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본문으로
암필로키오스에게 보내는 서두이다. 화자는 상대의 질문을 배움과 진리 탐구의 태도로 받아들이며, 논쟁을 걸기 위한 질문과 구별한다.
‘구하는 이는 받으며 찾는 이는 발견한다’는 누가복음 11:10과 마태복음 7:8에 연결되는 인용이다.
- 1.2 본문으로
첫 인용은 그리스어 잠언 17:28의 ‘지혜를 묻는 어리석은 이’라는 표현이다. ‘분별 있는 청중’과 ‘놀라운 조언자’는 그리스어 이사야 3:3의 두 표현을 연결한다.
συλλαβή는 ‘음절’로 옮겼다. 바실리오스는 짧은 낱말과 전치사의 쓰임을 논의하면서 문법적 단위의 의미를 넓게 다룬다.
이오타와 획은 마태복음 5:18, 겨자씨는 마가복음 4:31과 연결된다. ‘시편의 표현을 빌리면’ 뒤의 ἀδολεσχία는 그리스어 시편 118:85(히브리어 본문 체계 119:85)의 어휘이다.
‘예’와 ‘아니오’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ναί와 οὔ는 각각 한 음절이다. ‘두 음절’은 이 두 그리스어 낱말의 길이를 설명한다.
- 1.3 본문으로
송영의 두 형태를 나란히 제시한다. μετά와 σύν은 모두 ‘함께’, διά는 ‘통하여’, ἐν은 ‘안에서’로 옮겨 이후 전치사 논쟁과 연결했다.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드린 송영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아들과 함께, 성령과 함께’와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의 두 표현에 대한 이의 제기가 집필의 직접 계기로 제시된다.
- 2.4 본문으로
아에티오스에게 귀속한 논증을 인용하고, 그 논증이 전치사의 차이를 본성의 차이로 연결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인용 속 ‘아들은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는 상대방의 결론이다.
ἐξ οὗ는 ‘그분에게서’, δι’ οὗ는 ‘그분을 통하여’, ἐν ᾧ는 ‘그분 안에서’로 옮겼다. 고린도전서 8:6을 논쟁의 근거로 제시하는 화자의 인용 형태를 유지했다.
마지막의 ‘만물의 창조자’는 이 논쟁에서 아들을 가리킨다. 바로 앞에서 아들을 도구에 배정하는 주장의 결과를 바실리오스가 비판한다.
- 3.5 본문으로
원인을 말하는 여러 전치사 표현을 의자를 만드는 사례에 적용한다. 바실리오스는 이런 구별을 신적 관계에 그대로 옮기는 논증을 비판한다.
διά 뒤에 속격이 오는 δι’ οὗ는 수단을 나타내는 ‘그것을 통하여’, 대격이 오는 δι’ ὃ는 목적을 나타내는 ‘그것을 위하여’로 옮겼다. 형태가 비슷한 두 표현의 격과 뜻을 구별했다.
προκαταρκτικά는 먼저 작용하는 원인, συνεργά와 συναίτια는 함께 작용하는 원인, ὧν οὐκ ἄνευ는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가리킨다.
βάθρον은 여기서 목수가 나무와 도구를 사용하여 만드는 ‘의자’로 옮겼다. 말씀을 톱이나 망치 같은 도구로 낮추는 결과를 마지막 문장에서 풍자한다.
- 4.6 본문으로
‘그분에게서’(ἐξ οὗ)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근원을 나타낸다. 재료를 말하는 인용에서는 같은 전치사를 ‘나무로’, ‘금으로’, ‘흙에서’로 옮겼다.
‘진리의 말씀’은 여기서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 인용은 고린도전서 8:6, 11:12, 출애굽기 25장, 고린도전서 15:47, 욥기 33:6, 고린도전서 1:30과 연결된다.
마지막의 원인·도구·장소 구별은 바실리오스가 상대방의 논증을 재구성한 말이다. 아들과 성령의 본성이 성부와 다르다는 결론까지 인용 범위에 포함된다.
- 5.7 본문으로
ὑπόστασις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를 각각 구별하여 말하는 ‘위격’으로 옮겼다. 본성을 뜻하는 φύσις와 구별된다.
바실리오스는 로마서 11:36의 ‘그분’을 아들에게 적용한다. 이사야 40:12-13의 창조 묘사와 요한복음 5:20을 연결하여 그 해석을 설명한다.
σπιθαμή는 펼친 손의 엄지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인 ‘한 뼘’이다. δρακί는 한 움큼 쥔 손을 나타낸다.
끝의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144:15-16과 103:27(한국어 성경 시편 145:15-16과 104:27)에 해당한다. ‘보존에 필요한 것’은 만물을 지탱하는 문맥에서 σωτηρία를 옮긴 표현이다.
- 5.8 본문으로
앞 절의 로마서 11:36을 성자에게 적용하든 성부에게 적용하든, ‘그분에게서’와 ‘그분을 통하여’가 같은 분에게 쓰인다는 논증이다.
πρόσωπον은 이 문맥에서 같은 한 분을 가리키며, 앞 절의 ὑπόστασις와 함께 ‘위격’으로 옮겼다.
- 5.9 본문으로
‘그분에게서’가 성자에게 쓰인 예로 에베소서 4:15-16, 골로새서 2:19, 요한복음 1:16과 16:15, 누가복음 8:46을 든다. 성령에 관한 예는 갈라디아서 6:8, 요한일서 3:24, 마태복음 1:20, 요한복음 3:6이다.
골로새서 인용의 ὁ κρατῶν은 ‘붙드는 이’라는 긍정형이다. 인쇄본에 실린 인용 형태를 본문에 옮겼다.
- 5.10 본문으로
διά에 속격이 이어지는 ‘통하여’라는 표현을 성부와 성령에 관한 구절에서도 확인한다. 성부에 관한 인용은 고린도전서 1:9, 고린도후서 1:1, 갈라디아서 4:7, 로마서 6:4, 이사야 29:15이다.
성령에 관한 인용은 고린도전서 2:10, 디모데후서 1:14, 고린도전서 12:8이다. ‘선한 맡김’(καλὴ παραθήκη)은 디모데가 보존하도록 맡겨 받은 가르침을 가리킨다.
- 5.11 본문으로
ἐν은 앞에서 상대방이 성령에게만 배정했던 ‘안에서’라는 전치사다. 그리스어 형태의 공통점이 드러나도록 인용문에도 이 표현을 유지했다.
οὐσία는 ‘본질’, φύσις는 ‘본성’으로 옮겼다. 마지막 문장은 상대방의 전제인 ‘표현의 차이에서 본성의 차이를 추론한다’를 뒤집어, 공통 표현에서 같은 본질을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구약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107:14, 70:6, 88:17(한국어 성경 108:13, 71:6, 89:16)이다. 바울서신 인용은 에베소서 3:9, 데살로니가후서 1:1, 로마서 1:10, 2:17이다.
- 5.12 본문으로
창세기 4:1의 인용을 여기서는 아담의 말로 제시한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하와의 말이다. Johnston의 주석도 이 차이를 지적한다. 인용 주체는 바실리오스 본문의 아담으로 옮겼다.
본문의 다른 인용은 민수기 36:5, 창세기 40:8, 갈라디아서 4:4, 고린도전서 11:12에 해당한다.
θεοφόρος σάρξ는 ‘하나님을 품은 육신’, ἀνθρώπειον φύραμα는 ‘인간의 바탕’으로 옮겼다. φύραμα는 본래 반죽 덩어리를 뜻하며, 이 문맥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인간과 본성을 공유함을 나타낸다.
여자를 ‘통하여’ 태어났다는 표현에는 여자를 통과했다는 뜻이 끼어들 수 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어머니와 태어난 이가 같은 본성을 지녔음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설명이다.
- 6.13 본문으로
μετά 뒤에 속격이 오면 ‘함께’, 대격이 오면 ‘뒤에’라는 뜻이 된다. 상대방은 이 격의 차이를 성부와 성자의 위계에 적용한다.
συντεταγμένον과 ὑποτεταγμένον은 각각 ‘함께 배열됨’과 ‘아래에 종속됨’, συναριθμούμενον과 ὑπαριθμούμενον은 ‘함께 셈’과 ‘아래에 셈’의 대조이다.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할 때 너희는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 5:11의 인용이다. 모욕하는 이들이 입는 해를 슬퍼하면서도 박해받는 이에게 주어진 복을 떠올린다.
- 6.14 본문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전제하는 관계 명칭이라는 점과, 사건의 앞뒤는 현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 판단한다는 점을 차례로 논한다. 그런 시간적 거리를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신적 생명에 적용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다.
요한복음 1:1의 ἦν(계셨다)과 ἀρχή(태초)가 중심어이다. 사고가 아무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말씀은 이미 계시며, 그 태초보다 앞선 때를 설정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 6.15 본문으로
‘오른편’은 동등한 존귀함, ‘품’은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풀이한다. ‘발판’은 시편 110:1(칠십인역 109:1)에서 원수들이 놓이는 자리이다.
요한복음 1:18의 인용은 Johnston 본문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ὁ Μονογενὴς Θεός)으로 옮겼다. 편집 각주는 ‘아들’이라는 이문도 기록한다.
‘왼편’으로 옮긴 σκαιός에는 서투름이나 불길함의 뜻도 있다. 하나님의 오른편을 신체의 방향으로 해석할 때 따라오는 문제를 짚는 말이다.
성자의 서 계심과 앉아 계심은 사도행전 7:55, 로마서 8:34, 시편 110:1, 히브리서 1:3과 8:1을 통해 논한다. 바룩 3:3의 인용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변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 7.16 본문으로
‘그분과 함께’는 성자의 존귀함을 찬양할 때, ‘그분을 통하여’는 성자를 통해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어울린다고 설명한다.
‘우리 선조들’(οἱ πατέρες ἡμῶν)은 예배의 찬양 표현을 전해 준 앞선 교회 세대를 가리킨다. 바실리오스는 그 전승을 성경에서 제시한 근거와 연결한다.
마지막의 ‘광채와 영광’, ‘형상과 원형’,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전제하는 관계 명칭이다. 앞 장의 히브리서 1:3, 골로새서 1:15에 관한 논증을 이어 간다.
- 8.17 본문으로
성경의 호칭들을 그리스도의 본성을 드러내는 이름과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문’과 ‘길’은 ‘그분을 통하여’라는 표현의 근거가 된다.
εὐμετάδοτον은 ‘기꺼이 나누는 태도’, ἀνεξικακία는 ‘해를 입어도 참음’으로 옮겼다. Johnston은 39-40쪽의 주석에서 이 독법과 ‘변하기 쉬움’을 뜻하는 이문을 구별한다.
이 절은 로마서 1:8, 1:5, 5:2, 요한복음 10:27, 10:9, 빌립보서 2:10-11을 인용한다. 요한복음 10:9의 인용은 이 판본의 문구를 따른다.
- 8.18 본문으로
ἀπαθῶς·πάθει·ἀπάθειαν은 ‘고난을 받지 않음’, ‘고난’, ‘고난에서 벗어남’을 잇는 표현이다. 육신을 통한 죽음과의 싸움, 자신의 고난으로 주는 구원을 한 문장에 담는다.
οἰκονομία는 성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경륜’으로 옮겼다. 본문은 이를 성부의 뜻에 따른 성자의 자발적인 돌봄으로 설명한다.
‘우리에게 달린 선택’은 τὸ ἐφ’ ἡμῖν을 옮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주인께 쓸모 있는 그릇으로 바꾸시는 일에 응답하는 준비를 가리킨다.
로마서 8:37, 마태복음 12:29, 디모데후서 2:21, 골로새서 1:12-13, 요한복음 14:6의 표현을 연결한다.
- 8.19 본문으로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위하여 있다’는 히브리서 2:10의 표현으로 성부에게 적용된다. Johnston 45쪽 주석도 그 지시 대상을 성부로 설명한다. 뒤의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골로새서 1:16을 인용하여 성자에게 적용한다.
ἄναρχος는 이 문맥에서 ‘근원이 없음’으로 옮겼다. 성자에게서 일어나는 위대한 일을 성부에게 돌리는 문장과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는 요한복음 6:57을 연결한다.
‘주님께서 생각하시자’라는 인용은 유딧 9:5-6에 해당한다. 말씀의 창조가 시간적 지연 없이 이루어진다는 논증에 쓰인다.
‘본질’(οὐσία), ‘능력’(δύναμις), ‘활동’(ἐνέργεια)은 마지막 논증의 서로 연결되는 세 용어이다.
- 8.20 본문으로
‘명령’은 성부의 뜻이 성자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풀이하며, 거울에 형상이 비치는 비유를 든다. ἀχρόνως는 그 전달에 시간적 간격이 없음을 나타낸다.
성부가 선생이고 성자가 아직 배우는 학생인 교실의 모습은 상대방의 해석에서 생기는 문제를 드러내는 풍자이다.
요한복음 12:49-50, 14:24, 14:31, 5:20, 16:15와 골로새서 2:3을 인용한다.
- 8.21 본문으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 14:9)를 성부와 성자의 선한 뜻이 같다는 말로 풀이한다.
προκαταρκτικὴ αἰτία는 ‘먼저 작용하는 원인’, ποιητικὸν αἴτιον은 ‘만들어 내는 원인’으로 옮겼다. 마지막 문장은 성부에게 창조의 근원을 돌리면서 성자의 창조 활동을 함께 설명한다.
성자의 순종과 구원에 관한 인용은 빌립보서 2:8, 로마서 8:32, 갈라디아서 3:13, 로마서 5:8이다. 명령하는 말씀은 마태복음 8:3, 마가복음 4:39, 마태복음 5장, 마가복음 9:25에서 가져온다.
- 9.22 본문으로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 ‘곧은 영’, ‘다스리는 영’은 마태복음 12:28, 요한복음 15:26, 시편 51편(칠십인역 50편)의 표현들과 연결된다. 장소를 한정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한 여자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자이다.
νοερὰ οὐσία는 ‘지성을 지닌 실재’로 옮겼다. 이어지는 νοητὸν φῶς는 정신으로 깨닫는 빛을 뜻한다.
햇빛의 비유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온전히 계시면서도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설명한다. 은혜를 누리는 분량은 받는 이의 수용 능력에 맞춰진다.
- 9.23 본문으로
‘보혜사’는 παράκλητος의 전통적인 한국어 번역어이다. 본문은 성령께 가까이 가는 일을 욕정에서 벗어나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분의 형상’은 성자를, ‘원형’은 성부를 가리킨다. 성령 안에서 성자를 보고, 성자를 통해 성부를 아는 순서이다.
θεὸν γενέσθαι는 ‘신이 되는 것’으로 옮겼다. 바로 앞의 ‘하나님 안에 머묾’, ‘하나님을 닮음’과 이어지며, 성령과의 교제로 영혼이 변화하는 문맥에 놓인다. 이 표현은 신화(神化)를 가리키는 용례이다.
- 10.24 본문으로
συντάσσειν은 같은 배열에 함께 놓는다는 뜻으로, 마태복음 28:19의 세례 명령에서 성부·성자·성령을 함께 부르는 일을 가리킨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도행전 5:29의 인용이다. 첫 문장의 ‘지식이라는 거짓 이름’은 디모데전서 6:20의 표현을 사용한다.
- 10.25 본문으로
전쟁·화살·매복은 논쟁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스데반을 향한 돌팔매는 사도행전 7장의 순교 장면을 가리킨다.
채무자와 문서의 비유는 기록된 증거만 요구하며 교회의 전승을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뒤의 26절은 이 논의를 세례 때 받은 신앙고백과 연결한다.
- 10.26 본문으로
‘처음 들어올 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어와 세례와 함께 신앙을 고백한 때를 가리킨다. 고백은 서약 문서인 χειρόγραφον에 비유된다.
‘가르침의 틀’은 로마서 6:17의 τύπος διδαχῆς를 옮긴 표현이다. ‘처음 믿었을 때’와 구원의 거리를 비교하는 문장은 로마서 13:11의 표현을 뒤집어 사용한다.
υἱοθεσία는 ‘자녀로 받아들여짐’으로 옮겼다. 세례의 고백, 살아가는 동안의 신앙, 예배에서의 찬양을 함께 이어 설명한다.
- 11.27 본문으로
παραβάτης는 약속이나 법을 어기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는 세례 때의 신앙고백을 저버린 사람을 ‘배교자’로 부른다.
Πνευματομάχοι는 문자 그대로 ‘성령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다. 본문에서는 성령을 성부·성자와 함께 고백하는 일을 반대한 논쟁 상대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2:3과 요한복음 1:18을 인용한다. 요한복음 인용은 이 판본의 Μονογενὴς Θεός를 따라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옮겼다. 마지막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영’은 로마서 8:15의 표현이다.
- 12.28 본문으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한다. 바실리오스는 이 이름에서 기름 부으시는 성부, 기름부음 받으시는 성자, 기름부음 자체로 표현되는 성령을 함께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2:13을 여기서는 ‘한 몸 안에서 한 성령께로 세례를 받았다’고 인용한다. 성경의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와 순서가 바뀐다. Johnston은 63-64쪽 주석에서 이 차이를 설명하며, 본문에는 바실리오스의 인용 형태를 채택한다.
다른 인용은 갈라디아서 3:27, 로마서 6:3, 사도행전 10:38, 이사야 61:1, 시편 45:7(칠십인역 44:8), 사도행전 1:5, 누가복음 3:16에 해당한다.
‘그리스도께로’, ‘성령께로’는 세례 문구의 εἰς를 드러내어 옮긴 표현이다. 마지막은 신앙고백이 먼저이고 세례가 그 동의에 인장을 찍는다고 설명한다.
- 13.29 본문으로
처음의 반론은 디모데전서 5:21에서 하나님·그리스도·천사를 함께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한다. 바실리오스는 심판의 증인으로 불리는 천사들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구별한다.
디모데후서 2:2의 인용은 여기서 ‘많은 증인들 앞에서’(ἐπὶ πολλῶν μαρτύρων)로 되어 있다. 다른 인용은 누가복음 12:8-9, 데살로니가후서 1:7에 해당한다.
- 13.30 본문으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예는 시편 50:4(칠십인역 49:4), 신명기 4:26과 32:1, 이사야 1:2, 예레미야 2:12-13에서 가져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돌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여호수아 24:27, 야곱의 돌무더기는 창세기 31:47과 연결된다. 바실리오스는 증인으로 부르는 사물과 성령이 하나님과 갖는 본성상의 관계를 비교한다.
- 14.31 본문으로
τύπος는 ‘예표’, σκιά는 ‘그림자’로 옮겼다. 본문은 예표를 앞으로 올 것을 닮은 모습으로 미리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반론의 근거는 고린도전서 10:2와 출애굽기 14:31이다. 아담은 로마서 5:14, 바위와 물은 고린도전서 10:4와 요한복음 7:37, 만나는 요한복음 6장, 장대 위의 뱀은 민수기 21장과 요한복음 3:14에 연결된다.
‘처음 빚어진 사람’(πρωτόπλαστος)은 아담을 뜻한다. 바실리오스는 이집트에서 보호받은 맏아들들과 아담 안에서 죽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일을 연결한다.
바다에서 빠져나옴, 세례 물에서 올라옴, 욕정의 열기를 식히는 구름을 차례로 비교한다. ‘지체를 죽임’은 골로새서 3:5의 표현을 사용한다.
- 14.32 본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대신 바쳐진 양, 요나의 사흘은 창세기 22장과 마태복음 12:40의 예표들이다. 바실리오스는 예표가 작다는 이유로 그 예표가 가리키는 구원까지 작게 여기는 추론을 반박한다.
세례의 효과를 설명하는 부분은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15:49, 고린도후서 4:10, 골로새서 3:9-10의 표현을 모아 사용한다.
- 14.33 본문으로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한 일을 디모데전서 2:5의 중보자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갈라디아서 3:19, 출애굽기 20:19, 요한복음 5:46, 누가복음 16:29를 인용한다.
‘새로 태어남’(παλιγγενεσία)은 디도서 3:5의 표현과 이어지고,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 젊음은 시편 103:5(칠십인역 102:5)를 반영한다. 본문은 구약의 예표들을 진리의 빛에 눈을 익히게 하는 교육에 비유한다.
‘마음의 눈’과 ‘신비 안에 감추어진 지혜’는 에베소서 1:18과 고린도전서 2:7의 표현이다.
- 15.34 본문으로
앞 장의 ‘모세에게로 받은 세례’에 이어 ‘물에 받는 세례’라는 표현을 근거로 한 반론을 소개한다. 바실리오스의 답변은 다음 절에서 죽음과 생명, 물과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 15.35 본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과 세례에서 그 죽음·매장을 본받는 일을 함께 설명한다. 빌립보서 3:10-11, 로마서 6:4-5, 골로새서 2:11-12를 연결한다.
ἄνωθεν에는 ‘위로부터’와 ‘다시’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이어지는 παλιγγενεσία와 두 번째 삶의 설명에 맞춰 ‘새로 태어남’으로 옮겼다.
δίαυλος는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왕복 경주이다. 방향을 바꿀 때의 잠깐 멈춤을 이전 삶과 새 삶 사이의 죽음에 비유한다.
‘세 번 잠김’(τρεῖς καταδύσεις)과 그와 같은 횟수로 이름을 부르는 세례 의식을 묘사한다. 물은 죽음의 모습을, 성령은 생명의 보증을 준다는 설명이다.
베드로전서 3:21의 ἐπερώτημα는 요청 또는 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구함’으로 옮겼다.
- 15.36 본문으로
‘보증’(ἀρραβών)과 ‘첫 열매’(ἀπαρχή)는 지금 받은 성령의 은혜를 장차 누릴 충만함과 연결하는 표현이다.
마태복음 3:11의 물·성령·불 세례를 인용하며, 불은 고린도전서 3:13에 나오는 심판의 시험으로 풀이한다.
‘자기 피로 세례받은 이들’은 신앙 때문에 죽음을 맞은 순교자들을 뜻한다. 본문은 이들의 실제 죽음과 물세례에서 죽음을 본받는 일을 비교한다.
- 16.37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14:24-25와 12:4-6, 11을 연결한다.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에게서 출발하여 보내신 성자, 은혜의 근원이신 성부를 생각하는 순서로 설명한다.
삽비라에게 한 말로 제시한 인용은 사도행전 5:9와 5:4의 표현을 함께 사용한다. 인쇄본의 복수형 ‘너희가 거짓을 말했다’를 그대로 옮겼다.
αὐτεξουσίως는 ‘자신의 권한으로’ 옮겼다. 이어지는 ‘원하시는 대로’라는 인용과 함께 성령의 은사 분배를 설명한다.
- 16.38 본문으로
성부를 먼저 작용하는 원인, 성자를 창조하는 원인, 성령을 완성하는 원인으로 설명한다. 이어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은 하나’라고 말하며 세 분의 활동을 함께 논한다.
시편 33:6(칠십인역 32:6)의 말씀과 입의 영을 요한복음 1:1, 15:26에 연결한다. ‘굳게 세움’은 여기서 거룩하게 하여 선에 확고히 머물게 하는 완성으로 풀이된다.
καυτήρ는 불에 달군 쇠를 뜻한다. 쇠와 불을 구별하듯 천사들의 본질과 성령에게서 받는 거룩함을 구별하는 비유이다.
‘사랑받는 사람’(ἀνὴρ τῶν ἐπιθυμιῶν)은 다니엘 10:11의 다니엘을 가리킨다. 가브리엘의 예언, 스랍의 세 번 찬양, 천상 존재들의 섬김을 성령의 활동과 연결한다.
- 16.39 본문으로
예수의 세례에 관한 첫 인용은 요한복음 1:33과 마태복음 3:17의 문구를 함께 사용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까지 이어지는 판본의 인용 형태를 옮겼다.
제자들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는 장면은 요한복음 20:22-23을 창세기 2:7의 창조와 연결한다. ‘얼굴에’라는 표현도 이 문헌의 본문에 들어 있다.
다른 인용은 사도행전 10:38, 마태복음 4:1과 12:28, 고린도전서 12:28에 해당한다.
- 16.40 본문으로
‘많은 거처’는 요한복음 14:2, 별들의 서로 다른 영광은 고린도전서 15:41-42의 표현이다. 성령의 은혜를 장차 받을 상과 연결한다.
διχοτομία는 ‘둘로 가름’으로 옮겼다. 바실리오스는 마태복음 24:51의 표현을 영혼이 성령과 영원히 멀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의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에 관한 인용은 고린도전서 2:11이다. 앞의 고백과 죽음에 관한 문장은 시편 6:5(칠십인역 6:6)를 사용한다.
- 17.41 본문으로
συναρίθμησις는 ‘함께 셈’, ὑπαρίθμησις는 ‘아래에 두고 셈’으로 옮겼다. 후자는 상대방이 성령에게 낮은 지위를 부여하려고 사용하는 말이다.
οὐσία는 여기서 사물을 분류하는 가장 넓은 이름인 ‘실체’로 등장한다. 동물·인간·남자·개인으로 범위를 좁히는 사례를 통해 분류와 본질의 관계를 논한다.
- 17.42 본문으로
금·납·보석의 가치와 그것을 세는 순서를 비교한다. 오볼로스와 스타테르는 고대 화폐 이름으로, 여기서는 각각 청동화와 금화로 제시된다.
새로운 것만 듣고 말하려는 이들과 스토아·에피쿠로스 학파를 언급하는 부분은 사도행전 17:18-21의 아테네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 17.43 본문으로
세례 명령의 성부·성자·성령이라는 같은 배열을 근거로 한다(마태복음 28:19). 수를 세는 순서와 존재의 본성 사이의 관계가 이 절의 쟁점이다.
바실리오스는 ‘아래에 두고 셈’에 맞추어 ‘아래에 두고 무게를 잼’, ‘아래에 두고 크기를 잼’이라는 말을 만들어 논증을 펼친다. 같은 방식으로 잰다는 사실과 재료의 가치를 구별하는 예이다.
- 18.44 본문으로
성부·성자·성령을 부르는 세례 명령(마태복음 28:19)과 숫자를 붙이는 일을 구별한다. ‘한 분씩 고백한다’는 말은 각 위격의 고유함을 나타낸다.
- 18.45 본문으로
μοναρχία는 통치와 근원이 하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의 통치’로 옮겼다. 각 위격의 고유함과 공통된 본성을 함께 설명한다.
‘형상에 드리는 존경은 원형에 이른다’는 문장은 왕과 왕의 초상을 비유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어 성자는 본성으로 성부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인쇄본의 ἑνιζομένην은 하나를 이룬다는 뜻으로 옮겼다. 디지털 비교본은 형상으로 나타냄을 뜻하는 ἐνεικονιζομένην으로 읽는다.
- 18.46 본문으로
성령의 ‘하나님에게서 나오심’과 성자의 ‘나심’을 구별한다. ‘입의 영’이라는 표현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이해하며, 성령이 존재하시는 방식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성령을 보내신 ‘보혜사’는 성자를 가리킨다. 뒤의 ‘성령이 나오신 분’은 성부를 가리키며, Johnston의 93쪽 주석도 이 지시 대상을 설명한다.
로마서 8:9, 요한복음 16:14와 17:4, 12:28, 말라기 1:6, 마태복음 12:31의 표현을 사용한다.
- 18.47 본문으로
하나님을 아는 길을 성령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이르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함·거룩함·왕적 존귀함은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께 이른다고 말한다.
시편 36:9(칠십인역 35:10)의 빛을 성령의 비추심과 연결한다. 이어지는 참빛은 요한복음 1:9의 표현이다.
마지막은 고린도전서 15:46-47의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을 예로 들어 순서가 존귀함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ψυχικός는 ‘자연적 생명에 속한’, πνευματικός는 ‘영에 속한’으로 옮겼다.
- 19.48 본문으로
‘영’(πνεῦμα)은 숨결도 뜻한다. 애가 4:20의 ‘우리 얼굴의 숨결이신 주 그리스도’를 인용하여, 요한복음 4:24의 하나님과 함께 성자에게도 이 이름을 적용한다.
성령께 붙는 이름을 성부·성자의 이름과 비교한다. 보혜사에 관한 인용은 요한복음 14:16, 신적인 영과 브살렐에 관한 인용은 욥기 33:4와 출애굽기 31:3이다.
- 19.49 본문으로
창조·그리스도의 오심·죄에서의 해방·부활을 성령의 활동으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6:11, 갈라디아서 4:6, 시편 104:30(칠십인역 103:30), 고린도후서 5:17을 인용한다.
이사야 48:16의 τὸ Πνεῦμα는 주어와 목적어 두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성령의 권위를 논하는 문맥에 따라 ‘주님과 그분의 영께서 나를 보내셨다’로 옮겼다. Johnston의 100쪽 주석도 두 해석을 소개한다.
인도하심에 관한 시편 인용은 77:20, 80:1, 78:53(칠십인역 76:21, 79:2, 77:53)에 해당한다. 마지막 보혜사 인용은 요한복음 14:26과 16:13의 문구를 함께 사용한다.
- 19.50 본문으로
성령의 중보를 낮은 지위의 근거로 삼는 반론에, 성자의 중보도 함께 언급하여 답한다(로마서 8:26-27, 34).
성령을 슬프게 하거나 거스른다는 표현은 에베소서 4:30, 사도행전 7:51, 이사야 63:10, 미가 2:7에 연결된다. 마지막은 요한복음 15:15와 고린도전서 2:11을 비교한다.
- 20.51 본문으로
인간 사회의 주인·종·자유인이라는 신분 구분과 피조물이 하나님께 속하는 관계를 비교한다. 그 예로 창세기 47:25, 27:29, 9:25의 이야기를 해석한다.
‘본성에 따라 다스리는 것’은 사람 안의 이성을 뜻하며, 마부와 조타수의 비유로 설명한다.
마지막 인용은 말라기 1:6과 시편 119:91(칠십인역 118:91)이다. 결론에서 피조된 존재와 창조를 초월하는 성령을 구별한다.
- 21.52 본문으로
데살로니가후서 3:5의 인용에는 ‘환난을 견디신’(ὑπὲρ τῶν θλίψεων)이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Johnston은 이를 본문에 싣고 104쪽 주석에서 설명한다. 이어 데살로니가전서 3:12-13을 성부·성자와 구별되는 성령의 호칭에 연결한다.
고린도후서 3:14, 16-18의 ‘주’와 ‘영’을 출애굽기 34:34의 모세와 수건 이야기로 풀이한다. 문자·모형에서 영적 관조·진리로 나아가는 바실리오스의 율법 해석이 이어진다.
마지막 논증은 고린도전서 3:16의 ‘하나님의 성전’과 디모데후서 3:16의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θεόπνευστος)이라는 표현을 성령께 적용한다.
- 22.53 본문으로
요한복음 17:25, 14:19, 14:17을 이어 읽으면서 ‘세상’을 육신의 삶에 매인 사람들로 풀이한다. 제자들의 깨끗함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15:3을 인용한다.
이사야 42:5의 ‘땅을 밟는 이들’을 땅의 것들을 초월하는 사람들로 해석한다. πνοή는 생명의 숨결, πνεῦμα는 성령의 선물에 연결된다.
천사의 장소 제한과 성령의 편재성을 비교하는 문단은 Johnston판에서 22.53에 속한다(108-109쪽). 디지털 비교본은 이를 23장 앞부분에 배치한다. Johnston의 108쪽 주석은 다수 사본이 이 문단을 앞 장에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하박국과 다니엘 이야기는 다니엘서의 그리스어 추가 부분인 「벨과 용」 33-39절에 해당한다. 예레미야 20:2, 에스겔 1:1, 지혜서 1:7, 시편 139:7(칠십인역 138:7), 학개 2:4-5도 인용하거나 암시한다. καταρράκτης는 예레미야가 갇혔던 구금 장치를 가리켜 ‘차꼬’로 옮겼다.
- 23.54 본문으로
‘영광을 돌림’은 성령의 놀라운 속성과 은혜를 하나씩 말하는 일로 설명된다. 성부·성자께 드리는 영광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절은 Johnston판 109쪽의 Ἐγὼ δὲ로 시작한다. 천사와 성령의 편재성을 비교하는 앞 문단은 같은 판본의 22.53에서 읽을 수 있다.
- 24.55 본문으로
사람·이스라엘·천체·직분이 받는 영광을 열거한다. 로마서 2:10과 9:4, 고린도전서 15:41, 고린도후서 3:8-9를 인용한다.
‘나의 영광’은 시편 30:12와 57:8(칠십인역 29:13과 56:9)에 나오는 표현이다. 의인의 영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존중함은 시편 21:5와 15:4(칠십인역 20:6과 14:4)에 연결된다.
성령을 성부·성자와 함께 고백하는 자리로 신앙 고백, 세례, 능력의 행사, 성도 안의 거하심과 그분께 속한 피조물에게 주시는 은혜를 든다. 변론할 때의 성령의 도움은 마태복음 10:19-20, 성령과 자유에 관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3:17이다.
- 24.56 본문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아신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2:10-11의 표현을 함께 사용한다. 본래 선하신 성령과 선을 선택하여 선함에 참여하는 피조물을 비교한다.
생명을 주시는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을 디모데전서 6:13, 로마서 8:11, 요한복음 10:27-28, 고린도후서 3:6, 로마서 8:10, 요한복음 6:63의 문구로 설명한다.
- 24.57 본문으로
‘선물’이라는 말로 성령의 지위를 낮추는 반론에, 성령이 생명과 능력을 주시고 성자도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을 들어 답한다(로마서 8:2, 사도행전 1:8, 로마서 8:32).
고린도전서 2:12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성육신의 신비에 적용한다. 갈라디아서 4:6의 ‘아바, 아버지’는 성령의 외침이 성령을 받은 이들의 목소리가 된다고 풀이한다.
- 25.58 본문으로
ἐν은 보통 ‘안에서’를 뜻하며, 여기서는 σύν·μετά의 ‘함께’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번제물, 은과 금, 군대에 관한 예는 시편 66:13, 105:37, 44:9(칠십인역 65:13, 104:37, 43:10)이다.
논쟁의 대상은 성부께 독생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광을 돌리는 문구와, 성부·성자와 함께 성령께 영광을 돌리는 문구이다. 바실리오스는 성경의 개별 표현과 교회에서 결합하여 쓰는 영광송을 비교한다.
- 25.59 본문으로
καί는 ‘그리고’, σύν은 ‘함께’를 뜻한다. 바실리오스는 두 표현이 성부·성자·성령을 연결하며, σύν이 각 위격의 구별과 끊임없는 교제를 함께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사벨리오스에 관한 논박은 위격의 구별을, 반대편 논박은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시간 간격을 두는 주장을 겨냥한다. 본문은 이 두 문제를 ‘함께’라는 전치사로 연결한다.
인용과 예는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일부 절 구분 13:14), 로마서 15:30, 요한복음 14:23과 10:30, 골로새서 4:7-9에 연결된다.
- 25.60 본문으로
함께 항해하다·함께 살다에는 σύν이, 배 안에서 항해하다·집 안에 살다에는 ἐν이 쓰인다. 전자는 참여자 사이의 결합을, 후자는 활동이 이루어지는 대상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마지막 문단에서 논의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다음 26장은 성령과 피조물, 성부·성자의 관계를 이 전치사의 여러 용법으로 설명한다.
- 26.61 본문으로
형상과 질료, 능력과 수용자, 성향과 그것을 지닌 사람의 관계를 ‘안에 있음’의 예로 든다. 성령께서 이성적 존재를 완성하신다는 설명에 철학적 어휘를 적용한다.
사울과 장로들의 예는 사무엘상 16:14와 민수기 11:25-26이다. 바실리오스는 엘닷과 모닷에게 성령이 계속 머물렀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몸과 지체의 비유는 로마서 12:5-6과 고린도전서 12:18, 21, 25-26을 연결한다. 마지막 세례 문구는 12.28과 같이 ‘한 몸 안에서 한 성령께로’라는 순서를 따른다.
- 26.62 본문으로
‘장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예배한다는 뜻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출애굽기 33:21의 모세가 서는 자리, 신명기 12:13-14의 제사 장소, 요한복음 4:23의 예배를 연결한다.
시편 인용은 71:3(칠십인역 70:3)의 ‘견고한 장소’라는 문구와 연결된다. 야곱의 말은 창세기 28:16이다. 바울과 그리스도의 상호 관계는 고린도후서 2:17과 13:3으로 설명한다.
- 26.63 본문으로
불과 열, 몸과 건강, 영혼과 생명의 관계를 들어 ‘안에 있음’과 ‘함께 있음’을 구별한다. 성부·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교제에는 ‘함께’를, 은혜를 받는 피조물과 성령의 관계에는 ‘안에’를 적용한다.
찬양의 제사는 히브리서 13:15에, 바울의 말은 고린도전서 7:40과 디모데후서 1:14에 연결된다. 다니엘에 관한 말은 다니엘서 5:11이다.
- 26.64 본문으로
요한복음 4:23-24의 ‘영과 진리 안에서’를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성자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풀이한다. 이 설명은 18.47과 연결된다.
빛·형상·원형의 관계로 성령 안에서 성자를 뵙고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나아감을 설명한다. 끝의 ‘영광의 광채’와 ‘새김’은 히브리서 1:3의 표현이다.
- 27.65 본문으로
‘안에서’(ἐν)는 성부·성자·성령에게 공통으로 쓰이는 표현이라는 앞선 논의를 요약한다. 이제 ‘함께’(σύν)의 기원과 교회 전승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 27.66 본문으로
δόγμα와 κήρυγμα를 각각 ‘가르침’과 ‘선포’로 옮겼다. 이 절에서는 전자를 침묵 속에 지키는 내용, 후자를 공개하여 알리는 내용으로 설명한다. ‘신비’(μυστήριον)는 세례·성찬을 비롯한 교회의 의례와 그 뜻을 함께 가리킨다.
십자성호, 동쪽을 향한 기도, 성찬의 기원문, 세례의 축복과 세 번 잠김, 사탄을 거절하는 고백을 기록되지 않은 전승의 예로 든다. ‘봉헌’(ἀνάδειξις)은 성찬의 빵과 잔을 제시하고 거룩하게 하는 문맥에 쓰인다.
모세의 성소 구분은 접근하는 사람·날짜·시간을 제한하여 거룩함을 지키는 방식의 예이다. 바실리오스는 이 비유를 교회가 신비를 전수하는 방식에 적용한다.
동쪽의 낙원은 창세기 2:8,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위의 것을 찾음은 골로새서 3:1이다. 창세기 1:5의 μία를 ‘첫째’와 구별되는 ‘하나’로 읽고, 시편 6편과 12편(칠십인역 11편)의 표제에 나오는 ‘여덟째’와 연결한다.
여기서 오순절은 부활일부터 오순절까지의 오십 일 전체를 가리킨다. 서서 기도하기, 무릎 꿇기와 다시 일어서기에 부활과 영원한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 27.67 본문으로
세례에서 받은 성부·성자·성령의 고백을 믿음과 영광송의 기준으로 삼는다. 선조에게서 전해진 ‘함께’라는 말은 이 세례·신앙 고백·예배의 연결 속에서 옹호된다.
- 27.68 본문으로
‘안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 ‘함께’는 성령과 하나님의 교제를 설명한다. 세례의 이름 부름, 신앙 고백과 영광송이 같은 순서를 따른다는 논증이다.
마지막 예는 고린도전서 6:11과 5:4이다. 두 번째 인용의 ‘나의 영’은 바울 자신의 영을 가리키며, ‘주 예수의 능력과 함께’라는 전치사 용례를 제시한다.
- 28.69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영광을 받을 신자들의 소망을 성령에 관한 논증으로 이어 간다. 골로새서 2:13, 3:3-4, 로마서 8:16-17, 에베소서 2:6, 데살로니가전서 4:17을 연결한다.
바울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다는 설명은 고린도후서 5:8과 빌립보서 1:23이다. ψυχικός·πνευματικός는 18.47처럼 ‘자연적 생명에 속한’과 ‘영에 속한’으로 구별한다.
- 28.70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고 왕 노릇 한다는 말은 로마서 8:17과 디모데후서 2:12에 연결된다. ‘은혜의 영을 모욕함’은 히브리서 10:29의 표현이다.
여기서 『지혜』라 부르는 책의 인용은 집회서(시락의 지혜) 43:30이다. 끝의 용서받지 못할 성령 모독은 마태복음 12:31에 연결된다.
- 29.71 본문으로
기록되지 않은 전승을 지키는 근거로 고린도전서 11:2와 데살로니가후서 2:15를 인용한다. 둘이나 셋의 증언은 신명기 19:15, ‘어제 태어난 사람’이라는 비유는 욥기 8:9에 연결된다.
바실리오스는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의 봉사로 이끈 이에게서 영광송을 받았다고 말한다. Johnston의 139쪽 주석은 이 인물을 카이사레아의 디아니오스로 설명한다.
- 29.72 본문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스가 같은 이름의 로마 주교에게 보낸 논박과 변론의 둘째 편지에서 영광송과 위격에 관한 문구를 인용한다. 여기의 인용문은 바실리오스가 전하는 형태를 따른다.
클레멘스의 문구는 『클레멘스 1서』 58.2에 연결된다. 이레나이오스 인용은 『이단 논박』 5.8.2와 5.9.3에 해당한다고 Johnston의 141쪽 여백이 표시한다.
팔레스타인의 에우세비오스가 옛사람들의 일부다처 문제를 다룬 글의 기도문을 예로 든다. 바실리오스는 여러 인물이 사용한 접속사와 전치사를 영광송의 증언으로 모은다.
- 29.73 본문으로
오리게네스의 시편 강론, 요한복음 해설과 로마서 해설을 인용한다. 성령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견해를 평가하는 문장은 바실리오스 자신의 논평이다.
아프리카누스의 『연대기 요약』 5권에 실린 영광송과 저녁 등불을 켤 때 부르던 감사 찬송을 증언으로 제시한다. 저녁 찬송의 저자는 본문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아테노게네스의 찬송은 순교를 앞두고 동료들에게 남긴 작별의 선물로 소개된다. 바실리오스는 그 내용을 여기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순교자들의 성령 이해를 증언한다고 설명한다.
- 29.74 본문으로
이 절의 그레고리오스는 네오카이사레아의 그레고리오스, 곧 기적 행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본문은 그의 사역과 기적에 관한 전승을 성령의 활동과 영광송의 연속성에 연결한다.
피르밀리아노스와 멜레티오스의 증언에 이어 메소포타미아·카파도키아·서방의 예배 언어를 든다. 멜레티오스는 Johnston의 140쪽 설명에서 폰토스의 인물로 소개된다.
- 29.75 본문으로
세례에서 주님이 성령께 부여하신 존귀함, 세례를 통한 하나님 인식, 성령 모독에 대한 경고를 논고의 근거로 정리한다(마태복음 28:19, 12:31).
끝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골로새서 3:15, 온유한 영은 갈라디아서 6:1, 사형 선고의 비유는 고린도후서 1:9, 침묵할 때는 전도서 3:7에 연결된다. 폭풍의 비유가 다음 30장의 해전 장면으로 이어진다.
- 30.76 본문으로
함대·폭풍·적과 아군의 혼동·지휘관의 목소리를 덮는 소음을 차례로 묘사한다. 이어지는 30.77에서 이 비유를 교회의 분열에 적용한다.
πνεῦμα는 이 해전 장면에서는 바람을 뜻한다. τῶν πνευμάτων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바람들로 옮겼다.
- 30.77 본문으로
해전의 비유를 교회의 파벌, 동료에 대한 공격, 지도권 다툼에 적용한다. ‘선조들의 경계’와 ‘가르침의 보루’는 물려받은 신앙과 질서를 가리킨다.
Johnston판 152쪽은 ‘구원하시는 성령’(σωτήριον Πνεῦμα)의 원수들이라고 읽는다. 디지털 비교본은 ‘구원의 수난’(σωτήριον πάθος)으로 읽으며, 인쇄본 각주도 이 차이를 기록한다.
유대주의와 그리스적 이교라는 명칭은 위격을 뒤섞는 주장과 본성들을 대립시키는 주장을 비판하는 바실리오스의 논쟁 어휘이다. 본문은 두 극단을 교회의 분열에 연결한다.
- 30.78 본문으로
침묵에 관한 인용은 전도서 9:17과 아모스 5:13이다. 적의 짐승이라도 짐 아래 쓰러지면 도와야 한다는 예는 출애굽기 23:5에서 온다.
사랑이 식는다는 표현은 마태복음 24:12,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임은 로마서 14:1에 연결된다. 전염병의 비유로 다툼이 공동체 전체에 번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 30.79 본문으로
사랑이 자기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13:5, 바빌로니아의 세 청년은 다니엘서 3장의 이야기이다. 성령의 도움을 의지하여 진리를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마지막에는 논고의 수신자인 암필로키오스에게 다시 말한다. 다투지 않는 질문으로 지식을 더하도록 권하며, 성령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시리라는 기도로 마친다. 진주와 돼지의 비유는 마태복음 7:6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