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본문으로
앞선 제1신학강론(제27강론)의 준비 논의를 받아 신학 자체의 논의에 들어간다. 밭을 갈아엎고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지 않는 비유는 예레미야 4:3과 연결된다. 땅을 고르게 하는 표현은 이사야 28:25를 활용한다.
마지막의 ‘하나로 나뉘고 구별되면서 결합한다’는 표현은 μία θεότης(하나의 신성)와 성부·성자·성령의 구별을 함께 말한다.
- 2 본문으로
모세의 산에 올라가는 장면은 출애굽기 19장과 24:1-2를 바탕으로 한다. 아론, 나답과 아비후, 장로들, 산 아래의 백성을 정결과 관조의 정도에 따라 배치한다.
표범은 예레미야 13:23, 울부짖는 사자는 베드로전서 5:8, 진주를 밟는 돼지는 마태복음 7:6, 작은 포도원을 해치는 여우는 아가 2:15의 표현을 활용한다. 아라비아 늑대는 그리스어 하박국 1:8의 표현이다.
양면에 새긴 돌판은 출애굽기 32:15와 연결된다. 드러난 뜻과 감추어진 뜻을 산 아래와 산 위의 청중에 대응시킨다.
- 3 본문으로
하나님의 뒷모습과 보호하는 바위는 출애굽기 33:22-23을 바탕으로 한다. 그레고리오스는 바위를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 읽고, 뒷모습을 피조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엄에 연결한다.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되는 모세는 출애굽기 7:1, 셋째 하늘과 말할 수 없는 말은 고린도후서 12:2-4를 활용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거리를 인간과 천사 사이의 거리보다 크게 설명한다.
- 4 본문으로
‘그리스인들 가운데 한 신학자’의 말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28c와 연결된다(Mason 27쪽). 그레고리오스는 표현의 어려움보다 생각으로 파악하는 어려움을 더 크게 제시한다.
νοῆσαι는 생각으로 파악함, φράσαι는 말로 표현함으로 옮겼다. 몸을 지닌 인간에서 더 높은 지성적 존재들로 논의의 범위를 넓힌다.
- 5 본문으로
하나님의 평화는 빌립보서 4:7, 눈과 귀와 마음에 이르지 못한 약속은 고린도전서 2:9, 하늘과 달과 별은 시편 8:3의 표현과 연결된다. 성경의 말은 강론에 실린 그리스어 형태를 따른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이 무엇이신지를 구별한다. 본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믿음과 선포의 무의미함에 연결하려는 상대의 반론에 답한다.
- 6 본문으로
키타라는 줄을 뜯어 연주하는 악기이다. 제작과 조율과 연주를 통해 장인과 연주자를 추론하듯, 창조의 질서에서 창조주를 추론하는 비유이다.
‘생각의 입을 벌려 성령을 들이마신다’는 시편 119:131,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살피신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2:10과 연결된다.
- 7 본문으로
몸, 요소들의 합성, 다툼, 분리, 해체의 순서로 논박한 뒤 그 순서를 거꾸로 밟는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본성’과 몸의 해체 가능성을 비교하는 논의이다.
- 8 본문으로
하늘과 땅을 채우신다는 말씀은 예레미야 23:24, 주님의 영이 온 세계를 채웠다는 말씀은 지혜서 1:7과 연결된다. 몸을 가진 신을 가정할 때 생기는 공간적 모순을 묻는다.
‘다섯째 요소’는 천체의 원운동을 설명하는 당시의 우주론을 가리킨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는 원인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이 이어진다.
- 9 본문으로
ἀσώματον(몸이 없음), ἀγέννητον(나지 않음), ἄναρχον(시작이 없음) 등은 무엇이 아닌지를 밝히는 성질들이다. 이 대목의 ὑπόστασις는 본성과 함께 존재의 바탕을 가리키므로 ‘존재 자체’로 옮겼다.
다섯의 두 배라는 예는 수를 차례로 부정하는 일과 열이라는 답을 주는 일을 비교한다. 두 배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피하는 상황이다.
- 10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어디에도 계시지 않거나, 우주 안에 계시거나, 우주 위에 계신다는 가정을 차례로 시험한다. 위치와 경계의 언어로 신성을 온전히 담으려 할 때의 어려움을 묻는다.
‘작고 크다’는 담기는 것과 담는 것의 비교를 가리킨다(Mason 37쪽). 마지막에는 생각으로 파악하는 일에도 경계를 정하는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 11 본문으로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은 마태복음 7:20과 연결된다. 매듭을 풀어내는 다니엘의 능력은 다니엘 5:12와 5:16의 표현을 활용한다.
Λόγος는 여기서 말씀을, λογικά는 이성적 존재들을 가리킨다. 피조물의 존재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시기나 명예욕에 연결하는 생각에 답한다.
- 12 본문으로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은 로마서 11:33, 심연의 자취는 그리스어 욥기 38:16, 떨어진 새벽별은 이사야 14:12, 주님 앞에서 목을 곧게 세움은 욥기 15:25의 표현을 잇는다.
이집트인들과 히브리인들 사이의 구름은 출애굽기 14:19-20, 어둠을 숨는 곳으로 삼으심은 시편 18:11과 연결된다. 육체의 무거움을 하나님을 파악하는 일의 제한에 비긴다.
- 13 본문으로
πνεῦμα는 영과 바람, λόγος는 말씀과 말을 가리킬 수 있다. 신적인 이름들을 이해할 때 인간이 익숙한 움직임과 물질과 마음의 상태를 함께 떠올리는 문제를 다룬다.
‘두 번째 항해’는 처음 길로 목적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른 길을 택하는 비유이다. 보이는 것을 신으로 만들거나, 그 아름다움과 질서를 안내자로 삼는 두 길을 제시한다.
- 14 본문으로
천체와 요소들의 숭배에서 형상과 조각상의 숭배로 설명을 이어 간다. 죽은 가족을 기리고 관습이 법처럼 굳어지는 묘사는 지혜서 14:15-16의 설명과 연결된다.
- 15 본문으로
신화와 숭배에 관한 평가는 그레고리오스의 논박 언어이다. 신들을 땅 밑에 감추는 것이 유일하게 현명했다는 말은 풍자이며, 짐승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부여하는 대목은 로마서 1:23과 연결된다.
다이몬(δαίμων)은 이 목록에서 신들과 함께 불리는 초인간적 존재의 이름이다. 뒤의 ‘악한 자’는 하나님을 찾는 갈망을 빼앗는 존재로 설명된다.
- 16 본문으로
이 대목의 λόγος는 자연의 질서로부터 추론하는 이성이다. 사물들을 처음 있게 하는 일, 질서를 정하는 일, 그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구별하여 질문한다.
- 17 본문으로
‘알려진 만큼 알게 된다’는 고린도전서 13:12와 연결된다. 지성과 형상과 원형의 언어로 장차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 소망을 설명한다.
현재의 지식은 큰 빛에서 나오는 작은 광채에 비긴다. 어떤 사람이 완전해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받은 비춤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18 본문으로
에노스의 ‘소망했다’는 그리스어 창세기 4:26의 ἤλπισεν을 따른다. 에녹은 창세기 5:24, 노아는 6:9 및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의 믿음은 15:6, 손님 대접은 18:8과 연결된다.
아브라함의 제사는 창세기 22장의 제사이며, ‘큰 제사’와의 대응으로 설명한다. 야곱의 사다리와 돌기둥은 창세기 28장, 씨름과 이름의 변화는 32장의 이야기이다. Εἶδος Θεοῦ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옮겼다.
- 19 본문으로
엘리야의 미풍은 열왕기상 19:11-12, 불수레는 열왕기하 2:11, 마노아의 두려움은 사사기 13:22, 베드로의 요청은 누가복음 5:8과 연결된다. 본문은 마노아에게 ‘사사’라는 호칭을 붙인다.
이사야 6장과 에스겔 1장의 환상을 함께 열거한다. 강론은 보좌 위의 궁창을 말하며, 에스겔 1:26은 궁창 위의 보좌를 말한다.
주님의 존재와 본질에 선다는 표현은 그리스어 예레미야 23:18의 ὑποστήματι와 οὐσίᾳ를 활용한다. 그레고리오스는 이를 본성을 파악하는 문맥에 놓는다.
- 20 본문으로
셋째 하늘은 고린도후서 12:2-4, 부분적 앎과 예언은 고린도전서 13:9, 거울과 수수께끼는 13:12와 연결된다. ‘지식에 무지하지 않다’는 고린도후서 11:6, 그리스도의 증거는 13:3의 표현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요한복음 16:12, 세계가 담을 수 없다는 말은 21:25와 연결된다. Mason은 ‘말씀의 선구자’라는 호칭에 세례 요한과 복음서 저자의 지칭이 겹쳐 있다고 설명한다(52쪽).
- 21 본문으로
솔로몬의 지혜는 열왕기상 3:12와 4:29-31, 끝없이 탐구하는 지혜는 전도서 7:23-24와 연결된다. 바울의 풍요와 깊이는 로마서 11:33의 탄성이다.
큰 심연은 시편 36:6, 너무 높은 지식은 시편 139:6을 활용한다. 하나님을 파악하려는 어려움에서 인간 자신을 이해하는 어려움으로 논의를 잇는다.
- 22 본문으로
몸과 영혼의 결합, 출생, 영양, 감각, 기억과 욕구를 차례로 묻는다. 개체가 사라져도 출생으로 종이 이어지는 모습을, 흐르면서도 같은 자리에 있는 강에 비긴다.
μνήμη는 기억, ἀνάμνησις는 회상으로 구별했다. 인간을 μικρὸς κόσμος(작은 세계)라고 부르며 이 장을 마친다.
- 23 본문으로
동물의 다양함을 질문의 연쇄로 열거한다. ἀμφίβια는 물과 땅 양쪽에서 사는 것들, φιλόκαλα는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들로 옮겼다.
- 24 본문으로
물속 생물의 ‘자기에게 맞는 공기’는 물을 자기의 호흡 환경으로 설명하는 표현이다(Mason 58쪽). 매미의 소리를 줄악기의 줄받침에, 백조의 소리를 노래에 비긴다.
여성들의 직조 지혜는 그리스어 욥기 38:36의 표현이다. 공작의 메디아라는 수식어와 새들의 행동 묘사는 강론에 실린 고대의 자연 설명을 따른다.
- 25 본문으로
벌집의 육각형 구조와 거미줄의 짜임을 기하학과 예술의 솜씨에 견준다. 에우클레이데스는 기하학자이며, 페이디아스·제욱시스·폴뤼그노토스·파라시오스·아글라오폰은 조각과 회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이다.
팔라메데스는 학들의 대형을 본뜨는 군사적 솜씨의 비유에 등장한다. 다이달로스가 신부를 위해 만든 무도장은 『일리아스』 18.592 이하와 연결된다(Mason 60쪽). 크노소스와 미궁은 크레타의 신화적 공간이다.
- 26 본문으로
식물의 잎과 열매, 향기, 보석, 땅의 지형과 물을 차례로 살핀다. 온천의 열을 지하수와 공기의 압력 및 충돌로 설명하는 것은 이 강론의 자연 설명이다.
땅을 떠받치는 것을 거슬러 묻는 질문은 앞선 운동의 원인에 관한 질문과 대응한다. 지형의 다양함은 쓰임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점으로 설명한다.
- 27 본문으로
바다의 모래 경계는 예레미야 5:22, 바다에 들어가는 강들은 전도서 1:7, 수면의 둘레를 정하신 명령은 그리스어 욥기 26:10과 연결된다.
χερσαῖος ναυτίλος는 땅에 사는 뱃사람, 곧 사람을 가리킨다. 작은 배와 바람으로 땅과 바다가 교류하는 상황을 설명한다. 물이 뿌리로 마신다는 말은 샘의 지하 공급을 식물에 비긴 표현이다.
- 28 본문으로
만나의 분량은 출애굽기 16:18, 눈의 곳간과 이슬과 얼음은 욥기 38:22 및 38:28-29, 구름 안의 물은 욥기 26:8과 연결된다. 노아의 언약은 창세기 9장, 엘리야의 비는 열왕기상 18장의 이야기이다.
수증기, 공기의 응축, 구름의 압축과 파열은 당시의 기상 설명을 열거한 것이다. 가까운 자연에서도 인간의 이해가 제한된다는 점을 하늘에 관한 논의에 연결한다.
- 29 본문으로
천체의 궤도와 운동을 관찰하는 지식과 그 질서의 근원을 아는 일을 구별한다. 신랑과 거인의 비유, 하늘 끝까지 미치는 열기는 시편 19:5-6을 활용한다.
- 30 본문으로
감각 세계의 해와 지성 세계의 하나님을 비교한 말은 플라톤의 『국가』 6권 508c와 연결된다(Mason 68쪽). ‘불균등함의 균등함’은 낮과 밤의 길이가 바뀌면서 한 해의 전체에서는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가리킨다.
플레이아데스와 오리온은 욥기 38:31, 별들의 이름은 시편 147:4, 별들의 서로 다른 영광은 고린도전서 15:41과 연결된다.
- 31 본문으로
모세의 장막을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으로 보고, 성소의 휘장을 천상의 존재들을 향해 여는 비유로 사용한다. 천사들을 영과 불꽃으로 만드심은 시편 104:4와 히브리서 1:7의 표현이다.
λαμπρότητες와 ἀναβάσεις도 천상 존재들의 열거에 들어 있다. ‘광휘와 상승이라 불리는 이들’로 옮겼다. 첫 빛을 받은 존재들이 다시 다른 이들을 밝힌다는 비유가 이어진다.
마지막의 ‘두 번째 자리’는 하나님 다음의 피조된 천상 존재들을 가리킨다. ‘만물 위’라는 말에도 비교의 여지가 있어, 처음부터 계시며 홀로 계신 하나님의 본성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