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본문으로
1.1 status는 사물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가리키므로 ‘존재 상태’로, retractatus는 이미 다룬 사물을 다시 따져 보는 일이므로 ‘다시 검토할 때’로 옮겼다. 기원을 알아야 존재를 확신하고, 존재를 확신해야 본질과 성질을 분별한다는 순서가 이 장 전체의 논증 틀이다.
1.2 ‘복음서의 사도 명단’은 누가복음 6:13-16의 열두 사도 명단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복음서도 누가복음을 바탕으로 하므로 바울은 이 명단에 없다. dignissime를 Kroymann은 apparatus에서 summo iure(전적인 권리로)로 풀이하며, 이에 따라 ‘마땅한 권리에 따라’로 옮겼다.
1.3 바울이 그리스도의 승천 뒤에 부름받은 일은 사도행전 9:1-9에 나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기서 아직 바울의 기원을 모르는 ‘새 제자’의 입장으로 말하며, 이 반론은 1.10에서 밝히듯 의도적으로 취한 역할이다. sciit는 Kroymann의 교정이다(M과 R1은 scit, R3는 sciuit). quiescente는 M과 R3의 독법이며 R1은 quiescentem이다.
1.4 마르키온은 폰토스(시노페) 출신의 선주였다. 이 문장은 해운 용어로 이루어져 있다. symbolum은 화물을 맡을 때 주고받는 증표, tituli character는 화물에 찍는 표지, imponere는 배에 싣는 일, exponere는 화물을 하역하여 내놓는 일을 가리킨다. auertere와 adulterare는 화물을 빼돌리고 변조하는 일로, 마르키온이 성경 본문을 잘라 내고 고친 일을 암시한다. numquam은 M의 독법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nullum을 읽는다.
1.5 인용은 갈라디아서 1:1이다. Kroymann은 이전 판본들과 달리 ne illius probetur에서 새 문장을 시작하고 사본의 protulerit를 protulit로 고쳤다. illius qui omnia apostolatus eius instrumenta protulit는 바울의 사도직을 뒷받침하는 문서(창세기와 사도행전)를 내놓은 창조주를 가리키며, 말하는 주어는 마르키온이다.
1.7 scribere, subscribere, obsignare, actis referre는 공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고 봉인하고 관청 기록에 올리는 로마의 법적 절차를 가리킨다. professio(공언)는 호구 조사 등에서 하는 법적 신고이기도 하므로 professor를 ‘공언자’로 옮겼다.
1.8 누가복음 21:8. 개역개정은 “내가 그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마태복음 24:5처럼 ego sum Christus(내가 그리스도다)로 되어 있다.
1.11 Kroymann은 Engelbrecht의 추정에 따라 sit Christus, sit et apostolus로 읽고(사본 MR: sit et Christus, sic apostolus), 사본의 ut 대신 nunc을 넣었다. alterius는 마르키온의 다른 신을 가리키므로 ‘다른 신의’로 옮겼다.
1.12 창세기 49:27의 야곱의 축복을 가리킨다. Kroymann은 apparatus에서 figuras를 figuratas로 읽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direxisset는 M의 독법이며 R은 dixisset이다.
1.13 창세기 49:27. 개역개정은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눈다는 뜻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고대 라틴어 본문은 ad matutinum comedet adhuc et ad uesperam dabit escam(아침에는 아직 먹고 저녁에는 먹이를 줄 것이다)이다. 그는 ‘먹이를 준다’를 바울의 교사 활동으로 읽는다.
1.14 바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점은 로마서 11:1과 빌립보서 3:5에 나온다. ‘이방인들의 교사’(doctor nationum)는 디모데전서 2:7의 표현과 같다. 원문의 ecclesiaium은 ecclesiarum의 인쇄 오류로 보고 ‘교회들의’로 옮겼다.
1.15 사울 왕이 다윗을 쫓다가 다윗에게 목숨을 건짐받고 자기는 악으로 갚았는데 다윗은 선으로 갚았다고 고백한 일은 사무엘상 24:16-21과 26:21에 나온다. recipientis는 Saulis에 걸리므로, 악을 행하고도 선으로 갚음을 받은 쪽은 사울이다. 사울 왕도 베냐민 지파였고(사무엘상 9:1-2), 바울의 히브리 이름도 사울이다(사도행전 13:9). ‘동정녀의 혈통으로’(secundum uirginis censum)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전제한다.
1.16 사도행전에 대한 언급이다. 마르키온은 사도행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24 참조). ordo는 바울이 박해자에서 사도가 되기까지의 경과를 가리키므로 ‘이력’으로 옮겼다.
1.17 갈라디아서 1:1의 표현(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한 것도 아닌)을 사도행전 9:1-9의 다메섹 사건과 연결한다.
1.22 de meo는 apparatus에 따르면 de meo instrumento, 곧 테르툴리아누스가 받아들이는 문서인 사도행전을 가리킨다. quam meum apostolum quam et Christum은 테르툴리아누스가 흔히 쓰는 quam-quam(=tam-quam) 구문이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내 것이다’로 옮겼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tam meum으로 읽는다.
1.23 ‘같은 전선’과 ‘자리’(gradus)는 검투나 전투의 용어이며, praescriptio는 소송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막는 법적 항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4권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펼친 것과 같은 논증을 바울에게 적용한다.
1.24 a creatore는 R3의 독법이며 M과 R1은 ad creatorem을 읽는다. Kroymann은 a creatore를 택했다.
1.26 [그러면]은 Rhenanus의 셋째 판(R3)이 삭제한 at이다. Kroymann은 이 단어를 본문에 두되 괄호로 묶었다.
1.27 마르키온의 사도서(Apostolikon)는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라오디게아인들에게』(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의 열 편지로 이루어졌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들어 있지 않다(21장 참조). ‘수에서까지 훼손되었다’는 이 편지들의 수를 줄인 일을, ‘이단의 복음서가 지닌 형태’는 4권에서 다룬, 마르키온이 누가복음을 잘라 낸 복음서를 가리킨다.
- 2 본문으로
2.1 Kroymann 판은 이 문장 앞에 Ad Galatas(갈라디아서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둔다. M 사본은 INCIPIT AD GALATAS로, R은 de epistola ad Galatas로 표시한다. 마르키온의 사도서는 갈라디아서를 첫 편지로 두었다.
2.2 ‘새롭게 함’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43:18-19, 65:17을 가리키며, 고린도후서 5:17이 이를 반영한다. dispositio는 창조주가 정해 둔 구원의 질서를 가리키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amplectimur는 R3의 독법이며 M과 R1은 et amplectimur이다. amolitionem은 M의 독법이며 R은 abolitionem이다.
2.3 사본 MR은 distinctionis로 읽으며, Kroymann은 이를 distinx<it decess>ionis로 보충하여 동사와 명사를 갖추었다(Engelbrecht는 distin<xit destru>ctionis를 제안했다). 보충된 부분을 <물러남의>로 표시했고, ‘구분하여’는 사본에 남은 distinx-에 해당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다’는 누가복음 16:16이다.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로 옮긴다. Kroymann은 끝의 decessura 뒤에 <et noua oritura>(새것들이 일어나리라는 것도)를 보충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한다.
2.4 praesumptio와 praesumere는 미리 품은 판단을 가리키므로 ‘선입견’, ‘미리 여겼다’로 옮겼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율법 준수를 유지하려 한 일은 갈라디아서 3:1-5와 4:9-11, 5:2-4에 나온다.
2.7 status quaestionis는 수사학에서 논쟁의 핵심 쟁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쟁점’으로 옮겼다.
2.9 decessionem은 MR의 독법이며 Gelenius와 이후 판본들은 discessionem(떠남)을 읽는다.
2.11 갈라디아서 1:6. 개역개정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그리스도의’가 없고 in gratiam(은혜로)만 있다. miror는 R3의 독법이며 MR1은 mirari를 읽는다. Kroymann은 euocare 대신 auocare를 읽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2.12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지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르키온의 신을 섬기다가 창조주에게로 돌아간 것이 아니므로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감’이 신을 바꾼 일일 수 없다는 것이다.
2.13 갈라디아서 1:7(“다른 복음은 없나니”).
2.14 이사야 40:9. 개역개정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로 옮긴다. 라틴어 euangelizare가 euangelium(복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이 논증의 근거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옮겼다. si enim은 MR의 독법이며 Oehler는 sed enim을 제안했다.
2.15 이사야 52:7(로마서 10:15 참조). 개역개정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tempestiui(때맞춘)로 되어 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다’는 인용이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이다.
2.16 이사야 42:4의 칠십인역 본문을 따른 인용이며 마태복음 12: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과 같다. 개역개정 이사야 42:4는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Christi는 R3의 독법이며 MR1은 Christus를 읽는다.
2.17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삼았다”는 이사야 49:6이다. Kroymann은 Engelbrecht를 따라 nationum 뒤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두어, est autem euangelium etiam dei noui ... defensum을 2.14에서 시작한 조건절의 일부로 읽는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신의 복음도 있고 ... 변호한 것이라면’으로 옮겼다. potius demonstraret는 apparatus의 풀이대로 ‘더 나은 것으로 내보이다’로 옮겼다.
2.18 갈라디아서 1:8. 마르키온파의 해석은 이 저주가 창조주와 그의 천사가 전할 복음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hinc fugias는 M의 어순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fugias hinc이다.
2.19 Kroymann은 duo enim의 enim을 삭제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한다.
2.20 갈라디아서 1:8. tamen은 apparatus의 풀이(dagegen)에 따라 앞의 마르키온파 해석과 대비하는 ‘오히려’로 옮겼다. 바울이 천사보다 먼저 ‘우리’를 내세운다는 점이 논증의 근거다.
2.22 [사도도 믿어서는 안 되니]는 Kroymann이 괄호로 묶은 et nec apostolo이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nec apostolo를 본문으로 읽는다. <뜻에서가>는 Kroymann이 보충한 quo에 해당한다.
2.23 이 단락은 갈라디아서 1:11-24의 회심 기사와 2:4의 거짓 형제들에 관한 언급을 사도행전 15:1, 5, 10, 28과 연결한다. ‘조상들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짐’은 사도행전 15:10의 표현이다. 원문의 scripturam Apostolicorum은 사도행전을 가리키며, Pamelius는 <actorum> Apostolicorum으로 보충했다. ex auctoritate spiritus의 spiritus는 ‘영’으로 옮겼다(사도행전 15:28 “성령과 우리는”).
2.24 마르키온은 사도행전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령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가복음 24:49와 사도행전 1:4-5의 약속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된 일을 가리킨다. ‘율법을 버리도록 가르치는 방식’(forma dedocendae legis)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 결정과 갈라디아서 2:1-10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합의한 일을 가리킨다. respuatis는 2인칭 복수이므로 ‘그대들’로 옮겼다. Kroymann은 quando nec 앞에 탈문이 있을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하며 <satis quidem imprudenter,>(참으로 어리석게도)를 보충안으로 든다.
- 3 본문으로
3.1 갈라디아서 2:1-2. 바울이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대목 대신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후원(patrocinium)을 얻으려고 올라갔다고 풀어 쓴다. citra formam illorum은 ‘그들의 형식에 못 미치게’로 옮겼다.
3.2 quos는 Latinius의 추정이고 사본(MR)은 quod이다. si quando(‘언제든 그럴 수 있다면’)는 강조로 보아 ‘누구보다도’로 옮겼다. Junius는 uult is(‘그(바울)가 원한다’)로 고쳐 읽었고 Engelbrecht가 이를 지지했다.
3.3 갈라디아서 2:3-4. superinducticios는 Pamel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superducticios이다. 개역개정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다. 마르키온은 유대주의자들이 복음을 변조했다고 주장했으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거짓 형제들이 성경을 변조한 것이 아니라 옛 규율을 고수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3.4 갈라디아서 2:4-5. †: 전승 본문은 nec ad horam cessimus subiectioni(‘한시도 굴복하여 양보하지 않았다’)이고 그대로 옮겼다. 3.5-3.10의 논증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자기 사본에서 부정어 없이 ad horam cessimus(‘잠시 양보했다’)로 읽었고 nec를 마르키온의 첨가로 판단했음을 보여 준다. Kroymann은 그 대조가 탈락했다고 보아 seruituti, <ad horam cessimus subiectioni, non, ut mauult Marcion:> nec ad horam ...으로 복원하기를 제안한다. 그리스어 사본 대다수는 부정어 οἷς οὐδέ를 가지지만 클라로몬타누스 사본(D)의 첫 손과 이레나이우스의 라틴역 등 일부 서방 전승은 부정어 없이 읽는다.
3.5 uitiatio scripturae는 마르키온의 본문 변경, 곧 nec의 첨가를 가리킨다. Kroymann은 이 문장으로 보아 테르툴리아누스가 앞에서 마르키온이 사도의 말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미 말했으리라고 추론한다.
3.6 갈라디아서 2:3. 개역개정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3.7 ‘반대되는 행동’(contrarium factum)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받지 않은 일과 반대되는 일, 곧 거짓 형제들 때문에 잠시 양보한 일을 가리킨다. [nec ostendisset]은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말이다.
3.8 Ursinus는 cessissent<ne> subiectioni? opinor(‘양보했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로 읽었으나 Kroymann은 사본대로 non opinor를 유지한다.
3.10 갈라디아서 2:2, 2:9. <헛되이>는 Rhenanus의 셋째 판(R3)이 보충한 in을 옮긴 것이며(M과 R1에는 없다), <동의>는 사본의 censu를 Kroymann이 c<ons>ensu로 고친 것이다. libertate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ueritatem(‘진리’)이다.
3.11 디모데의 할례는 사도행전 16:3, 서원하여 머리를 깎은 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은 사도행전 21:23-26. 바울의 고백은 고린도전서 9:20, 22. ‘그렇게 저 몰래 들어온 자들 때문에도 그리했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사이에 끼워 넣은 말이다. eduntur는 Kroymann의 추정이며 M과 R1은 educuntur, R3와 이전 판본들은 edicuntur이다.
3.12 첫 문장 si haec quoque intellegi ex hoc postulant는 독립된 조건절로 전해져 의미가 불분명하다. 앞 문장에 이어 ‘이 일들(디모데의 할례와 성전 출입)도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보아 직역했다.
3.13 갈라디아서 2:9-10. 개역개정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의 순서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를 먼저 든다.
3.14 제4권에서 마르키온의 복음서를 검토하며 누가복음 6:20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창조주의 율법과 예언자들에 비추어 다룬 대목(제4권 14장)을 가리킨다.
3.16 갈라디아서 2:14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마르키온파가 베드로와 바울의 대립을 근거로 내세우는 반론을 인용한 것이다.
3.17 갈라디아서 2:11-12, 2:14, 2:16. diuersitate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peruersitatem(‘왜곡’)이다. 사본의 credi.를 Kroymann이 credi<disset.>로 보충했고, 보충된 어미를 ‘믿<었더라면>’으로 옮겼다. eius dumtamen도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은 eiusdem tamen이다. Engelbrecht는 si, quomodo Marcionitae uolunt credi, de Petro pergat apostolus, negans ...(‘마르키온파가 믿게 하려는 대로 사도가 베드로에 관해 계속 말하게 하라’)로 읽기를 제안했다.
3.19 갈라디아서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요한의 외침은 누가복음 3:4; 이사야 40:3.
3.20 누가복음 3:4-5; 이사야 40:3-4. 개역개정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 본문은 ‘골짜기’ 대신 riui(‘시내’)로 읽는다.
3.21 시편 2:3, 2:1-2를 이 순서로 인용한다. 이어 갈라디아서 2:16과 3:11, 하박국 2:4. iustificaretur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iustificetur이다.
3.22 하박국 2:4. pronuntiauit은 M의 읽기이며 R과 이전 판들은 praenuntiauit(‘미리 선언했다’)이다.
3.23 갈라디아서 3:10-12. operarius(‘일하는 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을 가리킨다.
3.25 신명기 11:26. 개역개정은 “복과 저주”의 순서이다. Kroymann은 quae etsi rerum est, non ideo auctorum을 삽입구로 표시하고, 두 구절의 순서를 바꾸어야 할 가능성도 언급한다.
3.26 갈라디아서 3:13. Engelbrecht의 구문 해석을 따라 ‘사도가 가르쳐 주니 사도가 얼마나 우리 편에 서 있는지 분명하다’로 옮겼다.
3.27 신명기 21:23; 갈라디아서 3:13. ligno는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들은 in ligno이다.
3.28 aut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et이다. ignorabat도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은 ignorat, Engelbrecht는 ignoraret를 제안했다. 마르키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알지 못하던 신에게서 왔으므로 창조주가 그를 미리 저주할 수 없었다는 논증이다. ‘남의 사람’은 창조주에게 속한 인간이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남이라는 뜻이다.
3.32 갈라디아서 3:14. 개역개정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가 읽은 마르키온 본문은 ‘영적인 복’이다.
3.33 forma gratiae fides는 ‘믿음이라는 은혜의 형식’으로 옮겼다. 은혜가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질서가 창조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fides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fidei이다.
3.34 갈라디아서 3:26. 개역개정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이고, 마르키온 본문은 ‘믿음의 아들들’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그 앞의 아브라함 단락(갈라디아서 3:6-9)을 지웠다고 본다.
3.35 갈라디아서 3:7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3.37 창세기 15:6(갈라디아서 3:6)과 창세기 17:5. <그에게>는 Kroymann이 보충한 ei를 옮긴 것이다. magis 뒤의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며, 그는 quam demerendo placentes(공로를 쌓아 기쁘게 하기보다)를 보충안으로 제시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 2:4; 갈라디아서 3:11.
3.39 아브라함은 할례(창세기 17:10-14) 이전에 믿어 의롭다고 여겨졌다(창세기 15:6; 로마서 4:10-11 참조). ‘육신이 온전한 상태’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3.40 <믿음으로>는 Kroymann이 보충한 ex fide를 옮긴 것이다.
- 4 본문으로
4.1 갈라디아서 3:15 첫머리의 “내가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다”가 마르키온의 본문에서는 갈라디아서 4:3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바로 앞에 붙어 있다. Kroymann은 마르키온이 3:15 이하 4:2까지를 지웠다고 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4.3-4.7에서 이 연결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인다. reuincatur의 생략된 주어는 마르키온으로 보고 번역에 밝혔다. 이 문장은 옛 판본들(Pamelius 이후)에서 3장 끝에 붙어 있었으나 Kroymann은 4장 첫머리로 옮겼다.
4.2 갈라디아서 4:3. elementa(그리스어 stoicheia)는 우주를 이루는 원소와 글자의 자모라는 두 뜻을 지닌다. 개역개정은 “초등학문”이라 옮겼으나, 테르툴리아누스가 4.4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우주의 원소로, 4.21-4.23에서는 율법의 ‘첫 글자들’로 이 말을 읽기 때문에 일관되게 “원소”로 옮겼다.
4.4 suspicit는 Engelbrecht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suscipit(받아들이다)로 읽는다.
4.5 갈라디아서 3:15. 개역개정은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이다. tum과 dixit sed는 Kroymann의 추정 교정이며, 사본 MR은 cum ... dixisset로 읽는다. testamentum은 ‘유언’과 ‘언약’을 함께 뜻하는 말로, 4.34의 “두 언약”(갈라디아서 4:24)과 맞추어 “언약”으로 옮겼다.
4.6 갈라디아서 3:16.
4.8 ‘해면’(spongia)은 글자를 지우는 데 쓰던 도구로, 마르키온이 바울 서신의 구절을 삭제한 일을 가리킨다.
4.9 갈라디아서 4:4. 해와 달과 별을 때의 표징으로 정한 일은 창세기 1:14를 가리킨다.
4.10 이사야 2:2(개역개정: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 굳게 설 것이요”)와 요엘 2:28(라틴어 성경 및 Kroymann 표기로는 요엘 3:1). de meo spiritu는 ‘내 영에서’라는 부분 표현이다.
4.14 갈라디아서 4:5 앞부분과 이사야 40:4, 그리고 고린도후서 5:17과 이사야 43:19; 65:17의 ‘옛것과 새것’ 주제를 가리킨다. Kroymann이 hoc est부터 4.15의 Hierusalem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기 때문에 번역에서도 줄표(-)로 둘렀다. uias leues는 Jun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uias lenes로 읽는다.
4.15 이사야 2:3. 개역개정은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새 율법’이라고 한다. 이어서 갈라디아서 4:5 뒷부분(개역개정: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을 인용한다.
4.16 이사야 49:6과 이사야 42:4. 42:4는 칠십인역을 따른 형태로, 개역개정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와 다르며 마태복음 12:21의 인용과 가깝다.
4.17 갈라디아서 4:6. 개역개정은 “그 아들의 영”이라고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또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자기 영”(spiritum suum)이다.
4.18 요엘 2:28을 다시 인용하여, 갈라디아서 4:6의 영을 보낸 이가 요엘을 통해 영을 약속한 창조주임을 보인다.
4.20 갈라디아서 4:9. 개역개정은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다.
4.21 그리스어 stoicheia처럼 라틴어 elementa도 알파벳의 낱자를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뜻을 근거로 4.23에서 갈라디아서 4:9-10의 elementa를 율법의 초보, 곧 ‘율법의 첫 글자들’로 읽는다.
4.23 갈라디아서 4:8. 정경 본문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인데, 마르키온의 본문은 부정어 없이 “본성상 신들인 것들”로 되어 있다. physicae는 그리스어 형용사를 라틴어로 적은 것이고 테르툴리아누스가 id est naturalis로 풀었으므로 “자연학적, 곧 자연에 관한”으로 옮겼다. 4.22 끝에서 시작하는 etsi 삽입구는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라 줄표로 표시했다.
4.24 갈라디아서 4:10. caenae purae(정결한 만찬)는 안식일 전날, 곧 예비일에 드는 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큰 날들’은 대속죄일 같은 큰 절기를 뜻한다.
4.26 이사야 1:13-14. 개역개정에서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로 된 부분을 라틴어 본문(anima mea)대로 “내 영혼이”로 옮겼다. caerimonia uestra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Pamelius는 caerimonias uostras로 읽는다.
4.27 아모스 5:21. odorabor(향기를 맡다)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adorabor(경배하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이다.
4.28 호세아 2:11.
4.32 nulla magis auferenda는 Engelbrecht의 교정이고 사본은 nullam ... auferendam으로 읽는다. conuertit(바꾸었다)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Latinius는 conuerrit(쓸어 냈다)로 고쳤다.
4.33 4.33-4.35는 갈라디아서 4:22-24, 26과 에베소서 1:21을 엮은 마르키온 본문의 인용이다. 정경 본문의 “어머니”인 예루살렘 대신 교회가 나오며, 테르툴리아누스는 4.32에서 이 대목을 마르키온이 ‘부분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allegorica는 “비유”로 옮기고, 테르툴리아누스가 붙인 풀이 id est aliud portendentia를 “곧 다른 것을 미리 가리키는 것들”로 옮겼다.
4.34 ‘두 보여 줌’(duae ostensiones)은 그리스어 diathēkai를 testamenta 대신 이렇게 옮긴 라틴어 번역을 테르툴리아누스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35 super omnem principatum ... uim dominationem은 에베소서 1: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 모든 이름 위에”)에서 온 표현이며, Kroymann의 본문에 접속사 없이 uim dominationem으로 남아 있는 것을 “권세와 주권”으로 옮겼다. in quam은 Ursinus의 교정이고(사본 quem), quae est mater nostra는 사본에서 조금 앞 in futuro 뒤에 있는 것을 Engelbrecht가 이 자리로 옮겼다. repromisimus는 세례 때의 서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우리가 서약하여 들어간”으로 옮겼다. 이 대목의 si(4.33)에 대한 귀결절은 4.36의 utique manifestauit이다.
4.36 갈라디아서 4:31. dispositio는 하나님이 정한 질서라는 뜻에서 “경륜”으로, deliniatio(R3는 delineationem, M과 R1은 declinationem)는 “밑그림”으로 옮겼다.
4.37 갈라디아서 5:1. manumittere는 주인이 자기 종을 법적으로 풀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종에서 놓아주다”로 옮겼다. 종을 풀어 줄 수 있는 이는 그 종의 주인뿐이라는 것이 이 논증의 전제다. nos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uos로 읽는다.
4.38 갈바는 68-69년의 로마 황제 Servius Sulpicius Galba다. nec는 Junius의 교정(사본 ne)이고, soluturus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solutos로 읽는다.
4.39 갈라디아서 5:1 뒷부분(“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40 시편 2:3과 시편 2:2. archontes는 그리스어를 그대로 옮겨 적은 말로 “통치자들”로 옮겼다.
4.41 갈라디아서 5:2-3의 할례 문제를 가리킨다. exemptis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exemptos로 읽는다.
4.42 예레미야 4:4와 신명기 10:16. 신명기 10:16은 개역개정에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이다.
4.43 갈라디아서 5:6.
4.46 이사야 42:4(4.16 참고; 여기서는 sperabunt 대신 credent)와 갈라디아서 5:6(“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4.48 신명기 6:5.
4.49 레위기 19:18과 갈라디아서 5:10.
4.53 갈라디아서 5:14. 정경 본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이며,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너희 안에서”(in uobis)라고 한다.
4.55 dispendium(손실)과 compendium(요약, 줄임)은 말놀이다. ‘적대자’는 마르키온이 창조주의 적대자로 내세우는 사도를 가리킨다.
4.57 갈라디아서 6:2. 개역개정의 “그리스도의 법”을 lex의 다른 용례와 맞추어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율법이 레위기 19:18의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논증한다.
4.58 proximum tibi와 4.57의 proximum sibi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Pamelius는 각각 tuum, suum으로 고쳤다.
4.59 갈라디아서 6:7. 개역개정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가 잘못 생각한다”(erratis)이다.
4.60 갈라디아서 6:7 뒷부분.
4.61 갈라디아서 6:9 앞부분과 6:10.
4.63 갈라디아서 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4.64 갈라디아서 6:9 뒷부분과 전도서 3:1. 테르툴리아누스는 전도서의 저자를 Ecclesiasticus라고 부르는데, 이는 집회서(Ecclesiasticus)가 아니라 전도서를 가리키므로 “전도자”로 옮겼다.
4.65 갈라디아서 6:14.
4.66 conuersatio는 세상에서의 생활 방식을 뜻한다. transfigimur(꿰뚫리다)는 십자가에 못 박힘의 표상을 이어받는 표현이다.
4.67 첫 문장 persecutores uocat Christi는 Kroymann이 삽입으로 의심하여 [ ]로 묶은 것이며,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어 “그들을 ... 라고 부른다”로 옮겼다. 이어지는 부분은 갈라디아서 6:17이며, 개역개정의 “예수의 흔적”이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다. putatiua caro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겉보기뿐인 것으로 보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을 겨냥한 말이다.
- 5 본문으로
5.1 “앞의 편지”는 마르키온의 순서에서 첫 편지인 갈라디아서이다. 여기서부터 고린도전서를 다룬다. titulus는 편지 첫머리의 발신인·수신인·인사 부분을 가리키므로 “머리말”로 옮겼다.
5.2 salutem praescribere는 라틴어 편지의 관용적 첫인사 salutem(dicit)을 적는 것을 말하며, “안녕”으로 옮겼다. 바울은 그 자리에 “은혜와 평강”을 쓴다(고린도전서 1:3).
5.3 줄표 안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유대인의 인사말 샬롬(평강)을 가리킨다. destructori는 R의 읽기이고 M은 destructore이다.
5.4 로마서 10:15; 이사야 52:7. maturi(때에 맞는)는 그리스어 ὡραῖοι를 옮긴 말이며, 개역개정은 “아름답도다”로 옮긴다. euangelizatur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uangelizator(복음 전하는 자)이다. praeferendam은 평강을 인사말 앞자리에 내세운다는 뜻으로 보았다.
5.5 haec는 앞의 은혜와 평강을 가리킨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로부터”는 고린도전서 1:3의 인사말이다. sacramentum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계를 가리키며 “신비”로 옮겼다. “공통된 이름들”은 마르키온파와 정통 교회가 함께 쓰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ex accidentibus는 이름에 덧붙어 그 대상에게 실제로 따르는 속성들을 말한다.
5.6 deu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주)이다.
5.8 <도>는 Kroymann이 보충한 et를 옮긴 것이다. “선포한 이”는 이사야를 통해 평강을 미리 선포한 창조주를 가리킨다(5.4 참조).
5.10 “백성”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본성을 외면함”은 자연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인류의 죄를 가리킨다(로마서 1:18-27 참조). rebellauera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ebellauerat이다.
5.13 고린도전서 1:18, 24. ait와 adici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aut, aliquid이다.
5.14 고린도전서 1:19; 이사야 29:14.
5.15 deputatam은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eputat이다.
5.16 ecquomodo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t quomodo이다. 마르키온파는 창조주가 다른 신과 그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주장을 근거로 반문한다.
5.17 deum(optimu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이다. 문장 끝의 물음표도 Kroymann이 둔 것이다.
5.18 Kroymann은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생략된 내용을 apud deum optimum alii salutem referunt alii perditionem(지극히 선한 신에게서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어떤 이들은 멸망을 얻는다)으로 보충하여 “그렇지 않다면”을 “지극히 선한 신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으로 이해한다. 이전 판들은 si non creatoris ... multasse?로 이어 읽었다.
5.19 고린도전서 1:20.
5.20 고린도전서 1:21. boni duxit는 그리스어 εὐδόκησεν을 옮긴 말이다. deum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이다.
5.21 이단자들은 고린도전서 1:21의 “세상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다”에서 “세상”을 세상의 주인 창조주로 읽어, 창조주가 마르키온의 신을 알지 못했다는 증거로 삼았다.
5.22 circus, forum, basilica는 로마의 공공장소이다. 바실리카는 재판과 상거래가 열리던 공공 건물이다.
5.23 <안>은 Kroymann이 보충한 in이고(MR1 quam, R3와 이전 판들 quem), <지혜 안에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 sapientia이다. 앞의 sapientia(“지혜를 통해”)는 고린도전서 1:21의 per sapientiam, 곧 인간의 지혜를 가리킨다. “지은 것들”(opera)은 창조된 세계를 가리킨다(로마서 1:20 참조). adcognitus는 M의 읽기이고 R은 agnitus이다.
5.24 고린도전서 1:22.
5.26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질투하는 이)를 라틴 글자로 옮겨 쓴 말이다(출애굽기 20:5 “질투하는 하나님” 참조). retributione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tributione이다.
5.27 “그 이유들”은 고린도전서 1:21에서 사도가 덧붙인 까닭을 가리킨다. Kroymann은 사본 M의 creatori ... intellegendo(이해되지 못한 창조주를 이해시키려고)를 따랐다. R은 creatore ... intellegendo, Oehler는 creatorem ... intellegendum(이해되지 못한 창조주를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으로 읽는다.
5.28 고린도전서 1:23. scandalum을 개역개정에 맞추어 여기서는 “거리끼는 것”, 5.29에서는 “거치는 바위”로 옮겼으나 라틴어로는 같은 낱말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낱말로 두 구절을 잇는다.
5.29 로마서 9:33; 이사야 8:14; 28:16. “그런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는 고린도전서 10:4이다. 마르키온의 본문에도 이 구절이 남아 있으므로, 이사야가 말한 “바위”를 그리스도로 읽을 근거가 마르키온의 사도서 안에 있다는 논증이다.
5.30 고린도전서 1:25. mors dei(하나님의 죽음)는 사본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들은 mors Christi(그리스도의 죽음)이다.
5.31 고린도전서 1:25. hominibus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은 homini, R은 homine이다.
5.32 고린도전서 1:27-28. “곧 참으로 있지 않은 것들”, “곧 참으로 있는 것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덧붙인 풀이이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수난이 실제가 아니라면 바울의 이 대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反)가현설 논증이다. sapientia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sapientiam이다.
5.34 autem iam은 Engelbrecht의 추정이고 M은 aut etiam, R과 이전 판들은 autem etiam이다. “옛것들”은 옛 언약의 제사와 정결 규정을 가리키며, 이어지는 5.35-37에서 열거된다.
5.35 레위기 6:9-18의 번제와 소제 규정 참조. holocaustomatum nidorosorum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holocaustomata idolorum(우상들의 번제)이다.
5.36 그릇과 침상의 정결 규정은 레위기 15:4, 12, 26에 있다. “이미 부끄러워하는 육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욕되게 하는 것”은 할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37 출애굽기 21: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레위기 11:2-44(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5.38 고린도전서 1:27, 29. 줄표 안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했다. aemulatur는 “다투어 애쓰다”라는 뜻과 함께 창조주의 질투(aemulatio)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어서 “질투”로 옮겼다. contrarii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a contrariis이다.
5.39 고린도전서 1:31; 예레미야 9:23-24. deo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F와 Pamelius는 domino(주)로 읽는다. “이것을 명한 이”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 말을 한 창조주를 가리킨다.
5.40 in deo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in deum이다. 창조주가 마르키온의 신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한 적이 없으므로,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라”의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반어이다.
- 6 본문으로
6.1 고린도전서 2:6(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함)과 이사야 29:14, 고린도전서 1:19-20, 27-28을 엮은 문장이다. sapientia mundi는 뒤의 stulta eius(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와 짝을 이루는 중성 복수로 보아 “세상의 지혜로운 것들”로 옮겼다. disponens in salutem은 “구원에 이르도록 경륜한”으로 옮겼다.
6.2 고린도전서 2:7(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 천한 것들 앞의 in은 Kroymann이 보충한 말이어서 <안에>로 표시했다. allegorii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allegoricis로 읽는다.
6.3 이사야 49:6(민족들의 빛)과 이사야 45:3(숨은 보화와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재물).
6.4 egit는 R의 독법이고 M과 F는 legit로 읽는다. ‘그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6.7 고린도전서 2:7의 ante saecula는 개역개정에서 “만세 전에”이다. 6.8-14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saecula를 시간과 날, 달, 해로 짜인 단위로 논증하므로 이 장에서는 saeculum을 일관되게 “세대”로 옮겼다.
6.8 창세기 1:14.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달과 해의 표징이 되리라”(in signa mensium et annorum)이고, 개역개정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이다. 라틴어의 solibus et lunis는 복수형이다.
6.9 organa eorum(시간들의 도구들)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 M과 R은 ortaneorum, R3 여백은 ortum eorum이며, Ursinus는 notas eorum, Oehler는 ordinem eorum을 제안했다.
6.10 고린도전서 2:7의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in gloriam nostram)를 테르툴리아누스는 “우리의 영광을 미리 정했다”는 뜻으로 다룬다. 동사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어서 “그 신”으로 옮겼다.
6.14 Kroymann은 첫 et를 etiam으로 보고 praeministrauit에 연결한다. 이에 따라 “세대들의 중간 기간에도 ... 미리 준비해 두었다”로 옮겼다. proposuisse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profuisse로 읽는다.
6.15 고린도전서 2:8. dominum 뒤의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다. Kroymann은 dominum <eius intellegendum, creatorem, qui gloriae dominum>을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그들의 주인인 창조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창조주가 영광의 주, 곧 다른 신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논증이 된다. Engelbrecht는 huius aeui 뒤에 <malos angelos (siue uirtutes et potestates) creatoris non esse, qui gloriae>를 보충하자고 한다. 단수 crucifixerit는 Kroymann의 수정이며(M과 R1 cruci eum fixerint, R3 cruci confixerint), redigat는 M과 R1의 독법이다(R3 recidas).
6.16 deputanda는 Kroymann이 손상 부호를 붙인 말이다. Kroymann은 cleptanda(감추어 두어야 할)를 추정했고 Engelbrecht는 depalata(드러난)를 제안했다. 전해진 deputanda를 “정해져야”로 옮기고 그 앞에 †를 두었다. ignoratam은 Kroymann이 사본의 ignotam을 고친 형태로, 뜻은 같아 <알려지지 않았던>으로 표시했다. ab omnibus는 M과 R의 독법이고 Rigaltius는 ab hominibus, Engelbrecht는 abominationibus로 고쳤다. dispositiones는 “경륜”으로 옮겼다.
6.17 uirtutes et potestates는 창조주에게 속한 천사적 세력들을 가리키며 “능력들과 권능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고린도전서 2:8이 통치자들에게 무지를 돌리므로, 예수를 알아본 영적 세력들은 이 구절의 통치자들이 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6.18 Kroymann은 사본의 autem을 enim으로 고쳤다. “우리의 복음서”의 시험 기사는 마태복음 4:1-11(누가복음 4:1-13)이며,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누가복음 4:31 이전을 싣지 않아 이 기사가 없다. “공통의 문서”는 마르키온과 교회가 함께 쓰는 누가복음 본문이고, 인용된 장면은 누가복음 4:34(“나사렛 예수여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이다. “그들을”(eorum)은 마귀와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6.19 누가복음 11:21-22. oppressit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obrepsit로 읽는다.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했고, 그는 “그 비유를 마귀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도 마귀가 주를 알았다는 증언이다”라는 뜻의 문장이 빠졌다고 본다. creatoris는 M과 R의 독법이고 Ursinus는 creatorem으로 고쳤다. 두 곳의 dominum(영광의 주)은 사본의 deum을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줄표 안의 삽입구 표시와 crucifixerint(R3 crucifixisse)도 Kroymann을 따랐다. “그의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6.20 누가복음 22:3(사탄이 가룟인 유다에게 들어감). 사본 M은 satanan으로 적는다.
6.21 archontes는 고린도전서 2:6, 8의 ἄρχοντες(통치자들)를 반향하는 그리스어 차용어로,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므로 “관원들”로 옮겼다. 사도행전 4:25-27은 시편 2:2의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사도행전 4:26 “관리들”)을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적용한다. “으뜸 백성”(populus principalis)은 이스라엘이다.
6.22 argumentationes는 Gelenius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argumentatione로 읽는다.
6.24 et deus는 M의 첫 필사자가 여백에 보탠 말이다. “같은 문서”는 창조주의 성경, 곧 구약을 가리킨다.
6.25 이사야 40:13, 고린도전서 2:16(로마서 11:34도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2:16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이다.
6.26 Esaia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Esaias로 읽는다. 고린도전서 3:10(지혜로운 건축자). depalator는 말뚝(palus)을 박아 집터의 경계를 표시하는 사람을 뜻하므로 “터를 잡는 자”로 옮겼다.
6.27 이사야 3:1-3. 칠십인역 3:3은 σοφὸν ἀρχιτέκτονα(지혜로운 건축자)이고 개역개정은 “정교한 장인”이다. “다른 것들과 함께”(inter cetera)는 이사야 3:2-3의 긴 목록을 줄인 말이다.
6.28 numqui non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numquid로 읽는다. 고린도전서 3:10-11(그리스도라는 터).
6.29 이사야 28:16. 개역개정의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와 달리 라틴어는 칠십인역처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이다(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6 참조).
6.31 고린도전서 3:12-15. nostra(우리의)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uestra(너희의)로 읽는다. 불로 심판하는 것을 창조주의 행위로 보는 논증이다.
6.32 고린도전서 3:16.
6.33 창세기 1:26-27(형상과 모양), 2:7(흙과 생기). totus는 Rigaltius의 수정이다(M과 R1 tutus, R3 tuus). Kroymann은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마르키온의 신이 남의 것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면”을 보충해 읽으므로 “그렇지 않다면”으로 옮겼다. 통상본은 si non creatoris sumus templum을 이어 읽어 “우리가 창조주의 성전이 아니라면 마르키온의 신은 남의 것 안에 거한다”는 뜻이 된다. 줄표 안의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을 따랐다.
6.34 고린도전서 3:17. uitiare는 망가뜨리다, 더럽히다의 뜻이며 개역개정은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이다.
6.35 intentau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M, R3, F intentabit, R1 intentabis). 이어지는 인용은 고린도전서 3:18이다.
6.36 고린도전서 3:19.
6.38 욥기 5:13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3:19. 개역개정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이다.
6.39 시편 94:11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3:20. 시편은 “사람의 생각”, 고린도전서는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다. “그 하나님을 위해”(illi)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6.40 고린도전서 3:21.
6.41 예레미야 17:5(개역개정 “무릇 사람을 믿으며 ...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와 시편 118:8(개역개정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 7 본문으로
7.1 고린도전서 4:5. 개역개정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문장의 주어 ipse를 창조주로 읽고, 그리스도를 통해 일한다고 해석한다. “민족들의 빛”은 이사야 42:6,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 등불”은 잠언 20:27과 예레미야 11:20을 합친 표현이다. in lumen nationum(사본 inluminationum, illuminationem)과 quique se(사본 quoque se, se quoque)는 Kroymann의 교정이다.
7.2 고린도전서 4:5 후반부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를 받아, 칭찬하는 이가 벌하는 심판자이기도 하다고 논증한다.
7.3 고린도전서 4:9. 개역개정은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이다. 마르키온파는 mundo를 천사들과 사람들과 별개인 ‘세상의 신’으로 읽었다. 그 해석이 드러나도록 “세상에게, 그리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로 옮겼다. hominibus, quia는 Ursinus의 교정이다(사본 hominibus. qui).
7.4 quomodo는 사본 M과 R1의 독법이고, R3와 대부분의 편집자는 quidnam으로 읽는다.
7.5 dum은 앞 인용을 풀이하는 접속사로 보아 “곧”으로 옮겼다. 천사들이 세상을 섬기고 사람들은 그 섬김을 받는다는 풀이로 ‘세상’을 세상의 신이 아닌 피조 세계로 읽는다.
7.6 반어적인 문장이다. 바울이 ‘세상의 신’을 거슬러 선포했다면 이름을 드러내어 말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복음으로 낳은 아들들은 고린도전서 4:15를 가리킨다. <quem>은 R3의 보충이며 “<그 신을>”로 옮겼다.
7.7 고린도전서 5:1. 바울 자신이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이라고 하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의 단죄가 창조주의 율법(레위기 18:8)이 아니라 이방인도 공유하는 일반 도덕에서 나왔다고 양보한다. secutus sit의 주어는 사도로 읽었다. Kroymann은 displicuisse <ei> illum을 제안했고, Engelbrecht는 이 대목을 삽입구로 표시했다.
7.9 고린도전서 5:5와 5:13. ‘악을 가운데서 제거하라’는 신명기 13:5, 17:7, 22:24 등에 되풀이되는 명령이다.
7.10 고린도전서 5:7. 개역개정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sicut estis azymi(너희가 누룩 없는 자들인 것처럼)로 끝난다.
7.11 고린도전서 5:7 후반부. pascha는 유월절과 유월절 어린양을 함께 가리키므로 “유월절”로 옮기고, 이어지는 7.12의 논증에서도 같은 말을 유지했다. sic는 ‘예표적으로’라는 뜻으로 읽었다.
7.12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가리킨다. pecoris e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et pecoris; Engelbrecht는 et pecoris <et>).
7.13 induit는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은 imbuit(물들였다)이다.
7.14 고린도전서 6:13. ‘성전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이 성전을 위하는 것처럼’이라는 문구는 바울 본문에 없다. Kroymann은 이를 마르키온이 고린도전서 6:19를 바탕으로 자기 본문에 덧붙인 문구로 본다.
7.15 고린도전서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를 받는다. Kroymann은 deus(사본 dominus; Pamelius dominum)와 suscitauit(M; R과 이전 판본은 suscitabit)로 읽고, “하나님이 일으켰고 또 우리를 일으킬 그 이(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몸으로도 일으켰다”로 풀이한다. 번역은 이 풀이를 따랐다.
7.16 고린도전서 6:15. 테르툴리아누스는 ‘몸’을 복수 corpora로 인용한다.
7.18 고린도전서 6:20. 개역개정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이다. magno는 M과 R1의 독법이고, F, R3, Gelenius와 이전 판본은 pretio magno로 읽는다. nullo si는 R3의 독법이다(M과 R1은 nullus in).
7.19 admittenda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eadem mittenda; Pamelius ea committenda). 고린도전서 6:19-20의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를 반영한다.
7.20 고린도전서 6:20. 개역개정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에는 하나님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tollere)는 동사가 더 있어 그대로 옮겼다.
7.21 고린도전서 7:7-11. constantior apostolo(사도보다 더 철저한)는 마르키온의 혼인 금지를 비꼬는 표현이다. <et>는 Pamelius의 보충이다.
7.22 마태복음 5:32, 19:9와 신명기 24:1-2. 마르키온은 혼인하지 않은 자나 혼인 관계를 끊은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제1권 29장).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catechumeni)는 혼인 상태로 남을 수 있었고, 삽입구는 이 점을 비꼰다. repudium ante nuptias는 혼인 자체를 금지한 것을 ‘혼인 전의 이혼’이라고 부른 표현이다. nuptias는 M과 R1의 독법이다(R3와 대부분의 편집자는 nuptae).
7.23 고린도전서 7:10-11. 사본은 Christus이지만, Kroymann은 약어 apls(apostolus)와 xps(Christus)가 혼동되었다고 보고 apostolus로 교정했다. Pamelius는 Christi <apostolus>로 읽었다.
7.24 고린도전서 7:29. 개역개정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이다.
7.25 <a>는 보충된 전치사로, a quo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quod이다. 이 문장은 7.26의 ab eo erit로 이어지므로 “<누구에게서> 오든, ... 그에게서 올 것이다”로 두 단위에 나누어 옮겼다.
7.28 고린도전서 7:39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이방 족속, 특히 블레셋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는 출애굽기 34:16, 신명기 7:3에 있다.
7.29 고린도전서 8:5.
7.31 고린도전서 8:4.
7.32 고린도전서 8:6. creatorem deum non negat는 ‘신이라 불리지만 신이 아닌 자들’과 대비되는 술어이므로 “창조주가 신이라는 것”으로 옮겼고, deus pater는 “하나님 아버지”로 옮겼다.
7.33 <ex quo omnia>는 Latinius의 보충이며 사본과 다른 편집자들에게는 없다. ‘앞에 나온 대목’은 고린도전서 3:21-22이다.
7.34 고린도전서 3:21-22. mundus를 이 장 전체에서 “세상”으로 옮겼으므로 개역개정의 “세계” 대신 “세상”을 썼다.
7.36 고린도전서 9:7. Kroymann은 uiuere와 satis를 묶어 ‘넉넉한 생계를 얻다’로 읽는다. 번역은 이를 따랐다.
7.37 illis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illa; Engelbrecht illic; Pamelius illi). ingratis를 Engelbrecht는 ‘배은망덕한 자들에게’로 옮겼고, Kroymann은 ‘마지못해’로 보는 편이 더 개연적이라고 했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Kroymann에 따르면 opponit(맞세운다)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를 비꼬아 가리키는 말이다. quam destruebat(그가 허물고 있던)도 바울이 율법을 폐했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비꼬는 표현이다.
7.38 고린도전서 9:9, 신명기 25:4.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9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num quid de bobus pertinet ad dominum)에는 ‘주’가 나오고 ‘염려하다’ 대신 ‘상관이 있다’는 표현을 쓴다.
7.39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빠진 말을 ut ostendat scilicet dominum(곧 주가 ... 인자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정도로 추정했다. 탈문 자리는 **로 표시했다. [de]는 Ursinus가 삭제를 제안한 말이며 “[에 관해서]”로 옮겼다. Rigaltius는 et bobus로 읽었다. 인용은 고린도전서 9:10이다.
7.41 고린도전서 9:12, 9:18. potestas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하는 사도의 권리를 가리키므로 “권리”로 옮겼다. ‘값없이 수고하다’는 고린도후서 11:7을 반영한다.
7.42 고린도전서 9:15. gloria는 바울의 ‘자랑’을 가리킨다. ‘다른 이가 그 율법을 쓴다’는 고린도전서 9:12의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에 해당한다.
7.43 고린도전서 10:1-4.
7.44 고린도전서 10:4. Kroymann은 utique creatoris, cuius et populus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extranei sacramenti는 창조주와 무관한 ‘낯선 신비’를 뜻한다. 바울이 창조주의 바위를 다른 신의 신비에 대한 예표로 해석할 이유가 없다는 논증이다.
7.46 고린도전서 10:6. 개역개정은 “그런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이다. ‘나머지 결말’은 고린도전서 10:7-10에서 백성이 우상숭배와 음행과 원망으로 멸망한 일을 가리킨다. autem은 M과 R3의 독법이고, R1과 다른 편집자들은 enim으로 읽는다.
7.48 Kroymann은 de illo와 a quo를 중성으로 읽어, 마르키온의 신이 믿음을 떼어 내려는 바로 그 옛 사건들을 가지고 겁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ngelbrecht는 terret 뒤에 끊고 sibi a quo로 읽는다. <an>은 Kroymann의 보충이고, aduersarius(적수)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번역은 Kroymann의 해석을 따랐다.
7.51 Engelbrecht의 풀이에 따라 si a creatore 뒤에 ‘(그런 일들을) 당하겠는가’를 보충하여 읽었다.
7.52 deus zelotes(질투하는 하나님)는 출애굽기 20:5, 34:14의 칭호이다.
7.53 Kroymann은 ad와 disciplinam 사이에 탈문을 표시하고, confirmandam(확증하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탈문 자리는 **로 표시했다.
7.54 고린도전서 10:11. 개역개정은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세대들의 끝이 우리에게 다다랐다’(fines aeuorum decucurrerunt)이다. ‘서두’는 고린도전서 10:6을 가리킨다.
7.55 paria eorum, quae retractata sunt는 앞선 책들에서 이미 다룬 논점과 같은 내용을 가리킨다. praetereo si는 M과 R3의 독법이고, R1은 praeter eos로 읽는다.
7.56 고린도전서 10:25 “시장에서 파는 것은 ... 먹으라”. opsonia는 시장에서 파는 먹을거리를 가리킨다. expungo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expugno로 읽는다.
7.57 율법의 짐을 지운 창조주가 새 일을 약속했다는 것은 이사야 43:19, 예레미야 31:31 등을 가리킨다.
7.58 창세기 1:29와 9:3. 창조주가 처음에 모든 먹을거리를 주었고, 율법으로 음식 규정을 두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돌려주었다는 논증이다.
- 8 본문으로
8.1 고린도전서 11:3. auctor(창시자)와 8.2의 auctoritas(권위)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놀이다. 남자를 지은 이가 남자에게 권위를 가진다는 논리로,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남자를 지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고 논증한다.
8.3 고린도전서 11:7.
8.4 창세기 1:26. 창조주가 장차 사람이 될 말씀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지었다는 해석은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6에도 나온다. 줄표 사이의 삽입절은 8.5의 인용문까지 이어진다.
8.7 고린도전서 11:8-10. potestas는 고린도전서 11:10의 ἐξουσία에 해당하므로, 개역개정의 “권세 아래에 있는 표”에 맞추어 ‘권세’로 옮겼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지어졌다는 창조주의 제정(institutio, 창세기 2:21-23)에서 그 사도가 너울에 관한 규율(disciplina)의 이유를 끌어낸다는 논증이다.
8.8 고린도전서 11:10.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간 천사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창세기 6:1-2)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처녀들의 너울에 관하여』 7에서도 고린도전서 11:10을 이 이야기와 연결한다.
8.9 마르키온파는 혼인을 금했다(1권 29장). 마르키온파 사람들조차 여자를 탐하지 않으니 그들의 신의 천사들이 여자를 탐할 리 없다는 풍자다.
8.10 고린도전서 11:18-19. ‘악들 가운데 하나의 악’은 이단(haereses)을 육체의 일 가운데 열거한 갈라디아서 5:20을 가리킨다. probabiles는 고린도전서 11:19의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에 해당한다.
8.11 고린도전서 11:23-29. ‘복음서에서 입증했다’는 4권 40장에서 최후의 만찬(누가복음 22:19-20)을 다루며, 빵이 몸의 표상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몸이어야 한다고 논증한 대목을 가리킨다. 여기서 sacramentum은 성례로 옮겼다.
8.12 고린도전서 12:1. Kroymann은 promissa 뒤에 ‘같은 창조주가 실현하기도 했다’는 취지의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Engelbrecht는 Christum <suum>(자기 그리스도에게)으로 고쳐 읽고 결락이 없다고 보았다. 결락 자리에 **를 두었다.
8.13 이사야 11:1-2. Kroymann은 flos 뒤의 de radice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1과 『화관에 관하여』 15에서 이 구절을 ‘가지에서 나온 꽃’으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 곧 ...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로 옮긴다.
8.14 이사야 11:2-3. 칠십인역을 따르는 이 본문에는 ‘경건의 영’(religio, 그리스어 εὐσέβεια)이 들어 있어 영의 종류가 일곱이 된다. 개역개정 11:2에는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만 있다. ualentia는 8.29의 uirtutes(능력 행함)와 짝을 이루므로 ‘능력’으로 옮겼다.
8.15 uirga(가지)와 uirgo(동정녀)의 말놀이로, 가지는 다윗 가문의 동정녀 마리아를, 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1). ‘그는 육신을 입기 전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영이었다’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표현이다. 줄표 사이의 문장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다윗 혈통에서 날 한낱 사람이라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겨냥한다. requiescere는 ‘머물다’와 ‘쉬다, 그치다’를 함께 뜻하여,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문다는 이사야의 말과 유대인들에게서 영의 활동이 그친다는 주장을 잇는다. 그래서 ‘머물러 쉬며’로 옮겼다.
8.16 이사야 3:2-3을 암시한다. 칠십인역은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거두어 갈 이들 가운데 예언자와 모사와 지혜로운 건축자(σοφὸν ἀρχιτέκτονα)를 든다. spirante(숨 쉬다)는 R3의 읽기이며, M과 R1은 sperante로 전한다.
8.17 누가복음 16:16.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로 옮긴다.
8.18 시편 68:18(칠십인역 67:19); 에베소서 4:8. 개역개정 에베소서 4:8은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captiuitas를 ‘죽음 또는 인간의 종살이’로 풀이하므로 추상명사 ‘사로잡힘’으로 옮겼다.
8.19 문구는 시편 68:18(“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보다 에베소서 4:8(“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에 가깝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들’ 대신 ‘사람의 아들들’로 읽는다. data dedit의 어순은 M의 읽기이며 R은 dedit data로 전한다. donatiua는 황제가 병사들에게 내리던 하사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8.21 고린도전서 4:15; 갈라디아서 4:19. 8.20의 ‘사도들의 아들들’을 그 사도가 신자들을 낳은 아버지라는 이 두 구절로 뒷받침한다. absoluta(이루어졌다)는 Kroymann이 M과 R의 absolute를 고친 읽기이며, Engelbrecht는 absoluta est로 읽는다.
8.22 요엘 2:28-29(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3:1-2); 사도행전 2:17-18. 개역개정 요엘 2:28은 “그 후에”로 시작하고 “너희 자녀들이”라고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사도행전 2:17처럼 ‘마지막 때에’로 시작하고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한다. Pamelius는 temporibus를 diebus(날들)로 고쳤다.
8.24 갈라디아서 4:4.
8.25 고린도전서 7:29. in collecto는 ‘모아졌다, 짧아졌다’는 뜻이며, 개역개정은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로 옮긴다. ‘그것을 선포한 이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를 미리 선포한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8.26 고린도전서 12:8-10의 은사 목록을 8.14에 인용한 이사야 11:2-3의 영의 종류들과 짝지운다(8.26-8.30). 그 사도의 말은 개역개정의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에 해당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per spiritum, in eodem spiritu다.
8.30 conspirare(같은 숨을 쉬다, 한뜻이 되다)는 spiritus와 어근이 같아, 한 영을 말하는 그 사도가 예언자와 같은 숨을 쉰다는 말놀이를 이룬다.
8.31 고린도전서 12:12-27; 12:31-13:13. ipsum quod는 Kroymann이 M과 R의 ipsum qui를 고친 읽기로, ‘바로 ...했다는 사실로’라는 뜻이다. merita는 R1 난외의 읽기이며 다른 사본과 대부분의 판본은 meritum으로 전한다. <지체들의>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몸의 지체들 사이에 공로의 우열이 없듯(12:21-25) 은사들도 내세울 공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apostolum은 R3의 읽기이며 M과 R1은 apostolorum으로 전한다.
8.32 누가복음 10:27; 신명기 6:5; 레위기 19:18.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음, 힘, 영혼의 세 항목을 들고, 개역개정 누가복음 10:27은 마음, 목숨, 힘, 뜻의 네 항목을 든다. 그리스도가 인정한 이 으뜸 계명은 창조주의 율법(신명기 6:5)에 있는 계명이다.
8.33 고린도전서 14:21; 이사야 28:11. 그 사도는 이사야의 말을 “율법에 기록된 바”로 인용한다. et si quod는 Kroymann이 M과 R의 quod etsi를 고친 읽기다. alienum(남의)은 창조주가 아닌 다른 신에게 속한 것을 뜻한다.
8.34 고린도전서 14:34-35; 11:5; 창세기 3:16. 고린도전서 14:34의 “율법에 이른 것 같이”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로 읽는다. 마지막 관계절의 quam은 문법상 auctoritas(근거)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마르키온의 사도라면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만 알았어야 한다는 논리에 맞추어 ‘그 율법’으로 옮겼다.
8.35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만을 위해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3권). 이 문장은 그 주장을 따르더라도 은사들이 테르툴리아누스 편에 맞서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사실로 가리자는 뜻이다. an nostrae parti는 Rigaltius의 고친 읽기이며 M과 R1은 a nostrae partis로 전한다.
8.36 고린도전서 14:24-25. ‘마음의 숨은 것들을 드러냄’은 고린도전서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에 해당한다. 여기의 dei spiritus는 humanus sensus(인간의 생각)와 대비되는 신적인 영을 뜻하므로 ‘신의 영’으로 옮겼다.
8.37 고린도전서 14:26. 황홀경(ecstasis)을 정신을 잃은 상태(amentia)로 설명하는 것은 예언하는 자의 탈아 상태를 옹호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4권 22장)와 같다.
8.38 magnis, dicam은 M과 R1의 읽기다. R3은 magnidicam(큰소리치는 여자를), Rigaltius는 magniducam으로 읽는다. Kroymann의 읽기에서 dicam(나는 말하겠다)은 8.39의 조건문을 이끈다. ‘더 거룩한 위대한 여인들’은 혼인을 거부하는 마르키온파 여성들을 비꼬는 말이다.
8.39 regulae(규칙), dispositiones(경륜), disciplinae(규율)는 각각 신앙의 규칙, 창조주의 구원 계획, 교회 생활의 규율을 가리킨다.
8.40 professio는 공적으로 신고하거나 서약한 내용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다. 8.39의 결론을 증서처럼 내놓았으니 누구든 그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 9 본문으로
9.1 앞 장(고린도전서 12-14장의 영적 은사)에서 이어지는 논증이다. Kroymann은 이곳의 장 구분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9.1-9.3은 앞 장의 논증을 마무리한다. 사본 MR의 qui를 Kroymann은 cui로 고치고 pronuntiare 뒤에 est를 보충해 읽는다. 마르키온파는 영의 증거를 내보이지 못하므로 그에게 누구의 그리스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지 밝혀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옮겼다.
9.2 사본 MR은 primordio 뒤에 sit를 두는데 Kroymann은 이를 sic으로 고쳐 9.3의 첫머리로 삼았다.
9.3 사본 MR의 nullum을 Kroymann이 ullum으로 고쳤다. 이단자가 어떤 그리스도를 믿든 그보다 낫다는 뜻으로 옮겼다. nullum으로 읽으면 이단자는 아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9.4 고린도전서 15:12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를 가리킨다.
9.7 Kroymann은 첫 번째 carnis를 삽입으로 보아 [ ] 안에 두었다. 이 경우 사도가 반박하는 대상은 부활 일반을 부인하는 자들이고, 그들이 부인하던 것이 육신의 부활이라는 결론이 문장 끝에서 나온다.
9.8 사본에서는 mortuorum 뒤에 곧바로 mortuum이 이어진다. Kroymann은 필사자의 눈이 mortuorum에서 비슷한 mortuum으로 건너뛰는 바람에 et ‘resurrectionis’가 빠졌다고 보아 <과 “부활”>을 보충했다. Ursinus는 ita와 uocabulum을 삭제하자고 제안했고, Kroymann은 두 낱말을 [ ] 안에 두었다. 9.8-9.10은 “죽은 자들”을, 9.11-9.16은 “부활”을 다루므로 보충된 낱말이 뒤의 논증과 맞아떨어진다.
9.11 resurrectio는 re(다시)와 surgere(일어나다)로 이루어진 말이다. 9.11-9.16의 어원 논증을 살리려고 surgere는 “일어난다”, resurgere는 “다시 일어난다”로 옮기고 명사 resurrectio는 “부활”로 옮겼다. cadere는 “쓰러지다”로 옮겼다.
9.15 창세기 3:19. 개역개정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이다. terra를 9.14에서는 “땅”, 인용과 9.16에서는 “흙”으로 옮겼으며 같은 낱말이다.
9.16 사본 MR의 abit을 Ciacconius의 추정에 따라 cadit으로 읽었다. Kroymann은 어순을 quod in terram ibit, hoc cadit; quod cadit, hoc resurgit(“흙으로 갈 것, 이것이 쓰러지고, 쓰러지는 것, 이것이 다시 일어난다”)로 바꾸어 읽어야 할지 판단을 보류한다.
9.17 고린도전서 15:21. 개역개정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죽은 자의”가 없다.
9.18 고린도전서 15:22. Kroymann은 두 번째 corpore를 sic을 풀이한 주석으로 보아 [ ] 안에 두었다. 사본 MR1의 et를 살려 “그리스도 안에서도”로 옮겼다.
9.19 similitudo는 창세기 1:26의 “모양”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9.18의 “… 것과 같이 …”라는 비교 구문을 가리키므로 “비교”로 옮겼다. 사본의 mortificationis를 Kroymann이 여격 mortificationi로 고쳐, 살림이 죽임과 맞물린다는 뜻으로 읽는다.
9.20 생략된 주어는 사도 바울이다.
9.22 고린도전서 15:25.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inimicos eius sub pedes eius로, 원수들을 발아래 두는 이(하나님)와 다스리는 이(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읽을 수 있다. 이 구별에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보복하는 하나님과, 시편 110:1에서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약속한 하나님을 끌어낸다. ultorem은 사본 MR3의 읽기이고 R1은 cultorem이다.
9.23 시편 110:1(칠십인역·불가타 109:1). 개역개정은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이다.
9.24 시편 110:2.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명령형 대신 3인칭 미래 dominabitur(“다스릴 것이다”)를 쓰고, 끝에 다음 절 시편 110:3(칠십인역 109:3 “통치가 너와 함께”) 첫머리의 tecum이 붙어 있다. 사본 M은 uirtutis, R은 uirtutis tuae이다. Pamelius는 dominaberis(“네가 다스릴 것이다”)로 고쳤다.
9.26 유대인들은 시편 110편을 히스기야에게 적용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위협 앞에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일(열왕기하 18-19장, 이사야 37:14-20, 36-38)을 근거로 삼는다. quia is sederi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qui ait sedit이다.
9.27 시편 110:3의 칠십인역(109:3) “내가 샛별보다 먼저 모태에서 너를 낳았다”를 따른 인용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옮긴 개역개정 110:3(“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과는 전혀 다르다. lucifer는 새벽에 뜨는 샛별(금성)이다. in Ezechi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ante Ezechiam이다. Engelbrecht는 사본의 읽기를 변호하여, 본문이 “낳을 것이다”가 아니라 “낳았다”이므로 그들이 이 구절을 히스기야의 탄생 이전에도 해당한다고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9.28 마태복음 2:2, 9-10(동방 박사들이 본 별), 누가복음 2:8-11(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 누가복음 2:7(구유와 여관)을 가리킨다. “이토록 방대한 저작”은 다섯 권으로 된 『마르키온 반박』 전체, 특히 복음서를 다룬 제4권을 가리킨다. fides는 여기서 복음서의 신빙성을 뜻한다.
9.29 diuersorium은 누가복음 2:7의 “여관”이다.
9.30 사본 MR의 puero(“아이에게”)를 Ciacconius의 추정에 따라 uero(“참된”)로 읽었다. dixisse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edixisset이다.
9.31 이사야 1:2. 개역개정은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이고, 칠십인역은 “내가 아들들을 낳았다”이다.
9.33 사본 MR은 carni deputans ex utero spiritus. quod et ipso hic accedit로 전해져 뜻이 통하지 않는다. Kroymann은 <quod>를 보충하고 spiritui quod ex ipso. his accedit로 고쳐 “모태에서 난 것은 육신에, 그 자신(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영에 돌렸다”는 뜻으로 읽는다. 9.34의 첫머리 his accedit도 이 수정에 따른 것이다.
9.34 시편 110:4. 개역개정은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이다.
9.35 창세기 14:18-20. 아브라함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오므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날 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할례받지 않은 제사장과 할례자의 조상을 대비하려고 아브라함을 circumcisum이라 부른다. accepta는 R의 읽기이고 사본 MF는 acceptat이다.
9.36 로마서 10:20-21(구하지 않은 자들에게 찾아진 하나님)과 로마서 11:26-27(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배경으로 한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일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할례자들을 받아들이고 축복하는 일의 예표로 읽는다. 사본 MR1은 bene에서 끊기고 R3가 bene<dictione>로 보충했다. 이 보충을 <축복>으로 옮겼다. agnituram은 사본 M의 읽기이고 R과 대부분의 판본은 cognituram이다.
9.37 시편 72:1(칠십인역·불가타 71:1). 개역개정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이다.
9.38 시편 72편의 표제는 개역개정에서 “솔로몬의 시”이고 칠십인역에서는 “솔로몬에 관하여”(εἰς Σαλωμων)이다. dicitur는 Engelbrecht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dicetur이다.
9.40 시편 72:6. 칠십인역은 “양털 위에 내리는 비처럼”(ἐπὶ πόκον)이고, 개역개정은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이다. 사본 MR의 descendit를 Kroymann이 칠십인역의 미래형 καταβήσεται에 맞추어 descendet로 고쳤다.
9.42 시편 72:8.
9.44 시편 72:11.
9.45 시편 72:17. 개역개정은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이다.
9.46 시편 72:17. 칠십인역 “해보다 먼저 그의 이름이 머물 것이다”를 따른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이다. sermo dei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겼다.
9.47 시편 72:17. 개역개정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이다.
9.48 9.48-9.49는 시편 72:17-19를 이어서 인용한다. quoni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quomodo이다. quoniam으로 읽으면 “그를 복되다 할 것이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찬송받는다”가 이유 관계로 이어져, 복되다 일컬어지는 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된다.
9.50 열왕기상 11:1-8.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 숭배에 빠진 일을 가리킨다. 라틴어는 단수 mulier를 써서 “여자”로 옮겼다.
9.51 시편 72:9. 개역개정은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이다. 원수들이 발아래 굴복한다는 표현으로 9.22의 고린도전서 15:25와 시편 110:1로 되돌아간다. dispositio는 “경륜”으로 옮겼다. 끝의 creatoris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뜻하며 “창조주에게 속한 이”로 옮겼다.
- 10 본문으로
10.1 ‘따로 한 권’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De resurrectione carnis)를 가리킨다.
10.3 고린도전서 15:29.
10.4 kalendae Februariae는 2월 초하루다. 로마 사람들은 2월에 죽은 조상을 기리는 파렌탈리아(Parentalia) 축제를 지냈고 그 마지막 날(2월 21일)이 페랄리아(Feralia)였다. 2월 초하루에 죽은 자를 기렸다는 기록이 따로 없어서 Kroymann은 kalendae fabariae(6월 초하루, 콩을 바치는 날)로 고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기했으나, Engelbrecht를 따라 ‘2월 초하루’를 2월이라는 달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로 보고 전승된 본문을 유지했다.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를 받는 관습을 이교도가 2월에 죽은 자들을 위해 비는 의례에 견준 말이다.
10.6 ‘세례는 하나뿐’은 에베소서 4:5를 가리킨다. tingi(물에 잠기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세례를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동사다. ‘죽은 것이 몸’이라는 논증은 9.8-10에서 폈다. Kroymann은 줄표 뒤에 ‘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고, Engelbrecht는 결락을 상정하지 않는다. 뒤의 인용은 고린도전서 15:29의 ‘죽은 자들’을 ‘몸들’로 바꾸어 읽은 것이다.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48.11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구절의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을 ‘세례받는 몸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si non quae baptizantur corpora resurgent)으로 풀이하고,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세례(uicarium baptisma)가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10.8 고린도전서 15:35. 10.12에서도 같은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10.10 마르키온은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으므로(제1권 24장), 부활한 몸의 성질을 묻는 문제는 육신의 부활을 인정하는 다른 상대와 다룰 문제라는 뜻이다.
10.13 고린도전서 15:37-41. 고린도전서 15:39의 ‘물고기의 육체’는 언급하지 않는다. caro는 ‘육신’으로 통일하여 개역개정의 ‘육체’ 대신 ‘육신’으로 옮겼고, carnalis와 corporalis는 ‘육신에 속한’, ‘몸에 속한’으로 옮겼다.
10.15 고린도전서 15:42.
10.16 고린도전서 15:42-43. Kroymann은 in corruptela 뒤에 in dedecoratione, in infirmitate, resurgit autem in incorruptelam(욕됨 가운데, 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음으로 다시 살아나며)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전승된 본문만 옮겼다.
10.18 Kroymann은 sicut et granum(낟알과 마찬가지로)이 10.15에서 잘못 끼어든 말이라고 보아 [ ]로 묶었다. Engelbrecht는 sicut et grani로 읽기를 제안한다.
10.19 고린도전서 15:44. 사본(M, R)은 seritur anima(영혼이 뿌려진다)로 되어 있고, Kroymann은 <corpus> anima<le>(영혼에 속한 몸)로 보충했다(Gelenius는 animale). corpus animale는 개역개정의 ‘육의 몸’, corpus spiritale는 ‘신령한 몸’에 해당하지만, 이 단락은 animale와 anima(영혼), spiritale와 spiritus(영)의 어원 관계에 기대어 논증하므로 ‘영혼에 속한 몸’, ‘영에 속한 몸’으로 옮겼다. ‘불릴 수 있는’은 capit(…할 수 있다)를 옮긴 것이다.
10.21 고린도전서 15:46. Kroymann은 인용 뒤에 ‘영혼에 속한 것이 먼저요 그다음에 영에 속한 것이다’(sed quod animale, deinde quod spiritale)가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5:46을 먼저 인용하고, 그 앞에 있는 15:45를 그 사도가 ‘앞서 놓은’ 기초로 이어서 인용한다.
10.22 고린도전서 15:45. 개역개정은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로 옮긴다. anima를 ‘영혼’으로 통일하여 ‘살아 있는 영혼’으로 옮겼다.
10.23 마르키온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아담’을 ‘마지막 주’로 바꾸어 읽었다. 사본에는 si et dominum nouissimum haberet ‘Adam’으로 되어 있으나, Kroymann은 dominum을 [ ]로 묶어 ‘마지막도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으로 읽는다.
10.29 고린도전서 15:47을 마르키온의 본문대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로 옮기지만, 마르키온의 본문은 ‘둘째 사람’ 대신 ‘둘째는 하늘에서 온 주’로 되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0.30-31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빠진 것을 문제 삼는다.
10.31 ‘그’는 마르키온이다. 마르키온의 복음서(누가복음을 잘라 낸 것)에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을 ‘인자’(filius hominis, 사람의 아들)라고 부른다(제4권 10장 참조).
10.32 고린도전서 15:48. 개역개정은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앞 구절에서 ‘사람’을 보충해 읽고, ergo et(그렇다면 이렇게도 된다)로 10.33의 뒷구절에도 ‘사람’을 넣어 읽는다.
10.33 고린도전서 15:48 후반. homo(사람)와 homines(사람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앞 구절과 짝을 맞추어 넣어 읽은 말이다.
10.36 고린도전서 15:49. 개역개정은 미래형 ‘입으리라’(φορέσομεν)를 따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권유형 portemus(지니자, φορέσωμεν)로 되어 있으며, 이 읽기는 많은 그리스어 사본에도 있다. 10.37은 이 차이에 기대어 논증한다. Kroymann은 사본의 ullam을 illam(저)으로 고쳤다.
10.37 ‘옛 사람’은 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를 떠올리게 한다.
10.38 고린도전서 15:50. 개역개정의 ‘혈과 육’을 caro=육신에 맞추어 ‘육신과 피’로 옮겼다. 갈라디아서 5:19-21은 육신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로마서 8:8이다.
10.45 expiatio(속죄)를 Kroymann은 apparatus에서 사후의 정화(in purgatorio)로 설명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에 관하여』 58에서 영혼이 부활 전에 하데스에서 작은 허물까지 갚는다고 말한다.
10.48 고린도전서 15:51-52. in atomo는 그리스어 ἐν ἀτόμῳ(나눌 수 없는 것 안에서)를 옮긴 말로, 개역개정은 ‘순식간에’로 옮긴다. ‘눈이 깜박이는 사이에’는 in oculi momentaneo motu(눈의 순간적 움직임 속에)를 옮긴 것이다.
10.49 고린도전서 15:53. ‘자기 육신을 붙잡고’는 그 사도가 ‘이’(hoc)라고 말하며 자기 몸을 가리켰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줄표로 시작한 삽입은 10.50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까지 이어진다.
10.50 마태복음 22:30, 누가복음 20:36.
10.51 ‘하나님이 그것에게 줄 몸’은 고린도전서 15: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을 되받는다.
10.52 고린도전서 15:50. 10.38에서는 possidebunt(소유하다)로, 여기서는 consequentur(얻다)로 인용한다.
10.53 apud creatorem은 창조주의 성경, 곧 구약을 가리킨다.
10.54 고린도전서 15:54-55, 호세아 13:14. 개역개정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다툼’(contentio)으로 읽는데, 이는 그리스어 νῖκος(승리) 대신 νεῖκος(다툼)로 읽은 본문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47, 51, 54에서도 이 구절을 uictoria 없이 contentio로만 인용하며, Kroymann은 이 대목들을 근거로 uictoria, ubi를 [ ]로 묶었다. mors는 장 전체에서 ‘죽음’으로 옮겼다.
10.55 Kroymann은 per prophetam 뒤에 <Osee>(호세아)를 보충했다.
10.56 고린도전서 15:57. ‘죽음을 조롱하고 개가를 올리는 말씀’은 10.54의 호세아 13:14 인용을 가리킨다. Kroymann은 사본에 없는 <a>(…에게서)를 보충했다.
- 11 본문으로
11.1 고린도후서 1:3. 그리스어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ὁ θεὸς καὶ πατήρ)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benedictus deus domini nostri Iesu Christi)에는 ‘아버지’가 없다. 개역개정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로 옮긴다. Ursinus는 Christi 뒤에 <pater>를 보충했으나 Kroymann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조주가 만물을 축복한 일은 창세기 1:22, 28, 만물이 창조주를 찬송하는 일은 칠십인역 다니엘 3:52-90(세 젊은이의 노래)을 가리킨다.
11.2 Kroymann은 사본의 dei를 deus로 고쳐 sterilis deus를 아무것도 짓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으로 읽고, nullius magis nomine quam creatoris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자비가 풍성하다’는 시편 103:8과 요나 4:2의 표현이다.
11.3 Kroymann은 사본의 exemplo를 exemplum으로 고쳤고, cum ipso의 ipso를 요나 4:2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풀이했다. 그래서 ‘그 칭호 자체와 함께’로 옮겼다. 니느웨는 요나 3:10, 히스기야는 열왕기하 20:5, 아합은 열왕기상 21:27-29, 다윗은 사무엘하 12:13,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한다는 말은 에스겔 33:11이다. indulgens는 사본의 indulger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5 Kroymann은 사본의 et nos를 nos et로 바꾸고, illum을 ‘자비의 아버지’로 풀이했다. 마르키온의 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때(티베리우스 15년, 제1권 19장)부터 그를 ‘자비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 계시 시점부터 이미 그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사본에서 이 문장 뒤에 오던 non potest igitur ... adscribit를 Kroymann은 11.8 자리로 옮겼다.
11.6 posset은 사본의 potest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7 accidens는 사물에 덧붙어 그 사물이 먼저 존재해야 성립하는 속성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로, ‘부수적 속성’으로 옮겼다. ‘자비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이런 속성이므로 그 신의 존재가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11.10 enim은 Kroymann이 보충했다.
11.11 고린도후서 3:6, 예레미야 31:31(새 언약의 약속), 고린도후서 3:3(돌판). Kroymann은 사본의 littera를 litterae(γράμματος)로, etsi를 et si로 고쳤고, eius를 ‘문자의’로 풀이했다. hoc erit nouitas를 삽입구로 표시하고 is를 보충했다.
11.12 요엘 2:28(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은 3: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de meo spiritu는 사도행전 2:17의 형태와 같다. 이어지는 말은 고린도후서 3:6이다.
11.13 신명기 32:39. ‘두 가지 힘’을 입증했다는 말은 제2권에서 창조주의 선함과 정의(심판)가 한 하나님에게 함께 속한다고 논증한 것을 가리킨다. uindicauimus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uindicamus).
11.15 quae는 Rigaltius의 읽기다(사본 qui).
11.16 고린도후서 3:13. uelamen은 개역개정을 따라 ‘수건’으로 옮겼다.
11.17 고린도후서 3:7-11. claritas는 고린도후서 3장의 δόξα에 해당하는 말로, gloria와 구별하여 ‘광채’로 옮겼다.
11.19 고린도후서 3:14.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은 sensus mundi(세상의 생각)로, 그리스어 본문과 개역개정의 ‘그들의 마음’과 다르다. 마르키온파는 ‘세상의’를 세상을 지은 창조주와 연결하여 읽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세상에 있는 백성, 곧 이스라엘로 풀이한다. Kroymann은 non utique에서 11.20의 eorum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11.20 고린도후서 3:14-15. figuram tum은 사본의 figuratum을 고친 Kroymann의 읽기다(Rigaltius는 figuram).
11.21 고린도후서 3:14의 “오늘까지”(adhuc)를 받는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제3권 참조). 그렇다면 모세에게서 아직 가려진 것이 다른 신의 사도인 바울과 상관이 없다는 논증이다.
11.22 apertius는 Kroymann이 고친 읽기다(M opertus, R3과 통용본 operta, Engelbrecht operta sunt). 통용본을 따르면 ‘가려진’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꾸미는 말이 된다. Kroymann의 읽기를 따라 ‘더 드러내어 말하자면’이라는 삽입구로 옮겼다.
11.24 고린도후서 3:16.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ad deum(하나님에게로)으로, 개역개정의 “주께로”와 다르다. intelleget은 사본의 intellegit을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25 Kroymann은 apparatus에서 creatoris를 in Christo와, uelamentum을 dei alterius와 묶어 ‘창조주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의 수건이 어떻게 벗겨지겠는가’로 읽으라고 하고, 어순도 그렇게 고쳐 써야 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번역은 전해진 어순대로 ‘다른 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의 수건’으로 옮겼다. 이어지는 cuius 절의 ‘그 신’은 다른 신이다.
11.26 고린도후서 3:18. qua는 imagine를 받는 것으로 보아 ‘모세도 변화되었던 그 형상’으로 옮겼다. 모세의 얼굴이 주의 영광으로 빛난 일은 출애굽기 34:29-35이다.
11.27 고린도후서 3:18 끝부분.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tamquam a domino spirituum(영들의 주에게서 말미암은 것처럼)으로, 개역개정의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와 다르다. reuelatio는 수건(uelamen)을 벗긴다는 뜻과 계시라는 뜻을 함께 지니며, 여기서는 몸의 수건과 짝을 이룬다.
11.28 고린도후서 4:4를 두고 끊어 읽기의 문제를 다룬다. distinctio는 문장을 어디서 끊어 읽는가를 가리킨다.
11.29 고린도후서 4:4. 마르키온은 ‘이 세상의 신’을 창조주로 읽어 다른 세상에 속한 다른 신, 곧 자기의 선한 신과 대비했다.
11.30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세상의’를 ‘신’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과 연결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눈멀게 했다’로 읽는다. 이레나이우스도 『이단 논박』 3.7.1에서 같은 끊어 읽기를 제시했다.
11.31 고린도후서 4:3.
11.32 이사야 29:13.
11.33 이사야 6:9.
11.34 이사야 7:9와 29:14. 앞의 인용은 칠십인역을 따른 형태로, 개역개정의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와 다르다. 뒤의 인용은 고린도전서 1:19의 형태와 같다.
11.36 Kroymann은 사본의 etsi huius를 유지했다. Pamelius는 non huius(이 세상의 신이 아니라)로 고쳤다.
11.37 Kroymann은 ultro 뒤에 결락을 표시하고, obsim(방해하지)이나 quid detraham(무엇을 덜어내지)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통용본은 contentus uictoriae(승리에 만족하여)로 읽고, Engelbrecht는 결락 없이 ultra로 읽었다. 결락 자리에 **를 두었다.
11.38 Kroymann은 simpliciori를 ‘더 단순한 사람에게’로 풀이하고, 사본의 responso를 responsu로, dominum을 deum으로 고쳤으며, esse를 ‘해도 된다’(licere)의 뜻으로 보았다.
11.39 이사야 14:14, 13.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마귀의 말로 읽는다. superstitio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11.40 고린도후서 4:6. gloriae는 Kroymann이 보충했다. persona는 ‘얼굴’과 ‘인격’의 뜻을 함께 지니며, 고린도후서 4:6의 πρόσωπον과 11.43-45의 시편 인용에 맞추어 ‘얼굴’로 옮겼다.
11.41 창세기 1:3. de는 Pamelius가 보충했고, inluminatione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inluminationem).
11.42 이사야 49:6과 이사야 9:2(누가복음 1:79 참조).
11.43 시편 4:6(라틴어 성경 4:7).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주의 얼굴의 빛이 우리 위에 새겨졌다’로, 개역개정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와 다르다. Kroymann은 M과 F의 복수 respondent를 따랐으므로 spiritus를 ‘영들’로 옮겼다. R과 통용본은 단수 respondet로 읽어 ‘영이 대답한다’가 된다. inquit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11.44 ‘하나님의 얼굴은 주 그리스도다’는 칠십인역 예레미야애가 4:20(πνεῦμα προσώπου ἡμῶν χριστὸς κύριος)에 기댄 표현으로, 개역개정의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와 다르다. ‘그는 형상이다’는 고린도후서 4:4이며, 11.45의 ‘하나님의’까지가 한 인용이다.
11.45 Kroymann은 Christus 뒤의 et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et를 빼면 apostoli는 속격 단수가 되어 ‘사도의 그리스도’로 읽힌다. 번역은 [와]를 남기고 apostoli를 복수 ‘사도들’로 옮겨 사본의 구문을 따랐다. ‘끝 문장’은 11.40에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4:6을 가리킨다.
11.46 『라오디게아인들에게』는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에베소서에 붙은 제목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가 『에베소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받은 편지를 마르키온파가 이 제목으로 부른다고 말한다(제5권 17장 참조). 괄호는 11.48의 ‘분명하다’에서 닫힌다.
11.47 에베소서 2:12. conuersatio는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에 해당하여 ‘시민권’으로 옮겼다. deo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domino). etsi de creatore를 Kroymann은 ‘그 세상이 창조주의 것이라 하더라도’로 풀이했고, 번역은 이를 따랐다.
11.48 deum은 사본의 dominum을 고친 Kroymann의 읽기이고, id est in corporibus도 그가 보충했다. 괄호가 닫힌 뒤의 물음은 고린도후서 4:7을 다룬다.
11.49 고린도후서 4:7. iam은 사본의 nam을, sit는 사본의 sunt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린도후서 4:6의 표현을 받는다.
11.51 고린도후서 4:8-10. mortificatio는 고린도후서 4:10의 νέκρωσις(죽어 감)에 해당한다.
11.52 고린도후서 4:10-1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예수의 생명’ 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11.54 고린도후서 4:18.
11.55 고린도후서 4:16. corrumpi는 개역개정의 “겉사람은 낡아지나”를 따라 ‘낡아지다’로 옮겼다. ‘앞서 말한 수고와 괴로움’은 고린도후서 4:8-9를 가리킨다.
11.56 고린도후서 4:16. non deficiemus는 개역개정의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에 해당한다.
- 12 본문으로
12.1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고린도후서 5:1에 따라 Ita et dissoluto tabernaculo(“그러므로 장막이 무너질 때에도”)를 보충하자고 제안했다. 전해진 속격 terreni domicilii nostri(땅에 있는 우리 거처의)를 그대로 옮겼다. Kroymann의 해설대로 non sic(…라는 뜻이 아니다)는 뒤의 quia절과 이어 읽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손으로 지은 것’, 곧 창조주가 지은 몸이 죽은 뒤 완전히 소멸한다는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부정한다.
12.2 고린도후서 5:2. 사본 MR의 manifestius 대신 Kroymann의 추정 manifestus(est)를 따라 “분명하다”로 옮겼다.
12.3 고린도후서 5:3.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siquidem et despoliati non inueniemur nudi(“벗김을 당하더라도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므로”)로, 개역개정의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와 달리 ‘벗김을 당함’을 명시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벗었던 몸을 부활 때 다시 받는다는 뜻으로 읽는다.
12.4 고린도후서 5:4.
12.5 고린도전서 15:52. ‘첫째 편지’는 고린도전서다. “이미 죽은 이들이다”와 “하나님에게 붙들릴 이들이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사이에 끼워 넣은 해설이다. reprehensi(붙들린)에는 deprehensi(발견된)라는 이문이 있고, 문장 끝 hic.과 다음 단위의 et illi는 Engelbrecht의 읽기를 따른 것이다.
12.6 ‘저들’은 이미 죽은 자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오심 때 살아 있는 자들이다. compendium mortis는 죽음을 단축하거나 생략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를 통해 썩지 않음에 이른다는 의미다. ‘적그리스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요한일서 2:18의 적그리스도와 종말의 환난을 가리킨다. sed mutati(변화된 채로)의 sed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et다.
12.8 고린도전서 15:53.
12.9 <아니다>는 R3의 보충 non을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사도가 “경솔하게 말했다”는 뜻이 되어 문맥과 맞지 않는다.
12.10 고린도후서 5:4.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다”는 개역개정의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에 해당한다. uita praeueniri는 죽음이 오기 전에 생명이 먼저 와서 앞지른다는 뜻이다.
12.11 고린도후서 5:5-8. arrabo(보증)는 개역개정 5:5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5:6의 “몸으로 있을 때에는”을 in carne(육신 안에 있는 동안)로 읽는다. mortis ... praeuentu는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죽음이 먼저 닥치는 경우를 가리킨다.
12.12 고린도후서 5:10.
12.13 cum domino(주와 함께)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cum deo(하나님과 함께)다. 심판대에서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그 전에 이미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12.14 corporalem(몸을 지닌)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 M과 R1은 temporalium, R3과 이전 판본들은 corporum을 읽는다. dispunctio는 회계의 결산을 뜻하는 말로 ‘결산’으로 옮겼다. utriusque sententiae iudicem(두 가지 판결을 다 내리는 재판관)은 상과 벌을 모두 선고하는 재판관이라는 뜻으로, 선하기만 한 신을 내세우는 마르키온에 맞서 심판자가 선함과 정의를 함께 지닌다는 논점을 겨냥한다.
12.16 deus 뒤에 마침표가 찍혀 있지만 si절이 앞 문장의 조건이므로 한 문장으로 옮겼다. per id punitur는 R의 읽기이고, M은 perdit punit, F는 periit punitur다.
12.17 고린도후서 5:17. conditio는 condere(짓다)에서 온 말로 ‘지음’, 곧 피조물을 뜻한다.
12.18 이사야 43:18-19(“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의 성취를 말한다. 이어지는 명령은 고린도후서 7:1인데 개역개정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inquinamentum carnis et sanguinis(육신과 피의 더러움)로 읽으며, 이는 고린도전서 15:50의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를 겨냥한다. Kroymann은 substantiam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non substantiam <negat, sed opera substantiae>, 곧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행위들이다”라는 보충을 제안했다. Migne 판은 substantium으로 읽으며 Engelbrecht가 이를 지지했다.
12.19 고린도후서 11:2. imago(형상)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신부와 신랑에 견주는 혼인의 비유를 가리킨다. 혼인을 금한 마르키온의 신은 그 비유의 실재인 혼인에 적대하므로, 사도가 쓴 이 형상이 그 신과 이어질 수 없다는 논지다.
12.20 고린도후서 11:13. 개역개정의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transfiguratores sui(자기를 가장하는 자들)로만 인용한다. 거짓 사도들이 고발당한 것은 다른 신을 선포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실 때문이라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12.21 고린도후서 11:14. transfigurare se in angelum lucis는 개역개정을 따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로 옮겼다. disciplina는 행실과 생활 규범을, diuinitas는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신성의 문제를 가리킨다.
12.22 deum lucis는 가정된 칭호이므로 ‘광명의 신’으로 옮겼다. 12.22-23은 한 문장이다. 사도가 창조주를 가리켰다면 ‘천사’가 아니라 ‘신’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논리다.
12.24 고린도후서 12:2-4에서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간 일을 말한다. 『낙원에 관하여』(De paradiso)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낙원에 관해 따로 쓴 저술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suus stilus는 이 주제를 다룬 별도의 저술을 뜻한다.
12.25 dispositio는 세상을 짓고 질서 지우는 경륜을 뜻하며, 마르키온의 신이 땅에 속한 것을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는 점을 겨냥한다.
12.26 precario는 남의 허락을 얻어 빌려 쓰는 것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12.27 열왕기하 2:11. 고린도후서 12:2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에 대응한다.
12.28 고린도후서 12:7-8. angelus satanae는 개역개정을 따라 “사탄의 사자”로 옮겼다. angelus는 앞의 ‘천사’와 같은 단어다. colaphizare는 “주먹으로 치다”를 뜻한다.
12.29 누가복음 1: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aemulari는 ‘질투하다’로 옮겼다.
12.30 욥기 2:6과 고린도후서 12:9(“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ipse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사도를 사탄의 사자에게 맡긴 그 신이 욥을 사탄에게 맡긴 창조주와 같은 존재가 아니냐는 반문이다.
12.31 고린도후서 13:1과 신명기 19:15. ‘갈라디아 사람들을 꾸짖은 이’는 율법의 행위를 문제 삼은 갈라디아서의 저자 바울이다.
12.32 고린도후서 13:2, 10. in praesentia는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직접 가 있을 때를 뜻한다. 개역개정 13:10의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 함이라”에 해당한다.
- 13 본문으로
13.1 이 장부터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에서 네 번째 편지인 로마서를 다룬다. quanto는 quanto magis의 뜻으로 보아 ‘마무리되어 갈수록’으로 옮겼다. quaedam uero et tramittenda는 M의 읽기이며, R1은 extra mittenda로 읽는다.
13.2 concessio legis는 율법이 양보하고 물러나는 일, 곧 율법의 효력이 그침을 뜻하므로 ‘율법의 물러남’으로 옮겼다. qui totiens probaueri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quotiens probat uera로 읽는다. <이>는 Kroymann이 보충한 ista를 옮긴 것이다.
13.4 로마서 1:16. 13.5까지 인용이 이어진다.
13.5 로마서 1:16-17과 1:18. 개역개정의 ‘먼저는 유대인에게요’에 있는 ‘먼저’(primum)가 이 인용에는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ex fide in fidem을 율법의 믿음에서 복음의 믿음으로 옮겨 가는 일로 풀이한다. 인용 안의 iustitia dei는 로마서의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의’로, 마르키온의 구분에서 선한 신과 맞세워진 iustus deus는 ‘정의로운 하나님’으로 옮겼다. <하나님의>는 Pamelius가 보충한 dei, <안에>는 R3가 보충한 in이다.
13.7 로마서 2:2. 개역개정은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로 옮긴다.
13.8 ulciscitur의 목적어가 ueritatem이므로 ‘진리를 위해 보복한다’로 옮겼다. 창조주가 남의 신의 진리를 위해 분노할 리 없다는 반어이다.
13.9 foueae(구덩이)는 마르키온이 본문을 떼어 내어 생긴 빈자리를 가리킨다. 이 장의 인용은 로마서 1-2장에서 3:21, 5장, 7장으로 건너뛰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의 로마서에서 큰 부분이 삭제되었다고 본다. auferendo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aut referendo로 읽는다.
13.11 로마서 2:12, 2:14, 2:16. ‘율법 안에서 범죄한’은 개역개정의 ‘율법이 있고 범죄한’에 해당한다. <비록>은 Kroymann이 보충한 etsi를 옮긴 것이며, 이어지는 at도 Kroymann의 추정이다(M과 R은 et hi legem ignorant et). Ciacconius는 ignorantes로 고쳐 읽는다. iudicabi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udicauit로 읽는다.
13.12 로마서 2:16. 개역개정의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에서 ‘나의’(meum)가 이 인용에는 없다. a deo는 Latinius의 읽기이고(M과 R은 adeo), de quo는 Kroymann의 추정이다(M과 R은 dei quod). uindicare는 ‘변호하다’와 ‘보복하다’의 뜻을 함께 지니는데, 주어가 율법과 본성이므로 ‘옹호되다’로 옮겼다.
13.13 ‘진리를 따른다’는 13.7에서 인용한 로마서 2:2를 다시 가리킨다. ‘앞의 문장’(pristinus sensus)은 로마서 2:2, ‘이 문장’(hic sensus)은 로마서 2:16이다. <이것들을> 옹호하기 <위해>는 Kroymann이 보충한 <ad> defendenda <ea>를 옮긴 것으로, ea는 앞에서 말한 율법과 본성을 가리킨다. 사본은 defendenda만 전하며, Engelbrecht는 defendenda <ea>로 보충하고 ea를 진리로 본다.
13.14 로마서 2:21과 출애굽기 12:35-36(3:22, 11: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서 금은 패물을 구해 가지고 나온 일을 마르키온 쪽은 창조주가 사기를 명한 증거로 들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제2권 20장에서 이 비난에 답했다. retorquent의 주어는 마르키온파이다.
13.15 scilicet로 시작하는 반어이다. 사도가 창조주를 떠났다면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뜻이다.
13.16 로마서 2:24. 바울은 이사야 52:5를 인용한다. incessera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gesserat로 읽는다.
13.18 로마서 2:29. 사본의 praeputiationi는 뜻이 통하지 않아 Kroymann이 praeputi. atenim으로 고쳐 읽었고, praeputi는 praeputii(포피의)이다. 13.19의 예레미야 4:4 ‘마음의 포피’에 맞추어 ‘마음의 포피에 행하는 할례’로 옮겼다. ‘율법의 하나님에게서’(apud deum legis)는 마르키온의 신이 아니라 율법을 준 하나님에게서라는 뜻이다.
13.19 예레미야 4:4, 신명기 10:16, 로마서 2:28-29. 신명기 10:16의 라틴어 duricordia는 칠십인역의 σκληροκαρδία(완고한 마음)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로 옮긴다. 두 인용의 circumcidemini는 미래형이나 명령의 뜻이므로 명령문으로 옮겼다. Moysei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moyses로 읽는다.
13.20 로마서 3:21-22를 요약한 문장이다. per fidem Christi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로 옮겼다.
13.21 dispositio는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일을 배열하고 다스리는 계획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3.23 dispositionum은 Pamelius의 읽기이고 M과 R은 dispositio nunc로 읽는다.
13.24 로마서 5:1. 그리스어 사본 사이에 ἔχομεν(가지고 있다)과 ἔχωμεν(가지자)의 차이가 있으며, 개역개정은 ‘화평을 누리자’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monet(권한다)로 받아 권고로 읽는다. numquam은 M의 읽기이고 R은 nusquam으로 읽는다.
13.26 로마서 5:10(‘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을 염두에 둔 문장이다.
13.27 로마서 5:20. subintroiuit(παρεισῆλθεν)는 ‘곁으로 슬며시 들어왔다’는 뜻이어서 ‘슬며시 들어온’으로 옮겼다. 둘째 인용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는 개역개정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를 목적절로 요약한 형태이다.
13.28 로마서 5:21. 라틴어는 in uitam이어서 개역개정의 ‘영생’ 대신 ‘생명’으로 옮겼다. <아래에서>는 Kroymann이 보충한 apud를 옮긴 것으로, 앞의 apud ipsum(그 자신 아래에서)과 짝을 이룬다. aemulus는 질투(aemulatio)와 같은 어근이지만 여기서는 맞서는 경쟁자를 가리키므로 ‘경쟁하는 신’으로 옮겼다.
13.29 갈라디아서 3:22(로마서 11:32 참조), 로마서 3:19, 3:27. 문장 끝의 느낌표는 Engelbrecht의 구두점을 따른 것으로, 마르키온의 해석을 따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는 반어이다.
13.30 ‘뒤따를 문제’는 14장에서 다루는 로마서 8:3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가리킨다.
13.31 로마서 7:4.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는 Kroymann이 『일부일처제에 관하여』(De monogamia) 13장의 같은 인용을 근거로 보충한 per corpus Christi를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뒤따르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있다’의 근거가 문장 안에 없다.
13.32 따옴표 안의 문장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육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est. potest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et potest, Engelbrecht는 et<si> potest로 읽는다. ‘죽음의 법이 선고된 육신’은 창세기 2:17과 3:19에서 사람에게 내려진 죽음의 선고를 가리키며, 여기서 lex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 선고이므로 ‘법’으로 옮겼다. ‘그 몸의 주인’은 로마서 7:4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이다.
13.34 로마서 7:7. 개역개정은 마지막 문장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로 옮긴다. 줄표 사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마르키온에게 하는 말이다. Kroymann은 그 안의 둘째 absit를 후대의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이를 [그럴 수 없다며]로 옮겼다. 이 장에서 delictum은 ‘범죄’, peccatum은 ‘죄’로 옮겼다.
13.35 <없었다>는 Kroymann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보충이 없으면 ‘율법을 통해 범죄가 숨어 있을 수 있었다’가 되어 율법에 대한 찬사가 성립하지 않는다.
13.36 로마서 7:8, 7:11. 개역개정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로 옮긴다.
13.37 로마서 7:12. 인용 안의 iustum은 로마서의 표현이므로 ‘의롭다’로 옮겼다. 13.38에서는 같은 iustus가 마르키온의 ‘정의로운 신’과 ‘선한 신’의 구분에 쓰이므로 ‘정의롭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증은 계명이 iustum이면서 bonum이라는 데 기대고 있다.
13.39 로마서 7:14. spiritalis를 ‘영적’으로, figurata를 ‘예표적’으로 옮겼다.
13.40 율법 안의 예표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논증은 제3권과 제4권에서 길게 전개되었다.
- 14 본문으로
14.1 로마서 8:3. similitudo는 바울 본문에서는 ‘모양’이고, 14.10-14.15의 논증에서는 ‘닮음, 같음’의 뜻으로 쓰인다. 같은 낱말의 두 뜻에 논증이 기대고 있으므로 전체를 ‘모양’으로 통일했다. 마르키온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육신이 환영(phantasma)이라는 근거로 썼다.
14.2 로마서 7:23. lex sensus는 개역개정의 ‘마음의 법’에 맞추었다. supra는 앞선 로마서 7장의 논의를 가리킨다.
14.3 테르툴리아누스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실체는 같은 육신이고 죄만 없는 육신이라는 뜻으로 읽는다. 같은 해석이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16에도 나온다.
14.7 14.7-14.9의 ‘죄 있는’은 라틴어 peccati(죄의)를 옮긴 것이다. 그 사도가 carnis(육신의)에 peccati를 덧붙였으므로 ‘모양’은 실체가 아니라 죄에 걸린다는 논증이다.
14.11 si는 Kroymann이 보충했다. ‘씨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그리스도가 남자의 씨 없이 처녀에게서 났다는 뜻이다.
14.12 MR은 simili sed uera로 읽고, Kroymann은 Latinius를 따라 similis et uera로 고쳤다. 뒷부분 de censu non uero dissimilis는 non 다음에 similis를 보충하고 uero를 ‘오히려, 그러나’로 읽어 ‘기원으로는 비슷하지 않고 오히려 다르다’로 옮겼다. 앞 문장의 ‘씨에서 난 것은 아니다’와 맞는 읽기다.
14.15 로마서 8:8-9(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을 가리킨다. 그 사도가 ‘육신 안에 있지 않음’을 ‘육신의 일 안에 있지 않음’으로 풀이한다는 것이 논거다.
14.16 고린도전서 15:50. 이 구절은 앞의 10장에서 길게 다루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 8장의 ‘육신 안에 있지 않음’을 근거로, 이 구절도 육신의 실체가 아니라 육신의 일을 정죄한다고 읽는다.
14.17 quia는 R3에서 보충되었다. conuersatio는 ‘생활, 행실’이다.
14.18 로마서 8:10. 이 절에서 iustitia는 성경 본문의 ‘의’로 옮겼다. 줄표 사이의 삽입은 Kroymann이 표시했다. 사본에 빠진 부분은 Ursinus가 ‘분명히 의 때문에 생명이 올 것이다’(ei utique obueniet uita propter iustitiam)로 보충했다. 보충을 따르면 문장은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면, 죄 때문에 죽음이 닥친 쪽, 곧 몸에게 분명히 의 때문에 생명이 올 것이다’가 된다.
14.19 alii quid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alicui다. 쉼표는 Kroymann을 따라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인 이상, 몸들의 부활’로 끊었다. 이전 판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몸들의 부활인 이상’으로 끊었다.
14.20 로마서 8:11. 사본 MR1은 uiuificauit(살렸다)이고 R3의 uiuificabit(살릴 것이다)를 따랐다.
14.21 두 번의 aliquid(어떤 것)는 Kroymann이 사본의 aliud(다른 것)를 고친 것이다.
14.22 nostra(우리의)는 R의 읽기이고 M은 uestra(너희의)다.
14.23 로마서 10:2.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 8:11에서 곧바로 10:2로 넘어가며, 그 사이를 ‘잘려 나간 성경의 아주 넓은 낭떠러지’라고 부른다.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로마서 9장 전체를 포함한 이 부분이 빠져 있었다는 뜻이다. zelus는 이 책에서 대개 하나님의 ‘질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로마서 10:2의 ‘열심’을 옮겼다. ‘자기들의 하나님’(sui)은 유대인들이 열심을 낸 대상이 그들이 아는 창조주라는 뜻이다.
14.24 로마서 10:3.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이지만, 마르키온의 본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deum ignorantes)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Kroymann). 14.25의 이단자의 논증이 이 읽기에 기대고 있다.
14.25 로마서 10:4.
14.26 dispositiones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뜻한다. ‘율법에 완성을 세워 줄 그리스도’는 14.25의 ‘율법의 마침’(finis legis)을 완성의 뜻으로 받는다.
14.28 이사야 1:3. Gelenius는 populus 뒤에 meus(나의)를 보충했다.
14.29 마태복음 15:9, 이사야 29:13. 이어지는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모였다’는 시편 2:2다.
14.31 ‘자기들의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유대인들이 알 수 없던 신을 몰랐다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으므로, 그 사도가 꾸짖은 무지는 창조주에 대한 무지라는 논증이다.
14.32 로마서 11:33. Kroymann은 마르키온의 사도서에 이 절이 줄어든 형태로 있었다고 본다. 개역개정의 ‘지식’과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가 빠져 있다. 사본의 inuestigabiles는 in-을 부정 접두사로 읽어 ‘찾을 수 없는’으로 옮겼다. Pamelius는 ininuestigabiles로 고쳤다.
14.33 ista는 Ju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irae(분노의)다. ‘앞에서 펼쳐 읽어 온 성경’과 ‘위에서 풀이했던 신비’는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빠진 로마서 9-11장의 구약 인용과 이스라엘에 관한 논의를 가리킨다.
14.34 Ursinus는 erasit 앞에 non을 넣어 ‘지우지 않았다면’으로 읽었다. Kroymann은 사본대로 ‘지워 버렸다면’을 유지했다. ‘남의 영역으로 내려온 자’는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 내려온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14.35 사본 MR1은 apostolus(사도)이고, R3와 이전 판본들은 opes(재물)로 읽었다. Kroymann은 apostolus를 유지하고 ‘사도도 창조주의 것이고, 부요도 창조주의 것’으로 해석한다.
14.36 이사야 45:3.
14.38 ‘이것은 이사야의 말’은 앞 문장의 보화가 열렸다는 표현이 이사야 45:3에서 왔다는 뜻이다. instrumentum은 문서, 책이다.
14.39 로마서 11:34, 이사야 40:13. eius는 R3에서 보충되었다.
14.40 로마서 11:35. Kroymann은 14.39-14.40의 인용을 이사야 40:13-14와 연결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4.38에서 이 인용을 이사야의 책에서 온 것으로 소개한다.
14.41 로마서 12:9. 사본 M의 여백에 첫 필사자가 antifrasin(반어)이라고 적었다. ‘창조주에게는 물론 다른 말이 있다’는 반어로, 이어지는 구약 인용이 같은 내용임을 드러낸다. 14.43-14.44의 ‘같은 것이 아니다’도 같은 반어다.
14.42 고린도전서 5:13(신명기 17:7; 21:21)과 시편 34:14(라틴어 시편 33:15).
14.43 로마서 12:10.
14.44 레위기 19:18, 로마서 12:12, 시편 118:8-9(라틴어 117:9).
14.45 로마서 12:12와 시편 20:1(라틴어 19:2). habes psalmum(그대에게 그 시편이 있다)은 Engelbrecht가 후대의 덧붙임으로 보아 [ ]로 묶었다.
14.46 로마서 12:14. ‘만물을 축복으로 지은 이’는 창세기 1:22, 28에서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복을 준 것을 가리킨다.
14.47 로마서 12:16과 이사야 5:21(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adsectantes는 M의 읽기이고 R은 assentantes다.
14.48 로마서 12:17과 스가랴 7:10.
14.49 로마서 12:19, 신명기 32:35.
14.50 로마서 12:18. hominibus는 Pamelius가 두 사본 전통을 합쳐 omnibus hominibus로 읽은 것이다. talio(동해 보복)는 출애굽기 21:24의 ‘눈은 눈으로’ 규정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2권 18장에서도 이 규정이 보복을 허락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복을 두려워하게 하여 해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논한다.
14.51 로마서 13:9, 레위기 19:18. conclusit는 로마서 13:9의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ἀνακεφαλαιοῦται)에 해당하여 ‘요약했다’로 옮겼다.
14.52 supplementum은 로마서 13:10의 ‘율법의 완성’(πλήρωμα)을 받는다. 14.52-14.53은 반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계명이 율법 자체에서 나왔으니, 마르키온의 신이 율법의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조롱이다.
14.53 Christi autem non est creatoris는 ‘그리스도의 것은 창조주의 것이 아니다’라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가정으로 세운 것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의 계명으로 완성된다면 그 전제는 스스로 무너지므로 더 다툴 것이 없다는 논증이다.
14.54 마태복음 5:17. 이 구절은 마르키온이 받아들인 누가복음에는 없다. non은 Engelbrecht가 보충했다. Ponticus(폰토스 사람)는 폰토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사본 MR은 Pontus이고, Ponticus는 R1의 여백, Pamelius, Rigaltius의 읽기다. Engelbrecht는 laborauit(애썼다) 대신 laborabit(애쓸 것이다)를 선호했다.
14.55 로마서 14:10. clausula(끝맺는 대목)는 마르키온의 로마서 끝부분을 가리킨다. 오리게네스(루피누스 라틴어 역 『로마서 주석』 10.43)는 마르키온이 로마서 14:23 이후를 모두 잘라 냈다고 전한다. promerendum은 ‘호의를 얻어야 할, 은혜를 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 15 본문으로
15.1 15장은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로마서 다음에 오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다룬다.
15.2 데살로니가전서 2:15. 개역개정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로 되어 있어 “자기”가 없다. 15.5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suos(자기)를 마르키온이 덧붙인 말로 본다. 후대 비잔틴 계열 그리스어 사본에도 τοὺς ἰδίους προφήτας(자기 예언자들)라는 읽기가 있다.
15.4 laesus는 ‘손상, 피해’를 뜻하는 명사(= laesura)로 보아 ‘피해’로 옮겼다. Kroymann은 이 낱말이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삽입일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 낱말이 없으면 ad quem pertinet의 주어는 ‘불의’가 되어 ‘그 불의가 관계되는 이’가 된다. exprobrabit는 Junius의 교정이다(사본 exprobrauit).
15.7 status는 수사학 용어로 논쟁의 쟁점을 뜻한다. 여기서는 주와 예언자들을 함께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 죄를 가중하려는 논법이라는 뜻이어서 ‘죄를 가중하는 논법’으로 옮겼다. es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5.8 impietatem은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impietates). aequauit와 exaggerauit의 주어는 다른 신의 사도로 상정된 바울이다. 두 신에게 각각 저지른 죄는 서로 대등하게 나열될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15.9 deum은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dominum, ‘주’).
15.10 데살로니가전서 4:3. agnoscere es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agnosceres). 15.10의 줄표부터 15.12 끝의 줄표까지를 Kroymann은 삽입구로 표시했고, 번역에서도 줄표로 표시했다. stuprum은 개역개정 4:3의 ‘음란’에 맞추어 옮겼다.
15.11 데살로니가전서 4:4-5. uas(그릇)는 그리스어 σκεῦος를 옮긴 말이며, 개역개정은 4:4에서 이를 ‘자기의 아내’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그릇을 혼인 안에서 존귀하게 다루어야 할 몸으로 읽는다(15.13).
15.12 luxuriae -: es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luxuria est). 그는 15.13 첫머리 est의 생략된 주어를 15.10의 sanctitas(거룩함)로 보며, 번역도 15.13의 주어를 ‘그 거룩함’으로 옮겼다. 다른 읽기로는 lex uxoria est(Latinius), <lex naturae> luxuriae est(Oehler), <sanctitas> luxuriae est(Ursinus)가 있다.
15.13 quaque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quoque). contraria는 M과 R3의 읽기이고 R1은 non contraria로 되어 있다.
15.14 ‘다른 거룩함, 곧 더 온전한 거룩함’은 절제와 동정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동정을 혼인보다 높이 두면서도 혼인 자체를 금하는 마르키온의 입장을 반박한다.
15.15 dei nuptiarum은 하나님에게 속한 혼인, 곧 창조주가 제정한 혼인을 뜻한다고 보아 ‘하나님의 혼인’으로 옮겼다. 마르키온은 세례 받는 이들에게 혼인을 금했다. 인용은 데살로니가전서 4:15-17이다. aërem은 Pamelius의 교정이다(사본 aere).
15.16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갈라디아서 4:26을 따른 표현이다.
15.17 이사야 60:8. 개역개정은 비둘기가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모습으로 옮겼으나,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칠십인역(ὡσεὶ περιστεραὶ σὺν νεοσσοῖς ἐπ' ἐμέ)을 따라 ‘새끼들과 함께 나에게’로 되어 있다.
15.18 praeparabit는 Engelbrecht의 교정이다(사본 praeparauit). 다음 인용은 아모스 9:6이다. 사본은 Osee(호세아)로 되어 있고 Junius는 Amos로 고쳤으나, Kroymann은 이 책의 다른 대목에 있는 같은 혼동을 근거로 사본 읽기를 유지한다. 번역은 사본대로 ‘호세아’로 옮겼다.
15.19 아모스 9:6. 개역개정은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은 ὁ οἰκοδομῶ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ἀνάβασιν αὐτοῦ(하늘로 자기의 올라가는 길을 세우는 이)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ascensum도 이를 따른다.
15.21 데살로니가전서 5:19-20. 개역개정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이다. nihil haberi(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다)는 그리스어 ἐξουθενεῖτε를 직역한 말이어서 직역을 살렸다.
15.22 destruit의 주어는 다른 신의 사도로 상정된 바울이다. 마르키온의 전제대로라면 그 사도는 창조주의 영과 예언을 이미 꺼뜨리고 무효로 만든 셈이므로, 그것들을 소멸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금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ipse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nihil). Gelenius는 destruit를 destruxit로 고쳤다.
15.24 ‘마음에 숨은 것들을 드러내며’는 고린도전서 14:25, ‘신비들을 풀어 설명하기’는 고린도전서 14:26을 반영한다. prouocaturos는 R3의 읽기이다(M, R1 prouolaturos).
15.25 secundum ipsum의 ipsum은 창조주로 보아 ‘창조주를 따라’로 옮겼다.
15.26 영이 일한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2:11을 반영한다. promissio celebratur는 약속된 영의 은사가 교회에서 실제로 행해진다는 뜻으로 보아 ‘약속도 이루어진다’로 옮겼다. qui는 R3의 읽기이다(M, R1 quod).
15.27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은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 흠 없게 보전되기를”의 순서이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영과 몸과 영혼’의 순서로 인용한다. 구원을 비는 바울의 기원(uotum)에 몸이 포함되므로 육신도 구원받는다는 논증이다. in nobis substantias는 Zahn의 교정이다(사본 in nouis substantiis). salutificatoris는 R3의 읽기이다.
15.29 [et]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어서 ‘[또한]’으로 옮겼고, <autem>은 그의 보충이어서 ‘<그런데>’로 옮겼다. 영혼도 그 나름의 성질을 지닌 몸이라는 견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영혼에 관하여』에서 자세히 논한다.
15.31 cum quae는 R3의 읽기이고(M, R1 cumque), nomine는 R의 읽기이다(M nominatur). 이 구절에서는 ‘몸’이 영, 영혼과 나란히 따로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육신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 16 본문으로
16.1 16장은 데살로니가후서를 다룬다. 인용은 데살로니가후서 1:6-8이다. utriusque meriti(두 가지 공과)는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벌을 함께 가리킨다. reuelatione는 R의 읽기이다(M reuelationem). 1:8의 in flamma ignis(ἐν πυρὶ φλογός)는 ‘타오르는 불 가운데’로 옮겼다.
16.2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데살로니가후서 1:8의 ‘타오르는 불 가운데’를 지웠다. extinxit(껐다)는 불이라는 낱말을 지운 일을 불을 끈 일에 빗댄 말놀이이며, 16.3의 lucet(빛나다)도 같은 비유를 잇는다. nostratem deum은 ‘우리 편의 하나님’, 곧 정통 교회가 섬기는 창조주를 뜻한다.
16.3 데살로니가후서 1:8-9. 개역개정 1:9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이다.
16.4 crematoris(불사르는 이의)와 creatoris(창조주의)는 소리가 비슷한 말놀이이다. 둘째 [est]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어서 ‘[이다]’로 옮겼다. ethnici는 이방인들을 뜻한다.
16.5 Kroymann은 여기에 탈문이 있다고 보고 deum ignorantes, id est ethnicos, seorsum(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따로, 또)을 보충할 것을 제안한다. 데살로니가후서 1:8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나누어 든다.
16.6 마르키온의 신은 창조 세계를 통해 알려지지 않고 복음으로만 계시되었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겨냥한 논증이다.
16.8 ignorari는 M의 읽기이다(R ignorare).
16.9 데살로니가후서 1:9; 이사야 2:10, 19, 21. ‘땅을 부수려고 일어나는’은 칠십인역 이사야 2:19, 21의 ὅταν ἀναστῇ θραῦσαι τὴν γῆν을 따른 표현이다. Esaiae et ex ipsa causa는 Kroymann의 교정이며, 그는 ipsa를 eadem(같은)의 뜻으로 보아 이에 따라 ‘같은 이유로’로 옮겼다(사본 Esaiae, ex ipsa causa).
16.10 데살로니가후서 2:3-4. consessurus는 Pamelius의 교정이다(사본 consecuturus). religio는 개역개정 2:4의 ‘숭배함을 받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어서 ‘숭배’로 옮겼다.
16.11 요한일서 4:1-3과 요한일서 2:18 참조. soluentes Iesum(예수를 해체하는)은 요한일서 4:3의 고대 라틴어 역본과 일부 그리스어 전승의 읽기 λύει τὸν Ἰησοῦν을 따른 표현이다(개역개정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scilicet in deo creatore는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ueteres ac nouae prophetiae는 ‘옛 예언과 새 예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작품의 제3권 24장(novae prophetiae sermo)과 제4권 22장(in causa novae prophetiae)에서 ‘새 예언’이라는 말로 몬타누스 운동의 예언을 가리킨다.
16.12 enim은 Ursinus의 보충이다. nescio ne는 ‘혹시 ...가 아닐까 싶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위해 장차 올 것이라고 보았으므로, 그의 체계에서는 이 ‘죄의 사람’이 창조주의 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논리이다.
16.13 데살로니가후서 2:9. quisquis는 Latinius의 교정이다(사본 cuiusquis).
16.14 데살로니가후서 2:10. 개역개정은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이다. ut salui essent를 목적절로 보아 옮겼다.
16.15 데살로니가후서 2:11-12. <in>과 <credant mendacio, u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정경 본문은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πέμπει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ἐνέργειαν πλάνης)이나, Kroymann은 마르키온의 사도서가 καὶ διὰ τοῦτο ἔσται αὐτοῖς εἰς ἐνέργειαν πλάνης(그리고 이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가 될 것이다)로 되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경우 ‘하나님이 보낸다’는 주어가 마르키온의 본문에 없었던 셈이다.
16.16 est secundum creatorem은 Migne 판의 읽기이다(사본 et secundum creatorem, Ursinus est secundum nos et).
16.17 eas는 Oehler의 교정이며(사본 ea, Pamelius ex), 진리와 구원을 가리킨다. 진리와 구원이 멸시받은 것을 미혹을 보냄으로써 갚는다는 뜻이다. decipere(속이다)와 cepit(사로잡았다)는 같은 어근을 이용한 말놀이이다.
16.18 라틴어 본문의 antiohristus는 antichristus의 오자이다.
16.19 summittat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다.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죄의 사람’으로 볼 경우, 마르키온의 신이 자기 진리를 멸시한 자들을 벌하려고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보내는 셈이 된다는 반박이다.
16.20 si는 Migne 판의 보충이다(Ursinus sed <si> et, Oehler at si et). consentit의 주어는 마르키온이고, illi는 마르키온의 신을, ab eo는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 불법한 자를 죽이는 주를 가리킨다. illi는 R3의 읽기이다(M, R1 illis).
16.21 suum은 R3 여백의 읽기이다(M, R summum).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질투하는 이)를 라틴 문자로 옮긴 말이다(출애굽기 20:5 ‘질투하는 하나님’ 참조). desultores는 신앙을 버리고 떠나는 자들을 뜻하여 ‘변절하는 자들’로 옮겼다.
16.22 instrumentum은 법적 증거 문서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마르키온이 내세우는 단 하나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16.23 uindicta는 ‘응징’으로 옮겨 ultio(‘보복’)와 구별했다.
16.24 데살로니가후서 3:10; 신명기 25:4(고린도전서 9:9에도 인용됨).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의 노동 명령을 신명기 율법을 준 창조주의 가르침으로 연결한다.
- 17 본문으로
17.1 마르키온의 바울 서신 모음(Apostolikon)에서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의 진리(ecclesiae ueritas)에 따라 이 편지의 수신자를 에베소인들로 본다. 골로새서 4:16이 언급하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마르키온의 제목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다.
17.2 “제목마저”(et titulum)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 MR은 ei titulum(“그것에 제목을”)이다. gestit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완료형 gestiit(“하려 했다”)이다.
17.4 에베소서 1:9-10. secundum boni existimationem(“선한 판단에 따라”)은 그리스어 εὐδοκία(개역개정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에 해당한다. “다시 머리 아래로 모으는 일”은 recapitulare를 옮긴 것으로, 그리스어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개역개정 “통일되게 하려”)의 직역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처음으로 되돌리다” 또는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다”로 풀이한다. adimpletio는 “충만”으로, 개역개정의 “때가 찬 경륜”에 해당한다. “<과 그 충만>”은 Engelbrecht의 보충 adimple<tio et adimple>tionis를 옮긴 것이다. 사본 MR은 adimpletiones, Oehler는 adimpletionis이다. competet는 Pamelius의 수정이고 MR은 competent이다.
17.8 actas(“행해진”)는 Junius의 수정이고 MR은 acta이다.
17.12 에베소서 1:12. <그의>(eius)는 Kroymann의 보충이다. praesperare(“미리 소망을 두다”)는 그리스어 προηλπικότας(개역개정 “전부터 바라던”)에 해당하며, 17.13-14의 논증은 이 “미리”에 근거한다.
17.13 Kroymann은 in deum(“하나님에게”) 대신 in dominum(“주에게”)이 원래 독법일 가능성을 적어 둔다.
17.15 에베소서 1:13.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의 약속의 거룩한 영”(spiritu promissionis eius sancto)으로, 개역개정 “약속의 성령”보다 “그의”가 더 있으며, 17.16은 이 “그의 약속”이 누구의 약속인지 묻는다.
17.16 요엘 2:28(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3:1). 사도행전 2:17도 같은 본문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요엘 2:28은 “만민에게”, 사도행전 2:17은 “모든 육체에”이다.
17.17 <둘 다>는 R3의 보충 <et>(et spiritus et euangelium, “영도 복음도”)를 옮긴 것이다.
17.18 에베소서 1:17의 “영광의 아버지”를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과 연결한다. “올라가며”(ascendens)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노래로 읽는 해석을 반영한다.
17.19 시편 24:10(칠십인역 23:10). dominus uirtutum은 개역개정의 “만군의 여호와”에 해당한다.
17.20 에베소서 1:17의 “지혜의 영”을 이사야 11:2-3과 연결한다. 칠십인역 이사야 11:2-3은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경건, 하나님을 경외함의 영을 열거하며, 이것이 교부들이 말하는 “일곱 영”이다. enumeratur는 Oehler의 수정이고 MR은 enumerantur이다.
17.21 에베소서 1:18.
17.22 이사야 42:19.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내 종들”, “하나님의 종들”로 복수형이며, 개역개정(“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과 문형이 다르다.
17.23 에베소서 1:18. 개역개정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다. hereditas를 에베소서와 시편 2:8(17.24)에서 모두 “기업”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낱말로 두 본문을 연결한다. 개역개정 시편 2:8은 “유업”이다.
17.24 시편 2:8, 이어서 에베소서 1:20-22. 1:21(“모든 통치와 권세 ... 위에”)이 빠져 있다. Kroymann은 마르키온 본문에서 이 절이 갈라디아서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보고, 갈라디아서를 다룬 앞부분(CSEL 47, 581쪽 20행)을 가리킨다. inoperatus est in Christum ualentiam suam은 “그리스도 안에 자기 능력을 역사했다”로 옮겼다.
17.25 시편 110:1(칠십인역 109:1).
17.26 시편 8:6(칠십인역 8:7). 시편의 말을 아버지를 향한 영의 말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이다.
17.28 에베소서 2:1-2. 사본에는 in quibus 앞에 non이 있으며, R3와 Kroymann은 이를 삭제 대상으로 표시했다. 이 부정어를 “행[하지 않]았던”으로 옮겨 괄호 안에 두었다. aeuum mundi huius는 개역개정 “이 세상 풍조”, princeps potestatis aëris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해당한다. filii incredulitatis는 개역개정 “불순종의 아들들”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17.33에서 incredulitas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창조주를 믿지 않는 일로 다루므로 “불신”으로 옮겼다. Pamelius는 aëris 뒤에 <huius>를 보충했다.
17.29 마르키온은 고린도후서 4:4의 “이 세상의 신”을 창조주로 해석했다(제5권 11장).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세상의 시대”의 “세상”(mundus)을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신, 곧 창조주로 풀이할 수 없다고 말한다.
17.34 competant는 Ursinus의 수정이고 MR은 competat이다.
17.35 potitus(“차지하고서”)는 Gelenius의 수정이고 MR은 potius이다. propheta refert는 Junius의 수정이고 MR은 profert et refert이다. obstruere는 “막아 쌓다”라는 뜻으로, 마귀가 불신의 아들들을 창조주 앞에 장벽처럼 세운다는 뜻으로 옮겼다.
17.36 이사야 14:13-14. 라틴어 본문 “내가 구름 속에 내 보좌를 두겠다”는 개역개정 14:13(“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과 14: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를 합친 꼴이다. “다른 곳”은 고린도후서 4:4이다. 제5권 11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절을 “하나님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의 마음을 눈멀게 했다”로 끊어 읽자고 제안했다. 여기서는 마르키온파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읽기를 고집한다면 그 신은 마귀라고 답한다.
17.38 <다고 해도>는 Kroymann이 보충한 <si>를 옮긴 것이다. 이전 판들은 apostolus 뒤에서 문장을 끊는다(“그 사도는 유대교 안에서 살았다. 그가 ... 때문이 아니다”).
17.39 에베소서 2:3 앞부분. habens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habenti이다.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 일은 갈라디아서 1:13, 빌립보서 3:6 참조.
17.40 에베소서 2:3. ira와 iracundia는 “분노”로 옮겼다(개역개정 “진노의 자녀”). filii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가 유대인들을 아들들이라고 불렀다”(출애굽기 4:22, 이사야 1:2 참조)와 연결하므로 “아들들”로 옮겼다. R1은 non iracundiae(“분노의 아들들이 아니었다”)이다. 이전 판들은 “inquit, sed natura. ne”로 끊는다. haereticus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hoc haereticus이다.
17.41 adlectio patrum은 하나님이 조상들(족장들)을 택한 일을 가리키며, 유대인들이 “아들들”인 근거를 출생이 아닌 선택에 둔다.
17.42 reputans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 M은 reputaris, R은 reputari, Ursinus는 reputare이다. <물들게>는 Rigaltius의 보충 <in>fecit(“물들였다”)을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fecit(“만들었다”), Ursinus는 infecit, Pamelius는 suam fecit(“자기 것으로 만들었다”)이다.
17.43 에베소서 2:10. facere(“만들다”)와 condere(“짓다”)는 그리스어 ποιεῖν(“만든 바”)과 κτίζειν(“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첫째를 실체의 창조, 둘째를 은혜에 의한 새 창조로 구별한다(17.45).
17.46 에베소서 2:11-12. conuersatio Israhelis는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개역개정 “이스라엘 나라”)에 해당하며, 17.52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므로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언약들에 대해 나그네”와 “그 약속의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를 이어 읽으며, 17.50의 “약속의 소망”도 같은 읽기를 따른다. praeputiatio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praeputium이다.
17.49 에베소서 2:13.
17.52 nos(“우리가”)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non이다.
17.54 이사야 46:12-13. 라틴어 본문(칠십인역 계통)은 “나에게서 멀리 있던 자들이 내 의에 가까이 왔다”이며, 개역개정(“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과 문형이 다르다.
17.55 에베소서 2:14. 대시 안의 “곧 유대인 쪽과 이방인 쪽, 가까운 쪽과 먼 쪽을”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이다. gentil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R은 gentilem이다. R과 이전 판들은 Iudaicum scilicet populum(“곧 유대 백성”)이다.
17.56 마르키온 본문은 “자기 육신으로” 대신 “육신으로”만 남겨, 이 말을 그리스도가 벽을 허문 수단이 아니라 “적대”를 꾸미는 말로 읽게 했다. 이렇게 하면 육신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아니라 적대를 일으키는 악덕이 된다. “적대라는 말에”(inimicitiae)와 “육신으로”(carne)는 Kroymann의 읽기이며 MR은 carnem이다. non은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했으며 “맞서[지 않]는”으로 옮겼다.
17.57 Marrucine와 Pontice는 호격이다. 카툴루스 12.1은 남의 냅킨을 훔친 아시니우스 마루키누스를 Marrucine Asini라고 부르며, Marrucinus는 이탈리아 중부 마루키니족 출신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출신지 호칭을 바꾸어, 바울 본문의 낱말을 훔친 마르키온을 그의 출신지 폰토스에 따라 Pontice라고 부른다. 출신지를 부르는 호칭의 대구를 살려 “마루키니 사람아”, “폰토스 사람아”로 옮겼다. “앞에서 그의 피는 고백해 놓고”는 17.49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2:13의 “그의 피로”를 가리킨다. sicubi는 MR의 독법이고 Pamelius는 sicuti, Junius는 sic uti이다. dixi는 R3, MR1은 dixit이다.
17.58 17.58-62는 에베소서 2:15-16을 따라가며 해설을 삽입한 한 문장이다. Kroymann은 삽입부를 괄호(여기서는 대시)로 표시하고 주절이 17.62의 ita et(“그렇다면 여기서도”)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sententiis(“선언들로”)는 그리스어 ἐν δόγμασιν(개역개정 “의문에 속한”)에 해당하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마태복음 5장의 그리스도의 선언으로 읽는다. “율법을 성취함으로써”는 마태복음 5:17을 가리킨다.
17.59 출애굽기 20:14과 마태복음 5:27-28. uacat는 더 엄한 계명이 주어지면 이전 계명이 따로 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쓸모없어지다”로 옮겼다.
17.60 출애굽기 20:13과 마태복음 5:21-22. “욕하지도 말라”(nec maledices)는 마태복음 5:22의 “라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에 대한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pote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MR은 potest이다. “만들었던 이가 바로 짓는 이다”는 17.43-45의 facere와 condere 구별을 다시 적용한 것이다.
17.61 에베소서 2:10을 다시 인용한 뒤 2:15-16을 이어 간다. “새롭다는 것은 ...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에서다”의 ut nou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R은 et noue이다. deo, quem은 R의 독법이고 MF는 dei, quem이다. et gentile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et gentilem populum이다. Kroymann은 inquit를 삭제해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cum interfecisset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tum interfecit, sed이다.
17.63 에베소서 2:17-20. et aduenae(“외인도”)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nec aduenae이다.
17.64 마르키온은 에베소서 2:20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에서 “예언자들의”를 지웠다. “주가 교회 안에 사도들처럼 예언자들도 세웠다”는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을 가리킨다. si non timuit(“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면”)는 Kroymann의 읽기이다. MR1은 prophetas. timuit si non, R3와 이전 판들은 prophetas. timuit scilicet(“예언자들을. 물론 그는 두려워했다”)이다. fundamentum은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fundamenta이다.
17.65 에베소서 2:20의 summus angularis는 그리스어 ἀκρογωνιαῖος(개역개정 “모퉁잇돌”)에 해당하며, “맨 위 모퉁잇돌”로 옮겨 시편의 in summo anguli와 연결되게 했다.
17.66 시편 118:22(칠십인역 117:22). 개역개정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이다.
- 18 본문으로
18.1 사본 MR은 manibus haeretici praecidendis(이단자의 손으로 잘라내야 할 것들에 관해)로 읽는다. Kroymann은 mania(그리스어 μανία) haeretici praecidendi로 고치고 miror를 보충했다. 번역은 이 본문을 따라, 여러 쪽을 통째로 빼는 이가 음절 하나까지 손대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는 뜻으로 옮기고 보충어를 <그것이 놀랍다>로 표시했다. Engelbrecht는 보충 없이 사본 본문을 그대로 해석했다.
18.2 에베소서 3:8-9. nouissimo omnium은 개역개정의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에 해당하며, 라틴어 표현에 따라 “모든 이 가운데 가장 나중 된”으로 옮겼다. sacramentum은 신비로, dispensatio는 경륜으로 옮겼다.
18.3 마르키온의 본문은 에베소서 3:9의 전치사 ἐν(in)을 빼서, 신비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한 신, 곧 창조주“에게” 감추어졌다는 뜻이 되게 했다.
18.4 에베소서 3:10. in supercaelestibus는 Gele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insuper caelestibus로 읽는다. principatus et potestates는 개역개정을 따라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옮겼다.
18.6 princeps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위의 우두머리,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principatus(통치자들)와 구별하려고 “우두머리”로 옮겼다.
18.7 첫째 illi(그에게)는 Kroymann이 사본의 illis를 고친 것이고, 둘째 illi는 Rigaltius의 읽기이다(R ille). 사본의 manifestum(분명하다)을 Kroymann은 manifest<at>um(드러났다)으로 고쳤다. 보충된 부분을 <밝히 드러났>으로 표시했다.
18.8 로마서 11:34. 이사야 40:13을 인용한 구절이다.
18.9 mutabit(바꿀 것이다)은 Junius의 수정이고 사본과 이전 편집본은 mutauit(바꾸었다)로 읽는다.
18.12 et(도)는 Kroymann의 보충이다. scriptura는 여기서 마르키온 쪽 본문의 문구를 가리키므로 “본문”으로 옮겼다.
18.13-14 마르키온의 독법대로라면 에베소서 3:10도 신의 지혜가 창조주 “에게” 알려지고 이어서 권세들과 통치자들에게 알려진다고 되어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실제 3:10에는 창조주가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18.15 subtractum constat quod et sic ueritati suae saluum est를 “무엇인가를 빼낸 것이 분명한데, 그 대목은 그렇게 해도 자기 진리를 온전히 지닌다”로 옮겼다. in을 빼더라도 3:10이 이어지는 한 마르키온의 독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았다.
18.16 non uis와 habuisse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은 nouus, habuisset로 읽는다. 마르키온은 예언서를 문자 그대로 읽어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지상의 전사로 보았다. 제3권 13-14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같은 예언 본문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18.17 에베소서 4:8, 시편 68:18(칠십인역 67:19). captiuitas는 포로 상태 또는 포로 무리를 뜻하며, 18.20의 captiuitas spiritalis와 연결되도록 “포로”로 옮겼다.
18.19 시편 45:3(칠십인역 44:4), 이사야 8:4. 개역개정은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로 옮기며, 테르툴리아누스는 uirtutem Damasci(다메섹의 힘)로 인용한다.
18.20 extundis(두들겨 빚어내다)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은 excondis로 읽는다. illius(그의)는 예언자들이 말한 그리스도 또는 그를 보낸 창조주를 가리킨다.
18.21 에베소서 4:25(스가랴 8:16), 에베소서 4:26(시편 4:4, 칠십인역 4:5). 개역개정 시편 4:4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로 옮기고, 칠십인역과 에베소서는 “화를 내라(ὀργίζεσθε)”로 읽는다. 사본에서 sol 뒤에 있던 ut를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18.22 에베소서 4:26b, 5:11, 시편 18:25-26(칠십인역 17:26-27). 시편에서는 하나님에게 하는 말로, 개역개정은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의로운 자와 함께하면 너도 의로울 것이고 비뚤어진 자와 함께하면 너도 비뚤어질 것이다”라는 라틴어 본문을 사람 사이의 사귐에 적용한다. occidat는 R3의 교정이고 사본은 excidat로 읽는다.
18.23 고린도전서 5:13(신명기 17:7 등의 인용), 고린도후서 6:17(이사야 52:11).
18.24 이사야 52:11(개역개정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에베소서 5:18(개역개정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Kroymann은 사본 MF의 dedecore를 형용사 dedecor의 탈격으로 보아 “수치스러운 포도주”로 해석했다. R과 이전 편집본은 dedecori로 읽는다.
18.25 아모스 2:12(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일), 레위기 10:9. dabati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abitis로 읽는다.
18.26 에베소서 5:19, 이사야 5:12. 이사야는 수금, 비파, 소고, 피리를 갖추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여호와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을 책망한다.
18.28 에베소서 5:22-23.
18.29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질서는 창세기 2장의 창조 기사에서 나온다. opus creatoris를 “창조주의 작품”으로 옮겼다.
18.30 statum(위상)은 R의 교정이고 사본은 satum으로 읽는다.
18.31 에베소서 5:23.
18.32 에베소서 5:28-29. 개역개정 5:28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carnem suam(자기 육신)으로 읽는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5:29 끝부분과 5:25를 함께 반영한다.
18.33 에베소서 5:29. 마르키온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했다.
18.34 ut(것처럼)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8.36 ueritate honoris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ueritatis honore로 읽는다. ueritas는 모양(similitudo)에 맞서는 원형, 곧 실재를 뜻하므로 “실재”로 옮겼다. et(와)는 R3의 보충이고, disserente(풀이하다)는 R3의 교정이다. 사본 M은 deferente, R1은 differente로 읽는다.
18.37 창세기 2:24, 에베소서 5:31. propter hanc(이 여자 때문에)는 사본의 독법이며 Pamelius는 hoc(이 때문에)로 고쳤다. 개역개정 에베소서 5:31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이다.
18.38 에베소서 5:32a. 사본은 inter ista로 읽으며, Kroymann은 interim, ista로 고치고 “창조주의 이 말들이 이단자들에게서는 가장 하찮은 신비인데 그 사도에게서는 큰 신비라면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로 해석했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18.39 에베소서 5:32b. habes(그대가 얻는다)는 R1 난외의 독법이고 사본 M과 이전 편집본은 habet(그가 제시한다)로 읽는다.
18.40 <sacra>menti는 R의 독법이고 사본 MF는 menti로 읽는다. 보충된 부분을 <신비>로 표시했다.
18.42 a destruendo(멸망시켜야 할 신에게서)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ad destruendum(멸망시키기 위해)으로 읽는다.
18.43 에베소서 6:1-2.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에베소서 6:2b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를 빼 버렸다고 전한다.
18.44 출애굽기 20:12, 에베소서 6:4. 에베소서 그리스어 본문은 “아버지들아(πατέρες)”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parentes(부모들아)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이다.
18.45 출애굽기 10:2. audisti ... ueteribus dictum은 마태복음 5:21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너희가 들었으나”를 반향한다. 사본 M은 audistis로 읽는다.
18.47 에베소서 6:12. munditenentes는 그리스어 κοσμοκράτορες의 번역이며 개역개정을 따라 “세상 주관자들”로 옮겼다. 마르키온파가 이들을 창조주와 연결하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복수형이므로 창조주가 여럿이 된다고 반박한다.
18.49 에베소서 6:11-12.
18.54 diabolus는 그리스어 διάβολος(중상하는 자)에서 왔다. delatura(중상, 고발)는 이 어원을 겨냥한 말이다. 창세기 3:4-5에서 뱀은 하나님이 사람이 신처럼 될까 봐 나무 열매를 금했다고 말하여 창조주의 의도를 거짓으로 꾸며 말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귀를 타락한 대천사로 본다.
18.55 창세기 2:17, 3:5. arbuscula는 arbor의 지소형으로 “작은 나무”로 옮겼다.
18.56 에베소서 6:12, 개역개정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spiritalia nequitiae를 이 표현에 맞추어 “악의 영들”로 옮겼다.
18.57 창세기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대목을 테르툴리아누스는 천사들의 타락으로 읽는다(『여성의 옷차림에 대하여』 1.2 참조). Kroymann 판 본문의 scandalizaterum은 scandalizatorum(걸려 넘어진)의 오식이며, 같은 판의 비판 장치에는 scandalizatorum으로 적혀 있다.
18.58 에베소서 6:19-20. quo는 R3가 지운 말이며 Kroymann은 이를 [ ]로 묶었다. sibi(자기를 위해)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bi로 읽는다. libertas praedicationis는 에베소서 6:19의 παρρησία(담대함)에 해당하며 “선포의 자유”로, constantia는 “굳센 담대함”으로 옮겼다.
- 19 본문으로
19.1 이 장은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에 있는 골로새서를 다룬다(Kroymann 판의 표제 Ad Colossenses). praescriptio는 소송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막는 법적 항변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단 규정』(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책에서 그는 진리가 앞서고 이단은 나중에 생겼다는 시간 순서로 모든 이단을 반박한다. regula는 신앙 규범(regula fidei)을 뜻하므로 ‘규범’으로 옮겼다. haeresis는 M의 철자이고 R은 haereses로 적는다.
19.2 골로새서 1:5-6.
19.4 Antoniniani Marcionis는 마르키온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재위 138-161년) 때 활동했음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9장에서도 마르키온의 등장 시기를 안토니누스 시대로 잡아 그의 교회가 사도 시대보다 늦다고 논증한다.
19.6 ‘저 하나님의 복음으로’는 탈격 euangelio를 옮긴 것이다. Junius는 대격 euangelium으로 고쳐 읽기를 제안했다.
19.7 시편 19:4(칠십인역 18:5). 라틴어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그들의 소리’, ‘그들의 말’로 복수이며, 개역개정 시편의 ‘그의 소리’, ‘그의 말씀’과 다르다. 바울도 로마서 10:18에서 같은 구절을 복음 선포자들에게 적용한다.
19.8 골로새서 1:15. 테르툴리아누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장면들은 모두 아들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고 아버지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고 본다(제2권 27장, 『프락세아스 반박』 14-15장 참조).
19.9 ‘그’는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보이는 창조주와 보이지 않는 선한 신을 나누는 근거로 이 구절을 쓸 수 있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창조주에 대한 구약의 정의라고 답한다.
19.10 출애굽기 33:20; 골로새서 1:15-16; 요한복음 1:3. 라틴어 primogenitus conditionis는 개역개정 골로새서 1:15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에 따라 옮겼고,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도 개역개정 1:16의 용어를 따랐다. 사본 M과 F는 복수 oportebant로, R과 이전 판들은 단수 oportebat로 적는다. 19.15의 ‘마르키온이 잘라 낸 것들’과 함께 보면, 마르키온의 본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1:15b-16의 진술이 없고 1:17의 ‘그는 모든 이보다 먼저 있다’는 남아 있었다.
19.11 골로새서 1:17.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한 본문은 남성 복수 ante omnes(‘모든 이보다’)이고, 그리스어 πρὸ πάντων은 남성으로도 중성으로도 읽힌다. 그는 이 남성형을 중성 ante omnia(‘모든 것보다’)로 넓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창조주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19.13 autem은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19.14 골로새서 1:19. boni duxit는 그리스어 εὐδόκησεν(‘기뻐하였다’)을 옮긴 표현으로, ‘좋게 여겼다’로 옮겼다. 라틴어 문장에는 주어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재귀대명사 in semetipso 때문에 ‘자기 안에’로 옮겼다. 사본 M과 F는 item, R은 autem이다.
19.15 ‘마르키온이 잘라 낸 것들’은 골로새서 1:16의 창조 진술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의 존재들로 풀이한다.
19.16 ‘우리의 거짓 사도들과 유대적 복음 전도자들’은 반어이다. 마르키온은 바울 서신의 창조주 관련 대목을 유대주의자들이 끼워 넣었다고 주장했으며(갈라디아서 2:4의 ‘거짓 형제들’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고 말한다. edat(‘내놓아 보라’)는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과 R은 et ad로 적는다. 관계사 qui는 문법상 마르키온에게도 걸릴 수 있으나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이라는 내용에 따라 마르키온의 신을 꾸미는 말로 옮겼다.
19.18 골로새서 1:20. uniuersa(‘만물’)는 R1 여백의 읽기이고, M과 R의 본문은 una ipsa로 적는다. cuius nouissime fuerant는 만물이 반역하여 떨어져 나가기 직전까지 창조주의 소유였다는 뜻으로 보아 ‘바로 전까지 속해 있던 이’로 옮겼다.
19.19 conciliari(‘화목하게 되다’)와 reconciliari(‘다시 화목하게 되다’)의 대조를 살리기 위해, 이 장에서 reconciliare는 일관되게 ‘다시 화목하게 하다’로 옮겼다. 다시 화목하게 된다는 말은 이전에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만물과 화목하게 되는 이는 본래 만물을 소유한 창조주라는 논증이다.
19.20 골로새서 1:21; 로마서 1:25(‘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creatori redigit in gratiam은 ‘창조주와의 호의 관계로 되돌린다’는 관용 표현이며, gratia를 은혜로 옮겨 ‘창조주의 은혜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로 옮겼다.
19.21 골로새서 1:24. 사본 M과 R1에는 19.21-19.22의 문장이 약간 다른 형태로 두 번 적혀 있다. Kroymann은 두 번째 형태를 후대 교정자의 손으로 보아 본문에서 빼고, 그 형태에서 per mortem과 ecclesia만 받아들였다. 그는 이 문장을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더라도, 몸이라는 개념을 육신의 실체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분사 transferens를 그 뜻에 맞추어 정동사로 옮겼다.
19.22 골로새서 1:22. 그리스어 본문은 ‘그의 육체의 몸 안에서’(ἐν τῷ σώματι τῆς σαρκὸς αὐτοῦ)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그의 몸 안에서’이며 ‘육체의’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19.23에서 그는 이 몸이 곧 육신이라고 논증한다.
19.23 사본 M과 R은 mori potuit per carnem, mortuus est(‘육신을 통해 죽을 수 있었던 [몸], 그는 죽었다’)로 적는다. Kroymann은 이를 mori potuit, per carnem mortuus et로 고쳐 ‘육신을 통해서 죽었고’가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와 짝을 이루게 했으며, 번역은 이 읽기를 따랐다. ‘몸을 몸과 맞바꾸었다’는 그리스도가 육적인 몸을 내주고 영적인 몸인 교회를 얻었다는 뜻이다.
19.24 골로새서 2:8. 그리스어 본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교묘한 말’(subtililoquentia)을 덧붙인다. elementa는 하늘과 땅 같은 물리적 원소와 글자 및 학문의 기초를 모두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첫째 뜻을 배제하고 둘째 뜻(litterae saeculares, ‘세속의 학문’)을 택하며, 개역개정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옮긴다. 철학이 이단의 원천이라는 논증은 『이단 규정』 7장에 있다. Kroymann은 R3를 따라 nec를 삽입된 말로 보아 괄호에 넣고, 이어지는 nec를 ne로 읽는다. 괄호 안의 말을 빼고 읽으면 마르키온이 에피쿠로스의 신처럼 무감각하여 노하지 않는 신을 내세운다는 뜻이 된다. deum은 F의 읽기이고 M과 R은 dominum으로 적는다.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물질을 세계의 재료로 붙여 준다는 점은 제1권 15장에서도 다룬다.
19.25 cuius는 앞 문장의 철학을 받는다. Kroymann은 ingeniis 앞에 ab를 보충할 가능성을 기록했으나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19.26 고린도전서 1:27; 이사야 29:14(고린도전서 1:19에서 인용). dispositio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9.27 hac는 R의 읽기이고 M은 hanc로 적는다.
19.28 골로새서 2:13. ‘예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아무도 그 신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 신을 거슬러 지은 죄도 없고, 따라서 그 신이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19.29 골로새서 2:16-17. in parte diei festi는 그리스어 ἐν μέρει ἑορτῆς(‘절기에 관하여’)를 글자대로 옮긴 표현이므로 ‘절기와 관련하여’로 옮겼다.
19.30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폐지되었다는 문제는 제4권과 이 책 앞부분의 갈라디아서 및 로마서 논의에서 다루었다. figura는 ‘예표’로 옮겼다.
19.31 두 번째 cuius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lex(율법)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lux로 읽는다.
19.33 골로새서 2:18-19, 21. 테르툴리아누스는 2:18의 ‘천사 숭배’와 ‘본 것’을 ‘천사들의 환상’으로 요약한다. 라틴어 constituerit에는 주어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앞의 ‘모세’를 받는 것으로 보아 ‘마치 모세가’로 옮겼다.
19.34 골로새서 2:22; 에베소서 1:10. recensentur는 에베소서 1:10의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하나로 모으다’, 개역개정 ‘통일되게 하다’)에 해당하는 말로 보아 ‘총괄되다’로 옮겼다. in Christum은 Kroymann이 삽입된 말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differentia(구별)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ndifferentia(구별 없음)로 읽는다. ‘처음으로 되돌려진다’는 음식의 구별이 없던 창조 때의 상태(창세기 1:29)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읽었다.
19.35 ‘같은 것들이므로’(ut eadem)는 나머지 계명들이 앞선 권들에서 이미 창조주의 것으로 다룬 계명들과 같다는 뜻이다. ‘옛것들이 지나가리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는 이사야 43:18-19와 65:17을 반영한다.
19.36 예레미야 4:3. 라틴어 nouate uobis nouamen nouum은 칠십인역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 일구다’라는 말을 골로새서 3:9-10(에베소서 4:22-24 참조)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와 연결한다.
- 20 본문으로
20.1 이 장부터 빌립보서를 다룬다. 빌립보서 1:14-17. Kroymann은 이 인용을 마르키온 판본의 본문으로 표시한다. 동기의 목록(시기와 다툼, 평판, 사랑, 질투, 반목)은 개역개정 1:15-17의 순서와 구성과 다르다. ‘per sermonis existimationem’은 사본 MR의 읽기로, Kroymann은 20.5의 ‘nimis docta’와 연결하여 그대로 두었고 ‘말솜씨에 대한 평판을 얻으려고’로 옮겼다. Junius는 ‘boni existimationem’으로 고쳐 개역개정의 ‘착한 뜻으로’(εὐδοκία)에 가깝게 읽었다.
20.2 ‘regulas sacramentorum’은 신앙 내용의 규범, 곧 무엇이 선포되는가를 가리킨다. ‘마음가짐의 동기’(causae animorum)와 대비되어, 바울이 선포자들의 동기만 문제 삼고 선포 내용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논증의 근거가 된다.
20.3 빌립보서 1:18. 테르툴리아누스의 ‘nihil mea’(나와는 상관없다)는 개역개정의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와 표현이 다르다. ‘causatio’(구실)는 개역개정의 ‘겉치레’에 해당한다.
20.5 ‘nimis docta’는 R의 교정자(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animis docta’이다.
20.6 ‘nouitas rei’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non ita spei’이다.
20.9 빌립보서 2:6. 20.9-20.18에서 ‘effigies’(μορφή)는 ‘형체’, ‘similitudo’(ὁμοίωμα)는 ‘모양’, ‘figura’(σχῆμα)는 ‘모습’, ‘imago’(εἰκών)는 ‘형상’으로 일관되게 옮겼다. 개역개정은 2:6의 μορφή를 ‘본체’, 2:7의 μορφή를 ‘형체’로 옮긴다.
20.10 빌립보서 2:6-7. ‘그 실재를 취한 것은 아니었고’(non ueritate),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non in homine), ‘실체로, 곧 육신으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non substantia, id est non carne)는 바울의 본문이 아니라 마르키온파가 붙인 해석이다. ‘rapinam’은 R의 읽기(MF ‘rapina’), ‘exhausit’는 R3의 읽기(MR1 ‘et haec sit’)이다. 개역개정 2:6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로 옮긴다. Kroymann은 ‘hominis’ 뒤에 γενόμενος에 해당하는 ‘factus’가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20.12 골로새서 1:15.
20.13 ‘사람의 형체로’(in effigie hominis)는 빌립보서 2:7의 ‘사람의 모양’(similitudo)이 아니라 2:6의 ‘하나님의 형체’와 짝을 맞춘 표현이다. ‘deus’는 Pamelius의 교정이고 MR은 ‘dei’이다.
20.15 <하나님의>는 Kroymann이 보충한 ‘dei’이다. ‘참으로 하나님이라면, ... 이미 판가름 났다’(uere deus, praeiudicatum est)는 Oehler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dei praeiudicatus est’이다. ‘filius hominis’는 ‘아버지의 아들’(filius patris)과 짝을 이루어, 사람의 아들이므로 사람의 형체 안에서도 참으로 사람으로 발견되었다는 논증의 근거가 된다. 낱말 뜻이 논증에 쓰이므로 ‘인자’ 대신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20.17 ‘것<처럼>’은 Kroymann이 ‘sic’을 ‘sic<ut>’으로 보충한 부분이다. 사본 MR은 ‘sic et ... sicut’이고 Kroymann은 뒤의 ‘sicut’를 ‘sic et’로 고쳤다. Engelbrecht는 앞을 ‘sicut’로 읽었다.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morti subditum)는 빌립보서 2:8을 가리키며, 개역개정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로 옮긴다.
20.18 빌립보서 2:8. 개역개정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로 옮긴다. ‘exaggeraret’는 Latinius의 교정이다(MR ‘exaggerat’). ‘고투’로 옮긴 ‘colluctationis’는 Engelbrecht의 교정으로 죽음과 벌이는 사투를 뜻하며, MR1은 ‘collectionis’, R3와 이전 판본들은 ‘subiectionis’이다. <안에서>는 Kroymann이 보충한 ‘in’이다.
20.19 빌립보서 3:7과 3:3-5. ‘Pharisaeae candidae dignitatem’의 ‘candida’는 공직 후보자가 입던 흰 토가(toga candida)를 연상시키는 말로 보고 ‘바리새파의 흰 옷이 주는 위엄’으로 옮겼다. 형용사로 ‘흠 없는 바리새파’로 읽을 수도 있다. ‘in nota’는 MR1의 읽기이고, R3와 이전 판본들은 ‘notam’이다.
20.20 ‘nunc’는 Junius의 교정이고 MR1은 ‘non’, R3는 ‘modo’이다.
20.21 빌립보서 3:8-9. Kroymann은 ‘existimat’ 뒤에서 끊어 ‘prae comparatione’부터를 주문장으로 읽었고, 이에 따라 ‘... 여기기까지 한다 해도, 그것은 ... 비교해서이다’로 옮겼다. ‘그를 통해 난 의’(quae per ipsum)는 Kroymann이 마르키온 판본으로 표시한 읽기로, 개역개정 3:9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와 달리 ‘믿음’이 없다.
20.23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를 통해’의 ‘그’가 율법을 준 하나님과 같은 이를 가리킨다고 보아, 의가 율법과 같은 근원에서 온다고 논증한다.
20.24 빌립보서 3:20. ‘municipatus’(πολίτευμα)는 개역개정을 따라 ‘시민권’으로 옮겼다.
20.25 창세기 22:17; 고린도전서 15:41.
20.26 빌립보서 3:21. ‘transfigurabit’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transfigurauit’이다. 여기서 ‘passiones’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사람이 겪는 고난을 가리키므로 ‘고난’으로 옮겼다.
20.27 고린도전서 15:51-53과 데살로니가전서 4:16(개역개정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가’(domini)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dei’이다. ‘변화를 겪게 될’은 Latinius의 교정에 따른 것이다. Kroymann의 본문은 649쪽 13행에 ‘demutare’로, 비평 장치는 ‘demutari’로 인쇄했다. 사본 MR과 다른 판본들은 ‘deputari’로 읽는다.
20.28 데살로니가전서 4:17. Kroymann은 ‘transfigurentur’ 뒤에 물음표를 두어 앞 문장을 수사 의문으로 읽었고, 이전 판본들은 평서문으로 끊었다.
- 21 본문으로
21.1 빌레몬서. 마르키온의 바울 서신 모음에서 열 번째 편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편지가 마르키온의 손질을 받지 않았다고 보고 별도의 논증 없이 넘어간다.
21.2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는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Apostolikon)에 들어 있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이 세 편지를 알면서 거부했다고 기술한다. ‘de ecclesiastico statu’는 교회의 직제와 질서를 가리키며 ‘교회의 질서’로 옮겼다.
21.3 ‘interpolare’는 손을 대어 바꾼다는 뜻으로 ‘변조하다’로 옮겼다. ‘여기’는 제5권, ‘저기’는 제1-4권을 가리키며, ‘이 책으로 미루어 두었던 것’은 앞선 권들에서 사도에 관한 논의로 넘긴 논점들이다. ‘이전의 논점’(rem pristinam)의 ‘rem’은 Engelbrecht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spem’이다. ‘제때에’(tempori)는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 MR은 ‘tempora ista’, Junius는 ‘tempore ista’, F와 Oehler는 ‘ipsa ista’, Engelbrecht는 ‘temporius ista’로 읽었다.
21.4 ‘opusculum’(작은 저작)은 다섯 권 전체를 가리킨다. 이 문장으로 『마르키온 반박』 전체가 끝나며, 사본 M에는 ‘ADVERSVS MARCIONEM LIBER QVINTVS EXPLICIT’(마르키온 반박 제5권 끝)라는 맺음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