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온 반박 2권 테르툴리아누스 자료 판본: alpha-0.30 수록 범위: Kroymann 1906, CSEL 47의 마르키온 반박 2권 1-29장. 전체 5권 가운데 2권이다. 고정 전자 원문을 333-377쪽 인쇄면과 대조해 교정. 고정판: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 원자료 SHA-256: 50e1f5aba9dfdeae2fc75c11cf64fb20f605630facb71131ad3cda2e30d9f418 형식: 한국어 1 이 소품을 고쳐 쓰게 된 계기, 곧 그것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첫 소책자의 서문에서 밝혀 둔 그 계기는 우리에게 이 결과도 가져다주었다. 마르키온을 반박하며 두 신을 다루어야 하므로, 주제의 구분에 따라 각 신에게 고유한 제목과 권을 나누어 주게 된 것이다. 한 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다른 신은 합당하게 하나님이심을 변호하는 것이니, 폰투스 사람이 한 신은 끌어들이고 다른 신은 배제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를 허물지 않고서는 거짓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세우려면 다른 것을 무너뜨려야 했다. 자기 자재가 없는 자는 이렇게 짓는다. 그런데 창조주 위에 덧세워진 그 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한 가지 점만 논했어야 했다. 그리하여 신성이 유일하고 완전하다고 규정하는 확실한 규칙들로 거짓 신이 쫓겨나면, 참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따지지 않게 되었어야 했다. 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한 만큼 -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동안에는 이렇게만 보아도 확실하다 - 그만큼 그분은 어떠한 분이든 논란 없이 받아들여져야 마땅했으며, 판단할 대상이기보다 경배할 분이요, 다시 따져 볼 대상이기보다 섬겨서 호의를 얻어야 할 분이었다. [또는 엄격함 때문에 두려워할 대상이기보다.] 사람에게 참 하나님을 향한 관심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다른 신이 없었기에 사람이 맞닥뜨리게 된 그 하나님 말이다. 번역 주석 1. 1.1 “이 소품을 고쳐 쓰게 된 계기”는 1권 1장 서문에서 밝힌 사정, 곧 초판은 급히 쓴 것이었고 고쳐 쓴 2판은 완성되기 전에 한 형제가 베껴 가 잘못된 형태로 유포되어 3판을 새로 쓰게 된 사정을 가리킨다. 2. 1.1 “폰투스 사람”(Ponticus)은 흑해 연안 폰투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3. 1장의 문장들은 서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van der Vliet와 Kroymann은 테르툴리아누스가 3판에서 한 권을 두 권으로 나누면서 1권의 끝과 2권의 첫머리를 덧붙였기 때문으로 본다. Kroymann은 1.3의 oportuerat autem이 본래 2.1의 at nunc와 짝을 이루는 oportuerat quidem이었으리라고 보며, 덧붙은 부분을 빼면 “참 하나님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 시비를 당하고 있다”라는 원래의 연결이 드러난다. 4. 1.3 superducitur는 자녀가 있는 집에 새 아내(계모)를 들이는 데 쓰이는 동사로, 마르키온이 창조주 위에 다른 신을 덧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nemo sit deus ille는 “그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로 옮겼다. 5. 1.3 demerendum은 섬김과 공경으로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섬겨서 호의를 얻어야 할 분”으로 옮겼다. 6. 1.4 대괄호 안의 uel quam timendum ob seueritatem은 van der Vliet가 삽입구로 보아 괄호 친 구절이다. 7. 1.4-1.5 라틴어로는 한 의문문(“다른 신이 없었기에 사람이 맞닥뜨린 참 하나님을 향한 관심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이다. 1.5의 inciderat의 주어는 문맥상 사람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 2 그러나 지금 전능한 하나님, 우주의 주님이며 창설자인 분이 시비를 당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오직 그분이 태초부터 알려져 있었고, 결코 숨겨진 적이 없었으며, 로물루스 자신보다도 앞서, 하물며 티베리우스보다 앞서서는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빛을 비추어 왔다는 데 있다. 다만 그분에게 시비를 거는 이단자들에게만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가 확실한 분을 부정하기보다는 비난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유로 다른 신을 상정해야 한다고 여기며,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저울질한다. 이는 마치 어떤 눈먼 사람이나 눈이 흐릿한 사람이 자기가 보는 해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더 온화하고 더 이로운 다른 해를 상정하려는 것과 같다. 오 사람이여, 이 세상을 조절하는 해는 유일하다. 그대가 그렇게 여기지 않을 때에도 그 해는 가장 좋고 유익하며, 그대에게 더 따갑고 더 해롭게, 심지어 더 흐리고 더 탁하게 느껴질 때에도 자기 이치에는 들어맞는다. 그대가 그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없다면, 다른 어떤 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 해의 빛살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해는 분명 더 큰 해일 것이니 더욱 그렇다. 사실 더 낮은 신<을 향해서>도 눈이 어두운 그대가 더 높은 신을 향해서는 어떻겠는가? 어찌하여 차라리 그대의 연약함을 아끼고 위험 속으로 몸을 내뻗지 않는가? 그대에게는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 없는 하나님이 있으니, 그분이 그대가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처음 알아보았을 때, 바로 그 점으로 그분은 충분히 보인 것이다. 그분 자신이 원한 그 부분만큼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모르는 자로서 다시 따지고, 더 나아가 마치 아는 자처럼 고발하기까지 한다. 그대가 그분을 안다면 고발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다시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분에게 이름은 돌려주면서 이름의 실체, 곧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위대함은 부정한다. 그대는 그 위대함이, 사람이 모든 면에서 알 수 있었다면 위대함이 아니었을 만큼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 자신이 이미 그때 [사도로서] 이단자들의 마음을 내다보며 말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그가 누구와 의논하였느냐? 누가 그에게 깨달음과 지식의 길을 보여 주었느냐?” 사도도 이에 화답한다.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여, 그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으며>” - 곧 심판자 하나님의 판단이다 - “그의 길은 얼마나 찾을 수 <없는가>” - 곧 깨달음과 지식의 길이다. 그 길은 아무도 그분에게 보여 준 적이 없다. 혹시 신성을 심사하는 이 검열관들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 “차라리 이렇게 했어야 했다”라고. 마치 하나님의 영 말고 누군가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영을 지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보다 더 사려 깊다고 여긴다.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음이듯, 하나님의 지혜도 세상 앞에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찮은 분일 때 가장 위대하고, 사람에게 선하지 않은 분일 때 가장 선하며, 사람에게 둘이나 그 이상일 때 가장 유일하다. 만일 태초부터 혼에 속한 사람이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 지키기를 소홀히 했고, 그래서 믿음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가진 것처럼 보이던 것, 곧 낙원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친밀함까지 빼앗겼다면 - 그가 순종했더라면 그 친밀함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 그가 자기 재료로 되돌려지고 경작해야 할 땅이라는 노역장으로 쫓겨나, 땅을 향해 숙이고 기울어진 바로 그 노동 가운데서 땅에서 취한 세상의 영을 자기 족속 전체에게, 다만 혼에 속하고 이단적이며 하나님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족속에 한해서 물려주었다 한들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아니면 아담이 하나님의 판결보다 자기 판단을 택함으로써 저지른 바로 그 범죄를 이단이라고 선언하기를 누가 주저하겠는가? 다만 아담은 자기를 빚은 토기장이에게 “당신은 나를 지혜롭지 못하게 빚었다”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 그는 자기가 꾐에 넘어갔음을 고백했고, 꾀어낸 여자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아주 서툰 이단자였다. 그는 순종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창조주를 모독하거나 자기를 지은 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존재의 처음부터 그분이 선하고 지극히 선한 분임을 발견했으며, 어쩌면 그분을 심판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번역 주석 1. 2.1 negotium patitur는 마르키온파에게서 시비를 당한다는 뜻이다(Kroymann 주). 2. 2.2 로물루스는 로마의 전설적 건국자이다. 티베리우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본 티베리우스 황제 15년(눅 3:1; 『마르키온 반박』 1.19)을 가리킨다. 3. 2.3 quem uideat non uidet(“자기가 보는 해를 보지 못한다”)는 사본의 읽기이며, Kroymann은 quem uidet non uideat를 가능성으로 든다. Kroymann은 사본의 aliqui proinde atque si caecus를 proinde atque si caecus aliqui로 고쳐 읽었다. 4. 2.6 은 R의 읽기를 따른 보충이며 “<을 향해서>”로 표시했다. 문두의 nam을 Kroymann은 손상된 것으로 보아 item을, 엥엘브레히트는 iam을 제안했으나, 번역은 전해진 nam을 “사실”로 옮겼다. “더 낮은 신”은 마르키온파가 열등하다고 보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은 고전 13:9, 12를 반영한다. 5. 2.7 qua uoluit ipse?는 앞 문장의 ex parte를 받아 “그분 자신이 원한 부분만큼”으로 읽었다. 통상 판본은 ipse 뒤에 마침표를 찍는다. 6. 2.8 magnitudinem은 Latinius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magnitudinis이다. 대괄호 안의 quae deus dicitur는 Kroymann이 1권의 구절에서 끼어든 삽입으로 보아 괄호 쳤다. 7. 2.9 사본 MR은 ipse만, Latinius는 Esaias를 읽는다. Kroymann은 ipse 로 보충하고, 2.11의 apostolus와 겹치는 apostolus를 괄호 쳤다. 2.9-2.10의 인용은 사 40:13-14의 칠십인역 계열 본문이다. 개역개정 사 40:13-14는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로 시작하여 표현이 다르며, 처음 두 질문은 롬 11: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와 같다. 8. 2.11 롬 11:33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다. ininuestigabilia/ininuestigabiles는 R의 읽기이고 MF는 inuestigabilia/inuestigabiles이다. Kroymann이 보충한 부정 접두사 in-을 “<없으며>”, “<없는가>”로 표시했다. “심판자 하나님의 판단”, “깨달음과 지식의 길”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에 덧붙인 해설로, 길은 2.10의 “깨달음과 지식의 길”을 받는다. condicet(MF, “같은 말을 한다”)를 따라 “화답한다”로 옮겼다. R은 contradicet이다. 9. 2.12 고전 2:11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를 반영한다. 10. 2.13 고전 2:12(세상의 영),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3:19, 1:18을 엮은 문장이다. in sapientia는 Pamelius의 교정이며 M은 insipientia, R은 insipientiam이다. 11. 2.14 고전 1:25 인용이다. 12. 2.16 homo animalis는 고전 2:14의 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이다. 개역개정은 “육에 속한 사람”이지만 caro(육)와 구별하려고 “혼에 속한 사람”으로 옮겼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것까지 빼앗겼다”는 눅 8:18(마 13:12 참조), “자기 재료로 되돌려지고”는 창 3:19, 23을 반영한다. redhibere는 하자 있는 물건을 판 사람에게 되돌려 보내는 법률 용어이다. dumtaxat animali et haeretico는 세상의 영이 전해지는 범위를 혼에 속하고 이단적인 이들로 한정하는 말로 읽었다. 13. 2.17 haeresis는 그리스어 hairesis(선택)에서 온 말이어서 per electionem(선택함으로써)과 말놀이를 이룬다. electionem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lectionem이다. 14. 2.18 사 45:9; 롬 9:20의 토기장이 비유를 반영한다. 15. 2.19 창 3:12-13. 아담은 여자가 준 열매를 먹었다고 말하여 꾐을 고백하고 꾀어낸 이를 드러냈다. 16. 2.20 마지막의 a primordio는 Kroymann이 앞의 a primordio sui와 겹치는 중복으로 보아 괄호 쳤고, Junius는 다음 문장과 연결하려 했다. “어쩌면 그분을 심판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다”는 아담의 범죄가 창조주로 하여금 심판자로 행하게 했다는 뜻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 3 그러므로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검토에 들어서면서 그분이 어떤 조건에서 알려졌는지를 묻는다면, 사람보다 앞선 그분의 일들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과 함께 곧바로 확인되고 그때부터 확립되고 규정된 그분의 선함이, 뒤이은 만물의 질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할 어떤 감각을 우리에게 일러 주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마르키온의 제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선함을 알아보면서, 우리가 그들의 신에게서 그 선함이 합당하지 않음을 보여 준 바로 그 항목들을 통해, 그 선함이 하나님에게 합당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이미 바로 이것, 곧 자신을 알게 하는 재료가 되는 것을 그분은 다른 이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것에서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 결국 창조주의 첫 선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히 숨겨 두기를 원하지 않은 데, 곧 하나님을 알아볼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원하지 않은 데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실 비록 이것이 좋다는 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 그것이 드러날 대상이 아직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무슨 좋은 것이 드러날지 미리 알았고, 그래서 그 일을 자신의 지극한 선함에 맡겼으니, 그 선함은 드러날 좋은 것을 마련하는 중개자였다. 그 선함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선함]이나 자극을 받아 일어난 의욕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마치 일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그 존재를 헤아려야 할 선함인 것도 아니다. 만일 그 선함이 일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처음을 세웠다면, 그것이 만들 때 그 자신은 처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함이 처음을 만들자 <그 선함에게서> 시간의 질서도 생겨났다. 시간들을 구분하고 표시하도록 별들과 하늘의 광명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때와 달과 해를 위하여 있으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만든 선함은 시간 이전에 시간을 가지지 않았고, 이는 처음을 세운 선함이 처음 이전에 처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과 같다. 이처럼 처음의 순서도 시간의 한도도 없으므로 그 선함은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세월에 속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며, 갑작스럽거나 우연하고 자극받아 생긴 것으로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여길 근거, 곧 어떤 시간의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영원하고 하나님에게 본래 타고난 것이며 항구적인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그 때문에 하나님에게 합당하다. 그리하여 그 선함은 이 점에서부터 이미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을 부끄럽게 한다.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은 처음과 시간보다 뒤진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창조주의 악함 자체보다도 뒤진 것이다. 그것도 악함이 선함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었다면 말이다. 번역 주석 1. 3.1 “알려진 하나님”(deus notus)은 1권에서 다룬 마르키온의 “알려지지 않은 신”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2. 3.2 “그들의 신에게서 그 선함이 합당하지 않음을 보여 준 바로 그 항목들”은 1권 22-27장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본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대목들을 가리킨다. 3. 3.3 자신을 알게 하는 재료는 세계를 가리킨다. 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자기 피조물이 없어 창조주의 세계에 기대야 한다고 논박한 것과 대조된다. 4. 3.4 id est-cognosceretur는 Kroymann이 3.5의 “그것이 드러날 대상이 아직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와 겹친다고 보아 삭제 가능성을 제시한 구절이다. 번역은 전해진 대로 옮겼다. 5. 3.6 대괄호 안의 bonitatis는 Kroymann이 괄호 친 낱말이다. animatio는 Kroymann의 주대로 그리스어 prothymia(의욕, 열의)에 해당한다. “갑작스럽고 우연하며 자극받아 생긴” 선함은 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티베리우스 시대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비판한 논점을 받는다. 6. 3.8 는 Kroymann이 사본의 ab ea 뒤에 한 번 더 보충한 것이어서 “<그 선함에게서>”로 표시했다. 7. 3.8-3.9 창 1:14. 개역개정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때와 달과 해를 위하여”이다. 8. 3.10 는 Kroymann의 보충이며 R3은 et를 덧붙인다. suffundens는 얼굴을 붉히게 한다는 뜻이어서 “부끄럽게 한다”로 옮겼다. 마지막 조건문 si tamen malitia potuit a bonitate committi는 창조주가 선함으로 행한 일을 마르키온이 악함이라 부르는 것을 비꼬는 말로, 창조주의 일은 선함에서 나왔으므로 악함일 수 없다는 뜻이다. committi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committere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3 4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선함이 하나님을 알게 할 존재로 사람을 내다보았을 때, 그 선함은 자기 찬사에 이것도 덧붙였다. 곧 먼저 사람을 위한 거처로 [나중에] 어떤 아주 큰 구조물을 고안하고, 나중에는 더 큰 것도 고안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큰 것 안에서 마치 더 작은 것 안에서처럼 미리 연습하며 자라나, 그렇게 하나님의 좋은 것, 곧 큰 것에서 그분의 가장 좋은 것, 곧 더 큰 거처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선함은 선한 일에 가장 좋은 일꾼, 곧 자기 말씀도 쓴다. “내 마음이 가장 좋은 말씀을 쏟아 내었다”라고 한다. 마르키온은 여기서 첫 열매가 가장 좋은 열매, 곧 가장 좋은 나무의 열매임을 알아보아야 한다. 정말이지 가장 서툰 농부인 그는 나쁜 나무를 좋은 나무에 접붙였다. 그러나 모독의 접순은 힘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만든 기술자와 함께 말라 버릴 것이고, 그렇게 좋은 나무의 본성이 스스로를 증언할 것이다. 요컨대 말씀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이 그것이 좋음을 보셨다.” 이는 보지 않으면 좋은 것을 모르는 분처럼 본 것이 아니라, 좋았기 때문에 본 것이다. 그분은 시선을 주는 영예로 일들의 선함을 높이고 인 치고 검증했다. 이처럼 그분은 좋게 만든 것들을 좋게 말하기도, 곧 축복하기도 했으니, 이는 그대에게 온전한 하나님, 곧 말하는 데에도 행하는 데에도 선한 분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씀은 아직 저주할 줄 몰랐으니, 해롭게 행할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하나님에게 요구한 원인들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동안 세상은 모두 좋은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이 모든 것이 마련되고 있던 그 존재에게 얼마나 큰 좋은 것이 준비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미리 보여 주었다. 결국 하나님의 작품들 안에 거하기에 그분 자신의 형상과 모양 말고 누가 합당하겠는가? 그 형상과 모양도 선함이, 그것도 더 힘써 일하는 선함이 지어냈으니, 명령하는 말로가 아니라 친밀한 손으로 지었고, 다정한 말을 먼저 건네기까지 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선함이 말했다. 선함이 진흙으로 빚어 이토록 큰 육신의 실체를 만들었으니, 그 실체는 하나의 재료에서 그토록 많은 성질로 세워졌다. 선함이 숨을 불어넣어 영혼이 되게 했으니, 죽은 영혼이 아니라 산 영혼이었다. 선함이 사람을 세워 만물을 누리고 다스리며 이름까지 붙이게 했다. 선함은 더 나아가 사람에게 즐거움을 더해 주었으니, 그가 온 세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더 아름다운 곳에 머물도록 그를 낙원으로 옮겼다 - 이미 그때 세상에서 교회로 옮긴 것이다. 같은 선함이 돕는 이도 마련했으니, 좋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함은 그 성, 곧 마리아의 성과 이어서 교회의 성이 그에게 유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대가 비난하고 논쟁거리로 비틀어 대는 그 율법도 선함이 부과했으니, 사람을 배려하여 그가 하나님에게 붙어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유롭다기보다 버려진 존재로 보이지 않게, 곧 하나님에게서 풀려나 경멸 때문에 자유롭게 된 그의 종들, 곧 다른 동물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람만이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받을 만한 유일한 존재였다는 것을 자랑하게 하고, 깨달음과 지식을 담을 수 있는 이성적 동물로서 이성적인 자유 그 자체로도 제어되어, 자기에게 만물을 복종시킨 분에게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권고도 선함이 함께 덧붙였다. “그러나 너희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선함은 지극히 너그럽게 범법의 결말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위험을 모르는 무지가 순종의 소홀함을 거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율법을 부과할 이유가 앞섰다면, 그것을 지키게 할 이유도 뒤따랐으니, 범법에 벌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벌을 미리 경고한 분은 그것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선함을 우선은 적어도 여기까지, 좋은 일들에서, 좋은 축복들에서, 너그러운 베풂들에서, 섭리들에서, 좋고 자애로운 율법들과 미리 준 경고들에서 알아보라. 번역 주석 1. 4.1 대괄호 안의 postmodum은 Kroymann이 다음 구의 postmodum과 겹친다고 보아 괄호 쳤으며, F에는 postmodum molem maximam이 없다. Kroymann은 maximam을 magnam(큰)의 뜻으로 보므로 이어지는 “더 큰 것”, “큰 것에서 ... 더 큰 거처로”와 짝을 이룬다. dei ipsius의 dei도 Kroymann은 삭제 가능성을 든다. 2. 4.2 시 45:1(불가타 44:2)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이지만, 라틴어는 sermo(말씀)로 읽어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창조에 참여한 말씀을 가리키는 증언으로 쓴다. R1은 uerbum sermonem이다. 3. 4.3-4.4 눅 6:43-44의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비유를 받는다. 마르키온은 이 비유로 악을 낳는 창조주와 선을 낳는 신을 구분했다(1권 2장). “나쁜 나무를 좋은 나무에”는 Kroymann의 교정 malam in bonam을 따른 것이고, 사본 MR은 in malam bonam(좋은 나무를 나쁜 나무에)이다. 4.4의 surculus(접순)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sarculus(괭이)이다. 4. 4.5 창 1:3-4 인용이다. dispungens는 회계를 검산하여 승인한다는 뜻이어서 “검증했다”로 옮겼다. 5. 4.6-4.7 benedicere(축복하다, 좋게 말하다)와 benefacere(좋게 만들다), maledicere(저주하다)와 malefacere(해롭게 행하다)의 말놀이이다. 4.6은 이를 살리려고 “좋게 말하기도, 곧 축복하기도”로 옮겼다. 하나님의 저주는 창 3:14-19에서 처음 나온다. 6. 4.9-4.11 창 1:26(“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과 창 2:7(흙으로 사람을 지으심)을 받는다. 7. 4.12 창 2:7(“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1:28, 2:19-20을 받는다. inflauit in animam은 사본 MR의 읽기이며, Pamelius는 animam, Junius는 in animam으로 읽었다. 8. 4.13 창 2:8, 15. 낙원으로 옮겨진 일을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진 일의 예표로 읽는 삽입구이며, 엥엘브레히트가 괄호로 구분했다. 9. 4.14 창 2:18 인용이다. 10. 4.15 sexum은 여성을 가리킨다. 돕는 이로 지어진 여자(하와)의 성이 장차 마리아와 교회에서 유익을 낳으리라는 예표론이다. irrogauit(부과했다)는 엥엘브레히트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erogauit, Oehler는 rogauit, 호페는 eructauit를 제안했다. ex fastidio liberis는 하나님이 율법을 줄 만큼 여기지 않아 풀어 둔 상태를 말하며, Gelenius는 fastigio로 읽었다. 마지막 구절은 시 8:6; 고전 15:27의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를 반영한다. 11. 4.16 창 2:17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로 단수이지만 라틴어 인용은 복수 ederitis이다. morte moriemini는 히브리어의 강조 어법을 옮긴 표현이어서 “반드시 죽으리라”로 옮겼다. 12. 4.16-4.17 Kroymann은 cuius legis-obsequii가 2판에서 덧붙은 부분이라고 보는데, 4.18의 porro si가 4.15에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3. 4.19 praemonitionibus(미리 준 경고)는 Gelenius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praemunitionibus(방비)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4 5 이제 여기서부터 질문들로 † 모두, 오 개들이여, 사도가 밖으로 내쫓는 그대들, 진리의 하나님을 향해 짖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갉아 대는 논증의 뼈다귀들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선하고, 미래를 미리 알며, 악을 막을 능력이 있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그것도 자기 형상과 모양이요 더 나아가 영혼의 유래로 보아 자기 실체이기도 한 사람을, 마귀에게 속아 율법에 대한 순종에서 미끄러져 죽음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그가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을 만큼 선하고, 그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지 않을 만큼 미리 알며, 그것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신적 위엄의 이 세 조건 아래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면, 반대로 하나님은 선하다고도, 미리 안다고도, 능력이 있다고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정된다. 실로 하나님이 그러한 분, 곧 선하고 미리 알며 능력 있는 분이었다면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그만큼, 그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창조주에게서 의심받는 이 속성들, 곧 선함과 예지와 능력을 변호해야 한다. 이 대목에 오래 머물지는 않겠다. 그리스도 자신도 일들에서 증명을 시작해야 한다고 먼저 규정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일들은 두 가지를 다 증언한다. 우리가 보였듯이 그 일들이 좋다는 점에서 그분의 선함을, 그토록 크다는 점에서, 그것도 무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분의 능력을 증언한다. 사실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어떤 재료에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바로 그 점에서 역시 무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이 지금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 일들은 좋다는 점에서 그렇게라도 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게라도 능력이 있으니, 그래서 전능하다고도 한다. 그분이 세운 예언자들만큼 많은 증인을 가진 예지에 대해서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기야 모든 것의 창시자에게 예지라는 항목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분은 분명 만물을 <한편으로> 배치하면서 미리 알았고, 미리 알면서 배치했다. 확실히 범법 자체도 그분은 미리 알았다.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걸고 그것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이 능력들이 있어서 그 앞에서는 어떤 악도 사람에게 일어날 수도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었는데, 그럼에도 악이 일어났다면, 사람의 조건도 살펴보자. 하나님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오히려 사람의 조건을 통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보자. 나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자유로운 존재, 곧 자기 의지와 자기 권능을 지닌 존재로 세워졌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에게서 이러한 상태의 형태보다 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 할 만한 것을 보지 못한다. 사람은 인류 안에서 그토록 다양한 얼굴과 몸의 윤곽으로 한 모양인 하나님을 본떠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이끌어 낸 실체, 곧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태를 따라 인 쳐졌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자기 의지의 자유와 권능을 보증한다. 그때 하나님이 세운 율법 자체도 사람의 이런 상태를 확증했다. 율법에 마땅히 바쳐야 할 순종을 자기 권능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또 율법에 대한 경멸도 의지의 자유에 따라 사람에게 돌려지지 않았다면 범법에 죽음의 위협이 덧붙여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이후 율법들에서도 그대는 그렇게 발견할 것이다. 창조주는 사람 앞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내놓는다. 아울러 부르고 위협하며 권면하는 하나님이 계명들로 배치한 훈육의 질서 전체도, 순종으로도 경멸로도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사람을 위한 것으로가 아니면 그대는 달리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 주석 1. 5.1 문장에 본동사가 없고 omnes 앞에서 본문이 손상되었다. 전해진 낱말을 그대로 옮기고 † 를 같은 자리에 두었다. Kroymann은 omnes 대신 hominis(“사람에 관한 질문들로”)를 추정으로 제시한다. o canes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canes이다. “사도가 밖으로 내쫓는 개들”은 계 22:15(“개들 ... 은 다 성 밖에 있으리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사도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이다. 2. 5.2 obroditis는 뼈를 갉아먹는다는 뜻으로 앞의 “개들”을 이어받는다. “영혼의 유래로 보아 자기 실체이기도 한”(per animae censum)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숨에서 왔다는 창 2:7 해석에 근거한다. 5.2-5.5의 따옴표는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3. 5.3 qui(세 차례)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qua, 엥엘브레히트는 quae이다. Kroymann은 si 뒤에 esset를 보충할 가능성도 든다. 4. 5.6 species는 “속성들”로, praescientia는 “예지”로, potentia는 “능력”으로 옮겼다. 5. 5.7 요 10:25, 38(“내가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을 가리킨다. 6. 5.9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선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지었다고 주장한 이들로,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르모게네스 반박』에서 이 견해를 반박한다. 7. 5.10 omnia(모든 것)와 omnipotens(전능하다)의 말놀이이다. 8. 5.12 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이어지는 et와 짝을 이루는 “한편으로”로 표시했다. 라틴어로는 한 의문문이다. 9. 5.13 창 2:17의 경고를 가리킨다. 10. 5.14-5.15 5.14의 조건절(“... 일어났다면”)의 귀결이 5.15의 “사람의 조건도 살펴보자”이다. 11. 5.17 anima는 MR1의 읽기이고 R3은 animae이다. spondentis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Latinius는 respondentis이다. libertatem et potestatem은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은 탈격 libertate et potestate이다. Kroymann 본문을 따라 spondentis는 dei에, sui는 하나님에게 걸리는 것으로 옮겼다. Latinius의 respondentis와 사본의 탈격을 따르면 “자기 의지의 자유와 권능으로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형태로 읽힌다. 12. 5.20 신 30:15, 19(“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를 가리킨다. 13. 5.21 dispositum은 Kroymann의 주대로 5.20의 inuenias(그대는 발견할 것이다)에 걸린다. a uocante(부르는)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auocante(불러내는)이다. et hortante는 엥엘브레히트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exhortante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5 6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인간이 자기 의지의 자유로운 권능을 가졌다고 세우는 목적이, 그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책망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 이로써 드러나므로, 그대가 이번에는 여기서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파멸을 가져올 것이었다면 그가 그렇게 지어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반박하지 못하도록, 나는 먼저 그가 그렇게 지어져야 했다는 것도 변호하겠다. 그를 그렇게 지은 원인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가 그렇게 지어졌다는 것과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더 강하게 확증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함과 그의 이성이 이렇게 지은 일도 옹호할 것이니, 우리 하나님에게서는 이 둘이 모든 일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성은 선함 없이 이성이 아니고, 선함은 이성 없이 선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보여 주었듯이 마르키온의 신에게서처럼 비이성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알려져야 했다. 이것은 분명 선하고 이성적인 일이다. 하나님을 알아볼 만한 합당한 무엇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보다 더 합당한 무엇을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도 의심할 것 없이 선하고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자유 의지와 자기 권능을 지닌 것으로 지어져야 했다. 바로 이것, 곧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여겨지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 인간에게는 이러한 상태에 걸맞은 실체, 곧 분명 자유롭고 자기 권능을 지닌 하나님의 숨이 갖추어졌다. 게다가 달리 보아도, 온 세상을 소유한 인간이 무엇보다 먼저 자기 마음을 소유하여 다스리지 못하고 남들의 주인이면서 자기 자신의 종이라면, 그것이 어떤 모양이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의 선함은 그가 인간을 귀히 여긴 데서, 그의 이성은 그 안배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이제 인간에게 그토록 큰 것, 곧 의지의 자유를 베푼 일은 선함 하나에만 돌리자. 이성은 다른 것, 곧 인간을 그러한 상태로 지은 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하게 하라. 본성으로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인 그것을 시작 없이 가진 이는 그것을 지음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지음에서 비롯되었고 시작을 가지므로, 시작과 함께 자기가 존재할 형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본성으로가 아니라 지음으로 선을 향해 배치되었고, 선하다는 것을 자기 것으로 가지지 않았다. 그는 본성으로가 아니라 지음으로, 곧 선한 지은 이, 다시 말해 선한 것들을 지은 이를 따라 선을 향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자기에게 양도된 선을 이제 자기 것으로 가지고, 선이 이제 인간 안에서 고유한 소유가 되고 어떤 의미에서 본성이 되도록, 지음에 따라 그에게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양도된 선의 저울잡이(libripens)처럼 덧붙여졌다. 그것이 선을 이제 인간 자신의 것으로서 인간에게서 자발적으로 행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 선함의 이치도 이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선함은 자발적으로, 곧 의지의 자유에서, 지음에 영합하지도 않고 예속되지도 않은 채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인간은 지음을 따르기는 하되 이제 자기 의지로 선한 자로 드러날 때에야, 이를테면 본성의 고유한 소유로부터 선한 자로 서게 되고, 마찬가지로 악에 맞서서도 - 하나님은 분명 그것도 미리 내다보았다 - 인간이 곧 자유롭고 자기 권능을 지닌 자로서 더 강한 자로 방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이 권리를 갖지 못하여 선조차 의지로가 아니라 필연으로 행한다면, 그는 예속의 연약함 때문에 악에게도 사로잡힐 수 있는 자가 되었을 것이고, 선에게처럼 악에게도 똑같이 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전적인 자유가 양쪽 방향으로 그에게 허락되었다. 그가 선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악을 자발적으로 피함으로써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달리 보아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인간은 자기 의지의 공과에 따라 그 심판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곧 자유로운 의지의 공과에 따라서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지로가 아니라 필연으로 선하거나 악한 자로 드러난 자에게는 선에 대한 보상도 악에 대한 보상도 정당하게 매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율법도 세워졌다. 율법은 자유를 배제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바치는 순종이나 자발적으로 저지르는 범법을 통해 자유를 입증한다. 이처럼 의지의 자유는 양쪽 결과를 향해 모두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허락된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하나님의 선함과 이성이 모두 발견된다면, 모든 논의에 앞서 확정해야 할 선함과 이성에 대한 첫 정의를 제쳐 두고서, 일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과 다르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 뒤에 일어난 일들<로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짓지 말았어야 했다고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야 했다는 것을 살펴 확인한 뒤, 확인된 것을 그대로 둔 채 나머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몰락에 곧바로 걸려 넘어진 자들이 그의 조건을 살펴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그를 만든 이에게 돌리기는 쉽다. 만든 이의 이성은 검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 일들부터 살펴본 하나님의 선함은 하나님에게서 아무 악도 나올 수 없었음을 납득시킬 것이고, 다시 숙고한 인간의 자유는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그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번역 주석 1. 6.3의 “마르키온의 신에게서처럼 비이성적으로 선한 것”은 제1권(특히 I.23)에서 마르키온의 신의 선함이 이성 없는 선함이라고 논박한 대목을 가리킨다. 2. 6.7의 “하나님의 숨”(adflatus dei)은 창 2:7을 가리킨다. liberi et suae potestatis는 dei에 걸리므로 “자유롭고 자기 권능을 지닌 하나님”으로 옮겼다. 3. 6.11의 “본성으로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은 막 10:18; 눅 18:19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반영한다. 4. 6.11의 in eiusmodi institutionem은 사본(MR)의 읽기이며, Kroymann은 이를 institutionem in eiusmodi (statum), 곧 인간을 그러한 상태로 지은 일로 풀이했고 Engelbrecht는 id est eiusmodi institutionem으로 고쳤다.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옮겼다. 5. institutio는 이 장에서 인간을 특정한 상태로 지어 세운 일을 뜻하므로 “지음”으로, institutor는 “지은 이”로, natura와 대비되는 경우에는 “지음으로/본성으로”로 옮겼다. 6. 6.14의 emancipatum, libripens는 로마법의 해방·양도 절차(mancipatio)에서 저울을 드는 증인(libripens)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선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법적으로 양도되어 인간의 고유한 소유(proprietas)가 되고,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그 양도를 성립시키는 증인 역할을 한다는 비유이다. 사본 MR1은 libripense mancipati로 읽는다. 7. 6.14-6.15의 줄표 구간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6.15의 non fauente institutioni non seruiente는 Rigaltius의 수정(institutioni, 사본 institutionis)을 따른 본문이며, Ursinus는 첫 non의 삭제를 제안했다. 본문대로 “지음에 영합하지도 않고 예속되지도 않은 채”로 옮겼다. 8. 6.16의 careret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caperet로 읽는다. 9. 6.20의 <로부터>는 Kroymann이 보충한 전치사 e(“~로부터”)의 번역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6 7 이 정의로써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온전히 보존된다. 선함의 본성도, 안배의 이성도, 예지와 능력의 충만함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에게 그의 모든 지음에서 최고의 진중함과 탁월한 신실함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묻기를 그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고 이성적인 지음들로 입증되어야 할 그의 진중함과 신실함을 붙들고 있으면, 그대는 하나님이 원한 것을 보존하려고 원하지 않은 일에 맞서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단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와 권능을 허락했고, 우리가 보여 주었듯이 합당하게 허락했다면, 분명 바로 그 지음의 권위에 근거하여 그것들을 누리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누린다는 것은, 그분 자신에게 달린 한에서는 그분 자신을 따라, 곧 하나님을 따라, 곧 선을 향해 누리는 것이다 - 누가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무엇을 허락하겠는가? - 그러나 인간에게 달린 한에서는 그 자유 자체의 움직임을 따라 누리는 것이다 - 어떤 것을 한번 누리도록 해 준 사람에게, 자기 마음과 의지대로 누리도록 해 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번 허락한 자유에서 물러나는 것, 곧 자신의 예지와 월등한 능력을 자기 안에 억제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분은 그 예지와 능력으로, 인간이 자기 자유를 악하게 누리기 시작하여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개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분이 개입했다면, 이성과 선함으로 허락한 의지의 자유를 폐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개입했다고, 그분이 의지의 자유를 폐기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분이 인간을 나무에서 불러 돌이키고, 속이는 자인 뱀 자체를 여자와 만나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이다. 마르키온은 “오, 헛되고 변덕스럽고 미덥지 못하며 자기가 지은 것을 폐기하는 주여!” 하고 외치지 않겠는가? “개입할 것이라면 왜 자유 의지를 허락했는가? 허락했다면 왜 개입하는가?” “지음<에서>인가 폐기에서인가, 어느 쪽에서 자기 오류를 드러낼지 그가 고르게 하라.” 그분이 막아섰다면, 그때에는 오히려 앞일을 미리 알지 못하여 속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분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처럼 허락했었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분이 인간이 자기가 지어진 상태를 악하게 쓸 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 지음이 어떠하든 지음에 대한 진중함과 신실함보다 하나님에게 더 합당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잘 받은 것을 잘 결산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일이었을 것이다.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율법 앞에서 죄 있는 자는 인간 자신이었을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입법자 자신이 율법의 규정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율법을 무력하게 만들어야 했겠는가? 창조주가 그대가 요구하는 그 섭리와 능력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가로막았다면 그대는 창조주를 향해 이런 말을 매우 그럴듯하게 늘어놓았을 터이니, 이제는 자기 지음<에서>, 그것이 이성적이고도 선한 지음이므로, 진중함과 [인내와] 신실함을 지켜 행한 창조주를 위해 그대 자신에게 속삭여 보라. 번역 주석 1. 7.2-7.3의 grauitas는 한번 정한 것을 가볍게 뒤집지 않는 무게와 일관성을 뜻하므로 “진중함”으로, fides는 자기가 세운 것에 대한 신실함으로 옮겼다. 2. 7.3의 bonis et rationalibus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boni sed로 읽는다. 3. 7.8은 창 2:16-17(나무에 대한 금령)과 창 3:1-6(뱀과 여자의 대화)을 가리킨다. 4. 7.9-7.11의 인용은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정하여 마르키온의 입에 넣은 말이다. 7.11의 <에서>는 Gelenius가 보충한 전치사 in을 옮긴 것이다. 5. Kroymann은 7.12-7.15(nonne tunc ... impleri)를 이전 판의 잔재로 보았다. 7.16의 peroraturus in creatorem이 7.9의 마르키온의 외침 바로 뒤에 이어질 때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6. 7.15의 dispunxisset는 Rigaltius의 수정(사본 depinxisset, depunxisset)으로, 장부를 결산하다는 회계 용어이므로 “결산하다”로 옮겼다. 같은 절의 non au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non ut로 읽는다. 7. 7.16의 qua exigis는 Kroymann의 수정(사본 quas)이다. [인내와]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et patientiam이며, <에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7 8 그분은 인간을 오직 사는 데까지만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바르게 사는 데까지, 곧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고려하여 바르게 사는 데까지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를 살아 있는 영혼으로 만듦으로써 사는 것은 몸소 그에게 주었고, 바르게 사는 것은 율법에 순종하도록 그에게 권고함으로써 명령했다. 이처럼 지금<도> 인간이 생명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며 죄인의 죽음보다 그의 뉘우침을 원하는 분은, 인간이 죽음을 향해 지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의 상태를 입혔듯이,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상태를 끌어들였다. 그것도 연약함 때문이 아니었고 무지 때문도 아니었으니, 만든 이에게 아무것도 전가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꾀어낸 자가 천사였다 하더라도, 꾀임을 받은 자는 자유롭고 자기 권능을 지닌 자였고, 천사보다 강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으며, 천사들을 이루는 물질적인 영보다 고귀한 하나님의 숨이었기 때문이다. - “그는 천사들을 영으로, 시종들을 타오르는 불꽃으로 삼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 그분은 다스리기에 연약하고 천사들보다 낫지 않은 인간에게 만물을 복종시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에게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복종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 율법이 무겁다 하더라도 -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는 자에게 율법의 무게를 지우지 않았을 것이고, 연약함을 이유로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그분이 아는 자라면 그를 죽음의 선고로 다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끝으로, 그분이 인간을 연약하게 만들었다면 의지의 자유와 권능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결여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인간, 같은 영혼의 실체, 같은 아담의 상태를, 같은 의지의 자유와 권능이 오늘날 같은 마귀를 이기는 승리자로 만든다. 그 자유와 권능이 하나님의 율법들에 순종하는 가운데 운용될 때 그러하다. 번역 주석 1. 8.1의 첫 낱말 usque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neque로 읽는다. Kroymann은 이 문장을 “하나님은 인간을 살 수 있는 데까지만 존재하게 했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2. 8.2의 “살아 있는 영혼”(anima uiua)은 창 2:7을 가리키며, 개역개정은 “생령이 되니라”로 옮긴다. 3. 8.3은 겔 18:23; 33:11(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함)과 벧후 3:9를 반영한다. <도>는 Kroymann이 보충한 et이다. 4. 8.5의 인용은 시 104:4(불가타 103:4)이며 히 1:7에도 인용된다. 개역개정 시 104:4는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고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며”로 옮기나, 테르툴리아누스는 spiritus를 천사들이 이루어진 물질적 영으로 읽어 논증에 사용하므로 라틴 본문대로 “영”으로 옮겼다. 5. 8.5의 “만물을 복종시키다”는 창 1:26, 28과 시 8:6의 인간 통치권을 가리킨다. 6. 8.7의 eum은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cum으로 읽는다. Kroymann은 끝 문장의 어순을 sed potius defectione earum fecisset infirmum으로 바꾸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8 9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창조주의 실체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숨, 곧 영혼이 인간 안에서 죄를 지었고, 부분의 부패는 근원인 전체에 돌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영혼의 성질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헬라어 성경이 표시해 둔 것, 곧 그것을 영이 아니라 숨이라고 부른 것을 붙들어야 한다. 헬라어에서 번역하는 어떤 이들은 그 차이를 다시 생각하지도 않고 낱말의 고유한 뜻에 마음을 쓰지도 않은 채 숨 대신 영이라고 써서, 이단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곧 하나님 자신을 죄로 더럽힐 빌미를 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이용당했다. 그러므로 숨이 영보다 작다는 것을 이해하라. 숨은 이를테면 영의 작은 미풍이어서, 영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 영은 아니다. 미풍도 바람보다 엷고, 미풍이 바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바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풍.] 입김을 영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의, 곧 영의 형상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김은 영의 형상이다. 그런데 형상이 실재와 모든 점에서 같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실재를 따라 존재하는 것과 실재 자체인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숨도 영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실재, 곧 영, 곧 하나님에게 죄가 없으니 형상, 곧 숨, <곧 인간도> 죄를 범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할 만큼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견줄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형상은 실재보다 작고 숨은 영보다 낮을 것이다. 숨은 분명 하나님의 저 윤곽들을 지니고 있으니, 불멸한다는 점, [영혼이] 자유롭고 자기 의지를 지닌다는 점, 흔히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 이성적이어서 이해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들에서도 그것은 형상이며 신성의 능력 자체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죄로부터 온전한 상태에까지도 이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곧 실재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만은 형상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형상은 실재의 모든 윤곽을 표현하더라도 움직임을 지니지 않아 능력 자체는 결여하듯이, 영의 형상인 영혼도 영의 능력 하나만은, 곧 죄를 짓지 않는 복된 상태만은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영일 것이고, 영혼을 받은 자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일 것이다. 게다가 달리 보아도,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숨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유로 숨도 하나님, 곧 죄가 없는 것이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대도 피리에 입김을 불어넣는다고 해서, 그대의 영혼에서 불어넣었다 하더라도 피리를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영에서 불어넣은 것도 그러하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이 사람의 얼굴에 불어넣으니 사람이 살려 주는 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때, 성경은 영혼을 그것을 만든 이의 조건과 구별했다. 작품은 장인과 다른 것, 곧 장인보다 못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기장이가 만든 항아리가 그 자체로 토기장이가 되지 않듯이, 영이 만든 숨도 그렇다고 해서 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입김이 영혼이라고 불렸다는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이 숨의 조건에서 더 낮은 어떤 성질로 다시 옮겨 간 것은 아닌지 보라. 그대는 말한다. “그러니 그대는 앞에서 부정한 연약함을 영혼에게 돌렸다.” 물론이다. 그대가 영혼이 하나님과 같기를, 곧 죄에서 면제되기를 요구할 때 나는 영혼이 연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사와 견주는 데로 논의가 옮겨 가면, 나는 만물의 주인인 인간이 더 강하다고 변호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이미 천사들이 섬기고 있고, 그는 천사들까지 심판할 것이다. 처음에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 곧 하나님의 율법 안에 굳게 서 있으면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숨은 바로 이것을 범할 수 있었다. 할 수는 있었으나, 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체의 가냘픔 때문이니, 그것은 영이 아니라 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은 의지의 권능 때문이니, 그것은 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으리라는 위협과 함께 죄를 짓지 말라는 지시가 곁에 있었으니, 이로써 실체의 가냘픔은 떠받쳐지고 판단의 자유는 인도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영혼이 하나님과 닮은 그것을 통해 죄를 지었다고 볼 수는 없다. 곧 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체에 덧붙여진 것을 통해서 죄를 지었다. 곧 자유 의지를 통해서이니, 그것은 하나님이 이성적으로 부여했지만 인간이 자기 원하는 대로 휘두른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모든 안배는 이제 악에 대한 비난에서 깨끗해진다. 의지의 자유는 자기 허물을 그것을 준 이에게 떠넘기지 않고,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운용하지 않은 자에게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창조주에게 무슨 악을 기록하겠는가? 인간의 죄라면, 인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닐 것이고, 금지한 이, 아니 정죄한 이로 드러나는 분을 죄의 장본인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죽음이 악이라면, 죽음도 그것으로 위협한 이가 아니라 그것을 업신여긴 자에게 그 장본인으로서 미움을 돌릴 것이다. 그는 업신여김으로써 죽음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가 업신여기지 않았다면 죽음은 분명 오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9.1의 quoquo tamen modo를 Engelbrecht는 aliquo tamen modo(“어떤 식으로든”)로 풀었고, Kroymann은 그 앞에 탈문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번역은 전해진 본문을 따랐다. 2. 9.2-9.3의 “헬라어 성경”은 창 2:7 칠십인역의 πνοὴ ζωῆς(생명의 숨)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πνοή를 adflatus(숨)로, πνεῦμα를 spiritus(영)로 구별하며, 일부 라틴어 번역이 πνοή를 spiritus로 옮겨 하나님의 영 자체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비판한다. 3. 9.5의 어순은 Kroymann이 고친 것이다(사본: etsi de spiritu accidit ut aurulam eius). aurula는 aura(미풍)의 지소형이므로 “작은 미풍”으로 옮겼다. 4. 9.7의 [미풍.]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aura이다. capit는 테르툴리아누스에서 “~할 수 있다, ~가 허용된다”(licet)의 뜻으로 쓰인다. 5. 9.8의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이다”는 요 4:24를 반영한다. 9.8-9.13의 ueritas는 형상(imago)과 대비되는 원본, 곧 실물을 뜻하므로 “실재”로 옮겼다. 6. 9.10은 Kroymann의 재구성이다. 사본 MR은 ideo et adflatus id est imago로 읽으며, Kroymann이 ideo et imago, id est adflatus, 로 고쳤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가리키며, Ciacconius는 comparare 대신 compariare를 제안했다. 7. 9.11의 [영혼이]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은 anima이다. 8. 9.13의 felicitas는 사본의 읽기이며 Pamelius는 facultatem(능력)으로 고쳤다. 사본대로 “복된 상태”로 옮겼다. 9. 9.17은 창 2:7(“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과 고전 15:45(“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를 대비한다. 10. 9.19의 토기장이와 그릇 비유는 사 29:16; 45:9; 롬 9:20-21을 떠올리게 한다. 11. 9.21의 “앞에서 부정한 연약함”은 8.4에서 인간이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한 진술을 가리킨다. 12. 9.22의 “천사들이 섬기고 있다”는 히 1:14, “천사들까지 심판할 것이다”는 고전 6:3을 가리킨다. 13. 9.24의 “죽으리라는 위협”은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를 가리킨다. 14. 9.28의 habet은 레오폴트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habent로 읽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9 10 그러나 그대가 악의 죄목을 인간에게서 마귀에게로, 곧 범죄를 부추긴 자에게로 옮겨 적[지 않]는다 해도, 그리하여 이렇게 해서도 창조주를 마귀를 지은 자로 삼아 그에게 탓을 돌리려 한다 해도 - “천사들을 영으로 삼으시는 이”<라고 그는 말한다> -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지음 받은 것, 곧 천사라는 것은 그것을 지은 이에게 속하겠지만, 하나님에게서 지음 받지 않은 것, 곧 마귀, 곧 고발자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고발함으로써, 그것도 거짓으로 고발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결론만 남는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모든 나무에서 먹지 못하게 했다고, 다음으로는 그들이 먹더라도 죽지 않을 것처럼, 셋째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성을 시기한 것처럼 고발했다. 그렇다면 인간을 향한 거짓말과 속임의 악의, 하나님을 향한 비방의 악의는 어디서 왔는가? 분명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천사도 선한 작품들의 형태에 따라 선하게 세웠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마귀가 되기 전에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로 소개된다. 지혜가 악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스겔의 예언을 펼쳐 보면, 그 천사가 지음 받은 바로는 선했고 스스로 타락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두로 왕이라는 인물을 빌려 마귀를 향해 이렇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말씀하셨다. 인자야, 두로 왕을 두고 애가를 지어 말하라. 주가 이같이 말한다. 너는 모양의 인장이다 - 곧 형상과 모양의 온전함을 봉인을 뜯듯 깨뜨린 자이다 - 아름다움의 면류관이다 - 이는 천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천사장,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에게 하는 말이다 -. 너는 네 하나님의 낙원의 즐거움 속에서 태어났다. - 실로 거기다. 하나님이 생물의 형태를 두 번째로 빚을 때 천사들을 만들었던 곳이다. - 너는 가장 좋은 돌을 입었다. 곧 홍옥수, 황옥, 녹옥, 석류석, 청옥, 벽옥, 호박, 마노, 자수정, 귀감람석, 녹주석, 호마노이다. 너는 금으로 네 곳간과 네 보물 창고를 채웠다. 네가 지음 받은 날부터, 내가 너를 그룹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두었을 때, 너는 불타는 돌들 가운데 있었다. 너는 지음 받은 날부터 네 날들 동안 흠잡을 데가 없었다. 네 상해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러했다. 너는 네 장사가 많으므로 네 창고들을 채웠고 범죄하였다.” 등등. 이 말들이 저 군주가 아니라 천사를 꾸짖는 데 본래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의 낙원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아담 자신도 그렇지 않아 오히려 그리로 옮겨졌으며, 누구도 그룹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산, 곧 하늘의 높은 곳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 역시 사탄이 그곳에서 떨어졌다고 증언한다. 또 누구도 불타는 돌들 사이, 곧 타오르는 별들의 보석처럼 빛나는 광채 사이에 머물지 않았다. 사탄은 그곳에서 번개처럼 내던져졌다. 오히려 죄 지은 한 사람의 인물 속에서 범죄의 장본인 자신이 지목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는 지음 받은 날부터 흠잡을 데가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피조물을 짓는 선한 조물주에게서 지음 받은 자답게 하나님에게서 선하게 지음 받았고, 천사의 모든 영광으로 꾸며졌으며, 선한 자로서 선한 이 곁에 있도록 하나님 곁에 세워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 자신에 의해 악으로 옮겨졌다. “네 상해들이 드러난 그때부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상해들을 그에게 돌리는데, 곧 그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꾀어낸 인간을 해친 그 상해들이다. 그는 범죄의 씨를 뿌린 그때부터 범죄하였고, 그리하여 그때부터 자기 장사, 곧 자기 악의의 많음을 부렸다. 곧 범죄들의 재산을 불렸다. 그 자신도 인간 못지않게 영으로서 자유 의지를 지니도록 세워졌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어떤 것도 이러한 자유 없이 정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미리 정죄함으로써, 그가 자기 욕망으로 스스로 품은 악의 때문에 지음 받은 형태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하였고, 그의 활동에 기한을 재어 줌으로써 자기 선함의 이치대로 행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회복을 미루는 것과 같은 계획으로 마귀의 소멸을 미루었다. 하나님은 싸움에 시간을 주었다. 인간이 원수에게 굴복했던 그 의지의 자유로 원수를 쳐부수어, 그 탓이 자기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그렇게 승리를 통해 구원을 마땅하게 되찾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마귀가 전에 자기가 쳐부수었던 자에게 패배하여 더 쓰라리게 벌을 받고, 하나님은 더 영광스러워진 인간이 이 생에서 낙원으로 돌아와 생명나무를 따 먹도록 허락받기를 기다림으로써 그만큼 더 선한 이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번역 주석 1. 10.1의 삽입구는 시 104:4를 인용한다. 칠십인역(103:4)과 라틴어 역본은 “천사들을 영으로 삼으시는 이”로 읽고, 개역개정은 히브리어를 따라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며”로 옮긴다. inquit는 Kroymann의 보충이므로 <라고 그는 말한다>로 표시했다. 2. 10.1의 [non]은 사본 M과 R1에 있고 R3에는 없으며,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non을 빼면 “옮겨 적는다 해도”가 되어 이어지는 논증과 맞는다. 번역에서는 부정 부분을 [지 않]으로 표시했다. Junius는 etsi nunc로 읽었다. 3. 10.2의 “고발자”는 delator이다. diabolus는 그리스어 diabolos(중상하는 자, 고발자)에서 온 말이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마귀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으로 고발한 행위에서 생겼고 따라서 그가 스스로 마귀가 되었다고 논증한다. 4. 10.3의 세 가지 거짓 고발은 창 3:1, 4, 5의 뱀의 말을 따른다. 5. 10.6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겔 28:3, 12를 가리킨다. Kroymann은 denique를 nam의 뜻으로 보며, “실로”로 옮겼다. 6. 10.8-10.16은 겔 28:11-16을 칠십인역에 가까운 라틴어 본문으로 인용하므로 개역개정과 문구가 다른 곳은 라틴어대로 옮겼다. princeps Sor는 개역개정을 따라 “두로 왕”으로 옮기되, 10.16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인간 군주와 천사를 대비하는 대목에서는 “군주”로 옮겼다. 줄표 사이의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이다. 7. 10.10의 resignaculum similitudinis는 칠십인역 겔 28:12의 aposphragisma homoiōseōs(모양의 인장)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resignare(봉인을 뜯다)의 뜻을 살려 마귀를 창 1:26의 형상과 모양의 온전함을 깨뜨린 자로 풀이하므로, 해설 부분을 “봉인을 뜯듯 깨뜨린 자”로 옮겼다. 8. 10.12의 “생물의 형태를 두 번째로 빚을 때”(in secunda animalium figurae formatione)는 창 2:19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짐승과 새를 빚는 장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천사의 창조를 낙원과 그 시점에 연결한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9. 10.13-10.14의 열두 보석 목록은 칠십인역 겔 28:13을 따른다. 히브리어 본문과 개역개정에는 아홉 보석이 나온다. lyncurium은 Rigaltius의 교정이며 사본 M은 lycirium, R은 ligurium으로 읽는다. 10. 10.14와 10.16의 cum Cherub imposui te, cum Cherub impositus는 Oehler의 교정이고, 사본 M과 R은 cherubin posui, cherubin positus로 읽는다. Engelbrecht는 테르툴리아누스가 Cherubin을 단수로 썼다고 보아 사본 독법을 지지한다. 칠십인역 겔 28:14은 “그룹과 함께 내가 너를 두었다”로 읽으며, 이에 따라 옮겼다. 11. 10.15와 10.18의 laesurae는 칠십인역 겔 28:15의 adikēmata(불의한 행위들)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laedere(해치다)와 연결하여 마귀가 인간에게 입힌 해로 풀이하므로(10.18 laesit hominem) “상해들”로 옮겼다. 12. 10.16의 promae(창고들)는 칠십인역 겔 28:16의 tameia에 해당한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졌다는 말은 눅 10:18이다. 13. 10.18의 electum은 사본 독법이며 Kroymann은 elicitum(꾀어낸)의 뜻으로 본다. Ciacconius는 eiectum(내쫓긴)으로 고쳤다.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꾀어낸”으로 옮겼다. 14. 10.19의 delictorum censum은 Oehler의 교정이며 사본 M과 R은 scilicet et censuum으로 읽는다. census를 재산으로 보아 앞의 negotiatio(장사)와 이어지도록 “범죄들의 재산을 불렸다”로 옮겼다. 15. 10.20의 praedamnando는 사본 M과 R의 독법이고 F는 non praedamnando로 읽는다. 하나님이 마귀를 미리 정죄한 일은 창 3:14-15의 뱀에 대한 저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6. 10.23의 sustinens는 Kroymann의 설명대로 expectans(기다리다)의 뜻으로 옮겼다. de uita는 지상의 생에서 떠나 낙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이 생에서”로 옮겼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허락은 창 3:22-24와 계 2:7을 배경으로 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0 11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범죄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선하기만 했고, 그 뒤로는 재판관이요 엄격하며, 마르키온파가 바라는 대로 말하자면 잔혹하다. 곧바로 여자는 고통 속에서 출산하고 남편을 섬기도록 정죄된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전에 아무 슬픔 없이 복을 통해 자손의 번성, 곧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만을 들었던 자였고, 남자를 돕도록 정해졌지 섬기도록 정해진 자가 아니었다. 곧바로 땅도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전에는 복을 받았다. 곧바로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난다. 그러나 전에는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있었다. 곧바로 땀과 수고로 빵을 얻는다. 그러나 전에는 모든 나무에서 값없이 먹을 것을 얻었고 양식은 걱정이 없었다. 그 뒤로 인간은 흙을 향하나, 전에는 흙에서 나왔다. 그 뒤로는 죽음을 향한다. 그러나 전에는 생명을 향했다. 그 뒤로는 가죽옷을 입었으나, 전에는 거리낌 없이 벌거벗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함은 본성에 따라 먼저 있고, 엄격함은 원인에 따라 나중에 있다. 앞의 것은 타고난 것이고 뒤의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며, 앞의 것은 고유한 것이고 뒤의 것은 사정에 맞춘 것이며, 앞의 것은 내어 보인 것이고 뒤의 것은 덧붙여 쓴 것이다. 본성이 선함을 활동하지 않은 채 가두어 두어서도 안 되었고, 원인이 엄격함을 감춘 채 넘어가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걸맞게, 다른 하나는 사태에 걸맞게 나타냈다. 이제 그대는 재판관의 지위도 악과 가까운 것으로 고발하기 시작해 보라. 그대는 재판관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오직 선하기만 한 다른 신을 꿈꾸었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 신도 재판관이라는 것을, 아니면 재판관이 아니라면 분명 보복되지 않는, 곧 심판되지 않는 계율을 세운 비뚤어지고 헛된 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재판관이 아닌 신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대가 재판관인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틀림없이 재판관을 만드는 정의 자체를 고발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 그것을 악의 종류에 셈해 넣어 보라. 곧 불의를 선함의 항목에 적어 넣어 보라. 불의가 선이라면, 그때에야 정의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가 불의를 가장 나쁜 것들 가운데 하나로 선언할 수밖에 없다면, 같은 멍에에 눌려 정의를 가장 좋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악에 맞서는 것치고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마찬가지로 선에 맞서는 것치고 악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의가 악인 만큼 정의는 선이다. 또 정의는 선함의 한 종류로만이 아니라 선함의 보호자로 여겨져야 한다. 선함은 정의롭도록 정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불의할 경우 선함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한 것은 어떤 것도 선하지 않으나, 정의로운 것은 모두 선하다. 번역 주석 1. 11.2-11.7은 창 3:16-19, 21의 벌을 범죄 이전의 복과 대조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인간에게 한 복인 창 1:28이며(Kroymann은 1:22를 표시한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자로 정한 것은 창 2:18, 모든 나무에서 얻는 먹을거리는 창 1:29; 2:16이다. 2. 11.2의 tantum(“만을”)은 여자가 범죄 전에 들은 말이 출산의 고통이 아닌 번성의 복뿐이었다는 뜻으로 보아 “그 말만을 들었던”으로 옮겼다. 3. 11.4의 arborum fructuosa는 Engelbrecht의 설명대로 arbores fructuosae(열매 맺는 나무들)로 옮겼다. 4. 11.6의 exinde-terra 부분은 사본 M에 빠져 있다. 5. 11.8의 seueritas posterior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seuerior posteritas로 읽는다. 6. 11.12에서 “우리는 보여 주었다”는 제1권에서 마르키온의 신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계율이 헛되다고 논증한 대목(I.26-27)을 가리킨다. 첫 aut는 Kroymann이 사본의 ut를 고친 것이다. 7. 11.13은 Engelbrecht의 풀이대로 심판하지 않는 신을 인정한다고 해서 심판하는 하나님이 제거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옮겼다. 8. 11.14의 † 자리는 사본 M의 aut da eam이다. R1은 aut det eam, R3은 aut et eam, Engelbrecht는 aut eandem으로 읽는다. Kroymann은 “악의 종류에 셈해 넣는 것”이 앞의 “고발하다”와 내용상 다르지 않은데 aut로 대등하게 이어지는 점을 문제로 보고, aut를 빼고 aude eam(감히 그것을 셈해 넣어 보라)으로 고칠 가능성을 제시한다. 번역은 전해진 da를 명령으로 보아 “셈해 넣어 보라”로 옮기고 †를 그 앞에 두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1 12 이처럼 선함과 정의의 결합과 일치가 그 둘의 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대는 무슨 입으로 분리를 근거로 두 신의 차이를 세우며, 선한 신을 따로, 정의로운 신을 따로 셈하겠는가? 선은 정의로운 것이 있는 곳에 있다. 실로 창조주는 처음부터 선하면서 또한 정의로웠다. 둘은 함께 나아왔다. 그의 선함은 세상을 만들어 냈고, 정의는 그것을 조율하였다. 정의는 세상을 선한 것들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에도 [왜냐하면] 선함의 계획과 함께 판단하였다. 빛과 어둠 사이에, 낮과 밤 사이에, 하늘과 땅 사이에,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사이에, 바다의 모임과 뭍의 덩어리 사이에, 큰 광명과 작은 광명, 곧 낮의 광명과 밤의 광명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죽음의] 앎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 사이에, 세상과 낙원 사이에, 물에서 난 생물과 땅에서 난 생물 사이에 분리가 선언된 것은 정의의 일이다. 선함이 모든 것을 구상한 대로 정의는 그것을 구별하였다. 이 전체가 판단에 따라 배치되고 질서 지어졌다. 각 원소의 모든 위치, 상태, 작용, 운동, 정지, 떠오름, 짐이 창조주의 판단이다. 이는 그대가 창조주를 악이 시작된 때부터 재판관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 그렇게 하여 악이라는 원인으로 정의를 흐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들로, 정의가 모든 것의 원천인 선함과 함께 나왔으며, 그러므로 정의 자체도 하나님에게 타고난 것이고 본성적인 것이지 나중에 덧붙은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정의는 주 안에서 그의 일들을 판정하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12.1의 non potest capere는 Kroymann이 Latinius를 따른 독법이며, 사본 M과 R은 non potest carere, Oehler는 non potes cauere로 읽는다. 사본 M은 earum 대신 eorum으로 쓰고 여백에 earum을 적었다. 2. 12.3의 [quia]는 Kroymann이 삭제한 말로 [왜냐하면]으로 표시했다. dum은 사본 독법이고 Gelenius는 tum으로 읽었다. 3. 12.4는 창조의 분리들을 열거한다. 빛과 어둠(창 1:4), 낮과 밤(1:5), 하늘과 땅, 위의 물과 아래의 물(1:6-8), 바다와 뭍(1:9-10), 큰 광명과 작은 광명(1:16), 남자와 여자(1:27), 지식의 나무와 생명나무(2:9), 세상과 낙원(2:8), 물의 생물과 땅의 생물(1:20-25)이다. [그리고]로 옮긴 et는 Gelenius를 따라 Kroymann이 의심한 말이고(사본 M과 R은 feminam et), [죽음의]로 옮긴 mortis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다. 4. 12.6의 elementorum은 사본에서 habitus 뒤에 있으나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ne는 M의 독법이고 R은 nec로 읽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2 13 그런데 나중에 악이 터져 나오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선함이 대적과 상대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바로 그 정의는 또 다른 일을 얻게 되었다. 이제는 대적에 맞서는 상황에 따라 선함을 이끄는 일이다. 곧 하나님이 자발적으로도 선한 그 선함의 자유는 따로 제쳐 두고, 선함이 각자의 공로에 따라 저울질되어, 합당한 자들에게는 베풀어지고,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거절되며, 배은망덕한 자들에게서는 거두어지고, 또한 모든 적대자들에 맞서 보복으로 지켜지게 하는 일이다. 이처럼 정의의 이 모든 일은 선함을 돌보는 일이다. 정의가 판단하여 정죄하는 것, 정죄하여 벌하는 것, 그대들의 말대로 잔혹하게 구는 것은 분명 악이 아니라 선에 이바지한다. 실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악이 아니라 선에 기여한다. 이미 대적 아래에서 시달리는 선이 그 자체로 권장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은 그 자체로 권장될 만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적에게 공략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선을 추구하고 지키도록 강제하는 두려움의 힘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그러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많은 악의 유혹이 선을 공략하는데, 벌 받지 않고 멸시할 수 있는 선을 누가 추구하겠는가? 위험 없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누가 지키겠는가? 그대는 악의 길이 넓고 훨씬 더 붐빈다고 읽는다. 그 길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 모두가 그 길로 미끄러져 가지 않겠는가? 우리는 창조주의 무서운 위협에 몸서리치면서도 겨우 악에서 떼어진다. 그가 아무 위협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대는 악을 편들지 않는 이 정의를 악이라고 말하겠는가? 선을 돌보는 이 정의가 선이라는 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대는 하나님이 어떠하기를 바라겠는가? 악인들에게 유리할 하나님인가? 그 아래에서 범죄들이 즐거워할 하나님인가? 마귀가 조롱할 하나님인가? 그대는 범죄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으로 인간을 더 악하게 만들 수 있는 신을 선한 신이라고 판단하겠는가? 선을 요구하기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가 선의 장본인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악의 원수이기도 한 이가 아니라면 누가 악과 무관한 자이겠는가? 악을 공격하기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가 원수이겠는가? 벌하기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가 공격하는 이이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은 선을 위해 모든 것이 됨으로써 전적으로 선하다. 이렇게 결국 그는 도울 능력도 해칠 능력도 있으므로 전능하다. 오직 이롭게 하기만 하는 것은 그보다 못하다. 이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이것만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슨 확신으로 그에게서 선을 바라겠는가? 죄 있음에 대한 삯도 내다보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무죄함의 상급을 좇겠는가? 양쪽을 다 할 힘이 없었던 자가 한쪽도 갚아 주지 못할까 하여 나는 불신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정의는 신성 자체의 충만이기도 하며, 하나님을 완전한 이, 곧 아버지이자 주로 드러낸다. 그는 자비로는 아버지요 훈육으로는 주이며, 부드러운 권능으로는 아버지요 엄한 권능으로는 주이며, 효성으로 사랑받아야 할 아버지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주이다. 그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므로 사랑받아야 하고, 죄를 원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해야 하며,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하므로 사랑받아야 하고, 자기에게 속한 죄인들이 이제는 뉘우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둘 다 규정한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율법은 하나는 순종하는 자에게, 다른 하나는 벗어나는 자에게 내놓았다. 번역 주석 1. 13.1의 aduersationem은 Engelbrecht의 독법이며(제1권의 같은 표현 참조), 사본 M과 R은 aduersionem, 스칼리게르는 auersionem으로 읽는다. seposita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se possit a로 쓴다. 2. 13.2의 “그대들의 말대로 잔혹하게 구는 것”은 11.1에서 마르키온파가 창조주를 saeuus(잔혹하다)라고 부른 것을 받는다. 3. 13.7의 넓고 붐비는 악의 길은 마 7:13이다. 사본 F에는 quis-amitteret가 빠져 있다. 4. 13.10의 prospicit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non prospicit로 읽는다. Engelbrecht는 oportet를 oporteret로 고칠 것을 제안했다. 5. 13.11의 malis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은 males, R은 malles, Oehler는 malle로 읽는다. malis를 여격 복수로 보아 “악인들에게 유리할 하나님인가”로 옮겼다. malles를 따르면 “그대는 어떤 하나님을 더 원하겠는가”가 되고, 통용본은 expediret 뒤에서 문장을 끊는다. 6. 13.16은 omnipotens(전능하다)를 iuuandi et laedendi potens(도울 능력도 해칠 능력도 있다)로 풀어 potens의 말놀이를 살린다. 7. 13.18은 innocentia(무죄함)와 nocentia(죄 있음)를 맞세운다. spectem은 R3의 독법이고 M, G, R1은 speciem으로 읽는다. remuneret는 M의 독법이며 R과 통용본은 remuneretur로 읽는다. 8. 13.19의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호 6:6(잠 21:3 참조),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한다”는 겔 33:11을 반영한다. 개역개정은 겔 33:11에서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로 옮긴다. 둘째 dominum은 R의 독법이고 M은 deum으로 읽는다. 9. 13.20의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 6:5(마 22:37; 막 12:30; 눅 10:27),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레 19:14, 32이다. 개역개정은 레 19:14, 32를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로 옮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3 14 모든 일에서 같은 하나님이 그대와 마주친다. 그는 치되 낫게도 하고, 죽이되 살리기도 하며, 낮추되 높이기도 하고, 악을 짓되 평화도 이룬다. 이 점에서도 이단들에게 대답하려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보라, 그는 ‘나는 악을 짓는 자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악을 짓는 자임을 고백한다.” 그들은 한 낱말을 함께 쓰는 탓에 두 종류의 악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점을 붙잡고서, 범죄도 형벌도 악이라 불리므로, 그를 가리지 않고 악을 짓는 자로 이해하려 하고, 그리하여 그가 악의의 장본인으로도 선언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형태를 구별하여 범죄의 악과 형벌의 악, 잘못의 악과 벌의 악을 나누고, 각 부분에 저마다의 장본인을 정한다. 곧 죄와 잘못의 악에는 마귀를, 형벌과 벌의 악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장본인으로 정한다. 그리하여 앞의 부분은 악의에, 뒤의 부분은 범죄의 악에 맞서 악을 짓는 심판의 정의에 돌려지게 한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고백하는 것은 재판관에게 어울리는 이 악들에 관해서이다. 이 악들은 물론 그것으로 갚음을 받는 자들에게는 악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선이다. 정의로우며, 선한 것들을 지키고 범죄들에 맞서며, 이러한 질서 안에서 하나님에게 합당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입증하라. 그래야 그것들이 악의에, 곧 불의에 돌려져야 할 악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그것들이 정의에 속한다면 더 이상 악이 아니라 선일 것이요, 악인들에게만 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것들조차 대놓고 악한 것들로 여겨 정죄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확정해 보라. 하나님의 율법을 자발적으로 멸시한 인간이 자기가 없이 지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을 돌려받은 것은 불의하고, 그 시대의 악함이 비로, 그 뒤에는 불로 쳐진 것도 불의하며, 불의하게도 가장 추악하고 미신적이며 더구나 손님으로 머문 백성을 괴롭힌 애굽이 열 겹의 징계로 맞았다고. 그는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부인했고, 이미 하나님의 사절들을 그토록 여러 번 교만하게 쫓아냈으며, 이미 백성에게 노역의 수고를 더했던 자는 멸망으로 넘겨질 만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애굽 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이방의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으니, 살아 있는 하나님보다 따오기와 악어를 먼저 섬겼다. 그는 자기 백성 자체도 내어 주었다. 그러나 그 백성은 배은망덕했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곰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에게 불경했다. 마땅히 공손해야 할 나이의 무례함은 응징되어야 했다. 번역 주석 1. 14.1은 신 32:39, 삼상 2:6-7, 사 45:7을 엮었다. 전자 원문에는 humilians sed et mans로 되어 있으나, Kroymann 1906의 353쪽 마지막 행 끝에 subli-가 있고 354쪽 첫 행이 mans로 이어진다. 인쇄면대로 sublimans(높이다)로 교정해 “높이기도 하고”로 옮겼다. 삼상 2:7의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와 같은 대구다. 2. 14.1의 et hic는 사본 독법이며 Engelbrecht는 “이 점에서도”로 풀이한다. Kroymann은 etiam et가 달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Rigaltius의 et hinc를 고려한다. 3. 14.1-14.5의 condens mala, conditor malorum은 사 45:7 “나는 악을 짓는 자다”(ego sum qui condo mala)를 따른다. 개역개정은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로 옮긴다. mala가 도덕적 악과 재앙(형벌)을 모두 가리키고 14.3-14.7의 논증이 이 이중 의미에 달려 있으므로 일관되게 “악”으로 옮겼다. 4. 14.4의 delicti ... supplicii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delictis ... suppliciis로 읽는다. iudicii는 미뉴판(van der Vliet)의 독법이며 사본 M과 R은 iudicia로 읽는다. 5. 14.8의 noluit는 M과 R1의 독법이고 R3과 통용본은 uoluit로 읽는다. 사본대로 “없이 지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을 돌려받았다”로 옮겼다. 인간이 금지된 열매로 얻으려던 것의 대가로 죽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비로, 그 뒤에는 불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창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창 19:24)을 가리킨다. 6. 14.9의 “손님으로 머문 백성”(hospes populus)은 애굽에 거류한 이스라엘이다. 열 겹의 징계는 출 7-12장의 열 재앙,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함은 출 4:21; 10:20, 사절들을 쫓아냄은 출 5:1-4, 노역을 더함은 출 5:5-14이다. sed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et로 읽으며, Engelbrecht는 indurat 대신 indurarat를 선호한다. 7. 14.10의 따오기와 악어는 고대 애굽에서 신성한 동물로 숭배되었다. 8. 14.11의 impendit et ipsum populum은 하나님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벌에 내어 준 일(민 14:29-35; 고전 10:5 참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내어 주었다”로 옮겼다. 예언자를 조롱한 아이들에게 곰을 보낸 일은 왕하 2:23-24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4 15 그러므로 먼저 재판관의 정의를 살펴보라. 그 정의의 이치가 확립된다면, 그때에는 엄격함도, 엄격함이 수행되는 수단들도 이치와 정의에 속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길게 머물지 않도록 말하자면, 판결을 정죄하려거든 [다른] 사건들도 변호해 보고, 심판을 배척하려거든 죄들을 변명해 보라. 재판관을 비난하지 말고, 그가 악한 재판관임을 논증하여 밝히라. 사실 그분이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에게서 받아 냈다 하더라도, 백성의 완고함이 그러한 처방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이 적어도 자기 후손을 내다보아서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누가 자기 안녕보다 자식들의 안녕을 더 염려하지 않겠는가? 또한 아버지들의 복이 아직 아무 공로도 없는 그들의 씨에게까지 정해져 있었다면, 아버지들의 죄책이 아들들에게도 넘쳐흐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은혜와 마찬가지로 노여움도] 온 족속에 걸쳐 은혜도 노여움도 흘러내려 가도록 말이다. 다만 나중에 정해질 것은 그대로 유효하다. 곧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떠맡지 않고 아들도 아버지의 죄를 떠맡지 않으며 각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 죄책을 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완고함이 있은 뒤에 율법의 엄함이 길들여져, 정의가 더 이상 족속이 아니라 개개인을 심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대가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에게 갚는 이의 판결이 누구에게 해당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곧 스스로 자청하여 이 판결을 자기에게 내리게 될 자들에게 해당한다. “그의 피가 우리 머리와 우리 자손의 머리 위에 있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들었던 바로 그것을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 번역 주석 1. 15.2의 ceteras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고 [ ]로 묶었으므로 ‘[다른]’으로 옮기고 괄호를 유지했다. adserere causas는 피고인의 사건을 변호한다는 법정 용어로 보아 ‘사건들도 변호해 보고’로 옮겼다. 2. 15.3의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에게서 받아 냈다’는 출 20:5; 34:7; 신 5:9의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갚되’를 가리킨다. 3. 15.4의 [sicut gratia, ita et offensa]는 Kroymann이 문장 연결을 흐트러뜨리는 구절로 보고 [ ]로 묶었다. 그는 이것을 다른 판본에서 들어온 수정, 곧 ‘ut per totum genus sicut gratia ita et offensa decurreret’로 읽으라는 수정으로 설명한다. 번역에서는 ‘[은혜와 마찬가지로 노여움도]’로 옮겨 괄호를 유지했다. 4. 15.5의 신 포도 격언은 렘 31:29-30(Kroymann은 칠십인역 장절에 따라 Hier. 38,29로 표기)과 겔 18:2-4, 20에서 온다. 개역개정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로 옮긴다. 5. 15.5의 post duritiam populi duritia legis edomita는 duritia legis edomita를 탈격 독립구로 읽어 ‘백성의 완고함이 있은 뒤에 율법의 엄함이 길들여져’로 옮겼다. 일부 번역은 ‘백성의 완고함이 율법의 엄함으로 길들여진 뒤에’로 옮기는데, 이는 edomitam을 전제하는 읽기다. 6. 15.6의 ‘진리의 복음’(euangelium ueritatis)은 마르키온이 손질한 누가복음과 대비되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온전한 복음서를 가리킨다. 15.7의 인용은 마 27:25(개역개정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이며, 마태복음은 마르키온의 정경에 없다. 7. 15.7의 homini는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omnis를 전한다. quod iam audierat의 주어는 섭리(섭리가 백성의 외침을 이미 미리 들었다)로도, 사람(사람이 율법에서 이미 그 판결을 들었다)으로도 읽을 수 있어, 번역에서는 주어를 드러내지 않았다. 8. Kroymann의 15장 난외 증언 가운데 출 32:35와 왕하 2:23-24(Kroymann의 IIII Reg.)는 앞 장 끝부분에 해당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5 16 그러므로 엄격함도 정의롭기 때문에 선하다. 재판관이 선하다면, 곧 정의롭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선한 엄격함이라는 선한 일이 그것들을 통해 수행되는 나머지 것들도 선하다. 분노든 질투든 가혹함이든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함에 마땅히 속한 것이니, 엄격함이 정의에 마땅히 속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재판관에게 수반되는 것들을 재판관의 허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재판관과 마찬가지로 그것들 자체도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의사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쇠 연장들은 베고 지지고 잘라 내고 조인다고 고발한다면 어떻겠는가? 의사는 자기 기술의 도구 없이는 의사일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잘못 베는 자, 때에 맞지 않게 잘라 내는 자, 무모하게 지지는 자를 고발하라. 그렇게 해서 그의 쇠 연장들도 나쁜 도구로서 비난하라. 그대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그것을 통해 심판하는 움직임과 감정은 무너뜨릴 때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에게서 배우지, 철학자들이나 에피쿠로스에게서 배우지 않는다. 하나님이 땅에서도 활동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 모습의 비천함을 취했다고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든 돌본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들의 견해와 멀리 떨어져 있다. 거기에서 이단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규정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분노하고 질투하고 격앙되고 격분한다면, 그렇다면 그분은 부패하기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죽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죽은 하나님을, 그럼에도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니 잘된 일이다. 인간의 것들을 근거로 신적인 것들을 미리 판정하는 자들은 지극히 어리석다. 인간 안에서는 이런 정념들이 부패를 가져오는 성질의 것으로 여겨지므로, 하나님 안에서도 같은 상태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식이다. 실체들을 구별하고, 각 실체에 그에 맞는 감정을 나누어 주라. 그 감정들은 비록 명칭으로는 공유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체들이 요구하는 만큼 서로 다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과 눈과 발에 대해서도 읽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인간의 것에 견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명칭에서 서로 묶인다는 이유로는 말이다. - 같은 지체 이름 아래서 신적 몸과 인간의 몸 사이의 차이가 큰 만큼, 신적 정신과 인간 정신의 차이도, 비록 같은 감정 명칭 아래 있더라도 그만큼 클 것이다. 인간 실체의 부패성이 인간 안에서 그 감정들을 부패하는 것으로 만드는 만큼, 신적 실체의 부패하지 않음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을 부패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그대는 분명히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분명히 그렇다”고 그대는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대는 하나님 안에 인간적인 무엇이 있다고 여기고, 모든 것이 신적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그대가 하나님임을 부정하지 않는 그분을, 그대는 인간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대는 분명히 그분이 인간 조건의 모든 성질과 다르다고 이미 판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대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숨을 받아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똑같이 인정하는데, 사람 안에 신적인 것들을 두기보다 하나님 안에 인간적인 것들을 두고,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 입히기보다 사람의 형상을 하나님에게 입힌다면 이는 몹시 뒤틀린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바로 이것, 곧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과 같은 움직임과 감정을 지니되, 하나님이 지닌 것과 같은 성질로 지니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체에 따라 그것들의 상태와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들과 반대되는 감정들, 곧 온화함, 인내, 자비, 그리고 그것들의 모태인 선함 자체를 그대들은 왜 신적인 것으로 미리 받아들이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완전하게 지니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 다른 종류들, 곧 분노와 격분을 우리는 그렇게 복되게 겪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부패하지 않음의 고유성 덕분에 복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분노하겠지만 ** 않을 것이고, 격분하겠지만 위태로워지지 않을 것이며, 움직이겠지만 뒤엎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에 대응하여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하며, 원인이 있는 만큼 감정도 써야 한다. 곧 범죄자들 때문에 분노를, 배은망덕한 자들 때문에 울분을, 교만한 자들 때문에 질투를, 그리고 악인들에게 이롭지 않은 무엇이든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길을 잃은 자들 때문에 자비를, † 돌아보지 않는 자들 때문에 인내를, 받을 만한 자들 때문에 보살핌을, 그리고 선한 이들에게 필요한 무엇이든 써야 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자기 방식으로, 곧 그분이 겪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겪는다. 그분 때문에 사람도 같은 것들을 겪되, 마찬가지로 자기 방식으로 겪는다. 번역 주석 1. 16.3 뒤에 사본 MR에는 ‘uindicanda erat procacitas aetatis uerecundiam debentis’(수치를 알아야 할 나이의 방자함은 벌받아야 했다)라는 문장이 있다. van der Vliet은 이것을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 이야기(왕하 2:23-24)를 다루는 14장 끝으로 옮겼고 Kroymann도 이를 따랐다. 이 문장은 14장 끝의 번역에 있다. 16.3의 seueritatis는 Jun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seueritati다. 2. 16.5의 ‘베고 지지고’(secent et inurant)는 R의 교정자(R3)의 읽기를 따른 것이다. M과 F는 secent tensuram, R1은 secent tonsuram을 전한다. 3. 16.7과 16.19의 motus et sensus는 ‘움직임과 감정’으로 통일했다. motus는 마음의 격동, sensus는 정서와 감정을 가리킨다. 4. 16.8-16.9는 신들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신관을 겨냥한다. ‘인간 모습의 비천함을 취했다’는 성육신을 말한다. 5. 16.11의 ‘죽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aeua aeuor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aeuo다. 6. 16.13-16.14에서 nam부터 sociantur까지를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했으므로 앞뒤에 ‘-’를 두었다. 주문장은 16.14의 quanta erit와 16.15의 tanta erit의 상관 구문으로 이어진다. 7. 16.18의 ‘숨을 받아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고’는 창 2:7(개역개정 ‘생령이 되니라’)을 가리킨다. 같은 절의 deo(하나님에게 입힌다)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eum이다. 8. 16.21의 ‘분노와 격분’(irae dico et exasperationis)은 R3의 읽기다. M과 R1은 praedico를 전한다. feliciter와 felix는 손상 없이 복된 상태를 가리키므로 ‘복되게’, ‘복되다’로 옮겼다. 9. 16.22에는 Kroymann이 결락을 표시했다. 그는 conturbabitur 또는 Engelbrecht의 exturbabitur(혼란에 빠지다, 내쫓기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므로 ‘분노하겠지만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번역에서는 ‘**’로 표시했다. 10. 16.24의 bilem(울분)은 M과 R1의 읽기다. R3와 Gelenius는 exacerbabilem을 전한다. 11. 16.25의 † non respicientes는 사본 MR의 읽기를 그대로 옮겨 ‘† 돌아보지 않는 자들’로 했다. Pamelius는 non resipiscentes(뉘우치지 않는 자들)로 고쳤다. Kroymann은 non을 지우고 respicere를 눅 9:62(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에 따라 이해하자고 제안하는데, 그렇게 읽으면 ‘뒤를 돌아보는 자들 때문에 인내를’이 된다. praestantia는 그리스어 προστασία(보호, 돌봄)에 대응하는 말로 보아 ‘보살핌’으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6 17 이렇게 살펴본 것들은 재판관 하나님의 질서 전체가 저 보편적이고 가장 높은 선함의 일꾼이며, 더 합당하게 말하자면 그 보호자임을 보여 준다. 마르키온파는 그 선함을 재판의 감정들과 떨어져 있고 그 자체로 순수한 것<으로서> 같은 하나님 안에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 위에 비를 내리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자기 해를 떠오르게 하는데, 다른 신은 이런 일을 전혀 베풀지 않는다. 마르키온이 창조주에 관한 그리스도의 이 증언마저 복음서에서 지워 버리는 대담함을 보였다 하더라도, 세상 자체가 새겨진 글이며 모든 양심이 그것을 읽는다. 그리고 창조주의 바로 이 인내가 마르키온에 대한 판결이 될 것이다. 그 인내는 죄인의 죽음보다 그의 뉘우침을 기다리고,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며, 니느웨 사람들에게 이미 정해진 멸망을 돌이키고, 히스기야의 눈물에 생명의 기한을 베풀고, 뉘우침을 행한 바벨론의 폭군에게 왕국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인내이다. 나는 저 자비를 말한다. 그 자비는 맹세 때문에 죽게 되어 있던 사울의 아들을 백성에게 내주었고, 우리아의 집에 대해 지은 죄를 고백한 다윗을 용서로 풀어 주었으며, 이스라엘 자체를 심판한 만큼 자주 회복시켰고, 꾸짖은 만큼 자주 다시 보살폈다. 그러므로 재판관만 바라보지 말고, 지극히 선한 분의 본보기들로도 눈을 돌리라. 그분이 보복할 때를 지적하는 그대는 그분이 너그러이 용서할 때도 살펴보라. 준엄함에 온화함을 맞대어 달아 보라. 창조주 안에서 그 둘이 함께 있음을 그대가 발견하면, 그대가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되는 그것도 그분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 이제 그분의 가르침과 규율과 계명과 권고를 살펴보는 데로 나아오라. 그대는 아마 이런 것들은 인간의 법으로도 정해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리쿠르고스들과 솔론들보다 앞서 모세와 하나님이 있었다. 후대치고 처음 것들에게서 받지 않는 것은 없다. 어쨌든 나의 창조주가 그대의 신에게서 이런 규정을 배운 것은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무죄함과 정결, 정의와 경건에 관한 이 으뜸가는 결정들에 더하여 인정의 규정들도 있다. 일곱째 해마다 종들이 자유를 얻어 풀려나고, 같은 때에 밭을 쉬게 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또> 곡식을 밟는 소에게도 입의 묶음을 풀어 주어 지금 하는 수고의 열매를 누리게 한다. 이는 짐승들에게서 미리 연습한 인정이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쪽으로 더 쉽게 훈련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번역 주석 1. 17.1의 는 Kroymann의 보충으로 ‘<으로서>’로 옮겼다. pluente, faciente는 사본의 pluentem, facientem을 Kroymann이 deo와 일치하도록 고친 것이다. 비와 해에 관한 말씀은 마 5:45다. catholicae는 모든 이에게 미친다는 뜻에서 ‘보편적’으로 옮겼다. 2. 17.2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없다는 사실을 마르키온의 삭제로 다룬다. 마르키온이 사용한 누가복음의 평행 본문(눅 6:35)에는 비와 해의 말씀이 없다. Kroymann은 inscriptus 앞에 (그 증언으로)를 보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3. 17.3의 인유: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겔 18:23; 33:11), 제사보다 자비(호 6:6; 잠 21:3), 니느웨(욘 3:10), 히스기야의 눈물과 연장된 생명(왕하 20:3-6), 회복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단 4:33-37). ‘마르키온에 대한 판결’(in iudicium Marcionis)은 마르키온에게 불리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4. 17.4의 인유: 사울의 맹세로 죽게 되었으나 백성이 구해 낸 요나단(삼상 14:39, 45), 우리아의 일로 죄를 고백한 다윗(삼하 12:13). populo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populi다. 5. 17.5의 optimus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에게 붙이는 칭호인데, 여기서는 창조주에게 적용하여 ‘지극히 선한 분’으로 옮겼다. 19.13의 dei optimi도 같다. 6. 17.6의 quod(그대가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되는 그것)는 Ursin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quem이다. 그것은 마르키온이 다른 신에게 돌리는 선함을 가리킨다. 7. 17.8의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솔론은 아테네의 입법자다.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 입법자들보다 오래되었다는 논증은 『호교론』 19장 등에서도 쓰인다. 8. 17.9는 출 20:12-17과 레 19:18을 인용한다. 17.10의 innocentiae et pudicitiae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innocentiae pudicitiae et로 et의 위치가 다르다. Kroymann에 따르면 innocentia(무죄함)는 ‘살인하지 말라’에 대응한다. 9. 17.10의 인유: 일곱째 해의 종 해방(출 21:2; 신 15:12), 안식년의 밭(레 25:4; 출 23:10-11),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음(신 25:4). 은 Kroymann의 보충으로 ‘<또>’로 옮겼다. humanitas는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을 뜻하여 ‘인정’으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7 18 그런데 이단이 <흔들어 놓기를> 탐냈던 것들보다 율법의 어떤 것들을 내가 더 좋은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예컨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멍은 멍으로 되갚으라고 요구하는 동해 보복의 규정이 그렇다. 이 규정은 서로 해를 가해도 된다는 방종을 풍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전적으로 억제하는 일을 내다본다. 이는 지극히 완고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원수 갚음을, 곧 나중에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될 원수 갚음을 기다리는 일이 오래 걸리거나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일로 보였으므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그동안에는 곧바로 닥칠 앙갚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를 가하는 일을 뿌리 뽑고, 보복의 허용이 도발의 금지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악행이 스스로에게서 안전하게 그치게 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이 허용되면 첫 번째 것이 겁을 먹고, 첫 번째 것이 겁을 먹고 물러서면 두 번째 것도 저질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같은 고통을 맛본다는 데서 다른 경우보다 더 쉽게 생긴다. 남에게 한 바로 그것을 당하는 것보다 쓴 일은 없다. 또 율법이 음식에서 무언가를 빼고 한때 복을 받았던 짐승들을 부정하다고 선언한다면, 절제를 훈련하려는 뜻을 이해하고, 저 식탐에 재갈을 물린 것임을 알아보라. 그 식탐은 천사들의 떡을 먹으면서도 애굽 사람들의 오이와 참외를 갈망했다. 동시에 식탐의 동반자들, 곧 정욕과 방탕에도 대비가 마련되었음을 알아보라. 그것들은 대개 배를 다스리면 식는다. - 백성은 먹고 마시고 일어나 뛰놀았던 것이다 -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도 생계의 필요를 핑계 삼는 부분에서는 꺼지도록, 값비싼 음식에 대한 야심이 제거되었다. 끝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금식하도록 더 쉽게 길들여지게 하려고, 그는 적고 화려하지 않은 음식에 익숙해졌으니, 더 호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굶주려 찾지 않게 될 것이었다. 물론 창조주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음식을 더 배은망덕한 마르키온파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 빼앗았으니 말이다. 또 아무도 제사의 짐과 의식과 예물의 번거로운 세세함을 비난하지 말라. 마치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해 바랐다는 듯이 말이다. 그분은 이처럼 분명하게 외친다. “너희의 많은 제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그리고 “누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오히려 하나님의 저 세심한 배려를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우상숭배와 범법에 기울어진 백성을, 세상의 미신이 행해지던 바로 그런 종류의 의무들로 자기 예배에 묶어 두고자 했다. 이는 그들을 미신에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으니, 그분은 마치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자기에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하여, 백성이 우상들에게 그것을 행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게 했다. 번역 주석 1. 18.1의 concupiit는 Kroymann의 보충이고 사본은 concupiit(탐냈다)만 전한다. 보충된 부분을 ‘<흔들어 놓기를>’로 옮겼다. Kroymann의 주에 따라 bona는 서술어로 보아 ‘더 좋은 것으로 변호하겠는가’로 옮겼다. 2. 18.2의 동해 보복 규정은 출 21:24-25를 가리킨다. liuor는 맞아서 생긴 멍으로, 개역개정은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라고 옮긴다. 3. 18.3-18.4의 defensa는 원수 갚음, 신원을 뜻한다. 18.4의 인용은 신 32:35(롬 12:19; 히 10:30에 인용, 개역개정 롬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이다. ‘예언자’는 신명기의 노래를 전한 모세를 가리킨다. 4. 18.4의 repastinaretur는 땅을 다시 파 뒤집는다는 농사 용어로, ‘뿌리 뽑고’로 옮겼다. 5. 18.5의 a se tuta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 MG와 R3는 astuta, R은 aestuata, Oehler는 extincta를 제안했다. a se tuta를 따라 ‘스스로에게서 안전하게’로 옮겼는데, 악행이 실제 보복을 겪지 않고도 그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같은 절의 eiusde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eundem이다. 6. 18.6의 ‘한때 복을 받았던 짐승들’은 창 1:22; 9:3을, 부정한 짐승의 규정은 레 11장과 신 14장을 가리킨다. 18.7의 ‘천사들의 떡’은 시 78:25(칠십인역과 라틴어역 77:25 ‘panem angelorum’, 개역개정 ‘힘센 자의 떡’)이고, 오이와 참외는 민 11:5다. 7. 18.9의 삽입구는 출 32:6(개역개정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이며 Engelbrecht가 삽입구로 표시했다. 같은 절의 est(제거되었다)는 Kroymann의 수정으로 사본은 et, van der Vliet은 ut를 제안했다. 8. 18.11은 반어다. 마르키온파는 혼인과 특정 음식을 금하는 금욕을 실천했으므로, 창조주가 음식을 금한 일을 비난하는 그들의 태도를 꼬집는다. 9. 18.13은 사 1:11-12를 인용한다. 18.14의 faciendo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faciendis다. religioni suae는 그분에 대한 예배, 경신 행위를 뜻하여 ‘자기 예배’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8 19 또한 그분은 인간의 삶과 생활의 교류 자체 안에서도, 집 안팎에서, 작은 그릇들을 돌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식으로 구분을 정했다. 이는 이 율법의 규율들이 어디서나 마주쳐, 그들이 한순간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뜻이 주의 율법에 있고, 주의 율법을 그가 밤낮으로 묵상하리라”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람을 복되게 하겠는가? 이 율법을 공포한 것은 제정자의 가혹함이 아니라 가장 높은 자애의 이치였다. 그 자애는 오히려 백성의 완고함을 길들이고, 순종에 서툰 믿음을 수고로운 의무들로 다듬었다. 율법의 숨은 의미들, 곧 영적이고 예언적이며 거의 모든 내용에서 예표로 짜인 율법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건드리지 않더라도 그렇다. 지금으로서는 율법이 단순히 사람을 하나님에게 묶어 주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율법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율법의 이 혜택, 곧 짐이 아닌 혜택을 돕도록, 하나님의 같은 선함은 예언자들도 세웠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들을 가르쳤다. 곧 영혼에서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고, 공의를 구하고,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신원하며, 변론을 사랑하고, 악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짓눌린 자를 온전히 놓아 주고, 불의한 증서를 찢어 버리고, 주린 자에게 떡을 떼어 주고 집 없는 자를 네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의 집안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혀를 악에서 금하고 입술을 금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게 하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찾아 그것을 따르며, 분노하되 죄를 짓지 않는 것, 곧 분노 속에 머물거나 날뛰지 않는 것, 불경한 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해독을 끼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보라, 형제들이 하나 되어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즐거운가.” 밤낮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하면서 말이다. 물론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상은 어떠한가? “그는 물길 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제때에 열매를 맺고 그 잎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 형통할 것이다.” 또한 무죄하고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받지 않고 이웃에게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을 자, 그는 주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자 하나님께 자비를 받을 것이다.” “주의 눈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 그분의 자비에 소망을 두는 자들 위에 있어, 그들의 영혼을 죽음에서”, 곧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시고, 굶주림 속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신다”, 곧 영원한 생명의 굶주림 속에서. “의인들의 환난이 많으나 주께서 그 모든 것에서 그들을 건지실 것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 앞에서 존귀하다.” “주께서 그들의 모든 뼈를 지키시니, 그것들이 꺾이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자기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의 그토록 많은 성경 가운데 이 몇 가지를 끌어왔다. 이제 지극히 선한 하나님에 대한 증언에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함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이것을 충분히 확증한다. 번역 주석 1. 19.1의 ‘작은 그릇들을 돌보는 일’은 부정한 것이 닿은 그릇에 관한 규정(레 11:32-35; 민 19:15)을 가리킨다. nec는 Kroymann이 ‘ne quidem’(한순간도)의 뜻으로 고친 것이고 사본은 ne다. ullo momento는 Rigaltius의 수정이다. 2. 19.2는 시 1:2를 인용한다. uoluntas는 개역개정에서 ‘즐거움’으로 옮겨지나 라틴어 그대로 ‘뜻’으로 옮겼다. 3. 19.3의 benignitas는 bonitas(선함)와 구별하여 ‘자애’로 옮겼다. ‘예표로 짜인’(figuratae)은 율법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미리 보여 주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을 가리킨다. 4. 19.6의 인유: 사 1:16-18(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며 공의를 구하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신 10:18, 사 58:6-7(흉악의 결박을 풀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시 34:13-14, 시 4:4(칠십인역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 엡 4:26 참조), 시 1:1. diligere quaestiones는 사 1:18의 ‘변론’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여 ‘변론을 사랑하고’로 옮겼고, Harris는 dirigere를 제안했다. integram은 R의 읽기이고 M은 in integram, Engelbrecht는 in integrum을 제안했다. pestilentium은 라틴어역 시 1:1의 표현으로 ‘해독을 끼치는 자들’로 옮겼으며 개역개정은 ‘오만한 자들’이다. 5. 19.7의 인용은 시 133:1(라틴어역 132:1)과 시 118:8-9(라틴어역 117:8-9)이다. Pamelius는 iocundum 앞에 을 보충했다. bonum ... quam은 히브리어식 비교 구문으로 ‘...보다 좋다’로 옮겼다. 6. 19.8은 시 1:3, 19.9는 시 24:4-5(라틴어역 23:4-5)를 인용한다. 19.9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자기 영혼을 헛되이 받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받지 않고’(출 20:7 참조)로 인용한다. iurabi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iurauit다. 19.9의 첫 문장은 동사 없는 표제구로 되어 있어 그대로 옮겼다. 7. 19.10은 시 33:18-19(라틴어역 32:18-19)를 인용하고, ‘곧 영원한 죽음에서’, ‘곧 영원한 생명의 굶주림 속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풀이이므로 인용부호 밖에 두었다. deliberandas는 liberandas(건지다)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8. 19.11은 시 34:19, 19.12는 시 116:15와 시 34:20, 19.13의 인용은 시 34:22다(라틴어역에서는 각각 33:20, 115:15, 33:21, 33:23).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19 20 그러나 이 갑오징어들은, 율법이 그들의 표상<으로> 그 물고기 종류도 음식에서 물리쳤거니와, 자신들이 폭로되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여기서부터 신성모독의 어둠을 토해 내고, 그렇게 하여 이미 바짝 다가온 각 사람의 추적을 무위로 돌린다. 창조주의 빛나는 선함을 어둡게 할 것들을 떠벌리고 우겨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둠을 뚫고서도 그 악의를 뒤쫓아 어둠의 재주들을 빛 가운데로 끌어낼 것이다. 이 재주들은 창조주에게 무엇보다도 저 속임수, 곧 그가 히브리 사람들에게 애굽 사람들을 상대로 하라고 명령했다는 금과 은의 약탈을 비난한다. 자, 가장 불행한 이단자여, 나는 바로 그대를 심판자로 청한다. 먼저 두 민족 모두에 대해 사건을 심리하라. 그러면 그렇게 하여 그 명령을 내린 이에 대해 판결하게 될 것이다.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금 그릇과 은 그릇을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맞서 히브리 사람들은 맞청구를 제기하며, 같은 성경 문서에 근거하여 같은 조상들의 이름으로 자기들에게도 저 노역의 품삯, 곧 빚어 낸 벽돌과 지어 준 성읍과 마을의 값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선한 신을 골라낸 자여, 그대는 어떻게 판결하겠는가? 히브리 사람들이 속임수를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애굽 사람들이 상계를 인정해야 하는가? 실제로 양편의 사절들을 통해 그렇게 소송이 진행되었다고들 한다. 애굽 사람들은 그릇을 돌려 달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노역을 돌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노역에 대한 권리를 부당하게도 애굽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포기해 버렸다. 오늘날 히브리 사람들은 마르키온파를 상대로는 더 많은 것을 주장한다. 60만 명의 노역을 그 많은 해 동안 하루 한 닢씩으로만 셈한다 <하더라도>, 저 금과 은이 아무리 많았다 해도 상계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편의 몫이 더 큰가? 그릇을 돌려 달라는 자들인가, 아니면 마을과 도시에 들어 사는 자들인가? 그러므로 애굽 사람들의 불평이 더 큰가, 히브리 사람들이 베푼 호의가 더 큰가? 가령 노예 작업장으로 끌려간 자유인인 히브리 사람들이 오직 모욕에 대한 소송만으로 애굽 사람들에게 맞섰다면, 가령 그들의 기록원들이 채찍의 모욕적인 잔혹함으로 찢긴 자기 어깨만을 재판석 앞에서 내보였다면, 몇몇 부자들의 몇 안 되는 접시와 잔이 아니라, 곳곳에서 그 부자들 자신의 전 재산과 모든 백성의 갹출금으로 히브리 사람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들의 소송이 정당하다면, 창조주의 소송, 곧 그의 명령도 이제 정당하다. 그는 애굽 사람들을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호의를 베푸는 자들로 만들었고, 출발할 때의 촉박한 시간 속에서 말없는 상계라는 얼마간의 위로로 자기 백성에게 셈을 치러 주었다. 분명히 그는 오히려 덜 받아 내라고 명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그 아들들까지도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20.1 sepia는 위협을 받으면 먹물을 뿜어 몸을 감추는 갑오징어다. 레 11:10과 신 14:10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속 생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금지를 먹물로 추적을 따돌리는 마르키온파의 표상으로 읽는다. 은 Engelbrecht의 보충이다(사본 figura). 2. 20.2 intentionem uniuscuiusque iam proximam dispargunt를 Kroymann은 ‘이미 아주 가까이 다가온 각 추적자의 노력을 무위로 만든다’로 풀이하며,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3. 20.3 금은 그릇을 요구하라는 명령은 출 3:21-22; 11:2; 12:35-36에 나온다. 4. 20.5 벽돌과 성읍 건축의 노역은 출 1:11-14; 5:6-19를 가리킨다. lateris는 M의 독법(= lateribus)이고, R과 이전 판본은 laterinis로 읽는다. instrumentum은 법정 증거 문서를 뜻하는 법률 용어로, 여기서는 성경을 가리킨다. 5. 20.6, 20.8 compensatio는 서로의 채권을 맞비기는 로마법의 상계(相計)를 뜻한다. 6. 20.7 aiunt가 전하는 소송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서 애굽 사람들이 금은 그릇을 돌려 달라고 하자 게비하 벤 페시사가 60만 명의 430년 노역 삯으로 맞섰다는 유대 전승(바벨론 탈무드 산헤드린 91a)과 같은 계통이다. 7. 20.8 has iniustitia ... Aegyptiis는 Kroymann의 추정이다(M hasi iustitia ... Aegyptii, R has iustitia; Rigaltius uasis istis). Kroymann의 풀이에 따라 ‘그들(유대인)이 이 노역에 대한 권리를 부당하게도 애굽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포기했다’로 옮겼다. 는 R3의 보충으로, ‘<하더라도>’로 옮겼다. 60만 명은 출 12:37의 장정 수다. 8. 20.10 iniuriarum iudicium은 신체와 명예에 대한 모욕을 다루는 로마법의 모욕 소송(actio iniuriarum)이다. 매를 맞은 기록원들(scribae)은 출 5:14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다. 9. 20.11 sed totis ubique와 pronuntiassent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ubique, sed totis; pronuntiasset). 판결의 주어는 원문에 명시되지 않았다. 10. 20.12 gratos fecit는 하나님이 백성으로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했다는 출 3:21; 11:3; 12:36을 반영한다. expungere는 장부의 항목을 지워 셈을 끝낸다는 회계 용어다. 11. 20.13 minus는 Kroymann에 따라 parum(너무 적게)의 뜻으로 옮겼다. 돌려주어야 할 아들들은 출 1:16, 22에서 죽임을 당한 히브리 남자아이들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0 21 마찬가지로 그대는 다른 일들에서도 그가 변덕스럽고 일정하지 않다며 그의 명령들이 서로 모순된다고 비난한다. 그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면서도 여드레 동안, 곧 안식일에도 궤를 메고 돌라고 명한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의 일이다. 이는 그대가 안식일 법조차 살펴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법은 신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을 금한다. 실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엿새 동안 일하며 네 모든 일을 행하라. 그러나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그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무슨 일인가? 물론 너의 일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앞뒤 문맥에 맞기 때문이다. 곧 그가 위에서 엿새 동안 하라고 명한 일들, 즉 너의 일, 다시 말해 인간의 일상적인 일을 안식일에 거두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궤를 메고 도는 일은 일상의 일로도, 인간의 일로도 볼 수 없다. 그것은 드물고 지극히 거룩한 일이며, 그때 하나님 자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분명 신적인 일이다. 이 일 자체가 무엇을 뜻했는지도 자세히 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가 행한 모든 일의 예표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 길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대는 아마 그 예표들을 받아들이지도 않겠지만. 그러나 그대들이 명백한 것들로, 곧 정교한 탐구가 아니라 진리의 단순함으로 논박당한다면 그것이 더 낫다. 지금 이 경우에도 안식일이 신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을 금한다는 분명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때 안식일에 나무를 주워 모은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그는 자기 일, 곧 율법이 금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안식일에 궤를 메고 돈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고 그 일을 행했다. 그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곧 그 자신의 명령에 따라 수행했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21.1-2 여리고 성 주위를 궤를 메고 돈 일은 수 6:3-4, 14-15에 나온다. 성경 본문에서는 엿새 동안 하루 한 번, 일곱째 날에 일곱 번 돌아 모두 이레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여드레’(per dies octo)라고 쓴다. prohibenti ... iubenti는 레오폴트의 수정이다(MR prohibentis ... iubentis). 2. 21.3-4 출 20:9-10. 개역개정은 ‘일곱째 날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네 모든 일’(opera tua)의 소유격을 근거로 안식일 금지가 인간의 일에 한정된다고 논증한다. 3. 21.7 ipsum은 Kroymann의 수정이다(MR ipse). nisi는 M의 독법이고 R은 nimis로 읽는다. argumenta는 창조주가 행한 사건이나 일을 가리킨다. 4. 21.10 민 15:32-36. ligna tum legerat는 Kroymann의 추정이다(M lignatum egerat, R lignatum ierat). 이전 판본의 lignatum ierat를 따르면 ‘나무하러 나갔던 사람’이 된다. 5. 21.11 sed dei opus는 M의 어순이다(R과 이전 판본 opus, sed dei).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1 22 마찬가지로 그는 하늘과 땅과 물에 있는 모든 것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금하면서 그 이유도 밝힌다. [곧 우상숭배의 실체를 억제하는 이유들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런데 뒤에 주가 모세에게 명한 놋뱀의 상은 우상숭배의 명목에 속한 것이 아니라, 뱀들에게 시달리던 자들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치료가 예표하는 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마찬가지로 금으로 된 그룹과 스랍도 궤에 딸린 예표적 본보기였다. 분명 단순한 장식이었다. 그것들은 받침에 맞추어 만들어졌고, 모양을 금하는 이유인 우상숭배의 조건과는 아주 다른 이유를 지니고 있으므로, 금지된 모양들에 관한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양을 금하는 이유가 되는 그런 모양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생 제사가 이치에 맞게 제정되었다는 것을 이미 말했다. 곧 그 제도는 그러한 섬김을 우상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그 섬김을 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그는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곧 그가 그것들을 본래 자기 자신을 위해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나는 황소들의 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아벨의 제물을 돌아보고 노아의 번제 냄새를 기꺼이 맡았다 하더라도, 양의 내장이나 타는 제물의 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받은 먹을 것과 향기로운 것을 바치는 이들의 단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여겨졌다. 하나님은 행해진 것들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행해진 이유, 곧 하나님의 영예를 요구했다. 피호민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부자나 왕에게 그래도 지극히 하찮은 작은 선물을 바쳤다면, 선물의 양과 질이 그 부자와 왕을 언짢게 하겠는가, 아니면 예의를 갖춘 그 명분이 그를 기쁘게 하겠는가? 그러나 피호민이 그에게 선물을 자청해서<든> 혹은 자기 신분에 따라 부과되어서든 바치고 왕의 의례를 지키되, 신실함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일들에서도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왕이나 부자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네 많은 선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 “나는 배부르다”라고 하고, 또 “엄숙한 모임과 절기와 너희의 안식일”을 말할 때, 그것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따라 지킴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행하라고 규정했던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조건적이고 이치에 맞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번역 주석 1. 22.1-2 출 20:4-5. similitudo는 창 1:26의 ‘모양’과 같은 말이므로 ‘모양’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출 20:4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로 옮긴다. 2. 22.2 [idolatriae scilicet substantiam cohibentes]는 Kroymann이 삽입구로 보고 괄호에 넣었다. 우상숭배를 억제하는 것은 ‘이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 그의 근거다. 번역은 괄호 안의 말을 앞의 ‘이유들’에 연결하여 옮겼다. 3. 22.3 놋뱀은 민 21:8-9에 나온다. 22.4에서 말하지 않겠다는 ‘치료의 예표’는 요 3:14에서 놋뱀을 인자의 들림과 연결하는 해석을 가리킨다. 4. 22.4 금 그룹은 출 25:18-22에서 속죄소 양 끝에 놓이지만, 스랍은 사 6:2에 나오며 궤의 장식에는 없다. Kroymann은 Cherubin et Seraphin aurea를 중성 복수로 보고, in arcae figuratum exemplum 뒤에 erant를 보충하여 ‘궤의 예표적 본보기로 있었다’(εἰς τυπικὸν παράδειγμα)로 풀이한다. 5. 22.5 suggestus는 그룹이 붙어 있는 속죄소의 판(출 25:17-21)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받침’으로 옮겼다. 6. 22.6 희생 제사가 백성을 우상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리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설명은 이 권 18장에 있다. auocante는 Pamelius의 수정이다(M auocantis, R auocanti). 7. 22.7 사 1:11. 개역개정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로 옮긴다. 8. 22.8 사 1:11 후반과 시 50: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을 함께 반영한 인용이다. 9. 22.9 사 40:28. 칠십인역은 οὐ πεινάσει(주리지 않는다)로 읽고, 개역개정은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곤비하지 아니하시며’로 옮긴다. 아벨의 제물은 창 4:4, 노아의 번제 향기는 창 8:21이다. berbicinorum는 ueruecinorum(거세한 숫양의)의 후기 철자다. 10. 22.10 exigentem은 van der Vliet의 수정이다(MR exigentis). 11. 22.11 cliens는 로마 사회에서 보호자(patronus)에게 예속되어 의례적 봉사와 선물을 바치는 피호민이다. 12. 22.12 은 Engelbrecht의 보충으로, ‘-든 ... -든’ 구문의 첫 ‘든’을 < > 안에 두었다. indicta는 Kroymann의 추정(M dicta, R dicto), obsequio는 van der Vliet의 수정(MR obsequia)이다. 13. 22.13 Kroymann은 비유를 실제 사안에 적용하는 문장(‘그러므로 하나님도 자기 백성의 섬김을 거부한다’ 같은 내용)이 빠졌다고 보고 탈문 표시를 했으며,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plenus sum은 사 1:11(‘배불렀고’), sollemnitates et dies festos et uestra sabbata는 사 1:13-14다. Pamelius는 dicendo 앞에 를 보충했다. celebrando는 R3의 독법이다(MR1 celebrabant deo). 14. 22.14 condicionalis는 제사의 거부가 바치는 이들의 상태라는 조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fecerant 뒤에서 문장을 끊는 구두점은 van der Vliet를 따른 것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2 23 그런데 그대들이 사람들과 관련해서도 그를 경솔하다고 여기려 한다면, 곧 그가 한때 인정했던 자들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고 여기려 한다면, 곧 그가 언젠가 버려야 할 자들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마치 그가 자신의 지난 판단을 정죄하거나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러나 현재의 공과에 따라 버리기도 하고 택하기도 하는 것만큼 선한 이에게<도> 재판관에게도 어울리는 일은 없다. 사울은 택함을 받지만, 그때는 아직 예언자 사무엘을 업신여기는 자가 아니었다. 솔로몬은 버림을 받지만, 그때는 이미 이방 여인들에게 사로잡히고 모압 사람들과 시돈 사람들의 우상들에게 종으로 넘겨진 뒤였다. 창조주가 마르키온파에게 비난받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했겠는가? 아직 선하게 행하는 자들을 장래의 죄 때문에 미리 정죄해야 했겠는가? 그러나 아직 그럴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자들을 미리 정죄하는 것은 선한 하나님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죄를 짓는 자들을 이전의 선행 때문에 버리지 말았어야 했겠는가? 그러나 이전의 선행이 이미 무효가 된 마당에 죄악을 용서해 주는 것은 정의로운 재판관이 할 일이 아니었다. 또 사람 가운데 누가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결코 버릴 수 없으므로 언제나 택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는가? 또 마찬가지로 누가 선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결코 택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겠는가? 언제나 선한 사람을 보여 보라. 그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악한 사람을 보여 보라. 그는 결코 택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 같은 사람이 때에 따라 양쪽 모두에 있게 된다면, 그는 양쪽 모두에서 선하면서 재판관이기도 한 하나님에게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경솔함이나 앞을 내다보지 못함 때문에 판결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엄중하고 지극히 앞을 내다보는 판단으로 각 때의 공과를 나누어 준다. 번역 주석 1. 23.1 aut leuem은 Kroymann의 추정(M aut legem, R1 legem), 는 van der Vliet의 보충이다. 번역에서는 ‘선한 이에게<도> 재판관에게도’의 첫 ‘도’를 < > 안에 두었다. 2. 23.2 사울의 선택은 삼상 9:16; 10:1, 사무엘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은 삼상 13:8-14; 15:1-23에 나온다. 솔로몬의 이방 여인들과 모압 사람들(그모스), 시돈 사람들(아스다롯)의 우상은 왕상 11:1-8에 나온다. 라틴 성경의 1-2 Regum은 사무엘상하에 해당한다. 3. 23.9 Kroymann은 si 뒤에 non semper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같은 사람이 늘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탈문 표시를 했고,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Engelbrecht는 homo est in으로 읽어 탈문이 없다고 본다. dispungere는 장부를 정산한다는 회계 용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3 24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의 뉘우침도 잘못 해석한다. 마치 그 역시 변덕이나 앞을 내다보지 못함 때문에, 아니 더 나아가 죄를 기억하기 때문에 뉘우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뉘우쳤다.” 그대는 곧 뉘우침이란 어떤 악한 일이나 잘못을 고백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미리 못 박는 것이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선한 행위에<도> 뉘우침을 고백하는 일이 생기는데, 이는 그 사람에게 원망과 책망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곧 받은 은혜를 저버린 사람 말이다. 그때 사울이라는 인물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우려고 창조주가 뉘우침을 선포한 것도 그러하다. 창조주는 사울을 왕위에 올리고 성령으로 그를 북돋았을 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 가장 훌륭했던 사람을 -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 지극히 합당하게 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대가 하나님임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앞을 내다보는 이로도 고백하는 그 하나님에게 앞을 내다보지 못함을 돌린다면, 아무도 그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고유한 신성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말했듯이 그는 자기 뉘우침을 공언함으로써 사울의 악한 행위를 무겁게 책망했다. 사울을 택한 일에는 아무 죄가 없으므로, 그 뉘우침은 죄책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대는 말한다. “보라, 니느웨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뉘우침이 죄책을 드러내는 것임을 나는 알아본다. 요나서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주는 그들에게 행하겠다고 말한 악을 뉘우쳤고,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 요나 자신도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먼저 서둘러 다시스로 도망하려 한 것은, 주께서 자비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곧 오래 참으시고 자비가 크시며 악을 뉘우치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지극히 선한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먼저 내세운 것은 잘한 일이다. 곧 악인들에게 지극히 오래 참고, 그때의 니느웨 사람들처럼 자기 죄를 인정하고 슬피 우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이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이라는 칭호 말이다. 그런 이가 지극히 선한 이라면, 그대는 먼저 이 점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곧 그런 이, 다시 말해 지극히 선한 이에게는 악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키온도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악을 말했으니 ** 지극히 선한 이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극히 선한 이에게도 미칠 수 있는 그런 악들로 이해할 어떤 해석이 숨어 있지 않겠는가? 그런 해석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악이 창조주의 본성, 곧 그가 악한 자인 것처럼 그 본성으로 돌려지는 악이 아니라, 그의 권능, 곧 재판관으로서의 권능으로 돌려지는 악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 권능에 따라 그는 “나는 악을 짓는 자다”라고, 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악을 보낸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죄로서의 악이 아니라 보복으로서의 악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재판관에게 어울리는 것들임을 보여 그 오명을 충분히 씻어 냈다. 그런데 이것들이 악이라 불린다 해도 재판관에게서는 비난받지 않고, 그 이름 때문에 재판관을 악한 자로 드러내지도 않는 것처럼, 지금 이 악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악은 저 재판에 따른 악들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것들과 함께 재판관에게 어울린다. 그리스 사람들에게서도 때때로 악이라는 말이 악의가 아니라 괴롭힘과 해악을 뜻하는 말로 쓰이며, 이 대목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설령 창조주가 그 악을 마치 자기가 만든 것, 곧 배척받아야 하고 죄로 판정되어야 할 것처럼 뉘우쳤다 하더라도, 여기서도 창조주에게 죄가 될 만한 어떤 잘못도 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극히 불의한 도성을 마땅하고 합당하게 멸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정당하게 정한 것은, 악하게 정한 것이 아니므로, 악에서가 아니라 정의에서 정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형벌 자체를, 그것을 겪는 일 자체의 해악과 그 마땅함에 따라 악이라고 불렀다. 그대는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멸망을 정했다는 이유로 그대가 그 악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변호한다면, 그렇다 해도 그는 비난받아야 한다. 결코 뉘우칠 필요가 없는 정의를 뉘우쳤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말한다. 하나님은 정의도 뉘우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의 뉘우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사람이 대개는 죄를 기억하여, 때로는 어떤 선한 일이 배은망덕으로 갚아진 탓에 뉘우친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렇게 뉘우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을 저지르지도 않고 선을 정죄하지도 않으므로, 그만큼 그에게는 선이나 악에 대한 뉘우침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같은 성경이 그대에게 이 점도 규정해 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할 때이다.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네 손에서 찢어 내셨고, 그것을 너보다 나은 네 이웃에게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질 것이다. 그분은 돌이키지 않으시고 뉘우치지도 않으실 것이니, 그분은 사람처럼 뉘우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모든 경우에 신적 뉘우침의 다른 형태를 확정한다. 그것은 인간의 뉘우침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함이나 경솔함이나 선하거나 악한 일에 대한 어떤 정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렇다면 신적 뉘우침의 방식은 무엇이겠는가? 그대가 그것을 인간의 조건에 견주지만 않는다면 이미 환히 드러난다. 그것은 앞선 판결을 단순히 바꾸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변경은 사람에게서도 그 판결을 비난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모든 판결에 허물이 없는 하나님에게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스어에서도 뉘우침이라는 이름은 죄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의 바뀜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이 바뀜이 변하는 사태들이 맞닥뜨려 오는 데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번역 주석 1. 24.2 삼상 15:11. 개역개정은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로 옮기고, 15:35도 ‘후회하셨더라’로 옮긴다. paenitentia/paenitere는 일관되게 ‘뉘우침/뉘우치다’로 옮겼다. praescribere는 상대의 주장을 미리 차단하는 법정 항변을 뜻하는 말로, ‘미리 못 박다’로 옮겼다. 2. 24.3 는 van der Vliet의 보충이다. 3. 24.4 onerandam은 Kroymann의 추정이다(MR honorandam, ‘사울을 높이려고’). 사울에게 영이 임한 일은 삼상 10:6, 10에 나온다. 4. 24.5 삼상 9:2. 개역개정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로 옮긴다. 5. 24.7 inuidiosa와 criminosa를 대비시킨다. inuidiosa는 뉘우침의 공언이 사울에게 비난을 돌리는 경우이고, criminosa는 뉘우치는 자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경우다. 각각 ‘책망을 돌리는’, ‘죄책을 드러내는’으로 옮겼다. 6. 24.9 욘 3:10. 개역개정은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로 옮긴다. malitia(칠십인역 κακία)는 도덕적 악과 재앙을 모두 뜻하며, 24.14-20의 논증이 이 이중 의미에 기대고 있으므로 이 장 전체에서 ‘악’으로 옮겼다. 7. 24.10-11 욘 4:2. 개역개정은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로 옮긴다. Tharsos는 개역개정의 ‘다시스’로 옮겼다. 24.11의 optimi dei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에게 돌리는 칭호이므로 ‘지극히 선한 하나님’으로 옮겼다. 8. 24.13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는 눅 6:43(마 7:18)의 말씀으로, 마르키온이 두 신을 구별하는 근거로 쓴 본문이다(1권 2장). et Marcion은 사본의 독법이다(Pamelius Marcion). Kroymann은 nominauit 뒤에 ‘창조주가 니느웨 사람들에게서 받아 내려던 형벌’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 탈문 표시를 했고, 번역도 그 자리에 **를 두었다. nominauit의 주어는 문맥상 창조주(또는 그를 기록한 성경)로 보인다. 9. 24.15 사 45:7(개역개정 ‘나는 ...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과 렘 18:11(개역개정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두 본문을 이 권 14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peccatoria와 ultoria는 각각 죄에 속한 악과 보복에 속한 악을 뜻한다. 10. 24.17 그리스어 κακία는 악의뿐 아니라 해악과 괴로움도 뜻한다. 예컨대 마 6:34의 ‘한 날의 괴로움’이 κακία다. 11. 24.18 creaturam, iudicandae, atquin은 모두 Kroymann의 추정이다(MR creaturae, uindicandae, atqui). quasi creaturam은 창조주가 그 악을 자기가 만든 것처럼 뉘우쳤다는 뜻으로 옮겼다. 12. 24.20 passionis는 R3의 독법이다(MR1 et passionis). 13. 24.26 삼상 15:28-29.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질 것이다’는 칠십인역(καὶ διαιρεθήσεται Ἰσραὴλ εἰς δύο)에 있고 마소라 본문과 개역개정에는 없다. 개역개정 29절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로 옮긴다. 사무엘의 말이므로 인용문 안에서는 높임말을 썼다. 14. 24.29 conuersio sententiae는 판결이나 결정을 바꾼다는 법정 용어로 ‘판결을 바꾸는 것’으로 옮겼다. 15. 24.30 그리스어 μετάνοια는 μετά(바뀜)와 νοῦς(마음, 생각)로 이루어진 말이다. occursu fieri는 Ursinus의 수정이다(MR1 occursu rei).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4 25 이제 이런 종류의 것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 그대들이 생각하는 나머지 하찮음과 연약함과 부적절함을 해석하고 해명하는 데로 나아가겠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른다. 곧 그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또 아담이 벌거벗은 수치를 핑계로 대자 나무 열매를 맛보았느냐고 묻는다. 곧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는 저지른 일을 확신하지 못한 것도, 장소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죄를 의식하여 숨어 있던 자는 불려 나와 주 앞에 나서야 했는데,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 이미 저지른 일을 얼마간 꾸짖는 말과 함께 불려 나와야 했다. 다음 말은 단순한 방식으로, 곧 묻는 어조로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히려 힘주어 내리치듯 책임을 묻는 어조로 읽어야 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는가!” 곧 너는 멸망 가운데 있다, 곧 너는 이제 여기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소리는 꾸짖음과 탄식이 함께 터져 나온 것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온 세상을 새 둥지처럼 손에 움켜쥐고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이 그의 발판인 이의 눈을 낙원의 어느 구석이 벗어났다는 말인가! 그래서 아담이 어디에 있든, 숨어 있든 금지된 열매를 따 먹든, 불러내기 전에<도>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대의 포도원이나 정원을 지키는 파수꾼에게서 산토끼나 좀도둑도 숨지 못한다. <그러니> 더 높은 곳에서 더 밝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은 아래에 있는 어떤 것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라.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의 교훈을 이토록 크게 보여 주는 증거를 코웃음 치다니! 하나님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묻는다. 이는 여기서도 인간이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임을 보이면서, 부인하느냐 고백하느냐 하는 사안에서 그에게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그로써 짐을 덜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인에게 그의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캐묻는다. 마치 땅에서 이미 부르짖은 아벨의 피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는 가인도 같은 의지의 권능에 따라 스스로 죄를 부인하고 그로써 짐을 무겁게 할 권능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죄를 부인하기보다 고백해야 한다는 본보기들이 세워졌고, 이로써 그때 이미 다음 복음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네 입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입으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사실 아담은 율법의 규정 때문에 죽음에 넘겨졌지만, 그에게 희망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주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보라, 아담이 우리 중 하나처럼 되었다.” 이는 곧 장차 인간이 신성으로 받아들여질 것에 관한 말이다. 그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는가? “그리고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생명나무에서 따 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없도록.” 그가 현재 시간을 나타내는 말인 “그리고 이제”를 끼워 넣음으로써, 생명을 한시적으로, 지금 당장에 대해서만 미루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담 자신<도> 하와도 저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복을 기다리는 자들이며 고백으로 짐을 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저주했고, 죽음으로 죄를 갚기를 바라던 그를 당분간 죽지 못하게 했다. 그는 저지른 죄 외에 부인한 죄까지 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무지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가장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가면서 “내가 보겠다. 내게 들려온 부르짖음대로 그들이 행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곧 여기서도 무지 때문에 확신하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여기서<도> 그 발음의 어조가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캐묻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의심이 아니라 위협의 뜻을 표현하는 어조 말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내려감까지 비웃으며, 그가 내려가지 않고서는 심판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여긴다면, 그대가 그대의 신도 똑같이 치는 것은 아닌지 보라. 그 신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25.2 창 3:9-11. 원문에 인용 부호가 있는 마르키온 측의 반론이다. 2. 25.4-5 첫 Adam, ubi es는 M의 어순이다(R ubi es, Adam). 두 번째 ubi es의 느낌표는 Engelbrecht의 구두점이며, 위치를 묻는 말이 아니라 아담이 처한 상태를 탄식하는 말로 읽으라는 뜻이다. 3. 25.7 사 10:14(새 둥지를 움켜쥠)와 사 66:1(하늘은 보좌, 땅은 발판)을 반영한다. 문장 전체가 반어이며,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4. 25.8 lepus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 lupus, ‘늑대’). 5. 25.9 deum puta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MR deum puto, ‘나는 생각한다’). 는 ‘<그러니>’로 옮겼다. 6. 25.10 naso agere는 코웃음 치며 업신여긴다는 관용 표현이다. 7. 25.11 가인에게 동생의 행방을 묻는 장면과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은 창 4:9-10이다. [sed]는 Engelbrecht가 삽입으로 보고 괄호에 넣었다. probans는 R3의 독법이다(MR1 inprobans). 아담에게는 고백의 기회, 가인에게는 부인의 기회가 같은 자유 의지에서 주어졌다는 대구다. 8. 25.12 마 12:37. 개역개정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로 옮긴다. status legis는 창 2:17의 금지 규정을 가리킨다. 9. 25.13-14 창 3:22. 개역개정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우리 중 하나처럼 되었다’를 장차 인간이 신성으로 받아들여질 일에 대한 예고로 읽는다. 10. 25.16 창 3:14-19에서 저주는 뱀과 땅에 내려지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직접 내려지지 않는다. 가인에 대한 저주와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한 표는 창 4:11-15다. 가인이 죽음으로 죄를 갚기를 바랐다는 말은 창 4:13-14를 그렇게 읽은 것이다. 11. 25.18 창 18:20-21. 개역개정은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로 옮긴다. 원문에는 인용 부호가 없지만 25.2처럼 반론의 요지를 전하는 문장이다. 12. 25.20-21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티베리우스 15년에 하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왔다는 말로 시작한다(눅 3:1; 4:31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내려옴’을 들어 창조주의 내려감을 비웃는 반론을 되돌린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5 26 “그러나 하나님은 맹세까지 한다.” 혹시 마르키온의 신을 두고 맹세하는가? 그는 말한다. “아니, 훨씬 더 헛되게도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그의 앎 속에 다른 신이 없었고, 더구나 그가 바로 자기 외에 다른 신은 전혀 없다는 이것을 맹세하고 있었다면, 그대는 그가 무엇을 하기를 바랐는가? 그러면 그대는 그가 거짓 맹세를 한다고 적발하는가, 아니면 헛되이 맹세한다고 적발하는가? 그러나 그대들의 말대로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가 거짓 맹세를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기가 안 것을 참되게 맹세했으므로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신이 없다고 한 그의 맹세는 헛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신들을 믿는 자들이 없었다면 그때에야 그는 헛되이 맹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그때에는 우상 숭배자들이었고, 지금은 이단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그대가 맹세하는 하나님에게라도 믿음을 두어, 다른 신은 전혀 없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키온, 하나님이 이렇게 하도록 몰아붙인 자는 그대이기도 하다. 그대는 이미 그때 미리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약속이나 위협에서도 맹세하여 처음에는 얻기 어려웠던 믿음을 억지로 끌어낸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일은 어느 것도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그 사나움 한가운데에서조차 꽤나 작다. 송아지를 신으로 받든 일 때문에 백성에게 격노하여 자기 종 모세에게 이렇게 요구할 때 말이다. “나를 내버려 두어라. 내가 분노로 진노하여 그들을 멸하고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그래서 그대들은 모세가 자기 하나님보다 낫다고, 곧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청한 자, 아니 분노를 가로막은 자라고 늘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아니면 저도 그들과 함께 내어 버리십시오.” 그대들도 그 백성과 함께 가련하다. 그대들은 모세라는 인물 안에 예표된 그리스도, 곧 아버지에게 간청하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기 영혼을 바친 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에는 그 백성이 모세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종이 주인에게 그것을 구할 수 있도록, 주인이 그것을 그에게 구한 것이다. 그가 종에게 “나를 내버려 두어라. 내가 그들을 멸하겠다”고 말한 것은, 종이 간청하고 자기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내버려 두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그대가 신실한 사람이자 예언자인 자에게 하나님 앞에서 얼마만큼이 허락되는지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번역 주석 1. 26.1의 “나를 두고 맹세한다”는 이사야 45: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을 가리킨다. Kroymann의 본문은 이어지는 말을 마르키온 측 반론(inquit)으로 놓으며, Ursinus는 quod multo uanius로 읽었다. 2. 26.2의 uelles faceret는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은 uellet faceret(M R1) 또는 uellet facere(R3)이며, 추정에 따라 마르키온파 상대에게 묻는 2인칭 질문으로 옮겼다. 3. 26.3의 peierare는 거짓을 맹세하는 것, deierare는 엄숙히 맹세하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창조주가 다른 신을 알지 못했다는 마르키온파의 전제를 받아들여, 그 전제 위에서도 창조주의 맹세가 거짓 맹세가 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4. 26.4의 sci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은 scit이다. nec uane는 사본 독법이며 Oehler는 non uane로 고쳤다. 5. 26.7의 “미리 내다보였다”는 이사야 45장의 맹세가 다른 신을 믿는 후대의 이단, 곧 마르키온까지 겨냥했다는 뜻이다. 6. 26.10은 출애굽기 32:10이다. 개역개정은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이다. indignatus ira는 R의 독법으로 칠십인역 θυμωθεὶς ὀργῇ에 대응하며, M은 in ira이다. 7. 26.12는 출애굽기 32:32를 자유롭게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impende는 ‘나도 함께 써 없애라’는 뜻이다. 8. 26.13의 anima는 용어 원칙에 따라 ‘영혼’으로 옮겼으나, 여기서는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포함한다. 모세의 중보를 그리스도의 중보의 예표로 읽는다. 9. 26.15의 a se는 형식상 재귀대명사지만, 26.16에서 하나님이 종에게 “나를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한 것을 설명하므로 ‘그(모세)에게’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6 27 이제 나머지 것들도 간략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대들이 창조주를 무너뜨리려고 작고 약하고 합당하지 않다며 아직도 모아 들이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단순하고 확실한 원리 하나를 내놓겠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을 취하지 않았다면 인간과 교제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는 그 감각과 감정을 통해 인간의 미약함으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자기 위엄의 힘을 낮아짐으로 누그러뜨렸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 자신에게는 합당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필요하며, 그렇기에 이미 하나님에게 합당하다. 사람의 구원만큼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방인들을 상대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더 길게 다루었을 것이다 - 물론 이단자들과의 논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 그러나 그대들 자신도 신이 인간 조건의 모습과 그 나머지 질서 안에 머물렀다고 이미 믿었으니,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됨에 맞추었다는 것을 더 오래 설득받기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대들의 믿음으로 논박당한다. 신이, 그것도 더 높은 신이 자기 위엄의 정점을 그토록 낮추어 죽음에,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했다면, 왜 그대들은 우리 하나님에게도 어떤 작은 면모들이 어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대인들에게서 받은 모욕과 형틀과 무덤보다는 그래도 더 견딜 만한 것이다. 아니면 바로 이 작은 면모들이야말로, 인간의 수난에 내맡겨진 그리스도가 그대들이 인간적인 면모들을 들어 비난하는 그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이미 여기서부터 미리 판정해 줄 것이 아닌가?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고, 바로 그가 처음부터 사람들과 함께 지냈으며, 바로 그가 족장들과 예언자들과 교제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창조주의 아들이요 그의 말씀이며, 창조주는 그를 자기 자신에게서 내보냄으로써 아들로 삼았고, 그때부터 자기의 모든 경륜과 뜻을 그에게 맡겼으며, 창조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했다. 이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대들이 인간적이라고 비난하는 이 일들에도 아버지에 의해 배치되었으며, 마지막에 자신이 될 것을 이미 처음부터 [이미 그때부터 사람을] 익혀 갔다. 내려오는 이도 그이고, 묻는 이도 그이며, 요구하는 이도 그이고, 맹세하는 이도 그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공통의 복음도 증언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 자신이 구약에서도 이미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아버지를 보이지 않는 이로 규정했는데, 보였던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아버지의 권위와 이름 안에서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는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방식으로도 그는 우리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하나님에게 합당하다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이지 않고 다가갈 수 없으며 평온한 아버지, 말하자면 철학자들의 신에게서 찾아질 것이고, 그대들이 합당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이고 들리고 만나진 아들, 곧 아버지의 대리자이자 일꾼에게 돌려질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서 사람과 하나님을 섞어, 능력에서는 하나님이고 작은 면모들에서는 사람이니, 하나님에게서 덜어 내는 만큼 사람에게 보태 준다. 요컨대 그대들이 보기에 내 하나님의 수치인 모든 것은 인간 구원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인간답게> 사람들과 함께 지냈으니, 사람이 하나님답게 행하기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대등하게 행했으니, 사람이 하나님과 대등하게 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작은 자로 나타났으니, 사람이 가장 큰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그대가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두 질서 모두를 향한 그대들의 왜곡은 얼마나 큰가? 그대들은 그를 재판관으로 지목하면서도, 사안의 공과에 따라 ** 어울리는 재판관의 엄격함을 잔혹함이라고 비난한다. 그대들은 지극히 선한 신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선의에 어울리는 온유함, 인간의 미약한 수용력에 맞추어 더 낮게 처신한 그 온유함을 작음이라고 깎아내린다. 그대들에게는 큰 이도 작은 이도, 재판관도 친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똑같은 것들이 그대들의 신에게서도 발견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신도 재판관이며, 재판관이므로 필연적으로 엄격하고, 엄격하므로 물론 잔혹하다는 것을, 그것이 정말 잔혹함이라면 말이지만, 우리는 그 신을 다룬 책에서 이미 보여 주었다. 번역 주석 1. 27.4의 줄표 삽입구는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다. 사본은 congressio stet(M) 또는 stet congressio(R)를 가지며, Kroymann은 congressio - sed로 고쳤다. deuersatum은 MR1의 독법이고 R3와 통행본은 diuersatum이다. 2. 27.5의 “죽음에,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에”는 빌립보서 2:8에서 온다. ‘더 높은 신’은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키며, 마르키온파가 그 신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믿는다는 점을 들어 창조주의 ‘작은 면모들’을 옹호한다. 3. 27.6의 an은 Kroymann의 주석에 따라 nonne의 뜻(‘~이 아닌가’)으로 옮겼다. 4. 27.7의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는 시편 8:5(불가타 8:6)에 근거한다. 개역개정 시편 8:5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이고, 히브리서 2:7은 “천사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시며”이다. apud eum은 사본 독법(창조주의 책)이며 Ursinus는 Dauid로 고쳤다. dispositio는 삼위일체적 ‘경륜’의 뜻으로 옮겼다. 5. 27.8의 [iam inde hominem]은 Engelbrecht가 삭제를 제안한 말이다. Kroymann은 ‘ediscens iam inde hominem’과 ‘ediscens iam inde a primordio quod erat futurus in fine’라는 두 판본이 겹쳤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번역은 괄호 안에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6. 27.9는 구약의 신현 장면들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내려오는 이’는 창세기 18:21, ‘묻는 이’는 창세기 3:9와 4:9, ‘요구하는 이’는 출애굽기 32:10, ‘맹세하는 이’는 이사야 45:23을 가리킨다. 7. 27.10의 ‘공통의 복음’은 마르키온파도 받아들이는 복음서 본문을 말한다. quia가 대격 부정사를 이끄는 구문을 Engelbrecht를 따라 ‘~라는 것’으로 옮겼다. 8. 27.11은 마태복음 11:27(누가복음 10:22)이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11:27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이다. 9. 27.12는 출애굽기 33:20이다. 개역개정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이다. 10. 27.13은 뜻이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서 보이고 말한 이가 그리스도라는 앞 문단을 받아, 신약의 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Kroymann은 sed et in persona Christi penes nos Christus accipitur로 어순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11. 27.14의 ‘철학자들의 신’은 움직이지 않고 감정이 없는 철학적 신 개념을 가리키며, 마르키온의 신을 그런 신으로 규정하는 비꼼이다. et uiso의 et는 라틴 통행본 독법이고 사본은 ut이다. 12. 27.15의 sacramentum은 ‘신비’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 말은 맹세, 신비, 성례의 뜻을 아우른다. 13. 27.16의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conuersabatur는 R3의 독법이며 M R1은 conseruabatur이다. 14. 27.17의 nescie는 Kroymann 1906의 374쪽 인쇄면 그대로이며 nescio의 오식으로 보고 ‘나는 모르겠다’로 옮겼다. 15. 27.18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iustitiae(‘정의에’)가 빠졌다고 보았다. 16. 27.21의 nunc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non이다. scilicet는 라틴 통행본 독법이고 사본은 sicut이다. ‘그 신을 다룬 책’은 마르키온의 신을 다룬 제1권, 특히 1.26-27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7 28 이제 나도 작은 면모들과 악의들과 그 밖의 흠들에 관하여 마르키온에 맞서 그것과 겨루는 안티테시스를 만들겠다. 내 하나님이 자기 위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대의 신도 자기 아래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저 어두운 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은 같은 길이다.” 결국 그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 신에게 맞섰을 것이다. 죄와 죽음과 죄의 장본인인 마귀 자신과 모든 악을 내 하나님이 존재하도록 허용했다면, 그것을 그대의 신도 허용했다. 그는 내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그대들의 신도 마찬가지다. 인류를 그토록 늦게 돌아본 신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인류를 돌아보지 않게 했던 그 생각을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일을 뉘우쳤다. 그러나 그대들의 신도 그렇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구원에 주의를 돌렸다는 바로 그 점에서 이전의 외면을 뉘우쳤기 때문이며, 그 뉘우침은 악한 행위에 마땅히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소홀히 한 것은 악한 행위로 여겨질 것이며, 그대들의 신에게서 그것은 뉘우침을 통해서만 바로잡혔다. 우리 하나님은 속임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금과 은을 두고 한 속임수였다. 그런데 사람이 금과 은보다 귀한 만큼, 사람을 그의 주인이자 지은 이에게서 빼앗아 가는 그대들의 신은 그만큼 더 기만적이다. 우리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되갚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대들의 신도 앙갚음을 금함으로써 오히려 되풀이될 수 있는 불의를 만든다. 맞받아 맞지 않는 자라면 누가 다시 때리지 않겠는가? 우리 하나님은 자기가 어떤 사람들을 택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신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리 알았다면 그는 배반자 유다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창조주도 어딘가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면, 몸이 참되지 않았던 그대의 그리스도에게 훨씬 더 큰 거짓이 있다. 내 하나님의 잔혹함은 많은 사람을 삼켰다. 그대의 신도 자기가 구원하지 않는 자들을 분명 멸망에 처한다. 내 하나님은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대의 신은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기를 원했으니, 자기를 죽일 자로 바란 그 사람과 관련해서 살인자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살인자다. 그런데 그의 신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나는 마르키온에게 입증하겠다. 그는 백성을 살인자로 만들었고, 그 백성은 그리스도에게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면 모를까 분명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힘은 거침이 없어 몇 마디로 족하기를 좋아한다. 거짓에는 많은 말이 필요할 것이다. 번역 주석 1. 28.1의 antithesîs aemulas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에 맞세운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대조 목록이다. 마르키온의 저작 제목과 구별하기 위해 겹낫표 없이 ‘안티테시스’로 썼다. 2. 28.2의 sciit는 F의 독법이며 M은 scit, R과 통행본은 sciuit이다. 3. 28.3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60(딜스-크란츠)이다. quid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quod이다. ‘어두운 자’(σκοτεινός)는 고대부터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붙은 별명이다. 4. 28.4의 논증은 이렇다. 마르키온의 신이 처음부터 창조주의 세계에 있는 악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면, 창조주가 악을 허용한 책임은 그것을 허용한 마르키온의 신에게도 돌아간다. 5. 28.6은 창세기 6:6(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을 겨냥한 마르키온의 비판을 되돌린다. in aliquo는 M의 독법이며 R은 mali quo이다. pristinae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pristinam이다. 6. 28.8은 출애굽기 3:22, 11:2, 12:35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인들에게서 금은 패물을 구한 일을 가리킨다. fraus는 ‘속임수’로 옮겼다. 7. 28.9는 출애굽기 21:24(“눈은 눈으로”)와 누가복음 6:29(다른 뺨도 돌려 대라)를 대조한다. 8. 28.10의 ‘택한 사람들’은 창조주가 왕으로 택한 사울 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마르키온의 비판으로 보인다. nesciit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nescit이다. 9. 28.11의 은 Engelbrecht의 보충이다. 10. 28.12는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육체가 아니었다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을 겨냥한다. 11. 28.14의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율법의 사형 규정이나 출애굽기 32:27 같은 명령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죽기를 원했다면 그를 죽인 자들을 살인자로 만든 셈이라는 논리이다. 12. 28.15의 homicidam popul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homicidam이다. nisi si도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nisi si populus이다.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 백성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8 29 그 밖에 나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 자체도 맞붙어 쳐부수었을 것이다. 우리가 보여 준 대로 양쪽 부분의 사례에 따라 하나님에게 어울리게 선하기도 하고 재판관이기도 한 창조주를 변호하는 데에, 그것을 더 공들여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선함과 정의라는 두 부분이 함께 전능한 이의 신성에 합당한 충만함을 이룬다면, 나는 우선 간략하게 『안티테시스』를 물리친 셈이다. 그것은 성품이나 율법이나 능력의 특성들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창조주에게서 구별하고 그렇게 해서 떼어 내려고, 곧 지극히 선한 이를 재판관에게서, 온유한 이를 사나운 이에게서, 구원하는 이를 멸망시키는 이에게서 떼어 내려고 안달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차이들 속에 놓는 그 둘을 오히려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키온이라는 표제와 그 저작 자체의 의도와 목적을 걷어 내 보라. 그러면 그 저작이 같은 하나님, 곧 지극히 선하면서 재판관인 하나님에 대한 증명 외에 다른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음이 **. 이 두 가지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사례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맞세우려는 그 열심 자체도 오히려 단일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성의 실체는 선하면서도 엄격한 바로 그 하나의 실체였기에, 그는 앞서 엄격함을 보였던 바로 그 사례들과 비슷한 논거들 속에서 자기 선함도 보여 주려 했다. 이전에 길들지 않은 것들 때문에 더 엄했던 하나님이 나중에 길들여진 것들 때문에 더 온화하다면, 시간에 따른 차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티테시스』를 통해서는 창조주의 질서가 그리스도에 의해 물리쳐졌다기보다 새롭게 개혁되었고, 배제되었다기보다 회복되었다는 것을 더 쉽게 보여 줄 수 있다. 특히 그대가 그대의 신을 모든 쓰라린 감정에서, 물론 창조주를 향한 질투에서도 떼어 놓<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티테시스』는 그 신이 창조주의 개별 항목 하나하나에 질투로 맞섰다고 보여 주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점에서도 그것들을 통해 내 하나님이 질투하는 이임을 인정하겠다. 그는 처음에 덜 다듬어졌던 자기 것들을 선한, 곧 이성적인 질투로써 자기 권리에 따라 미리 성숙에 이르도록 돌보았다. 그의 세계 자체도 그의 대조들을 인정할 것이니, 그 세계는 원소들의 상반됨으로부터, 그러나 지극한 이성에 따라 조율되었다. 그러므로 지극히 생각 없는 마르키온이여, 그대는 빛의 신이 다르고 어둠의 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선함의 신이 다르고 엄격함의 신이 다르다는 것을 더 쉽게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조는 세계 안에 있는 대조도 그의 것인 그 이의 것이 될 것이다. 번역 주석 1. 29.1의 comminus는 M F의 독법이고 R과 통행본은 cominus이다. egeret는 R의 독법이며 M은 ageret이다. 2. 29.2의 ingenia는 두 신에게 배정된 ‘성품’으로 옮겼다. ‘지극히 선한 이’와 ‘재판관’은 마르키온이 나눈 두 신의 칭호이다. 3. 29.3의 in eis는 M의 독법이고 R은 meis이다. 4. 29.4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uidebitur(‘~으로 보일 것이다’) 또는 relucebit(‘~이 드러날 것이다’) 같은 동사가 빠졌다고 보았다. praestare는 MR1의 독법이며 R3는 praestat, Oehler는 praestaret이다. 5. 29.6의 diuinitatis와 ut eisdem, et bonitatem은 모두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은 diuinitatibus, et eisdem, ut bonitatem이다. 6. 29.7의 quam repercussus는 레오폴트의 수정(사본 quo repercussus)이고, 도 레오폴트의 보충이다. aemulatio creatoris는 창조주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를 함께 뜻하며, 용어 원칙에 따라 ‘질투’로 옮겼다. 7. 29.8의 aemulatum은 창조주의 개별 규정마다 맞수로 겨룬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은 자기 신에게 질투 같은 감정이 없다고 하면서도 『안티테시스』에서 그 신을 창조주의 경쟁자로 그린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8. 29.9의 zelotes는 출애굽기 20:5와 34:14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받는다. arbustiores는 드문 비교급이며 ‘덜 다듬어진, 거친’ 뜻으로 옮겼다. maturitati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maturitatis이다. 세계가 상반된 원소들로부터 조화롭게 조율되었다는 생각은 스토아 철학의 우주론과 맞닿아 있다. 9. 29.11의 ‘대조’는 성경과 율법에 나타난 대조를 말하며, 세계 안에 대조를 지닌 창조주가 성경의 대조도 지닌다는 결론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0/tertullian-marcion-2/index.html#p-29 출처·이용 조건 이 저장소의 한국어 AI 번역 시제품; Codex AI 생성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AI 한국어 번역에 프로젝트가 보유할 수 있는 권리의 범위. 저작권 성립을 단정하지 않음 Tertullian; Emil Kroymann (ed.), CSEL 47 (1906); University of Leipzig (2014), OpenGreekAndLatin/csel-dev.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TEI 헤더에 이용허락을 명시한 라틴어 전자 원문과 인쇄면 대조·교정 가공물 Claude 한국어 번역·메모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한국어 번역·메모에 보유 가능한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