 반론을 되돌린다.
- 26 본문으로
26.1의 “나를 두고 맹세한다”는 이사야 45: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을 가리킨다. Kroymann의 본문은 이어지는 말을 마르키온 측 반론(inquit)으로 놓으며, Ursinus는 quod multo uanius로 읽었다.
26.2의 uelles faceret는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은 uellet faceret(M R1) 또는 uellet facere(R3)이며, 추정에 따라 마르키온파 상대에게 묻는 2인칭 질문으로 옮겼다.
26.3의 peierare는 거짓을 맹세하는 것, deierare는 엄숙히 맹세하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창조주가 다른 신을 알지 못했다는 마르키온파의 전제를 받아들여, 그 전제 위에서도 창조주의 맹세가 거짓 맹세가 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26.4의 sci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은 scit이다. nec uane는 사본 독법이며 Oehler는 non uane로 고쳤다.
26.7의 “미리 내다보였다”는 이사야 45장의 맹세가 다른 신을 믿는 후대의 이단, 곧 마르키온까지 겨냥했다는 뜻이다.
26.10은 출애굽기 32:10이다. 개역개정은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이다. indignatus ira는 R의 독법으로 칠십인역 θυμωθεὶς ὀργῇ에 대응하며, M은 in ira이다.
26.12는 출애굽기 32:32를 자유롭게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impende는 ‘나도 함께 써 없애라’는 뜻이다.
26.13의 anima는 용어 원칙에 따라 ‘영혼’으로 옮겼으나, 여기서는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포함한다. 모세의 중보를 그리스도의 중보의 예표로 읽는다.
26.15의 a se는 형식상 재귀대명사지만, 26.16에서 하나님이 종에게 “나를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한 것을 설명하므로 ‘그(모세)에게’로 옮겼다.
- 27 본문으로
27.4의 줄표 삽입구는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다. 사본은 congressio stet(M) 또는 stet congressio(R)를 가지며, Kroymann은 congressio - sed로 고쳤다. deuersatum은 MR1의 독법이고 R3와 통행본은 diuersatum이다.
27.5의 “죽음에,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에”는 빌립보서 2:8에서 온다. ‘더 높은 신’은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키며, 마르키온파가 그 신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믿는다는 점을 들어 창조주의 ‘작은 면모들’을 옹호한다.
27.6의 an은 Kroymann의 주석에 따라 nonne의 뜻(‘~이 아닌가’)으로 옮겼다.
27.7의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는 시편 8:5(불가타 8:6)에 근거한다. 개역개정 시편 8:5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이고, 히브리서 2:7은 “천사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시며”이다. apud eum은 사본 독법(창조주의 책)이며 Ursinus는 Dauid로 고쳤다. dispositio는 삼위일체적 ‘경륜’의 뜻으로 옮겼다.
27.8의 [iam inde hominem]은 Engelbrecht가 삭제를 제안한 말이다. Kroymann은 ‘ediscens iam inde hominem’과 ‘ediscens iam inde a primordio quod erat futurus in fine’라는 두 판본이 겹쳤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번역은 괄호 안에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27.9는 구약의 신현 장면들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내려오는 이’는 창세기 18:21, ‘묻는 이’는 창세기 3:9와 4:9, ‘요구하는 이’는 출애굽기 32:10, ‘맹세하는 이’는 이사야 45:23을 가리킨다.
27.10의 ‘공통의 복음’은 마르키온파도 받아들이는 복음서 본문을 말한다. quia가 대격 부정사를 이끄는 구문을 Engelbrecht를 따라 ‘~라는 것’으로 옮겼다.
27.11은 마태복음 11:27(누가복음 10:22)이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11:27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이다.
27.12는 출애굽기 33:20이다. 개역개정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이다.
27.13은 뜻이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서 보이고 말한 이가 그리스도라는 앞 문단을 받아, 신약의 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Kroymann은 sed et in persona Christi penes nos Christus accipitur로 어순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27.14의 ‘철학자들의 신’은 움직이지 않고 감정이 없는 철학적 신 개념을 가리키며, 마르키온의 신을 그런 신으로 규정하는 비꼼이다. et uiso의 et는 라틴 통행본 독법이고 사본은 ut이다.
27.15의 sacramentum은 ‘신비’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 말은 맹세, 신비, 성례의 뜻을 아우른다.
27.16의 <human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conuersabatur는 R3의 독법이며 M R1은 conseruabatur이다.
27.17의 nescie는 Kroymann 1906의 374쪽 인쇄면 그대로이며 nescio의 오식으로 보고 ‘나는 모르겠다’로 옮겼다.
27.18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iustitiae(‘정의에’)가 빠졌다고 보았다.
27.21의 nunc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non이다. scilicet는 라틴 통행본 독법이고 사본은 sicut이다. ‘그 신을 다룬 책’은 마르키온의 신을 다룬 제1권, 특히 1.26-27을 가리킨다.
- 28 본문으로
28.1의 antithesîs aemulas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에 맞세운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대조 목록이다. 마르키온의 저작 제목과 구별하기 위해 겹낫표 없이 ‘안티테시스’로 썼다.
28.2의 sciit는 F의 독법이며 M은 scit, R과 통행본은 sciuit이다.
28.3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60(딜스-크란츠)이다. quid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quod이다. ‘어두운 자’(σκοτεινός)는 고대부터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붙은 별명이다.
28.4의 논증은 이렇다. 마르키온의 신이 처음부터 창조주의 세계에 있는 악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면, 창조주가 악을 허용한 책임은 그것을 허용한 마르키온의 신에게도 돌아간다.
28.6은 창세기 6:6(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을 겨냥한 마르키온의 비판을 되돌린다. in aliquo는 M의 독법이며 R은 mali quo이다. pristinae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pristinam이다.
28.8은 출애굽기 3:22, 11:2, 12:35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인들에게서 금은 패물을 구한 일을 가리킨다. fraus는 ‘속임수’로 옮겼다.
28.9는 출애굽기 21:24(“눈은 눈으로”)와 누가복음 6:29(다른 뺨도 돌려 대라)를 대조한다.
28.10의 ‘택한 사람들’은 창조주가 왕으로 택한 사울 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마르키온의 비판으로 보인다. nesciit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nescit이다.
28.11의 <enim>은 Engelbrecht의 보충이다.
28.12는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육체가 아니었다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을 겨냥한다.
28.14의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율법의 사형 규정이나 출애굽기 32:27 같은 명령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죽기를 원했다면 그를 죽인 자들을 살인자로 만든 셈이라는 논리이다.
28.15의 homicidam popul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homicidam이다. nisi si도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nisi si populus이다.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 백성을 가리킨다.
- 29 본문으로
29.1의 comminus는 M F의 독법이고 R과 통행본은 cominus이다. egeret는 R의 독법이며 M은 ageret이다.
29.2의 ingenia는 두 신에게 배정된 ‘성품’으로 옮겼다. ‘지극히 선한 이’와 ‘재판관’은 마르키온이 나눈 두 신의 칭호이다.
29.3의 in eis는 M의 독법이고 R은 meis이다.
29.4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uidebitur(‘~으로 보일 것이다’) 또는 relucebit(‘~이 드러날 것이다’) 같은 동사가 빠졌다고 보았다. praestare는 MR1의 독법이며 R3는 praestat, Oehler는 praestaret이다.
29.6의 diuinitatis와 ut eisdem, et bonitatem은 모두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은 diuinitatibus, et eisdem, ut bonitatem이다.
29.7의 quam repercussus는 레오폴트의 수정(사본 quo repercussus)이고, <cum>도 레오폴트의 보충이다. aemulatio creatoris는 창조주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를 함께 뜻하며, 용어 원칙에 따라 ‘질투’로 옮겼다.
29.8의 aemulatum은 창조주의 개별 규정마다 맞수로 겨룬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은 자기 신에게 질투 같은 감정이 없다고 하면서도 『안티테시스』에서 그 신을 창조주의 경쟁자로 그린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29.9의 zelotes는 출애굽기 20:5와 34:14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받는다. arbustiores는 드문 비교급이며 ‘덜 다듬어진, 거친’ 뜻으로 옮겼다. maturitati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maturitatis이다. 세계가 상반된 원소들로부터 조화롭게 조율되었다는 생각은 스토아 철학의 우주론과 맞닿아 있다.
29.11의 ‘대조’는 성경과 율법에 나타난 대조를 말하며, 세계 안에 대조를 지닌 창조주가 성경의 대조도 지닌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