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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os(지참금)는 혼인 때 신부에게 딸려 보내는 재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복음서에 신뢰를 얻어 주려고 『안티테시스』를 딸려 보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쓴다.
1.3 Antithesîs라는 표기는 Kroymann이 사본 M과 F의 표기(antithesis)를 따라 그리스어 복수형을 옮긴 것이다. Oehler는 antitheses, R은 antitheseis로 읽는다. 책 제목으로 쓰일 때는 『안티테시스』로, 그 책에 담긴 개별 대립 명제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안티테시스로 옮겼다.
1.3 instrumentum은 법률 문서를 뜻하는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성경 문서를 가리킬 때 즐겨 쓴다. 그는 testamentum이 더 널리 쓰이는 말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는 instrumentum을 문서, testamentum을 언약으로 옮겼다. 1.13 이하에서 testamentum은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말하는 언약 자체를 가리키므로 역시 언약으로 옮겼다.
1.4 Ponticus(폰토스 사람)는 흑해 남안 폰토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1.29의 Pontici(폰토스 사람들)는 마르키온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1.5 praescriptiue는 로마 소송법의 praescriptio, 곧 본안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다투는 선취 항변을 말한다. accepto facere(받아들인 것으로 하다)와 ratum habere(유효하다고 인정하다)도 법률 용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안티테시스』의 자격을 다투어 물리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받아들여 거꾸로 마르키온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1.6 dispositio는 하나님이 옛 시대와 새 시대에 세운 질서와 배열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17의 dispositionem eorum과 1.21의 dispositiones는 언약을 세우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각각 그들의 일, 제정으로 옮겼다.
1.8 이사야 2:3을 간접 인용한다.
1.9 이사야 2:4다. traducet(책망할 것이다)는 칠십인역의 ἐλέγξει를 옮긴 것이다. 개역개정은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동사를 믿은 민족들이 자기들의 이전 오류를 드러내어 꾸짖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1.10 이사야 2:4의 둘째 반절이다. zibina(지비나)는 그리스어 σιβύνη를 옮긴 사냥 창으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생소한 낱말이라 직접 설명을 붙였다. Kroymann은 사본 M의 zibbynas와 R의 sibinas를 zibinas로 고쳐 읽는다. 개역개정은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다.
1.11 이사야 51:4다. 칠십인역을 따라 ‘그리고 왕들아’(et reges)가 들어 있는데, 개역개정에는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로 되어 있어 왕들이 없다. 1.11 뒷부분의 iudicium(심판)은 바로 앞 인용문의 iudicium meum(내 심판)을 받는 말이다.
1.12 시편 19:7(칠십인역 18:8)이다. inuituperabilis(흠잡을 데 없는)는 칠십인역의 ἄμωμος를 옮긴 것이고, 개역개정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로 읽는다. qua perfecta(완전하므로)는 그 율법이 완전하기 때문에 영혼을 돌이킨다는 뜻으로 옮겼다. Pamelius는 animam을 animas로 고쳐 읽었다.
1.13 이사야 10:23이다. decisum sermonem(짧게 줄인 말씀)은 칠십인역의 λόγον συντετμημένον을 옮긴 것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로 읽어 뜻이 다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줄인 말씀’을 율법의 번잡한 짐을 덜어 낸 새 언약으로 풀이한다.
1.14 per eundem(같은 이를 통하여)은 이사야를 가리킨다.
1.15 이사야 43:18-19다. 그 사이의 ‘옛 것들은 지나갔고 새 것들이 일어난다’는 고린도후서 5:17의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이사야 본문 사이에 끼워 넣었다.
1.16 예레미야 4:3-4다. nouate uobis nouamen nouum(너희를 위하여 새 밭을 새로 일구라)은 칠십인역의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옮긴 것으로, nouamen은 묵은 땅을 새로 간 밭(nouale)을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롭다’는 낱말을 세 번 겹쳐 새로움을 강조한다.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로 읽는다.
1.17 예레미야 31:31-32(칠십인역 38:31-32)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야곱의 집’으로 읽지만 칠십인역과 개역개정은 ‘이스라엘 집’이다. arripui dispositionem eorum(그들의 일을 손에 잡았다)은 칠십인역의 ἐπιλαβομένου μου τῆς χειρὸς αὐτῶν(내가 그들의 손을 잡았을 때)에 해당하며, 개역개정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다.
1.19 이사야 55:3이다. <inquit>(그는 말한다)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Engelbrecht는 aeternum 뒤에 <dicens et>를 넣어 ‘영원한 언약을 말하면서 덧붙여’로 읽기를 제안했다. ‘다윗의 거룩하고 신실한 것들’(sancta et fidelia Dauid)은 칠십인역 τὰ ὅσια Δαυὶδ τὰ πιστά를 옮긴 것이고, 개역개정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다.
1.20 secundum Mariae censum(마리아의 호적을 따라)은 누가복음 2:4-5의 호적 등록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리아가 다윗의 집안으로 등록된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다윗 혈통을 끌어낸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가지’는 이사야 11:1이다. 사본 M과 R에는 eundem이 demonstraret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1.21 ‘그가 말하였다’(dixit)의 주어는 1.19-20에서 말한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이고, ‘정하여 두었다’(destinarit)의 주어는 창조주다. 라틴어는 둘을 모두 3인칭 단수로만 적으므로 번역에서도 주어를 보충하지 않았다.
1.22 말라기 1:10-11이다. 개역개정은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로 읽는다. ‘곧 깨끗한 양심에서 나오는 단순한 기도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정결한 희생 제물’을 풀이한 말이다. Pamelius는 사본의 offeretur(드려질 것이다)를 offertur(드려진다)로 고쳤고 Kroymann이 이를 따랐다.
1.26 potestates(권능들)는 여기서 마르키온이 상정하는 두 신적 권능, 곧 창조주와 선한 신을 가리킨다.
1.27 신명기 32:39(‘내가 치고 내가 고칠 것이다’, ‘내가 죽이고 내가 살릴 것이다’)와 이사야 45:7(‘재앙을 짓고 평화를 만드는’)이다. 개역개정 신명기 32:39는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이사야 45:7은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다.
1.28 quo(그래서)는 Engelbrecht가 사본의 qua를 고친 것이다. Ursinus는 iubet와 prohibet를 접속법 iubeat, prohibeat로 읽었다.
1.29 contrarii sibi semper creatoris(언제나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창조주)는 마르키온의 비난을 되받아 쓴 표현이다. ‘서로 경쟁하는 실체들의 차이로 구성된 세계’는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젖음처럼 대립하는 요소들로 세계가 이루어졌다는 통념을 가리킨다. 사본 M은 structum, R은 constructum으로 읽는다.
1.31 sacramenta(신비들)는 창조주가 세운 두 경륜, 곧 율법과 복음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창조주의 작품과 성품이 대립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가 세운 경륜도 같은 형식으로 대립을 포함한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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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hanc(이)는 Engelbrecht가 사본의 nunc를 고친 것이고, <ad>(에 대하여)는 Ursinus가 보충한 것이다. ‘유대의 것이 아니라 폰토스의 것’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유대적 요소를 잘라 내어 폰토스 사람의 작품이 되었다는 비꼼이다.
2.1 praestructuram ordinem(순서를 미리 세워 둘 것이다)의 목적어 ordinem은 2.2의 quem adgredimur(우리가 착수하려는)로 이어진다. 복음서의 저자 문제를 먼저 다루고 나서 본문을 차례로 검토하는 순서를 말한다.
2.3 [et postapostolicos](그리고 사도 이후의 사람들도)는 Kroymann이 잘못된 자리에 끼어든 삽입구로 보고 괄호에 넣은 말이다. R3와 통행본은 et post apostolos(그리고 사도들 다음에)로, Engelbrecht는 et [post] apostolicos로 읽는다.
2.3 apostolici(사도적인 사람들)는 사도들의 동료와 제자로서 복음서를 쓴 누가와 마가를 가리키며, 2.4에서 사도인 요한과 마태와 대비된다.
2.4 quae magistros apostolos fecit(사도들을 스승으로 만든)의 quae는 2.3의 auctoritas(권위)를 받는다. Pamelius는 qui로 고쳐 그리스도를 주어로 읽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subplementum legis et prophetarum)은 마태복음 5:17을 염두에 둔 말이다.
2.4 복음서 저자들을 요한, 마태, 누가, 마가 순서로 든다. Matheus는 사본 M의 철자이고 R과 통행본은 Matthaeus로 적는다.
2.6 ‘몸체 자체를 뒤엎는’(ipsum corpus euertere)은 마르키온이 누가복음 본문을 잘라 낸 일을 가리키고, ‘제목’(titulus)은 복음서 머리에 붙는 저자 이름을 가리킨다.
2.8 ex nostro(우리의 것에서)는 교회가 가진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교회 본문과 비교하면 그가 누가복음을 손질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2.9 quem caederet(잘라 내려고)는 마르키온이 누가복음에서 창조주와 유대 성경에 이어지는 대목을 삭제한 일을 가리킨다. 사본 M은 elegisse 대신 legisse로 읽는다.
2.11 갈라디아서 1:18과 2:2다. ‘혹시 자기가 헛되이 달린 것은 아닌지’(ne forte in uacuum cucurrisset)는 갈라디아서 2:2의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를 옮긴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자기 복음을 먼저 있던 사도들의 복음에 맞추어 확인받았다고 읽는다.
2.12 갈라디아서 2:9다. ‘오른손을 맞잡았다’(dexteras miscuerunt)는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에 해당한다. 갈라디아서 2:7-9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베드로 등이 유대인에게 가기로 했다고만 말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유대인과 민족들 양쪽에게 간 것으로 적는다.
2.13 inluminator Lucae(누가를 비춘 사람)는 바울이다. ‘그의 스승의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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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sacramentum religionis Christianae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로 옮겼다. 여기서 sacramentum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 전체를 가리키며, 2장 끝에서 누가가 사도가 아니라 사도의 제자라고 말한 데 이어, 마르키온이 누가 이전의 사도적 전승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누가의 권위가 문제된다는 뜻이다.
3.2 authentica paratura는 누가 이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던 원본 문서, 곧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가리키며 ‘원본에 해당하는 자료’로 옮겼다.
3.3 ‘바른 걸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갈라디아서 2:14의 οὐκ ὀρθοποδοῦσιν(개역개정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를 옮긴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집는 자들은 갈라디아서 1:7,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서 2:4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갈라디아서의 ‘거짓 형제들’을 일관되게 pseudoapostoli(거짓 사도들)라고 부른다.
3.4 ‘기둥으로 여겨지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2:9를 따른 것이다. 갈라디아서 2:11-14에서 책망받은 사람은 베드로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세 기둥 모두를 책망의 대상으로 묶어 말한다.
3.5 conuictum uariare는 갈라디아서 2:12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물러난 일을 가리키며 ‘식탁 교제를 달리하다’로 옮겼다.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는 고린도전서 9:19-22를 따른 것이다.
3.6 Iudaicos fastus는 Kroymann이 사본 M과 R의 첫 손을 따라 읽은 것으로, fastus(자만, 거드름)의 복수 대격이며 ‘유대적 자만’으로 옮겼다. 통행본은 fastos(축일 역법, 절기)로 읽어 ‘유대의 절기들’로 이해한다.
3.8 praeuaricatio는 로마 소송법에서 고발인이 피고와 결탁하여 자기 직무를 배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배신’으로 옮겼다. simulatio는 갈라디아서 2:13의 위선(개역개정 “외식”)에 해당하여 ‘위장’으로 옮겼다.
3.9 ‘<겪지 않은>’의 non은 Kroymann이 보충한 것이다. Engelbrecht는 non 없이 ‘quod adulteros passum est, quod ... Lucam?’으로 구두점을 바꾸어 읽는다. instrumentum은 법률 용어로 증거 문서를 뜻하며 ‘문서’로 옮겼다.
3.10 at(그런데)는 Kroymann이 사본의 aut를 고친 것이다. ‘대홍수’(cataclysmus)는 위조자들이 사도들의 원문서를 모두 지워 버렸다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비꼬는 비유이다.
3.12 ceterum(오히려)은 Ciacconius가 사본의 ceterorum을 고친 것이다. Kroymann은 ‘그러나 그것은 제목에 관해서도 변조되었다’를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보고, 전통적인 장 구분이 이 반론 뒤에 놓인 것은 잘못이며 4장 첫 문장이 이 반론에 대한 답이라고 밝혔다. ‘제목’은 ‘누가에 따른 복음서’라는 표제를 가리키며,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는 저자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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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funis contentionis는 양쪽이 같은 힘으로 줄을 당기는 줄다리기의 비유이다. 양편의 주장이 똑같이 맞서 있으므로 다른 판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4.3의 ‘시간의 계산’으로 이어진다.
4.3 praescribere와 praeiudicare는 소송 용어이다. praescribere는 본안 심리에 앞서 상대방의 청구 자격을 막는 항변을, praeiudicare는 본안 판결에 앞서 미리 판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더 오래된 것이 권위를 갖고 더 나중 것이 변조된 것이라는 시간 우선 원칙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29-32장과 이 책 제3권 1장에도 나온다.
4.5 여기서 aemulatio는 원본을 본뜬 경쟁적 모방을 뜻하므로 ‘모방’으로 옮겼다. passio는 사물이 겪는 변화나 손상을 뜻하며 ‘겪는 일’로 옮겼다. 사물이 그 변화보다 먼저 있고 재료가 그것을 본뜬 것보다 먼저 있듯이, 참된 복음서가 변조된 복음서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4.6 catholica ecclesia는 ‘보편 교회’로 옮겼다. 마르키온이 처음 로마 교회에 들어올 때 바친 돈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0장에서 2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전해지며, 거기서도 그가 출교될 때 돈이 함께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Marcionis는 사본 N의 읽기이며(M은 marcio, R은 Marcione) 마르키온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4.7 ‘그 자신의 편지’는 마르키온이 쓴 편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장에서도 이 편지를 들어 마르키온이 처음에는 교회의 믿음을 가졌다고 논증한다. 이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4.9 quo(그렇게 해서)는 Kroymann이 사본의 qua를 고친 것이다. inde(거기서)는 유대교를 가리키며, 유대교의 옹호자들이 율법과 예언자들을 복음서에 끼워 넣어 거기에서 그리스도까지 만들어 냈다는 것이 마르키온의 주장이다. ‘마르키온에게서도 그런지는 살펴볼 일이다’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누가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4.10 ‘교정이 잘못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마르키온이 교정했다고 주장하는 복음서가 그의 교정보다 먼저 존재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4.11 티베리우스 시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복음 선포가 시작된 때이고, 안토니누스 시대는 마르키온이 활동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 때이다.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보호 없이 사도들을 서둘러 보낸 것을 뉘우쳤다는 말은 비꼬는 표현이다.
4.12 ‘제자라 하더라도 스승 위에 있지 못하고’는 마태복음 10:24와 누가복음 6:40을, ‘나나 그들이나 이렇게 선포한다’는 고린도전서 15:11(개역개정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을, ‘예언자들의 영도 예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는 고린도전서 14:32를 따른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복종한다’가 아니라 미래형 erunt subditi(복종해야 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4.13 ‘뒤엎음의 영이 아니라 평화의 영’은 고린도전서 14: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을 예언자들의 영에 적용한 것이다. 천사라 하더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을 자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1:8을 따른 것이다.
4.14 anterius(앞선다)는 Latinius가 사본의 alterius를 고친 것이다. 마르키온이 교정 작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교정 대상인 우리 복음서가 먼저 있었고 그의 복음서가 나중에 만들어졌음을 입증한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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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처음부터>’(ab initio)는 Kroymann이 보충한 것이다. 사본은 ‘id prius quod et ab initio quod ab apostolis’로 읽고, 통행본은 ‘quod et ab initio. <id ab initio> quod ab apostolis’로 보충한다. 어느 쪽이든 ‘더 먼저 - 처음부터 - 사도들에게서’의 세 단계 연쇄 논증이다.
5.2 ‘젖’은 고린도전서 3:2를 따른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바로잡혔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1:6-9와 3:1-5에서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바로 세운 일을 가리킨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여 복음을 피로 인쳤다는 전승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6장에도 나온다. de proximo(가까이 있는)는 카르타고에서 가까운 로마를 가리킨다.
5.3 마르키온이 요한계시록을 거부한 사실은 이 대목에서 확인된다. ‘요한이 길러 낸 교회들’은 아시아의 교회들, 특히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를 가리키며,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2장에서는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요한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ordo episcoporum ad originem recensus는 주교 명단을 기원까지 거슬러 세어 올라가는 것이다.
5.4 generositas는 좋은 가문에서 난 혈통을 뜻하며 ‘혈통’으로 옮겼다. societas sacramenti(신비의 교제)는 같은 신앙과 세례를 나누는 교제이다. ‘펴내진 처음부터’(ab initio editionis suae)는 누가복음이 처음 세상에 나온 때부터를 뜻한다.
5.5 ‘그것이 바로 그 점 때문에 정죄되지 않은 채 알려진 곳이 하나라도 있는가?’는 Kroymann이 물음표를 두고 ‘nullis autem notum ut non eo damnatum?’으로 읽은 것이다. 그는 eo(그 점 때문에)가 앞 문장의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밝혔다. 사본 R의 첫 손은 eodem natum, Oehler는 eadem damnatum으로 읽는다. examen(벌떼)은 다음 문장의 말벌 비유를 준비하는 말이다.
5.6 ‘말벌들도 벌집을 만든다’는 마르키온파 교회들이 겉모습만 교회라는 뜻이다.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interpres)였다는 전승은 파피아스의 증언(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39.15)과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3.1.1에 나온다. Mathei는 Kroymann이 사본 M과 F를 따라 읽은 것이고 통행본은 Matthaei로 쓴다.
5.7 capit autem(허용되는 일이다)은 Junius가 사본의 capita를 고친 것이다. 누가의 복음서를 바울에게 돌리는 관행은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3.1.1과 3.14.1에도 나온다.
5.8 ‘이 복음서들’은 마태, 마가, 요한의 복음서이다. 마르키온이 누가복음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세 복음서를 버린 사실은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1.27.2와 3.11.7에도 나온다.
5.13 ‘거짓 사도들이라 불린 것’은 3.3과 3.6에서 말한 갈라디아서의 거짓 형제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사도들을 흉내 냈듯이 복음서를 뒤집던 자들도 가장 권위 있는 복음서를 노렸을 것이라는 논증이며, 그렇다면 마르키온이 사도들의 복음서에는 손대지 않은 것이 그 복음서들의 온전함을 확인해 준다는 결론이다.
5.15 integra(온전하게)는 Latinius가 사본의 integrae(M), integre(R)를 고친 것이다. regula eorum은 사도들의 복음서들이 담은 신앙의 규범을 뜻한다.
5.17 ‘**’ 자리에 결락이 있으며 Kroymann은 별표 세 개로 표시했다. Kroymann은 여기에 aut ad formam illorum suum(아니면 자기들의 복음서를 저 복음서들의 형태에 맞추든지)과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본다. 그렇게 읽으면 ‘그리하여 그것이 사도들의 복음서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게’와 5.18의 ‘그것을 고쳐 만들고 있다’는 마르키온파 자신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uideatur(보이게)는 Kroymann이 사본의 uideantur를 고친 것이다.
5.19 ex conscientia tramittit는 마르키온이 복음서의 어떤 대목은 그 내용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뜻이며 ‘양심에 따라 그대로 넘겨주다’로 옮겼다. utrobique(두 가지 점에서)는 그대로 둔 대목과 뒤엎은 대목 양쪽을 가리킨다.
5.20 compendia(지름길들)는 본안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쓰는 요약 논증, 곧 항변(praescriptio)을 가리킨다. 시간 순서와 교회들의 권위라는 두 항변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20-21장과 29-32장의 논증이다. fides euangelii는 여기서 복음서 본문의 신빙성을 뜻하여 ‘복음서의 신빙성’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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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prouocare는 상대를 법정에 불러내어 다툰다는 법률 용어이며, 이 장 전체가 소송의 비유(conuenire, praescriptio, pactum, condicio condicta)로 짜여 있다. 1-5장이 복음서의 사도적 권위와 선후 관계를 다루었고, 이 장부터는 마르키온 복음서의 본문 자체를 검토하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6.2 constitu<ens constitu>a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M과 R에는 constituat 하나만 있어 ‘차이를 확립하면서 자기 그리스도를 ... 확립한다’는 이중 구조가 드러나지 않는다. 보충된 분사를 <확립하면서>로 옮겼다. dei alterius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M과 R은 deum으로 읽는다.
6.2 testamentum은 언약과 그 문서를 함께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두 성경의 대립을 모으는 책이므로 구약과 신약으로 옮겼다.
6.3 <ab>는 R의 읽기이며 M과 F에는 없다. 전치사 보충을 주격 조사 <이>로 표시했다. eius는 창조주를 가리키므로 ‘창조주의 옹호자들’로 옮겼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와 일치하는 누가복음의 구절들을 유대주의자들이 끼워 넣은 것으로 보고 삭제했다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전제이다.
6.4 haec는 마르키온이 남겨 둔 구절들, illa는 그가 지운 구절들이다. Kroymann은 amplectemur 뒤에 쌍점을, fuerint 뒤에 마침표를 두어 ‘우리 편이라면’을 앞 문장의 조건으로, ‘억측을 쳐부순다면’을 tunc 문장의 조건으로 읽는다. 통용 본문은 amplectemur 뒤에 쉼표, percusserint 뒤에 마침표를 두어 두 조건절을 모두 앞 문장에 붙인다. 번역은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랐다.
6.6 Tiberianis temporibus는 누가복음 3:1의 연대 표시를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회복을 위해 장래에 올 메시아로 따로 두고, 티베리우스 때 나타난 그리스도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신의 계시로 본다.
6.7 iustum et bonum은 마르키온이 창조주를 정의로운 신, 자기 신을 선한 신으로 나누는 대립을 가리킨다. 제1-2권에서 다룬 그 구분을 여기서는 중성 추상명사로 쓰므로 ‘정의로운 것과 선한 것’으로 옮겼다.
6.8 praescriptio는 로마 소송에서 본안 심리에 앞서 제출하는 항변으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논증의 선결 규칙이라는 뜻으로 쓴다. ‘선결 항변’으로 옮기고 6.10의 praescriptum도 같은 말로 옮겼다. 6.10의 pactum은 6.5의 ‘양편에서 합의된 조건’을 가리킨다.
6.9 uirtutes는 여기서 창조주가 행한 능력의 일들, 곧 기적을 뜻하므로 ‘권능의 일들’로 옮겼다. sententiae는 창조주의 판결과 선언을, mores와 proprietates는 그의 품성과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 7 본문으로
7.1 누가복음 3:1; 누가복음 4:31.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누가복음 1:1-4:30(탄생 기사, 세례 요한, 족보, 시험, 나사렛 설교)이 없이 ‘티베리우스 제15년에’(누가복음 3:1)를 가버나움으로 ‘내려왔다’(누가복음 4:31, 개역개정 ‘내려오사’)에 곧장 이어 시작했다. 마르키온은 이 ‘내려옴’을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읽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9장에서도 이 시작을 다루었다.
7.2 ecquid는 Rigaltius의 추정이며 사본 M, R은 et quid로 읽는다.
7.4 ‘다른 곳에서’는 마르키온의 신에게 자기 세계가 없고 창조주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논증(제1권 15-16장)을 가리킨다. an(~인지)은 R의 읽기이고 M은 ac로 읽는다.
7.6 ‘subicit oculos de facto’는 Kroymann의 구두점이다. 통행본은 ‘subicit oculos. de facto etiam ordinem facit’로 끊어 ‘de facto’를 7.7의 첫머리에 둔다. Kroymann은 ‘내려옴은 일어나는 동안 지각되며,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눈을 위로 향하게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읽었다. subicit는 M의 읽기이며 R은 subit로 읽는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7.9 로물루스가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언한 사람은 프로쿨루스 율리우스(Proculus Iulius)이다(리비우스 『로마사』 1.16). Kroymann은 adnuntiatorem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ut sic interim agamus’(우선 이렇게 논의를 진행한다면)와 같은 말을 보충하기를 바랐다. Engelbrecht는 탈문 없이 ‘<non> quasi non sic’으로 읽는다. ‘저 사람’은 로물루스, ‘이 사람’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이다. ‘신의’(dei)는 사본 N과 Pamelius에 없다.
7.10 ‘창조주의 것’(creatoris)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뜻한다. 7.10의 물음은 7.12의 인용 끝까지 이어지는 한 문장이다.
7.11 이사야 9:1(칠십인역 8:23); 마태복음 4:15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첫머리 ‘Τοῦτο πρῶτον πίε, ταχὺ ποίει’(이것을 먼저 마셔라, 속히 행하라)를 그대로 옮긴 옛 라틴 본문을 따르며, 개역개정 9:1에는 이 말이 없다. bibito(마셔라)는 R 초판의 읽기이고 M과 F는 ibito, R 제3판과 Gelenius는 obito로 읽는다. Kroymann은 ‘qui maritimam’을 ‘해변 땅에 사는 자들’, ‘Iordanis’를 ‘요단 땅’으로 보충해 읽고 nationum 뒤에서 크게 끊었다. 개역개정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로 옮긴다.
7.12 이사야 9:2(칠십인역 9:1); 마태복음 4:16 참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앉아 있는 백성아, 보라’라는 명령형이고, 개역개정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는 서술형이다. ‘너희 위에’(super uos)는 M, R의 읽기이며 N은 uobis로 읽는다.
7.13 폰토스는 흑해 남안 지방으로 마르키온의 고향 시노페가 있는 곳이다. ‘uel de caelo etsi descendere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 R은 ‘debuerit uel de caelo descendere, etsi’로 읽는다.
7.14 마태복음 5:17. ‘예고대로’(secundum praedicationem)는 7.11-12에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을 가리킨다.
7.15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은 마태복음 5:17에만 있고 누가복음에는 평행 구절이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이 말을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자기 복음서에서 지웠다고 말한다. ‘부인해도’(negabit)는 R 제3판의 읽기이며 M과 R 초판은 negauit(부인했다)로 읽는다.
7.18 마태복음 15:24. 개역개정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누가복음에는 없는 말이다.
7.19 마태복음 15:26. 개역개정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non est’는 그리스어 οὐκ ἔξεστιν(허락되지 않는다)에 해당하며 Latinius는 est <bonum>(좋지 않다)을 보충했다. ‘보이지 않게’(uideatur)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은 uideretur로 읽는다.
7.24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조사는 누가복음 2:1-2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호적 기록이 로마의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하며, 19장에서는 이 호적을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치하에 시행된 것으로 말한다.
7.25 누가복음 4:16. ‘지성소’(sancta sanctorum)는 성전의 가장 안쪽 공간을 가리키는 말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회당의 예배 공간을 가리키는 데 느슨하게 쓴다.
7.26 Kroymann은 ‘cum hoc munere’(이 직무와 함께)가 후대 삽입일 수 있다고 보았다. 앞의 ‘in hoc ipsum’(바로 이 일을 위해)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보충해 읽는 편이 훨씬 낫다는 이유이다. 번역은 전승된 본문대로 옮겼다.
7.27 누가복음 4:32. 개역개정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in potestate erat sermo eius’이며 potestas를 ‘권능’으로 옮겼다. ‘놀랐다’(stupebant)는 개역개정의 ‘놀라니’에 해당한다.
7.28 Kroymann은 ‘diuinum et ui et gratia praestabat’(신적인 말은 힘과 은혜에서 뛰어났다)로 읽을 가능성을 적어 두었다. 번역은 본문의 대격 uim et gratiam을 따라 ‘힘과 은혜를 드러내면서’로 옮겼다.
7.29 ‘서로 다르고 맞서는 신성’(diuersae atque aemulae diuinitatis)의 aemulus는 창조주와 겨루는 경쟁자라는 뜻이다. ‘가르칠 수도’(potuisset)는 R의 읽기이며 M과 F는 pocius set으로 읽는다.
7.31 praeuaricator는 소송에서 자기 의뢰인을 저버리고 상대편과 내통하는 변호인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며 ‘배신자’로 옮겼다. 창조주를 거슬러 왔다면서 창조주를 따라 가르쳤다면 자기 신을 배신한 셈이라는 뜻이다.
7.32 누가복음 4:33-34. ‘귀신의 영’은 누가복음 4:33의 ‘더러운 귀신의 영’이다. 개역개정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나사렛’이 없으며, 7.41에서 그는 ‘우리와 당신’이라는 어순을 근거로 논증한다.
7.33 누가복음 4:34. 개역개정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름들에 관한 ‘다른 곳’은 그리스도와 예수라는 이름을 다룬 제3권 15-16장이다. ignoti(알려지지 않은 자)와 <et>iam은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은 ignoto, iam으로 읽는다. ‘귀신 자신의 창조주’(ipsi suo creatori)는 Kroymann의 설명대로 귀신을 만든 창조주를 뜻한다. 번역은 보충된 et를 <조차>로 옮겼다. ‘이름들에 관해서는...따진 바 있다’를 삽입구로 본 것은 Engelbrecht의 구두점이다.
7.35 <erat>는 Kroymann이 보충한 조동사이며 번역에서는 <터였는데>로 나타냈다.
7.37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선포한 예언자 본문은 시편 16:10(칠십인역 15:10 ‘주의 거룩한 자’; 사도행전 2:27)이다. ‘눈의 아들’은 여호수아이며, 칠십인역과 옛 라틴 본문은 그를 Iesus Naue(눈의 아들 예수)로 부른다. 여호수아가 예수(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받은 일은 제3권 16장에서 다루었다. ‘주의 이름’(nomen domini)에서 domini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은 dei(하나님의 이름)로 읽는다. Kroymann은 신명기 28:10을 참조로 든다.
7.38 누가복음 1:35; 누가복음 1:31. 테르툴리아누스는 두 구절을 거꾸로 인용한다. 개역개정 1:35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1:31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네 안에서 태어날 것은 거룩한 자라 불릴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sanctum이 중성이다. ‘우리 복음서에 따르면’은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눅 1-2장이 없음을 전제한 말이다.
7.39 dispositio는 하나님이 미리 정해 두고 이루어 가는 구원의 경륜을 가리키며 ‘계획’으로 옮겼다. ‘귀신이기는 했지만’은 삽입구이다.
7.40 ‘예수여’(Iesu)는 사본 M, R에서 extraneum 뒤에 전승되었고 Junius가 인용문 안으로 옮겼다. Oehler는 사본 위치로 되돌렸으나 Kroymann은 이를 부당하다고 보고 Junius를 따랐다. <sed>(오히려)는 Junius의 보충이다. ‘창조주의 영들’은 귀신들도 창조주가 지은 영으로서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7.43 누가복음 4:34. ‘지극히 선한 신’(optimi illius)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혹독한 하나님’(saeui dei)은 마르키온이 창조주를 가리켜 쓰는 말투를 ‘말하자면’이라는 유보와 함께 빌려 쓴 것이다.
7.45 ‘구원의 흰옷’(candida salutis)에서 candida는 승리자나 후보자가 입는 흰 토가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귀신들을 제압했다고 기뻐했을 때 그리스도가 하늘에 기록된 이름을 기뻐하라고 한 말(누가복음 10:17-20)을 가리킨다.
7.47 ‘자기가 생각해야 한다고 알고 있던 바’는 예수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고, ‘생각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던 바’는 7.48 첫머리의 ‘다른 예수, 다른 신의 거룩한 자’이다. 7.47의 끝 콜론이 7.48로 이어진다.
7.48 status는 소송에서 주장이 서는 근거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며 ‘근거’로 옮겼다.
- 8 본문으로
8.1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었다’는 마태복음 2:23(“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을 가리킨다. Nazaraeus/Nazarenus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호칭이기도 하다(사도행전 24:5의 “나사렛 이단”). 사본 MR은 Nazarenos, Pamelius는 Nazaraeos로 읽는다.
8.2 인용은 예레미야애가 4:7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nezirim을 “존귀한 자들”로 옮기지만, 칠십인역은 Ναζιραῖοι(나실인들)로 음역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나사렛 사람들로 읽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 exalbati(희게 되었다)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exaltati(높여졌다)로 전한다.
8.3 마태복음 2:22-23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22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요셉이 그리로 가기를 무서워하여 갈릴리로 떠난 일을 전한다. <in>은 Kroymann의 보충이고 Gelenius는 <ad>를 넣었다. 둘 다 ‘그 은신처로’의 뜻이다.
8.4 emancipata는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법률 용어다. 예언자들이 나사렛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미리 할당했으므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면 그렇게 지정되지 않은 다른 유대 성읍을 택해야 했다는 논리다. Junius는 mancipata로 고쳤으나 뜻은 같다.
8.5 ‘쫓겨났다’는 누가복음 4:29를 가리킨다. Kroymann은 alio merito를 ‘다른 잘못 때문에’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쫓겨난 까닭이 새로운 선포가 아니라 누가복음 4:23의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전승 본문의 unius prouerbii(한 격언, 곧 누가복음 4:24의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는 Kroymann이 alio merito를 풀이하려고 누가복음 4:24에서 끌어온 서투른 주석이 본문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하여 괄호로 묶었다. 번역은 merito를 ‘이유’로 옮기고 괄호 안의 말을 그대로 두었다.
8.6 누가복음 4:29(“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폭력적 접촉을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phantasma)이 아니라는 첫 증거로 삼는다.
8.7 누가복음 4:30(“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탈출을 소동이 가라앉았거나 그리스도가 뚫고 나간 것으로 설명하며, 안개나 환영으로 사라졌다는 해석을 배제한다.
8.8 ‘몸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없다’는 Lucretius, De rerum natura 1.304의 시행 tangere enim et tangi nisi corpus nulla potest res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Oehler는 sapientiae를 sapientia로 고쳤다.
8.10 이사야 53:4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태복음 8:17의 인용 형태(“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에 가깝다.
8.11 테르툴리아누스는 ‘짊어지다’(portare)로 옮겨진 그리스어 동사(칠십인역 이사야 53:4의 φέρειν, 마태복음 8:17의 βαστάζειν)가 ‘없애다’(tollere)의 뜻도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가 병을 치료하여 없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8.14 ‘앞선 사례’는 누가복음 4:34의 가버나움 회당 귀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외친 일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누가복음 4:41의 귀신들의 외침이다.
8.15 누가복음 4:41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이다. 따옴표 안의 두 번째 문장(“그러나 그들은 마찬가지로 꾸짖음을 받고...”)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귀신들의 증언을 그리스도가 거절했으므로 그가 창조주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8.17 사본 MR은 cui sancti abundabant로 전하는데, Kroymann은 abundabat로 고치고 sancti를 sancti spiritus praeconium(거룩한 영의 선포)으로 이해했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라 ‘거룩한 영의 선포가 넘쳐 났던 이’로 옮겼다. 뒤의 quia(때문이다)도 Kroymann이 사본의 qui를 고친 것이다.
8.19 마르키온의 입장은 선한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심판자인 창조주만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materiae timoris(두려움의 재료)는 분노(ira), 가혹함(saeuitia), 심판(iudicia), 응징(uindicta), 정죄(damnatio)를 가리킨다.
8.20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해야 할 신의 아들을 고백한 것이다... 구실이 있었을 것이다’는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8.22 praeuaricatio는 소송에서 상대편과 내통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로, 여기서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아들 노릇을 하여 자기 신의 입장을 배반했다는 뜻이므로 ‘배반’으로 옮겼다. sustineret(감수했고)는 R의 읽기이고 M은 sustineri et, F는 sustinere et로 읽는다.
8.23 누가복음 4:42를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한적한 곳”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이사야 35:1의 광야와 연결하므로 solitudo를 두 곳(8.23, 8.24) 모두 ‘광야’로 옮겼다. ‘구름 속에서 활동했던’은 출애굽기 13:21의 구름 기둥을 가리키며, sermo(말씀)는 성육신 이전에도 활동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Kroymann은 in corpore 앞에 <et>를 넣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8.24 ‘광야는 기쁨을 얻으라’는 이사야 35: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을 가리킨다.
8.25 누가복음 4:43을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이다.
8.26 사본은 de his loquebatur(이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로 전하지만, Kroymann은 de를 괄호로 묶어 his loquebatur(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로 읽는다. 번역은 ‘사람들을 상대로’로 기본 뜻을 살리고 괄호 안에 de의 뜻을 두었다.
- 9 본문으로
9.1 누가복음 5:1-11, 시몬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이다. “논증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던 일”은 뒤이어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로 풀이되는 어부 소명을 가리킨다.
9.2 누가복음 5:10. 테르툴리아누스의 옛 라틴 본문 “ne time, abhinc enim homines eris capiens”는 개역개정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와 뜻이 같다. ‘se eum esse’의 ‘eum’은 R3의 교정이며 MR1은 ‘enim’으로 읽는다.
9.3 예레미야 16:16. 개역개정은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로 읽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mittam’(보내리니)으로 인용한다. “저들이란 곧 사람들이다”(homines scilicet)는 예언의 목적어를 설명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다.
9.4 ‘nauclis’(MF)는 희귀한 형태이며 R과 통행본은 ‘nauiculis’(작은 배들)로 읽는다. 둘 다 “배”로 옮겼다.
9.5 마르키온은 폰토스 출신의 선주(nauclerus)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8장, 제3권 6장, 제5권 1장과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0장에서도 그를 이 직업으로 부르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어부들을 택한 이유가 뒷날 선주 마르키온을 사도로 삼으려는 뜻이었겠느냐고 비꼰다.
9.6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창조주 자신의 계획이라는 논증은 제1권 19-20장과 이 책 1장에서 이미 전개되었다. 새 율법과 새 말씀은 이사야 2:3(미가 4:2),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32에 근거한다. ‘testamentum’은 “언약”으로 옮겼다.
9.7 Kroymann은 마르키온이 자기 저작에서 상대로 삼은 인물의 호칭을 그리스어로 복원했다. R은 συνταλαίπωρον과 συμμισούμενον으로, M은 라틴 대문자 음역으로 전한다. ‘commiseronem’과 ‘coodibilem’은 두 그리스어를 옮긴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신조어이며, R3와 통행본은 그 앞에 <id est>를 넣었다. 번역에서는 그리스어를 그대로 두고 괄호 안에 뜻을 적었다. ‘purgatione’는 사본의 ‘purgationem’을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나병 환자를 만지지 말고 공동체에서 떼어 놓으라는 규정은 레위기 13:45-46, 죄인과 함께 먹지도 말라는 사도의 말은 고린도전서 5:11이다.
9.11 ‘praescribere’는 재판에서 본안 심리 전에 제기하는 선결 항변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겼다는 항변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항변은 제기되지 못할 것이다”로 옮겼다.
9.13 ‘aemulus legis’는 율법에 맞서는 적수를 뜻하므로 “율법의 적수”로 옮겼다. 사본 M의 ‘nihil’ 대신 R의 ‘nihili’(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를 따랐다.
9.14 ‘uirtus diuina’는 “신적 능력”으로, ‘potestas’(9.21-22)는 “권능”으로 구별하여 옮겼다.
9.16 누가복음 4:27과 열왕기하 5:1-14. 나아만을 개역개정 열왕기하의 “아람 사람”이 아니라 누가복음 4:27의 “수리아 사람”으로 적었다. 마르키온의 논거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을 두고 이방인 하나만 고쳤는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나병 환자를 고쳤으니 그리스도가 창조주와는 다른, 더 나은 신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melioris’는 R3의 교정이며 MR1은 ‘meliori se’로 읽는다.
9.17 ‘significat † per nationes emundationis in Christo’는 훼손된 자리다. Kroymann은 ‘significat’의 주어를 예언자 엘리사로 보고, ‘per nationes’ 자리에 ‘propiores nationes’(정결에 더 가까운 민족들)를 추측했으며, Engelbrecht는 ‘per nationes emundationes’를, R3와 통행본은 ‘significato’를 제안했다. 번역은 전해진 낱말을 그대로 따라 “민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결”로 옮겼다. “그 민족들의 빛”은 누가복음 2:32의 “이방을 비추는 빛”을 가리킨다.
9.18 일곱 가지 중대한 범죄 목록은 우상 숭배, 신성 모독, 살인, 간음, 음행, 거짓 증언, 사기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은 것은 열왕기하 5:14다. “말씀을 간략하게 한”(sermonem compendiatum)은 로마서 9:28의 옛 라틴 본문(이사야 10:22-23 인용)에서 온 표현으로, 개역개정은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짧아진 말씀에 짝하여 세례도 단 한 번의 씻음으로 줄어들었다고 본다. ‘et’(prius)를 Pamelius는 삭제했으나 Kroymann은 유지한다.
9.19 ‘hoc semel functo’의 ‘functo’는 사본의 읽기로, Engelbrecht가 ‘fungi’의 수동적 용법을 들어 옹호했고 Latinius는 ‘functum’으로 고쳤다. “단 한 번 쓴 말로”로 옮겼다.
9.21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incredibile plane)는 반어다. 말로 세계를 지은 창조주의 권능이 말로 한 사람의 병을 고쳤다는 것이 믿기 어렵다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조롱한다. 창조주의 말씀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근거는 창세기 1장과 시편 33:6, 9이다.
9.22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 쪽의 논거를 테르툴리아누스가 요약한 것이다. 주가 종보다 크다는 비교는 마태복음 10:24의 어법을 뒤집어 쓴 것이다.
9.24 ‘quia ... agnoscatur’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은 ‘qui ... agnoscitur’로 읽는다. “과연 더 크다면 말이지만”(si tamen maior)은 치유의 결과가 같으므로(9.25) 더 크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삽입구다.
9.26 “창조주의 강”은 요단강이다. 그리스도의 말이 이룬 것이 요단강 물이 이룬 것과 같은 치유라면 말 자체가 특별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9.28 누가복음 5:14. 개역개정은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에 해당하는 말을 인용하지 않으며, 마지막 구절은 9.30에서 따로 인용한다.
9.29 ‘argumenta figurata utpote prophetae legis’는 사본의 읽기이며, Engelbrecht는 ‘figurata, utpote propheta, legis’로, Pamelius는 ‘prophetatae’로 고쳤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율법의 예표적 논거들이 예언하는 율법의 것이라는 뜻으로 옮겼다. “아버지의 보편적 제사장”(catholicum patris sacerdotem)은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을 위한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성전의 예물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기도와 감사의 예표로 풀이된다.
9.30 누가복음 5:14 “ut sit uobis in testimonium”. 그리스어 본문과 개역개정은 “그들에게”(αὐτοῖς) 입증하라고 읽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너희에게”(uobis)로 인용한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말은 마태복음 5:17, 병과 질환을 짊어진다는 예고는 이사야 53:4(마태복음 8:17)다. Kroymann은 ‘quo testabatur se ipsum esse ... adnuntiabatur’가 뒤의 논증 흐름과 어긋난다고 보아 후대의 삽입일 수 있다고 의심했으나 본문에 남겨 두었다.
9.32 ‘ut bonus’는 사본의 ‘et bonus’를 Kroymann이 고친 것이고, <ut>도 Kroymann의 보충이다.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의 설명으로, 그리스도가 선하기 때문에, 또 나병에서 벗어난 사람이 어차피 율법의 의식을 지킬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명했다는 것이다. 보충된 ‘ut’는 “<자로서>”로 표시했다.
9.33 9.33-9.34(in uanum ergo ... in hoc uenerat)는 사본에서 9.41의 ‘ultro futurum’ 뒤에 놓여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선함을 다루는 9.35-9.40과 앎을 다루는 9.41-9.43의 순서가 마르키온이 든 두 이유(9.32)의 순서와 맞도록 한 것이다.
9.34 ‘formam eorum’을 Kroymann은 나병 환자들이 율법의 의식을 이행하는 그들의 방식으로 풀었다. “그들의 방식”으로 옮겼다.
9.35 ‘an non’의 ‘an’은 Pamel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aut’로 읽는다.
9.36 ‘dei alterius habebitur’는 그리스도가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를 다른 신의 그리스도로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율법 파괴라는 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반복해서 짚는다. ‘nusquam’은 사본의 읽기이며 Pamelius는 ‘numquam’으로 고쳤다.
9.37 [postea]는 Kroymann이 앞의 ‘postea’를 되풀이한 것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9.40 ‘legi malae’는 M의 어순이며 R과 통행본은 ‘malae legi’로 읽는다. 뜻의 차이는 없다.
9.42 ‘cur enim’은 사본의 읽기이며 N과 Pamelius는 ‘cur ergo’로 읽는다. ‘arbitrium’은 “판단”으로 옮겼다.
9.44 ‘de gradu pellere’는 상대를 발 디딘 자리에서 밀어내는 격투와 군사의 비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확인한 동기가 무엇이든 그 사실만으로 마르키온의 입지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9.46 마태복음 5:17. 누가복음에는 이 말이 없으나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복음서에서 이 말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quod saluum est)은 교회의 복음서에 이 말이 보존되어 있다는 뜻이다.
9.48 테르툴리아누스의 결론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을 실제로 행했으므로 마태복음 5:17의 말도 했다는 것이며, 그 말이 교회의 복음서에 있고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없는 까닭은 교회가 삽입한 것이 아니라 마르키온이 삭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10 본문으로
10.1 누가복음 5:17-26의 중풍병자 치유를 다룬다. 인용은 이사야 35:2다. 개역개정은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두 명사(영광, 높음)를 자리를 바꾸어 ‘주의 숭고함(sublimitas)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용한다.
10.2 이사야 35:3-4의 칠십인역 형태다. 개역개정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손과 무릎 자체에 ‘굳세어라’(conualescite)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곧 중풍일 것이다’는 늘어진 손과 풀린 무릎이 중풍의 증상을 가리킨다는 저자의 삽입 해설이다.
10.3 ‘힘이 당장 되살아나는 것’(uirium repraesentatio)은 지체의 회복과 더불어 힘이 지체 없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10.4 누가복음 5:24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의 앞부분이다.
10.5 누가복음 5:21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다. ‘결산된’(dispunctam)은 장부를 대조하여 지운다는 회계 용어로, 예언이 이루어져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10.6 이사야 53:11-12의 칠십인역 형태다. 전승 사본은 aufert(없앤다)이고 Kroymann이 칠십인역 ἀνοίσει(짊어질 것이다)에 맞추어 미래형 auferet로 고쳤다. 번역은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미래형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53:11-12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와 대응한다.
10.7 이사야 1:18이다. 개역개정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로 수동형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이 1인칭으로 ‘내가 희게 하겠다’(exalbabo)고 말한다. ‘앞부분’(in primore)은 이사야서의 앞부분(1장)을 가리키며, 뒤에 인용된 53장과 대비된다. 장밋빛을 예언자들의 피, 더 밝은 홍색을 주의 피로 읽는 해석은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것이다.
10.8 미가 7:18-19의 칠십인역 형태다. 개역개정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에 대응한다.
10.9 † 표시 자리의 전승 본문 uoluit et misericordiae는 문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Oehler는 uoluit esse misericordiae, Engelbrecht는 misericordiam, Kroymann은 칠십인역 ὅτι θελητὴς ἐλέους ἐστίν(그가 자비를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에 맞추어 uolens est misericordiae를 제안했다. 번역은 전승된 낱말을 살려 ‘자비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로 옮겼다.
10.10 미가 7:19다. 개역개정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두 번 ‘가라앉히다’(demerget)로 읽는다. demerget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dimerget다.
10.12 요나 3:10의 니느웨 사람들의 용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에게서 그때에도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ne dixerim)는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수사적 완곡어법이다. 아들이 처음부터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생각은 2권 27장과 이어진다.
10.13 사무엘하 12:13이다. 라틴어 성경 구분으로는 열왕기 둘째 권(II Reg.)에 해당한다.
10.14 나단의 말은 사무엘하 12:13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circumduxit(옮겨 버렸다)는 칠십인역 παρεβίβασεν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아합의 용서는 열왕기상 21:27-29, 요나단의 일은 사무엘상 14:24-45다. 요나단은 사울이 백성에게 명한 금식 맹세를 모르고 꿀을 먹어 어겼고, 백성의 간구로 죽음을 면했다. <또>(e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0.15 호세아 6:6(참조 잠언 21:3)과 에스겔 33:11을 결합한 표현이다.
10.18 죄를 붙들어 두지도 정죄하지도 않는 마르키온의 신이 죄를 사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지는 1권과 2권에서 이미 다루었다는 말이다.
10.19 praescriptio는 로마 법정 절차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주장을 차단하는 선결 항변을 뜻하며, 테르툴리아누스가 논증의 전제 원칙을 가리킬 때 즐겨 쓰는 용어다. ‘선결 항변’으로 옮겼다. 이 장에서 filius hominis는 ‘사람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논증의 축이므로 모두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10.21 <아버지>(patr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0.22 <어머니>(matr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0.25 카스토르는 제우스와 레다의,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로 전해지며, 신인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를 둔 탄생의 예로 쓰였다. ‘처녀가 잉태할 것’은 이사야 7:14다. Kroymann은 si haec ita distinguntur 뒤에 <ut nos uolumus>(우리가 원하는 대로)를 보충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본문에 넣지는 않았다.
10.28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고>(matris nequ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0.29 발렌티누스파의 아이온 체계에서는 한 아이온이 ‘사람’(Anthropos)으로 불린다(참조 Aduersus Valentinianos 7-8).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을 ‘사람’이라 부르거나 마리아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두 길밖에 없다고 몰아간다.
10.30 다니엘 7:13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를 가리킨다.
10.32 nomen(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은 ‘이름’으로, appellatio(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는 ‘호칭’으로 구분해 옮겼다. accidens는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일어난 사정을 뜻하며, 여기서는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리키므로 ‘우연적 사정’으로 옮겼다. <그를>(eum)은 Kroymann의 보충이고, [같은](eadem)은 Kroymann이 삭제한 말이다. 두 번의 ‘-’ 괄호 구문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10.33 Kroymann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도 ... 그러므로’(si et Christus ... ergo, 10.33-10.35 첫머리)를 여백의 주석이 본문에 끼어든 것으로 보아 [ ]로 묶었다. 그에 따르면 atque adeo(그리고 더욱이)는 10.35의 cum appellatio propria est로 바로 이어져 전체 논증의 결론을 시작한다. Engelbrecht는 이 부분을 진본으로 옹호했다.
10.35 [호칭의 공유는 없는](non etiam appellationis)과 [곧 동일한 자](idemque)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말이다.
10.37 다니엘 3:25의 풀무 속 넷째 인물이다. 개역개정은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의 아들 같은’(tamquam filius hominis)이라고 하여 다니엘 7:13에 맞추어 읽는다. 세 소년을 ‘순교자들’이라 부른다. 구름과 함께 오는 심판자는 다니엘 7:13-14다.
10.39 누가복음 5:21-24다. ‘사람됨만 바라보고’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인성만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10.40 테르툴리아누스의 요지는 예수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골라 쓴 까닭이 다니엘 7:13의 그 인물을 떠올리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문서’(instrumentum Danihelis)는 다니엘서를 가리킨다.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사본 M의 esse et hominem이다. Ursinus는 deum et hominem(하나님이자 사람)으로 고쳤다.
10.41 심판하는 권능은 다니엘 7:13-14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가리킨다.
10.45 insaniam은 Rigalt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in insaniam이다. ‘환영들’(phantasmata)은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육신이 아니라 보이기만 하는 것이라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가리킨다. 몸의 실체에 관한 본격적 논의는 De carne Christi로 이어진다.
10.48 ‘폰투스 사람’은 폰투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이다. 심장(cor)과 뇌(cerebrum)는 각각 분별력과 지성의 자리로, 마르키온에게 둘이 없다는 조롱이다.
- 11 본문으로
11.1 세리 레위를 부른 일과 그에 이어지는 논쟁은 누가복음 5:27-32에 있다. 마르키온은 이 일화를 그리스도가 율법 바깥의 사람을 택했다는 증거로 삼았다.
11.2 아버지가 베드로에게 베푼 깨달음에 대한 증언은 마태복음 16:17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이 없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의 네 복음서를 근거로 반론한다.
11.3 민족들의 빛은 이사야 42:6; 49:6과 누가복음 2:32, 민족들의 희망은 이사야 51:5, 민족들의 기대는 창세기 49:10(칠십인역 '민족들의 기대')을 가리킨다.
11.4 누가복음 5:31. 개역개정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로 옮긴다.
11.7 auctor를 '자기를 지은 이'로 옮겼다. 창조주가 사람을 지은 이이자 보호자이므로 의사도 창조주에게서 온다는 것이 논점이다.
11.12 Kroymann은 사본의 어순 prophetae creatoris qua를 qua prophetae creatoris로 바꾸어 읽는다. 이 읽기를 따라 '창조주의 예언자들이 창조주의 그리스도와 들어맞는 방식으로'로 옮겼다. frustra frustratus는 '헛되이 흐트러뜨린'이라는 말놀이다.
11.13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이사야 40:3, 뉘우침의 선포는 누가복음 3:3(마태복음 3:2; 마가복음 1:4)을 가리킨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을 두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따진 일은 누가복음 5:33에 있다. ipsum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Kroymann은 ipsum <dominum>을 추정한다.
11.14 disciplina는 금식과 기도 같은 생활 규율을 뜻하므로 '규율'로 옮겼다.
11.16 신랑과 신랑의 아들들의 금식에 관한 말은 누가복음 5:34-35이다. 가운데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말끊김으로,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같은 귀결절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그것을 요한의 때에 돌리면서]는 Kroymann이 뒤따르는 구절을 잘못 풀이한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부분이다. ut tempori suo는 사본의 temporis ut tempore suo를 Latinius가 고친 읽기이며, Kroymann은 '그 고유의 때'를 신랑을 빼앗긴 뒤, 곧 주의 죽음 이후로 이해한다.
11.18 시편 19:5-6(칠십인역 18:6-7). 개역개정은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늘 끝에서 그가 나아가고 그의 돌아감은 그 끝에까지 이른다'이며,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오심과 돌아감으로 읽는다.
11.19 이사야 61:10. 개역개정은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신부에게 하듯' 뒤가 끊어져 있으며, Kroymann은 칠십인역의 κατεκόσμησέν με κόσμῳ에 해당하는 '나를 장식으로 꾸몄다'가 빠졌다고 본다. Kroymann이 이 자리에 탈문을 표시했다.
11.21 이사야 49:18. 개역개정은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읽어 '신부의 장식처럼'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11.22 아가 4:8. 개역개정은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로 옮긴다. 레바논의 그리스어 이름 Λίβανος는 유향(λίβανος)과 같은 낱말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겹뜻으로 교회가 향을 바치는 우상숭배에서 불려 나왔음을 읽어 낸다.
11.24 마르키온파는 독신자, 고자, 과부와 홀아비, 이혼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전언이며, 제1권 29장에서도 같은 관행을 비판한다. '죽음이나 이혼을 위해 남겨 둔다'는 혼인한 사람은 배우자가 죽거나 이혼한 뒤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11.26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새 천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는 누가복음 5:36-39에 있다.
11.28 사본의 alter를 Junius가 aliter로 고쳤고, Kroymann은 그 뒤에 egerit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 이 읽기를 따라 '달리 행했는지'로 옮겼다.
11.29 예레미야 4:3.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nouate uobis nouamen nouum은 칠십인역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옮긴 것으로, nouus(새로운)와 nouamen(새로 일군 땅)의 말놀이가 들어 있어 '새 땅을 새로 일구라'로 옮겼다.
11.30 이사야 43:18-19. '옛것은 지나갔다'는 고린도후서 5:17의 표현과 겹친다.
11.31 destinatio pristinorum은 옛것들에 대해 정해진 처분, 곧 옛것들이 끝나고 새것으로 바뀌도록 정해진 일을 뜻하므로 '옛것들에 대한 결정'으로 옮겼다. [하나님]은 Pamelius가 중복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낱말이다.
11.32 논점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은 낡은 가죽 부대를 가진 자에게만 해당하고, 새 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지 않는다는 말은 낡은 옷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옛것을 전혀 갖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이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11.33 <가지지 않은>은 Migne 판(ed. Migniana)이 보충하고 Kroymann이 받아들인 non을 옮긴 것이다. 보충된 본문은 '어떤 일을 할 바탕이 없는 자는 그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이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며, 앞 문장과 같은 논점을 이룬다. 보충 없이 읽으면 '어떤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이어서 하지 않는 자는 그 일을 할 바탕을 가진 자이다'가 된다.
11.40 시편 78:2(칠십인역 77편). <칠>은 Pamelius가 보충한 septimo를 옮긴 것이다. 사본은 '제칠십편'으로만 읽는다.
11.41 시편 78:2. 개역개정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어 차용어 parabola를 라틴어 similitudo(비유)로, problemata를 quaestiones(질문들)로 풀이한다. 이 풀이 구조를 살리기 위해 두 차용어를 '파라볼라'와 '프로블레마타'로 음역했다.
- 12 본문으로
12.1 이 장은 누가복음 6:1-11의 두 안식일 논쟁(밀밭에서 이삭을 자른 제자들, 손 마른 사람의 치유)을 다룬다. circumferre(들고 다니다)를 ‘내세우고 다니다’로 옮겼다.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내세우며 다녔다는 뜻이다.
12.5 Kroymann은 sicuti nec disceptatum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fuisset, si fuisset editum(공표되었더라면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이 빠졌다고 본다. Engelbrecht는 sicuti nec disceptatum 자체를 삭제하는 쪽을 택한다. definitio는 수사학의 ‘규정’이며, 이어지는 문장 전체가 그 규정의 내용이다.
12.5 disciplina를 ‘가르침’으로 옮겼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에서 새로운 신을 추론하는 데 맞서, 신이 가르침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지 가르침이 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다.
12.6 litterae는 ‘글, 문자’이며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 식 문헌 작업을 겨냥한 말장난이다. 스승에게서 글을 배우는 정상 순서를 뒤집어, 글에서 스승(신)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12.7 여호수아 6:3-4, 15. 이레 동안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으므로 그 가운데 하루는 반드시 안식일이었다는 논리다. septem(이레)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octo(여덟)로 읽는다. Kroymann은 circumlata ... arca를 주격으로 보아 언약궤가 ‘일함으로써’(operatione) 안식일을 파기한 것으로 구문을 잡으며, ex praecepto creatoris는 circumlata에 걸린다. 이 구문을 따랐다.
12.8 Iesus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이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여호수아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미리 알려진(renuntiari) 것으로 읽는다.
12.9-10 이사야 1: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월삭과 안식일’을 읽는다. 12.10의 <quo>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사본은 quoque modo, Gelenius 이하는 quoquo modo로 읽는다.
12.11 abrupta defensio ... abruptam prouocatione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대격 adhibendam ... abruptam defensionem으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거친 도발에는 거친 방어로 맞서겠다는 뜻으로, 이사야 1:14의 본래 의도를 알면서도 일부러 글자대로 받아 맞받는 수법을 예고한다.
12.13-14 누가복음 6:1-5. 테르툴리아누스는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 먹은 행위를 ‘음식을 마련하는 일’(cibum operari)로 규정하여, 안식일 노동 금지와 연결한다. effrixerant(비볐다)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efflixerant로 읽는다.
12.15 ‘문자와 의도’(scripti et uoluntatis)는 법정 수사학의 쟁점 유형(status) 가운데 하나로, 법률의 문자와 입법자의 의도가 충돌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기록된 율법과 그리스도의 의도를 서로 충돌하는 두 당사자로 세운다. stat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status로 읽는다. ludam은 Oehler의 수정이며 사본은 eludam으로 읽는다.
12.16 사무엘상 21:1-6. 다윗이 놉에서 진설병을 먹은 일로, 누가복음 6:3-4에서 그리스도가 인용한 선례다. Kroymann은 quasi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non instructi(가르침을 받지 못한 듯)를 보충하기를 바란다. color는 수사학 용어로 사건을 유리하게 채색하는 논거를 뜻한다. Kroymann은 ‘그리스도의 의도’(de Christi uoluntate) 자리에서 독자가 ‘창조주의 의도’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의도된 뜻밖의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12.17-18 출애굽기 16:5, 22-30. 여섯째 날에 이틀분의 만나를 거두게 하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못하게 한 규정이다. parasceue는 안식일 전날인 예비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규정을 안식일에 금식하지 않도록 창조주가 마련한 ‘특권’으로 해석한다.
12.19 dici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iei로 읽는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은 안식일 파기(destructio)라는 마르키온파의 용어를 양보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이다.
12.22 tuetur(옹호한다)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tuebatur로 읽는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옹호하지 않고 인간적 필요를 들어 변호한 것은, 안식일 규정 자체는 인정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6:5의 ‘안식일의 주’ 선언과 함께 읽힌다.
12.23 누가복음 6:7. 바리새인들이 고발 사유로 삼은 것은 안식일 위반이었고 새로운 신의 선포가 아니었다는 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12.24 †: 사본은 alium Christum nusquam praedicatum(다른 그리스도는 어디서도 선포되지 않았다)으로 읽는다. Kroymann은 이 자리를 손상된 것으로 표시하고 alium <deum a> Christo(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신은 어디서도 선포되지 않았다)를 제안한다. 논증의 흐름에서는 Kroymann의 제안이 더 어울린다.
12.25 de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eum(MR1) 또는 eam(R3)으로 읽는다. 안식일 노동 금지가 ‘조건부’라는 것은 금지된 일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며, 12.26-28에서 그 조건이 설명된다.
12.26 출애굽기 20:10(“아무 일도 하지 말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네 모든 일을’(omne opus tuum)로 읽으며, 그는 ‘네’(tuum)에서 인간의 일만 금지되었다는 논거를 끌어낸다.
12.28 출애굽기 12:16. 칠십인역은 ‘다만 모든 영혼(ψυχή)을 위하여 행해질 일은 예외’라고 읽고, 개역개정은 ‘각자의 먹을 것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로 옮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영혼’은 여기서 각 사람(의 생명)을 뜻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anima를 구원받아야 할 영혼으로 읽어 치유와 구원의 일을 안식일 금지의 예외로 세운다. 이 말놀이를 살리기 위해 anima를 일관되게 ‘영혼’으로 옮겼다.
12.29 qua et deus(하나님이기도 한 자로서)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은 quia로 읽는다.
12.30 누가복음 6:9. 개역개정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benefacere an non)로 읽고, ‘생명’ 자리에 anima(영혼)가 있다. ‘안식일의 주’는 누가복음 6:5다. permittens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promittens로 읽으며, omni는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omnia로 읽는다.
12.31 magis ille는 Engelbrecht의 구분을 따라 magis <merito> ille(제정한 이라면 더욱 정당하게)로 이해했다.
12.32-33 여호수아 6:3-4. 여리고에서 언약궤를 돌며 운반한 일은 하나님이 직접 명한 것이고 전쟁 중인 백성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12.26-28에서 세운 구분에 따라 ‘하나님의 일’에 속한다는 논지다.
12.34 이사야 1:14(‘너희의 안식일’). ‘입술로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아니다’는 이사야 29:13의 말이다. ‘다른 지위를 부여했다’(alium statum fecit)는 하나님이 백성의 안식일과 자기 안식일을 서로 다른 범주로 두었다는 뜻이다.
12.35 이사야 58:13(칠십인역은 안식일을 ‘즐거운 것’ τρυφερά이라고 부른다)과 이사야 56:2, 6(안식일을 더럽히지 않음). ‘같은 예언자’는 이사야다.
12.36 ‘앞서 제자들의 사건’은 12.13-22의 밀밭 사건이다. factis ... ingerens는 그리스도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율법 완성을 보였다는 뜻이며, 인용되는 말씀은 12.37에 이어진다.
12.37 마태복음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 없고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도 없다. Kroymann은 hac uoce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eradicata 또는 erasa(뽑아 버린, 지워 버린)가 빠졌다고 본다. Ursinus는 si를 nec로 고쳤다. 전해진 본문은 ‘마르키온이 이 말씀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면’이며, 문맥상 마르키온이 이 말씀을 삭제하여 그리스도의 입을 막았다는 비꼼이다.
12.38 ‘처음부터 아버지의 축복으로 거룩한’ 안식일은 창세기 2:3을 가리킨다. aduersarius(적대자)는 마르키온이 상정하는 창조주에 맞선 신이다. 그런 신이라면 창조주의 안식일을 빛내 주지 않으려고 다른 날에 치유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12.39 열왕기하 4:18-37.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이다. 열왕기하 4:23(‘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추론한다. forma는 창조주가 미리 보여 준 본(선례), praedicatio는 창조주의 예언적 선포다.
12.40 이사야 35: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이것을 명령이 아니라 예언(‘힘없는 손이 강해진다’)으로 읽는다. 중풍병자는 누가복음 5:17-26의 치유로, 제10장에서 다루었다. ‘특정한 치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가 손과 무릎이라는 특정 지체의 회복을 예언했다는 뜻이다.
- 13 본문으로
13.1 누가복음 6:12(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함)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장면을 이사야 52:7(평화와 좋은 것을 전하는 자)과 나훔 1:15에 연결하고, 13.10에서 이름, 행위, 장소, 시간, 소리, 들음의 여섯 요소로 정리한다.
13.2 이사야 40:9. 개역개정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이다. euangelizare는 이 장 전체에서 복음(euangelium)과 같은 어근이므로 “복음을 전하다”로 옮겼다.
13.3 마가복음 1:22, 마태복음 7:29, 누가복음 4:32.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사야 40:9의 “힘 있게(cum uigore)”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란 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uirtutem habens는 개역개정의 “권위 있는 자와 같고”에 해당하며 우리말 번역에서는 권능(potestas/uirtus)의 용례를 따라 “권능을 가진 자처럼”으로 옮겼다.
13.4 이사야 52:6. 개역개정은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어떤 이름인가?”는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끼어든 말이며, 인용은 13.5에서 이어진다.
13.5 이사야 52:6의 후반부 “말하는 이가 바로 나다(ego sum ipse qui loquor)”. 사본 M은 sim, R은 sum으로 읽으며 Kroymann은 sim을 택했다. sermo는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에 해당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이므로 “말씀”으로 옮겼다.
13.6 이사야 52:6-7의 칠십인역 형태 “내가 때가 되어 산 위에 있다(πάρειμι ὡς ὥρα ἐπὶ τῶν ὀρέων)”이다. 개역개정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말하는 이 자신이 산 위에 있다고 하므로 누가복음 6:12의 산과 연결된다.
13.7 나훔 1:15(칠십인역과 불가타는 2:1). 개역개정은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발이 “빠르다(ueloces)”고 하며 산을 단수로 쓴다.
13.8 시편 22:2(칠십인역 21:3). 개역개정은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이다. exaudies 앞의 non은 사본에 없고 Engelbrecht가 칠십인역 οὐκ εἰσακούσῃ에 따라 보충한 것이며, Kroymann이 받아들였다. non in uanitatem mihi는 칠십인역 οὐκ εἰς ἄνοιαν ἐμοί를 따른 읽기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구절을 아버지가 들은 그리스도의 밤 기도로 읽는다.
13.9 시편 3:4(칠십인역 3:5). 개역개정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이다.
13.10 actum(행위)은 Latinius의 수정이며 사본 M과 R은 sanctum, Engelbrecht는 statum, Ciacconius는 factum으로 읽는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복음 전하는 자의 행위”로 옮겼다.
13.11 누가복음 6:13-16(열두 사도 선택).
13.12 ne <non>: 사본 M과 F는 ne, R은 nae로 읽으며 Kroymann이 non을 보충했다. non이 없으면 “내가 해석할 수 없도록”이라는 반대 뜻이 된다.
13.13 엘림의 열두 샘은 민수기 33:9(출애굽기 15:27), 아론의 제사장 옷에 달린 열두 보석은 출애굽기 28:17-21, 요단에서 고른 열두 돌은 여호수아 4:3-9, 20이다. 출애굽기는 보석이 흉패에 달렸다고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옷(tunica)이라 하고, 여호수아는 돌을 길갈에 세웠다고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언약궤에 넣었다고 한다. 라틴어 Iesus는 여호수아와 예수를 같은 이름으로 쓰며, 여기서는 개역개정의 인명 여호수아로 옮겼다.
13.14 <dei>는 Migne 판의 주석에서 보충한 것이며 Kroymann이 받아들였다. 이사야 인용은 13.15로 이어진다.
13.15 이사야 43:19-20. 개역개정은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다. “참 예수(Iesus uerus)”는 13.13의 여호수아(Iesus)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라틴어에서 두 인물의 이름이 같다는 데 논증이 의지한다. lauacrum Iordanis는 요단에서 받은 세례를 뜻하므로 “요단의 세례”로 옮겼다. pontifex patris는 사본 M과 R의 읽기이며 Latinius는 pacis(평화의 대제사장)로 고쳤는데, Kroymann의 본문 patris를 따랐다.
13.16 simpliciter는 아무 뜻이나 이유 없이 행한다는 뜻이며 “단순히”로 옮겼다. 열두라는 수가 창조주의 예표와 맞물린다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그 수를 우연히 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증이다.
13.17 누가복음 6:14(시몬을 베드로라 함). 창세기 17:5(아브람에서 아브라함), 17:15(사래에서 사라), 민수기 13:16(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부름). Ausa는 호세아의 그리스어 형태 Αὐσή에서 온 이름이며 개역개정 인명 호세아로 옮겼다. “여호수아라 부르고”의 라틴어는 Iesum으로, 테르툴리아누스에게는 창조주가 예수라는 이름을 붙인 사례이기도 하다.
13.18 cur et는 Engelbrecht의 어순 수정이며 사본은 et cur이다. solidae aeque도 Engelbrecht의 읽기이며 사본 M은 solidae quę, R은 solidaeque이다. 뜻은 믿음의 굳셈만이 이유라면 쇠나 바위처럼 똑같이 단단한 다른 재료도 이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3.19 이사야 8:14(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8 참조). 개역개정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다. 베드로(Petrus)라는 이름은 반석(petra)에서 왔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반석이자 돌이라는 데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본다. 우리말 음역 베드로에서는 이 말놀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13.20 propius(더 가까운)는 사본 M과 R의 읽기이며 Pamelius는 proprius(더 고유한)로 고쳤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더 가까운 일”로 옮겼다. “자기의 예표들”은 반석과 돌처럼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예표들을 뜻한다.
13.21 누가복음 6:17(두로와 시돈 해안에서 온 많은 백성). 누가는 해안(maritima)이라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바다 건너(transmarina)에서 온 무리라고 말한다.
13.22 시편 87:4(칠십인역 86:4). 개역개정은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이다.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블레셋을 가리키는 데 쓴 말로 글자 그대로는 다른 민족이라는 뜻이며, 13.23의 ex allophylis quoque가 이 넓은 뜻으로 쓰이므로 “이방 민족들”로 옮겼다. Aethiopes는 개역개정의 구스에 해당하지만 라틴어 이름을 따라 에티오피아로 적었다. spectabat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expectabat이다.
13.23 시편 87:5(칠십인역 86:5)의 칠십인역 형태 “사람이 어머니 시온이라 말할 것이고, 사람이 그 안에서 났으며, 그가 그 성을 세웠다”이다. 개역개정은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와 “아버지의 뜻으로”는 인용 사이에 끼어든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다. natus는 사본 M의 읽기이며 R은 factus이다.
13.24 이사야 49:12. “페르시아 사람들의 땅에서”는 칠십인역 ἐκ γῆς Περσῶν을 따른 읽기이며 개역개정은 “시님 땅에서”이다.
13.25 이사야 49:18. 인용은 13.26의 “모두가 모였다”로 이어진다.
13.26 uidens(보고서)는 Latin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uides이다. “낯선 자들과 외인들”은 다음 인용(이사야 49:21)에서 시온이 알아보지 못하는 자녀들을 가리킨다.
13.27 이사야 49:21. 개역개정은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 누가 이들을 양육하였는고”이다. 인용은 13.28로 이어진다.
13.28 이사야 49:21의 끝부분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에 해당한다.
13.29 peruersitas는 뒤집어 보는 고집을 뜻하며 “뒤틀린 생각”으로 옮겼다. 마르키온파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로 규정하면 그는 이 장에서 확인한 예언을 전혀 이루지 못한 자가 된다는 결론이다.
- 14 본문으로
14.2 누가복음 6:20.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어 πτωχοί를 pauperes가 아니라 mendici(거지들)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거지들”로 옮겼다. 개역개정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는 2인칭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3인칭(illorum)이다. 사본 M은 dei regnum, R은 regnum dei, Pamelius는 마태복음 5:3에 따라 regnum coelorum으로 읽는다.
14.4 시편 45:1(칠십인역 44:2). 개역개정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sermo optimus를 “지극히 좋은 말”로 옮겼다. ueteris는 Jun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ueteri로 읽는다. “옛 언약의 예로부터”는 수정된 본문을 따른 것이다.
14.5 fontibus saluatoris는 이사야 12:3(칠십인역 “구원의 샘들에서”, 개역개정 “구원의 우물들에서”)을 암시하며, 여기서 saluator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usque는 Kroymann의 설명대로 semper와 같은 뜻이다.
14.7 시편 82:3-4(칠십인역 81:3-4). 개역개정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14.8 시편 72:4(칠십인역 71:4). 본문의 “시편 71편”은 칠십인역 번호이며 개역개정 72편에 해당한다. iustitia는 재판의 방식을 나타내는 탈격으로 읽어 “정의로”로 옮겼다. 개역개정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14.9 시편 72:11-12(칠십인역 71:11-12). 개역개정 72: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dynasta(권력자)는 칠십인역 δυνάστης를 옮긴 말이다. Engelbrecht는 liberauerit 대신 liberauerat를 의심했으나 Kroymann은 접속법을 유지한다. 다윗에 관한 삽입구는 Kroymann이 괄호로 표시했다.
14.10 시편 72:13-14(칠십인역 71:13-14). 개역개정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이자와 불의에서” 속량하고 “그들의 이름”이 존귀하다고 읽는다.
14.11 시편 9:17-18(칠십인역 9:18-19). 개역개정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inferos를 “음부”로 옮겼다.
14.12 앞 문장은 시편 9:18 후반(개역개정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이며, tolerantia(칠십인역 ὑπομονή)를 “참음”으로 옮겼다. 뒷 인용은 시편 113:5-8(칠십인역 112:5-8). 개역개정 113:7-8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물론 자기 나라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문 안에 끼워 넣은 말이다. R의 excelsis(높은 곳)를 따랐고 MF는 ecclesiis로 읽는다.
14.13 Basiliae는 칠십인역의 책 이름 ‘왕국기’(Βασιλειῶν)로, 여기서는 사무엘상을 가리킨다. 인용문은 사무엘상 2:8.
14.14 사무엘상 2:8. 개역개정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는 Engelbrecht가 사본에 빠진 어구를 보충한 것이다. “물론 왕의 보좌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다.
14.15 이사야 3:14. incendistis(“불태웠다”, 칠십인역 ἐνεπυρίσατε)는 Engelbrecht의 수정이며 사본은 incenditis로 읽는다. 개역개정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4.16 이사야 3:15. 개역개정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14.17 이사야 10:1-2. 개역개정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 화 있을진저”. iudicia mendicorum은 거지들의 송사, iudicata pauperum은 가난한 자들에게 판결로 돌아간 권리를 뜻한다. pupillis(14.18)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populis로 읽는다.
14.19 이사야 1:17-18. 개역개정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conciliemur는 “화해하자”로 옮겼다.
14.20 [창조주의]는 Kroymann이 후대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말이다. 이 말을 빼면 “이토록 큰 애정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는 14.3-19에 인용된 창조주의 말들이 밝힌다.
14.21 nam et si putas로 시작하는 조건절은 주절 없이 끊어지고 14.22의 bene quod 문장이 뒤따른다. 조건절을 “...생각한다고 하자”로 마무리했다.
14.23 누가복음 6:21a. 개역개정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3인칭이며 “지금”이 없다. praestructio는 복음의 기초를 미리 놓는 일을 뜻하므로 “사전 준비”로 옮겼다.
14.25 이사야 5:26-27(“빠르게, 가볍게 올 것이다”)과 이사야 49:10(“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을 하나의 인용으로 이었다. 개역개정 5:26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빠르게”와 “가볍게”의 해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삽입이다.
14.27 이사야 65:13.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인용은 14.28까지 이어진다.
14.28 contraria ista는 Kroymann의 설명대로 “너희는 굶주릴 것이다”, “너희는 목마를 것이다”라는 반대쪽 선언을 가리키며, 누가복음 6:25의 화 선언에 대응한다. praeministrentur는 그리스도를 위해 미리 마련되었다는 뜻으로 옮겼다.
14.29 누가복음 6:21b. 개역개정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de creatoris est는 Kroymann의 설명대로 “창조주의 (글)에서 나온 것”을 뜻하므로 “창조주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옮겼다. R은 dei creatoris로 읽는다.
14.30 이사야 65:13-14. 사본 MR은 14.30에 oblectabuntur, 14.31에 exultabunt in iocunditate를 두는데 Gelenius 이후 판본들은 둘을 바꾸었다. Kroymann은 사본 순서를 따른다.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14.32 recognoscemus는 Kroymann이 사본의 recognosce(“확인하라”)를 14.28의 uidebimus에 맞추어 고친 것이다.
14.33 시편 126:5(칠십인역 125:5). 개역개정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사본 MR은 “시편 127편”(CXXVII)으로 읽는다. Engelbrecht와 Pamelius는 125편으로 고쳤고, Kroymann은 사본의 숫자가 CXXVđ(= CXXV dicit)를 잘못 읽은 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14.37 이사야 61:1-3의 인용이 14.39까지 이어진다. 개역개정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괄호 안의 복 선언들은 각 이사야 구절에 대응하는 누가복음 6:20-21이다. 14.37은 14.2의 “하나님의 나라”와 달리 마태복음 5:3의 “하늘 나라(regnum caelorum)” 형태로 인용한다.
14.38 이사야 61:1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복 선언은 누가복음 6:21a.
14.39 이사야 61:2-3. aduocare languentes는 칠십인역 61:2 παρακαλέσαι πάντας τοὺς πενθοῦντας(개역개정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에 대응하므로 aduocare를 “위로하다”로 옮겼다. 개역개정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복 선언은 누가복음 6:21b.
14.40 admissus는 그리스도가 공적 활동에 들어선 것을 가리키므로 “등장하자마자”로 옮겼다. 마지막 문장은 이사야가 예고한 이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가 그 일을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위임했다는 식의 억지 가정을 비꼬는 말이다.
14.41 누가복음 6:22. 개역개정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에는 “멀리하고”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사본 M은 nequam, R은 malum으로 읽는다. 이 장에서는 filius hominis를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14.44-50은 창조주의 예언에 따른 사람의 아들을 “태어난 이”(14.50 qui natus est)와 동일시하므로,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논거가 된다.
14.43 이사야 51:7. 개역개정 “너희는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nullificatio(칠십인역 φαυλισμός)를 “멸시”로 옮겼다.
14.45 ex odio는 Kroymann이 사본의 excidio를 고친 것이다. praedicato는 예언으로 미리 선포되었다는 뜻이다.
14.46 첫 인용은 이사야 52:5(로마서 2:24에서도 인용). 개역개정 52:5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둘째 인용은 Kroymann이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칠십인역 이사야 49:7 “ἁγιάσατε τὸν φαυλίζοντα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τὸν βδελυσσόμενον ὑπὸ τῶν ἐθνῶν, τῶν δούλων τῶν ἀρχόντων”에 대응한다. 개역개정 49:7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 circumscribit animam suam(φαυλίζων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은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며, anima는 “영혼”으로 통일했다. sancite(ἁγιάσατε)는 “거룩하게 하라”로 옮겼다.
14.49 propter nos eam ponens은 요한복음 10:15, 15:13의 “목숨을 버린다”(animam ponere)를 반영하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로써 14.46의 circumscribit animam suam을 풀이한다.
- 15 본문으로
15.1 누가복음 6:23 인용. 개역개정은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이다. “오, 낯을 바꾸는 그리스도여”(o Christum uersipellem)는 R3의 독법이고, 사본 MR은 et Christum으로 읽는다. uersipellis는 본래 ‘가죽을 바꾸는 자’, 곧 늑대 인간 등 둔갑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예언자를 파괴하다가도 옹호하는 그리스도의 이중성을 비꼰다.
15.3 <않>은 R3가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MR에는 non이 없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예언자들의 옹호가 어울렸을 만큼”이 되는데, 뒤이은 “예언자들을 파괴하러 왔던”이라는 설명과 맞지 않으므로 Kroymann은 보충을 받아들였다.
15.5 ‘모욕했다’(suggillauerunt)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figurauerunt(형상화했다)로 읽는다. 15.2-3에서 같은 어근 suggillans, suggillatio(질책)가 쓰인 것이 수정의 근거다.
15.6 ‘에피쿠로스의 신’은 노여움도 분노도 모르고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신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25장과 제2권 16장에서도 마르키온의 신을 에피쿠로스의 신에 견주었다. 여기서는 마르키온의 신이 저주를 발하는 순간 그 무감정이 깨진다는 뜻이다.
15.8 uae는 누가복음 6:24-26의 “화 있을진저”(οὐαί)이다. 이 장 전체에서 인용되는 uae를 “화 있을진저”로 통일했다.
15.11 <누군가가>는 Engelbrecht가 보충한 quis를 옮긴 것이다. Kroymann은 한때 ne quid fiat(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로 고쳐 읽을 생각이었다고 밝힌다.
15.13 ‘갖추게 하는’(instruendo)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nstruendae로 읽는다. ‘선한 하나님과 심판자’는 마르키온이 둘로 나눈 속성을 창조주가 하나로 가진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본 논지다.
15.14 신명기 30:19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신명기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두 구절의 요소를 함께 담고 있다.
15.18 ‘부자들을 향한’(in diuites spectat)은 R3의 독법이고, MR1은 induit et expectat로 읽는다. ‘받아 마땅하다’(merentur)는 Gelen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merentibus로 읽는다. ratas habet causas는 ‘명분을 유효한 것으로 승인한다’는 법률 용어다.
15.19 mendici는 본래 ‘거지들’이지만, 누가복음 6:20의 “가난한 자”(πτωχοί)를 가리키므로 ‘가난한 자들’로 옮겼다. 이 장에서 같은 말을 모두 그렇게 옮겼다.
15.21 ‘같은 신에게’(eidem)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iusdem으로 읽는다. Engelbrecht는 eiusdem <deo>를 선호한다. ‘한 하나님, 곧 창조주’(unum deum, creatorem)는 마르키온의 두 신 구별이 무너지면 창조주만이 하나님으로 남는다는 결론이다.
15.22 ‘그래야 ... 보일 수 있다. 그가 솔로몬을 부유하게 한 것은’은 Kroymann이 ostendam. locupletat is quidem으로 끊어 읽은 것을 따랐다. 사본은 ostendam locupletantis quidem(M), ostendam locupletantis(R)로 읽는다.
15.23 열왕기상 3:11-13 참조. <총명을>은 Engelbrecht가 보충한 intellegentiam을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 열왕기상 3:12의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따랐다. Kroymann은 한때 iustitiam(의)을 보충할 생각이었다고 밝힌다. 솔로몬이 부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구하지 않은 부까지 더해 주었다는 것이 열왕기상 3:13의 내용이다.
15.24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누가복음 6:24의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이다. aduocatio는 그리스어 παράκλησις를 옮긴 고대 라틴어 역어로 ‘위로’를 뜻한다. ‘그가 말하는데 ... 결실로부터’(quoniam-fructibus)는 사본 MR에서는 15.25의 adscribunt 뒤에 놓여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15.25 ‘부에 따라붙는 저 악덕들’(accidentia diuitiis uitia)의 어순은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uitia diuitiis로 읽는다. ‘신명기에서도 그와 같다’(uti)는 Kroymann의 수정이며, MR1은 utique, R3은 itaque로 읽는다. ‘모세의’(Moysei)도 Engelbrecht의 수정으로, 사본은 moyses로 읽는다.
15.26 신명기 8:12-14 인용. 개역개정은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돈과 금’(pecunia et auro)으로 읽는다. 히스기야에게 온 사절은 이사야 39:1에 따르면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자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서 온 자들’이라고 썼다. 원문대로 옮겼다.
15.27 이사야 39:6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이다.
15.28 예레미야 9:23-24 참조. 개역개정 9:23은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9:24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이다. 둘째 문장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고린도전서 1:31과 고린도후서 10:17이 이 구절을 요약 인용한 형태(“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를 따른다. ‘다만’은 라틴어 scilicet을 옮긴 것이다.
15.29 이사야 3:16-26의 시온의 딸들에 대한 책망을 가리킨다. ‘귀족들과 교만한 자들’에 대한 위협은 15.30-31의 이사야 5:14-15과 10:33-34이다.
15.30 이사야 5:14-15 인용. 개역개정은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많은 무리와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모두 그 속에 빠질 것이라 여느 사람은 구푸리고 존귀한 자는 낮아지고”이다. orcus는 칠십인역의 ᾅδης(스올)를 옮긴 말로 ‘음부’로 적었고, anima는 히브리어 네페쉬(목구멍, 욕심)를 글자대로 옮긴 ‘영혼’이다. <불>명예는 Engelbrecht가 보충한 접두사 de-(<de>honorabitur, 욕을 당할 것이다)를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honorabitur(존귀하게 될 것이다), Gelenius는 inhonorabitur로 읽는다. substantia는 이 책에서 대개 ‘실체’이지만 여기서는 재산을 뜻하므로 ‘재산’으로 옮겼다. 명망 있는 자들, 큰 자들, 부자들이라는 세 부류는 개역개정에는 없고 칠십인역 본문에서 왔다.
15.31 이사야 10:33-34 인용. 칠십인역은 “보라, 만군의 주가 영화로운 자들을 힘으로 뒤흔들 것이니 높은 자들은 꺾이고 높은 자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나무를 꺾고 숲을 베는 비유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성한 가지를 꺾으시리니 ... 높은 나무들이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어내시리니”이다. dominus uirtutum은 ‘만군의 주’이다.
15.33 테르툴리아누스가 ‘제48편’이라 한 것은 칠십인역 번호로, 개역개정 시편 49:16-17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에 해당한다. ‘제61편’은 개역개정 시편 62편이다.
15.34 시편 61:11(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62:10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칠십인역은 “재물이 흘러들어도”(πλοῦτος ἐὰν ῥέῃ)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부가 빛난다 해도’(etsi relucent)로 읽으며, 앞의 ‘부를 탐내지 말라’(ne desideraueritis diuitias)는 시편 본문의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에 해당하는 느슨한 인용이다. ‘사치에’(deliciis)는 MGR3의 독법이고 R1은 diuitiis로 읽는다. ‘발해진다’(destinatur)에 대해 Kroymann은 destinabatur를, Engelbrecht는 destinaturus를 제안하지만 본문은 그대로 두었다.
15.35 아모스 6:4-6 인용. 개역개정은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을 따라 ‘염소 떼에서 어린 염소를’로 읽는다. ‘상아 침상’(lectis eburnaciis)은 R1의 독법이고, MGR3은 eburneis로 읽는다.
15.36 아모스 6:5b-6의 칠십인역 본문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영속하는 것으로 여겼으니”(ὡς ἑστῶτα ἐλογίσαντο καὶ οὐχ ὡς φεύγοντα)는 히브리어 본문의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개역개정 6:5)를 칠십인역이 달리 읽은 것으로, 개역개정에는 없다. ‘걸러 낸 포도주’(uinum liquatum)는 개역개정의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에, ‘최상급 향유’는 “귀한 기름”에 해당한다.
15.37 ‘그리스도가 쓴 바로 그 말로’(etiam uerbo ipso quo et Christus)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 자체를 가리킨다. materiae는 ‘질료, 소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위협의 대상이 되는 부 자체를 가리키므로 ‘대상’으로 옮겼다.
15.38 누가복음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15.39 ‘위에서’는 제14장에서 누가복음 6:21의 축복에 맞세워 인용한 이사야 65:13을 가리킨다.
15.40 이사야 65:13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배부를 것이다’(saturabuntur)로 읽어 누가복음 6:25의 ‘배부른 자들’(saturati)과 짝을 맞춘다.
15.41 이사야 65:13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이다. ‘즐거워할 것이나’(oblectabuntur)는 칠십인역 εὐφρανθήσονται에 해당한다.
15.42 시편 125:5(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웃음으로 ... 심는 자들’(qui in risu seminant)의 qui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quia로 읽는다.
15.44 누가복음 6:26 인용. 개역개정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benedixerint는 그리스어 εὖ εἴπωσιν(좋게 말하다)을 ‘축복하다’로 옮긴 고대 라틴어 역어이며, 15.45-51의 ‘축복’(benedictio) 논증이 이 말에 걸려 있으므로 ‘축복할 때에’로 옮겼다.
15.46 이사야 3:12 인용. 칠십인역은 “내 백성이여, 너희를 복되다 하는 자들(οἱ μακαρίζοντες ὑμᾶς)이 너희를 미혹하고 너희 발의 길을 어지럽힌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이다.
15.48 예레미야 17:5 인용. 개역개정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이다. ‘제117편’은 칠십인역 번호로 개역개정 시편 118편이다.
15.49 시편 117:8-9(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118:8-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피하는 것’ 대신 ‘신뢰하는 것’(confidere)과 ‘희망을 두는 것’(sperare)으로 읽는다.
15.52 <이 아니고서는>은 편집자가 보충한 nisi를 옮긴 것이다. 보충 없이는 “예언자들이 받은 침해가 그들의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을 것처럼”이 되어 뒤 문장의 nisi deo prophetarum과 대응하지 않는다.
- 16 본문으로
16.1 “그러나 듣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는 누가복음 6:27의 도입부다. 개역개정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로 옮긴다.
16.2 “듣는 자들의 귀에 말하라”는 사사기 7:3(칠십인역 “백성의 귀에 말하라”)과 제4에스라 15:1(“내 백성의 귀에 말하라”)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인용은 누가복음 6:27-28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로, 개역개정의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에 있는 ‘선대하라’가 없고 축복의 대상이 미워하는 자들이다.
16.3 이사야 66:5의 칠십인역 본문이다. 칠십인역은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우리 형제다’라고 말하라”로 읽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따른 개역개정은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로 되어 있어 화자와 청자가 다르다.
16.5 따옴표 안의 문장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마르키온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출애굽기 21:24, “다른 뺨”과 “속옷 위에 겉옷”은 누가복음 6:29와 마태복음 5:39-40이다. 누가복음 6:29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순서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의 순서(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도)를 따랐다. uicem iniuriae(불의를 되갚는 것)와 ultio(보복)를 구별하여 옮겼다.
16.6 <ni>(…이 아니라면)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보충 없이 읽으면 “그렇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이것들을 창조주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보충으로 덧붙였다”는 뜻이 되며, 보충을 넣으면 16.5 끝의 ‘그렇다, 분명히’가 조건절로 제한된다. 보충된 말을 < > 안에 두었다.
16.7 Kroymann은 여기의 an을 nonne의 뜻으로 읽는다. “인내의 가르침이 창조주에게서도 선포되고 있지 않은가?”로 옮겼다. 16.7-16.9는 하나의 긴 문장이다. “스가랴를 통해 명했다면”(16.7)이 조건절이고, 16.8의 인용과 16.9 앞부분의 인용이 그 내용이며, 16.9의 “망각을 명한 이는 … 훨씬 더 명한 것이다”가 주절이다. Kroymann은 16.8의 “그뿐 아니라 이웃의 악도”부터 16.9의 인용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16.8 스가랴 7:10의 칠십인역 본문이다(“각 사람은 자기 형제의 악을 마음에 기억하지 말라”). 개역개정은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이다.
16.9 스가랴 8:17의 칠십인역 본문이다(“각 사람은 자기 이웃의 악을 마음에 헤아리지 말라”). 개역개정은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이다.
16.10 신명기 32:35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로마서 12:19와 히브리서 10:30의 인용 형태와 같다. uindicta는 ‘응징’으로, ultio는 ‘보복’으로 옮겨 구별했다.
16.11 사본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순서로 전하지만 Kroymann은 출애굽기 21:24의 순서에 맞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바로잡았다. 이 순서를 따랐다.
16.12 [그가 금지했던](quam prohibuerat)은 Kroymann이 앞 구절에서 잘못 반복된 삽입으로 보아 괄호 안에 넣은 말이다. 번역하여 [ ] 안에 두었다. talio는 가해자에게 같은 해를 되돌려 주는 처벌로, ‘동해보복’으로 옮겼다. 사본 M은 opposito talione, R의 후대 교정은 talione opposita로 읽으며 뜻은 같다.
16.13 sciit는 Kroymann의 교정이다(F comprimiscit, R comprimi scit, M comprimescit). 주어는 하나님(창조주)이다.
16.14 legis taliones(율법의 동해보복들)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talionis로 읽는다. Kroymann은 이를 율법이 명한 보복 규정, 곧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16.15 “안식일의 주”는 누가복음 6:5(마태복음 12:8)를 반영한다. “다른 뺨”은 누가복음 6:29이다. dispositio는 하나님이 역사를 단계별로 배치한 질서를 뜻하여 ‘경륜’으로 옮겼다. compotem fecit는 율법의 뜻이 목적에 도달하게 했다는 뜻으로 ‘이루어지게 했다’로 옮겼다.
16.17 “재판관을 제공하는”(qui iudicem praestat)은 창조주가 불의를 심판할 재판관으로 자신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16.18 disciplinae interest는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 도덕 질서의 유지에 중요하다는 뜻이어서 여기서는 disciplina를 ‘규율’로 옮겼다. 이 장의 다른 곳에서 창조주와 하나님의 disciplina는 ‘가르침’으로 옮겼다. praestare는 Rigaltius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praestaret로 읽는다.
16.19 excitatura(쳐서 빼낼)는 사본의 읽기이며 Latinius는 excussura로 고쳤다. 뜻은 같다.
16.21 누가복음 6:30이다. 개역개정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모든’(omni)이 있다.
16.22 indigeat datorem은 사본 M과 R의 읽기로, indigere가 목적격을 취하여 ‘주는 자를 아쉬워하다’, 곧 줄 사람이 없어 궁핍하다는 뜻이다. Pamelius는 <in> datorem을, R의 후대 교정은 datori를 제안했다. forma는 창조주가 미리 정해 둔 규정을 뜻한다.
16.23 신명기 15:4이다. 개역개정은 4-5절을 한 절로 묶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로 옮긴다. “복 주고 또 복 주려”(benedicens benedicat)는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강조 어법을 그대로 옮긴 형태다.
16.24 non sit indigens in te는 16.23의 non erit indigens를 테르툴리아누스가 명령으로 바꾸어 다시 말한 것이다. 작은따옴표 안의 ‘먼저 나서서 없도록 돌보라’는 그의 해설이다.
16.25 신명기 15:7이다. 개역개정은 “가난한 형제가 있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이다.
16.26 신명기 15:8이다. 개역개정은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이다. fenus fenerabis는 ‘빚으로 빌려 주다’라는 뜻이어서 ‘꾸어 주라’로 옮겼다.
16.27 “꾸어 주는 일에 관해서는 뒤에”라는 말은 17장에서 누가복음 6:34-35의 꾸어 주라는 명령을 에스겔 18:8과 비교하여 다루는 것을 가리킨다. de fenore는 R의 후대 교정이며 사본 M과 R의 원래 읽기는 dato fenore다. erit와 in Christo 사이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으로, 그는 adimpleta(이루어진) 또는 suppleta(보충된)가 빠졌다고 본다. 그 자리에 **를 두었다.
16.30 “사랑할 수 있겠는가” 뒤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이다. 그는 nisi qui ante dilexerit proximos(먼저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면)가 빠졌다고 보며, Ursinus는 quis enim <non diligens proximos> poterit(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 할 수 있겠는가)로 보충했다. 어느 쪽이든 뜻은 이웃 사랑이 낯선 사람 사랑에 앞선다는 것이다. secundus는 R의 읽기이며 M과 F는 secundum으로 읽는다.
16.31 benignitas는 ‘인자함’으로, bonitas는 ‘선함’으로, misericordia는 ‘자비’로, miseratio는 ‘긍휼’로 옮겨 구별했다.
16.32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땅끝을 소유로”는 시편 2:8이다. sacramentum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뜻에서 ‘신비’로 옮겼다.
16.33 호세아 2:23과 1:10(칠십인역 2:1)을 로마서 9:25의 인용 형태로 옮긴 것이다. 호세아의 원문은 이스라엘에 관한 말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를 따라 이방 민족(natio)에 적용한다.
16.35 누가복음 6:31이다. 개역개정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이다.
16.36 부정형 황금률은 누가복음에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긍정형 명령에 함께 들어 있는 다른 한쪽으로 본다.
16.37 passiuitas는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상태를 뜻하여 ‘내 판단이 제멋대로 되도록’으로 옮겼다. 문장의 구조는 조건절 “새로운 신이 … 명했다면”에 신의 성격을 설명하는 관계절 “그 전에 어떤 가르침으로도 나를 형성한 적이 없는”이 이어지고, 주절은 “내 판단이 제멋대로 되도록 허락한 것이며 … 묶어 놓지 않은 것이다”이다.
16.38 uoluntatis parem은 R의 후대 교정이며 M과 R의 원래 읽기는 uoluntati sperem이다.
16.39 <이제>(iam)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들은 possim으로 읽는데 Kroymann은 possum <iam>으로 고쳤다. 보충된 말을 < > 안에 두었다. obsequium은 상대의 뜻을 따라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섬김’으로 옮겼다.
16.40 아직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ethnici)에 대한 서술은 로마서 2:14를 반영하며, 16.41의 “본성으로 선과 악이 알려져 있다”도 같은 구절과 닿는다. a deo는 M의 읽기이며 R은 ab eo로 읽는다.
16.42 reuelatus, si tamen reuelatus(드러났으면서 - 과연 드러났다면 말이지만)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reuelatus sit, tamen으로 읽는다. compendium은 긴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줄인 요약을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지는 마르키온의 신이 미리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았으므로 황금률이라는 요약이 그 신에게서는 뜻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16.44 이사야 58:7이다.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이다. mendicis(구걸하는 자들)는 칠십인역의 ‘굶주린 자’에 해당한다.
16.45 에스겔 18:7(18:16 참조)이다.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이다.
16.47 출애굽기 20:13-16과 신명기 5:17-20의 십계명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순서 살인-간음-도둑질-거짓 증언은 개역개정 출애굽기 20장의 순서와 같다.
16.48 “간추린 말씀을 땅에서 행할 것”(recisum sermonem facturus in terris)은 이사야 10:22-23의 칠십인역(로마서 9:28)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간추린 말씀’을 그리스도가 율법을 황금률로 요약한 것으로 읽는다. compendio substrinxit는 긴 명령들을 하나의 요약 명령으로 묶었다는 뜻이다.
- 17 본문으로
17.1 누가복음 6:34. 개역개정은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gratia를 ‘감사’로 옮겨 17.17-21의 ingrati(감사를 모르는 자들)/grati(감사하는 자들)/debitum gratiae(감사의 빚)와 같은 말로 이었다. fenus는 ‘대부’, usura는 ‘이자’로 구별하였다.
17.2 에스겔 18:8. ‘같은 의인’은 16장에서 인용한 에스겔 18장의 의인이다. dede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dedit, Engelbrecht는 dederit로 읽었다.
17.5 에스겔 18:7. ‘reddet debenti’는 사본의 reddes beati를 칠십인역 ἐνεχυρασμὸν ὀφείλοντος ἀποδώσει에 맞춰 Kroymann이 고친 것이다(Oehler는 reddes dati). [utique]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중복어이다. ‘utrum homo scriberet’는 Kroymann의 설명대로 비선택 의문문(num quisquam scriberet)으로 옮겼다.
17.6 신명기 24:12-13. ‘redditione reddes’는 히브리어 강조 어법을 그대로 옮긴 고대 라틴어 표현으로, ‘반드시 돌려주어라’로 옮겼다.
17.7 신명기 15:2.
17.8 ‘plus’는 Engelbrecht를 따라 ‘지나침’(zu viel)으로 이해하였다. ‘esset, si’는 Engelbrecht의 수정이며 사본은 est, et si이다.
17.9 누가복음 6:35. 개역개정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에 해당하는 구절을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아들들’(filii dei)로 인용한다.
17.10 마르키온은 혼인을 금하였다(1권 29장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한 신이 사람을 아들로 삼는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17.14 창세기 2:24. ‘ante duos unum denuo factos’는 Kroymann의 수정으로, 사본은 ‘unum. denuo factus’이다.
17.15 창세기 2:7.
17.17 누가복음 6:35. ‘비와 해’는 마태복음 5:45의 말이며 누가복음에는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부재를 마르키온의 삭제로 돌린다.
17.19 <non>은 Kroymann의 보충이며 ‘빌려 주지 <않>았으니’로 옮겼다.
17.20 시편 19:10(칠십인역 18:11). ‘ingratus’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gratos이다.
17.21 ‘tuus’에 Engelbrecht는 <deus>를 보충하려 하였다. 문맥에 따라 ‘그대의 신’으로 옮겼다.
17.22 누가복음 6:36.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 아버지가 너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misertus est uestri)으로 과거형이며, 개역개정의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와 다르다.
17.23 이사야 58:7. <qui>는 Leopoldus의 보충이며(Oehler는 <si>), 관계대명사에 해당하는 ‘<자>를’로 표시하였다.
17.24 이사야 1:17과 호세아 6:6.
17.26 누가복음 6:37.
17.27 누가복음 6:38.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개역개정의 ‘흔들어’(concussam)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17.28 누가복음 6:38.
17.32 ‘quanti’는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quam이다. Engelbrecht는 ‘creatori <oboediendum> docentem’으로 보충하여 ‘창조주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는’으로 읽으려 하였다. 사본대로 ‘사람들을 위해서나 창조주를 위해서 가르치는’으로 옮겼다.
17.33 누가복음 6:39-40. ‘Corrigun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credunt이다. 아펠레스가 마르키온의 가르침을 고친 일을 가리킨다.
17.34 누가복음 6:41-42. 아펠레스(Apelles)는 마르키온의 제자였으나 뒤에 스승을 떠나 신은 하나이고 그리스도는 실제 육신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M 사본은 Appelles로 쓴다.
17.35 누가복음 6:43-45. 케르돈(Cerdo)은 로마에서 마르키온이 따른 스승이다(1권 2장, 3권 21장 참조). thesaurus는 누가복음 6:45의 ‘쌓은 것’을 가리키며 ‘보고’로 옮겼다.
17.37 ‘huic’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huc이다. Kroymann은 ‘in hoc solo’부터 17.38 끝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하였고, ‘in hoc solo’는 복음서 어딘가에 다른 신을 끼워 넣는 일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17.38 <sine>은 Kroymann의 보충이다. M과 F는 nec formidine, R은 sine formidine이다.
17.39 ‘domin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eum이다. 뒤에 오는 누가복음 6:46의 ‘주여, 주여’에 맞춘 것이다.
17.40 누가복음 6:46. <me>는 Engelbrecht의 보충이고, uocatis는 Pamel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uocas이다.
17.42 누가복음 6:46.
17.44 이사야 29:13.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입술로는 나를 사랑하나’(labiis diligit)로, 개역개정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와 다르다.
- 18 본문으로
18.1 누가복음 7:1-10의 백부장 이야기를 다룬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은 누가복음 7:9에 있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면 이스라엘의 믿음이 그와 무관하므로 이 말을 할 수 없었다는 논증이다.
18.2 Kroymann은 sed nec부터 adhuc nulla까지가 후대 삽입일 수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본문에 두었다. poterat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의 뜻으로 읽었다. 주어는 앞 단위의 “이스라엘의 믿음”이며,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는 그때부터도 그 믿음이 상관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18.3 <dixisset>는 R3(Rhenanus 제3판)의 보충이다. M과 R1에는 동사가 없다.
18.4 <se>는 Oehler의 보충이다.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으로, 그는 “그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자기에게 속하는 자임을 입증했다”(eum se probauit, ad quem pertineret fides Israhelis) 같은 말이 떨어져 나갔다고 본다. 전해진 말만 옮겼으므로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Oehler는 quique를 qui quidem으로 읽었다.
18.6 누가복음 7:11-17의 나인 과부의 아들 이야기이다. 창조주의 예언자들이 죽은 자를 살린 일은 엘리야(열왕기상 17:17-24)와 엘리사(열왕기하 4:32-37)를 가리킨다.
18.7 “다른 어떤 신도”(nullum alium deum)의 de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ominus로 전한다.
18.8 누가복음 7:16 인용이다. 개역개정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와 내용이 같고,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나타났다”(prodiit)로 되어 있다. prophetes는 다른 곳과 같이 예언자로 옮겼다.
18.9 uirtutes는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적 능력을 가리키므로 능력으로 옮겼다. “다른 신을 들고 다녔다”(alium circumferebat deum)는 다른 신을 선포하며 다녔다는 뜻이다.
18.10 scandalum은 요한이 의심에 걸려 넘어진 것과 이단자가 그 의심을 근거로 내세우는 반론을 함께 가리킨다. 요한의 경우는 실족으로, 이단자의 경우는 걸림돌로 옮겼다. 마르키온파는 누가복음 7:18-23에서 요한이 그리스도의 일을 듣고 의심한 것을,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다른 신의 그리스도였다는 증거로 삼았다. M과 R1의 addecorationem 대신 R3의 at ego rationem을 따랐다.
18.11 dominus uirtutum은 시편 24:10(칠십인역 23:10) 등의 “만군의 주”를 옮긴 옛 라틴어 표현이다. 앞뒤의 uirtutes(능력)와 이어지도록 “능력의 주”로 옮겼다. M과 R1의 domino 대신 R3의 dominum을 따랐다. massalis summa는 성령의 몫이 되돌아가는 본래의 전체, 곧 성령 자신을 뜻한다.
18.12 사본은 scandalizabatur quidem qua homo, sed non qua alium Christum sperans으로 전하며, Kroymann이 sed의 위치를 옮겨 quidem, sed qua homo, non qua로 읽었다. 번역은 Kroymann의 본문을 따랐다. <habere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8.14 <ne dica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18.15 사본의 quasi haesitauit를 Kroymann이 quis haesitabit로 고쳤다.
18.16 누가복음 7:19-20 인용이다. 개역개정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metus는 여기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염려를 뜻하므로 염려로 옮겼다.
18.17 [ ] 안의 글(18.17 “오시는 이가 당신입니까?”부터 18.19 “다른 이입니까?”까지)은 Kroymann이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이 아닌 후대의 설명으로 보아 괄호로 묶은 부분이다. 그는 18.19의 enim이 18.17의 simpliciter inquirens에 바로 이어진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18.19 Kroymann은 사본의 어순 ipse scilicet dominus, qui uenturus expectabatur를 qui uenturus expectabatur, ipse scilicet dominus로 바꾸고 et를 ex로 고쳤다. 번역은 이를 따랐다. 사람들이 예수를 예언자로 여겼다는 것은 누가복음 9:7-8 참조.
18.20 사본의 debuerant를 Kroymann이 debuerat로 고쳤다. 주어는 요한이다.
18.21 <au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주가 바로 그 일들로 자기를 알아보게 요한에게 전한 것은 누가복음 7:22-23을 가리킨다.
18.23 요한을 예언자 이상으로 부른 것은 누가복음 7:26-27을 가리킨다. angelus는 말라기 3:1의 “사자”(ἄγγελος)를 옮긴 말이며, 용어의 일관성을 위해 천사로 옮겼다. M과 F의 iohannes 대신 R의 Iohanni를 따랐다.
18.24 누가복음 7:27 인용이며 말라기 3:1을 끌어온 것이다. 개역개정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네 얼굴 앞에”(ante faciem tuam)로 되어 있고 “네 앞에서”는 한 번만 나온다. praeparet는 R의 읽기이며 M은 praepararet, Pamelius는 praeparabit로 읽는다.
18.26 누가복음 7:28 참조. 개역개정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작은 자”를 그리스도 자신 또는 아무 작은 자로 해석한다(18.27-28).
18.2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는 누가복음 7:24-26을 가리킨다.
18.28 quem<cum>que와 <dei>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의 quemque(각각)를 quemcumque(누구든)로 읽은 것이며 “<누구>든”으로 표시했다. “그토록 큰 예언자보다 더 큰 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실족하지 않은 작은 자이며, 요한의 실족(18.20)이 그때 요한을 그 작은 자보다 낮아지게 했다는 뜻이다.
18.29 죄 사함은 4권 10장의 중풍 병자 단락에서 다루었다. 누가복음 7:36-50의 죄인인 여자 이야기이다. 뉘우침을 희생제보다 앞세우는 창조주는 호세아 6:6, 시편 51:16-17 등을 가리킨다. phantasma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에 맞선 말이므로 환영으로 옮겼다.
18.31 누가복음 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와 하박국 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인용이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자기 믿음으로”(ex fide sua)는 히브리어 본문과 같다.
- 19 본문으로
19.1 누가복음 8:2-3. “왕의 청지기의 아내”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누가복음 8:3)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롯을 왕(rex)이라 부른다.
19.2 이사야 32:9. 칠십인역 “부유한 여자들이여”(γυναῖκες πλούσιαι)를 따른다. 개역개정은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19.3 이사야 32:9-10(칠십인역). <내>(meos)는 Pamelius의 보충이다. “그 해의 날”(diei anni)은 Kroymann이 칠십인역 ἡμέρας에 따라 MR의 dei를 고친 것이며, Oehler는 die, Pamelius는 dies로 읽었다. 개역개정 32:10은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19.4 prosequebantur는 Junius의 수정이다(MR quo sequebantur). 비유가 창조주에게서 약속되었다는 논증은 제11장에서 시편 78:2를 근거로 이미 다루었다.
19.5 이사야 6:9. 개역개정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19.6 누가복음 8:8.
19.7 [ ] 안의 문장은 Engelbrecht가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ostendebant는 Kroymann의 수정이며(MR ostendebat), 그 결과 “귀를 가진 자들”이 주어가 된다.
19.8 누가복음 8:18. “곧 귀로 듣고도 듣지 못하는 일”(id est: ne aure audiatis)은 M에만 있고 R와 다른 판본들에는 없다.
19.10 누가복음 8:18. “위협하지 않는다”(non minatur)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nominatur, Oehler minatur). 마르키온의 신이 심판도 분노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이다.
19.11 누가복음 8:18.
19.14 인쇄본의 israci는 irasci로 읽었다.
19.15 누가복음 8:16-17. obumbrat에 대해 Engelbrecht는 obumbrarat를 추정했다.
19.16 Venimus는 R의 읽기이다. MF는 uenimus enim, Engelbrecht는 uenimus nunc.
19.17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인가”는 마태복음 12:48(마가복음 3:33)의 형태이다. 누가복음 8:21에는 질문이 없고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로 되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질문을 마르키온의 복음서 본문으로 다룬다.
19.18 인쇄본의 ita sem. per는 ita semper로 읽었다.
19.19 누가복음 8:20.
19.21 누가복음 10:25.
19.22 Kroymann은 마태복음 16:1을 지시한다. 세금 질문은 마태복음 22:15-18(누가복음 20:20-23 참조)이다.
19.24 인쇄본의 ex ist는 ex ista로 읽었다.
19.25 filius hominis를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칭호를 사람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읽어, 그가 태어났음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다는 논거로 삼는다.
19.26 existimans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existimantes). Engelbrecht는 existimantes를 유지하고 19.25의 dubitaret를 dubitarent로 읽는다.
19.27 explorationem은 Kroymann의 수정이다(MR exploratione).
19.30 누가복음 2:1-2는 구레뇨(Quirinius)를 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C. Sentius Saturninus(기원전 9-6년경)를 든다. tunc는 Junius의 수정(MR nunc), Iudaea는 Latinius의 수정이다(MR iudaeam).
19.32 [또한](et)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19.33 †: quaerentes merito indignatus est non tam negauit는 전승 본문이 어긋난다. Kroymann은 quaerentes와 est를 삭제하기를 원했고, Engelbrecht는 indignatus, eas non으로 읽었다. 번역은 quaerentes를 “불러내려고 들었으니”로 살리고 est 없이 읽었다. abdicauit(내쳤다, 의절하다)에 대해 N과 Pamelius는 abnegauit.
19.34 인쇄본의 praemisiss et는 praemisisset으로 읽었다. quis(MR)는 19.17의 quae와 다르며 Pamelius와 N은 qua로 읽었다.
19.35 누가복음 8:21. 인쇄본의 quiaudiunt는 qui audiunt로 읽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내 말”(uerba mea)이며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prae fide는 M의 읽기이다(R pro fide).
19.36 [그에게서](ab eo)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19.38 “오히려 그가 그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더욱 고백한 것이니”(ceterum ex hoc ... agnoscere)는 MR에서는 dignum discipulum 뒤에 있으나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인쇄본의 ex boc는 ex hoc으로 읽었다. 마태복음 10:37; 누가복음 14:26 참조. F는 in semet ipso부터 한 장이 없다.
19.39 offensa를 노여움으로 옮겼다. 그리스도가 혈육을 부인한 것은 그들이 그를 거룩한 일에서 불러낸 데서 생긴 노여움 때문이다.
- 20 본문으로
20.1 누가복음 8:22-25(풍랑을 잠잠하게 한 사건)를 다룬다.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파가 할 법한 주장을 테르툴리아누스가 대신 꾸며 말한 것이다.
20.2 substantiae는 바람과 바다라는 원소적 실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창조주의 종들, 곧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에게도 순종했다는 뜻이다.
20.3 출애굽기 14:16, 21-22, 27을 가리킨다. 남풍(austri)은 칠십인역 출애굽기 14:21의 νότος를 따른 것이며,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큰 동풍”으로 옮긴다. 사본의 mari rubro, uastior는 어색하지만 뜻은 ‘유대의 모든 호수보다 넓은 홍해’이므로 그렇게 옮겼다.
20.4 사본(M, R)의 et sorte familiae dirimendae는 훼손된 본문으로 Kroymann이 †로 표시했다. 전승된 낱말을 그대로 옮겨 ‘나누어야 할 가족의 몫으로’라고 썼다. Kroymann은 이 대목이 열왕기하 2:8, 14(엘리야와 엘리사가 겉옷으로 요단을 가른 사건)를 가리킨다고 보고 lege et, sodes, pallium Eliae를, Engelbrecht는 lege et pellem ouillam Eliae dirimendae <undae>를 제안했으며, Oehler는 extorri로 고쳤다. 뒤의 Iesus는 여호수아 3:15-17에서 요단을 멈춘 여호수아이며, 라틴어 성경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은 Iesus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제3권 16장에서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이 같다는 점을 논한다. machaera(칼)는 요단을 가르는 엘리야의 겉옷을 비유한 말로 읽힌다.
20.5 따옴표 안의 ‘이것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마르키온파의 반문이다.
20.7 시편 29:3(칠십인역 28:3)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를 인용한다.
20.8 하박국 3:10을 칠십인역(σκορπίζων ὕδατα πορείας)에 따라 인용한다. 개역개정 3:10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창수가 넘치고”로 옮겨 표현이 다르다.
20.9 나훔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를 인용한다.
20.11 누가복음 8:26-39(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를 다루며, ‘군대’(legio)는 누가복음 8:30에서 귀신이 밝힌 이름이다. daemones는 개역개정 누가복음의 용례를 따라 ‘귀신들’로 옮겼고, diabolus(마귀)와 구별했다. 마르키온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무장한 전사라고 보았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전쟁이 영적인 전쟁이라고 답한다.
20.12 시편 24:8(칠십인역 23:8)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를 인용한다. ‘마지막 적인 죽음’은 고린도전서 15:26을 가리킨다. tropaeum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적의 무기를 걸어 세운 기념물로, ‘전승비’로 옮겼다.
20.13 ‘군대’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은 누가복음 8:28, 무저갱(abyssus)으로 보내지 말라는 간청은 누가복음 8:31이다. Kroymann은 사본 M, R1의 testatus(남성)를 그리스어 ὁ λεγεών의 성에 맞춘 것으로 보아 그대로 두었다.
20.16 Kroymann은 innotuisse 뒤에 debuisset, ut quae 정도의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결락을 보충하면 ‘주인이 알아낸 것은 그 집안에도 알려졌어야 했을 것이니, 그 집안은 같은 세계 안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dominus는 집안(familia)의 주인이라는 비유 속의 창조주이므로 ‘주인’으로 옮겼고, familia는 창조주에게 속한 영들, 곧 귀신들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식솔을 가리킨다.
20.17 Kroymann은 사본의 quia nulla fuit 어순을 nulla fuit, quia로 바꾸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읽었다. 번역은 이 교정을 따랐다.
20.18 depeterent, ab alio는 Kroymann의 교정이다. 사본은 depetunt ab alio, Ursinus는 peterent ab alio로 읽는다. uenia abyssi는 무저갱에 떨어지는 벌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20.20 iudicis는 Kroymann이 사본의 iudicem을 고친 것으로, ‘심판자이며 보복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요점은 귀신들이 창조주의 아들을 알아보았고 예수가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21 20.21의 ‘나도 그에게 무지를 돌리고 싶기 때문이다’부터 20.22의 ‘내게 허락하라’까지는 Engelbrecht가 지적한 삽입구다. permittite는 복수형으로 마르키온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한 말이다. 사소함과 연약함(pusillitates et infirmitates)은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돌린 결점들, 특히 모르고 묻는 무지를 가리킨다.
20.22 누가복음 8:43-48(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다룬다.
20.23 누가복음 8:45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를 인용한다. 제자들의 해명은 같은 절에서 베드로가 무리가 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20.24 누가복음 8:46 “어떤 사람이 내게 손을 대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를 인용한다.
20.26 <re>probaret는 Kroymann의 교정이다. 사본은 probaret(시험하기 위해서)로 읽으며, 교정에 따라 ‘책망하기 위해서’로 옮기고 접두어만 보충된 부분을 <책망>으로 표시했다. <창조주>도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20.27 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인용한다.
20.28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파의 주장이다. 피 흘리는 여자와의 접촉 금지는 레위기 15:19-27을 가리킨다.
20.29 aemulatio는 다른 곳과 같이 ‘질투’로 옮겼다. 이 문맥에서는 율법에 맞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경쟁심을 뜻하며, 20.45의 aemulus legis(율법을 질투하는 자)도 같은 뜻이다.
20.30 누가복음 8: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를 인용한다.
20.31 <noui>는 Kroymann의 보충이다. Engelbrecht는 대신 앞의 nullius 뒤에 <alius>를 보충하려 했다.
20.32 cui spernens creatorem은 사본 M의 읽기로, Kroymann은 cui를 ‘누구를 위하여’로 이해한다. R과 통행본은 quem spernens? creatorem(누구를 업신여기면서? 창조주를)으로 읽는다.
20.35 ‘제사 자체보다 자비를 더 원한다’는 호세아 6:6을 가리킨다.
20.38 월경과 출산으로 인한 출혈의 규정은 레위기 15:19-24와 12:1-8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율법이 정한 기간(modus temporis)이 자연적인 출혈에 적용되는 것이고, 병으로 인한 출혈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자가 분별했다고 말한다.
20.41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는 칠십인역 이사야 7:9(ἐὰν μὴ πιστεύσητε, οὐδὲ μὴ συνῆτε)를 인용한 것이다. 개역개정 7:9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뒷부분을 “굳게 서지 못하리라”로 옮긴다.
20.42 quam probauit는 앞 단위의 ‘이 믿음’을 받는 관계절이어서 ‘그는 그 믿음을 인정한 것이다’로 옮겼다. 옷이 만져진 것은 누가복음 8:44이다.
20.43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이 아니라는 논의는 제3권 8-11장에서 다루었다.
- 21 본문으로
21.1 누가복음 9:1-2. 마지막 물음 cuius는 선포된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묻는 말이다.
21.2 누가복음 9:3. 까마귀와 들꽃은 누가복음 12:24, 27, 곡식 밟는 소는 신명기 25:4, 일꾼의 삯은 누가복음 10:7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ad ueniam pabuli ex opere summouendi는 소가 일하는 중에 곡식을 입으로 집어 가도록 허락한다는 뜻으로 옮겼다. Ursinus는 summouendi 대신 sumendi로 읽는다.
21.3 누가복음 9:5. 발의 먼지를 떨어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in testimonium)는 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심판의 증언으로 읽는다.
21.5 누가복음 9:7-9. 누가복음에서는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라는 세 의견이 헤롯에게 전해지고, 헤롯은 요한을 자기가 목 베었다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의견들을 모두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으로 묶어 새로운 신을 들고 온 자로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논거로 쓴다.
21.7 누가복음 9:10-17.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은 출애굽기 16:35, 장정 육십만 명은 출애굽기 12:37.
21.8 ea<de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 M, R는 ea로 읽는다. 보충을 받으면 21.7의 “같은 위엄”(eadem maiestas)과 이어진다.
21.9 열왕기상 17:7-16. 개역개정은 열왕기상에서 “사르밧”, 누가복음 4:26에서 “사렙다”로 쓴다. Sareptensis는 사본 M의 속격이고, R와 통용본은 Sareptensi로 읽는다.
21.10 “열왕기 셋째 권”과 “넷째 권”은 칠십인역과 옛 라틴 성경의 구분으로, 개역개정의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다. 열왕기하 4:42-44의 엘리사 이야기다. 열왕기하 4:42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되어 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열 개라고 쓴다. ordiacios는 사본 M의 표기이고 R는 hordeaceos로 쓴다.
21.11 열왕기하 4:43. centum [milibus] hominum의 milibus는 Pamelius가 삭제 표시한 말이다. 그 말이 없으면 열왕기하 본문대로 “백 명”이고, 사본대로 읽으면 “십만 명”이 된다. in <con>spectu는 Rigaltius의 보충으로 “눈앞에”라는 뜻이다. 사본 M은 inspectu, R는 inspectum으로 읽는다.
21.12 열왕기하 4:43-44. “주의 말대로”(secundum dictum domini)는 열왕기하 4:44에서 사람들이 먹고 남긴 사실을 서술하는 말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엘리사의 말에 바로 이어 붙였다.
21.13 누가복음 9:18-20.
21.14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는 마가복음 8:29의 형태다.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마태복음 16:16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다. [nisi]는 Latinius가 삭제 표시한 말로, ‘[다름 아닌]’으로 옮겼다. 그 말이 없으면 “베드로는 그를 자기가 성경에서 알고 있던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가 되고, 그 말을 살리면 “성경에서 알고 있던 그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없었다”가 된다. 어느 쪽이든 베드로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결론은 같다.
21.15 누가복음 9:21. 침묵 명령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둔 것으로 읽는다.
21.17 누가복음 9:22. 개역개정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의 순서이고, “사흘 뒤에”(post tertium diem)로 읽는다.
21.20 누가복음 9:24. anima는 이 장 전체에서 “영혼”으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목숨”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1.22와 21.25에서 같은 말을 순교자의 영혼에 적용한다.
21.21 다니엘 3:92(칠십인역과 불가타, 개역개정 3:25). 개역개정은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tamquam filium hominis)로 읽는다. 바벨론 왕은 느부갓네살이다. “이런 결말들”(istos exitus)은 21.20의 영혼을 잃는 자와 구하는 자의 결말을 가리킨다. 21.17의 filius hominis는 ‘인자’로, 21.21의 filius hominis는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여기서 그가 아직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므로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이 칭호를 낱말 뜻대로 따지기 때문이다.
21.22 다니엘 3:19-23. 세 “형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다. 갈대아 사람들의 죽음은 다니엘 3:22와 칠십인역 다니엘 3:48에서 불꽃이 집행자들을 태운 것을 가리킨다.
21.24 이사야 57:1. 개역개정은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이다.
21.25 ** 자리에 Kroymann은 시편 116:15(칠십인역 115:6)를 근거로 <sed et honorabilis, inquit Dauid, mors>를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그러나 다윗이 말하듯 그의 성도들의 죽음은 또한 귀중하니”가 되고, 이어지는 “단순하지 않고 자연의 법에 따른 보통의 것도 아니며 믿음을 위한 군사적인” 수식어는 그 죽음을 꾸미는 말이 된다. 번역은 보충 없이 “그의 성도들의 것”으로 두었다. “군사적인”(militaris)은 순교를 믿음을 위한 군인의 죽음으로 보는 말이다.
21.26 remuneraturus sit et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 사본은 remuneraturus. sed et로 읽어 새 문장을 시작한다. “질투하는 하나님”(zeloten deum)은 출애굽기 20:5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돌리는 특징이다.
21.27 누가복음 9:26. 개역개정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로 1인칭으로 읽는다. mei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me다. 인용 뒤 ** 자리에 Kroymann은 <sic quoque meus Christus>를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도 그는 나의 그리스도다”가 되고, 이어지는 quando 절이 그 근거가 된다. 번역은 보충 없이 quando 절을 “…이니 말이다”로 옮겼다.
21.29 ** 자리에 Kroymann은 prolatus, non이 빠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자궁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응결되지도 않았다”가 된다. Engelbrecht는 iaculatus, non을 제안한다. coagulatus는 R3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1은 coagulatum으로 읽는다. “씨에서는 아니더라도 법칙에 따라”는 동정녀 탄생이 남자의 씨 없이, 그러나 피와 체액으로 몸이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 일어났다는 뜻이며, 21.30 첫머리의 substantiae corporalis가 이 lege에 걸린다.
21.30 열 달은 로마의 음력 계산에 따른 임신 기간이다. “소금과 꿀로 손질되다”는 신생아의 피부를 소금으로 문지르고 입에 꿀을 발라 주던 관습이다. “이미 매장의 싸개인 배내옷”은 배내옷을 수의의 예행으로 보는 말이다. “하늘에서 내버려졌다”(de caelo expositus)의 expositus는 버려진 아이에게 쓰는 말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탄생 없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조롱이다. “영이요 능력이요 신일 뿐”의 deus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므로 “신”으로 옮겼다.
21.31 <u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보이지 않았던 그”(qui non uidebatur)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몸이 없어 참으로 보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저주는 갈라디아서 3:13과 신명기 21:23을 가리킨다.
21.32 시편 8:5(칠십인역 8:6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개역개정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이사야 53:5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noster는 “우리의 그리스도”로 옮겼다.
21.33 “자기 형상과 모양”은 창세기 1:26. [tunc]는 편집자가 삭제 표시한 말이고, <non>은 편집자의 보충이다. 보충 없이 읽으면 “사람이 돌과 나무를 숭배하면서 부끄러워했으므로”가 되어 뒤따르는 “똑같은 꿋꿋함으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맞지 않는다.
- 22 본문으로
22.1 누가복음 9:28-36의 변모 기사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장면이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도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파괴자로 왔다고 하면서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22.2 누가복음 9:35.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dilectus(사랑하는)로, 개역개정 누가복음의 “택함을 받은 자”(ἐκλελεγμένος)가 아니라 마가복음 9:7과 마태복음 17:5의 형태와 같다. 22.37, 22.43에서도 같은 형태로 인용된다.
22.5 in sordibus aliquibus는 영광의 광채와 대비되는 “어떤 더러운 차림새”다. in tenebris creatoris, quibus discutiendis erat missus는 마르키온이 창조주의 영역을 어둠으로, 자기 그리스도를 그 어둠을 흩어 버리러 온 자로 묘사한 것을 전제한다.
22.7 Christus ipsorum은 직접적으로는 앞 문장들의 illos, 곧 모세와 엘리야에게 속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마르키온파의 그리스도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다. 번역은 “바로 그들의 그리스도”로 두어 두 가지 이해가 모두 가능하게 했다.
22.8 <ostendisset>는 Kroymann이 22.9의 ostendere를 근거로 보충한 말이다.
22.9 Christi creatoris의 Christi는 Kroymann이 사본 MR의 Christus를 고친 것이다.
22.12 informator와 reformator는 모세가 백성을 처음 세운 자, 엘리야가 말라기 4:5-6에 따라 백성을 다시 세울 자임을 가리킨다. testamentum은 두 사람이 각각 옛 언약을 시작하고 새 언약을 완성한다는 뜻이므로 “언약”으로 옮겼다. 22.27, 22.38도 같다.
22.13 <in>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은 indiuiduitate, Engelbrecht는 indiuiduitati로 읽는다. 뜻은 어느 쪽이든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의 동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초막 셋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22.14 누가복음 9:33. 개역개정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hic(여기에)가 두 번 들어 있다.
22.15 누가복음 9:33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더라.” noua prophetia(새 예언)는 몬타누스 운동의 자칭 명칭이고, causa nouae prophetiae는 테르툴리아누스가 그 운동을 옹호하며 쓴 논쟁을 가리킨다. 그는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exstasis(탈혼)가 따른다고 주장했다. exstasis는 “탈혼”, amentia는 “정신을 벗어남”으로 옮겼다.
22.17 psychici(영혼적인 자들)는 고린도전서 2:14의 ψυχικός에서 온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새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른 명칭이다. 영적인(spiritales) 자들과 대비된다. 구두점은 Kroymann을 따라 앞 문장을 diuina에서 끊었다.
22.18 [nisi in spiritu?]는 Kroymann이 22.19의 nisi quia in spiritu uiderat와 겹친다고 보아 괄호에 넣은 말이다. 형상과 조각상과 모양의 금지는 출애굽기 20:4를 가리킨다.
22.22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는 마가복음 8:29의 형태다.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짧은 형태를 인용하고, 베드로가 이 고백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 것으로 논증한다.
22.25 신명기 19:15. 개역개정은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세 증인만 들어 베드로, 야고보, 요한(누가복음 9:28)에 맞춘다.
22.26 출애굽기 19:16-20의 시내산 사건이다. formam loci는 변모의 장소가 산이라는 점이 시내산의 양식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22.27 <si>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번역에서는 조건을 나타내는 어미에 괄호를 두었다. ille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키고, per caelum creatoris uiam ruperat는 마르키온의 신이 창조주의 하늘을 뚫고 내려왔다는 마르키온파의 주장을 비꼰 말이다. 구름은 출애굽기 19:16과 누가복음 9:34를 잇는다.
22.28 in secundo psalmo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in primo로 되어 있다. 인용은 시편 2:7이다. ad quem도 Kroymann이 사본의 atque를 고친 것이다.
22.29 시편 2:7. 개역개정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이다.
22.30 이사야 50:10. 칠십인역은 “그의 종(παῖς)의 음성”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filii(아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이다. 22.36에서 같은 구절이 다시 인용된다.
22.31 quem repromisi는 하늘의 음성 “이는 내 아들이다”에 숨어 있다고 테르툴리아누스가 보는 말이다. 미리 약속한 자만이 “이가 그다”라고 가리켜 보일 수 있다는 논증이다.
22.32 이 반문은 마르키온의 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그는 아들을 예고한 적도 없고 자기 자신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적도 없으므로, “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eras는 Ursinus의 교정이고 사본은 erat이다.
22.33 누가복음 9:35. <nisi que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in nomine prophetae는 신명기 18:15에서 하나님이 장차 올 자를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미리 가리켰다는 뜻이다.
22.34 신명기 18:15과 사도행전 3:22.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x filiis uestris(너희 자손 가운데서)로, 개역개정의 “네 형제 중에서”와 다르다. secundum carnalem censum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22.35 사도행전 3:23. 신명기 18:19에 해당하는 말을 사도행전의 형태로 인용한다. 개역개정 사도행전은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이다.
22.36 이사야 50:10. <deu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22.37 이사야 44:26. 칠십인역은 “그의 종(παῖς)의 말을 세우며”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filii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이다. sistens uerba는 아들의 말을 확고하게 세운다는 뜻으로, 하늘의 음성이 그 일을 했다고 본다.
22.38 translatio auditionis는 들어야 할 대상이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이전이 다른 신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점을 강조한다.
22.39 이사야 63:9 칠십인역 “사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주 자신이 그들을 구원했다.” 개역개정은 히브리 본문을 따라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로 되어 있어 뜻이 다르다. implens legem et prophetas는 마태복음 5:17을 가리킨다. 사본의 deus를 Pamelius는 dominus로 고쳤다.
22.40 모세와 엘리야가 “직무와 명예를 다 마친 자들처럼”(officio et honore dispunctis) 물러난 것은 그들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영광을 함께 누린 뒤 임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22.41 하박국 3:1-2. 개역개정 하박국 3장은 히브리 본문을 따르므로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칠십인역 문장과 상당히 다르다. ex persona apostolorum은 예언자의 말을 사도들의 입장에서 발설된 것으로 읽는 방식이다.
22.42 하박국 3:2 “주여, 내가 주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였나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이다. auditum tuum은 “주에 관해 들린 것”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것을 하늘의 음성으로 본다.
22.43 하박국 3:2 칠십인역 “내가 주의 일을 살펴보고 정신을 잃었나이다”(κατενόησα τὰ ἔργα σου καὶ ἐξέστην). 개역개정에는 이 문장이 없다. <et>는 Rigaltius의 보충이다. 사본 M은 excedi, R은 excidi로 읽는다. excidi mente를 베드로가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 것(누가복음 9:33)과 연결한다.
22.44 하박국 3:2 칠십인역 “두 생물 사이에서 주는 알려지시리이다”(ἐν μέσῳ δύο ζῴων γνωσθήσῃ). 개역개정에는 이 문장이 없고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가 있다. 두 감람나무는 스가랴 4:3, 11-12를 가리킨다.
22.45 스가랴 4:14. 칠십인역은 “기름짐의 두 아들”(οἱ δύο υἱοὶ τῆς πιότητος)이고 개역개정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이다.
22.46 하박국 3:3-4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능력이 하늘을 덮었다”를 변모 때의 구름에, “광채”를 누가복음 9:29의 빛나는 옷에 적용한다.
22.47 commemoremur는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promissio Moysi는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에게 한 약속이고, expuncta는 변모에서 그 약속이 이행되었다는 뜻이다.
22.48 출애굽기 33:13 칠십인역 “주 자신을 내게 나타내사 내가 주를 알아보며 보게 하소서”(ἐμφάνισόν μοι σεαυτόν, γνωστῶς ἴδω σε). 개역개정은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내가 주를 알고”이다. “어떤 사람도 보고 살 수 없다”는 출애굽기 33:20, “네가 말한 이 말대로 내가 네게 행하리라”는 출애굽기 33:17이다.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을 따랐다.
22.49 출애굽기 33:18.
22.50 출애굽기 33:19와 33:23. posteriora(뒤, 뒷모습)와 posterioribus temporibus(뒤의 때, 후대)의 말놀이로, 모세가 볼 것은 몸의 뒷부분이 아니라 후대에 드러날 영광이라는 뜻이다. 개역개정 33:23은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이다.
22.51 민수기 12:6-8. 테르툴리아누스는 ad Aaronem(아론에게)이라고 하지만 민수기 12:4-8에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한 말이다.
22.52 민수기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칠십인역의 στόμα κατὰ στόμα(입과 입을 맞대어), ἐν εἴδει(모습으로), οὐ δι’ αἰνιγμάτων(수수께끼로 아니고)을 따른 라틴 본문이다. in specie의 species를 그리스도가 입을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22.53 누가복음 9:30-32. 누가복음 9:30은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거늘”(conloquebantur)이라 하고, 9:32는 “함께 선 두 사람”(stantes cum illo)이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대화 부분을 지우고 서 있는 모습만 남겼다고 전한다. cum illo는 누가복음 9:32의 말이다.
22.54 출애굽기 34:29-35. 하나님과 말한 뒤 모세의 얼굴이 빛나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한 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변모 때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물러난 모세를 같은 모습으로 보고, 그 빛이 지금은 마르키온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7, 13을 배경으로 한다.
- 23 본문으로
23.2 누가복음 9:41. 개역개정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패역한’이 없다. 그는 이 말을 이스라엘에게 한 질책으로 읽는다.
23.3 ‘오 청지기여’(o oeconome)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 M은 o ęchonome, F는 eperchomene이고 R 이하 통행본은 그리스어 ἐπερχόμενε(‘다가오는 자여’)로 읽는다. 23.9도 같다. Kroymann은 근거로 누가복음 12장을 참조하게 하는데(apparatus의 표기는 Luc. 12, 24), 청지기(οἰκονόμος)가 나오는 곳은 누가복음 12:42다.
23.6 ‘인내’(patientiam)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aenitentiam(뉘우침)으로 읽는다. 23.14의 patientiam iactes에 맞춘 것이다.
23.7 ‘이솝의 우물에서 나온 나귀’는 느닷없이 나타나 큰 소리를 내는 자를 가리키는 속담식 표현이다. 이 우화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23.7 [ ] 안의 23.7 후반부터 23.14 전반까지는 Kroymann이 삽입문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그는 마가복음 9:19(‘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여’)에 따라 이 질책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한 후대 필사자가 23.1-23.7의 내용을 제자들 쪽으로 되풀이해 적어 넣었다고 본다.
23.12 <맡겼기에>(commisisti)는 Gelenius가 보충한 말이다. 23.5의 같은 구문을 근거로 한다. ‘그대를 세운 이’(auctorem tuum)는 사본 R3의 읽기이고 MR1은 auditorem(듣는 자)으로 읽는다.
23.14 ‘이처럼 ... 않았겠는가’(non ita)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nouit로 읽는다.
23.16 누가복음 9:46-48의 어린아이 본문과 열왕기하 2:23-24의 엘리사와 아이들 이야기를 맞세운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다. 열왕기하 2:24에서는 암곰 두 마리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는다.
23.17 테르툴리아누스는 paruuli(어린아이, 누가복음 9:47-48)와 pueri(소년, 열왕기하 2:23)를 구별한다. 열왕기하 2:23의 히브리어 ‘작은 아이들’(네아림 케탄님)은 판단력이 있는 젊은이를 포함할 수 있는 표현이다.
23.18 ‘용서하지 않았으니’(parsi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은 psit, R 이하 통행본은 pepercit로 읽는다. 의미는 같다.
23.19 출애굽기 1:15-21. 바로의 명령을 거슬러 히브리 남아를 살린 산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푼 일이다.
23.20 마르키온파는 혼인과 출산을 거부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29장에서도 같은 논점을 든다.
23.21 ‘참으로’(ne)는 Kroymann이 긍정의 감탄사 nae로 읽은 것이다. 사본 MR1은 nec, R3 이하 통행본은 nae로 읽는다.
23.22 ‘열 달’은 고대의 태음월 기준 임신 기간이다.
23.23 창세기 1:28. ‘축복받을 것이라고’(benedicendum)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benedicendo로 읽는다. ‘그 열매는 유아기에서 처음 시작한다’(qui de infantia primus)는 M의 읽기이며 R은 primus est, Engelbrecht는 primus <est status>로 보충한다. Kroymann은 ‘유아기부터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23.24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가리키는 사건은 열왕기하 1:10-12로 보인다. 엘리야의 말에 따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을 태운 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 대상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른다. 뒷부분은 누가복음 9:51-56의 사마리아 마을 사건이다. 몇몇 사본의 누가복음 9:54에는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 덧붙어 있다.
23.24 <꾸짖은 온유함>(lenitatem increpantis)은 Pamelius의 보충이다. ‘내리려 하던 제자들’(destinantes discipulos)도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estinantis로 읽는다.
23.26 이사야 42:2-3, 마태복음 12:19-20.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며>(clamabit nec)는 Kroymann이 이사야 본문과 『유대인 반박』 9장을 근거로 보충한 말이다.
23.28 열왕기상 19:12. 개역개정은 ‘세미한 소리’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온화한 영 가운데’(in spiritu miti)로 인용한다. ‘주’(dominu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deus로 읽는다.
23.29 누가복음 9:57-58. 테르툴리아누스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대답을 거절로 읽는다.
23.32 누가복음 9:59-60.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이다.
23.33 레위기 21:11. 대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고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지 말라는 규정이다. 라틴어 anima defuncta는 히브리어 네페쉬(죽은 사람)를 옮긴 말이어서 ‘죽은 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는 편집자의 보충이다. ‘민수기’는 라틴어 Arithmi(그리스어 책 이름)를 옮긴 것이다.
23.34 민수기 6:6-7. 나실인 서원자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규정이다.
23.37 누가복음 9:61-62.
23.38 창세기 19:17, 26. 소돔에서 나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과 롯의 아내 이야기다.
- 24 본문으로
24.1 누가복음 10:1의 일흔 제자 파송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열두 사도와 일흔 제자를 엘림의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출애굽기 15:27; 민수기 33:9)에 대응시킨다.
24.3 인용부호 안의 문장은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창조주와 그리스도를 대조한 내용을 테르툴리아누스가 옮긴 것이다. 출애굽 때의 반죽 짐과 이집트 사람들의 금은 패물과 옷(출애굽기 12:34-35)을,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는 지시(누가복음 9:3; 마태복음 10:10)와 대조한다. 누가복음 10:4에는 지팡이가 없어서 Pamelius는 uirgam을 peram(전대)으로 고쳤으나 Kroymann은 사본의 uirgam을 유지했고 번역도 이를 따랐다.
24.5 circumcidens(덜어 내다)는 Latinius의 추정이다. 사본 MR은 circumiens(돌아다니며)이다. 번역은 Kroymann이 채택한 circumcidens를 따랐다.
24.6 누가복음 10:4의 신발 금지를 광야 사십 년 동안 신발이 해지지 않았다는 신명기 29:5와 연결한다.
24.7 누가복음 10:4. “예언자들을 파괴하는 그리스도”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반어다.
24.8 열왕기하 4:29. 라틴어 Gezin은 개역개정의 게하시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축복하다’(benedicere)를 쓰고 그가 이것을 ‘인사하다’(salutare)로 풀이하는데, 개역개정은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로 옮긴다.
24.12 누가복음 10:5. <라고 한 것도>는 Engelbrecht의 보충 dicere<nt, de>를 옮긴 것이다. 사본은 dicere. exemplo로 끊긴다. 사본 MR의 dominus ut는 Kroymann이 domini istud로 고쳤다.
24.13 열왕기하 4:26. 개역개정에서는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맞아 그와 남편과 아이가 평안한지 물으라고 한다. 라틴어 본문은 이를 “평안이 있으라”는 인사로 읽는다.
24.14 안티테시스는 마르키온 저서의 제목을 받아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을 ‘갈라놓는’(separant) 대조 대신 ‘견주어 맞추는’(comparant) 대조를 제시하는 말이다.
24.15 누가복음 10:7(“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24.18 신명기 25:4(“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24.19 출애굽기 12:35-36(참조: 3:22; 11:2). 이집트 사람들의 금은 패물을 가져간 일을 이스라엘이 받지 못한 품삯의 보상으로 보는 해석이다. 마르키온은 이 일을 창조주의 부도덕한 명령으로 비판했다.
24.21 누가복음 10:9(“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이어지는 논증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그 나라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마르키온의 신이 새롭고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는 주장을 겨냥한다.
24.23 speciem(모습)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spem(희망)이다. accipit(얻는다)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accepit이다.
24.24 potuer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oterit이다.
24.25 누가복음 10:11.
24.27 Kroymann은 ‘구원으로’ 다음에 대응 구절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 표시를 했다. 그가 추정한 빠진 내용은 et in perditionem eorum, qui non recepissent(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멸망으로)이고, 번역에서는 그 자리에 **를 두었다. 이어지는 non potest에 대해 Oehler는 non을 삭제했으나 Kroymann은 이것이 저자의 어법이라고 보아 유지했다. 판본에 따라 이 문장 끝을 의문문(utroque?)으로 읽기도 한다.
24.28 누가복음 10:11. eieratae etiam(절연되었음을)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은 M ei; hęret etiam, R et haeret etiam이며 Oehler는 et haerentia로 고쳤다.
24.30 신명기 23:3-4. 개역개정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고, 그 이유로 그들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않았음을 든다. ecclesia는 이 구절에 맞추어 ‘총회’로 옮겼다.
24.31 앞 문장은 누가복음 10:16이고, 창조주가 모세에게 한 말은 사무엘상 8:7이다. 사무엘상 8:7에서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사무엘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모세에게 한 말로 인용한다(참조: 민수기 14:11; 출애굽기 16:8).
24.33 누가복음 10:19(“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
24.34 이사야 11:8.
24.35 ‘악의 영들’(spiritalia malitiae)은 에베소서 6:12의 표현이다. ‘제90편 시편’은 라틴어 번호이고 개역개정의 시편 91편이다. eminentissimae(가장 두드러진)는 사본의 읽기다. Ciacconius는 immanissimae(가장 사나운)로, Engelbrecht는 imminentissimae로 고쳤다. scimus는 R의 읽기다. M은 sciemus이고 Engelbrecht는 sciamus를 제안했다. 삽입구 안의 poterun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otuerunt이다.
24.36 시편 91:13(라틴어 번호 90:13). 라틴어 basiliscus를 ‘바실리스크’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이다.
24.37 이사야 27:1. 칼을 ‘그의 그리스도’로 풀이한 것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안에 끼워 넣은 해석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다.
24.38 이사야 35:8-9. sed et cum idem 다음에 동사가 없어 Engelbrecht는 idem <dicit>를 의심했다. 번역은 문장 끝(24.39)의 “라고 말할 때”로 이 구문을 완결했다.
24.41 이사야 35:3, 5. 24.42는 이사야 35:6이다.
24.43 ‘선포의 순서’(ordo praedicationis)는 이사야 35장의 순서를 가리킨다. 거기서 치유의 약속(35:5-6)이 짐승의 제거(35:9)보다 앞서듯, 그리스도도 치유를 먼저 베풀고(누가복음 9-10장) 그 뒤에 뱀과 전갈을 밟을 권능을 주었다(누가복음 10:19)는 것이다.
- 25 본문으로
25.1 누가복음 10:21.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형태는 ‘domine caeli’(하늘의 주님)로 ‘아버지’와 ‘땅’이 없고, ‘감추셨다’ 대신 ‘감추어져 있던 것들’(quae erant abscondita)이라는 수동형이다. 개역개정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이다. Harnack은 이 형태를 마르키온 본문으로 재구성하며, 첫 문장의 논증은 ‘하늘의 주’라는 호칭에 기대고 있다. confiteor는 ‘고백하다’와 ‘찬미하다’를 함께 뜻하며 여기서는 ‘찬미하다’로 옮겼다.
25.5 ‘자기가 한 일들의 선포’(operum praedicatio)는 창조된 세계가 창조주를 알리는 일을 가리키며, 로마서 1:20을 떠올리게 한다.
25.6 Kroymann은 ‘ignotum pone, nunc notum’으로 읽고 pone를 retro(이전에)의 뜻으로 본다. MR은 ‘ignotum, pone nunc’(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 지금 가정해 보라 -)로, Rigaltius는 ‘pone tunc’로 읽는다. ‘질투하는 신’(zelotes)은 출애굽기 20:5, 신명기 5:9의 창조주 칭호다.
25.7 ‘저 하나님’(ille)은 숨길 재료(예언)와 죄 지은 자들을 실제로 가졌던 창조주를 가리키며, 25.8이 그 세 조건을 하나씩 창조주에게 적용한다.
25.8 “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는 이사야 7:9의 칠십인역 형태(ἐὰν μὴ πιστεύσητε, οὐδὲ μὴ συνῆτε)다. 개역개정은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이다. ‘그의 일들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하나님’은 로마서 1:20을 반영한다. instrumentum은 법률 문서이자 성경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문서’로 옮겼다.
25.9 이사야 29:14(고린도전서 1:19 참조). 개역개정 이사야 29:14는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로 3인칭 수동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는 하나님이 1인칭 주어다. ‘<자신이>’는 Kroymann이 보충한 se를 옮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감사하는 일’(gratulatur)은 25.1의 누가복음 10:21을 받는다.
25.10 이사야 45:3. 개역개정은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네게 주어”이다.
25.11 이사야 44:25. ‘복화술사들’(uentriloqui)은 칠십인역의 ἐγγαστρίμυθοι, 곧 배에서 소리를 내어 신탁을 전하던 자들이다. 개역개정은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 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이다.
25.12 이사야 49:6(개역개정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어린아이 같고’의 paruulos는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은 paruos, R3는 paruas다.
25.14 traducere는 ‘폭로하다’와 ‘조롱거리로 만들다’를 함께 뜻한다.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창조주의 비밀을 드러내 무력화하는 일로 설명했다는 반론이며, ‘폭로하다’로 옮겼다.
25.16 마태복음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을 반영한다. extructio(세움)와 destructio(파괴)의 대구를 살려 옮겼다.
25.17 누가복음 10:22 상반절. ‘자기보다 못하지 않은’은 R3의 ‘non minori se’를 따른 것이고, MR1은 ‘minorum si’, Gelenius는 ‘et quia’ 대신 ‘qui’로 읽는다. ‘말씀’(sermo)은 요한복음 1:3의 창조 중보자로서의 말씀을 가리킨다.
25.18 ‘관리인’(oeconomus)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eperchomenus, R3와 통행본은 ἐπερχόμενος(덮쳐 온 자, 침입자)로 읽는다. Kroymann은 ille를 마르키온의 신이 보낸 그리스도로 본다. 통행본을 따르면 ‘그가 저 침입자라면’이 된다.
25.19 bona는 ‘좋은 것들’과 ‘재산’을 함께 뜻한다. 창조된 ‘모든 것’이 좋다(창세기 1:31)는 점과 남의 재산을 침탈한다는 점을 한 단어로 묶은 말장난이어서 ‘좋은 것들’로 옮겼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출애굽기 20:17을 가리킨다.
25.21 [그리고]는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본 et다. Engelbrecht는 et를 살리고 앞의 si를 삽입으로 본다. Oehler는 ‘ecquomodo’로 읽는다.
25.24 시편 2:8. 개역개정은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이다.
25.25 Kroymann은 사본의 ‘quae omnia’와 ‘habet’를 ‘omnia, quae’와 ‘habebat’로 고쳐 읽었고, ‘하나’(aliquod)는 Ciacconius의 수정이다(사본 aliquem).
25.26 누가복음 10:22.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들 외에 아무도 모른다’가 앞에 오고, 개역개정(“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느니라”)과 순서가 반대다. 이 어순은 아들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알린다는 마르키온파의 논증을 뒷받침한다. [ ] 안의 문장은 마태복음 11:27의 형태로, Gelenius가 삭제했고 Kroymann도 삽입으로 본다.
25.27 ‘본성에 따라’는 Gelenius의 naturam을 따른 것이고, 사본은 naturalem이다. Kroymann은 naturalem <agnitionem>(본성적 <앎>)일 가능성도 제시한다.
25.28 이사야 1:3. 개역개정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로 목적어 ‘나를’이 없다.
25.29 “보라, 민족들 가운데서도 아무도 없다”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Kroymann은 이사야 55:5를 의문부와 함께 제시한다. ‘통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은 이사야 40:15(개역개정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포도원에 버려진 망대’는 이사야 1:8(개역개정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이다.
25.31 ‘민족들의 빛으로’(in lumen nationum)는 이사야 49:6에 맞춘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inluminatio nationum(민족들의 비춤), Engelbrecht는 inluminationi nationum이다.
25.33 누가복음 10:23.
25.34 누가복음 10:24.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에는 개역개정의 ‘많은’, ‘임금’, ‘보고자 하였으되’가 없고 “예언자들은 너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로만 되어 있다. 문장 끝의 ‘곧’은 adeo가 25.35의 내용을 이끄는 구문을 옮긴 것이다.
25.37 Kroymann은 사본에서 25.38의 ‘merito uidisse non poterant’ 뒤에 있던 ‘si non erant consecuti ... quae numquam praedicarant’를 이 자리로 옮겼다.
25.38 [ ] 안의 구절은 Kroymann이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원래 자리를 잃은 구절을 대신해 누군가 끼워 넣은 것으로 판단한 부분이다. ‘<실로>’는 사본의 qui를 Kroymann이 qui<dem>으로 보충한 것을 옮겼다(Oehler는 aeque). nisi quoniam qui는 ‘ei, qui’의 뜻으로 읽었다.
25.39 ‘바로’(enim), ‘그들의’(illorum, Engelbrecht), ‘~라는 점’(quia)은 모두 사본의 autem, aliorum, qui를 고친 읽기이며, Kroymann은 이 문장을 ‘그들의 복은 다른 이들이 선포만 한 것을 그들이 보았다는 데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25.41 누가복음 10:25. ‘진리의 복음서’는 교회가 쓰는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25.42 ‘장수하는 생명’(uita longaeua)은 출애굽기 20:12(개역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처럼 율법이 약속하는 긴 수명을 가리킨다. 사본 M에는 longaeua 뒤에 aeterna가 덧붙어 있다.
25.43 누가복음 10:27(신명기 6:5).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에는 개역개정의 ‘뜻을 다하고’가 없고, 이웃 사랑 계명도 인용하지 않는다. ‘율법의 생명’(legis uita)은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은 lege uitae, Engelbrecht는 lege uitam이다.
25.45 ** 자리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et incertus’(그리고 확신하지 못하여)와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며, 번역의 ‘~않을까 하여’는 그 뜻에 맞춰 ne 절을 옮긴 것이다. ‘소망’(spes)은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spei다. ‘일으켜진’(suscitatus)은 앞의 ‘살아나고’(suscitabantur)와 같은 동사로, 죽은 자를 살림과 소망을 일깨움을 겹쳐 쓴다.
25.51 praescriptio는 소송 본안에 앞서 제기하는 법적 항변을 가리키는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반복해 쓰는 판단 기준을 뜻하여 ‘원칙’으로 옮겼다. 더 작은 것(창조와 율법의 약속)을 먼저 준 창조주가 더 큰 것(영원한 생명)도 준다고 믿기가 더 쉽다는 논리다.
25.52 ‘<장수하는>’은 사본의 longae를 Kroymann이 longae<uae>로 보충한 것이고, ‘<으로 나아가라고>’는 그가 보충한 전치사 ad를 옮긴 것이다. 문장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온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기회를 놓쳤다는 모순이 생긴다는 논증이다.
25.53 ‘세워 주었다면’(aedificauerat)의 주어는 드러나 있지 않으며, 문맥상 마르키온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로 읽힌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 사랑을 가르쳤다면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그와 반대로 가르쳤어야 한다는 반어다.
- 26 본문으로
26.1 누가복음 11:1. ‘저 더 높은 아버지’는 마르키온이 창조주 위에 둔 신을 가리키는 반어다. 그리스도가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서 창조주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마르키온파의 전제를 비꼬아, 그런 그리스도라면 창조주가 우박과 벼락으로 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의 ad는 Kroymann의 보충이다. suffigi(못 박히다)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suffugi를 전한다.
26.2 누가복음 11:1. scilicet 뒤의 인용(‘다른 신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인용한 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6.6에서 이를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non alium, sed aliter)로 뒤집는다.
26.3 praesumpserit(전제하는)는 Ursinus의 수정이고, M과 R은 praesumpserat를 전한다.
26.9 누가복음 11:2. 26.9-26.15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있던 주기도의 청원을 아버지, 성령, 나라,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의 순서로 다룬다. sensus orationis는 기도를 이루는 개별 문구들의 뜻을 가리키므로 ‘기도의 문구들’로 옮겼다.
26.11 성령을 구하는 청원은 개역개정 누가복음 11:2-4에 없다. 이 구절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누가복음 11:2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자리에 성령을 구하는 청원을 두었다는 근거로 흔히 읽힌다. 누가복음 11:2에는 ‘당신의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라는 이문이 있으며, Gregorius Nyssenus와 Maximus Confessor가 이를 전하고 소문자 사본 162와 700은 이를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리에 둔다. ‘세상의 영’은 고린도전서 2:12, ‘천사들도 영으로 만들고’는 시편 104:4(라틴어 시편 103:4 qui facit angelos suos spiritus; 개역개정은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며’), ‘물 위에 움직이던’ 영은 창세기 1:2를 가리킨다.
26.12 누가복음 11:2. ‘영광의 왕’은 시편 24:7-10, ‘왕들의 마음까지 그 손에 있는’은 잠언 21: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을 가리킨다.
26.13 누가복음 11:3. milium은 기장(좁쌀)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을 비꼰다. ‘천사들의 양식’은 시편 78:24-25(개역개정은 ‘힘센 자의 떡’)와 지혜서 16:20을 가리킨다. panis는 주기도 문구에서는 개역개정을 따라 ‘양식’으로, 26.26 이하의 비유와 26.35에서는 ‘빵’으로 옮겼다.
26.14 누가복음 11:4. 마르키온의 신은 심판하지 않으므로 죄를 ‘붙들어 둘’ 일도 없고, 따라서 용서할 일도 없다는 논리다. retinere는 용서하지 않고 남겨 둔다는 뜻이며 요한복음 20:23의 표현과 같다.
26.15 누가복음 11:4. 테르툴리아누스의 문구 non sinet nos deduci in temptationem은 ‘시험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개역개정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와 표현이 다르다. ‘시험하는 천사를 미리 정죄한’ 일은 창세기 3:14의 뱀 저주를 가리킨다.
26.17 누가복음 11:9-10. 26.17-26.25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차례로 다룬다.
26.20 이사야 29:14(‘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욥기 17:4 참조.
26.22 fugatus(쫓겨난)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functus를 전한다. 인간이 쫓겨난 곳은 낙원이다(창세기 3:23-24).
26.23 ad praestandum non suo homini에서 praestare를 Kroymann의 비평 각주가 설명하는 대로 ‘돌보다, 보호하다’(그리스어 προστατεῖν)의 뜻으로 보아 ‘자기 것이 아닌 인간을 돌보려고’로 옮겼다. 마르키온의 신이 자기가 만들지 않은 인간을 구하러 왔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indixisse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duxisset를 전한다.
26.24 <않는>은 R3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구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주지 않는다면’이 되어 논리가 서지 않는다.
26.25 labore(수고로)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M과 R은 laboraret를 전한다.
26.26 누가복음 11:5-8. 누가복음에서 밤중에 빵을 청하는 친구의 비유는 11:9-10보다 앞에 있으므로 praemissa(앞에 놓인)라고 했다.
26.28 누가복음 11:7(‘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비유에서 문 안에 누워 있는 친구를 창조주로, 아이들을 창조주가 태어나게 한 사람들로 읽는다.
26.29 누가복음 11:5의 ‘밤중에’를 시대의 저묾, 곧 세상의 끝 무렵으로 읽어, 시대 전체를 소유한 창조주에게 속한다고 논증한다. 26.30의 ‘이제 막 빛나기 시작한 새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 최근에야 나타났다는 1권의 논점을 되받는다. 옛 판본들은 est tempus. illius로 끊는다.
26.31 creatoris est et ianua, qui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creator est, qui et ianuam(창조주는 문도 … 닫아 둔 이다)을 전한다. cluserat는 Ursinus의 수정이며(M과 F는 cluserit, R과 이전 판본들은 clauserit), <않았다>는 Kroymann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민족들에게 문이 닫혀 있던 때는 그리스도 이전 시기를 가리킨다.
26.32 누가복음 11:8. o deus iste는 M과 R1의 읽기로 Kroymann이 채택했다. R3과 옛 판본들은 Iudaeis, is et로 읽어 ‘그 문은 유대인들이 두드렸고, 그는 일어나서 준다’는 뜻이 되며, Engelbrecht는 a Iudaeis를 제안했다. 누가복음 11:8은 친구이기 때문에 주지는 않더라도 강청함 때문에 일어나 준다고 말한다.
26.33 ‘성가신 사람’(molestus)은 누가복음 11:7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와 11:8의 ‘강청함’을 받는다. 마르키온의 신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가 오래 졸라 댈 시간도 없었다는 반박이다. inquit의 주어가 밝혀져 있지 않아 ‘고 한다’로 옮겼다.
26.34 누가복음 11:11-13.
26.35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출애굽기 16:4, 16:15, 메추라기는 민수기 11:31-32를 가리킨다. ortygometra는 칠십인역이 메추라기를 가리키는 데 쓴 말이다. 생선과 뱀, 알과 전갈은 누가복음 11:11-12다.
26.37 전갈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은 전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전갈을 주지 않겠다’는 말 자체가 그에게는 무의미하다는 논증이다.
26.38 누가복음 11:13. ‘거룩하지 않은 영’은 사무엘상 16:14의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처럼 창조주가 부리는 영을 가리킨다.
26.39 누가복음 11:14-15. 테르툴리아누스는 surdum(귀먹은)이라고 쓰는데, 그리스어 κωφός는 ‘말 못하는’과 ‘귀먹은’을 모두 뜻하며 개역개정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으로 옮긴다. 이사야 29:18(‘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참조. Belzebul은 개역개정의 ‘바알세불’로 옮겼다(Oehler는 Beelzebub로 표기한다).
26.40 누가복음 11:19.
26.43 누가복음 11:17-18. 26.42-26.43은 한 문장이며, 26.42의 sic accipiendum(이렇게 받아들여야)이 가리키는 내용이 26.43의 quasi 절이다.
26.45 누가복음 11:20.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rgone adpropinquauit(그렇다면 … 가까이 온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문으로,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와 다르다. adpropinquauit는 M, F, R3의 읽기이고, R1은 adpropinquabit(가까이 올 것이다)를 전한다.
26.46 출애굽기 8:19(히브리어 성경 8:15). 개역개정은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로 옮기지만 히브리어, 칠십인역, 라틴어 본문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다. uenefici는 개역개정의 용어를 따라 ‘요술사들’로 옮겼다.
26.47 uetustatum, scilicet suarum은 구약의 옛 일들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26.49 누가복음 11:21-22. 테르툴리아누스는 강한 자를 창조주로, 더 강한 자를 마르키온의 신으로 보는 해석을 물리치고, 강한 자를 바알세불, 곧 사탄으로 본다.
26.50 26.50-26.51은 한 문장의 의문문이다. ‘그’는 창조주다. ‘흙으로 녹아 돌아가며 죽는’ 일은 창세기 3:19의 창조주의 법을 가리키고, 전갈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서 마르키온파도 그 독에 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26.52 누가복음 11:27-28. 26.52-26.53은 한 인용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faciunt(행하는)이고, 개역개정은 ‘듣고 지키는 자’다.
26.54 앞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물리친 장면은 누가복음 8:19-21이며 4권 19장에서 다루었다. 마르키온은 이 장면을 그리스도가 탄생을 부인한 증거로 썼다.
26.55 nec hic mater adsistebat illi는 여기서도 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를 직접 물리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id rursus habiturus는 앞의 일(누가복음 8장)을 여기서 다시 다룰 참이었다는 뜻으로 보아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다루려 하면서’로 옮겼다. 복을 어머니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옮겼다는 것은 그에게 어머니가 있었음을, 따라서 실제로 태어났음을 전제한다는 논증이다.
- 27 본문으로
27.1 et는 Engelbrecht의 읽기를 따랐다(MR은 ea).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의 성품에서 찾는 모순을 그리스도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논증이 이 장 전체의 틀이다.
27.2-5 『안티테시스』가 창조주에게 돌리던 비난(한결같지 않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을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적용한 목록이다. 27.3은 누가복음 6:30과 11:29, 27.4는 누가복음 11:33, 27.5는 누가복음 6:28과 11:42-52를 가리킨다.
27.4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빛을 감추었다’는 말은 티베리우스 시대에 처음 드러났다는 마르키온의 신을 겨냥한다. abstrudendam은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abstruendam).
27.5 maledicere는 R의 읽기다. M은 benedicere로 읽는다.
27.6 <이>는 Kroymann이 보충한 is를 옮긴 것이다. ‘내 하나님’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믿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27.7 fiximus는 Latinius의 읽기를 따랐다(MR은 finximus).
27.8-13 누가복음 11:37-41. 누가복음 11:38은 예수가 식사 전에 씻지 않은 것을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겼다고 전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의문 자체가 예수를 율법의 하나님을 전하는 이로 여긴 증거라고 본다.
27.9 누가복음 11:39. rapina et iniquitate를 ‘약탈과 불의’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탐욕과 악독’이다.
27.10 <또>는 Kroymann이 보충한 et를 옮긴 것이다. ‘곧 육신’, ‘곧 영혼’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누가복음 11:39의 잔의 겉과 속에 덧붙인 해석이다. emundastis는 M의 읽기이며 R은 emundatis로 읽는다.
27.11 누가복음 11:40. 개역개정은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이다.
27.12 quo dicto는 R의 교정 읽기를 따랐다(M과 R의 원래 읽기는 quod digito, ‘손가락으로’). 자비를 제사보다 앞세운다는 말은 호세아 6:6과 잠언 21:3을 반영한다.
27.13 누가복음 11:4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가 가진 것을’(quae habetis)이고, 개역개정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이다.
27.16-17 누가복음 11:42.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리스어 κρίσιν(‘공의’) 대신 κλῆσιν(‘부르심’)에 해당하는 uocationem을 읽는다. 개역개정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dilectionem dei는 27.19의 신명기 인용에 맞추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옮겼다. 27.17의 ex decimis는 M의 읽기이고, offerebant는 R의 교정 읽기다(MR의 원래 읽기는 offerebat).
27.19 신명기 6:5에 6:12의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을 ‘불러낸’(uocauit)으로 결합했다. 이 동사로 누가복음 11:42의 ‘부르심’(uocatio)을 창조주에게 연결한다. <네>는 Pamelius가 보충한 tuo를 옮긴 것이다.
27.20 praecocam(이르게 익은)과 acerbam(덜 익어 떫은)은 과일의 익음에 빗댄 표현으로, 갓 알려진 마르키온의 신에게 이스라엘이 사랑을 바칠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praecocam은 M의 읽기이고, nouo는 R의 교정 읽기다(MR의 원래 읽기는 nouam).
27.21 누가복음 11:43. ‘소돔의 관원들’은 이사야 1:10, 지도자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금지는 시편 118:9(불가타 117:9),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자에 대한 선언은 예레미야 17:5를 가리킨다. archontas는 라틴어 문장 안에 쓰인 그리스어 낱말이다. appellantis와 prohibentis는 R의 교정 읽기를 따랐다.
27.22 <금지하여>는 Kroymann이 보충한 interdictione를 옮긴 것이다(adu. Marc. V 19의 interdictio를 근거로 든다). officia는 피후견인이 유력자에게 바치는 문안과 수행 같은 섬김을 뜻한다.
27.23 누가복음 11:46.
27.24 ‘이것들조차 무겁지 않다’는 요한일서 5:3(‘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을 반영한다. cum maxime는 ‘바로 그때’로 옮겼다.
27.26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치고’는 마태복음 15:9와 이사야 29:13, ‘집에 집을 잇대며’는 이사야 5:8, ‘백성을 짓밟고’는 이사야 3:15, ‘뇌물을 사랑하며 보수를 좇고’는 이사야 1:23, 가난한 자의 판결과 과부와 고아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10:2를 반영한다. doctrinas praecepta는 Kroymann이 어순을 바꾼 읽기다(MR은 praecepta doctrinas). calcantes는 이사야 3:15를 근거로 한 Kroymann의 추정이며 MR은 clamantes(‘외치며’)로 읽는다. auferrent는 R의 교정 읽기다.
27.27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이사야에게 돌리지만, Kroymann의 인용 지시는 아모스 6:1이다. Pamelius는 Israhele를 Hierusalem으로 고쳤다.
27.28 이사야 3:12의 칠십인역 본문(‘너희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자들이 너희를 다스린다’)을 따른다. 개역개정은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이다.
27.29 hi si는 R의 읽기다(M은 in si). pulsasset는 ‘공격하다’로 옮겼다.
27.30 누가복음 11:47-51. 누가복음 11:48에서 예수는 무덤을 세우는 일이 조상들의 행위에 동의한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들을 꾸짖는 그리스도가 조상의 죄를 자손에게 갚는 창조주(출애굽기 20:5)와 같은 질투를 지녔다고 논증한다. natiuitas는 여기서 세대를 뜻하므로 ‘대’로 옮겼다.
27.31 누가복음 11:52. 삽입된 인용은 이사야 7:9의 칠십인역(‘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이다. 개역개정은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이다. ‘사람의 계명과 교훈’은 골로새서 2:22와 이사야 29:13을 반영한다. uti qui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utique, Engelbrecht는 utique <qui>).
27.33 ei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et). aemulus는 ‘경쟁자’로 옮겼다. Engelbrecht는 iam non 대신 non est를 선호한다.
27.34 따옴표 안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그리스도가 ‘화 있을진저’를 퍼부은 것은 창조주를 잔인한 신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infuscandum은 ‘깎아내리다’로 옮겼다(원뜻은 ‘검게 물들이다’).
27.35 demerendum은 섬김으로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섬겨 그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로 옮겼다.
- 28 본문으로
28.1 이사야 29:13(마태복음 15:8)과 누가복음 12:1을 반영한다. hypocrisis는 ‘위선’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12:1은 같은 말을 ‘외식’으로 옮긴다. 동사는 M의 placet를 따른 본문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placebat로 읽는다.
28.2 누가복음 12:1. “그것은 위선이다”(quod est hypocrisis)까지가 누가복음의 문구이고, “창조주의 선포가 아니다”(non praedicatio creatoris)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다.
28.3 fuit et는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fuisset로 읽는다. 관계대명사 cuius는 Kroymann의 설명대로 hypocrisis를 받으므로 ‘그 위선의 본’으로 옮겼다. ‘그를 향해’(in illum)와 ‘바로 그 대상’은 아버지,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28.4 <cum>(‘때’)은 Kroymann이 보충했다. 사본 R은 prohibet 대신 perhibet로 읽는다.
28.5 누가복음 11:52(‘지식의 열쇠’)를 반영한다. superficialib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superficii talibus로 적는다. [in]은 Junius가 ipsa만 읽고 사본 MR이 in ipsa로 적은 데 따른 것으로, in이 없으면 ipsa는 위선 자체를 주어로 받아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가 된다.
28.6 누가복음 12:2. 개역개정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와 같은 뜻이다.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던 신’은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신을 가리킨다. intra(‘속으로’)는 Engelbrecht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inter로 읽는다. inter se tractarent(‘서로 의논하던’)는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본들은 tractarent만 적는다. dinoscetur는 R, MF는 diuosceretur다.
28.7 따옴표 안의 말은 마태복음 12:24(누가복음 11:15 참조)이며, 이어지는 문장은 누가복음 12:3(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밝은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한 말이 지붕 위에서 전파된다는 말씀)을 풀어 쓴 것이다. Belzebule는 R의 읽기이고 M은 belzebulem, Oehler는 Beelzebub로 적는다. 개역개정 표기에 따라 ‘바알세불’로 옮겼다.
28.8 누가복음 12:4. 개역개정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를 죽일 수만 있고 그 후에는 너희에게 아무 권능도 갖지 못하는 자들’이다. N과 Pamelius는 amicis meis로 읽는다.
28.9 첫 대시 사이의 문장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며, 이사야 57: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을 인용한다. his는 M의 읽기이고 Gelenius와 이후 판본들은 iis로 적는다. 이어지는 따옴표는 누가복음 12:5 앞부분이다.
28.10 누가복음 12:5. gehenna는 개역개정을 따라 ‘지옥’으로 옮겼다. 대시 사이의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이다.
28.11 누가복음 12:5 끝부분. mihi sic: quem은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mihi, si quem으로 읽는다. 이 읽기에 따라 28.12 전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의 내용이 된다.
28.12 demereri는 섬김으로 상대의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호의를 얻다’로 옮겼다. offendi는 offensa(노여움)와 맞추어 ‘노엽게 하다’로 옮겼다. cui는 R의 읽기이고 MF는 cuius로 적는다.
28.13 누가복음 12:8. 개역개정은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일인칭 ‘나도’이고 ‘사자들’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다. confiteri in me는 그리스어 ὁμολογεῖν ἐν ἐμοί를 옮긴 표현이어서 ‘나를 두고 시인하다’로 옮겼고, 보충된 <in>은 ‘두고’에 해당한다(R3). Kroymann은 coram hominibus의 위치를 사본(occidi habebunt coram hominibus)과 달리 옮겼다. 끝의 대시부터 28.14의 대시까지는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다.
28.14 누가복음 12:9.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다. hi는 R의 읽기이고 M은 hic로 적는다. sustinendam 대신 substruendam으로 읽은 판본(Pamelius)도 있다.
28.20 누가복음 12:10. 개역개정은 성령에 대해 ‘모독한 자’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인자와 성령 두 경우 모두 dixerit in(‘거슬러 말하다’)을 쓴다. 이 장에서 filius hominis는 이 인용에만 나오므로 ‘인자’로 옮겼다. qui autem은 Rigaltius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autem qui로 적는다.
28.21 <et>(‘도’)는 Kroymann이 보충했다. hui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cuius로 적는다. 사본 MR1은 이 문장 앞의 remissio를 앞 문장 끝에 붙여 읽는다. ‘앞에서 부인해서는 안 되는 이’는 28.13-14에서 시인하고 부인하는 대상인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8.23 ‘저 다른 신’(illius diuersi dei)은 마르키온이 창조주와 구별하는 신이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엄격함을 깎아내리려고 이 말을 했다고 보는 해석을 따라갈 때 마르키온의 신에게 남는 결과를 서술한다.
28.24 누가복음 12:11-12. 개역개정 12:11의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는 potestates만 언급하므로 ‘권세자들’로 옮겼다. 28.8과 28.10의 potestas(‘권능’)와는 다른 뜻이다.
28.25 누가복음 12:12 끝부분(‘마땅히 할 말을’). quid eloqui debeatis 대신 quid loquamini로 읽은 판본(N, Pamelius)도 있다. documentum은 앞선 실례나 교훈이라는 뜻이어서 ‘실례’로 옮겼다. 그 실례가 28.26-27의 발람 이야기다.
28.26 민수기 22-24장, 특히 22:6(저주 요청), 22:18-19(사자들에게 한 말), 22:38(발락에게 한 말), 23:5-10(축복)을 요약한다. in Arithmis는 민수기의 그리스어 제목 Ἀριθμοί를 따른 이름이다. Balac은 M의 표기이고 R과 이전 판본들은 Balach로 적는다. professus는 R의 읽기이고 MF는 professum으로 적는다. Kroymann은 ipsa <ea> hora로 보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28.27 민수기 22:38. 23:5도 하나님이 발람의 입에 말씀을 두었다고 서술한다. ‘새 그리스도의 새 가르침’은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으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어다.
28.28 출애굽기 2:13. iniuriosum은 동족을 친 사람을 가리켜 ‘잘못한 자’로 옮겼다. 이 문장은 마르키온파가 두 인물을 대조하는 논법을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대로 제시한 것이다.
28.29 출애굽기 2:13-14. 개역개정은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이웃’(proximum)이고, magistrum은 칠십인역 ἄρχοντα에 맞추어 ‘다스리는 자’로 옮겼다.
28.30 누가복음 12:13-14. <de>(‘에 관해’)는 Pamelius가 보충했다.
28.32 누가복음 12:14. 개역개정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물건 나누는 자’가 없다. 28.29의 모세 인용과 같은 iudicem이므로 두 곳 모두 ‘재판관’으로 옮겼다. 문장 전체는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며, ‘재판관이 아닌 신’은 마르키온이 자기 신을 심판하지 않는 신으로 규정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28.33 pietas와 impius는 신에 대한 경건과 혈육에 대한 도리를 함께 뜻한다. 여기서는 형제 사이의 일이 문제이므로 ‘도리’로 옮겼다. probitas는 ‘올바름’으로 옮겼다.
28.34 declinatione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eclinationem으로 적는다. denique는 앞 문장의 수사 의문에 대한 결론을 이끈다.
28.36 plane ita sit. ipse는 Engelbrecht의 읽기다. 사본 MR1은 si ipse로 적고 R3은 si를 지웠다.
28.37 ‘다른 곳’은 이 책 14-15장을 가리킨다. 14장은 시편 72:12와 사무엘상 2:8(시편 113:7)을, 15장은 부자들에 대한 화와 히스기야의 예를 다룬다. 권세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린다는 말은 누가복음 1:52와 같은 내용이고, 가난한 자들을 거름 더미에서 일으킨다는 말은 시편 113:7과 사무엘상 2:8이다. detrahente-adleuante는 R의 읽기이고 MF는 detrahentes-adleuantes로 적는다.
28.38 누가복음 12:16-20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
28.39 누가복음 12:20. reposcent는 삼인칭 복수여서 ‘그들이’로 옮겼다. 개역개정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28.40 이사야 39:2, 5-7(열왕기하 20:12-18). <히스기야>(Ezechias)는 Kroymann이 보충했다. 성경 본문에서 히스기야가 보물을 보여 준 사람들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15장에서와 같이 ‘페르시아인들’이라고 쓴다.
- 29 본문으로
29.1 누가복음 12:22-27. 누가복음 12:24는 마태복음 6:26의 ‘새’와 달리 ‘까마귀’라고 한다. ‘풀’(foenum)은 누가복음 12:28에서 왔다.
29.3 ‘조금 뒤에 드러날 것이다’라고 미루어 둔 문제는 29.11에서 다룬다.
29.4 누가복음 12:28의 “믿음이 작은 자들아”를 가리킨다.
29.5 사본 M과 R은 uelato(‘가려진’)라고 읽는다. Oehler가 re-를 보충하여 reuelato(‘계시된’)로 읽었고, 그 보충을 < > 안에 옮겼다. ‘막 계시된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29.6 누가복음 12:30. 개역개정은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옮긴다.
29.7 누가복음 12:30 후반부.
29.9 사본 M에는 si가 없고 R은 sin으로 읽는다. Kroymann이 <si>를 보충했다.
29.10 사본은 scit(현재)로 읽고, Kroymann은 sciit(완료)로 고쳤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29.13 누가복음 12:31. 개역개정은 “그의 나라”라고 하나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regnum dei(‘하나님의 나라’)이고, 개역개정의 “더하시리라”는 여기서 수동형(adicientur)이다.
29.16 누가복음 12:35-36. dominus는 비유 속에서는 종의 ‘주인’이고 동시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르는 ‘주’이다. 비유와 직결된 자리에서는 ‘주인’으로 옮겼다. 사본은 id sumus로 읽고, Engelbrecht가 et sumus로 고쳤다.
29.17 누가복음 12:36 “혼인 집에서 돌아와”. nec ipse Marcion ... isset의 Marcion은 주격으로, 마르키온 자신도 초대받은 혼인 잔치에 가지 않았으리라는 뜻이다. Latinius는 intuens(바라보아) 대신 metuens(두려워하여)로 읽는다. 마르키온은 신도들에게 혼인을 금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근거로 마르키온의 신을 ‘혼인을 혐오하는 자’라고 부른다.
29.19 누가복음 12:39.
29.21 누가복음 12:40. 이 장에서는 filius hominis를 개역개정을 따라 ‘인자’로 옮겼다. 마귀가 태초에 사람을 ‘뚫었다’는 것은 창세기 3장의 유혹을 가리킨다.
29.22 사본은 creatorem(‘창조주를’)으로 읽는다. Kroymann은 creatoris로 고치고 filium(‘아들’)을 생략된 말로 보았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29.23 사본 M과 R은 scriptum(‘위에 기록한’)이다. Oehler가 praescriptum(‘앞에서 규정한’)으로 보충했다. 가리키는 원칙은 29.20의 “아무도 자기 것을 훔치거나 뚫지 않는다”이다.
29.24 누가복음 12:41-42. 사본 M과 R1은 dicit et로 읽고, R의 교정(R3)과 이전 판본들은 dixisset로 읽는다. Engelbrecht가 diceret, <id> est로 고쳤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비유의 청지기들을 교회의 지도자들로 적용한다.
29.25 누가복음 12:42-46. 개역개정 12:46의 “엄히 때리고”(그리스어 ‘둘로 쪼개고’)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segregabitur(‘갈라내어질 것이다’)이다. ‘믿지 않는 자들’(infideles)은 개역개정의 “신실하지 아니한 자”에 해당한다.
29.26 사본 M은 et illic, R은 et illi로 읽는다. Engelbrecht는 ut illic, Kroymann은 <ut> et illic으로 읽었다. ‘거기에서’는 심판자인 인자가 나오는 앞의 도둑 비유(29.21-22)를 가리킨다.
29.27 마르키온파는 마르키온의 신이 벌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갈라냄’을 형벌 없이 원래 상태로 돌려보내는 일로 해석했다.
29.32 누가복음 12:47-48.
29.33 누가복음 12:49. 제자들을 제지한 일은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리자고 한 누가복음 9:54-55의 일이다. docet는 사본 M과 F의 읽기이고, R은 decet(‘마땅하다’)로 읽는다.
29.34 창세기 19:24. ‘그에 대해’(de eo)는 Kroymann의 보충이다.
29.35 시편 97:3(불가타 96:3).
29.36 호세아 8:14. 이사야의 것으로 인용된 말은 이사야서에 그대로 나오지 않고 예레미야 15:14(신명기 32:22 참조)에 가깝다.
29.37 출애굽기 3:2-4. 사본과 이전 판본들은 non mentiatur로 읽고 그 뒤에서 문장을 끊어 si 절을 29.38의 uiderit에 붙인다. Kroymann은 non을 삽입된 말로 보아 [ ] 안에 두고 si 절을 mentiatur에 붙이며, mentiatur 뒤에 esse가 생략되었다고 설명한다(scil. esse, si non uere est; tunc enim fortasse ei credatur). 이 읽기에서 문장은 ‘떨기나무에서 말한 그 이가 참으로 아니라면 그 이라고 거짓으로라도 주장하게 하라, 그러면 혹시 믿어 줄지도 모른다’는 반어다.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말한 창조주의 말이라는 논점이다. Engelbrecht는 29.38 앞에 <sed>를 보충한다.
29.38 figura는 여기서 유형론적 예표가 아니라 불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뜻으로 쓴 표현을 가리키므로 ‘비유적 표현’으로 옮겼다. Kroymann은 qui de meis utitur를 군더더기로 본다.
29.40 누가복음 12:51. 개역개정은 “화평을 주려고”,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보내다’(mittere)를 써서 12:49의 ‘불을 던지다’(ignem mittere)와 맞물리고, 마지막 말은 separatio(‘분리’)이다.
29.41 테르툴리아누스는 원래 본문이 ‘칼’(machaera)이었는데 마르키온이 ‘분리’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칼’은 마태복음 10:34의 표현이고, 누가복음 12:51의 그리스어 본문은 ‘분열’(διαμερισμός)이다.
29.43 누가복음 12:53. ‘그대의’(tuo)는 Kroymann의 보충이다. Engelbrecht는 neutra congruens domino를 삽입된 말로 본다.
29.44 미가 7:6. 사본은 praedicaret로 읽고, Rigaltius가 praedicarit로 고쳤다.
29.45 누가복음 12:56.
29.47 누가복음 12:57. 에스겔의 것으로 인용된 말은 스가랴 8:16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에 가깝다(에스겔 45:9 참조).
29.48 예레미야 22:3. iudicium을 ‘정의’, iustitia를 ‘공의’로 하여 개역개정의 표현을 따랐다.
29.49 이사야 1:17과 5:7. ‘과부를 의롭다 하라’는 칠십인역 이사야 1:17(δικαιώσατε χήραν)과 같다. ‘소렉’(Sorech)은 칠십인역 이사야 5:2가 히브리어 ‘극상품 포도나무’를 음역한 말이다.
29.52 누가복음 12:58-59. quadrans는 마태복음 5:26의 ‘고드란트’에 해당하고, 누가복음 12:59의 그리스어 본문은 ‘렙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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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누가복음 13:15. 13:10-17에서 안식일에 허리 굽은 여자를 고친 일을 두고 회당장이 항의하자 한 대답이다. ‘안식일에’(sabbati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은 sabbati, R은 sabbato로 읽는다.
30.2 출애굽기 12:16. 무교절 첫날과 일곱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되 각 사람이 먹을 것만은 준비하라는 규정이다. omni animae의 anima는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생명’으로 옮겼다. 짐승의 생명을 위해서도 일이 허용된다면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는 논증이다.
30.3 ‘알려져 있다’(recognoscor)는 사본 MR의 읽기로 Kroymann이 그대로 두었다. Latinius는 recognosco te, Engelbrecht는 te cognosco로 고쳐 ‘그대가 비유들의 부합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로 읽는다. 인용은 누가복음 13:18-19이며, 개역개정의 ‘채소밭’(hortus)을 여기서는 ‘밭’으로 옮겼다.
30.4 ‘비록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 하더라도’(licet Marcionis)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로 불린다는 점을 겨냥한다. 비유의 ‘사람’(homo)을 그리스도로 읽는 근거가 이 칭호 안의 ‘사람’이라는 낱말이므로 filius hominis를 ‘인자’ 대신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그는’(qui)은 Kroymann이 사본 MR의 quia를 고친 것이다. ‘이 세상에’(isto)는 M과 R1의 읽기이고 R3은 suo(‘자기 세상에’)로 읽는다.
30.5 ‘창조주에게 속한 자’(creatori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creator로 읽는다. 사본대로라면 ‘자기 밭에 뿌린 이는 창조주로 드러난다’가 된다. Engelbrecht는 ‘자기’(suo)가 본문에 속하는지 의심했다. ‘그의 것’(illius)은 마르키온의 신 쪽을 가리킨다.
30.6 ‘사람’(hominis)과 ‘그리스도에게서 돌려’(a Christo)는 R3의 읽기이다. 사본 M과 R1은 각각 homines, personam Christi(R1은 in personam Christi)로 읽는다. ‘그 재료 자체’는 나라의 씨를 가리킨다.
30.7 누가복음 13:20-21의 누룩 비유. ‘나라’(regnum)는 Kroymann이 사본의 regno를 고친 것이다. 30.7-30.8은 누룩이 무교병과 대비된다는 이유로 이 비유를 다른 신의 나라로 읽는 해석을 비꼬는 말이다.
30.9 ‘게헨나의 화덕’(clibanus)은 말라기 4:1(칠십인역 κλίβανος, 개역개정 ‘용광로’)을, ‘풀무’(furnus)는 마태복음 13:42의 ‘풀무 불’을 떠올리게 한다. 누룩 반죽 뒤에 화덕이 오듯 나라 뒤에 심판이 온다는 반어적 대응이다.
30.10 이 문장은 사본 MR에서는 조금 앞, 30.8의 ‘창조주에게’(creatori) 바로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이라니>(sit)는 Oehler가 보충한 말이다.
30.11 ‘물리치며’(reici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iecit(‘내쫓았다’)로 읽는다.
30.12 누가복음 13:25. 30.12-30.15의 줄표는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이다. 주문장은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으면 …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이고, 그 사이에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과 13:25-27의 인용이 끼어 있다.
30.13 ‘그가 땅을 부수려고 일어날 때’는 이사야 2:19(2:21도 같다)의 칠십인역 형태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이다.
30.14 누가복음 13:25-26. 누가복음의 ‘우리의 길거리에서’가 간접화법이라 ‘자기들의 거리에서’(in plateis eorum)로 되어 있다. [덧붙일 것이다](adiciet)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30.15 누가복음 13:27-28. 개역개정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이다.
30.16 인용은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있던 누가복음 13:28의 형태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인데, 마르키온의 본문에는 족장들과 예언자들 대신 ‘의인들’이 있었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2, scholion 40도 이 변경을 전한다. ‘바깥이다. 문이 닫혀 … 곳이다. 그러므로’의 구두점은 Kroymann의 것이다.
30.18 ‘거기서’(illic)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lluc로 읽는다.
30.20 ‘창조주의 악명’(infamia creatoris)은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에게 씌우는 형벌하는 신이라는 오명이다. 선한 신이 불의한 자들의 형벌을 원한다면 그 오명의 원인이 선한 신 자신이 된다는 논증이다. ‘혹은’(aut)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an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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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누가복음 14:12-14.
31.2 이사야 58:7. 개역개정은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이다.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은 누가복음 14:14의 말이다. ‘이런 인정’(humanitatis)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et humanitatis로 읽는다.
31.3 ‘부활 때에 다시 약속한다’는 누가복음 14:14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를 가리킨다.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좇는 자들’은 이사야 1:23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에서 왔다.
31.4 누가복음 14:16. 개역개정은 ‘큰 잔치’이지만 cena를 이 장에서는 일관되게 ‘만찬’으로 옮겼다. 31.4-31.27은 14:16-24의 비유를 차례로 다룬다.
31.6 <통해서는>(per)은 Gelenius가 보충한 말이다.
31.7 누가복음 14:17. ‘스스로 갑자기 내려와서’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앞선 준비 없이 티베리우스 치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마르키온의 주장(1권 19장)을 겨냥한다.
31.9 출애굽기 32:1. Kroymann은 uocationem tunc, primo로 끊어 ‘그때 거절했다 … 처음에는 말했다’로 읽고, 통행본은 uocationem, tunc primo로 끊어 ‘그때 처음으로 말했다’로 읽는다.
31.10 출애굽기 32:1. 개역개정은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이다. ‘귀로 듣고도 듣지 않았다’는 이사야 6:9를 떠올리게 한다.
31.11 예레미야 7:23-24. ‘하나님’(de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주’)으로 읽는다.
31.12 누가복음 14:18-20의 세 핑계이다. 개역개정은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나는 장가 들었으니”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핑계들을 예레미야 7:24의 ‘악한 마음으로 욕심낸 것들’의 내용으로 엮는다.
31.13 예레미야 7:25-26. ‘낮에도 동트기 전에도’는 칠십인역 ἡμέρας καὶ ὄρθρου에 해당하고 개역개정은 “끊임없이 보내었으나”이다. 삽입구의 ‘이것’은 누가복음 14:17에서 손님들에게 보낸 종을 가리키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종을 예언자들을 통해 말한 성령으로 읽는다.
31.14 누가복음 14:21 “집 주인이 노하여”. 31.14의 motus와 31.15의 moueri를 모두 ‘격동하다’로 옮겨, 마르키온의 신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맞선 말놀이를 살렸다. 줄표 사이의 말은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이다.
31.15 누가복음 14:21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보충하여 뽑다’(sublectio)는 빈자리를 채우려고 새 사람을 뽑는 일을 가리킨다. ‘나의 하나님’(meus)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믿는 하나님, 곧 감정을 지닌 창조주를 말한다.
31.16 예레미야 2:31. 개역개정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칠십인역(γῆ κεχερσωμένη)을 따라 ‘버려져 갈지 않은 땅’으로 되어 있다.
31.18 예레미야 2:31 끝부분. 개역개정은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이다. 사본은 uenimus로 읽고, Kroymann은 미래형 ueniemus일 가능성을 적었다.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보냈다’는 누가복음 14:21이다.
31.19 누가복음 14:22-23. ‘자리가 넉넉히 남자’(loco abundante)는 14:22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를 가리킨다.
31.20 신명기 32:20.
31.21 신명기 32:21. <민족으로>(in natione)는 R3의 보충이다. ‘탄식하지만’(gemunt)은 Semler의 수정이고 사본 MR과 다른 편집본들은 gerunt로 읽어 ‘유대인들이 지니는 소망’이 된다. Latinius는 spem 대신 speciem으로 읽었다. ‘맛보지 못할 것’은 누가복음 14:24, ‘포도원의 망대 … 참외밭의 원두막’은 이사야 1:8이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는 M과 R1의 읽기이고 R3과 통행본은 in Christum으로 읽는다.
31.22 ‘순서’(ordo)와 ‘경륜’(dispositio)은 Kroymann이 사본 MR의 ordinem, dispositionem을 고친 것이고, habet를 se habet(‘어떤 상태에 있다’)의 뜻으로 읽었다. ‘저 신에게’(illi)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llic으로 읽는다.
31.24 ‘비유라는 거울’(speculum parabolae)은 비유가 그려 보이는 순서, 곧 먼저 부름받은 자들이 거절한 뒤에 다른 이들이 불려 오는 순서를 가리킨다.
31.27 [ ] 안의 말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이를 빼면 ‘물론 그는 아직 두 번째로 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 이미 자리에 앉히려는 이로서 올 것이다’로 이어진다.
31.28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의 약속은 신명기 7:13, 요엘 2:19 등에 나온다. ‘도성 자체’는 회복될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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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누가복음 15:4-10의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
32.5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더 바란다’는 에스겔 18:23, 32; 33:11을 가리킨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두고 기뻐한다는 말은 누가복음 15:7, 10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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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누가복음 16:13. 개역개정의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를 테르툴리아누스는 offendi(노여움을 사다)와 defendi(두둔을 받다)의 대구로 요약한다.
33.2 mamona는 개역개정에서 ‘재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이 낱말이 창조주가 아니라 돈을 가리킨다는 것을 논증하므로 음역 ‘맘몬’을 유지했다. 사본 M은 mamona, R과 이전 판본들은 mammona로 쓴다.
33.3 누가복음 16:1-9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가리킨다. ‘증서를 줄여 주어’는 Latinius의 추정 diminutis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diminuit로 읽는다. ab actu summotus의 actus는 청지기의 관리 직무를 뜻한다.
33.4 누가복음 16:9. 개역개정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로 옮긴다.
33.6 누가복음 16:13, 16:14 참조. ammentare는 투창에 가죽끈(amentum)을 매어 던진다는 뜻의 동사여서 ‘겨누어 던졌다’로 옮겼다.
33.7 누가복음 16:14. Kroymann은 dictum 뒤에 쉼표를 두어 ne quis existimet를 앞 문장에 잇지만 이전 판본들은 마침표를 두고 새 문장으로 읽는다. 번역은 이 절을 금지의 뜻으로 독립시켰다.
33.11 alium se ageret는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다른 신에게 속한 이로 행세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더 받들어 섬겨야’는 Kroymann의 추정 homini obseruandus를 따른 것이며, MR1은 non obseruandus, R3는 obseruandus로 읽는다. 줄표로 묶은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의 것이다.
33.12 ‘참된 주와 나란히 놓은’과 ‘창조주 하나님’은 Kroymann의 추정 cum domino iunxerat uero와 deum creatorem을 따른 것이다. 사본 MR은 deo iunxerat, uere ipsorum과 de creatore로 읽는다. Kroymann은 ‘참된 주’를 마르키온파의 가정에서 말하는 마르키온의 신으로 해석한다.
33.14 Kroymann은 dominum과 deo non을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이 둘을 빼면 “그는 창조주를 다른 이 없이 세웠다”가 되고, 전승된 본문 quem dominum sine alio deo non posuit는 “그를 다른 신 없이는 주로 세우지 않았다”로 읽혀 논지와 어긋난다.
33.15 누가복음 16:11. <만일>은 Kroymann이 보충한 si이며, Pamelius는 sit 대신 si로 읽었다. 옛 라틴어 본문의 credere는 ‘믿다’가 아니라 ‘맡기다’의 뜻이다.
33.17 누가복음 16:12. 개역개정은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meum(내 것)으로 읽으며, 일부 그리스어 사본도 ‘내 것’으로 읽는다.
33.19 alienus는 ‘남의 것’과 ‘낯선 이(남)’를 모두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6:12의 ‘남의 것’을 마르키온의 해석처럼 창조주에게 적용하면 유대인들의 고유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이 된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33.19 ‘그러나 어떻게’는 R3의 autem quomodo를 따른 것이며, MR1은 alio modo로 읽는다. M에는 후대의 손이 여백에 autem을 더했다.
33.21 <낯선>은 Kroymann이 alius를 ali<en>us로 고친 데 따른 것으로, 다른 신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본 MR은 alius(다른 이)로 읽는다.
33.22 ‘자신을 구별해 드러냈을’은 Kroymann의 추정 distinctione se fecisset을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distinctiones fecisset로 읽는다. † 이하 quoniam tunc alterius uideri potest, si non ad hoc proponatur, ut a re, de qua agitur, separetur는 Kroymann도 뜻을 풀 수 없다고 밝힌 부분이다. 번역은 전승된 낱말을 그대로 옮겼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quoniam 대신 quomodo, Engelbrecht는 quomodo autem으로 읽으며, Kroymann은 si non ad hoc을 si nomen adhuc로 고쳐 ‘그 이름이 여전히 다루어지는 사안에서 분리되도록 제시될 때’로 읽기를 제안한다.
33.23 누가복음 16:15. iustificantes se는 개역개정의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에 해당하며 ‘의롭다고 하는’으로 옮겼다.
33.24 예레미야 17:5. 개역개정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miser(비참하다)로 읽는다.
33.25 누가복음 16:15. ‘등불’은 잠언 20:27(“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에서,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은 시편 7:9, 예레미야 11:20, 요한계시록 2:23에서 온 표현이다. 잠언에서 등불은 사람의 영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하나님 자신의 말로 읽는다. <곧>은 Pamelius가 보충한 qui이며, M은 pronuntiarat, R과 이전 판본들은 pronuntiabat로 읽는다.
33.26 누가복음 16:15 후반. 개역개정은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로 옮긴다.
33.27 이사야 2:12. 개역개정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로 옮긴다.
33.29 마르키온의 신이 창조주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점을 들어, 그 신이 오래 숨어 있다가 창조주에게서 다 배운 뒤에야 나타났다고 비꼬는 반어이다.
33.30 누가복음 16:16.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로 옮긴다. 인용은 앞부분에서 끝난다.
33.31 [그리스도 자신이다.]는 Kroymann이 앞의 ‘하나님의 나라’에 붙은 난외 주석이 본문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 괄호로 묶은 말이다. uirtus는 ‘능력’으로 옮겨 potestas(권능)와 구별했다.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이사야 40:3과 말라기 3:1을 가리킨다.
33.32 unde<unde>의 뒤 음절은 Kroymann의 보충이며 ‘어디<에서든>’으로 옮겼다. Kroymann은 probetur와 quam 사이에 탈락을 표시했다. 남은 본문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요한에게서 저물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떠오른 사실보다 더 잘 증명되는 곳은 없다’는 뜻의 비교로 보인다. occasus와 ortus는 해가 지고 뜨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33.33 누가복음 16:17. 개역개정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다루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율법의 한 획’ 대신 ‘주의 말씀들의 한 획’으로 읽는다. 33.35의 ‘자기 말씀보다’도 같은 본문을 가리킨다. 이사야 인용은 40:8이다.
33.34 이사야 40:3. 개역개정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누가복음 3:4의 그리스어 구문을 따라 ‘광야에서’를 ‘외치는 자’에 붙인다.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sermo(말씀)이자 spiritus(영)라 부르며 예언자의 말을 그리스도의 말로 본다.
33.35 elementa(원소들)는 앞에서 인용한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 ‘폐지가 아니라 성취를 통해’는 마태복음 5:17을 반영한다.
- 34 본문으로
34.1 누가복음 16:18.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옛 라틴어 본문은 둘째 구절을 “마찬가지로 간음하는 자이다”(aeque adulter est)로 쓴다. 첫 구절의 committet(MR의 미래형)는 Oehler가 committit, Pamelius가 commisit로 고쳤다. <또>는 Kroymann이 보충한 et이다. “이렇게 해서도 … 불법으로 만든다”는 Engelbrecht가 삽입구로 표시한 대목이다.
34.2 신명기 24:1. 34.1-34.3 전체는 마르키온파 반론자의 말이다.
34.3 “저 복음서”는 마태복음이다. 마르키온은 누가복음을 줄인 자기 복음서만 받아들였으므로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마태복음 19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34.4 마태복음 19:8.
34.5 마태복음 19:4-5; 창세기 1:27; 2:24.
34.6 마태복음 19:6. 사본에 없는 non은 Engelbrecht가 보충했고, 그 부정을 <나누지 말라>로 옮겼다.
34.7 <그대의 그리스도인>은 Kroymann이 보충한 tuus이다. Engelbrecht는 ac si를 삭제하고 meus Christus nonne로 읽자고 제안했다. ‘맞수’는 Kroymann의 추정 parem(그는 aduersarium의 뜻으로 설명한다)을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patrem, Latinius는 gestans 대신 testans로 읽는다. 사본대로 읽으면 ‘남자와 여자를 결합한 이의 아버지 역할을 지니면서도’가 된다.
34.10 누가복음 16:18을 다시 인용한다. 여기서는 첫 동사가 완료형 commisit이다.
34.12 <그런데>는 Kroymann이 보충한 autem이다. Engelbrecht는 manente-est(“혼인이 … 간음이다”)를 삭제하려 했다. alias ubi(“다른 경우에는”)는 Rigaltius의 교정이다.
34.13 et iam(“그러므로 이제”)은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etiam이다.
34.14 [아니라고]는 R3(Rhenanus 제3판)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non이다. 이 non을 살리면 이중 부정이 되어 문맥과 맞지 않는다. 마르키온파가 혼인한 사람들에게 금욕을 서약하게 한 뒤에야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은 1권 29장에서도 다룬다. sacramentum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의식을 가리키므로 ‘성례’로 옮겼다.
34.15 faciet는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facit이다.
34.16 고린도전서 6:15. 마르키온도 바울 서신을 받아들였으므로 ‘그대의 사도’라고 부른다. <안다>는 Ursinus가 보충한 scis이다.
34.17 iustitia diuortii는 이혼이 정당하게 허용되는 근거를 뜻하므로 ‘정의’ 대신 ‘정당함’으로 옮겼다. ‘내세우는’은 Kroymann의 교정 perhibens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prohibens(‘금하는’)이다.
34.18 신명기 24:1.
34.19 마태복음 5:32. 개역개정은 ‘음행한 이유 없이’로 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causa adulterii(간음의 이유)이다.
34.20 atque ita는 사본 M의 읽기이며, R3과 대부분의 판본은 aeque(‘마찬가지로’)로 읽는다.
34.21 신명기 22:28-29. feceri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fecerat이다.
34.23 말라기 2:15. 개역개정은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이다. Kroymann은 이 인용문이 앞 문장과 문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아 탈락이 있거나 후대 삽입일 가능성을 제기했고, Engelbrecht는 앞 문장과 묶어 ‘예언의 권위에서도 … 버리지 말라고 하듯이’라는 의문문의 일부로 읽자고 했다. 번역은 전해진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34.24 quoquo(‘어디로 … 하든’)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quoque이다. ‘오점’은 R3의 macula를 따른 것이며, MR1은 masculo이다.
34.27 누가복음 16:16-18. 마르키온의 복음서에서도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까지라는 말(16:16)과 율법의 한 획에 관한 말(16:17)에 이어 이혼에 관한 말씀(16:18)이 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순서를 근거로 이혼 말씀이 요한 언급에 이어져 있다고 본다. eum non spectasse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eadem expectasse이다.
34.28 마태복음 14:3-10; 누가복음 3:19-20; 신명기 25:5-6(형사취수). ‘자식 없이’는 R3의 inliberis를 따른 것이며, MR1은 illecebris이다. ‘그 자신의 갈빗대’는 창세기 2:21-22를 따라 죽은 형제의 아내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 죽은 것으로 서술하지만, 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5.4)는 헤로디아가 살아 있는 남편과 갈라선 뒤 헤롯 안티파스와 혼인했다고 전한다.
34.29 누가복음 16:18. ‘물론 그의 그러한 죽음에 격분하여’는 Kroymann의 교정 eo utique succensus exitu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et utique successus exitus이다. ‘죽음 못지않게 이혼으로도’는 Engelbrecht가 어순을 바꾼 repudio quam morte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morte quam repudio(‘이혼 못지않게 죽음으로도’)이다. figuras는 유형론적 예표가 아니라 헤롯을 겨냥한 말의 형상을 뜻하므로 ‘모습들’로 옮겼다.
34.30 누가복음 16:19-31. inferi는 개역개정 누가복음 16:23의 표현에 맞추어 ‘음부’로 옮겼다.
34.31 refrigerium은 개역개정 누가복음 16:25의 ‘위로’에 맞추어 옮겼다. ‘잘못 혼인하여’는 R3 난외의 maritati를 따른 것이며, MR은 meritati이다.
34.32 누가복음 16:29. 개역개정은 ‘선지자들’이다.
34.33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보상과 형벌을 모두 음부 안에 두고, 자기 신을 믿는 자들의 보상만 하늘에 둔다. 아브라함의 품은 이 해석에서 음부 안의 장소가 된다.
34.34 <대해서>는 Kroymann이 보충한 ad이다. qui는 Engelbrecht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quae이다. quae로 읽으면 ‘음부와 관련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브라함의 품을 따로 구별하는 성경 자체가 그의 눈을 논박한다’가 된다.
34.35 누가복음 16:26. ‘그’는 비유 속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이다.
34.36 누가복음 16:23.
34.37 엘리시움(Elysium)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복된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저승의 낙원이다. 창세기 17:4; 로마서 4:3, 11-13, 17. [그리고]는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et이다.
34.38 Kroymann은 iustorum 뒤에 contendimus(‘우리는 주장한다’) 같은 주동사가 빠졌다고 보아 탈락 표시를 했다. ‘제공하는’은 Kroymann의 교정 praebere를 따른 것이며, MR1은 praeterea, R3과 이전 판본은 praebituram이다. <신>은 Kroymann이 보충한 deo이며, Ciacconius는 Christo를 보충했다. ‘하늘로 오르는 자기 길을 세운다’는 구절은 칠십인역 아모스 9:6에 나오며, 사본은 호세아(Osee)라고 하지만 Pamelius는 아모스(Amos)로 고쳤다.
34.39 이사야 33:14-15.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누가 너희에게 영원한 처소를 알려 주겠느냐’로 읽는다. 개역개정 33:14는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이다. 33:15의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를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34.40 창세기 22:17; 15:5. candida quaedam은 ‘밝은 어떤 것’이라는 뜻이어서 두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밝은 윤곽으로 해석하여 ‘환한 전망’으로 옮겼다. ac는 R의 읽기이며 MF는 ad, quaedam은 R의 읽기이며 MF는 quadam이다.
34.41 dum in uita estis 뒤의 탈락 자리에는 문맥상 ‘들으라고’(audire)와 같은 동사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6:29의 ‘그들의 말을 들으라’를 이단자들에게 적용하는 문장이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은 신명기 32:39; 사무엘상 2:6이다.
34.42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monella는 ‘훈계’를 뜻하는 드문 낱말이다.
34.43 누가복음 9:35(변화산의 음성).
34.44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한 형태는 마가복음 8:29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와 같다.
34.45 이사야 52:7; 로마서 10:15. ‘영원한 처소’는 34.39의 이사야 33:14를 다시 가리킨다.
34.46 아모스 9:6을 다시 가리킨다(34.38 참조). 34.45의 분사구가 이 단위까지 이어진다.
34.47 누가복음 16:29.
34.48 누가복음 1:52; 사무엘상 2:8; 시편 113:7. dynastas는 그리스어에서 온 낱말로 ‘권세 있는 자들’로 옮겼다.
- 35 본문으로
35.1 누가복음 17:1-2. 누가복음 17:2에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것”이라는 구절이 없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26:24와 마가복음 14:21의 표현이고, “깊은 곳에 던져졌더라면”은 마태복음 18:6(“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에 가깝다. scandalum/scandalizare는 개역개정 누가복음 17:1-2를 따라 ‘실족’, ‘실족하게 하다’로 옮겼다.
35.4 스가랴 2:8(개역개정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이 1인칭으로 “내 눈동자”라고 말한다.
35.5 누가복음 17:3. ex acceptione personae는 성경의 ‘외모로 사람을 취함’(προσωποληψία)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사람을 차별하여’로 옮겼다.
35.6 레위기 19:17. 사본 MR은 habens이고 Kroymann은 habes로 고쳤다. traduces는 M의 읽기이고 R은 non traduces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레위기의 ‘이웃’에 형제도 포함된다는 말을 인용 사이에 끼워 넣었다.
35.7 출애굽기 23:4(원수의 소나 나귀)와 신명기 22:1(형제의 소나 양)을 아우르는 암시다. ‘형제의 가축’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22:1에 더 가깝다.
35.8 누가복음 17:4.
35.10 레위기 19:18(개역개정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형제의 악의를 기억하지 말라”로, 칠십인역의 οὐ μηνιεῖς(원한을 품지 말라)에 가깝다. 뒤의 nec petenti … sed et non petenti는 ‘구하는 이에게만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이에게도’로 옮겼다. Kroymann은 petenti 뒤에 <tantum>이 빠졌을 가능성을 apparatus에 적었다.
35.11 offensa는 여기서 남에게서 받은 잘못을 뜻하므로 ‘잘못’으로 옮겼다. 나병 환자에 관한 율법은 레위기 13-14장, 열 명의 나병 환자는 누가복음 17:11-19이다. morositas는 율법의 ‘까다로움’, 곧 세세한 규정을 가리킨다.
35.12 <per>는 사본 R의 읽기로, M과 F에는 없다. retractari와 prouocari는 수동 부정사로 옮겼다. Kroymann은 능동형 retractare, prouocare를 가능성으로 적었다.
35.13 앞선 논증은 같은 권 9장에서 다룬 나병 환자 치유(누가복음 5:12-14)를 가리킨다.
35.14 누가복음 4:27. Kroymann은 시리아 사람의 이름을 Neman으로 인쇄했다(M neaman, R3와 통행본 Naamann). 개역개정을 따라 ‘나아만’으로 옮겼다.
35.15 <potius>는 Engelbrecht가 보충했다.
35.17 ‘율법의 비밀’(legis arcanum)은 레위기 13-14장에서 제사장이 나병을 검사하는 규정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읽는 해석이다. disceptator는 ‘가려내는 이’로 옮겼다. Kroymann은 dispectatorem(살펴보는 이)을 가능성으로 적었다. elimator는 줄로 갈아 내듯 얼룩을 없애는 이라는 뜻으로 ‘씻어 내는 이’로 옮겼다.
35.18 누가복음 17:14.
35.20 [uideret]는 뒤의 uiderit를 중복해 쓴 것으로 보아 R3 이래 삭제되었다. Engelbrecht는 rideret? uiderit로 읽기를 제안했다. si cui tam은 R의 읽기이고 M은 sic uitam이다. uiderit는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는 관용 표현이다. opiniosus는 제멋대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을 가리켜 ‘변덕스러운’으로 옮겼다.
35.22 obseruatores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obsecratores(간청하는 자들)이다.
35.23 ‘이전의 나병 환자’는 누가복음 5:12-13의 나병 환자다. 누가복음 5:14에서도 예수는 그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지만, 이는 고친 뒤에 한 명령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런 명령’은 치유 전에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보낸 명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했다(열왕기하 5:10).
35.24 ‘그’는 엘리사를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엘리사가 제사장에게 보내지 않았는데도 창조주의 예언자였듯이,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도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논리다. credit id는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credidit이다.
35.25 누가복음 17:11, 16. 개역개정은 예수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갔다고 한다.
35.26 열왕기상 11:29-39. 사본 MR은 ‘아홉 지파’(nouem)이고 Pamelius는 성경을 따라 ‘열 지파’(decem)로 고쳤다. 열왕기상 11:31에서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준다고 말한다. 북왕국의 수도로서 사마리아는 여로보암이 아니라 오므리 때에 세워졌다(열왕기상 16:24).
35.28 요한복음 4:12(개역개정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와 4:20. 사본 MR의 ne는 의문 소사로 읽었고, Pamelius는 nae로 고쳤다.
35.29 [그,]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qui이다. “사마리아 산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화를 말한 본문은 아모스 6:1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사야를 통해 말했다고 쓴다. Pamelius는 Esaiam을 Amos로 고쳤다. dixerat는 Kroymann의 수정(MR dixerit), confiderent는 Latinius의 수정(MR confident), ipse eam은 Kroymann의 수정(MR ipsam)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요한복음 4:22다. licet Israhelitae et Samaritae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북쪽 지파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제사장들은’에서 시작하는 줄표 삽입구는 35.30의 tota enim promissio … fuit까지 이어진다.
35.30 [그리스도]는 ‘약속 전체’를 풀이한 주석이 본문에 들어온 것으로 Kroymann이 보고 삭제 표시한 낱말이다. 유다 지파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49:9-10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한 ‘우물’(요한복음 4장)과 대비하여 예루살렘을 구원의 ‘샘’(fons)이라고 부른다.
35.31 expungere는 ‘지우다, 폐지하다’와 ‘완수하다, 이행하다’를 모두 뜻한다.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어 끝난다는 두 뜻이 겹치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가 아니라는 앞의 논지에 맞추어 ‘완수되어야 한다’로 옮겼다.
35.32 누가복음 17:15-18. 깨끗하게 된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돌아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35.35 누가복음 17:19(개역개정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를 참된 제물로 보는 생각은 시편 50:14, 23에 근거한다.
35.37 누가복음 17:20-21. 옛 라틴어 본문의 cum obseruatione(개역개정 “볼 수 있게”)를 ‘지켜보는 가운데’로 옮겼다. 개역개정의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와 달리, 옛 라틴어 본문은 nec dicunt(사람들이 말하지도 않는다)이다.
35.38 누가복음 17:21. 테르툴리아누스는 intra uos를 ‘너희 손에, 너희 권능 안에’, 곧 계명을 듣고 행하는 일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35.43의 신명기 30:14 “네 손에”와 연결한다.
35.39 secundum nostras antithesîs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Antitheses)를 비튼 표현이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복음을 서로 대립시켰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모세를 그리스도 맞은편에 세워 두 말이 같은 뜻임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 나름의 안티테시스에 따라’로 옮겼다.
35.40 신명기 30:11-14(35.40-43). 개역개정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xcelsum non est(높지 않다)이다. 개역개정의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을 따라 “네 손에”를 더 가진다. ascendet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ascendit이다.
35.45 누가복음 17:24-25. ‘자기’ 오심은 누가복음 17:24의 “자기 날에”를 받는 말이다. reuelabitur는 R의 읽기이고 M은 reuelabatur이다. substantialiter는 substantia(실체)에 맞추어 ‘실체로’로 옮겼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실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35.46 누가복음 17:25의 ‘버림받다’(reprobari)를 시편 118:22의 ‘버린’(reprobauerunt)과 연결한다. ‘두 번의 드러남’은 고난받는 첫 번째 오심과 영광 가운데 오는 두 번째 오심을 가리킨다.
35.47 시편 118:22-23(개역개정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a domino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대로 ‘주로 말미암아’로 옮겼다.
35.48 ‘반석’의 예표는 고린도전서 10:4나 이사야 28:16, ‘산’의 예표는 다니엘 2:34-35, 45(산에서 뜨인 돌이 큰 산을 이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35.49 누가복음 17:26-30. ‘온화하고 부드러운 신’은 마르키온의 선한 신을 비꼬는 표현이다.
35.50 누가복음 17:32와 창세기 19:26.
35.51 ‘저 신’(ille)은 창조주를 가리키며, ‘그’는 마르키온이 말하는 그리스도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처럼 심판하고 보복한다 해도, 창조주의 본보기로 사람을 가르쳐서는 안 되었다는 논리다.
35.52 ill<ius ill>u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의 illum만으로는 ‘그를 그가 모든 곳에서 선포하는 이로 믿는다’가 되고, 보충을 따르면 ‘그를 그가 모든 곳에서 선포하는 저 신(창조주)에게 속한 이로 믿는다’가 된다. ne quid de suo praedicet는 ‘그가 자기 오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는 셈이니’라는 비꼬는 뜻으로 옮겼다.
- 36 본문으로
36.1 누가복음 18:1-8(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36.3 누가복음 18:7. Kroymann은 사본의 iudex qui et uindex를 uindex qui et iudex로 바꾸어 읽었다. [만일]로 옮긴 si는 Rhenanus 제3판(R3)이 삭제한 말이다. ‘더 나은 하나님’은 심판하지도 원한을 풀어 주지도 않는 마르키온의 신과 견준 표현이다.
36.4 누가복음 18:9-14. et tamen은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어쨌든’으로 옮겼다. relaturi essent ... orandi disciplinam은 두 사람이 성전에서 내려가며 각자 받아 간 판정(누가복음 18:14)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기도의 법도를 ... 받아 돌아가게 될 것’으로 옮겼다. iam은 R3와 이후 판본들에서 eam으로 읽는다. adorare는 ‘경배하다’, orare는 ‘기도하다’로 옮겼다.
36.6 시편 113:7과 사무엘상 2:8(낮은 자를 일으킴), 이사야 13:11(교만한 자를 낮춤)을 반영한다.
36.8 주기도문이 창조주에게 맞는다는 논증은 이 책 26장에 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며, 경배조차 받으려 하지 않는 신이라는 반어이다.
36.9 누가복음 18:19. 고대 라틴어 역본은 그리스어 agathos를 optimus(지극히 선한)로 옮긴다. 개역개정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unus를 두 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으로 읽는다.
36.10 마태복음 5:45.
36.11 누가복음 18:18. 개역개정 “선한 선생님이여”에 해당하는 말이 여기서는 optime(지극히 선한)이다.
36.12 누가복음 18:20-21. R3는 사본의 praeceptoris를 praeceptis로, cumque illi를 cumque ille로 고쳤다.
36.13 누가복음 18:22.
36.14 commiserones와 coodibiles는 ‘함께 비참한 자들’, ‘함께 미움받는 자들’이라는 뜻의 조어이며, 마르키온이 자기 추종자들을 부른 말로 보인다. Kroymann은 이 책 9장의 해당 대목을 함께 참조하도록 제시한다.
36.15 출애굽기 20:12-16, 누가복음 18:20. diligendi patrem et matrem은 ‘공경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여서 그대로 옮겼다. gloriosissimus는 ‘지극히 영광스러운’과 ‘자랑하는’의 두 뜻을 모두 지니며, 계명을 지켰다고 내세운 관원에 대한 반어여서 ‘지극히 자랑스러운’으로 옮겼다. an e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ante et이다.
36.16 마태복음 5:17. 누가복음에 없는 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부자 관원 대목이 이 말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논증한다. ‘여기서도 복음서에는’은 M 사본의 hic euangelio를 따른 것이며, R 판본은 hoc in euangelio로 읽는다.
36.17 cuius 앞에 선행사가 없어 Kroymann은 <eius dei Christum> 같은 말이 필사 중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 자신도 그 존재, 곧 ... 그 계명의 주인에게 속한다’로 풀어 옮겼다.
36.18 미가 6:8(칠십인역 계열). 개역개정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homo를 부르는 말(사람아)이 아니라 ‘전하였다’의 주어로 읽고, 36.19에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마지막 구절은 여기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sequi), 36.21에서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ire cum domino)으로 달리 인용된다. iudicium은 미가서의 맥락에 따라 ‘공의’로 옮겼다.
36.20 누가복음 18:20, 22. diligere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ilige이다.
36.21 누가복음 18:22. 테르툴리아누스는 pauperibus(36.13) 대신 egenis(궁핍한 자들)로 인용한다. [그가 말한다](inquit)는 R3가 삭제한 말이다. Pamelius는 domino를 deo로 고쳤다.
36.22 누가복음 18:22. ‘최근의 아우구스투스 인구 조사’는 누가복음 2:1-5의 호적 등록을 가리킨다. populos는 그리스어 dēmoi에 해당한다는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족속’으로 옮겼다. potuisset은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potuit sed이다.
36.23 <비록>은 Kroymann이 보충한 si(et<si>)이고, ‘어떤 <식으로든>’은 Ursinus가 quo를 quoquo로 보충한 것이다. Engelbrecht는 quo<dam>으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호적에 오를 혈통이 없다는 논증이다.
36.24 누가복음 18:35-38.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에게 전해진 일은 누가복음 8:19-20을 가리킨다. <곧>은 R3가 보충한 id이다.
36.25 누가복음 18:39.
36.27 praesumeres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praesumeret, R3 praesumeretur). fals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palam이다.
36.28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라 immo 이하를 하나의 의문문으로 옮겼다. 이전 판본들은 erroris, immo ... creatoris, ut ...로 끊는다. ‘창조주를 폭로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창조주를 드러내 무너뜨리려고 왔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받는다.
36.29 [그대들이 다윗의 자손을 부인하지 못하도록,]은 Kroymann이 삽입문으로 의심하여 괄호에 넣은 구절이다. Pamelius는 이 구절의 ne를 nec으로 읽는다.
36.30 누가복음 18:42.
36.31 ‘다른 신에게서’는 Ursinus의 alio를 따른 것이다(사본 illo). Ursinus는 detectionem(폭로)을 deiectionem(무너뜨림)으로 고친다.
36.32 이사야 11:1, 열왕기상 8:19(“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시편 146:8(“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을 반영한다. Junius는 remunerator를 remuneratorem으로 고친다.
36.34 누가복음 18:42-43. simulque는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simulquam이다.
36.35 census는 36.22의 인구 조사(census)와 같은 낱말로, 예수가 처녀 마리아를 통해 다윗 가문의 호적에 오른다는 뜻이다. 이전 판본들은 qui uult uidere Iesum Dauid filium, credat로 끊어 ‘다윗의 자손 예수를 보려는 자는 처녀의 호적을 통해 믿어야 한다’로 읽는다.
36.36 ‘안티테시스’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Antitheses)에 실린 대립, 곧 맹인들을 치라고 한 다윗과 맹인을 고친 그리스도의 대조를 가리킨다. 그 대립 자체가 다시 테르툴리아누스의 반대 논증(36.38)에 부딪힌다는 뜻이며, <속으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이다.
36.37 누가복음 6:39, 사무엘하 5:6-8. <때문에>는 Kroymann이 보충한 quia이다. ‘선한 이임을 보여 주려 한’의 ut는 Oehler의 읽기이며(사본 et, Engelbrecht는 삭제), ‘그는 왜 이것을’의 id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caedi. et). ‘그릇된 믿음’은 마르키온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킨다. Oehler는 et quidem을 equidem으로 읽는다.
36.38 <준다>는 Kroymann이 보충한 dat이다.
36.39 †는 eiusdem carnis(같은 육신)에 붙은 표시이다. Kroymann은 condicionis(같은 처지)를 추정하고, R3는 indecoris로 읽는다. Engelbrecht는 사무엘하 5:1(“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을 암시한다고 보아 carnis를 옹호하지만 Kroymann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본의 낱말대로 ‘같은 † 육신을 지닌’으로 옮겼다. 문장 첫머리의 quia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qui).
36.40 ualitudo는 맹인들의 몸 상태, 곧 눈먼 상태를 가리키며 ‘병’으로 옮겼다. offenderat는 M과 F 사본의 읽기이고, R과 이후 판본들은 offenderit로 읽는다.
- 37 본문으로
37.1 누가복음 19:1-10. ‘마르키온의 <신>에게서’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사본은 a Marcione(마르키온에게서)이다.
37.2 누가복음 18:38.
37.3 누가복음 18:43. Pamelius는 복수 동사 referebant를 단수 referebat로 고친다. allophylus는 ‘이방인’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삭개오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본다. <만일>은 R3가 주석에서 보충한 si이다.
37.4 이사야 58:7.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이다. ‘주를 자기 집에 맞아들여’는 누가복음 19:6을 가리킨다.
37.5 누가복음 19:8과 이사야 58:6의 칠십인역 표현(“폭력적인 계약의 매듭을 풀고, 억눌린 자들을 놓아 자유롭게 하며, 모든 불의한 증서를 찢으라”)을 엮었다. Kroymann은 이사야 58:9-10도 참조로 든다. substantia는 여기서 실체가 아니라 재산을 뜻한다. contractuum은 Pamelius의 수정(사본 contractum)이고, obnexus(결박)는 M 사본과 Pamelius의 읽기다. Engelbrecht는 promittebat 대신 promebat(내놓고 있었다)를 추정한다.
37.6 누가복음 19:8.
37.7 누가복음 19:9. 고대 라틴어 본문 hodie salus huic domui에는 동사가 없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있다’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이다. ‘창조주의 예언자’는 이사야를 가리킨다.
37.8 누가복음 19:10. 개역개정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이며, 고대 라틴어 본문에는 ‘찾아’가 없다. perire는 ‘잃어버린 바 되다’와 ‘멸망하다’를 모두 뜻하는데, 37.9-12에서 몸과 영혼 가운데 어느 쪽이 멸망했는지를 따지므로 ‘멸망하다’로 옮기고, cui perierat만 ‘그가 잃어버린’으로 옮겼다.
37.14 누가복음 19:11-27, 특히 19:22-23, 26. <그대의>는 Kroymann이 보충한 tuum이다.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신에게 속한다면 이 비유가 그 신을 엄격한 재판관으로 보여 준다는 논증이다. ‘책망할’은 Kroymann이 사본의 honorantem(높이는)을 onerantem(= criminantem)으로 고친 것을 따랐다.
37.15 누가복음 19:21-22. 비유 속 ‘엄한’ 주인을 창조주로 보는 해석을 가정한 문장이며, ille(그이)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 38 본문으로
38.1 누가복음 20:1-8의 요한의 세례에 관한 물음이다. 누가복음 20:1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질문자로 들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들을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른다.
38.2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한다”는 누가복음 19:22의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고대 라틴어 본문 ex ore tuo te iudico)를 떠올리게 한다. 라틴어 문장은 interrogabat가 생략된 형태이므로 “심판하려는 것이었는가?”로 옮겼다.
38.3 ‘창조주를 변호하는 데에’는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의 물음(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을 무지의 증거로 삼은 데 대해 제2권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를 변호한 논증을 가리킨다. ad comparationem Christi는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견주어 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38.4 누가복음 20: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니”를 반영한다.
38.5-6 마르키온파가 창조주를 비난하던 논법을 그들의 신에게 되돌린 가상의 발언이다. ‘나무에 관한 율법’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창세기 2:16-17)이다. 마르키온파는 창조주가 아담의 타락을 미리 알면서도 그 명령을 주었다고 비난했다. 수사본 M에는 ‘오, 지극히 선한 신이여’가 없다.
38.7 누가복음 20:5.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했을 경우를 가정한 말이다.
38.8 sacramentum은 요한이 베푼 세례를 가리키므로 ‘성례’로 옮겼다.
38.9-10 누가복음 20:8. 고대 라틴어 본문의 in qua uirtute를 ‘무슨 능력으로’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무슨 권위로”이다. ‘악을 악으로 갚았다’(malum malo reddidit)는 그리스도의 대응을 창조주의 보복 원칙과 같은 것으로 제시한다. Rigaltius는 <pro> malo reddit로 고쳐 읽었으나 뜻은 같다.
38.11 누가복음 20:25. ‘가이사’는 Caesar의 개역개정 표기이다. Kroymann은 sunt를 삭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통행본은 quae erunt dei? 뒤에 물음표를 두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겠는가? 가이사의 데나리온과 닮은 것들이다”로 읽는다.
38.12 형상과 모양은 창세기 1:26-27을 가리킨다. expressus est는 주화를 찍어 내는 말이어서 ‘찍혀 나왔다’로 옮겼다.
38.13 ‘자기의 가이사’는 데나리온에 찍힌 형상의 주인,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38.14 Kroymann은 necesse est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mutuetur ab alio(남에게서 빌려야)가 빠졌다고 추정했다. 이 추정을 따르면 “자기 데나리온이 없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남에게서 빌릴 수밖에 없다”가 된다. 수사본 M과 F는 qui 대신 quid로 읽는다.
38.17 누가복음 20:27-33.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와 혼인하는 율법은 신명기 25:5-10이다.
38.20 누가복음 20:34-36. 고대 라틴어 본문은 “하나님이 합당하다고 여긴 자들”로 하나님을 행위자로 명시하며, 개역개정은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줄표 사이의 부분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R과 통행본은 둘째 sint 대신 fiant로, Gelenius와 통행본은 <et> resurrectionis로 읽으며, Kroymann은 누가복음 20:36에 따라 sint <et filii> dei를 제안했다.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는 마태복음 22:30과도 겹친다.
38.22 ‘혼인의 고유한 권리에 관해’는 사두개인들의 물음이 혼인 제도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부활을 다룬 것이었다는 뜻이다.
38.23 MF는 respondisse, R과 통행본은 respondere로 읽는다.
38.25 라틴어 quos autem dignatus est deus illius aeui에서 deus 바로 뒤에 illius aeui가 오므로 이 소유격을 deus에 붙여 ‘저 세대의 신’으로 읽을 수 있다. 마르키온파는 이렇게 읽어 창조주와 다른 ‘저 세대의 신’을 끌어냈다. 한국어 인용은 이 어순을 살려 ‘저 세대의’를 끝에 두었다. ita-decurrunt는 수사본에서 조금 앞, 본문 인용 뒤에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고, decurrunt(수사본 decucurrerunt)와 <ut ‘illius aeui’>는 Kroymann의 교정과 보충이다. R3와 통행본은 <illius aeui>만 보충한다.
38.26-27 테르툴리아누스는 deus 뒤에서 끊고 illius aeui를 뒤의 possessione et resurrectione에 걸어 “저 세대의 소유와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긴”으로 읽는다. 누가복음 20:35의 그리스어 본문도 ‘저 세대’를 얻는 일에 걸려 있다.
38.28 누가복음 20:34. 마르키온파는 세례받은 신자에게 혼인을 금했으며(제1권 29장), 이 구절을 근거로 자신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혼인하지 않는 ‘저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38.29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atquin non potest uideri respondisse dominus de nuptiis huius aeui(그러나 주가 이 세대의 혼인에 관해 대답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Engelbrecht는 탈문 없이 quando ... eas negauerat, de quibus <non> consulebatur?로 복원하자고 했다. negaueri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수사본은 negauerat이다.
38.30-31 누가복음 20:39. Kroymann은 R3를 따라 per를 삭제할 말로 표시했다. per를 읽으면 “부활을 통하여 확증했다”, 빼면 “부활을 확증했다”가 된다.
38.33 누가복음 20:41-44, 시편 110:1(불가타 109:1). Kroymann은 ad Christum non Dauid?로 이어 읽어 ‘다윗의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 곧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했다. 통행본은 ad Christum? non Dauid로 끊는다. filius Dauid는 누가복음 20:41의 개역개정 표현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옮겼다.
38.34 <아니다>(<non.>)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창조주를 파괴하는 자’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38.35 누가복음 18:35-43의 여리고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친 일을 가리킨다(이 책 36장). Kroymann은 in illum의 in을 삭제할 말로 표시했다. in을 읽으면 “그를 향해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다”, 빼면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었다”가 된다.
- 39 본문으로
39.1 Kroymann은 “ei illam” 뒤에 탈문을 표시했다. Ursinus는 competere, Engelbrecht는 <esse>, Oehler는 deberi를 보충하는데, 모두 ‘이름들의 소유권이 그에게 속한다’는 뜻이 된다. 동사는 사본 MR의 adnuntiaret, transnominaret 대신 Kroymann의 adnuntiarit, transnominarit를 따랐다.
39.1 “예수라는 이름도 바꾸어 붙인 이”는 창조주가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꾼 일(민수기 13:16)을 가리킨다. 라틴어 성경에서 여호수아는 Iesus로 표기되며, 이 논증은 제3권 16장에 나온다.
39.2 누가복음 21:8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를 인용한다.
39.3 Kroymann은 “alieno: si non, ipsius erat”로 끊고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로 읽는다. 통상 본문은 “alieno, si non ipsius erat”로 끊어 ‘그것이 그의 몫이 아니었다면’의 조건절이 된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39.4 누가복음 21:8. 개역개정은 “내가 그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태복음 24:5처럼 “내가 그리스도다”(ego sum Christus)이다.
39.5 첫 문장의 nec는 사본 MR의 et를 Kroymann이 고친 것이고, quando는 MR의 quod를 Engelbrecht가 고친 것이다.
39.7 누가복음 21:9-11.
39.8 누가복음 21:9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의 oportet를 근거로 삼는다.
39.10 누가복음 21:12-13. 누가복음 21:13의 “증거가 되리라”(εἰς μαρτύριον)를 테르툴리아누스는 in martyrium으로 옮겼다. martyrium은 ‘증언’과 ‘순교’를 모두 뜻하는데, in salutem과 짝을 이루고 앞의 박해와 이어지므로 ‘순교’로 옮겼다. passiones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제자들이 겪을 일이므로 ‘고난’으로 옮겼다.
39.11 스가랴 9:15-16 칠십인역.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를 삼키고 피를 마셔 제단 모퉁이처럼 피가 가득하게 되며, 9:16 후반은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이다. 칠십인역은 “거룩한 돌들이 구른다”(λίθοι ἅγιοι κυλίονται)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돌팔매질과 피 흘림을 성도들이 당하는 박해로 읽으므로(39.12-15), 번역은 삼키고 돌을 던지는 주어를 밝히지 않았다. quia는 MR의 qui를 Pamelius가 고친 것이다.
39.12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블레셋 사람을 비롯한 이민족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이방 민족들’로 옮겼다.
39.17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동사 uolutant는 MR의 uolutabant를 Engelbrecht가 고친 것이다.
39.18 누가복음 21:14-15. 발람 이야기(민수기 22-24장)와 모세가 입이 둔하다고 핑계 대자 하나님이 입을 약속한 일(출애굽기 4:10-12)을 끌어온다. Balaae는 발람을 가리킨다(Pamelius는 Balaam으로 고쳤다).
39.19 누가복음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를 받는다.
39.20 이사야 44:5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불리리라”이다. <이 사람은>은 Kroymann이 보충한 hic이다. dice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icent이다. Engelbrecht는 inscribetur 대신 inscribet를 추정했으나 Kroymann은 사본대로 두었다.
39.21 창세기 32:28.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과 함께 강해지는 자’(cum deo inualescens)로 풀이한다. martyr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증인을 뜻하며 ‘순교자’로 옮겼다.
39.23 이사야 50:4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이다. Kroymann은 disciplinae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ut sciam(‘내가 알도록’) 또는 ad cognoscendum을 제안했다. 마지막 문장은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서 말할 능력을 받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그리스도라는 점을 전제한다.
39.24 누가복음 21:16-17. rurs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usus이다.
39.25 누가복음 21:19. 개역개정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는 인내로 너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saluos facietis uosmetipsos)이다.
39.26 첫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9:19(개역개정 9:18 “가난한 자들의 희망이 영원히 실망되지 아니하리로다”)로, 칠십인역의 ‘가난한 자들의 인내’ 대신 ‘의인들의 인내’로 되어 있다. 둘째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115:6(개역개정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이다. Rigaltius는 periet 대신 peribit로 읽었다.
39.27 스가랴 6:14 칠십인역 “면류관은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개역개정에서는 면류관이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헨을 기념하여 성전에 두어진다.
39.28 누가복음 21:20. “멸망의 때, 곧 ... 시작할 때”는 R3의 excidii cum coepisset를 따른 것이다(MR1 excidium ... coepisse).
39.29 누가복음 21:25-26. “땅에서는”(in terra)은 MR의 inter를 Gelenius가 고친 것이다.
39.30 누가복음 21:26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를 받아 요엘 2:30-31을 인용한다.
39.32 39.32-35는 하박국 3:9-12 칠십인역이며 개역개정과 문구가 많이 다르다(예: 3:10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이므로 인용 안에서 ‘주께서’, ‘-시-’를 썼다.
39.33 dispergens(흩으시니)는 MR1의 분사 읽기이고, R3는 dispergent, Pamelius는 disperges로 읽었다.
39.37 누가복음 21:27.
39.38 누가복음 21:28.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adpropinquabit는 미래형(가까이 올 것이다)이고, 개역개정은 “가까웠느니라”이다. ‘그 비유’는 39.39와 39.52-53에 인용되는 무화과나무 비유(누가복음 21:29-31)이다.
39.39 누가복음 21:31.
39.41 다니엘 7:13-14를 인용하면서 두 차례 삽입구를 넣는다. 첫째는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로 간 귀인의 비유(누가복음 19:11-27), 둘째는 시편 2:8이다.
39.42 시편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그 나라에서는 죽지도 않고 장가들지도 않으며”는 누가복음 20:35-36에서 온 말이다.
39.44 하박국 3:13 칠십인역은 복수형 ‘기름 부음 받은 자들’(τοὺς χριστούς)이고, 개역개정은 단수형 “기름 받은 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들을 누가복음 21:28의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드는 자들과 연결한다. erecturos, leuaturos, redempto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단수형이다.
39.45 nedum(‘하물며’)은 MR의 necdum을 Pamelius가 고친 것이다.
39.46 <그대의>는 Kroymann이 보충한 tui이다.
39.47 <너그러움>은 Kroymann이 사본 MR의 libertate(‘자유’)를 liber<ali>tate로 고친 것이다.
39.48 ‘제자들의 질문’은 누가복음 21:7, ‘무화과나무 비유’는 누가복음 21:29-31이다.
39.49 <이 되>는 Kroymann이 보충한 sit이다. 문장 끝의 ** 자리에는 siue에 짝하는 둘째 조건이 빠져 있다. Rigaltius는 “siue tui malueris, quo bona ei adscribas, quae ab aduentu eius oriuntur”를 보충했다. 이를 따르면 ‘또는 그대가 그 오심을 그대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 그의 오심에서 생겨나는 선한 것들을 그에게 돌린다면, 그의 오심에 앞서는 악들도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가 된다.
39.51 Rigaltius는 in quam 대신 in quem으로 읽었다.
39.52 누가복음 21:29-31. adspicite는 MR의 adspice를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개역개정 21:30은 “싹이 나면”인데,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열매를 맺으면”(cum fructum protulerint)이다.
39.55 Kroymann은 이 문장을 훼손된 것으로 보아 †를 붙였다. 전승된 본문(omne autem signum eius est res, cuius est signum)을 직역하면 ‘모든 표징의 경우, 사물은 그 표징이 속한 이의 것이다’가 된다. Kroymann은 omnis autem [signum] eius est res(‘모든 사물은 그 표징이 속한 이의 것이다’)를, Ursinus는 omne autem signum eius est, <cuius et> res(‘모든 표징은 사물이 속한 이의 것이다’)를 제안했다. 어느 쪽이든 표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이 같은 주인에게 속한다는 뜻이며, 번역은 전승된 본문을 이 뜻으로 옮겼다.
39.57 누가복음 21:9의 “먼저 있어야 하되”(oportet)를 다시 받는다. ‘지극히 선한 신’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반어적 표현이다.
39.58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를 반향한다.
39.59 누가복음 21:32-33. 누가복음 21:32에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기 전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대’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21:33의 ‘하늘과 땅’을 주어로 삼아 두 절을 합쳐 진술한다.
39.60 <선포한>은 Kroymann이 보충한 praedicata이다. M은 sunt만, R은 fiunt(‘일어나는’)로 전하며, Engelbrecht는 sunt를 지우고 앞 문장의 peragantur를 이어 읽자고 했다.
39.61 aemulus(‘경쟁자’)는 창조주 편에서 본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39.62 ‘질투하는 하나님’(zelotes deus)은 출애굽기 20:5; 34:14의 표현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말씀은 남는다는 말은 누가복음 21:33과 이사야 51:6; 40:8을, 제자들에 대한 경고는 누가복음 21:34-35를 인용한다. 배불러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경고는 신명기 8:11-14이다. 줄표로 묶은 삽입구는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른 것이고, 통상 본문은 “mundi. Moysi ...”로 끊는다.
39.63 liberabit(‘건져 줄 것이다’)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완료형 liberauit이다.
39.65 누가복음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9.66 호세아 12:4 칠십인역(12:5). 개역개정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인데,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내 성전에서”(in templo meo)이다. elaeon은 그리스어 τῶν ἐλαιῶν(올리브 나무들)을 옮긴 말로 ‘감람산’으로 옮겼다.
39.67 스가랴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in monte elaeon은 Engelbrecht의 읽기이고 MR은 elaeone이다.
39.68 누가복음 21: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quia는 Migne판의 읽기이고 MR은 qui이다.
39.69 이사야 50:4 칠십인역. 개역개정 후반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다.
39.70 39.58과 같이 마태복음 5:17의 ‘폐하다’와 ‘완전하게 하다’를 반향한다.
- 40 본문으로
40.1 누가복음 22:1 참조. sciit는 M과 R의 sci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figura<ra>t는 전승된 figurat(현재)에 Kroymann이 ra를 보충해 과거완료로 만든 읽기이므로, 보충된 시제 어미를 “예표<했던>”으로 표시했다.
40.2-3 “이는 주의 유월절이다”는 레위기 23:5(개역개정 “여호와의 유월절”)이다. 이어지는 인용은 누가복음 22:15이며, concupiscentia concupii는 그리스어 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를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의 “원하고 원하였노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에는 개역개정의 “이” 유월절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없다.
40.4 반어다. 율법을 파괴하러 왔다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유월절을 지키려 갈망한 것을 두고, 유대식 양고기(uerbecina)가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라고 조롱한다. M과 F는 Iudaica 앞에 in을 전하고 R은 이를 지웠으며 Kroymann은 [in]으로 묶었다. in을 살리면 ‘유대 방식으로’라는 뜻이 되므로 “유대[식]”의 “식”을 괄호에 넣었다. delectarat는 사본의 delectare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40.5 이사야 53:7.
40.6-7 인용은 시편 41:9(칠십인역·불가타 40:10)이며, 개역개정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이다. expunctum은 예언이 ‘채워져 끝났다’는 뜻으로 “성취되었다”로 옮겼다. leuauit는 Latinius의 읽기이고 M과 R은 미래형 leuabit를 전한다. Kroymann은 tradi 뒤에 쉼표를 두어 ne dicerem을 목적절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였다면 낯선 자에게, 대가 없이 넘겨져도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40.8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백성 앞에서 공공연히 그들의 노여움을 샀다면 배반자 없이도 곧바로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inuadi는 배반을 거치지 않고 직접 덮쳐 붙잡히는 것을 뜻한다.
40.10 “그들이 의인을 팔았기 때문이다”는 아모스 2:6이다. 유다가 뉘우쳐 돈을 돌려주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일은 마태복음 27:3-8에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 27:9를 따라 예언을 예레미야에게 돌리지만, 인용의 내용은 주로 스가랴 11:12-13과 일치한다.
40.11 마태복음 27:9-10. “또는 존귀하게 여겨진 자”(uel honorati)는 그리스어 τοῦ τετιμημένου의 라틴어 번역 adpretiati가 맞는지 테르툴리아누스가 의문을 품고 덧붙인 대안 번역으로 Kroymann은 본다. Latinius는 이 말을 지우려 했고, Engelbrecht는 uel honorarii를 추정했다.
40.12 누가복음 22:19. “이것은 내 몸이다”를 ‘내 몸의 예표’(figura corporis mei)로 풀이하는 이 대목에서 figura는 실재하는 몸을 가리키는 표상이라는 뜻이다. 다음 문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예표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이 아니라 참된 몸이었다고 논증한다. 삽입구의 deus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으로 옮겼다.
40.15 pepo는 멜론이나 호박 같은 박과 열매다. “마르키온이 심장 대신 지니고 있던 멜론”은 마르키온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말이며, 심장(cor)은 지성의 자리를 뜻한다. uanitas는 ‘허망함’과 ‘빈 것’을 함께 뜻하여 40.13의 “빈 것, 곧 환영”을 받는다.
40.16 예레미야 11:19를 칠십인역(Δεῦτε καὶ ἐμβάλωμεν ξύλον εἰς τὸν ἄρτον αὐτοῦ)에 따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로 옮긴다. R은 crucem을, M과 F는 tamen을 전하며 Kroymann은 crucem을 채택했다.
40.18 누가복음 22:20. testamentum은 잔의 말씀에 나오는 “새 언약”이므로 “언약”으로 옮겼다.
40.22-23 이사야 63:1-2를 칠십인역에 따라 인용한다. Bosor는 보스라다. uiolentia는 M과 R의 uiolenta를 Engelbrecht가 고친 읽기로, 칠십인역 βίᾳ μετὰ ἰσχύος에 해당한다. “가득 차서 밟힌 포도즙 틀”은 개역개정 63:2-3의 “포도즙 틀을 밟는 자”에 해당한다.
40.25-26 창세기 49:10-11,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이다. “포도의 피”(sanguine uuae)는 칠십인역 αἵματι σταφυλῆς를 따른 것이며 개역개정은 “포도즙”으로 옮긴다. Kroymann은 processurus 앞에 erat가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40.27 consecrauit는 성찬의 잔에서 포도주를 자기 피로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뜻으로, “거룩하게 구별했다”로 옮겼다. in sanguinem(피의 예표로)은 M과 R의 in sanguine을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 41 본문으로
41.1 누가복음 22:22(마태복음 26:24, 마가복음 14:21 참조).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이며, 개역개정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이다. 화를 선언하는 것은 분노하는 신의 일이므로,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마르키온의 선한 신과 맞지 않는다는 논증이다.
41.2 at는 M과 R의 au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41.3-4 아담의 범죄를 막지 않은 창조주는 무지하거나 무능하거나 악의적이라는 마르키온의 논증(제2권 5장 이하에서 다룬 것)을 유다를 막지 않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되돌린다. 41.4의 <non>은 Kroymann이 보충했다.
41.6 누가복음 22:33-34.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를 음역한 말로, 출애굽기 20:5와 34:14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옮겼다.
41.7 입맞춤으로 넘겨진 일은 누가복음 22:47-48에 있다. “백성이 입술로 사랑하던 이”는 이사야 29:13(“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을 가리킨다.
41.8 누가복음 22:66-67. consessum은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킨다. Junius는 Perductus 대신 productus를 제안했고, Oehler는 quaesissent 대신 quaesisset를 추정했다.
41.9 alium은 41.8의 “자기들의 그리스도”와 대비되는 다른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다른 그리스도”로 옮겼다. 41.12의 alium se도 같은 뜻으로 옮겼다.
41.10 누가복음 22:67.
41.11 <se>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자신을>”으로 옮겼다. alterius dei는 ‘다른 신에게 속한 자’라는 소속의 속격으로 옮겼다.
41.14 누가복음 22:69. uirtus dei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옮겼다.
41.15 “인자”는 다니엘 7:13(개역개정 “인자 같은 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이”는 시편 110:1을 가리킨다. <de>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에 나오는>”으로 옮겼다.
41.17-19 누가복음 22:70과 시편 110:1(개역개정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41.19의 작은따옴표 부분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개역개정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은 uos dicitis뿐이어서 마르키온파는 이 대답을 부인으로 읽었다.
41.21-23 <et>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역시>”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공회원들의 말 ergo tu dei filius es를 의문문이 아니라 평서문으로 읽을 수 있다고 보고, 그렇다면 예수의 “너희가 말한다”도 그 평서문을 확인하는 대답이 된다고 논증한다.
41.24 “그 말이 풍기던 뜻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공회가 더 이상 증언이 필요 없다고 결론지은 누가복음 22:71을 가리킨다. confirmatiue는 “단언하는 뜻으로”로 옮겼다.
- 42 본문으로
42.1 누가복음 23:2. 개역개정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앞 공회 심문 장면의 누가복음 22:69-70을 묶은 표현으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왕 그리스도’라는 고발을 이 고백과 같은 내용으로 본다.
42.2 <않>: Kroymann은 R3의 nisi를 따르고, M과 R1은 si로 읽는다. ‘너희가 말한다’는 누가복음 22:70(개역개정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이며, sic를 41.24의 sic에 대한 Engelbrecht의 설명대로 긍정의 어조(confirmatiue)로 보고 ‘자기가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라고 옮겼다.
42.3 누가복음 23:3. 개역개정에서 빌라도의 물음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네가 그리스도냐?”로 인용한다. <대답했다>는 Kroymann이 보충한 respondit이다. potestas는 여기서 빌라도의 권한을 가리키므로 ‘권력’으로 옮겼다.
42.3 이사야 3:13-14를 칠십인역 형태로 따르되 미래 시제를 과거로 바꾸어 그리스도의 재판에 적용한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이다.
42.4 archontes는 칠십인역의 그리스어 ἄρχοντες를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대로 쓴 말이며, 42.5-6에서도 같은 낱말을 ‘관원들’로 옮겼다.
42.5 시편 2:1-2. 개역개정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의문사 대신 ibidem(‘그곳에서’)을 넣어 시편을 빌라도 앞의 장면에 바로 적용한다.
42.6 같은 시편을 헤롯, 빌라도, 이방인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하는 해석은 사도행전 4:25-27에 있다.
42.7 누가복음 23:7-11.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일을 ‘선물’로 보는 것은 다음 단위의 호세아 인용과 연결된다.
42.8 호세아 10:6(칠십인역). xenium은 그리스어 ξένια, 곧 손님이나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개역개정은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져서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로, 묶여 가는 대상이 우상 송아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그를’을 그리스도로 읽는다.
42.9 누가복음 23:8-9.
42.10 이사야 53:7, 이사야 50:4, 시편 22:15(불가타 21:16). lingua disciplinae는 칠십인역 γλῶσσαν παιδείας에 해당하여 ‘가르침의 혀’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학자들의 혀”이다. ‘언제’는 Kroymann이 칠십인역의 ἡνίκα에 맞추어 M과 R의 quomodo(‘어떻게’)를 quando로 고친 읽기를 따른 것이다. tondentem도 M과 R의 tondent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이다. 시편 22:15 개역개정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이다.
42.11 누가복음 23:18-25.
42.12 누가복음 23:32-33; 이사야 53:12; 누가복음 22:37(개역개정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42.13 누가복음 23:34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를 마르키온이 자기 복음서에서 뺐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전한다. <일부는>은 Latinius가 보충한 partim이며, sorti는 M과 R의 sort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이다.
42.14 시편 22:18(불가타 21:19). 개역개정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이다. 라틴어는 uestimenta와 uestitum으로 겉옷과 속옷을 구별하지 않아 ‘옷들’과 ‘의복’으로 옮겼다.
42.15 crucem ipsa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tamen ipsam이다. de ea는 M과 R의 de eo를 고친 Engelbrecht의 읽기로, ‘그것’은 십자가를 가리킨다.
42.16 시편 22:16 후반(개역개정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exitus는 생의 끝, 곧 죽음을 뜻하여 ‘최후’로 옮겼다.
42.17 시편 22:16 전반, 22:7. synagoga maleficorum은 개역개정의 “악한 무리”에 해당한다. synagoga는 ‘회당’을 뜻하는 낱말이기도 하여 유대인 회중을 떠올리게 하지만, 시편 본문의 뜻을 따라 ‘무리’로 옮겼다. naso inridebant는 ‘코로 비웃었다’는 뜻이어서 ‘코웃음 치며’로 옮겼다.
42.18 시편 22:7-8. 개역개정 22:8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이다.
42.19 군인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어 가진 일에 빗대어, 마르키온이 옷 구절을 지운 것을 ‘위조로 얻은 전리품’이라 부른다. 시편 22편 전체가 수난을 예언하므로 옷 구절 하나를 지워도 증언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지이다.
42.20 누가복음 23:44-45. elementa는 하늘, 해, 낮처럼 세계를 이루는 요소를 가리킨다. ‘적대자’는 창조주의 적대자로 상정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이다. 원소들이 창조주의 것이므로, 고난받는 이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면 원소들이 함께 흔들리고 창조주의 적대자라면 기뻐했으리라는 논증이다.
42.21 argumentata는 M의 읽기이고, R은 argumenta이다.
42.22 이사야 50:3(개역개정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42.23 아모스 8:9; 누가복음 23:44. 개역개정 아모스 8:9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이다. 정오는 유대식 시간으로 제육시이다. contenebrabit는 M과 R의 contenebrauit를 고친 Pamelius의 읽기이며, Kroymann은 super terram 뒤에 ‘대낮에’에 해당하는 말이 빠졌을 가능성을 적어 두었다.
42.24 누가복음 23:45; 이사야 1:8(개역개정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성전을 지키던 천사가 떠났다는 생각과 비슷하게,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 6.299-300에서 성전 파괴 전에 제사장들이 “우리가 여기서 떠나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42.25 시편 31:5(칠십인역과 불가타 30:6)와 누가복음 23:46. 라틴어 시편 번호 tricesimus psalmus를 그대로 ‘시편 30편’으로 옮겼으며 개역개정으로는 31편이다. Christu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과 R은 Christum이다. ipsum reddere는 ‘그 말 자체를 되풀이하다’로 보고 옮겼다. Engelbrecht는 42.26의 결락을 인정하지 않고 <Dauid>를 넣고 ipsum을 spiritum으로 고쳐 ‘다윗이 시편 30편에서까지 그리스도가 영을 내어 주는 것을 얼마나 끝까지 그려 냈던가’로 읽고, uociferatur를 uociferabatur로 고치기를 제안한다.
42.26 Kroymann은 시작 부분에 결락(**)을 표시했다. 뒤따르는 ‘이 말을 하고’로 보아 누가복음 23:46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틴어 in manus tuas commendo spiritum meum)가 빠진 것으로 추정한다. ‘예언자들을 성취하려는’은 마태복음 5:17을 반향한다.
42.26 expirauit는 누가복음 23:46의 고대 라틴어 역본 낱말로 그리스어 ἐξέπνευσεν에 해당하며, 개역개정은 “숨지시니”이다. 42.26-33의 논증은 spiritus가 ‘숨’과 ‘영’을 모두 뜻하고 expirare가 ‘숨을 내쉬다’와 ‘숨지다’를 모두 뜻하는 데 기댄다. 논증을 따라가도록 expirare는 ‘내쉬다’, spiritus는 ‘영’으로 일관되게 옮겼다.
42.30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가 참된 육신 없이 육신의 모습만 지녔다고 보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환영이 영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제하고, 영이 떠나면 환영도 함께 사라졌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42.31 누가복음 23:50-53. sindon은 개역개정의 ‘세마포’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은 무덤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라 하고, ‘새 무덤’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27:60과 요한복음 19:41에 있다.
42.34 누가복음 23:50-51(개역개정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시편 1:1. 라틴어 cathedra pestium은 ‘해로운 자들의 자리’라는 뜻이어서 ‘해악을 끼치는 자들의 자리’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이다.
- 43 본문으로
43.1 ‘주를 장사한 사람’(sepultor)은 아리마대 요셉이다(누가복음 23:50-53). ‘마땅히 복되다고 일컬어져야 했다’는 앞 장 끝에서 요셉에게 적용한 시편 1: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누가복음 23:51 참조)을 가리킨다. 여인들의 일은 누가복음 23:55-24:1이다.
43.2-43.3 호세아 5:15-6:2를 칠십인역에 가까운 라틴어로 인용한다. ‘동트기 전에 나를 향해 깨어 일어나’(ante lucem uigilabunt ad me)는 칠십인역 ὀρθριοῦσι(새벽에 일어나다)를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 5:15의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와 다르다. ‘그가 빼앗아 갔으나’(eripuit)는 칠십인역 ἥρπακεν, 개역개정 6:1의 ‘찢으셨으나’에 해당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miserebitur)는 개역개정의 ‘싸매어 주실 것’과 다르다. ‘셋째 날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resurgemus)는 개역개정 6:2의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에 해당한다.
43.3 [dixit](‘그가 말했다’)는 R(Rhenanus 판)이 삭제한 낱말이다.
43.4 restitutuiri는 Engelbrecht의 추정으로 restitutum iri(회복되리라)를 뜻하며, M과 R은 restitui rite이다. arbitrabantur는 M과 R의 arbitrantur를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destitutio는 주를 잃은 상태를 가리키므로 ‘상실’로 옮겼다.
43.5 ‘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는 누가복음 24:3을 가리킨다. ‘그의 무덤이 그 가운데서 치워졌다’는 칠십인역 이사야 57:2(ἡ ταφὴ αὐτοῦ ... ἦρται ἐκ τοῦ μέσου)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 57:2(‘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와 문구가 다르다.
43.6 누가복음 24:4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 하고 24:23에서 이들을 천사로 부른다. ‘두 증인’은 신명기 19:15(‘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를 가리킨다. laterenses는 곁에서 수행하는 호위자들을 뜻하므로 ‘수행원’으로 옮겼다.
43.7-43.8 이사야 27:11 칠십인역(γυναῖκες ἐρχόμεναι ἀπὸ θέας, δεῦτε, ‘구경거리에서 오는 여인들아, 오라’)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27:11(‘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은 내용이 다르다. 첫 번째 [uenite](‘오라’)는 Pamelius가 삭제한 반복어이다. 여인들이 소식을 전하는 장면은 누가복음 24:9이다.
43.10-43.1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누가복음 24:13-33)이다. 43.11은 누가복음 24:21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putabamus(‘우리는 생각했다’)는 개역개정의 ‘바랐노라’(ἠλπίζομεν)와 다르다. redemptor Israhelis는 개역개정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에 해당하며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옮겼다.
43.12 existimabatur는 Latinius의 수정이며 M과 R 및 다른 판들은 existimatur이다. 과거 시점의 서술이므로 수정된 읽기를 따랐다.
43.15 누가복음 24:25이다. 개역개정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지만, 따옴표로 표시된 ‘그가 너희에게 말한’(quae locutus est ad uos)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예언자들을 빼고 바꾼 문구다. Epiphanius(Panarion 42)도 마르키온 본문이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으로 읽었다고 전한다. 이어지는 ‘그가 무엇을 말했다는 것인가?’는 이 바뀐 문구를 받아 묻는 말이다.
43.15-43.16 quaenam locutus? alterius se dei esse? proba, et manus dedo. an eadem은 Kroymann의 추정 본문이다. M과 R1은 se dei esse probat et manus de deo. an eadem, R3와 통행본은 quae locutus <non> alterius se dei esse probat, sed eiusdem dei. nam eadem(‘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다른 신의 것임을 증명하지 않고 같은 신의 것임을 증명한다. 천사들도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이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고, manus dare(손을 내주다)는 항복을 뜻하므로 ‘손을 들겠다’로 옮겼다. an은 Kroymann의 설명대로 ‘아니면 ... 이 아닌가?’로 옮겼다.
43.17 누가복음 24:6-7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개역개정의 ‘죄인의 손에’가 없다.
43.20 사본 M에는 itaque부터 다음 existimauerant까지가 빠져 있고, credi se eum은 R3의 읽기다(R1은 credidisse eum). 문장 구조가 매끄럽지 않아 ‘그들이 여겼던 것이 믿어지기를, 곧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믿어지기를’로 두 요소를 함께 살려 옮겼다.
43.21 누가복음 24:37은 개역개정에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πνεῦμα)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phantasma(환영)로 읽는다. 베자 사본(D)도 이 자리에서 φάντασμα로 읽는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의 몸을 환영으로 본 데 맞서는 대목이므로 phantasma는 ‘환영’으로 통일했다.
43.22 <inquit>(‘그가 말한다’)는 Pamelius가 보충한 말이다. 인용은 누가복음 24:38이며, 개역개정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와 문구가 조금 다르다.
43.23 누가복음 24:39이다. 인용에는 개역개정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의 ‘살’이 없다. sicut me habentem uidetis는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로도, 마르키온의 해석처럼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 없는 영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로도 읽힐 수 있다. 43.26-43.27의 논증이 이 중의성에 달려 있으므로 ‘가지고 있는’의 목적어를 밝히지 않고 옮겼다.
43.24 Kroymann은 illa ... industria를 ‘바로 그런 술책으로’라는 탈격구로 읽고 credo를 삽입구로 끊는다. 통행본은 illa, credo industria로 끊어 illa를 지우지 않은 대목들의 목적어로 읽는다.
43.25 Engelbrecht는 parcit 대신 완료형 parsit를 의심했다. non minus는 subuertit와 이어 ‘지우는 것 못지않게 ... 뒤엎는다’로 옮겼다.
43.26 quasi는 M과 R에서 조금 앞 dictum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Kroymann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sicut me uidetis habentem을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 없는 영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으로 이해한다.
43.28-43.29 누가복음 24:40과 24:39이다. ‘그리고 내가 그인 줄 알라’(et scitote, quia ego sum)는 그리스어 24:39의 ὅτι ἐγώ εἰμι αὐτός(개역개정 ‘나인 줄 알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서는 ‘알라’(scitote)가 독립된 명령이지만, 그리스어 본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고 ὅτι절이 ‘보라’(ἴδετε)에 이어진다.
43.31 누가복음 24:41-43이다.
43.32 ‘약속’(sponsio)은 4권 앞부분(6장)에서 마르키온 자신의 복음서로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그리스도임을 보이겠다고 한 계획을 가리킨다. prophetarum은 이어지는 가르침, 견해, 감정, 생각, 능력, 수난을 모두 꾸미는 속격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이 예언자들이 미리 말한 것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사도 파송은 누가복음 24:47이고,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는 시편 19:4(칠십인역 18:5)이며, 개역개정은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