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온 반박 4권 테르툴리아누스 자료 판본: alpha-0.33 수록 범위: Kroymann 1906, CSEL 47의 마르키온 반박 4권 1-43장. 전체 5권 가운데 4권이다. 고정 전자 원문을 422-568쪽 인쇄면과 두 AI가 따로 대조하고 세 번째 AI가 판정해 교정. 고정판: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 원자료 SHA-256: 1efcc01d1521edfd711bcd9c5c8d76c99cc52fb05b28c5148f75464254a49b95 형식: 한국어 1 불경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마르키온의 모든 주장과 모든 장비를 우리는 이제 그의 복음서 자체 앞으로 불러낸다. 그는 그 복음서를 변조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신뢰를 세우려고 그것에 일종의 지참금을 지어 주었다. - 모순들의 대립으로 이루어졌기에 『안티테시스』(Antitheses)라고 이름 붙여지고, 율법과 복음을 갈라놓는 데로 몰아간 저작이다 - 이것으로 그는 두 신을 나누되, 한쪽은 한 문서의 신이고 다른 쪽은 다른 문서의 신, 아니 더 흔히 쓰는 말로 하면 다른 언약의 신일 만큼 서로 다르게 갈라 놓고, 그로부터 『안티테시스』에 따라 믿어지는 복음서까지 변호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직접 맞붙은 근접전으로, 곧 폰토스 사람의 공격 하나하나를 상대하여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복음서 자체 안에서 그 복음서와 함께 하는 쪽이 훨씬 더 적절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곧 그것들이 돌보고 있는 그 복음서에서 꺾이는 쪽이 말이다. 선취 항변으로 맞서는 것이 그처럼 쉽기는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하고 유효하다고 인정하며 우리 편에 선다고 말하겠다. 그래야 그것들이 제 저자의 눈먼 상태를 두고 더욱 부끄러워할 것이니, 이제 그것들은 마르키온에 맞서는 우리의 안티테시스다. 그리고 실로 나는 옛 경륜에서는 창조주에게서 한 질서가, 새 경륜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질서가 펼쳐졌음을 인정한다. 말씀의 가르침, 덕행의 계명, 율법의 규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차이가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에게 귀속된다는 조건에서다. 곧 그 차이를 배정하였을 뿐 아니라 미리 선포하기도 하였음이 분명한 그 하나님에게 말이다. 오래전에 이사야는 시온에서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주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고 외쳤다. 물론 다른 율법과 다른 말씀이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그가 민족들 사이에서 심판하고 많은 백성을 책망할 것이다.” 곧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의 백성이 아니라 민족들의 백성인데, 그들은 복음의 새 율법과 사도들의 새 말씀을 통하여 심판받고, 믿는 즉시 자기들 안에서 이전의 오류에 대하여 책망받으며, 그 뒤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든다. 또 지비나, 곧 사냥 창의 한 종류를 쳐서 낫을 만든다. 다시 말해 한때 거칠고 사나웠던 마음을 올곧은 생각과 좋은 열매를 맺는 일꾼으로 바꾼다. 또 다시 말한다. “내 말을 들으라, 들으라, 내 백성아, 그리고 왕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율법이 내게서 나오고 내 심판이 민족들의 빛으로 나올 것이다.” 이 심판으로 그는 민족들도 복음의 율법과 말씀을 통하여 빛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하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는 그 율법, 곧 흠잡을 데 없는 율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 율법은 완전하므로 영혼을 돌이키는데, 물론 우상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이킨다. 또 이것이 그 말씀이기도 할 것인데, 이에 관하여 같은 이사야는 말한다. “주가 땅에서 짧게 줄인 말씀을 이룰 것이다.” 새 언약은 요약되어 율법의 너덜너덜한 짐들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더 말하겠는가? 창조주가 같은 이를 통하여 새로움을 더 분명하게, 빛 자체보다 더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는데. “너희는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적 일들을 되새기지 말라 - 옛 것들은 지나갔고 새 것들이 일어난다 - 보라, 내가 새 일들을 행하니 그것들이 이제 일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한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새 밭을 새로 일구고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지 말며 너희 마음의 가죽에 할례를 행하라.”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날이 올 것이다. 주가 말한다. 그때 내가 야곱의 집과 유다의 집에 새 언약을 이룰 것이니,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려고 그들의 일을 손에 잡은 날에 세운 언약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처럼 그는 이전 언약을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줌으로써 그것이 한시적임을 나타내며, 또 나중 언약에 대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할 때에도 그렇다. 이사야를 통하여 <그는 말한다.> “내 말을 들으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거룩하고 신실한 것들”을 덧붙여, 그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곧 마리아의 호적을 따라 다윗의 족속에서 난 이 안에서 말이다. 그는 또 같은 그를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가지 안에서도 예표로 미리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율법과 다른 말씀과 새로운 언약의 제정이 창조주에게서 올 것이라고 그가 말하였고, 그래서 희생 제사 자체에서도 더 나은 다른 봉사를, 그것도 민족들 가운데서 정하여 두었다면, 말라기가 이렇게 말하는 대로다. “내 뜻이 너희에게 있지 않다.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 손에서 너희 희생 제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해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민족들 가운데서 내 이름이 영화롭게 되었고, 모든 곳에서 내 이름에 희생 제물이, 곧 정결한 희생 제물이 드려지기 때문이다.” 이는 곧 깨끗한 양심에서 나오는 단순한 기도다. 그렇다면 새로움에서 오는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 변화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차이를 이루고, 그 차이에서 모순을 이루게 된다. 변화되고서 다르지 않은 것이 없듯이, 다르고서 모순되지 않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이에서 나오는 모순 역시, 새로움에서 나오는 변화가 속한 바로 그 이에게 귀속될 것이다. 변화를 배정한 자, 바로 그가 차이도 세웠다. 새로움을 선포한 자, 바로 그가 모순도 미리 알렸다. 그대는 왜 사물들의 차이를 권능들 사이의 간격으로 해석하는가? 그대는 왜 실례들의 안티테시스를 창조주에게 맞서도록 비틀어 대는가? 그것들은 창조주 자신의 생각과 감정 안에서도 그대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인데. 그는 말한다. “내가 치고 내가 고칠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죽이고 내가 살릴 것이다.” 곧 재앙을 짓고 평화를 만드는 자다. 그래서 그대는 그를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다는 이름으로도 비난하기 일쑤다. 그가 명하는 것을 금하고 금하는 것을 명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왜 안티테시스들도 언제나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창조주의 본성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내가 틀리지 않다면 폰토스 사람들에게서도 세계가 서로 경쟁하는 실체들의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적어도 생각이라도 해 보지 못했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을 서로 다른 신으로 규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율법의 신과 복음의 신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들로부터 이미 판결이 났다. 그의 작품과 성품이 안티테시스로 이루어진 자라면, 그의 신비들도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번역 주석 1. 1.2 dos(지참금)는 혼인 때 신부에게 딸려 보내는 재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복음서에 신뢰를 얻어 주려고 『안티테시스』를 딸려 보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쓴다. 2. 1.3 Antithesîs라는 표기는 Kroymann이 사본 M과 F의 표기(antithesis)를 따라 그리스어 복수형을 옮긴 것이다. Oehler는 antitheses, R은 antitheseis로 읽는다. 책 제목으로 쓰일 때는 『안티테시스』로, 그 책에 담긴 개별 대립 명제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안티테시스로 옮겼다. 3. 1.3 instrumentum은 법률 문서를 뜻하는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성경 문서를 가리킬 때 즐겨 쓴다. 그는 testamentum이 더 널리 쓰이는 말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는 instrumentum을 문서, testamentum을 언약으로 옮겼다. 1.13 이하에서 testamentum은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말하는 언약 자체를 가리키므로 역시 언약으로 옮겼다. 4. 1.4 Ponticus(폰토스 사람)는 흑해 남안 폰토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1.29의 Pontici(폰토스 사람들)는 마르키온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5. 1.5 praescriptiue는 로마 소송법의 praescriptio, 곧 본안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다투는 선취 항변을 말한다. accepto facere(받아들인 것으로 하다)와 ratum habere(유효하다고 인정하다)도 법률 용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안티테시스』의 자격을 다투어 물리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받아들여 거꾸로 마르키온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6. 1.6 dispositio는 하나님이 옛 시대와 새 시대에 세운 질서와 배열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17의 dispositionem eorum과 1.21의 dispositiones는 언약을 세우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각각 그들의 일, 제정으로 옮겼다. 7. 1.8 이사야 2:3을 간접 인용한다. 8. 1.9 이사야 2:4다. traducet(책망할 것이다)는 칠십인역의 ἐλέγξει를 옮긴 것이다. 개역개정은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동사를 믿은 민족들이 자기들의 이전 오류를 드러내어 꾸짖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9. 1.10 이사야 2:4의 둘째 반절이다. zibina(지비나)는 그리스어 σιβύνη를 옮긴 사냥 창으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생소한 낱말이라 직접 설명을 붙였다. Kroymann은 사본 M의 zibbynas와 R의 sibinas를 zibinas로 고쳐 읽는다. 개역개정은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다. 10. 1.11 이사야 51:4다. 칠십인역을 따라 ‘그리고 왕들아’(et reges)가 들어 있는데, 개역개정에는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로 되어 있어 왕들이 없다. 1.11 뒷부분의 iudicium(심판)은 바로 앞 인용문의 iudicium meum(내 심판)을 받는 말이다. 11. 1.12 시편 19:7(칠십인역 18:8)이다. inuituperabilis(흠잡을 데 없는)는 칠십인역의 ἄμωμος를 옮긴 것이고, 개역개정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로 읽는다. qua perfecta(완전하므로)는 그 율법이 완전하기 때문에 영혼을 돌이킨다는 뜻으로 옮겼다. Pamelius는 animam을 animas로 고쳐 읽었다. 12. 1.13 이사야 10:23이다. decisum sermonem(짧게 줄인 말씀)은 칠십인역의 λόγον συντετμημένον을 옮긴 것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로 읽어 뜻이 다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줄인 말씀’을 율법의 번잡한 짐을 덜어 낸 새 언약으로 풀이한다. 13. 1.14 per eundem(같은 이를 통하여)은 이사야를 가리킨다. 14. 1.15 이사야 43:18-19다. 그 사이의 ‘옛 것들은 지나갔고 새 것들이 일어난다’는 고린도후서 5:17의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이사야 본문 사이에 끼워 넣었다. 15. 1.16 예레미야 4:3-4다. nouate uobis nouamen nouum(너희를 위하여 새 밭을 새로 일구라)은 칠십인역의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옮긴 것으로, nouamen은 묵은 땅을 새로 간 밭(nouale)을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롭다’는 낱말을 세 번 겹쳐 새로움을 강조한다.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로 읽는다. 16. 1.17 예레미야 31:31-32(칠십인역 38:31-32)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야곱의 집’으로 읽지만 칠십인역과 개역개정은 ‘이스라엘 집’이다. arripui dispositionem eorum(그들의 일을 손에 잡았다)은 칠십인역의 ἐπιλαβομένου μου τῆς χειρὸς αὐτῶν(내가 그들의 손을 잡았을 때)에 해당하며, 개역개정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다. 17. 1.19 이사야 55:3이다. (그는 말한다)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Engelbrecht는 aeternum 뒤에 를 넣어 ‘영원한 언약을 말하면서 덧붙여’로 읽기를 제안했다. ‘다윗의 거룩하고 신실한 것들’(sancta et fidelia Dauid)은 칠십인역 τὰ ὅσια Δαυὶδ τὰ πιστά를 옮긴 것이고, 개역개정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다. 18. 1.20 secundum Mariae censum(마리아의 호적을 따라)은 누가복음 2:4-5의 호적 등록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리아가 다윗의 집안으로 등록된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다윗 혈통을 끌어낸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가지’는 이사야 11:1이다. 사본 M과 R에는 eundem이 demonstraret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19. 1.21 ‘그가 말하였다’(dixit)의 주어는 1.19-20에서 말한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이고, ‘정하여 두었다’(destinarit)의 주어는 창조주다. 라틴어는 둘을 모두 3인칭 단수로만 적으므로 번역에서도 주어를 보충하지 않았다. 20. 1.22 말라기 1:10-11이다. 개역개정은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로 읽는다. ‘곧 깨끗한 양심에서 나오는 단순한 기도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정결한 희생 제물’을 풀이한 말이다. Pamelius는 사본의 offeretur(드려질 것이다)를 offertur(드려진다)로 고쳤고 Kroymann이 이를 따랐다. 21. 1.26 potestates(권능들)는 여기서 마르키온이 상정하는 두 신적 권능, 곧 창조주와 선한 신을 가리킨다. 22. 1.27 신명기 32:39(‘내가 치고 내가 고칠 것이다’, ‘내가 죽이고 내가 살릴 것이다’)와 이사야 45:7(‘재앙을 짓고 평화를 만드는’)이다. 개역개정 신명기 32:39는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이사야 45:7은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다. 23. 1.28 quo(그래서)는 Engelbrecht가 사본의 qua를 고친 것이다. Ursinus는 iubet와 prohibet를 접속법 iubeat, prohibeat로 읽었다. 24. 1.29 contrarii sibi semper creatoris(언제나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창조주)는 마르키온의 비난을 되받아 쓴 표현이다. ‘서로 경쟁하는 실체들의 차이로 구성된 세계’는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젖음처럼 대립하는 요소들로 세계가 이루어졌다는 통념을 가리킨다. 사본 M은 structum, R은 constructum으로 읽는다. 25. 1.31 sacramenta(신비들)는 창조주가 세운 두 경륜, 곧 율법과 복음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창조주의 작품과 성품이 대립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가 세운 경륜도 같은 형식으로 대립을 포함한다고 결론짓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 2 그대는 『안티테시스』<에 대하여> 우리가 내놓은 이 간결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나는 복음서의 입증으로 넘어간다. 물론 유대의 것이 아니라 폰토스의 것으로, 그동안 변조된 복음서다. 이 입증은 순서를 미리 세워 둘 것이다. 우리가 착수하려는 순서다. 우리는 먼저 복음서 문서가 사도들을 저자로 가지고 있음을 확정한다. 이 복음을 공포하는 임무는 주 자신이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사도적인 사람들도 저자라면, 그들만이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그리고 사도 이후의 사람들도] 저자다. 제자들의 선포는 명예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들의 권위가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니, 사도들을 스승으로 만든 그리스도의 권위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도들 가운데서 요한과 마태가 믿음을 심어 주고, 사도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와 마가가 그 믿음을 새롭게 세운다. 그들은 같은 규범에서 출발하였으니, 유일한 하나님 창조주와 그의 그리스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인 그리스도에 관한 한 그렇다. 서술의 배열이 달라졌는지는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믿음의 핵심에 대해서만 일치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마르키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반대로 마르키온은 복음서에, 물론 자기 복음서에, 아무 저자도 붙이지 않는다. 마치 몸체 자체를 뒤엎는 것도 불경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에게 제목까지 꾸며 붙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여기서 이미 발을 멈추고, 이마를 들지 못하는 저작, 아무 당당함도 내보이지 않으며 온전한 제목과 저자의 합당한 공표로써 아무 신뢰도 보증하지 않는 저작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점에서 맞붙어 싸우는 쪽을 택하며, 우리의 것에서 알아낼 수 있는 바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저술가들 가운데서 마르키온은 누가를 잘라 낼 대상으로 고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는 사도가 아니라 사도적인 사람이고,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며, 당연히 스승보다 못하고, 그가 따른 사도가 나중 사도인 만큼 분명히 그만큼 나중 사람이다. 그 사도는 의심할 바 없이 바울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이 바울 자신의 이름으로 복음서를 들여왔다 하더라도, 선임자들의 뒷받침이 없는 문서 하나만으로는 믿음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발견하고 믿음을 바쳤으며 곧 자기 복음을 그것과 일치시키려고 열심을 낸 그 복음도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의논하였으니, 혹시 자기가 헛되이 달린 것은 아닌지, 곧 그들을 따라 믿지 않았고 그들을 따라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저자들과 의논하고 믿음의 규범에 관하여 일치하자, 그들은 오른손을 맞잡았고 그로부터 선포의 임무를 나누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로, 바울은 유대인들과 민족들에게로 가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누가를 비춘 사람 자신이 자기 믿음과 선포를 위하여 선임자들의 권위를 원했다면, 그의 스승의 복음에 필요했던 그 권위를 나는 누가의 복음서에 대하여 얼마나 더 요구해야 하겠는가? 번역 주석 1. 2.1 hanc(이)는 Engelbrecht가 사본의 nunc를 고친 것이고, (에 대하여)는 Ursinus가 보충한 것이다. ‘유대의 것이 아니라 폰토스의 것’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유대적 요소를 잘라 내어 폰토스 사람의 작품이 되었다는 비꼼이다. 2. 2.1 praestructuram ordinem(순서를 미리 세워 둘 것이다)의 목적어 ordinem은 2.2의 quem adgredimur(우리가 착수하려는)로 이어진다. 복음서의 저자 문제를 먼저 다루고 나서 본문을 차례로 검토하는 순서를 말한다. 3. 2.3 [et postapostolicos](그리고 사도 이후의 사람들도)는 Kroymann이 잘못된 자리에 끼어든 삽입구로 보고 괄호에 넣은 말이다. R3와 통행본은 et post apostolos(그리고 사도들 다음에)로, Engelbrecht는 et [post] apostolicos로 읽는다. 4. 2.3 apostolici(사도적인 사람들)는 사도들의 동료와 제자로서 복음서를 쓴 누가와 마가를 가리키며, 2.4에서 사도인 요한과 마태와 대비된다. 5. 2.4 quae magistros apostolos fecit(사도들을 스승으로 만든)의 quae는 2.3의 auctoritas(권위)를 받는다. Pamelius는 qui로 고쳐 그리스도를 주어로 읽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subplementum legis et prophetarum)은 마태복음 5:17을 염두에 둔 말이다. 6. 2.4 복음서 저자들을 요한, 마태, 누가, 마가 순서로 든다. Matheus는 사본 M의 철자이고 R과 통행본은 Matthaeus로 적는다. 7. 2.6 ‘몸체 자체를 뒤엎는’(ipsum corpus euertere)은 마르키온이 누가복음 본문을 잘라 낸 일을 가리키고, ‘제목’(titulus)은 복음서 머리에 붙는 저자 이름을 가리킨다. 8. 2.8 ex nostro(우리의 것에서)는 교회가 가진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교회 본문과 비교하면 그가 누가복음을 손질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9. 2.9 quem caederet(잘라 내려고)는 마르키온이 누가복음에서 창조주와 유대 성경에 이어지는 대목을 삭제한 일을 가리킨다. 사본 M은 elegisse 대신 legisse로 읽는다. 10. 2.11 갈라디아서 1:18과 2:2다. ‘혹시 자기가 헛되이 달린 것은 아닌지’(ne forte in uacuum cucurrisset)는 갈라디아서 2:2의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를 옮긴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자기 복음을 먼저 있던 사도들의 복음에 맞추어 확인받았다고 읽는다. 11. 2.12 갈라디아서 2:9다. ‘오른손을 맞잡았다’(dexteras miscuerunt)는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에 해당한다. 갈라디아서 2:7-9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베드로 등이 유대인에게 가기로 했다고만 말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유대인과 민족들 양쪽에게 간 것으로 적는다. 12. 2.13 inluminator Lucae(누가를 비춘 사람)는 바울이다. ‘그의 스승의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 3 마르키온의 견해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가 누가가 제자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이전에도 이어져 내려왔다면, 그것은 분명히 원본에 해당하는 자료를 갖고 있었고, 그 자료를 통해 누가에게까지 이르렀으니, 그 자료의 증언이 뒷받침해 줄 때에 누가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마르키온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를 손에 넣었다. 그 편지는 사도들 자신까지도 복음의 진리를 향해 바른 걸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꾸짖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집는 어떤 거짓 사도들을 고발한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의 이름으로, 또는 사도적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그들 고유의 것으로 펴낸 복음서들의 지위를 무너뜨리려 애쓴다. 물론 그 복음서들에서 빼앗은 신뢰를 자기 것에 넘겨주려는 것이다. 더구나 기둥으로 여겨지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책망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아 가며 식탁 교제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 자신이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면, 베드로에게도 자기가 가르치던 것과 달리 무엇인가를 행하려는 이런 뜻이 있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거짓 사도들이 몰래 끼어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성격도 밝혀져 있다. 그들은 할례와 유대적 자만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이렇듯 그들은 선포 때문이 아니라 행실 때문에 바울에게 지적받았다.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이나 그의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인가 잘못했다면, 바울은 그것도 똑같이 지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하나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마르키온이 사도들은 복음을 변질시킬 정도까지 배신과 위장의 의혹을 받는 자들로 여겨진다고 탓한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을 고발함으로써 이미 그리스도를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온전한 복음을 전해 주었고 다만 식탁 교제의 불일치 때문에만 책망받았는데, 거짓 사도들이 그들의 진리를 변조했고 거기서 우리의 복음서들이 편찬되었다면, 변조자들을 <겪지 않은> 사도들의 그 진정한 문서는 어느 것이겠는가? 바울을 비추었고 그를 통해 누가를 비춘 그 문서는 어느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마치 어떤 대홍수처럼 위조자들의 범람으로 지워져 그토록 철저히 사라졌다면, 그러면 이제 마르키온도 참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면 마르키온만이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참된 것, 곧 사도들의 것이라면, 그것이 사도들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우리의 것은 누가의 것으로 전해지는데 말이다. 아니면 마르키온이 쓰는 것이 우리의 것과 - 물론 제목에서도 변조된 우리의 것과 - 일치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누가의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도들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제 그것과 일치하는 우리의 것도 똑같이 사도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목에 관해서도 변조되었다.” 번역 주석 1. 3.1 sacramentum religionis Christianae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로 옮겼다. 여기서 sacramentum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 전체를 가리키며, 2장 끝에서 누가가 사도가 아니라 사도의 제자라고 말한 데 이어, 마르키온이 누가 이전의 사도적 전승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누가의 권위가 문제된다는 뜻이다. 2. 3.2 authentica paratura는 누가 이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던 원본 문서, 곧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가리키며 ‘원본에 해당하는 자료’로 옮겼다. 3. 3.3 ‘바른 걸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갈라디아서 2:14의 οὐκ ὀρθοποδοῦσιν(개역개정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를 옮긴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집는 자들은 갈라디아서 1:7,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서 2:4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갈라디아서의 ‘거짓 형제들’을 일관되게 pseudoapostoli(거짓 사도들)라고 부른다. 4. 3.4 ‘기둥으로 여겨지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2:9를 따른 것이다. 갈라디아서 2:11-14에서 책망받은 사람은 베드로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세 기둥 모두를 책망의 대상으로 묶어 말한다. 5. 3.5 conuictum uariare는 갈라디아서 2:12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물러난 일을 가리키며 ‘식탁 교제를 달리하다’로 옮겼다.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는 고린도전서 9:19-22를 따른 것이다. 6. 3.6 Iudaicos fastus는 Kroymann이 사본 M과 R의 첫 손을 따라 읽은 것으로, fastus(자만, 거드름)의 복수 대격이며 ‘유대적 자만’으로 옮겼다. 통행본은 fastos(축일 역법, 절기)로 읽어 ‘유대의 절기들’로 이해한다. 7. 3.8 praeuaricatio는 로마 소송법에서 고발인이 피고와 결탁하여 자기 직무를 배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배신’으로 옮겼다. simulatio는 갈라디아서 2:13의 위선(개역개정 “외식”)에 해당하여 ‘위장’으로 옮겼다. 8. 3.9 ‘<겪지 않은>’의 non은 Kroymann이 보충한 것이다. Engelbrecht는 non 없이 ‘quod adulteros passum est, quod ... Lucam?’으로 구두점을 바꾸어 읽는다. instrumentum은 법률 용어로 증거 문서를 뜻하며 ‘문서’로 옮겼다. 9. 3.10 at(그런데)는 Kroymann이 사본의 aut를 고친 것이다. ‘대홍수’(cataclysmus)는 위조자들이 사도들의 원문서를 모두 지워 버렸다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비꼬는 비유이다. 10. 3.12 ceterum(오히려)은 Ciacconius가 사본의 ceterorum을 고친 것이다. Kroymann은 ‘그러나 그것은 제목에 관해서도 변조되었다’를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보고, 전통적인 장 구분이 이 반론 뒤에 놓인 것은 잘못이며 4장 첫 문장이 이 반론에 대한 답이라고 밝혔다. ‘제목’은 ‘누가에 따른 복음서’라는 표제를 가리키며,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는 저자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 4 그러므로 다툼의 줄을 당겨야 한다. 이쪽과 저쪽에서 같은 힘으로 밀고 당겨 줄이 출렁이는 가운데 말이다. 나는 내 것이 참되다고 말하고, 마르키온은 자기 것이 참되다고 말한다. 나는 마르키온의 것이 변조되었다고 주장하고, 마르키온은 내 것이 변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시간의 계산 말고 누가 우리 사이를 판가름하겠는가? 시간은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지는 쪽에 권위를 미리 정해 주고, 더 나중 것으로 입증되는 쪽에는 변질을 미리 판결한다. 거짓이 참된 것의 부패인 만큼, 그만큼 진리가 거짓보다 앞서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것이 겪는 일보다 앞서고, 재료는 모방보다 앞설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우리의 것이 더 오래되었고 마르키온의 것은 더 나중임을 증명했는데도, 우리의 것이 진리에서 재료를 얻기도 전에 거짓으로 보이고, 마르키온의 것이 펴내지기도 전에 우리의 것에게 모방당했다고 믿어지며, 끝으로 더 나중인 것이 더 참되다고 여겨진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그토록 많고 큰 업적들과 문서들이 이미 세상에 나온 뒤에 말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리 없이는, 곧 복음의 진리보다 앞서서는 결코 나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선 누가의 복음서에 관해서는, 우리와 마르키온이 그것을 공유하면서 진리를 두고 다투는 한에서, 우리 쪽에 있는 것이 마르키온의 것보다 훨씬 오래되어서, 마르키온 자신도 한때는 그것을 믿었을 정도이다. 그는 믿음의 첫 열기 속에서 보편 교회에 돈까지 바쳤는데, 그가 우리의 진리에서 떨어져 자기 이단으로 빠져 나간 뒤에 그 돈은 곧 그 자신과 함께 내던져졌다. 그런데 마르키온파가 그 자신의 편지와도 어긋나게 그가 처음에 우리 가운데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그 편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적어도 『안티테시스』(Antitheses)는 그들도 마르키온의 것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앞세우기까지 한다. 나에게는 이것으로 증명이 충분하다. 우리에게서 누가의 것으로 전해지는 그 복음서가 - 마르키온에게서도 그런지는 살펴볼 일이다 - 마르키온이 자기 『안티테시스』를 통해 유대교의 옹호자들이 율법과 예언자들을 한 몸으로 합쳐 넣고 그렇게 해서 거기서 그리스도까지 꾸며 내기 위해 변조했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복음서라면, 그는 분명히 자기가 발견한 것이 아니면 비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나중에 있을 일을, 그것이 있을 줄 모르는 채로 책망하지 않는다. 교정이 잘못보다 앞서지 않는다. 정말이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안토니누스 시대까지 뒤집혀 있던 복음서의 교정자로 마르키온이 홀로 그리고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으며, 마르키온의 보호 없이 사도들을 서둘러 먼저 보낸 것을 이미 뉘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단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무모함이 벌이는 일이어서, 복음서들을 망쳐 놓으면서 언제나 이런 식으로 교정한다. 마르키온이 제자라 하더라도 스승 위에 있지 못하고, 마르키온이 사도라 하더라도 바울은 “나나 그들이나 이렇게 선포한다”고 말하며, 마르키온이 예언자라 하더라도 예언자들의 영도 예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 영들은 뒤엎음의 영이 아니라 평화의 영이기 때문이다. 마르키온이 천사라 하더라도, 다르게 복음을 전했으니 복음 전하는 자라기보다 차라리 저주받을 자라 불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정하는 동안 두 가지를 다 확인해 준다. 우리의 것이 앞선다는 것은 자기가 발견한 것을 교정함으로써 확인해 주고, 자기 것이 나중이라는 것은 우리의 것을 교정하여 세움으로써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확인해 준다. 번역 주석 1. 4.1 funis contentionis는 양쪽이 같은 힘으로 줄을 당기는 줄다리기의 비유이다. 양편의 주장이 똑같이 맞서 있으므로 다른 판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4.3의 ‘시간의 계산’으로 이어진다. 2. 4.3 praescribere와 praeiudicare는 소송 용어이다. praescribere는 본안 심리에 앞서 상대방의 청구 자격을 막는 항변을, praeiudicare는 본안 판결에 앞서 미리 판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더 오래된 것이 권위를 갖고 더 나중 것이 변조된 것이라는 시간 우선 원칙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29-32장과 이 책 제3권 1장에도 나온다. 3. 4.5 여기서 aemulatio는 원본을 본뜬 경쟁적 모방을 뜻하므로 ‘모방’으로 옮겼다. passio는 사물이 겪는 변화나 손상을 뜻하며 ‘겪는 일’로 옮겼다. 사물이 그 변화보다 먼저 있고 재료가 그것을 본뜬 것보다 먼저 있듯이, 참된 복음서가 변조된 복음서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4. 4.6 catholica ecclesia는 ‘보편 교회’로 옮겼다. 마르키온이 처음 로마 교회에 들어올 때 바친 돈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0장에서 2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전해지며, 거기서도 그가 출교될 때 돈이 함께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Marcionis는 사본 N의 읽기이며(M은 marcio, R은 Marcione) 마르키온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5. 4.7 ‘그 자신의 편지’는 마르키온이 쓴 편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장에서도 이 편지를 들어 마르키온이 처음에는 교회의 믿음을 가졌다고 논증한다. 이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6. 4.9 quo(그렇게 해서)는 Kroymann이 사본의 qua를 고친 것이다. inde(거기서)는 유대교를 가리키며, 유대교의 옹호자들이 율법과 예언자들을 복음서에 끼워 넣어 거기에서 그리스도까지 만들어 냈다는 것이 마르키온의 주장이다. ‘마르키온에게서도 그런지는 살펴볼 일이다’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누가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7. 4.10 ‘교정이 잘못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마르키온이 교정했다고 주장하는 복음서가 그의 교정보다 먼저 존재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8. 4.11 티베리우스 시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복음 선포가 시작된 때이고, 안토니누스 시대는 마르키온이 활동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 때이다.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보호 없이 사도들을 서둘러 보낸 것을 뉘우쳤다는 말은 비꼬는 표현이다. 9. 4.12 ‘제자라 하더라도 스승 위에 있지 못하고’는 마태복음 10:24와 누가복음 6:40을, ‘나나 그들이나 이렇게 선포한다’는 고린도전서 15:11(개역개정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을, ‘예언자들의 영도 예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는 고린도전서 14:32를 따른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복종한다’가 아니라 미래형 erunt subditi(복종해야 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10. 4.13 ‘뒤엎음의 영이 아니라 평화의 영’은 고린도전서 14: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을 예언자들의 영에 적용한 것이다. 천사라 하더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을 자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1:8을 따른 것이다. 11. 4.14 anterius(앞선다)는 Latinius가 사본의 alterius를 고친 것이다. 마르키온이 교정 작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교정 대상인 우리 복음서가 먼저 있었고 그의 복음서가 나중에 만들어졌음을 입증한다는 결론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4 5 요컨대, 더 먼저인 것이 더 참되고, <처음부터> 있던 것이 더 먼저이며, 사도들에게서 온 것이 처음부터 있던 것임이 확정된다면, 사도들의 교회들에서 신성불가침하게 지켜져 온 것이 사도들에게서 전해진 것이라는 점도 똑같이 분명히 확정될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어떤 젖을 받아 마셨는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떤 규범으로 다시 바로잡혔는지, 빌립보 사람들과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에베소 사람들이 무엇을 읽는지, 또 가까이 있는 로마 사람들이 무엇을 울려 내는지 보자. 로마 사람들에게는 베드로와 바울이 자기들의 피로도 인친 복음을 남겨 주었다. 우리에게는 요한이 길러 낸 교회들도 있다. 마르키온이 그의 계시록을 내던져 버리기는 하지만, 주교들의 계보를 기원까지 거슬러 세어 보면 요한이 그 창설자로 서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교회들의 혈통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그 교회들에서, 이제는 사도적 교회들에서만이 아니라 신비의 교제로 그들과 연합한 모든 교회들에서, 우리가 지금 무엇보다 지키고 있는 누가의 그 복음서가 펴내진 처음부터 변함없이 서 있고, 마르키온의 것은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 점 때문에 정죄되지 않은 채 알려진 곳이 하나라도 있는가? 물론 그것에도 교회들이 있지만 자기 교회들이며, 나중에 생긴 만큼이나 변조된 것들이다. 그 교회들의 계보 기록을 찾아보면 사도적인 것보다 배교적인 것을 더 쉽게 발견할 것이다. 물론 창설자는 마르키온이거나 마르키온의 벌떼 가운데 누구이다. 말벌들도 벌집을 만들고, 마르키온파도 교회들을 만든다. 사도적 교회들의 같은 권위가 다른 복음서들도 옹호해 줄 것이다. 우리는 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로 그 교회들을 통해 그 교회들을 따라 갖고 있다. 요한과 마태의 복음서를 말하는 것이다. 마가가 펴낸 것도 베드로의 것이라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 누가의 편찬물도 사람들은 흔히 바울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공포한 것이 스승들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허용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들에 관해서도 마르키온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왜 이것들은 제쳐 두고 오히려 누가의 것에 매달렸는가. 마치 이것들도 누가의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교회들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들이 더 처음부터 있었다고 믿는 것이 이치에 맞다. 사도들의 것인 만큼 더 먼저이고, 교회들 자체와 함께 봉헌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사도들은 아무것도 펴내지 않았는데 오히려 제자들이 펴냈다면, 그것이 무슨 꼴인가? 그 제자들은 스승들의 가르침이 전혀 없었다면 제자로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들도 교회들에 있었음이 확실한 이상, 마르키온은 왜 이것들에도 손대지 않았는가? 변조되었다면 교정해야 하고 온전하다면 인정해야 할 것인데 말이다. 복음을 뒤집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더 널리 받아들여진 권위를 지녔다고 알고 있던 이들의 복음서를 뒤집는 데 더 마음을 쓰는 것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라 불린 것도 그들이 거짓으로 사도들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부패했더라면 교정해야 했을 것들을 교정했을 터인 만큼, 그는 자기가 교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들이 부패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결국 그는 부패했다고 생각한 것을 교정했다. 그러나 이것도 정당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복음서들이 온전하게 이어져 내려왔고, 우리 쪽에 있는 누가의 복음서는 그들의 규범과 너무나 일치하여 교회들에서 그들과 함께 남아 있다면, 누가의 것도 마르키온의 신성모독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이어져 내려왔음이 이미 확정된다. 결국 마르키온이 그것에 손을 댔을 때, 그때 그것은 사도들의 복음서들과 다르고 그것들에 맞서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제자들에게 권고하겠다. 늦었지만 그 복음서들도 자기들 복음서의 형태에 맞게 바꾸어 놓든지, ** 그리하여 그것이 사도들의 복음서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든지 하라고. 사실 그들은 우리에게 날마다 반박당하는 대로 날마다 그것을 고쳐 만들고 있다. 아니면 두 가지 점에서 다 폭로된 자기 스승을 두고 부끄러워하라고 권고하겠다. 그는 복음의 진리를 어떤 때는 양심에 따라 그대로 넘겨주고 어떤 때는 몰염치하게 뒤엎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런 지름길들을 쓴다. 이단자들을 상대로 복음서의 신빙성을 두고 논쟁할 때, 위조자들의 후대성에 맞서 항변하는 시간의 순서와 사도들의 전승을 옹호하는 교회들의 권위를 내세워 변호하면서 그렇게 한다. 진리는 거짓보다 앞서야 하고, 진리를 전해 준 이들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5.1 ‘<처음부터>’(ab initio)는 Kroymann이 보충한 것이다. 사본은 ‘id prius quod et ab initio quod ab apostolis’로 읽고, 통행본은 ‘quod et ab initio. quod ab apostolis’로 보충한다. 어느 쪽이든 ‘더 먼저 - 처음부터 - 사도들에게서’의 세 단계 연쇄 논증이다. 2. 5.2 ‘젖’은 고린도전서 3:2를 따른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바로잡혔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1:6-9와 3:1-5에서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바로 세운 일을 가리킨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여 복음을 피로 인쳤다는 전승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6장에도 나온다. de proximo(가까이 있는)는 카르타고에서 가까운 로마를 가리킨다. 3. 5.3 마르키온이 요한계시록을 거부한 사실은 이 대목에서 확인된다. ‘요한이 길러 낸 교회들’은 아시아의 교회들, 특히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를 가리키며,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2장에서는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요한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ordo episcoporum ad originem recensus는 주교 명단을 기원까지 거슬러 세어 올라가는 것이다. 4. 5.4 generositas는 좋은 가문에서 난 혈통을 뜻하며 ‘혈통’으로 옮겼다. societas sacramenti(신비의 교제)는 같은 신앙과 세례를 나누는 교제이다. ‘펴내진 처음부터’(ab initio editionis suae)는 누가복음이 처음 세상에 나온 때부터를 뜻한다. 5. 5.5 ‘그것이 바로 그 점 때문에 정죄되지 않은 채 알려진 곳이 하나라도 있는가?’는 Kroymann이 물음표를 두고 ‘nullis autem notum ut non eo damnatum?’으로 읽은 것이다. 그는 eo(그 점 때문에)가 앞 문장의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밝혔다. 사본 R의 첫 손은 eodem natum, Oehler는 eadem damnatum으로 읽는다. examen(벌떼)은 다음 문장의 말벌 비유를 준비하는 말이다. 6. 5.6 ‘말벌들도 벌집을 만든다’는 마르키온파 교회들이 겉모습만 교회라는 뜻이다.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interpres)였다는 전승은 파피아스의 증언(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39.15)과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3.1.1에 나온다. Mathei는 Kroymann이 사본 M과 F를 따라 읽은 것이고 통행본은 Matthaei로 쓴다. 7. 5.7 capit autem(허용되는 일이다)은 Junius가 사본의 capita를 고친 것이다. 누가의 복음서를 바울에게 돌리는 관행은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3.1.1과 3.14.1에도 나온다. 8. 5.8 ‘이 복음서들’은 마태, 마가, 요한의 복음서이다. 마르키온이 누가복음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세 복음서를 버린 사실은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1.27.2와 3.11.7에도 나온다. 9. 5.13 ‘거짓 사도들이라 불린 것’은 3.3과 3.6에서 말한 갈라디아서의 거짓 형제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사도들을 흉내 냈듯이 복음서를 뒤집던 자들도 가장 권위 있는 복음서를 노렸을 것이라는 논증이며, 그렇다면 마르키온이 사도들의 복음서에는 손대지 않은 것이 그 복음서들의 온전함을 확인해 준다는 결론이다. 10. 5.15 integra(온전하게)는 Latinius가 사본의 integrae(M), integre(R)를 고친 것이다. regula eorum은 사도들의 복음서들이 담은 신앙의 규범을 뜻한다. 11. 5.17 ‘**’ 자리에 결락이 있으며 Kroymann은 별표 세 개로 표시했다. Kroymann은 여기에 aut ad formam illorum suum(아니면 자기들의 복음서를 저 복음서들의 형태에 맞추든지)과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본다. 그렇게 읽으면 ‘그리하여 그것이 사도들의 복음서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게’와 5.18의 ‘그것을 고쳐 만들고 있다’는 마르키온파 자신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uideatur(보이게)는 Kroymann이 사본의 uideantur를 고친 것이다. 12. 5.19 ex conscientia tramittit는 마르키온이 복음서의 어떤 대목은 그 내용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뜻이며 ‘양심에 따라 그대로 넘겨주다’로 옮겼다. utrobique(두 가지 점에서)는 그대로 둔 대목과 뒤엎은 대목 양쪽을 가리킨다. 13. 5.20 compendia(지름길들)는 본안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쓰는 요약 논증, 곧 항변(praescriptio)을 가리킨다. 시간 순서와 교회들의 권위라는 두 항변은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20-21장과 29-32장의 논증이다. fides euangelii는 여기서 복음서 본문의 신빙성을 뜻하여 ‘복음서의 신빙성’으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5 6 그러나 이제 여기서부터 우리는 다른 단계로 들어간다. 우리가 미리 밝힌 대로 마르키온의 복음서 자체를 법정으로 불러내어, 그것이 이런 방식으로도 변조되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사실 분명히, 그가 『안티테시스』(Antitheses)를 미리 세워 둔 것까지 포함하여 공들여 만든 모든 것을 그는 다음 한 가지로 몰아간다. 곧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립하면서>, 그에 따라 자기 그리스도를 창조주에게서 분리된 자로, 다른 신의 그리스도로,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낯선 자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 견해에 반대되는 것들, 곧 창조주와 일치하는 것들은 마치 창조주의 옹호자들<이> 짜 넣은 것인 양 모두 지워 버렸고, 자기 견해에 맞는 것들은 남겨 두었다. 이것들을 우리는 따져 볼 것이고, 이것들을 우리는 끌어안을 것이다. 그것들이 오히려 우리 편이라면 말이다. 그것들이 마르키온의 억측을 쳐부순다면, 그때에는 저것들도, 이것들이 남겨진 것과 같은 이단적 눈멂의 결함으로 지워졌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 소책자의 의도와 형식은 이러할 것이다. 물론 양편에서 합의된 저 조건 아래에서다.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가 서로 다른 둘이라고 정한다. 하나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신에게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계시된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유대 국가의 회복을 위해 정해져 언젠가 올 그리스도이다. 이 둘 사이에 그는 크고 전면적인 차이를 갈라 놓는다. 정의로운 것과 선한 것 사이만큼, 율법과 복음 사이만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만큼 큰 차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선결 항변도 나온다.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신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공통된 것을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확정한다. 그렇지 않고, 그가 창조주의 경륜을 집행했다면, 그의 예언을 성취했다면, 그의 율법을 뒷받침했다면, 그의 약속을 실현했다면, 그의 권능의 일들을 다시 일으켰다면, 그의 판결들을 다시 새겼다면, 그의 품성과 고유한 특성들을 드러냈다면, 그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라고 선고되어야 한다. 독자여, 그대에게 청하니, 이 약정과 이 선결 항변을 어디서나 기억하라. 그리고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인지 창조주의 그리스도인지 식별하기 시작하라. 번역 주석 1. 6.1 prouocare는 상대를 법정에 불러내어 다툰다는 법률 용어이며, 이 장 전체가 소송의 비유(conuenire, praescriptio, pactum, condicio condicta)로 짜여 있다. 1-5장이 복음서의 사도적 권위와 선후 관계를 다루었고, 이 장부터는 마르키온 복음서의 본문 자체를 검토하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2. 6.2 constitua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M과 R에는 constituat 하나만 있어 ‘차이를 확립하면서 자기 그리스도를 ... 확립한다’는 이중 구조가 드러나지 않는다. 보충된 분사를 <확립하면서>로 옮겼다. dei alterius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M과 R은 deum으로 읽는다. 3. 6.2 testamentum은 언약과 그 문서를 함께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두 성경의 대립을 모으는 책이므로 구약과 신약으로 옮겼다. 4. 6.3 는 R의 읽기이며 M과 F에는 없다. 전치사 보충을 주격 조사 <이>로 표시했다. eius는 창조주를 가리키므로 ‘창조주의 옹호자들’로 옮겼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와 일치하는 누가복음의 구절들을 유대주의자들이 끼워 넣은 것으로 보고 삭제했다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전제이다. 5. 6.4 haec는 마르키온이 남겨 둔 구절들, illa는 그가 지운 구절들이다. Kroymann은 amplectemur 뒤에 쌍점을, fuerint 뒤에 마침표를 두어 ‘우리 편이라면’을 앞 문장의 조건으로, ‘억측을 쳐부순다면’을 tunc 문장의 조건으로 읽는다. 통용 본문은 amplectemur 뒤에 쉼표, percusserint 뒤에 마침표를 두어 두 조건절을 모두 앞 문장에 붙인다. 번역은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랐다. 6. 6.6 Tiberianis temporibus는 누가복음 3:1의 연대 표시를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회복을 위해 장래에 올 메시아로 따로 두고, 티베리우스 때 나타난 그리스도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신의 계시로 본다. 7. 6.7 iustum et bonum은 마르키온이 창조주를 정의로운 신, 자기 신을 선한 신으로 나누는 대립을 가리킨다. 제1-2권에서 다룬 그 구분을 여기서는 중성 추상명사로 쓰므로 ‘정의로운 것과 선한 것’으로 옮겼다. 8. 6.8 praescriptio는 로마 소송에서 본안 심리에 앞서 제출하는 항변으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논증의 선결 규칙이라는 뜻으로 쓴다. ‘선결 항변’으로 옮기고 6.10의 praescriptum도 같은 말로 옮겼다. 6.10의 pactum은 6.5의 ‘양편에서 합의된 조건’을 가리킨다. 9. 6.9 uirtutes는 여기서 창조주가 행한 능력의 일들, 곧 기적을 뜻하므로 ‘권능의 일들’로 옮겼다. sententiae는 창조주의 판결과 선언을, mores와 proprietates는 그의 품성과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6 7 티베리우스 통치 제15년에 그가 갈릴리의 도시 가버나움으로 내려왔다고 마르키온은 내세운다. 물론 창조주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인데, 그 하늘로 그는 자기 하늘에서 먼저 내려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먼저 자기 하늘에서 창조주의 하늘로 내려오는 장면이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서에 맞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거짓말에서는 언제나 무너지고 마는 질서 있는 서술, 그 서술의 신빙성을 채우지 못하는 이런 점들도 내가 어찌 책잡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룬 논점들은 한 번 말한 것으로 치자. 곧 창조주를 거쳐, 더구나 창조주를 거슬러 내려오는 자가 창조주에게 받아들여지고 거기서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것인 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가 “내려왔다”는 말을 붙들고서 내려옴의 나머지 순서도 요구한다. 어디에 “나타났다”고 적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나타난다는 것은 뜻밖에 갑자기 들어온 시야를 함축하며, 그 시야는 지체 없이 나타난 것에 단번에 눈을 부딪친다. 그러나 내려온다는 것은 일어나는 동안 보이며,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눈을 붙들어 둔다. 또한 그것은 순서를 만들어 내며,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차림새로, 얼마나 세차게 또는 얼마나 느릿하게, 또 낮이나 밤의 어느 때에 내려왔는지를 따져 묻게 만든다. 그 밖에도 누가 내려오는 그를 보았는지, 누가 전했는지, 누가 그 일을 확언했는지를 묻게 하는데, 그 일은 확언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쉽게 믿어 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로물루스는 자기가 하늘로 올라간 일에 대해 프로쿨루스라는 확증자를 두었는데, 신의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일에 대해 알려 주는 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부당하다. ** 마치 저 사람도 이 사람이 내려온 것과 똑같은 거짓의 사다리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가 창조주의 것이 아니었다면 갈릴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는 선포를 시작할 때 이 지역이 정해져 있었으니,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것을 먼저 마셔라, 속히 행하라, 스불론 지방과 납달리 땅이여, 그리고 해변 땅에 사는 그 밖의 사람들과 요단 땅이여, 이방인들의 갈릴리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아, 큰 빛을 보라. 사망의 그늘에 앉아 땅에 사는 자들아, 빛이 너희 위에 떠올랐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르키온의 신도 이방인들을 비추는 자로 주장된다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그는 설령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더라도 갈릴리보다는 폰토스로 내려와야 더욱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소도 비춤의 일도 예고대로 그리스도에게 들어맞으므로, 우리는 이미 그가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첫 등장에서 자기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음을 보여 준다. 마르키온은 이 말을 덧붙여진 것이라 하여 지워 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곧바로 일부나마 실행한 그 말을 했음을 그가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선 장소에 관한 예언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곧장 회당으로 갔으니. 흔히 하는 말대로 “우리가 온 목적, 그것을 하라.” 마르키온, 복음서에서 다음 말도 치워 버리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가 아니면 보내지지 않았다”는 말과, “자녀들에게서 빵을 빼앗아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내게는 말 대신 행적으로 충분하다. 내 그리스도의 말들을 떼어 내 보라. 사실들이 말할 것이다. 보라, 그는 회당으로 들어갔다. 분명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간 것이다. 보라, 그는 자기 가르침의 빵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내놓는다. 분명 그들을 자녀로서 앞세우는 것이다. 보라, 다른 이들에게는 아직 그 빵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분명 그들을 개들로서 지나쳐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것이 아니었다면, 창조주에게 낯선 자들보다 누구에게 더 나누어 주었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갑작스럽고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자가 어떻게 회당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의 지파에 대해, 백성에 대해, 집안에 대해, 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조사에 대해 아직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 호적 조사는 주의 탄생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증인으로서 로마의 문서고가 보관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할례 받은 자임을 알지 못하면 지성소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회당에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하더라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주 잘 알려지고 검증되고 바로 이 일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받은 사람이나, 다른 곳에서 이 직무와 함께 추천받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렇다. “그의 말이 권능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거슬러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의 신적인 말은 힘과 은혜를 드러내면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실체를 허물기보다 오히려 세워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놀라지 않고 몸서리쳤을 것이며, 경탄하지 않고 율법과 예언자들의 파괴자, 더구나 무엇보다도 다른 신의 선포자를 곧바로 외면했을 것이다. 서로 다르고 맞서는 신성에 대한 고백을 먼저 내놓지 않고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거슬러, 그리고 그런 명목으로 창조주를 거슬러 가르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런 것은 전혀 표시하지 않고 오직 말의 힘과 권능만이 경탄을 샀다고 하므로, 성경은 그가 창조주를 거슬러 가르쳤다고 보여 주기보다 창조주를 따라 가르쳤다고 보여 주는 쪽이 더 쉽다. 후자는 부정하지 않았고 전자는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그 뜻을 따라 가르친 자의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거슬러 왔던 자를 따라 가르쳤다면 배신자로 판정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귀신의 영이 외친다. “예수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 호칭마저 그에게 합당했는지는 다시 다루지 않겠다. 그는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라고 불려서도 안 될 자이다. 이름들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따진 바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을 논한다. 알려지지 않았고 그 당시까지 말이 없던 신이 그에 관하여 그 이전에 어떤 예고도 결코 내놓은 적이 없는데, 귀신이 어떻게 그가 이렇게 불린다는 것을 알았는가? 귀신은 그를 그 신의 거룩한 자로 증언할 수도 없었다. 그 신은 귀신 자신의 창조주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자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다른 신의 거룩한 자로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어떤 새로운 신성의 일을 그때까지 내놓았던가? 겨우 회당에 들어섰을 뿐이고, 말로도 창조주를 거스르는 일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터였는데>? 그러므로 귀신은 자기가 모르는 자를 예수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결코 알아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자기가 아는 자를 알아본 것이다. 귀신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선포했다는 것과, 예수가 눈의 아들에게 주어진 주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은 이것을 우리 복음서에 따르면 천사에게서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네 안에서 태어날 이는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또한 귀신은, 귀신이기는 했지만, 주의 계획에 대해 어떤 감각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낯선 신의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계획에 대해서보다는 말이다. 귀신이 먼저 “예수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말한 것도 낯선 자에게 하듯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의 영들이 속해 있는 자에게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하지 않고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한탄하며 자기 운명을 꾸짖은 것이다. 그 운명을 이미 눈앞에 보면서 귀신은 덧붙인다. “당신은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다.” 그만큼 귀신은 예수를 심판자이자 보복자이며, 말하자면 혹독한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본 것이지, 멸하는 것도 벌하는 것도 모르는 저 지극히 선한 신의 아들로 알아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대목을 왜 먼저 내놓았는가? 귀신도 예수를 창조주의 예수 외에 다른 자로 알아보지 않았고, 예수 자신도 자기를 다른 자로 확인하지 않았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대는 말한다, “예수가 그를 꾸짖었다.” 그렇다. 미움을 사는 자, 바로 그 고백에서도 방자한 자, 잘못 아첨하는 자로서 꾸짖은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귀신들의 멸망을 위해 왔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최고 영광이라도 되는 듯이 말했으니. 그리스도는 제자들조차 영들을 제압한 일이 아니라 구원의 흰옷을 자랑하기를 원했다. 아니면 왜 그를 꾸짖었는가? 만일 완전히 거짓말을 한 자로서 꾸짖었다면, 그는 예수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도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만일 부분적으로 거짓말을 한 자로서, 곧 그를 예수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여기기는 했으되 창조주의 것으로 여겼다는 이유로 꾸짖었다면, 자기가 생각해야 한다고 알고 있던 바를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던 바를 생각하지 않은 자를 더없이 불의하게 꾸짖은 것이다. 곧 다른 예수, 다른 신의 거룩한 자를 말이다. 그런데 만일 그 꾸짖음이 우리가 해석하는 것 말고 더 그럴 법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그러면 귀신도 아무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며 거짓말 때문에 꾸짖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바로 예수였고, 귀신은 그 외에 다른 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예수는 귀신이 알아본 그 자신을 확인해 주었다. 거짓말 때문에 귀신을 꾸짖은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번역 주석 1. 7.1 누가복음 3:1; 누가복음 4:31.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누가복음 1:1-4:30(탄생 기사, 세례 요한, 족보, 시험, 나사렛 설교)이 없이 ‘티베리우스 제15년에’(누가복음 3:1)를 가버나움으로 ‘내려왔다’(누가복음 4:31, 개역개정 ‘내려오사’)에 곧장 이어 시작했다. 마르키온은 이 ‘내려옴’을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읽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9장에서도 이 시작을 다루었다. 2. 7.2 ecquid는 Rigaltius의 추정이며 사본 M, R은 et quid로 읽는다. 3. 7.4 ‘다른 곳에서’는 마르키온의 신에게 자기 세계가 없고 창조주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논증(제1권 15-16장)을 가리킨다. an(~인지)은 R의 읽기이고 M은 ac로 읽는다. 4. 7.6 ‘subicit oculos de facto’는 Kroymann의 구두점이다. 통행본은 ‘subicit oculos. de facto etiam ordinem facit’로 끊어 ‘de facto’를 7.7의 첫머리에 둔다. Kroymann은 ‘내려옴은 일어나는 동안 지각되며,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눈을 위로 향하게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읽었다. subicit는 M의 읽기이며 R은 subit로 읽는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5. 7.9 로물루스가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언한 사람은 프로쿨루스 율리우스(Proculus Iulius)이다(리비우스 『로마사』 1.16). Kroymann은 adnuntiatorem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ut sic interim agamus’(우선 이렇게 논의를 진행한다면)와 같은 말을 보충하기를 바랐다. Engelbrecht는 탈문 없이 ‘ quasi non sic’으로 읽는다. ‘저 사람’은 로물루스, ‘이 사람’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이다. ‘신의’(dei)는 사본 N과 Pamelius에 없다. 6. 7.10 ‘창조주의 것’(creatoris)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뜻한다. 7.10의 물음은 7.12의 인용 끝까지 이어지는 한 문장이다. 7. 7.11 이사야 9:1(칠십인역 8:23); 마태복음 4:15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첫머리 ‘Τοῦτο πρῶτον πίε, ταχὺ ποίει’(이것을 먼저 마셔라, 속히 행하라)를 그대로 옮긴 옛 라틴 본문을 따르며, 개역개정 9:1에는 이 말이 없다. bibito(마셔라)는 R 초판의 읽기이고 M과 F는 ibito, R 제3판과 Gelenius는 obito로 읽는다. Kroymann은 ‘qui maritimam’을 ‘해변 땅에 사는 자들’, ‘Iordanis’를 ‘요단 땅’으로 보충해 읽고 nationum 뒤에서 크게 끊었다. 개역개정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로 옮긴다. 8. 7.12 이사야 9:2(칠십인역 9:1); 마태복음 4:16 참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앉아 있는 백성아, 보라’라는 명령형이고, 개역개정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는 서술형이다. ‘너희 위에’(super uos)는 M, R의 읽기이며 N은 uobis로 읽는다. 9. 7.13 폰토스는 흑해 남안 지방으로 마르키온의 고향 시노페가 있는 곳이다. ‘uel de caelo etsi descendere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 R은 ‘debuerit uel de caelo descendere, etsi’로 읽는다. 10. 7.14 마태복음 5:17. ‘예고대로’(secundum praedicationem)는 7.11-12에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을 가리킨다. 11. 7.15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은 마태복음 5:17에만 있고 누가복음에는 평행 구절이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이 말을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자기 복음서에서 지웠다고 말한다. ‘부인해도’(negabit)는 R 제3판의 읽기이며 M과 R 초판은 negauit(부인했다)로 읽는다. 12. 7.18 마태복음 15:24. 개역개정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누가복음에는 없는 말이다. 13. 7.19 마태복음 15:26. 개역개정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non est’는 그리스어 οὐκ ἔξεστιν(허락되지 않는다)에 해당하며 Latinius는 est (좋지 않다)을 보충했다. ‘보이지 않게’(uideatur)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은 uideretur로 읽는다. 14. 7.24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조사는 누가복음 2:1-2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호적 기록이 로마의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하며, 19장에서는 이 호적을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치하에 시행된 것으로 말한다. 15. 7.25 누가복음 4:16. ‘지성소’(sancta sanctorum)는 성전의 가장 안쪽 공간을 가리키는 말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회당의 예배 공간을 가리키는 데 느슨하게 쓴다. 16. 7.26 Kroymann은 ‘cum hoc munere’(이 직무와 함께)가 후대 삽입일 수 있다고 보았다. 앞의 ‘in hoc ipsum’(바로 이 일을 위해)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보충해 읽는 편이 훨씬 낫다는 이유이다. 번역은 전승된 본문대로 옮겼다. 17. 7.27 누가복음 4:32. 개역개정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in potestate erat sermo eius’이며 potestas를 ‘권능’으로 옮겼다. ‘놀랐다’(stupebant)는 개역개정의 ‘놀라니’에 해당한다. 18. 7.28 Kroymann은 ‘diuinum et ui et gratia praestabat’(신적인 말은 힘과 은혜에서 뛰어났다)로 읽을 가능성을 적어 두었다. 번역은 본문의 대격 uim et gratiam을 따라 ‘힘과 은혜를 드러내면서’로 옮겼다. 19. 7.29 ‘서로 다르고 맞서는 신성’(diuersae atque aemulae diuinitatis)의 aemulus는 창조주와 겨루는 경쟁자라는 뜻이다. ‘가르칠 수도’(potuisset)는 R의 읽기이며 M과 F는 pocius set으로 읽는다. 20. 7.31 praeuaricator는 소송에서 자기 의뢰인을 저버리고 상대편과 내통하는 변호인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며 ‘배신자’로 옮겼다. 창조주를 거슬러 왔다면서 창조주를 따라 가르쳤다면 자기 신을 배신한 셈이라는 뜻이다. 21. 7.32 누가복음 4:33-34. ‘귀신의 영’은 누가복음 4:33의 ‘더러운 귀신의 영’이다. 개역개정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나사렛’이 없으며, 7.41에서 그는 ‘우리와 당신’이라는 어순을 근거로 논증한다. 22. 7.33 누가복음 4:34. 개역개정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름들에 관한 ‘다른 곳’은 그리스도와 예수라는 이름을 다룬 제3권 15-16장이다. ignoti(알려지지 않은 자)와 iam은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은 ignoto, iam으로 읽는다. ‘귀신 자신의 창조주’(ipsi suo creatori)는 Kroymann의 설명대로 귀신을 만든 창조주를 뜻한다. 번역은 보충된 et를 <조차>로 옮겼다. ‘이름들에 관해서는...따진 바 있다’를 삽입구로 본 것은 Engelbrecht의 구두점이다. 23. 7.35 는 Kroymann이 보충한 조동사이며 번역에서는 <터였는데>로 나타냈다. 24. 7.37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선포한 예언자 본문은 시편 16:10(칠십인역 15:10 ‘주의 거룩한 자’; 사도행전 2:27)이다. ‘눈의 아들’은 여호수아이며, 칠십인역과 옛 라틴 본문은 그를 Iesus Naue(눈의 아들 예수)로 부른다. 여호수아가 예수(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받은 일은 제3권 16장에서 다루었다. ‘주의 이름’(nomen domini)에서 domini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은 dei(하나님의 이름)로 읽는다. Kroymann은 신명기 28:10을 참조로 든다. 25. 7.38 누가복음 1:35; 누가복음 1:31. 테르툴리아누스는 두 구절을 거꾸로 인용한다. 개역개정 1:35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1:31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네 안에서 태어날 것은 거룩한 자라 불릴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sanctum이 중성이다. ‘우리 복음서에 따르면’은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눅 1-2장이 없음을 전제한 말이다. 26. 7.39 dispositio는 하나님이 미리 정해 두고 이루어 가는 구원의 경륜을 가리키며 ‘계획’으로 옮겼다. ‘귀신이기는 했지만’은 삽입구이다. 27. 7.40 ‘예수여’(Iesu)는 사본 M, R에서 extraneum 뒤에 전승되었고 Junius가 인용문 안으로 옮겼다. Oehler는 사본 위치로 되돌렸으나 Kroymann은 이를 부당하다고 보고 Junius를 따랐다. (오히려)는 Junius의 보충이다. ‘창조주의 영들’은 귀신들도 창조주가 지은 영으로서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28. 7.43 누가복음 4:34. ‘지극히 선한 신’(optimi illius)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혹독한 하나님’(saeui dei)은 마르키온이 창조주를 가리켜 쓰는 말투를 ‘말하자면’이라는 유보와 함께 빌려 쓴 것이다. 29. 7.45 ‘구원의 흰옷’(candida salutis)에서 candida는 승리자나 후보자가 입는 흰 토가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귀신들을 제압했다고 기뻐했을 때 그리스도가 하늘에 기록된 이름을 기뻐하라고 한 말(누가복음 10:17-20)을 가리킨다. 30. 7.47 ‘자기가 생각해야 한다고 알고 있던 바’는 예수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고, ‘생각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던 바’는 7.48 첫머리의 ‘다른 예수, 다른 신의 거룩한 자’이다. 7.47의 끝 콜론이 7.48로 이어진다. 31. 7.48 status는 소송에서 주장이 서는 근거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며 ‘근거’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7 8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예언에 따라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바로 그 이름으로, 그를 따라 우리를 나사렛 사람들이라 부른다. 사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이 눈보다 더 희게 되었다”라고 기록된 바로 그 사람들이다. 곧 전에는 범죄의 얼룩으로 누렇게 더러워지고 무지의 어둠으로 검게 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 사람이라는 호칭은 유년기의 은신처에서 비롯하여 어울리게 될 것이었다. 그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를 피하여 나사렛에 있는 그 은신처<로> 내려갔다. 내가 이것을 빠뜨리지 않은 까닭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면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친숙한 장소들과의 모든 교류까지도 끊어 버려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예언자들을 통해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넘겨지지 않은 유대의 성읍들이 그토록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예언자들에 따라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리스도는 예언자들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사렛에서조차 그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선포했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다른 이유 [한 격언] 때문에 쫓겨났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댄 것을 보면서, 나는 이제 그의 몸의 실체에 관하여 미리 규정해 두어야 한다. 붙들리고 잡혀 벼랑까지 끌려가면서 접촉을, 그것도 폭력으로 가득한 접촉을 받아들인 이는 환영으로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그들 가운데를 지나 빠져나갔다 해도, 이미 그 전에 폭력을 겪었고 그 뒤에 풀려난 것이다. 곧 흔히 그렇듯이 소동이 가라앉았거나 혹은 그가 뚫고 나갔기 때문이지, 안개 같은 어둠으로 소동을 따돌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어둠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접촉에도 전혀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몸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없다는 말은 세속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도 귀담아들을 만한 격언이다. 요컨대 그 자신도 곧 다른 사람들을 만졌고, 그들에게 당연히 감각될 수 있는 손을 얹어 치료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은혜는 그것을 베푼 손이 참되고 상상의 것이 아니었던 만큼 참되고 상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바로 이사야의 그리스도, 병을 고치는 이다. “이 사람이 우리의 연약함을 없애고 질병을 짊어진다”라고 이사야는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짊어지다’를 ‘없애다’라는 뜻으로도 흔히 쓴다. 당장은 이 일반적인 약속만으로 내게 충분하다. 예수가 무엇을 고쳤든 그는 나의 것이다. 그렇지만 치료의 개별 사례들에도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에게서 풀어 주는 것도 병의 치료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이미 앞선 사례의 정식을 따르는 듯이 증언과 함께 이렇게 외치며 나갔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어느 신의 아들인지, 적어도 여기서는 분명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찬가지로 꾸짖음을 받고 잠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더러운 영들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이 어울리는 그리스도, 곧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게 할 이들, 그것도 훨씬 더 합당한 선포자들을 앞서 보냈던 그 그리스도만이 그렇다. 더러운 영의 선포를 물리치는 것은 거룩한 영의 선포가 넘쳐 났던 이의 몫이었다. 그러나 미리 전해진 바가 전혀 없던 자는, 그래도 인정받기를 원했다면 - 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온 것은 헛일이었을 것이다 - 낯선 실체든 어떤 실체든 그 증언을 멸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낯선 실체 속으로 내려온 자에게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가 창조주의 파괴자인 한에서는, 창조주의 영들에게서 두려움 때문에 인정받고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 더 바랐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마르키온은 자기 신이 두려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선한 신은 두려움을 받지 않고 심판자가 두려움을 받으며 그에게는 두려움의 재료인 분노와 가혹함과 심판과 응징과 정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귀신들도 분명히 두려움 때문에 물러갔고 -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해야 할 신의 아들을 고백한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신의 아들이었다면 그들에게는 물러가지 않을 구실이 있었을 것이다 - 그는 선한 자로서의 설득이 아니라 명령과 꾸짖음으로 그들을 내쫓으면서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을 보였다. 아니면 그는 두려움을 받고 있었기에, 두려움 받기를 원치 않아서 꾸짖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들이 나가기를 원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고는 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러므로 그는 선한 자로서 그들을 아예 아껴 줄 수도 있었는데도 자기 본성과 어긋나게 행동하는 궁지에 빠졌고, 또 다른 배반의 오점에도 빠졌다. 그는 자신이 창조주의 아들인 것처럼 귀신들에게 두려움 받는 것을 감수했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고유의 권능으로 귀신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위를 통해 내쫓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야로 나아간다. 이런 지역 또한 창조주에게 익숙한 곳이다. 말씀이 한때 구름 속에서도 활동했던 그곳에서 몸으로도 보여야 마땅했다. 율법의 마음에도 들었던 장소의 성격이 복음에도 어울렸다. 그러므로 광야는 기쁨을 얻으라. 이것을 이사야가 약속했었다. 무리에게 붙들리자 그는 “나는 다른 성읍들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미 어디선가 자기 신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가? 아직까지는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그는 다른 신도 알고 있던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는가? 이것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도 다른 신을 내놓은 적이 없고 그들도 창조주 외에는 알지 못했다면, 그는 듣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신이라고 자신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신의 나라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주석 1. 8.1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었다’는 마태복음 2:23(“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을 가리킨다. Nazaraeus/Nazarenus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호칭이기도 하다(사도행전 24:5의 “나사렛 이단”). 사본 MR은 Nazarenos, Pamelius는 Nazaraeos로 읽는다. 2. 8.2 인용은 예레미야애가 4:7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nezirim을 “존귀한 자들”로 옮기지만, 칠십인역은 Ναζιραῖοι(나실인들)로 음역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나사렛 사람들로 읽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 exalbati(희게 되었다)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exaltati(높여졌다)로 전한다. 3. 8.3 마태복음 2:22-23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22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요셉이 그리로 가기를 무서워하여 갈릴리로 떠난 일을 전한다. 은 Kroymann의 보충이고 Gelenius는 를 넣었다. 둘 다 ‘그 은신처로’의 뜻이다. 4. 8.4 emancipata는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법률 용어다. 예언자들이 나사렛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미리 할당했으므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면 그렇게 지정되지 않은 다른 유대 성읍을 택해야 했다는 논리다. Junius는 mancipata로 고쳤으나 뜻은 같다. 5. 8.5 ‘쫓겨났다’는 누가복음 4:29를 가리킨다. Kroymann은 alio merito를 ‘다른 잘못 때문에’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쫓겨난 까닭이 새로운 선포가 아니라 누가복음 4:23의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전승 본문의 unius prouerbii(한 격언, 곧 누가복음 4:24의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는 Kroymann이 alio merito를 풀이하려고 누가복음 4:24에서 끌어온 서투른 주석이 본문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하여 괄호로 묶었다. 번역은 merito를 ‘이유’로 옮기고 괄호 안의 말을 그대로 두었다. 6. 8.6 누가복음 4:29(“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폭력적 접촉을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phantasma)이 아니라는 첫 증거로 삼는다. 7. 8.7 누가복음 4:30(“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탈출을 소동이 가라앉았거나 그리스도가 뚫고 나간 것으로 설명하며, 안개나 환영으로 사라졌다는 해석을 배제한다. 8. 8.8 ‘몸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없다’는 Lucretius, De rerum natura 1.304의 시행 tangere enim et tangi nisi corpus nulla potest res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Oehler는 sapientiae를 sapientia로 고쳤다. 9. 8.10 이사야 53:4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태복음 8:17의 인용 형태(“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에 가깝다. 10. 8.11 테르툴리아누스는 ‘짊어지다’(portare)로 옮겨진 그리스어 동사(칠십인역 이사야 53:4의 φέρειν, 마태복음 8:17의 βαστάζειν)가 ‘없애다’(tollere)의 뜻도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가 병을 치료하여 없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11. 8.14 ‘앞선 사례’는 누가복음 4:34의 가버나움 회당 귀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외친 일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누가복음 4:41의 귀신들의 외침이다. 12. 8.15 누가복음 4:41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이다. 따옴표 안의 두 번째 문장(“그러나 그들은 마찬가지로 꾸짖음을 받고...”)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귀신들의 증언을 그리스도가 거절했으므로 그가 창조주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13. 8.17 사본 MR은 cui sancti abundabant로 전하는데, Kroymann은 abundabat로 고치고 sancti를 sancti spiritus praeconium(거룩한 영의 선포)으로 이해했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라 ‘거룩한 영의 선포가 넘쳐 났던 이’로 옮겼다. 뒤의 quia(때문이다)도 Kroymann이 사본의 qui를 고친 것이다. 14. 8.19 마르키온의 입장은 선한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심판자인 창조주만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materiae timoris(두려움의 재료)는 분노(ira), 가혹함(saeuitia), 심판(iudicia), 응징(uindicta), 정죄(damnatio)를 가리킨다. 15. 8.20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해야 할 신의 아들을 고백한 것이다... 구실이 있었을 것이다’는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16. 8.22 praeuaricatio는 소송에서 상대편과 내통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로, 여기서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아들 노릇을 하여 자기 신의 입장을 배반했다는 뜻이므로 ‘배반’으로 옮겼다. sustineret(감수했고)는 R의 읽기이고 M은 sustineri et, F는 sustinere et로 읽는다. 17. 8.23 누가복음 4:42를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한적한 곳”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이사야 35:1의 광야와 연결하므로 solitudo를 두 곳(8.23, 8.24) 모두 ‘광야’로 옮겼다. ‘구름 속에서 활동했던’은 출애굽기 13:21의 구름 기둥을 가리키며, sermo(말씀)는 성육신 이전에도 활동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Kroymann은 in corpore 앞에 를 넣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18. 8.24 ‘광야는 기쁨을 얻으라’는 이사야 35: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을 가리킨다. 19. 8.25 누가복음 4:43을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이다. 20. 8.26 사본은 de his loquebatur(이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로 전하지만, Kroymann은 de를 괄호로 묶어 his loquebatur(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로 읽는다. 번역은 ‘사람들을 상대로’로 기본 뜻을 살리고 괄호 안에 de의 뜻을 두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8 9 그토록 많은 종류의 일 가운데서 그는 도대체 왜 어업을 돌아보아 거기에서 시몬과 세베대의 아들들을 사도로 뽑았는가? - 논증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던 일을 단순한 행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힌 것에 떨고 있던 베드로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들을 잡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 말로 그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깨달음을, 곧 자기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렇게 선언했던 바로 그 사람임을 그들에게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저들을 낚을 것이다.” 저들이란 곧 사람들이다. 마침내 그들은 배를 버려두고 그를 따랐으니, 자기가 공언한 바를 행하기 시작한 그 사람이 바로 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언젠가 선주 마르키온을 사도로 삼게 될 터라 선주들의 조합에서 뽑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이미 『안티테시스』(Antitheses)에 맞서, 마르키온이 생각하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그의 주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곧 이 차이 또한 창조주가 마련한 것이고 더구나 새 율법과 새 말씀과 새 언약의 약속 가운데 미리 선포된 것임을 미리 확립해 두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그 누군지 모를 συνταλαίπωρον(함께 고생하는 자)이자 συνμισούμενον(함께 미움받는 자) 앞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에 관하여 더 열심히 논증하므로, 나는 그에게 맞서서 무엇보다 먼저 예표로 주어진 율법의 효력을 보여 주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 율법은 나병 환자를 만지지 말고, 아니 모든 교제에서 떼어 놓으라는 본보기 안에서, 범죄들로 더러워진 사람과의 사귐을 금했는데, 사도 역시 그러한 자들과는 음식조차 함께 먹지 말라고 금한다. 누구든 죄인과 어울리면 마치 전염에 의한 것처럼 범죄의 낙인을 함께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는 육적인 것들을 통해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율법이 더 깊이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또 이 점에서, 더 적실하게 인식되기를 원했던 그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세우면서, 나병 환자를 만졌다. 설령 사람은 그에게서 더러워질 수 있었다 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더러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물론 오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과의 접촉이 더럽힐 수 없었던 그에게, 율법을 지켜 부정한 자를 만지지 말아야 했다는 항변은 제기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그대의 그리스도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증명함으로써, 나는 이것이 오히려 나의 그리스도에게 해당됨을 이렇게 가르친다. 그가 율법의 적수로서 나병 환자를 만졌고, 더러움을 무시함으로써 율법의 계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면, 더러워질 몸이 없었던 그가 어떻게 더러워질 수 있었겠는가? 환영은 더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영으로서 더러워질 수 없었던 자는, 이제 신적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영의 공허함에 의해서 오염될 수 없는 자가 될 것이고, 자기에게 그 재료가 없었던 더러움을 무시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능력을 드러냄으로써가 아니라 환영이라는 사정 덕분에 더러움을 피한 자가 율법을 파괴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창조주의 예언자 엘리사가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했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다름을 입증하지 못한다. 마치 자기 주가 깨끗하게 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나병 환자를 외부자가 깨끗하게 한다는 이 방식으로 그가 더 나은 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수리아 사람이 더 쉽게 깨끗해진 것으로써 그는 † 민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결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그 민족들의 빛이며, 그 민족들은 일곱 가지 중대한 범죄의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 우상 숭배, 신성 모독, 살인, 간음, 음행, 거짓 증언, 사기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항목마다 하나씩인 듯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으니, 이는 동시에 한 주간 전체의 속죄를 노래하기 위해서였고, 또 단 한 번의 씻음이 지닌 힘과 충만함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바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땅 위에서 말씀을 간략하게 한 것처럼 씻음도 그렇게 간략하게 할 것이었다. 마르키온은 이것도 반론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재료가 필요했고 물을 썼으며 그것도 일곱 번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오직 말만으로, 그것도 단 한 번 쓴 말로 즉시 치유를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말 자체도 창조주의 실체에 속한다고 주장할 용기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것에서도 먼저인 자가 더 우월한 창시자가 아닌 경우는 없다. 말로써 그토록 큰 세계의 덩어리를 단번에 내놓은 창조주의 권능이 말로써 한 가지 병의 치료를 이루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말의 권능에서보다 어디에서 더 잘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므로 다른 그리스도다. 엘리사와는 다르게 했기 때문이며, 주는 자기 종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마르키온, 그대는 무엇을 정하는가? 종들도 주인들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인가? 그대가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유가, 그가 창조주의 종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고 엘리사의 작음에 비하여 더 크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라면 - 과연 더 크다면 말이지만 - 그것이 그대에게 수치로 돌아가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가? 치유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수행 방식은 다르다 해도 그렇다. 그대의 그리스도가 나의 엘리사보다 무엇을 더 이루었는가? 아니, 그대의 그리스도의 말이 무슨 큰 일을 이루었는가? 그것이 이룬 일은 창조주의 강이 이룬 일인데. 이에 따라 나머지 점들도 답을 얻는다. 사람의 영광을 피하는 일에 관련되는 한 그는 그 사람에게 이를 퍼뜨리지 말라고 금했고, 율법을 보호하는 일에 관련되는 한 정해진 절차를 다 이행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가라,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라.” 그는 율법의 예표적 논거들을 - 예언하는 율법의 것이니만큼 - 아직 그 형상들 안에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논거들은 한때 죄인이었던 사람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지면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려야 함을 나타냈는데, 그것은 곧 아버지의 보편적 제사장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와 감사다. 그래서 그는 덧붙였다. “너희에게 증언이 되게 하라.” 분명히 이 말로 그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을 증언했고, 이 말로 자기가 바로 그들의 병과 질환을 짊어질 것이라고 예고된 그 사람임을 증언했다. 이 증언에 대한 이토록 적합하고 마땅한 해석을, 자기 그리스도의 아첨꾼 마르키온은 온유함과 부드러움이라는 핑계 아래 배제하려 한다. “그는 선한 자로서”라고 그는 말한다. “게다가 나병에서 해방된 자는 누구나 율법의 의식들을 이행할 것임을 아는 <자로서>, 그래서 그렇게 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율법을 파괴할 자로서 헛되이 내려온 것이다.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양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방식을 아는 자였다면, 그가 이것을 위하여 왔을 경우, 오히려 그들을 그 방식에서 돌이키도록 미리 손을 써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선함에, 곧 율법을 허용하는 데 끝까지 머물렀는가, 아닌가? 그가 선한 자로 끝까지 머물렀다면, 그는 어디에서도 율법의 파괴자가 아닐 것이고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다른 신에게 속한다고 주장되는 근거인 율법의 파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선한 자로 끝까지 머물지 않고 나중에 율법을 파괴했다면, 그렇다면 그는 나병 환자를 치유할 때 [나중에] 그들 가운데 거짓 증언을 세운 것이다. 율법을 파괴하면서 그는 선함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허용하는 자였을 때 선했다면, 율법을 뒤엎는 자가 되었을 때는 이제 악하다. 그런데 그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허용했다는 사실로써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확증했다. 아무도 악한 것에 순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허용했다면 그 점에서도 악하고, 선한 율법의 파괴자로 왔다면 그 점에서는 더 악하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병에서 해방된 자는 누구나 그렇게 할 것임을 아는 자로서 그래서 예물을 드리라고 명했다면, 그는 저절로 일어날 줄 알고 있던 일을 명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왜 침묵하여 그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율법에 순종하게 하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그는 어느 정도는 자기의 인내에 양보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증언의 무게로 더욱 높여진 자기의 권위까지 덧붙인다. 이제 무슨 증언인가? 율법이 옹호되었다는 증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가 율법을 어떤 방식으로 굳혔든지, 선한 자로서든 쓸데없는 자로서든, 인내하는 자로서든 변덕스러운 자로서든, 분명히 아무 차이가 없다. 마르키온, 내가 그대를 그 자리에서 밀어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보라, 그는 율법을 이행하라고 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명했든지, 같은 방식으로 그는 저 말씀도 앞서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지워 버린 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었는가? 그대는 그가 말했음을 부인하는 그 일을 그가 선함 때문에 행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그렇게 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쪽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복음서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그것을 복음서에서 뿌리째 뽑아냈다는 것도 분명하다. 번역 주석 1. 9.1 누가복음 5:1-11, 시몬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이다. “논증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던 일”은 뒤이어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로 풀이되는 어부 소명을 가리킨다. 2. 9.2 누가복음 5:10. 테르툴리아누스의 옛 라틴 본문 “ne time, abhinc enim homines eris capiens”는 개역개정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와 뜻이 같다. ‘se eum esse’의 ‘eum’은 R3의 교정이며 MR1은 ‘enim’으로 읽는다. 3. 9.3 예레미야 16:16. 개역개정은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로 읽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mittam’(보내리니)으로 인용한다. “저들이란 곧 사람들이다”(homines scilicet)는 예언의 목적어를 설명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다. 4. 9.4 ‘nauclis’(MF)는 희귀한 형태이며 R과 통행본은 ‘nauiculis’(작은 배들)로 읽는다. 둘 다 “배”로 옮겼다. 5. 9.5 마르키온은 폰토스 출신의 선주(nauclerus)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8장, 제3권 6장, 제5권 1장과 『이단자들에 대한 항변』 30장에서도 그를 이 직업으로 부르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어부들을 택한 이유가 뒷날 선주 마르키온을 사도로 삼으려는 뜻이었겠느냐고 비꼰다. 6. 9.6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창조주 자신의 계획이라는 논증은 제1권 19-20장과 이 책 1장에서 이미 전개되었다. 새 율법과 새 말씀은 이사야 2:3(미가 4:2),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32에 근거한다. ‘testamentum’은 “언약”으로 옮겼다. 7. 9.7 Kroymann은 마르키온이 자기 저작에서 상대로 삼은 인물의 호칭을 그리스어로 복원했다. R은 συνταλαίπωρον과 συμμισούμενον으로, M은 라틴 대문자 음역으로 전한다. ‘commiseronem’과 ‘coodibilem’은 두 그리스어를 옮긴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신조어이며, R3와 통행본은 그 앞에 를 넣었다. 번역에서는 그리스어를 그대로 두고 괄호 안에 뜻을 적었다. ‘purgatione’는 사본의 ‘purgationem’을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나병 환자를 만지지 말고 공동체에서 떼어 놓으라는 규정은 레위기 13:45-46, 죄인과 함께 먹지도 말라는 사도의 말은 고린도전서 5:11이다. 8. 9.11 ‘praescribere’는 재판에서 본안 심리 전에 제기하는 선결 항변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겼다는 항변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항변은 제기되지 못할 것이다”로 옮겼다. 9. 9.13 ‘aemulus legis’는 율법에 맞서는 적수를 뜻하므로 “율법의 적수”로 옮겼다. 사본 M의 ‘nihil’ 대신 R의 ‘nihili’(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를 따랐다. 10. 9.14 ‘uirtus diuina’는 “신적 능력”으로, ‘potestas’(9.21-22)는 “권능”으로 구별하여 옮겼다. 11. 9.16 누가복음 4:27과 열왕기하 5:1-14. 나아만을 개역개정 열왕기하의 “아람 사람”이 아니라 누가복음 4:27의 “수리아 사람”으로 적었다. 마르키온의 논거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을 두고 이방인 하나만 고쳤는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나병 환자를 고쳤으니 그리스도가 창조주와는 다른, 더 나은 신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melioris’는 R3의 교정이며 MR1은 ‘meliori se’로 읽는다. 12. 9.17 ‘significat † per nationes emundationis in Christo’는 훼손된 자리다. Kroymann은 ‘significat’의 주어를 예언자 엘리사로 보고, ‘per nationes’ 자리에 ‘propiores nationes’(정결에 더 가까운 민족들)를 추측했으며, Engelbrecht는 ‘per nationes emundationes’를, R3와 통행본은 ‘significato’를 제안했다. 번역은 전해진 낱말을 그대로 따라 “민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결”로 옮겼다. “그 민족들의 빛”은 누가복음 2:32의 “이방을 비추는 빛”을 가리킨다. 13. 9.18 일곱 가지 중대한 범죄 목록은 우상 숭배, 신성 모독, 살인, 간음, 음행, 거짓 증언, 사기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은 것은 열왕기하 5:14다. “말씀을 간략하게 한”(sermonem compendiatum)은 로마서 9:28의 옛 라틴 본문(이사야 10:22-23 인용)에서 온 표현으로, 개역개정은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짧아진 말씀에 짝하여 세례도 단 한 번의 씻음으로 줄어들었다고 본다. ‘et’(prius)를 Pamelius는 삭제했으나 Kroymann은 유지한다. 14. 9.19 ‘hoc semel functo’의 ‘functo’는 사본의 읽기로, Engelbrecht가 ‘fungi’의 수동적 용법을 들어 옹호했고 Latinius는 ‘functum’으로 고쳤다. “단 한 번 쓴 말로”로 옮겼다. 15. 9.21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incredibile plane)는 반어다. 말로 세계를 지은 창조주의 권능이 말로 한 사람의 병을 고쳤다는 것이 믿기 어렵다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조롱한다. 창조주의 말씀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근거는 창세기 1장과 시편 33:6, 9이다. 16. 9.22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 쪽의 논거를 테르툴리아누스가 요약한 것이다. 주가 종보다 크다는 비교는 마태복음 10:24의 어법을 뒤집어 쓴 것이다. 17. 9.24 ‘quia ... agnoscatur’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은 ‘qui ... agnoscitur’로 읽는다. “과연 더 크다면 말이지만”(si tamen maior)은 치유의 결과가 같으므로(9.25) 더 크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삽입구다. 18. 9.26 “창조주의 강”은 요단강이다. 그리스도의 말이 이룬 것이 요단강 물이 이룬 것과 같은 치유라면 말 자체가 특별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9. 9.28 누가복음 5:14. 개역개정은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에 해당하는 말을 인용하지 않으며, 마지막 구절은 9.30에서 따로 인용한다. 20. 9.29 ‘argumenta figurata utpote prophetae legis’는 사본의 읽기이며, Engelbrecht는 ‘figurata, utpote propheta, legis’로, Pamelius는 ‘prophetatae’로 고쳤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율법의 예표적 논거들이 예언하는 율법의 것이라는 뜻으로 옮겼다. “아버지의 보편적 제사장”(catholicum patris sacerdotem)은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을 위한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성전의 예물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기도와 감사의 예표로 풀이된다. 21. 9.30 누가복음 5:14 “ut sit uobis in testimonium”. 그리스어 본문과 개역개정은 “그들에게”(αὐτοῖς) 입증하라고 읽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너희에게”(uobis)로 인용한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말은 마태복음 5:17, 병과 질환을 짊어진다는 예고는 이사야 53:4(마태복음 8:17)다. Kroymann은 ‘quo testabatur se ipsum esse ... adnuntiabatur’가 뒤의 논증 흐름과 어긋난다고 보아 후대의 삽입일 수 있다고 의심했으나 본문에 남겨 두었다. 22. 9.32 ‘ut bonus’는 사본의 ‘et bonus’를 Kroymann이 고친 것이고, 도 Kroymann의 보충이다.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의 설명으로, 그리스도가 선하기 때문에, 또 나병에서 벗어난 사람이 어차피 율법의 의식을 지킬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명했다는 것이다. 보충된 ‘ut’는 “<자로서>”로 표시했다. 23. 9.33 9.33-9.34(in uanum ergo ... in hoc uenerat)는 사본에서 9.41의 ‘ultro futurum’ 뒤에 놓여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선함을 다루는 9.35-9.40과 앎을 다루는 9.41-9.43의 순서가 마르키온이 든 두 이유(9.32)의 순서와 맞도록 한 것이다. 24. 9.34 ‘formam eorum’을 Kroymann은 나병 환자들이 율법의 의식을 이행하는 그들의 방식으로 풀었다. “그들의 방식”으로 옮겼다. 25. 9.35 ‘an non’의 ‘an’은 Pamel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aut’로 읽는다. 26. 9.36 ‘dei alterius habebitur’는 그리스도가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를 다른 신의 그리스도로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율법 파괴라는 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반복해서 짚는다. ‘nusquam’은 사본의 읽기이며 Pamelius는 ‘numquam’으로 고쳤다. 27. 9.37 [postea]는 Kroymann이 앞의 ‘postea’를 되풀이한 것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28. 9.40 ‘legi malae’는 M의 어순이며 R과 통행본은 ‘malae legi’로 읽는다. 뜻의 차이는 없다. 29. 9.42 ‘cur enim’은 사본의 읽기이며 N과 Pamelius는 ‘cur ergo’로 읽는다. ‘arbitrium’은 “판단”으로 옮겼다. 30. 9.44 ‘de gradu pellere’는 상대를 발 디딘 자리에서 밀어내는 격투와 군사의 비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확인한 동기가 무엇이든 그 사실만으로 마르키온의 입지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31. 9.46 마태복음 5:17. 누가복음에는 이 말이 없으나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복음서에서 이 말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quod saluum est)은 교회의 복음서에 이 말이 보존되어 있다는 뜻이다. 32. 9.48 테르툴리아누스의 결론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을 실제로 행했으므로 마태복음 5:17의 말도 했다는 것이며, 그 말이 교회의 복음서에 있고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없는 까닭은 교회가 삽입한 것이 아니라 마르키온이 삭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9 10 중풍병자도 고쳐지는데, 그것도 모인 자리에서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쳐진다. 이사야가 “백성이 주의 숭고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숭고함이며 어떤 영광인가? “굳세어라, 늘어진 손들과 풀린 무릎들아” - 이것이 곧 중풍일 것이다 -.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굳세어라’를 쓸데없이 반복한 것도 아니고 ‘두려워하지 말라’를 헛되이 덧붙인 것도 아니다. 지체의 회복과 함께 힘이 당장 되살아나는 것도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라.” 아울러 이렇게 말할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마음의 활력도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이 특정한 치료에 대한 예언도, 그 치료에 뒤따른 일들에 대한 예언도 이루어져 결산된 것으로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죄를 사하는 자 그리스도도 같은 예언자에게서 알아보라. 그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그들의 죄를 사할 것이며, 우리의 죄를 그 자신이 없애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앞부분에서도 주 자신이 말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죄가 장밋빛 같을지라도 내가 눈처럼 희게 하겠고, 홍색 같을지라도 양털처럼 희게 하겠다.” 장밋빛으로는 예언자들의 피를, 홍색으로는 더 밝은 피로서 주의 피를 보여 주는 것이다. 미가도 죄의 용서에 관하여 말한다. “어느 신이 당신과 같습니까? 당신 유산의 남은 자들에게서 불의를 거두어 내고 불법을 지나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자기 진노를 증거로 붙들어 두지 아니하셨으니, † 자비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이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 우리의 죄를 가라앉히실 것이고 우리의 죄악을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히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런 것이 전혀 예언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창조주에게서 이러한 인자함의 사례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사례들은 아들 안에도 아버지의 심정이 있으리라고 나에게 약속한다. 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창조주에게서 - 처음부터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그리스도에게서 그때에도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 악행의 용서를 얻은 것을 본다. 또한 나는 예언자 나단이 우리아에게 지은 자기 죄를 인정하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읽는다: “주께서도 네 죄를 옮겨 버리셨으니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세벨의 남편으로 우상 숭배와 나봇의 피에 대하여 유죄인 아합 왕이 뉘우침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고, <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깨뜨린 금식의 잘못을 간구로 지워 버렸다고 읽는다. 그토록 여러 번 죄의 용서로 회복된 백성 자체에 관하여는 무엇을 다시 늘어놓겠는가? 물론 제사보다 자비를, 죄인의 죽음보다 그의 뉘우침을 더 원하는 그 하나님에게서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할 일은 그대가 창조주가 언젠가 죄를 용서한 적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다음 할 일은 창조주가 자기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런 어떤 것도 예언하지 않았음을 그대가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리스도의, 곧 새로운 그리스도의 그 새로운 인자함을, 그것이 창조주와 같지도 않고 창조주에 의해 예언되지도 않았음을 증명한 경우에만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를 붙들어 두지 않는다고 하는 자에게 죄를 사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정죄하는 일도 없는 자에게 사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자기에게 아무 잘못도 저질러지지 않은 자가 용서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므로 다시 논하기보다 환기시키는 쪽을 택한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우리의 선결 항변은 두 가지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선언할 만큼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과, 사람에게서 - 아버지에게서든 어머니에게서든 - 태어나지 않은 자는 사람의 아들로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사람의 아들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아버지의 아들인지 어머니의 아들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났다면 분명 사람에게서 난 것은 아니다. 사람 <아버지>에게서 나지 않았다면, 사람 어머니에게서 났다는 것만 남는다. 사람 <어머니>에게서 났다면, 이제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 아버지가 주어지지 않는 자에게는 그 어머니에게 남편이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남편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 여자는 처녀다. 그렇지 않고 어머니가 처녀가 아니라면, 이제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아버지가 있게 될 것이다. 처녀가 아니려면 그 여자에게 남편이 있을 것이고, 남편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될 자에게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아버지를 만들어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탄생을 신화는 카스토르나 헤라클레스에게 돌린다. 이것들이 이렇게 구별된다면, 즉 그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난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 아버지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인 어머니에게서 난 것이라면, 그는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 그대가 어떤 근거로 사람의 아들을 받아들이는지 나는 살펴 알 수가 없다. 사람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면, 그대는 그리스도를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 어머니만의 아들이라면, 그대는 나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고> 사람 아버지의 아들도 아니라면, 그는 어떤 사람의 아들도 아니며, 자기가 아니었던 것을 자기라고 말한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대의 곤경을 도울 수 있는 길은 하나다. 그대가 감히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그대의 신을 사람이라고도 부르거나 - 발렌티누스가 아이온에 대하여 그렇게 했다 - 처녀가 사람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발렌티누스조차 하지 않은 일이다. 이제, 다니엘에게서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지칭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으로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가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된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부를 때, 의심 없이 자신이 그 예언의 대상인 바로 그 사람으로 이해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의 공유는 아마 단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 그렇더라도 우리는 다름이라는 조건을 견지하여 <그를> 그리스도라고도 예수라고도 불러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우연적 사정에서 생겨난 것인 만큼, 그것까지 이름의 공유 위에 겹쳐지기는 그만큼 어렵다 - 그것은 고유한 우연적 사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특히 공유에 이르게 할 [같은] 원인이 맞지 않을 때에는 그렇다. 그리고 더욱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도 사람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때에는 그도 호칭의 공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두 그리스도와 두 예수가 있듯이 두 사람의 아들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호칭은 그 원인을 자기 안에 가진 자에게 고유한 것이므로, 그것이 이름의 공유는 있으되 [호칭의 공유는 없는] 다른 자에게도 주장된다면, 원인 없이 호칭의 공유가 주장되는 그자에게는 이름의 공유조차 이제 의심스러워지며, 따라서 이름과 호칭 둘 다를 더 잘 감당할 수 있다고 판명되는 자가 한 사람 [곧 동일한 자]으로 믿어지고, 원인이 없어 호칭의 공유를 갖지 못하는 다른 자는 배제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둘을 다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먼저 얻은 자, 곧 창조주의 예수 외에 다른 이가 아닐 것이다. 이 사람이 풀무 속에서 자기 순교자들과 함께 넷째로 바벨론 왕에게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보인 자이며, 바로 그가 다니엘 자신에게 곧바로 사람의 아들로,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심판자로 계시된 자이다. 성경도 그렇게 보여 준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예언의 명명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곧 주 자신의 해석을 가져다준다. 유대인들이 그의 사람됨만 바라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한 까닭에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직 확신하지 못한 채, 사람은 죄를 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사할 수 있다고 그럴 만하게 따지고 있을 때에, 왜 그는 그들의 생각에 맞추어 사람에 관하여, 곧 자기에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다고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는가? 사람의 아들을 지칭하면서 사람도 지칭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죄를 사하는 이가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다니엘의 문서에서 가져온 사람의 아들이라는 바로 그 호칭으로 그들을 되받아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이겠는가? 곧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그 유일한 사람의 아들로서, 심판하는 권능과 그것을 통해 당연히 죄를 사하는 권능까지 얻은 자라는 것이다 - 심판하는 자는 사면도 하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성경을 상기시킴으로써 이 걸림돌이 제거되면, 그들이 바로 그 죄 사함으로부터 그가 바로 사람의 아들임을 더 쉽게 알아보게 하려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처음으로 죄를 사한 이 자리, 곧 사면하면서 처음으로 심판한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밝혔고, 그때까지 다른 어디에서도 그렇게 밝힌 적이 없다. 이에 대하여 반대편이 무엇을 논증하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라. 반대편은 필연적으로,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그가 사람의 아들임을 옹호하면서도 그가 처녀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사람에게서 태어났음을 부인하는 그런 광기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적 권위와 사물의 본성과 공통의 지혜가 이단의 광증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도 마르키온의 환영들에 맞서 몸의 실체에 관하여 아주 짧게 끼어들어 말할 기회가 있다.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면, 그는 몸에서 난 몸이다. 실로 그대는 태어난 사람이 마르키온 자신처럼 심장이나 뇌를 갖지 않은 경우를,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처럼 몸을 갖지 않은 경우보다 더 쉽게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폰투스 사람의 심장이나 뇌를 들여다보라. 번역 주석 1. 10.1 누가복음 5:17-26의 중풍병자 치유를 다룬다. 인용은 이사야 35:2다. 개역개정은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두 명사(영광, 높음)를 자리를 바꾸어 ‘주의 숭고함(sublimitas)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용한다. 2. 10.2 이사야 35:3-4의 칠십인역 형태다. 개역개정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손과 무릎 자체에 ‘굳세어라’(conualescite)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곧 중풍일 것이다’는 늘어진 손과 풀린 무릎이 중풍의 증상을 가리킨다는 저자의 삽입 해설이다. 3. 10.3 ‘힘이 당장 되살아나는 것’(uirium repraesentatio)은 지체의 회복과 더불어 힘이 지체 없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4. 10.4 누가복음 5:24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의 앞부분이다. 5. 10.5 누가복음 5:21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다. ‘결산된’(dispunctam)은 장부를 대조하여 지운다는 회계 용어로, 예언이 이루어져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6. 10.6 이사야 53:11-12의 칠십인역 형태다. 전승 사본은 aufert(없앤다)이고 Kroymann이 칠십인역 ἀνοίσει(짊어질 것이다)에 맞추어 미래형 auferet로 고쳤다. 번역은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미래형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53:11-12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와 대응한다. 7. 10.7 이사야 1:18이다. 개역개정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로 수동형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이 1인칭으로 ‘내가 희게 하겠다’(exalbabo)고 말한다. ‘앞부분’(in primore)은 이사야서의 앞부분(1장)을 가리키며, 뒤에 인용된 53장과 대비된다. 장밋빛을 예언자들의 피, 더 밝은 홍색을 주의 피로 읽는 해석은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것이다. 8. 10.8 미가 7:18-19의 칠십인역 형태다. 개역개정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에 대응한다. 9. 10.9 † 표시 자리의 전승 본문 uoluit et misericordiae는 문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Oehler는 uoluit esse misericordiae, Engelbrecht는 misericordiam, Kroymann은 칠십인역 ὅτι θελητὴς ἐλέους ἐστίν(그가 자비를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에 맞추어 uolens est misericordiae를 제안했다. 번역은 전승된 낱말을 살려 ‘자비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로 옮겼다. 10. 10.10 미가 7:19다. 개역개정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두 번 ‘가라앉히다’(demerget)로 읽는다. demerget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dimerget다. 11. 10.12 요나 3:10의 니느웨 사람들의 용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에게서 그때에도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ne dixerim)는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수사적 완곡어법이다. 아들이 처음부터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생각은 2권 27장과 이어진다. 12. 10.13 사무엘하 12:13이다. 라틴어 성경 구분으로는 열왕기 둘째 권(II Reg.)에 해당한다. 13. 10.14 나단의 말은 사무엘하 12:13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circumduxit(옮겨 버렸다)는 칠십인역 παρεβίβασεν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아합의 용서는 열왕기상 21:27-29, 요나단의 일은 사무엘상 14:24-45다. 요나단은 사울이 백성에게 명한 금식 맹세를 모르고 꿀을 먹어 어겼고, 백성의 간구로 죽음을 면했다. <또>(e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4. 10.15 호세아 6:6(참조 잠언 21:3)과 에스겔 33:11을 결합한 표현이다. 15. 10.18 죄를 붙들어 두지도 정죄하지도 않는 마르키온의 신이 죄를 사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지는 1권과 2권에서 이미 다루었다는 말이다. 16. 10.19 praescriptio는 로마 법정 절차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주장을 차단하는 선결 항변을 뜻하며, 테르툴리아누스가 논증의 전제 원칙을 가리킬 때 즐겨 쓰는 용어다. ‘선결 항변’으로 옮겼다. 이 장에서 filius hominis는 ‘사람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논증의 축이므로 모두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17. 10.21 <아버지>(patr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8. 10.22 <어머니>(matr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9. 10.25 카스토르는 제우스와 레다의,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로 전해지며, 신인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를 둔 탄생의 예로 쓰였다. ‘처녀가 잉태할 것’은 이사야 7:14다. Kroymann은 si haec ita distinguntur 뒤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를 보충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본문에 넣지는 않았다. 20. 10.28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고>(matris neque)는 Kroymann의 보충이다. 21. 10.29 발렌티누스파의 아이온 체계에서는 한 아이온이 ‘사람’(Anthropos)으로 불린다(참조 Aduersus Valentinianos 7-8).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자기 신을 ‘사람’이라 부르거나 마리아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두 길밖에 없다고 몰아간다. 22. 10.30 다니엘 7:13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를 가리킨다. 23. 10.32 nomen(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은 ‘이름’으로, appellatio(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는 ‘호칭’으로 구분해 옮겼다. accidens는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일어난 사정을 뜻하며, 여기서는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리키므로 ‘우연적 사정’으로 옮겼다. <그를>(eum)은 Kroymann의 보충이고, [같은](eadem)은 Kroymann이 삭제한 말이다. 두 번의 ‘-’ 괄호 구문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24. 10.33 Kroymann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도 ... 그러므로’(si et Christus ... ergo, 10.33-10.35 첫머리)를 여백의 주석이 본문에 끼어든 것으로 보아 [ ]로 묶었다. 그에 따르면 atque adeo(그리고 더욱이)는 10.35의 cum appellatio propria est로 바로 이어져 전체 논증의 결론을 시작한다. Engelbrecht는 이 부분을 진본으로 옹호했다. 25. 10.35 [호칭의 공유는 없는](non etiam appellationis)과 [곧 동일한 자](idemque)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말이다. 26. 10.37 다니엘 3:25의 풀무 속 넷째 인물이다. 개역개정은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의 아들 같은’(tamquam filius hominis)이라고 하여 다니엘 7:13에 맞추어 읽는다. 세 소년을 ‘순교자들’이라 부른다. 구름과 함께 오는 심판자는 다니엘 7:13-14다. 27. 10.39 누가복음 5:21-24다. ‘사람됨만 바라보고’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인성만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28. 10.40 테르툴리아누스의 요지는 예수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골라 쓴 까닭이 다니엘 7:13의 그 인물을 떠올리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문서’(instrumentum Danihelis)는 다니엘서를 가리킨다.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사본 M의 esse et hominem이다. Ursinus는 deum et hominem(하나님이자 사람)으로 고쳤다. 29. 10.41 심판하는 권능은 다니엘 7:13-14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가리킨다. 30. 10.45 insaniam은 Rigalt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in insaniam이다. ‘환영들’(phantasmata)은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육신이 아니라 보이기만 하는 것이라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가리킨다. 몸의 실체에 관한 본격적 논의는 De carne Christi로 이어진다. 31. 10.48 ‘폰투스 사람’은 폰투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이다. 심장(cor)과 뇌(cerebrum)는 각각 분별력과 지성의 자리로, 마르키온에게 둘이 없다는 조롱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0 11 그는 주가 세리를 택한 일을 논거로 끌어들인다. 마치 율법의 적대자가 율법 밖에 있는 자, 유대교에 속하지 않은 속된 자를 택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에게는 베드로의 일마저 기억에서 빠져 버렸다. 베드로는 율법의 사람이었지만 택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베푼 깨달음에 대한 증언까지 얻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민족들의 빛과 희망과 기대라고 선포된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오히려 의사가 건강한 자들에게는 필요하지 않고 병든 자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인정했다. 만일 그가 병든 자들을 자신이 택하던 이방인들과 세리들로 이해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유대인들이 건강하다고 확증한 것이다.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그가 마치 병을 고치려는 듯이 율법을 파괴하러 내려온 것은 잘못이다. 그 율법 안에서 살던 자들은 건강했고, 그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의사의 비유를 내놓고도 그것을 채우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건강한 자들에게 아무도 의사를 데려가지 않듯이, 사람이 마르키온의 신에게 낯선 만큼 그렇게 낯선 자들에게도 아무도 의사를 데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를 지은 이이자 보호자를 가지고 있고, 오히려 그에게서 오는 의사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이 비유는 병든 자들이 속한 그가 오히려 의사를 제공한다는 것을 미리 판정한다. 그런데 요한은 또 어디에서 한가운데로 나오는가? 그리스도도 갑작스럽고, 요한도 갑작스럽다. 창조주에게서는 고유하고 완전한 순서를 가지는 모든 것이 마르키온에게서는 이와 같다. 그러나 요한에 관한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각 조항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점을 지켜내겠다. 요한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요한과 들어맞는다는 것을, 곧 창조주의 예언자들이 창조주의 그리스도와 들어맞는 방식으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그리하여 이단자가 요한의 순서를 헛되이 흐트러뜨린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겠다. 만일 요한이, 이사야에 따르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요 뉘우침을 선언하고 권하여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인 그가, 아무것도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면, 아무도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끊임없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요한의 제자들의 본을 들어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와 요한 사이에, 그리고 양쪽의 무리 사이에 어떤 다름이 있었다면, 비교를 요구할 일이 전혀 없었을 것이고 따지려는 의도도 헛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신성에 속한 경쟁하는 선포들이 규율의 권위에 관해 먼저 일치하지 않는 터에 규율에 관해서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속했고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둘은 모두 창조주에게 속했고, 둘은 모두 율법과 예언자들에 근거한 선포자요 교사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요한의 규율을 다른 신의 것이라 하여 거부했고, 제자들이 다르게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곧 다르고 상반된 신성에 입문한 자들이라고 옹호했더라면 - 그러나 지금 그는 신랑의 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겸손히 이유를 대고, 신랑을 빼앗기면 그 뒤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제자들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유 없이 책망받은 것은 아니라는 듯이 변명해 주었고, 요한의 규율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한의 때에 돌리면서] 그것을 그 고유의 때에 배정하여 인정했다. 만일 이미 있던 그 규율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 경쟁자들을 옹호했을 것이다. 나는 신랑이라는 이름에서도 나의 그리스도를 붙든다. 그에 관하여 시편은 말한다. “그는 자기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 하늘 끝에서 그가 나아가고, 그의 돌아감은 그 끝에까지 이른다.” 그는 또 이사야를 통해 아버지에게 기뻐하며 말한다. 그는 말한다. “내 영혼이 주 안에서 기뻐 뛰리라. 그가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고 즐거움의 겉옷을 입혔으며, 신랑에게 하듯 내게 관을 둘러 주고, 신부에게 하듯 **.” 그는 자기 안에 교회까지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에 관하여 같은 영이 그에게 말한다. “너는 그들 모두를 신부의 장식처럼 네게 둘러 두리라.” 그리스도는 이 신부를 솔로몬을 통해서도 이방 민족들의 부름으로부터 자기에게로 불러들인다. 그대가 과연 읽었다면 말이다. “신부여, 레바논에서 오라.” 레바논 산의 언급을 절묘하게 끼워 넣은 것이니, 그 산의 이름은 그리스인들에게서 유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우상숭배로부터 교회를 자기 신부로 맞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키온, 이제 그대가 더없이 미친 자라는 것을 부인해 보라. 보라, 그대는 그대의 신의 율법마저 공격한다. 그 신은 혼인을 맺어 주지 않고, 이미 맺어진 혼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독신자나 고자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고, 세례를 죽음이나 이혼을 위해 남겨 둔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그 신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드는가? 이 이름은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킨 이의 것이지, 갈라놓은 이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주가 새것과 옛것을 구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선언에서도 잘못을 범했다. 그대는 낡은 가죽 부대로 부풀어 올랐고 새 포도주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하여 옛것, 곧 먼저 있던 복음서에 이단적 새로움이라는 천 조각을 꿰매 붙였다. 어떤 점에서 창조주가 달리 행했는지 나는 배우고 싶다. 창조주가 예레미야를 통해 명하기를,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새 땅을 새로 일구라”라고 할 때, 그는 옛것에서 돌아서게 하지 않는가? 이사야를 통해 선포하기를, “옛것은 지나갔다. 보라, 내가 만드는 새것이다”라고 할 때, 그는 새것으로 향하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오래전에 이 점을 확정했다. 옛것들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오히려 창조주가 약속하고 그리스도가 드러낸 것으로, 한 [하나님]이자 같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으며, 옛것도 새것도 그 하나님의 것이다. 낡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자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 그 사람이 아니며, 낡은 옷도 함께 가진 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낡은 옷에 새 조각을 덧대지 않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을 행할 바탕을 <가지지 않은> 자는, 그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해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자신이 복음의 새로움을 율법의 옛됨에서 분리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이 비유를 그 방향으로 이끌었다면, 그는 자신이 새로움을 떼어 내던 그 옛됨 또한 자기 것임을 증명한 것이다. 남의 것을 분리하는 일은 지적할 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남의 것에서 떼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남의 것에 붙이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분리는 그 분리가 생겨나는 결합을 통해 성립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분리하던 것들이 하나 안에 있었다는 것도 보여 준 것이다. 그가 분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이 그대로 그렇게 있었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러한 분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개혁을 통한, 확대를 통한, 진전을 통한 분리다. 열매가 씨에서 나온 열매이면서도 씨에서 분리되듯이, 복음도 율법에서 자라 나오면서 율법에서 분리된다. 율법과는 다른 것이지만 남의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지만 상반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에게서 말하는 방식도 새롭지 않다. 그가 비유를 내놓을 때, 질문들을 반박할 때, 그것은 시편 제칠십<칠>편에서 온다. 그는 말한다. “내가 내 입을 열어 파라볼라를 말하리라.” 곧 비유를 말하리라는 것이다. “내가 프로블레마타를 말하리라.” 곧 질문들을 풀어 밝히리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다른 족속의 사람임을 입증하고자 했다면, 분명히 고유한 말투로 입증했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11.1 세리 레위를 부른 일과 그에 이어지는 논쟁은 누가복음 5:27-32에 있다. 마르키온은 이 일화를 그리스도가 율법 바깥의 사람을 택했다는 증거로 삼았다. 2. 11.2 아버지가 베드로에게 베푼 깨달음에 대한 증언은 마태복음 16:17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이 없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의 네 복음서를 근거로 반론한다. 3. 11.3 민족들의 빛은 이사야 42:6; 49:6과 누가복음 2:32, 민족들의 희망은 이사야 51:5, 민족들의 기대는 창세기 49:10(칠십인역 '민족들의 기대')을 가리킨다. 4. 11.4 누가복음 5:31. 개역개정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로 옮긴다. 5. 11.7 auctor를 '자기를 지은 이'로 옮겼다. 창조주가 사람을 지은 이이자 보호자이므로 의사도 창조주에게서 온다는 것이 논점이다. 6. 11.12 Kroymann은 사본의 어순 prophetae creatoris qua를 qua prophetae creatoris로 바꾸어 읽는다. 이 읽기를 따라 '창조주의 예언자들이 창조주의 그리스도와 들어맞는 방식으로'로 옮겼다. frustra frustratus는 '헛되이 흐트러뜨린'이라는 말놀이다. 7. 11.13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이사야 40:3, 뉘우침의 선포는 누가복음 3:3(마태복음 3:2; 마가복음 1:4)을 가리킨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을 두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따진 일은 누가복음 5:33에 있다. ipsum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Kroymann은 ipsum 을 추정한다. 8. 11.14 disciplina는 금식과 기도 같은 생활 규율을 뜻하므로 '규율'로 옮겼다. 9. 11.16 신랑과 신랑의 아들들의 금식에 관한 말은 누가복음 5:34-35이다. 가운데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말끊김으로,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같은 귀결절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그것을 요한의 때에 돌리면서]는 Kroymann이 뒤따르는 구절을 잘못 풀이한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부분이다. ut tempori suo는 사본의 temporis ut tempore suo를 Latinius가 고친 읽기이며, Kroymann은 '그 고유의 때'를 신랑을 빼앗긴 뒤, 곧 주의 죽음 이후로 이해한다. 10. 11.18 시편 19:5-6(칠십인역 18:6-7). 개역개정은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늘 끝에서 그가 나아가고 그의 돌아감은 그 끝에까지 이른다'이며,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오심과 돌아감으로 읽는다. 11. 11.19 이사야 61:10. 개역개정은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신부에게 하듯' 뒤가 끊어져 있으며, Kroymann은 칠십인역의 κατεκόσμησέν με κόσμῳ에 해당하는 '나를 장식으로 꾸몄다'가 빠졌다고 본다. Kroymann이 이 자리에 탈문을 표시했다. 12. 11.21 이사야 49:18. 개역개정은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읽어 '신부의 장식처럼'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13. 11.22 아가 4:8. 개역개정은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로 옮긴다. 레바논의 그리스어 이름 Λίβανος는 유향(λίβανος)과 같은 낱말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겹뜻으로 교회가 향을 바치는 우상숭배에서 불려 나왔음을 읽어 낸다. 14. 11.24 마르키온파는 독신자, 고자, 과부와 홀아비, 이혼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전언이며, 제1권 29장에서도 같은 관행을 비판한다. '죽음이나 이혼을 위해 남겨 둔다'는 혼인한 사람은 배우자가 죽거나 이혼한 뒤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15. 11.26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새 천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는 누가복음 5:36-39에 있다. 16. 11.28 사본의 alter를 Junius가 aliter로 고쳤고, Kroymann은 그 뒤에 egerit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 이 읽기를 따라 '달리 행했는지'로 옮겼다. 17. 11.29 예레미야 4:3.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nouate uobis nouamen nouum은 칠십인역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옮긴 것으로, nouus(새로운)와 nouamen(새로 일군 땅)의 말놀이가 들어 있어 '새 땅을 새로 일구라'로 옮겼다. 18. 11.30 이사야 43:18-19. '옛것은 지나갔다'는 고린도후서 5:17의 표현과 겹친다. 19. 11.31 destinatio pristinorum은 옛것들에 대해 정해진 처분, 곧 옛것들이 끝나고 새것으로 바뀌도록 정해진 일을 뜻하므로 '옛것들에 대한 결정'으로 옮겼다. [하나님]은 Pamelius가 중복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낱말이다. 20. 11.32 논점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은 낡은 가죽 부대를 가진 자에게만 해당하고, 새 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지 않는다는 말은 낡은 옷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옛것을 전혀 갖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이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21. 11.33 <가지지 않은>은 Migne 판(ed. Migniana)이 보충하고 Kroymann이 받아들인 non을 옮긴 것이다. 보충된 본문은 '어떤 일을 할 바탕이 없는 자는 그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이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며, 앞 문장과 같은 논점을 이룬다. 보충 없이 읽으면 '어떤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이어서 하지 않는 자는 그 일을 할 바탕을 가진 자이다'가 된다. 22. 11.40 시편 78:2(칠십인역 77편). <칠>은 Pamelius가 보충한 septimo를 옮긴 것이다. 사본은 '제칠십편'으로만 읽는다. 23. 11.41 시편 78:2. 개역개정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어 차용어 parabola를 라틴어 similitudo(비유)로, problemata를 quaestiones(질문들)로 풀이한다. 이 풀이 구조를 살리기 위해 두 차용어를 '파라볼라'와 '프로블레마타'로 음역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1 12 안식일에 관해서도 나는 이것을 먼저 말해 둔다.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하나님을 내세우고 다니지 않았다면, 이 문제 역시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안식일을 마땅히 파기해야 했다면, 왜 안식일을 파기하는지 논란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가 다른 신에게 속했다면 마땅히 파기해야 했을 것이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는 그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내세우고 다니면서 그의 안식일을 공격하는 것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어떤 새로운 제도에 기대는 적대자의 모든 논증에 대해 어디서나 같은 말을 새로 되풀이하지 않도록, 첫머리에 나오는 문제들을 각각 결말지어 두기로 하자. 이제 다음 규정이 확고히 설 것이다. 각 제도의 새로움에 관해 논란이 된 것은, 신성의 새로움에 관해서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공표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논란도 없었던 것처럼 **. 또 각 제도의 새로움 자체로부터 그리스도가 다른 신성을 충분히 입증했다고 거꾸로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새로움 자체가 창조주에 의해 미리 선언되었으므로 그리스도에게서 새로움은 놀랄 일이 아님이 확정되었고, 어쨌든 먼저 다른 신이 제시되고 그 뒤에 그의 가르침이 도입되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신이 가르침에 권위를 주는 것이고, 가르침이 신에게 권위를 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마르키온마저도 그토록 비뚤어진 글을 스승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스승을 배운 것이 분명하다면 몰라도 말이다. 안식일에 관한 나머지 논의는 이렇게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가 안식일을 뒤엎었다면 그는 창조주의 본보기를 따라 행한 것이다. 정말로 여리고 성을 포위했을 때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이레 동안, 안식일에도, 성벽을 돌며 운반된 언약궤가 일함으로써 안식일을 파기했다면 말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그렇게 여기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도 창조주도 안식일을 파기하지 않았음을 모르는 것이다. 이는 곧 가르쳐 보이겠다. 그렇지만 그때도 여호수아를 통해 안식일이 흔들렸으니, 이것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켜 미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그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로서 유대인들의 가장 엄숙한 날을 미워하며 공격했다 하더라도, 안식일에 대한 미움으로도 그는 창조주를 고백한 것이니, 창조주 자신의 그리스도로서 이사야의 입으로 외치는 창조주를 따르고 있었다. “너희의 월삭과 안식일을 내 영혼이 미워한다.” 그러나 이 말도 <어떤> 방식으로 말해진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경우에는 거친 도발에 맞서 거친 방어도 동원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안식일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인 그 사안 자체에 관해서도 논하겠다. 그날 제자들은 배가 고팠고,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볐으며,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하여 안식의 휴식을 깨뜨렸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변호하고, 안식일 훼손의 피고가 된다. 바리새인들이 고발한다. 마르키온은 이 논쟁의 쟁점을 - 내 주의 진리를 두고 잠시 장난을 좀 쳐 보자면 - 마치 “문자와 의도”의 문제인 것처럼 교묘하게 잡아낸다. 논거의 색깔을 창조주의 성경과 그리스도의 의도에서 끌어오면서, 마치 **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떼어 대담하게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한 다윗의 본보기에서 그런 것처럼 하기 때문이다. 다윗도 처음부터, 곧 그날이 처음 알려진 때부터 안식일에 주어진 이 특권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금식의 면제다. 창조주가 만나를 이틀분 거두는 것을 금했으면서도 오직 예비일에만 허락했으니, 전날에 양식을 마련하여 다음 안식일의 휴식을 금식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가 - 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 안식일의 파기에서 같은 이유를 따랐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안식일에 금식하지 않는다는 영예 안에서 그가 창조주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도 잘된 일이다. 결국 그가 제자들에게 안식일에 금식하라고 명령하여 창조주의 “문자와 의도”라는 입장에 어긋났더라면, 그때야말로 안식일을, 그리고 창조주 자신까지 파기한 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을 단호하게 옹호하지 않고 변호하기 때문에, 인간적 필요를 마치 간청하는 변호인처럼 내세우기 때문에, 안식일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는 영예를 쉬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어 지키기 때문에, 다윗과 그 동행자들을 자기 제자들과 잘못에서도 용서에서도 동등하게 두기 때문에, 창조주가 너그러이 허락했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창조주의 본보기를 따라 그 자신도 그토록 선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창조주에게 낯선 자라는 말인가? 그 뒤 바리새인들은 그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는지 지켜보았으니,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분명히 안식일 파기자로서 고발하려는 것이었고, 새로운 신을 고백하는 자로서가 아니었다. 아마 나는 이 한 가지 요점만을 어디서나 들이밀 것이다. 다른 † 그리스도는 어디서도 선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율법에 관해 전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일을 쉬라고 명한 것이 조건부이며 일의 특정한 종류에 한정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안식일에 관해 “그날에는 네 모든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할 때, 그는 “네”라고 말함으로써 각 사람이 자기 기술이나 생업으로 수행하는 인간의 일에 관해 규정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관해 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과 온전한 건강의 일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고유한 것이다. 율법에서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그날에는 모든 일을 하지 말라. 다만 모든 영혼을 위하여 행해지는 일은 예외다”라고 그는 말한다. 곧 영혼을 구해 내는 일은 예외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통해서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 행해질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인 그리스도도, 하나님이기도 한 자로서, 행하게 될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른 손을 회복시키는 일을 통해 그들을 율법의 이런 뜻으로 이끌려고 하면서 그는 묻는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옳은가, 멸하는 것이 옳은가?” 이는 영혼을 위해 행하려는 그 일을 허용하면서, 안식일 율법이 어떤 일을 금하는지, 곧 인간의 일을 금하고, 어떤 일을 명하는지, 곧 모든 영혼을 위해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을 명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그가 안식일의 주라고 불린 것은 안식일을 자기 것으로 지켰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주로서 안식일을 파기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했을 것이고, 안식일을 제정한 이라면 더욱 정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로서 안식일을 결코 파기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이제 여리고에서 언약궤를 돌며 운반한 그때에도 창조주가 안식일을 파기한 것이 아님이 드러날 수 있다. 그 일도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명한 일이고, 전쟁의 위기에 놓인 자기 백성의 영혼들을 위해 마련한 일이었다. 또 그가 어디선가 “너희의 안식일”이라고 말하며 안식일들에 대한 미움을 고백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들을 자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것은 죄로 가득하고 하나님을 마음이 아니라 입술로 사랑하는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함 없이 지키던 안식일들이었다. 자기 안식일들, 곧 자기 가르침대로 행해지는 모든 안식일에는 그가 다른 지위를 부여했다. 그 안식일들을 그는 뒤에 같은 예언자를 통해 참되고 즐거운 것이며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도 안식일을 결코 폐기하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의 율법을 지켰으니, 앞서 제자들의 사건에서 영혼을 위해 일했고 - 굶주린 자들에게 음식의 위안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 이제는 마른 손을 고쳐 주면서, 행동으로 어디서나 이것을 들이밀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르키온이 이 말씀으로 **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면 말이다. 여기서도 그는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율법의 조건을 해석하고, 일의 차이를 밝히고, 율법이 안식일의 휴식에서 예외로 둔 일을 행하고, 처음부터 아버지의 축복으로 거룩한 안식일 그날을 자기 선행으로 더 거룩하게 만들면서 그렇게 했다. 그날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베풀었던 것인데, 적대자였다면 창조주의 안식일을 빛내지 않으려고, 안식일에 마땅한 일들을 안식일에 돌리지 않으려고 그 도움을 다른 날들에 베풀었을 것이다. 그날에 예언자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 생명으로 돌려놓았다면, 바리새인이여, 그리고 그대 마르키온이여, 그대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영혼을 구하며 멸하지 않는 것이 오래전부터 창조주의 일이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본, 창조주의 온유, 창조주의 자비, 또 창조주의 선포에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들여오지 않았음을 본다. 여기서도 그는 특정한 치유에 관한 예언을 실현해 보이기 때문이다. “풀린 손들이 강해진다.” 중풍병자의 경우에 “풀린 무릎들”이 그랬던 것과 같다. 번역 주석 1. 12.1 이 장은 누가복음 6:1-11의 두 안식일 논쟁(밀밭에서 이삭을 자른 제자들, 손 마른 사람의 치유)을 다룬다. circumferre(들고 다니다)를 ‘내세우고 다니다’로 옮겼다.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내세우며 다녔다는 뜻이다. 2. 12.5 Kroymann은 sicuti nec disceptatum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fuisset, si fuisset editum(공표되었더라면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이 빠졌다고 본다. Engelbrecht는 sicuti nec disceptatum 자체를 삭제하는 쪽을 택한다. definitio는 수사학의 ‘규정’이며, 이어지는 문장 전체가 그 규정의 내용이다. 3. 12.5 disciplina를 ‘가르침’으로 옮겼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에서 새로운 신을 추론하는 데 맞서, 신이 가르침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지 가르침이 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다. 4. 12.6 litterae는 ‘글, 문자’이며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 식 문헌 작업을 겨냥한 말장난이다. 스승에게서 글을 배우는 정상 순서를 뒤집어, 글에서 스승(신)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5. 12.7 여호수아 6:3-4, 15. 이레 동안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으므로 그 가운데 하루는 반드시 안식일이었다는 논리다. septem(이레)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octo(여덟)로 읽는다. Kroymann은 circumlata ... arca를 주격으로 보아 언약궤가 ‘일함으로써’(operatione) 안식일을 파기한 것으로 구문을 잡으며, ex praecepto creatoris는 circumlata에 걸린다. 이 구문을 따랐다. 6. 12.8 Iesus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이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여호수아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미리 알려진(renuntiari) 것으로 읽는다. 7. 12.9-10 이사야 1: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월삭과 안식일’을 읽는다. 12.10의 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사본은 quoque modo, Gelenius 이하는 quoquo modo로 읽는다. 8. 12.11 abrupta defensio ... abruptam prouocatione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대격 adhibendam ... abruptam defensionem으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거친 도발에는 거친 방어로 맞서겠다는 뜻으로, 이사야 1:14의 본래 의도를 알면서도 일부러 글자대로 받아 맞받는 수법을 예고한다. 9. 12.13-14 누가복음 6:1-5. 테르툴리아누스는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 먹은 행위를 ‘음식을 마련하는 일’(cibum operari)로 규정하여, 안식일 노동 금지와 연결한다. effrixerant(비볐다)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efflixerant로 읽는다. 10. 12.15 ‘문자와 의도’(scripti et uoluntatis)는 법정 수사학의 쟁점 유형(status) 가운데 하나로, 법률의 문자와 입법자의 의도가 충돌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기록된 율법과 그리스도의 의도를 서로 충돌하는 두 당사자로 세운다. stat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status로 읽는다. ludam은 Oehler의 수정이며 사본은 eludam으로 읽는다. 11. 12.16 사무엘상 21:1-6. 다윗이 놉에서 진설병을 먹은 일로, 누가복음 6:3-4에서 그리스도가 인용한 선례다. Kroymann은 quasi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non instructi(가르침을 받지 못한 듯)를 보충하기를 바란다. color는 수사학 용어로 사건을 유리하게 채색하는 논거를 뜻한다. Kroymann은 ‘그리스도의 의도’(de Christi uoluntate) 자리에서 독자가 ‘창조주의 의도’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의도된 뜻밖의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12. 12.17-18 출애굽기 16:5, 22-30. 여섯째 날에 이틀분의 만나를 거두게 하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못하게 한 규정이다. parasceue는 안식일 전날인 예비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규정을 안식일에 금식하지 않도록 창조주가 마련한 ‘특권’으로 해석한다. 13. 12.19 dici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iei로 읽는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은 안식일 파기(destructio)라는 마르키온파의 용어를 양보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이다. 14. 12.22 tuetur(옹호한다)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tuebatur로 읽는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옹호하지 않고 인간적 필요를 들어 변호한 것은, 안식일 규정 자체는 인정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6:5의 ‘안식일의 주’ 선언과 함께 읽힌다. 15. 12.23 누가복음 6:7. 바리새인들이 고발 사유로 삼은 것은 안식일 위반이었고 새로운 신의 선포가 아니었다는 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16. 12.24 †: 사본은 alium Christum nusquam praedicatum(다른 그리스도는 어디서도 선포되지 않았다)으로 읽는다. Kroymann은 이 자리를 손상된 것으로 표시하고 alium Christo(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신은 어디서도 선포되지 않았다)를 제안한다. 논증의 흐름에서는 Kroymann의 제안이 더 어울린다. 17. 12.25 de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eum(MR1) 또는 eam(R3)으로 읽는다. 안식일 노동 금지가 ‘조건부’라는 것은 금지된 일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며, 12.26-28에서 그 조건이 설명된다. 18. 12.26 출애굽기 20:10(“아무 일도 하지 말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네 모든 일을’(omne opus tuum)로 읽으며, 그는 ‘네’(tuum)에서 인간의 일만 금지되었다는 논거를 끌어낸다. 19. 12.28 출애굽기 12:16. 칠십인역은 ‘다만 모든 영혼(ψυχή)을 위하여 행해질 일은 예외’라고 읽고, 개역개정은 ‘각자의 먹을 것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로 옮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영혼’은 여기서 각 사람(의 생명)을 뜻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anima를 구원받아야 할 영혼으로 읽어 치유와 구원의 일을 안식일 금지의 예외로 세운다. 이 말놀이를 살리기 위해 anima를 일관되게 ‘영혼’으로 옮겼다. 20. 12.29 qua et deus(하나님이기도 한 자로서)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은 quia로 읽는다. 21. 12.30 누가복음 6:9. 개역개정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benefacere an non)로 읽고, ‘생명’ 자리에 anima(영혼)가 있다. ‘안식일의 주’는 누가복음 6:5다. permittens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promittens로 읽으며, omni는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omnia로 읽는다. 22. 12.31 magis ille는 Engelbrecht의 구분을 따라 magis ille(제정한 이라면 더욱 정당하게)로 이해했다. 23. 12.32-33 여호수아 6:3-4. 여리고에서 언약궤를 돌며 운반한 일은 하나님이 직접 명한 것이고 전쟁 중인 백성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12.26-28에서 세운 구분에 따라 ‘하나님의 일’에 속한다는 논지다. 24. 12.34 이사야 1:14(‘너희의 안식일’). ‘입술로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아니다’는 이사야 29:13의 말이다. ‘다른 지위를 부여했다’(alium statum fecit)는 하나님이 백성의 안식일과 자기 안식일을 서로 다른 범주로 두었다는 뜻이다. 25. 12.35 이사야 58:13(칠십인역은 안식일을 ‘즐거운 것’ τρυφερά이라고 부른다)과 이사야 56:2, 6(안식일을 더럽히지 않음). ‘같은 예언자’는 이사야다. 26. 12.36 ‘앞서 제자들의 사건’은 12.13-22의 밀밭 사건이다. factis ... ingerens는 그리스도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율법 완성을 보였다는 뜻이며, 인용되는 말씀은 12.37에 이어진다. 27. 12.37 마태복음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 없고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도 없다. Kroymann은 hac uoce 뒤에 탈락을 표시하고 eradicata 또는 erasa(뽑아 버린, 지워 버린)가 빠졌다고 본다. Ursinus는 si를 nec로 고쳤다. 전해진 본문은 ‘마르키온이 이 말씀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면’이며, 문맥상 마르키온이 이 말씀을 삭제하여 그리스도의 입을 막았다는 비꼼이다. 28. 12.38 ‘처음부터 아버지의 축복으로 거룩한’ 안식일은 창세기 2:3을 가리킨다. aduersarius(적대자)는 마르키온이 상정하는 창조주에 맞선 신이다. 그런 신이라면 창조주의 안식일을 빛내 주지 않으려고 다른 날에 치유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29. 12.39 열왕기하 4:18-37.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이다. 열왕기하 4:23(‘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추론한다. forma는 창조주가 미리 보여 준 본(선례), praedicatio는 창조주의 예언적 선포다. 30. 12.40 이사야 35: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이것을 명령이 아니라 예언(‘힘없는 손이 강해진다’)으로 읽는다. 중풍병자는 누가복음 5:17-26의 치유로, 제10장에서 다루었다. ‘특정한 치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가 손과 무릎이라는 특정 지체의 회복을 예언했다는 뜻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2 13 분명히 그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평화와 온갖 좋은 것을 복음으로 전하고, 분명히 산에 올라가 거기서 기도하며 밤을 지내고, 또 틀림없이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듣는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펼쳐서 그 순서 전체를 확인해 보라. 이사야가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라, 시온에 복음을 전하는 자여. 힘 있게 네 목소리를 높이라,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는 자여.” ‘힘 있게’라는 말에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가 권능을 가진 자처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그 날에 백성이 내 이름을 알 것이다” -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어떤 이름인가? - “말하는 이가 바로 나라는 것을.” 그때 예언자들 안에서 말하던 이가 바로 그, 곧 창조주의 아들인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때가 되어 내가 산 위에 있다, 평화의 소식을 복음으로 전하는 자로서, 좋은 것을 복음으로 전하는 자로서.” 마찬가지로 열두 예언자 가운데 나훔도 말한다. “보라, 산 위에 평화를 복음으로 전하는 자의 발이 빠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드리는 밤 기도의 소리에 대해서는 시편이 분명하게 말한다. “내 하나님, 내가 낮에 부르짖겠으나 당신은 <듣지 않>으실 것이고, 밤에도 부르짖겠으나 그것이 내게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장소와 소리에 대하여 시편이 말한다. “내 소리로 주를 향해 부르짖었더니, 그가 자기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었다.” 그대는 이름의 제시를 가지고 있고, 복음 전하는 자의 행위를 가지고 있고, 산이라는 장소와 밤이라는 시간과 목소리의 울림과 아버지의 들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예언자들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열두 사도를 택했고 다른 어떤 수든 택하지 않았는가? 이 점에서도 내가 그를, 예언자들의 목소리로만 아니라 사실들의 증거로도 예고된 나의 그리스도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창조주에게서 이 수의 예표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엘림의 열두 샘, 아론의 제사장 옷에 달린 열두 보석, 그리고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골라 언약궤에 넣어 둔 열두 돌이다. 사도들도 같은 수로 예고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전에 메말랐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버려져 있던 민족들의 세계에 물을 댈 샘과 강으로서 - 이사야를 통해서도 말하듯이, “내가 물 없는 땅에 강들을 두리라” - 또 아버지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입은 교회의 거룩한 옷을 빛낼 보석으로서, 또 참 예수가 요단의 세례에서 골라 자기 언약의 성소에 받아들인, 믿음으로 단단한 돌로서 말이다. 수를 뒷받침하는 이런 근거 가운데 어떤 것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가? 나의 그리스도가 단순히 행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일을, 저 그리스도가 단순히 행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일에 대한 준비가 발견되는 이에게 그 일이 속할 것이다. 그는 또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바꾸는데, 창조주도 아브라함과 사라와 호세아의 이름을 고쳐서 이 사람은 여호수아라 부르고 저들에게는 음절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왜 베드로인가? 믿음의 굳셈 때문이라면, 똑같이 단단한 많은 재료들이 자기들에게서 이름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반석이기도 하고 돌이기도 하기 때문인가? 실로 우리는 그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으로 놓였다고 읽는다. 나머지는 생략한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의 예표들에서 특별히 이름을 나누어 주고자 했으니, 내 생각에 이는 자기 것이 아닌 예표들에서 주는 것보다 더 가까운 일이다. 두로와 그 밖의 지역들에서 무리가 모여드는데, 바다 건너의 무리까지 온다. 시편이 이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 이방 민족들과 두로와 에티오피아 백성,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사람이 ‘어머니 시온’이라 말할 것이고, 사람이 그 안에서 태어났다” -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가 그 성을 세웠다” - 아버지의 뜻으로 -, 이는 그때 이방인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음을 그대가 알게 하려는 것인데, 그는 사람으로 태어난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방 민족들로부터도 교회를 세울 자였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한다. “보라, 이들은 먼 곳에서 오고, 이들은 북쪽과 바다에서 오며, 다른 이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의 땅에서 온다.” 이들에 대하여 또 다시 말한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라.” “모두가 모였다.” 이들에 대하여 뒤에서도, 낯선 자들과 외인들을 보고서 말한다. “그리고 너는 네 마음에 말할 것이다. ‘누가 이들을 내게 낳아 주었는가?’ 또 ‘이들을 누가 내게 길러 주었는가?’” “그런데 이들은 내게 어디에 있었던가?” 이 그리스도가 예언자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이겠는가? 그러면 마르키온파의 그리스도는 누구이겠는가? 뒤틀린 생각이 마음에 든다면, 예언자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일 것이다. 번역 주석 1. 13.1 누가복음 6:12(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함)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장면을 이사야 52:7(평화와 좋은 것을 전하는 자)과 나훔 1:15에 연결하고, 13.10에서 이름, 행위, 장소, 시간, 소리, 들음의 여섯 요소로 정리한다. 2. 13.2 이사야 40:9. 개역개정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이다. euangelizare는 이 장 전체에서 복음(euangelium)과 같은 어근이므로 “복음을 전하다”로 옮겼다. 3. 13.3 마가복음 1:22, 마태복음 7:29, 누가복음 4:32.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사야 40:9의 “힘 있게(cum uigore)”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란 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uirtutem habens는 개역개정의 “권위 있는 자와 같고”에 해당하며 우리말 번역에서는 권능(potestas/uirtus)의 용례를 따라 “권능을 가진 자처럼”으로 옮겼다. 4. 13.4 이사야 52:6. 개역개정은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어떤 이름인가?”는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끼어든 말이며, 인용은 13.5에서 이어진다. 5. 13.5 이사야 52:6의 후반부 “말하는 이가 바로 나다(ego sum ipse qui loquor)”. 사본 M은 sim, R은 sum으로 읽으며 Kroymann은 sim을 택했다. sermo는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에 해당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이므로 “말씀”으로 옮겼다. 6. 13.6 이사야 52:6-7의 칠십인역 형태 “내가 때가 되어 산 위에 있다(πάρειμι ὡς ὥρα ἐπὶ τῶν ὀρέων)”이다. 개역개정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말하는 이 자신이 산 위에 있다고 하므로 누가복음 6:12의 산과 연결된다. 7. 13.7 나훔 1:15(칠십인역과 불가타는 2:1). 개역개정은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발이 “빠르다(ueloces)”고 하며 산을 단수로 쓴다. 8. 13.8 시편 22:2(칠십인역 21:3). 개역개정은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이다. exaudies 앞의 non은 사본에 없고 Engelbrecht가 칠십인역 οὐκ εἰσακούσῃ에 따라 보충한 것이며, Kroymann이 받아들였다. non in uanitatem mihi는 칠십인역 οὐκ εἰς ἄνοιαν ἐμοί를 따른 읽기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구절을 아버지가 들은 그리스도의 밤 기도로 읽는다. 9. 13.9 시편 3:4(칠십인역 3:5). 개역개정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이다. 10. 13.10 actum(행위)은 Latinius의 수정이며 사본 M과 R은 sanctum, Engelbrecht는 statum, Ciacconius는 factum으로 읽는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복음 전하는 자의 행위”로 옮겼다. 11. 13.11 누가복음 6:13-16(열두 사도 선택). 12. 13.12 ne : 사본 M과 F는 ne, R은 nae로 읽으며 Kroymann이 non을 보충했다. non이 없으면 “내가 해석할 수 없도록”이라는 반대 뜻이 된다. 13. 13.13 엘림의 열두 샘은 민수기 33:9(출애굽기 15:27), 아론의 제사장 옷에 달린 열두 보석은 출애굽기 28:17-21, 요단에서 고른 열두 돌은 여호수아 4:3-9, 20이다. 출애굽기는 보석이 흉패에 달렸다고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옷(tunica)이라 하고, 여호수아는 돌을 길갈에 세웠다고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언약궤에 넣었다고 한다. 라틴어 Iesus는 여호수아와 예수를 같은 이름으로 쓰며, 여기서는 개역개정의 인명 여호수아로 옮겼다. 14. 13.14 는 Migne 판의 주석에서 보충한 것이며 Kroymann이 받아들였다. 이사야 인용은 13.15로 이어진다. 15. 13.15 이사야 43:19-20. 개역개정은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다. “참 예수(Iesus uerus)”는 13.13의 여호수아(Iesus)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라틴어에서 두 인물의 이름이 같다는 데 논증이 의지한다. lauacrum Iordanis는 요단에서 받은 세례를 뜻하므로 “요단의 세례”로 옮겼다. pontifex patris는 사본 M과 R의 읽기이며 Latinius는 pacis(평화의 대제사장)로 고쳤는데, Kroymann의 본문 patris를 따랐다. 16. 13.16 simpliciter는 아무 뜻이나 이유 없이 행한다는 뜻이며 “단순히”로 옮겼다. 열두라는 수가 창조주의 예표와 맞물린다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그 수를 우연히 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증이다. 17. 13.17 누가복음 6:14(시몬을 베드로라 함). 창세기 17:5(아브람에서 아브라함), 17:15(사래에서 사라), 민수기 13:16(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부름). Ausa는 호세아의 그리스어 형태 Αὐσή에서 온 이름이며 개역개정 인명 호세아로 옮겼다. “여호수아라 부르고”의 라틴어는 Iesum으로, 테르툴리아누스에게는 창조주가 예수라는 이름을 붙인 사례이기도 하다. 18. 13.18 cur et는 Engelbrecht의 어순 수정이며 사본은 et cur이다. solidae aeque도 Engelbrecht의 읽기이며 사본 M은 solidae quę, R은 solidaeque이다. 뜻은 믿음의 굳셈만이 이유라면 쇠나 바위처럼 똑같이 단단한 다른 재료도 이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 13.19 이사야 8:14(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8 참조). 개역개정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다. 베드로(Petrus)라는 이름은 반석(petra)에서 왔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반석이자 돌이라는 데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본다. 우리말 음역 베드로에서는 이 말놀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20. 13.20 propius(더 가까운)는 사본 M과 R의 읽기이며 Pamelius는 proprius(더 고유한)로 고쳤다. Kroymann의 본문을 따라 “더 가까운 일”로 옮겼다. “자기의 예표들”은 반석과 돌처럼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예표들을 뜻한다. 21. 13.21 누가복음 6:17(두로와 시돈 해안에서 온 많은 백성). 누가는 해안(maritima)이라 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바다 건너(transmarina)에서 온 무리라고 말한다. 22. 13.22 시편 87:4(칠십인역 86:4). 개역개정은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이다.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블레셋을 가리키는 데 쓴 말로 글자 그대로는 다른 민족이라는 뜻이며, 13.23의 ex allophylis quoque가 이 넓은 뜻으로 쓰이므로 “이방 민족들”로 옮겼다. Aethiopes는 개역개정의 구스에 해당하지만 라틴어 이름을 따라 에티오피아로 적었다. spectabat는 Rigalt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expectabat이다. 23. 13.23 시편 87:5(칠십인역 86:5)의 칠십인역 형태 “사람이 어머니 시온이라 말할 것이고, 사람이 그 안에서 났으며, 그가 그 성을 세웠다”이다. 개역개정은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와 “아버지의 뜻으로”는 인용 사이에 끼어든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다. natus는 사본 M의 읽기이며 R은 factus이다. 24. 13.24 이사야 49:12. “페르시아 사람들의 땅에서”는 칠십인역 ἐκ γῆς Περσῶν을 따른 읽기이며 개역개정은 “시님 땅에서”이다. 25. 13.25 이사야 49:18. 인용은 13.26의 “모두가 모였다”로 이어진다. 26. 13.26 uidens(보고서)는 Latin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uides이다. “낯선 자들과 외인들”은 다음 인용(이사야 49:21)에서 시온이 알아보지 못하는 자녀들을 가리킨다. 27. 13.27 이사야 49:21. 개역개정은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 누가 이들을 양육하였는고”이다. 인용은 13.28로 이어진다. 28. 13.28 이사야 49:21의 끝부분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에 해당한다. 29. 13.29 peruersitas는 뒤집어 보는 고집을 뜻하며 “뒤틀린 생각”으로 옮겼다. 마르키온파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로 규정하면 그는 이 장에서 확인한 예언을 전혀 이루지 못한 자가 된다는 결론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3 14 이제 나는 그의 통상적인 선언들, 곧 그가 그것들을 통해 자기 가르침의 고유한 특성을 도입하는 선언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칙령으로 나아간다. “거지들은 복이 있다” - 그리스어 본문에 있는 낱말의 번역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복 선언들로 시작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창조주의 것이다. 창조주는 만물을 내놓는 대로 축복의 말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봉헌하지 않았다. “내 마음이 지극히 좋은 말을 토해 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지극히 좋은 말, 곧 축복의 말일 것이며, 이 말은 옛 언약의 예로부터 새 언약의 개시자로도 인정된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종류의 말을 통해 창조주의 애정에서부터 시작했다 해도 무엇이 놀라운가? 창조주는 거지들과 가난한 자들과 낮은 자들과 과부들과 고아들을 늘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위로하고 옹호하고 변호하니, 그 결과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 이른바 사적인 인자함이 구원자의 샘들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라고 믿게 된다. 정말로 이런 종류의 말들이 이렇게 많이 있으니, 마치 숲이나 풀밭이나 과수원에 있는 것처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주치는 대로 여기저기서 자료를 구해야 한다. 시편이 외친다. “고아와 거지를 위해 재판하고 낮은 자와 가난한 자를 정의롭게 다루어라. 가난한 자를 구하고 거지를 죄인의 손에서 건져 내라.” 또 시편 71편은 이렇다. “그는 백성의 거지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들의 자녀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길 것이다” - 그런데 다윗은 유대 한 민족만을 다스렸으니, 다윗 역시 낮은 자들과 곤경에 시달리는 자들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이 말이 다윗을 두고 한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말라 - “그가 거지를 권력자에게서 건져 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거지와 가난한 자를 아끼고 가난한 자들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며, 이자와 불의에서 그들의 영혼을 속량할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그 앞에서 존귀하다.” 또 이렇다. “죄인들, 곧 하나님을 잊는 모든 민족은 음부로 돌아가게 하라. 거지는 끝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참음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 이렇다. “높은 곳에 거하며 하늘과 땅에서 낮은 것들을 내려다보고, 거지를 땅에서 일으키며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높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 물론 자기 나라에서 - “앉게 하는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인가?” 이와 같이 그 이전에 왕국기에서도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영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땅에서 일으키고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 그를 백성의 권력자들과 함께 영광의 보좌들에 앉게 한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물론 왕의 보좌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를 통해서는 궁핍한 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어떻게 공격하는가!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내 포도원을 불태웠으며, 거지에게서 빼앗은 것이 너희 집에 있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 백성을 해치며 거지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느냐?” 그리고 다시 이렇다. “악을 기록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은 기록하면서 악한 것을 기록하여, 거지들의 송사를 피하고 내 백성의 가난한 자들에게 판결된 것을 강탈한다.” 그는 이러한 재판을 고아들과 과부들에게도 요구한다. 그들 역시 위로에 궁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정의롭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라, 우리가 화해하자, 주가 말한다.” 낮은 처지의 모든 상태에 대해 이토록 큰 [창조주의] 애정을 가진 이에게, 그리스도가 약속하는 나라도 속할 것이다. 그 나라가 약속된 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애정에 속해 있다. 그런데 설령 그대가 창조주의 약속들은 땅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하늘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하늘이 지금까지 다른 어떤 신의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땅도 그의 것인 이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창조주가 더 작은 것들이라도 약속했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 작은 것들에 관해 먼저 자기 후함에 대한 신뢰를 결코 쌓은 적이 없는 이보다 그를 더 큰 것들에 관해서도 더 쉽게 믿는다. “굶주린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굶주린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거지들 외에 다른 이들이 아니므로, 나는 이 항목을 앞의 항목에 넘겨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창조주가 이 약속도 특별히, 곧 자기 복음의 사전 준비로 정해 두지 않았다면 말이다. 실로 이사야를 통해 그가 땅 끝에서 부를 자들, 곧 민족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보라, 그들이 빠르게, 가볍게 올 것이다” - 빠르게는 시대의 끝에 서둘러 오기 때문이고, 가볍게는 옛 율법의 짐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 이것은 물론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가 아니면 약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그는 말한다.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배부를 것이나 너희는 굶주릴 것이다.”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마실 것이나 너희는 목마를 것이다.” 이 반대되는 말들도 그리스도를 위해 미리 마련된 것인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당장은, 굶주린 자들에게 배부름을 약속하는 것은 창조주의 것에서 나온 것이다.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말을 훑어보라.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즐거워할 것이나 너희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기쁨으로 환호할 것이나 너희는 마음의 고통으로 울부짖을 것이다.” 이 반대되는 말들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확인할 것이다. 확실히 즐거움과 기쁨 속의 환호는 반대 처지에 있는 자들, 곧 슬픈 자들과 비탄에 잠긴 자들과 근심하는 자들에게 약속된다. 물론 시편 125편도 말한다. “눈물로 씨 뿌리는 자들은 환호하며 거둘 것이다.” 그런데 환호하며 기쁨을 얻는 자들에게 웃음이 따르는 것은 슬퍼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울음이 따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창조주는 웃음과 울음의 재료들을 미리 선포하면서, 우는 자들이 웃게 될 것이라고 먼저 말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과 낮은 자들과 굶주린 자들과 우는 자들의 위로에서부터 시작한 이는, 자신이 이사야를 통해 지시해 두었던 바로 그 사람임을 곧바로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주의 영이 내 위에 있다.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내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거지들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게 했다” (“굶주린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쇠약한 자들을 위로하게 했다”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의 애곡하는 자들에게 영광을, 재 대신 기름의 기쁨을, 고달픈 영 대신 영광의 옷을 주게 했다.” 그리스도가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것들을 수행했다면, 그 자신이 바로 이것들을 위해 자신이 올 것이라고 선포한 이이거나, 아니면 선포한 이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 우스꽝스럽지만 필요해서 말하는 것이다 - 아마도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그 일을 맡겼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너희 이름을 악한 것처럼 내쫓을 때, 너희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 선언으로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음을 권고한다. 창조주는 이사야를 통해 무엇을 덜 했는가? “사람들에게서 오는 치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멸시로 위축되지 말라.” 어떤 치욕, 어떤 멸시인가? 사람의 아들 때문에 있을 치욕과 멸시다. 어떤 사람의 아들인가? 창조주에 따른 사람의 아들이다. 어디서 증명할 것인가? 그 자신에 대해서도 미리 선포된 미움에서다. 이사야를 통해 미움의 주동자인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너희 때문에 내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렇다. “자기 영혼을 하찮게 여기는 이, 민족들과 종들과 관리들에게 멸시를 받는 이를 거룩하게 하라.” 만일 미움이 창조주에 따른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 미리 선포되었고, 복음서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 것이 분명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사람의 아들, 곧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증언한다면, 복음서는 창조주에 따른 사람의 아들, 그에 대해 미움이 미리 선포된 그 사람의 아들을 미움의 원인으로 세운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만일 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그 이름에 대한 미움이 그 이름의 당사자보다 앞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로 그는 우리 가운데서 거룩하게 되고, 자기 영혼을 하찮게 여겨 우리를 위해 그것을 내놓으며,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태어난 이, 그가 바로 사람의 아들일 것이며, 그 때문에 우리의 이름도 배척받는다. 번역 주석 1. 14.2 누가복음 6:20.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어 πτωχοί를 pauperes가 아니라 mendici(거지들)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거지들”로 옮겼다. 개역개정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는 2인칭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3인칭(illorum)이다. 사본 M은 dei regnum, R은 regnum dei, Pamelius는 마태복음 5:3에 따라 regnum coelorum으로 읽는다. 2. 14.4 시편 45:1(칠십인역 44:2). 개역개정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sermo optimus를 “지극히 좋은 말”로 옮겼다. ueteris는 Jun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ueteri로 읽는다. “옛 언약의 예로부터”는 수정된 본문을 따른 것이다. 3. 14.5 fontibus saluatoris는 이사야 12:3(칠십인역 “구원의 샘들에서”, 개역개정 “구원의 우물들에서”)을 암시하며, 여기서 saluator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usque는 Kroymann의 설명대로 semper와 같은 뜻이다. 4. 14.7 시편 82:3-4(칠십인역 81:3-4). 개역개정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5. 14.8 시편 72:4(칠십인역 71:4). 본문의 “시편 71편”은 칠십인역 번호이며 개역개정 72편에 해당한다. iustitia는 재판의 방식을 나타내는 탈격으로 읽어 “정의로”로 옮겼다. 개역개정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6. 14.9 시편 72:11-12(칠십인역 71:11-12). 개역개정 72: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dynasta(권력자)는 칠십인역 δυνάστης를 옮긴 말이다. Engelbrecht는 liberauerit 대신 liberauerat를 의심했으나 Kroymann은 접속법을 유지한다. 다윗에 관한 삽입구는 Kroymann이 괄호로 표시했다. 7. 14.10 시편 72:13-14(칠십인역 71:13-14). 개역개정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이자와 불의에서” 속량하고 “그들의 이름”이 존귀하다고 읽는다. 8. 14.11 시편 9:17-18(칠십인역 9:18-19). 개역개정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inferos를 “음부”로 옮겼다. 9. 14.12 앞 문장은 시편 9:18 후반(개역개정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이며, tolerantia(칠십인역 ὑπομονή)를 “참음”으로 옮겼다. 뒷 인용은 시편 113:5-8(칠십인역 112:5-8). 개역개정 113:7-8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물론 자기 나라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문 안에 끼워 넣은 말이다. R의 excelsis(높은 곳)를 따랐고 MF는 ecclesiis로 읽는다. 10. 14.13 Basiliae는 칠십인역의 책 이름 ‘왕국기’(Βασιλειῶν)로, 여기서는 사무엘상을 가리킨다. 인용문은 사무엘상 2:8. 11. 14.14 사무엘상 2:8. 개역개정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는 Engelbrecht가 사본에 빠진 어구를 보충한 것이다. “물론 왕의 보좌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다. 12. 14.15 이사야 3:14. incendistis(“불태웠다”, 칠십인역 ἐνεπυρίσατε)는 Engelbrecht의 수정이며 사본은 incenditis로 읽는다. 개역개정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3. 14.16 이사야 3:15. 개역개정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14. 14.17 이사야 10:1-2. 개역개정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 화 있을진저”. iudicia mendicorum은 거지들의 송사, iudicata pauperum은 가난한 자들에게 판결로 돌아간 권리를 뜻한다. pupillis(14.18)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populis로 읽는다. 15. 14.19 이사야 1:17-18. 개역개정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conciliemur는 “화해하자”로 옮겼다. 16. 14.20 [창조주의]는 Kroymann이 후대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은 말이다. 이 말을 빼면 “이토록 큰 애정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는 14.3-19에 인용된 창조주의 말들이 밝힌다. 17. 14.21 nam et si putas로 시작하는 조건절은 주절 없이 끊어지고 14.22의 bene quod 문장이 뒤따른다. 조건절을 “...생각한다고 하자”로 마무리했다. 18. 14.23 누가복음 6:21a. 개역개정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3인칭이며 “지금”이 없다. praestructio는 복음의 기초를 미리 놓는 일을 뜻하므로 “사전 준비”로 옮겼다. 19. 14.25 이사야 5:26-27(“빠르게, 가볍게 올 것이다”)과 이사야 49:10(“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을 하나의 인용으로 이었다. 개역개정 5:26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빠르게”와 “가볍게”의 해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삽입이다. 20. 14.27 이사야 65:13.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인용은 14.28까지 이어진다. 21. 14.28 contraria ista는 Kroymann의 설명대로 “너희는 굶주릴 것이다”, “너희는 목마를 것이다”라는 반대쪽 선언을 가리키며, 누가복음 6:25의 화 선언에 대응한다. praeministrentur는 그리스도를 위해 미리 마련되었다는 뜻으로 옮겼다. 22. 14.29 누가복음 6:21b. 개역개정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de creatoris est는 Kroymann의 설명대로 “창조주의 (글)에서 나온 것”을 뜻하므로 “창조주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옮겼다. R은 dei creatoris로 읽는다. 23. 14.30 이사야 65:13-14. 사본 MR은 14.30에 oblectabuntur, 14.31에 exultabunt in iocunditate를 두는데 Gelenius 이후 판본들은 둘을 바꾸었다. Kroymann은 사본 순서를 따른다.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24. 14.32 recognoscemus는 Kroymann이 사본의 recognosce(“확인하라”)를 14.28의 uidebimus에 맞추어 고친 것이다. 25. 14.33 시편 126:5(칠십인역 125:5). 개역개정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사본 MR은 “시편 127편”(CXXVII)으로 읽는다. Engelbrecht와 Pamelius는 125편으로 고쳤고, Kroymann은 사본의 숫자가 CXXVđ(= CXXV dicit)를 잘못 읽은 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26. 14.37 이사야 61:1-3의 인용이 14.39까지 이어진다. 개역개정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괄호 안의 복 선언들은 각 이사야 구절에 대응하는 누가복음 6:20-21이다. 14.37은 14.2의 “하나님의 나라”와 달리 마태복음 5:3의 “하늘 나라(regnum caelorum)” 형태로 인용한다. 27. 14.38 이사야 61:1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복 선언은 누가복음 6:21a. 28. 14.39 이사야 61:2-3. aduocare languentes는 칠십인역 61:2 παρακαλέσαι πάντας τοὺς πενθοῦντας(개역개정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에 대응하므로 aduocare를 “위로하다”로 옮겼다. 개역개정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복 선언은 누가복음 6:21b. 29. 14.40 admissus는 그리스도가 공적 활동에 들어선 것을 가리키므로 “등장하자마자”로 옮겼다. 마지막 문장은 이사야가 예고한 이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가 그 일을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위임했다는 식의 억지 가정을 비꼬는 말이다. 30. 14.41 누가복음 6:22. 개역개정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에는 “멀리하고”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사본 M은 nequam, R은 malum으로 읽는다. 이 장에서는 filius hominis를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14.44-50은 창조주의 예언에 따른 사람의 아들을 “태어난 이”(14.50 qui natus est)와 동일시하므로,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논거가 된다. 31. 14.43 이사야 51:7. 개역개정 “너희는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nullificatio(칠십인역 φαυλισμός)를 “멸시”로 옮겼다. 32. 14.45 ex odio는 Kroymann이 사본의 excidio를 고친 것이다. praedicato는 예언으로 미리 선포되었다는 뜻이다. 33. 14.46 첫 인용은 이사야 52:5(로마서 2:24에서도 인용). 개역개정 52:5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둘째 인용은 Kroymann이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칠십인역 이사야 49:7 “ἁγιάσατε τὸν φαυλίζοντα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τὸν βδελυσσόμενον ὑπὸ τῶν ἐθνῶν, τῶν δούλων τῶν ἀρχόντων”에 대응한다. 개역개정 49:7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 circumscribit animam suam(φαυλίζων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은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며, anima는 “영혼”으로 통일했다. sancite(ἁγιάσατε)는 “거룩하게 하라”로 옮겼다. 34. 14.49 propter nos eam ponens은 요한복음 10:15, 15:13의 “목숨을 버린다”(animam ponere)를 반영하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로써 14.46의 circumscribit animam suam을 풀이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4 15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했다”고 그는 말한다. 오, 낯을 바꾸는 그리스도여, 때로는 예언자들의 파괴자이고 때로는 예언자들의 옹호자인 그리스도여! 그는 적수로서 예언자들의 제자들을 자기에게로 돌려세우며 그들을 파괴했고, 친구로서 그들을 박해한 자들을 질책하며 그들을 옹호했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을 파괴하러 왔던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예언자들의 옹호가 어울리지 <않>았을 만큼, 그만큼 예언자들을 박해한 자들에 대한 질책은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어울린다. 그는 모든 점에서 예언자들을 성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조상들의 잘못을 자손들에게 책망하는 것은 각 사람 자신의 잘못조차 징계하지 않을 저 신의 일이기보다 창조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들의 불의, 곧 그들이 자기들의 예언자들에게도 경건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정되기를 바랐다고 해서, 곧바로 예언자들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책망할 불의는 전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그들은 칭찬받고 인정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뒤에 지극히 선한 신이 파괴하러 나선 바로 그 예언자들을 그들이 모욕한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는 이제 지극히 선하지도 않고, 이제 어느 정도 창조주 곁에 머물러 있으며, 전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신도 아니다. 보라, 그는 저주로 돌아서서, 자신이 노여워할 줄도 분노할 줄도 아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성격을 두고 우리에게 문제가 제기된다. 마치 그것이 저주의 말이라기보다 경고의 말이라는 듯이. 그런데 그것이 사안에 무슨 차이를 가져오는가? 경고도 위협의 가시 없이는 있지 않으며, 특히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더 쓰라리게 되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한데. 그런데 경고도 위협도 분노할 줄 아는 자의 것일 것이다. 아무도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위협하지 않을 것이니, 행해진 일을 보복할 자가 아니라면 그렇다. 분노할 줄 아는 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저주의 말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화 있을진저”를 그렇게 선언한 것은 본래 자기 자신의 판단에서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가 창조주의 것이므로 그들에게 창조주의 가혹함을 맞세워, 앞서 축복에서 보인 자신의 관용을 돋보이게 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선한 하나님과 심판자, 그 둘 다를 보여 주는 창조주에게, 축복에서 인자함을 먼저 내놓았으니 저주에서도 엄격함을 뒤에 덧붙여, 축복을 추구하는 데에나 저주를 미리 피하는 데에나 두 방면의 가르침의 폭을 갖추게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이미 이렇게 먼저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었다.” 이 말은 복음의 이 경륜까지도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선함을 심어 주려고 창조주의 가혹함을 맞세운 그자는 어떤 자인가? 다른 이를 파괴하는 데 의지하여 뒷받침되는 추천은 허약하다. 그렇지만 그는 창조주의 가혹함을 맞세움으로써 창조주가 두려워해야 할 자임을 확증했다. 두려워해야 할 자라면 분명 소홀히 할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종해야 할 자이니,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는 이제 창조주를 위해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들을 향한 “화 있을진저”가 창조주의 것이라면, 부자들에게 노여워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창조주이고, 그리스도는 부자들의 명분, 곧 교만과 허영과 세속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들 때문에 그들은 창조주에게서 “화 있을진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부자들을 거부하는 일이 어떻게 앞서 가난한 자들을 인정한 바로 그 자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기가 인정한 것의 반대를 거부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부자들에 대한 저주가 창조주의 것으로 돌려진다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도 같은 이의 것으로 주장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업 전체는 이제 창조주의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이 마르키온의 신에게 돌려진다면 부자들에 대한 저주도 같은 신에게 부과될 것이고, 그는 이제 창조주와 동등하게 선하기도 하고 심판자이기도 할 것이며, 두 신을 만들어 내는 구별의 자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고, 구별이 제거되면 한 하나님, 곧 창조주를 선언하는 일만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가 저주의 말이든 어떤 더 엄한 질타의 말이든,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부자들을 향해 발해진다면, 나는 창조주가 가난한 자들의 변호자임을 입증한 것처럼 창조주가 부자들을 물리치는 자이기도 함을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선언에서도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그리스도임을 보일 수 있다. 그가 솔로몬을 부유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솔로몬이 자기에게 선택이 허락되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고 있던 것, 곧 지혜와 <총명을> 구하기를 더 원했으므로, 자기가 더 원하지는 않았던 부까지도 얻기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를 베푸는 것도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아니다. 부를 통해 부자들도 위로의 도움을 받으며 -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고 그가 말하는데, 이는 분명 부로부터, 곧 부의 영광과 세속의 결실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 또 부로부터 정의와 사랑의 많은 일들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에 따라붙는 저 악덕들이 복음서에서도 부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를 돌리는 것이니, 모세의 신명기에서도 그와 같다. 그는 말한다. “네가 먹고 배부르고 큰 집들을 짓고 네 양과 소가 많아지고 돈과 금으로 네 마음이 높아져서 네 주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라.” 또 그는 보물로 부풀어 올라 페르시아에서 온 자들 앞에서 하나님보다 보물을 자랑한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들이친다. “보라, 날들이 올 것이니 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거두어지고, 네 조상들이 쌓아 둔 것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는 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한다. “부자는 자기 부를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다만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라.” 그는 또 이사야를 통해, 넘치는 부에서 나온 치장으로 부풀어 오른 시온의 딸들을 공박하고, 다른 곳에서는 귀족들과 교만한 자들을 이렇게 위협한다. “음부가 제 영혼을 넓히고 제 입을 열었으니, 명망 있는 자들과 큰 자들과 부자들이 내려갈 것이다” - 이것이 부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화 있을진저”에 해당할 것이다 - “사람은 낮아질 것이니”, 분명 부로 높아진 사람이며, “남자는 <불>명예를 당할 것이니”, 분명 재산 때문에 존귀하던 남자이다. 이들에 대해 또다시 말한다. “보라, 만군의 주가 영화로운 자들을 힘으로 뒤흔들 것이니, 높아진 자들은 부서지고 높은 자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다.” 부자들보다 더 그러한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분명 자기들의 위로, 곧 영광과 명예의 높음을 부로부터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이것들에서 돌려세우며 시편 제48편에서도 말한다. “사람이 부자가 되고 그의 영광이 넘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죽을 때에 모든 것을 가져가지 못하고 그의 영광도 그와 함께 내려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제61편에서도 말한다. “부를 탐내지 말라. 부가 빛난다 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 마지막으로 바로 그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옛적에 아모스를 통해 사치에 넘쳐 흐르는 부자들을 향해 발해진다. 그는 말한다. “화 있을진저, 상아 침상에서 자고 자기 침대에서 사치에 흘러넘치는 자들, 염소 떼에서 어린 염소를 먹고 소 떼에서 젖 먹는 송아지를 먹는 자들, 악기 소리에 맞추어 손뼉 치는 자들이여.” “그들은 이것들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영속하는 것으로 여겼으니, 걸러 낸 포도주를 마시고 최상급 향유를 바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창조주를 단지 부에서 떠나도록 만류하는 자로만 보이고, 그리스도가 쓴 바로 그 말로 부자들을 미리 정죄하는 자로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대상 자체, 곧 부에 대한 만류가 먼저 앞서 나왔던 바로 그 창조주가 그리스도의 “화 있을진저”를 통해 부자들에 대한 위협을 덧붙였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위협은 만류에 덧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배부른 자들에게도 “화 있을진저”를 던지니 그들이 굶주릴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 웃는 자들에게도 던지니 그들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에는 위에서 창조주에게서 축복들에 맞세워진 저 말들이 대응할 것이다.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배부를 것이나 너희는 굶주릴 것이다.” 분명 배부른 자들인 너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나를 섬기는 자들은 즐거워할 것이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분명 지금 웃고 있는 너희가 울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시편에서 “눈물로 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복음서에서는 웃음으로, 곧 기쁨에서 심는 자들은 눈물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창조주가 옛적에 함께 세워 두었고, 그리스도는 바꾸지 않고 다만 나누어 놓음으로써 새롭게 했다. “화 있을진저, 사람들이 너희를 축복할 때에!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도 이와 같이 행했다.” 창조주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축복과 칭찬을 추구하는 자들을 이사야를 통해 꾸짖는다. “내 백성이여, 너희를 복되다 하는 자들이 너희를 미혹하고 너희 발의 길을 어지럽힌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사람의 칭찬을 의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의지하는 것 자체를 전적으로 금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다.” 또 시편 제117편에서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좋고, 고관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는 것이 좋다.” 이렇게 창조주는 사람에게서 얻으려 하는 모든 것을 배척했으니, 축복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칭찬받거나 축복받은 것을 책망하는 일은, 예언자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배척받은 것을 책망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그의 일이다. 예언자들이 받은 침해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와도 상관이 없었을 것처럼, 거짓 예언자들이 받은 호의도 예언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불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15.1 누가복음 6:23 인용. 개역개정은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이다. “오, 낯을 바꾸는 그리스도여”(o Christum uersipellem)는 R3의 독법이고, 사본 MR은 et Christum으로 읽는다. uersipellis는 본래 ‘가죽을 바꾸는 자’, 곧 늑대 인간 등 둔갑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예언자를 파괴하다가도 옹호하는 그리스도의 이중성을 비꼰다. 2. 15.3 <않>은 R3가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MR에는 non이 없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예언자들의 옹호가 어울렸을 만큼”이 되는데, 뒤이은 “예언자들을 파괴하러 왔던”이라는 설명과 맞지 않으므로 Kroymann은 보충을 받아들였다. 3. 15.5 ‘모욕했다’(suggillauerunt)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figurauerunt(형상화했다)로 읽는다. 15.2-3에서 같은 어근 suggillans, suggillatio(질책)가 쓰인 것이 수정의 근거다. 4. 15.6 ‘에피쿠로스의 신’은 노여움도 분노도 모르고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신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25장과 제2권 16장에서도 마르키온의 신을 에피쿠로스의 신에 견주었다. 여기서는 마르키온의 신이 저주를 발하는 순간 그 무감정이 깨진다는 뜻이다. 5. 15.8 uae는 누가복음 6:24-26의 “화 있을진저”(οὐαί)이다. 이 장 전체에서 인용되는 uae를 “화 있을진저”로 통일했다. 6. 15.11 <누군가가>는 Engelbrecht가 보충한 quis를 옮긴 것이다. Kroymann은 한때 ne quid fiat(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로 고쳐 읽을 생각이었다고 밝힌다. 7. 15.13 ‘갖추게 하는’(instruendo)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nstruendae로 읽는다. ‘선한 하나님과 심판자’는 마르키온이 둘로 나눈 속성을 창조주가 하나로 가진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본 논지다. 8. 15.14 신명기 30:19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신명기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두 구절의 요소를 함께 담고 있다. 9. 15.18 ‘부자들을 향한’(in diuites spectat)은 R3의 독법이고, MR1은 induit et expectat로 읽는다. ‘받아 마땅하다’(merentur)는 Gelenius의 수정이며, 사본 MR은 merentibus로 읽는다. ratas habet causas는 ‘명분을 유효한 것으로 승인한다’는 법률 용어다. 10. 15.19 mendici는 본래 ‘거지들’이지만, 누가복음 6:20의 “가난한 자”(πτωχοί)를 가리키므로 ‘가난한 자들’로 옮겼다. 이 장에서 같은 말을 모두 그렇게 옮겼다. 11. 15.21 ‘같은 신에게’(eidem)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iusdem으로 읽는다. Engelbrecht는 eiusdem 를 선호한다. ‘한 하나님, 곧 창조주’(unum deum, creatorem)는 마르키온의 두 신 구별이 무너지면 창조주만이 하나님으로 남는다는 결론이다. 12. 15.22 ‘그래야 ... 보일 수 있다. 그가 솔로몬을 부유하게 한 것은’은 Kroymann이 ostendam. locupletat is quidem으로 끊어 읽은 것을 따랐다. 사본은 ostendam locupletantis quidem(M), ostendam locupletantis(R)로 읽는다. 13. 15.23 열왕기상 3:11-13 참조. <총명을>은 Engelbrecht가 보충한 intellegentiam을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 열왕기상 3:12의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따랐다. Kroymann은 한때 iustitiam(의)을 보충할 생각이었다고 밝힌다. 솔로몬이 부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구하지 않은 부까지 더해 주었다는 것이 열왕기상 3:13의 내용이다. 14. 15.24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누가복음 6:24의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이다. aduocatio는 그리스어 παράκλησις를 옮긴 고대 라틴어 역어로 ‘위로’를 뜻한다. ‘그가 말하는데 ... 결실로부터’(quoniam-fructibus)는 사본 MR에서는 15.25의 adscribunt 뒤에 놓여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15. 15.25 ‘부에 따라붙는 저 악덕들’(accidentia diuitiis uitia)의 어순은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uitia diuitiis로 읽는다. ‘신명기에서도 그와 같다’(uti)는 Kroymann의 수정이며, MR1은 utique, R3은 itaque로 읽는다. ‘모세의’(Moysei)도 Engelbrecht의 수정으로, 사본은 moyses로 읽는다. 16. 15.26 신명기 8:12-14 인용. 개역개정은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돈과 금’(pecunia et auro)으로 읽는다. 히스기야에게 온 사절은 이사야 39:1에 따르면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자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서 온 자들’이라고 썼다. 원문대로 옮겼다. 17. 15.27 이사야 39:6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이다. 18. 15.28 예레미야 9:23-24 참조. 개역개정 9:23은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9:24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이다. 둘째 문장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고린도전서 1:31과 고린도후서 10:17이 이 구절을 요약 인용한 형태(“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를 따른다. ‘다만’은 라틴어 scilicet을 옮긴 것이다. 19. 15.29 이사야 3:16-26의 시온의 딸들에 대한 책망을 가리킨다. ‘귀족들과 교만한 자들’에 대한 위협은 15.30-31의 이사야 5:14-15과 10:33-34이다. 20. 15.30 이사야 5:14-15 인용. 개역개정은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많은 무리와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모두 그 속에 빠질 것이라 여느 사람은 구푸리고 존귀한 자는 낮아지고”이다. orcus는 칠십인역의 ᾅδης(스올)를 옮긴 말로 ‘음부’로 적었고, anima는 히브리어 네페쉬(목구멍, 욕심)를 글자대로 옮긴 ‘영혼’이다. <불>명예는 Engelbrecht가 보충한 접두사 de-(honorabitur, 욕을 당할 것이다)를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honorabitur(존귀하게 될 것이다), Gelenius는 inhonorabitur로 읽는다. substantia는 이 책에서 대개 ‘실체’이지만 여기서는 재산을 뜻하므로 ‘재산’으로 옮겼다. 명망 있는 자들, 큰 자들, 부자들이라는 세 부류는 개역개정에는 없고 칠십인역 본문에서 왔다. 21. 15.31 이사야 10:33-34 인용. 칠십인역은 “보라, 만군의 주가 영화로운 자들을 힘으로 뒤흔들 것이니 높은 자들은 꺾이고 높은 자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나무를 꺾고 숲을 베는 비유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성한 가지를 꺾으시리니 ... 높은 나무들이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어내시리니”이다. dominus uirtutum은 ‘만군의 주’이다. 22. 15.33 테르툴리아누스가 ‘제48편’이라 한 것은 칠십인역 번호로, 개역개정 시편 49:16-17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에 해당한다. ‘제61편’은 개역개정 시편 62편이다. 23. 15.34 시편 61:11(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62:10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칠십인역은 “재물이 흘러들어도”(πλοῦτος ἐὰν ῥέῃ)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부가 빛난다 해도’(etsi relucent)로 읽으며, 앞의 ‘부를 탐내지 말라’(ne desideraueritis diuitias)는 시편 본문의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에 해당하는 느슨한 인용이다. ‘사치에’(deliciis)는 MGR3의 독법이고 R1은 diuitiis로 읽는다. ‘발해진다’(destinatur)에 대해 Kroymann은 destinabatur를, Engelbrecht는 destinaturus를 제안하지만 본문은 그대로 두었다. 24. 15.35 아모스 6:4-6 인용. 개역개정은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을 따라 ‘염소 떼에서 어린 염소를’로 읽는다. ‘상아 침상’(lectis eburnaciis)은 R1의 독법이고, MGR3은 eburneis로 읽는다. 25. 15.36 아모스 6:5b-6의 칠십인역 본문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영속하는 것으로 여겼으니”(ὡς ἑστῶτα ἐλογίσαντο καὶ οὐχ ὡς φεύγοντα)는 히브리어 본문의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개역개정 6:5)를 칠십인역이 달리 읽은 것으로, 개역개정에는 없다. ‘걸러 낸 포도주’(uinum liquatum)는 개역개정의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에, ‘최상급 향유’는 “귀한 기름”에 해당한다. 26. 15.37 ‘그리스도가 쓴 바로 그 말로’(etiam uerbo ipso quo et Christus)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 자체를 가리킨다. materiae는 ‘질료, 소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위협의 대상이 되는 부 자체를 가리키므로 ‘대상’으로 옮겼다. 27. 15.38 누가복음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8. 15.39 ‘위에서’는 제14장에서 누가복음 6:21의 축복에 맞세워 인용한 이사야 65:13을 가리킨다. 29. 15.40 이사야 65:13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배부를 것이다’(saturabuntur)로 읽어 누가복음 6:25의 ‘배부른 자들’(saturati)과 짝을 맞춘다. 30. 15.41 이사야 65:13 인용. 개역개정은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이다. ‘즐거워할 것이나’(oblectabuntur)는 칠십인역 εὐφρανθήσονται에 해당한다. 31. 15.42 시편 125:5(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웃음으로 ... 심는 자들’(qui in risu seminant)의 qui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quia로 읽는다. 32. 15.44 누가복음 6:26 인용. 개역개정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benedixerint는 그리스어 εὖ εἴπωσιν(좋게 말하다)을 ‘축복하다’로 옮긴 고대 라틴어 역어이며, 15.45-51의 ‘축복’(benedictio) 논증이 이 말에 걸려 있으므로 ‘축복할 때에’로 옮겼다. 33. 15.46 이사야 3:12 인용. 칠십인역은 “내 백성이여, 너희를 복되다 하는 자들(οἱ μακαρίζοντες ὑμᾶς)이 너희를 미혹하고 너희 발의 길을 어지럽힌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이다. 34. 15.48 예레미야 17:5 인용. 개역개정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이다. ‘제117편’은 칠십인역 번호로 개역개정 시편 118편이다. 35. 15.49 시편 117:8-9(칠십인역) = 개역개정 시편 118:8-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피하는 것’ 대신 ‘신뢰하는 것’(confidere)과 ‘희망을 두는 것’(sperare)으로 읽는다. 36. 15.52 <이 아니고서는>은 편집자가 보충한 nisi를 옮긴 것이다. 보충 없이는 “예언자들이 받은 침해가 그들의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을 것처럼”이 되어 뒤 문장의 nisi deo prophetarum과 대응하지 않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5 16 그는 “그러나 듣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고 말하는데, 이로써 이것이 오래전에 창조주에게서 명령된 것임을 보여 준다. 곧 “듣는 자들의 귀에 말하라”는 것이다. - 그리고 이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들을 창조주는 이사야를 통해 한 마디 선언으로 묶어 놓았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우리 형제다’라고 말하라.” 원수이며 미워하고 저주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형제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들을 형제로 여기라고 명한 이는 분명히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도 명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새로운 인내를 가르친다. 그는 창조주가 허락한, 불의를 되갚는 일까지 금한다. 창조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요구하지만, 그리스도는 반대로 다른 뺨까지 더 내밀고 속옷 위에 겉옷까지 내주라고 명한다.” 그렇다, 분명히. 그리스도가 이것들을 창조주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보충으로 덧붙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곧바로 답해야 한다. 인내의 가르침이 창조주에게서도 선포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스가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명했다면, “각 사람은 자기 형제의 악을 기억하지 말라” - 그뿐 아니라 이웃의 악도 기억하지 말라고 했으니, 다시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의 악을 되새기지 말라”고도 그가 말하기 때문이다 - 망각을 명한 이는 불의를 참는 인내를 훨씬 더 명한 것이다. 또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할 때에도 그는 마찬가지로 응징을 기다리는 인내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되갚음뿐 아니라 보복까지, 심지어 불의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까지 금하는 바로 그가 불의를 되갚으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만큼, 그가 어떤 뜻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했는지가 우리에게 그만큼 분명히 드러난다. 즉 보복을 금지함으로써 이미 금지했던 두 번째 불의, 곧 동해보복의 불의를 허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해보복을 맞세워 [그가 금지했던] 첫 번째 불의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각 사람이 두 번째 불의가 허락되어 있음을 돌아보고 첫 번째 불의를 스스로 삼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이 보복의 약속보다 동해보복의 즉각적인 제시로 더 쉽게 억제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본성과 믿음에 따라 둘 다 제정되어야 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보복을 기다리고, 믿음이 덜한 자는 율법의 동해보복을 두려워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해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율법의 이 뜻을, 안식일과 율법과 아버지의 모든 경륜의 주인 그리스도가 드러내고 또 이루어지게 했다. 그는 다른 뺨까지 내밀라고 명함으로써, 율법도 동해보복을 통해 막으려 했고 예언은 불의의 기억을 금하고 보복을 하나님에게 돌림으로써 분명히 억제했던 그 불의의 되갚음을 그만큼 더 소멸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무엇을 덧붙였다면 그것은 반대하는 명령이 아니라 돕는 명령으로 한 것이니, 그는 창조주의 가르침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끝으로, 인내를, 더구나 그토록 충만하고 완전한 인내를 명하는 근거 자체를 살펴보면, 그것은 응징을 약속하고 재판관을 제공하는 창조주의 것이 아니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되받아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뺨도 내주고, 맞저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축복까지 하고, 속옷을 붙들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겉옷까지 내주는 그토록 무거운 인내의 짐을 나를 방어해 주지 않을 자가 내게 지운다면, 그는 인내를 헛되이 명하는 것이다. 그는 명령의 보수, 곧 내가 말하는 인내의 열매인 보복을 내게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보복은 그 자신이 제공하지 않는다면 내게 허락했어야 했고,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제공해야 했다. 불의가 응징되는 것은 규율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불법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은 제멋대로 풀려난 자유로 지배하게 될 것이며, 처벌받지 않는다는 안심 때문에 두 눈을 다 뽑고 모든 이를 다 쳐서 빼낼 것이다. 그러나 인내에 불의를 행하고, 폭력에 문을 열어 주고, 선량한 자들을 방어하지 않고, 악한 자들을 억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극히 선하고 오직 선하기만 한 신이 하는 일이다. “네게 구하는 모든 자에게 주라.” 물론 궁핍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고, 설령 넉넉한 자에게도 주라는 뜻이라면 궁핍한 자에게는 그만큼 더 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는 자를 아쉬워하지 않도록, 그대는 신명기에 창조주가 명해 놓은 규정을 가지고 있다. “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너를 복 주고 또 복 주려 함이라”고 그는 말한다. 곧 궁핍한 자가 없게 만든 주는 자를 복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 이상이다. 그는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없게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먼저 나서서 없도록 돌보라’는 뜻이다. 그만큼 더 그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야 함을 미리 결정해 두는데, 이어지는 말에서도 그렇다. “네 형제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있으면, 너는 네 마음을 돌리지 말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서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 “너는 그에게 손을 활짝 열고, 그가 원하는 만큼 그에게 꾸어 주라.” 꾸어 주는 것은 구하는 자에게가 아니면 주어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어 주는 일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겠다. 지금은, 누가 창조주는 형제들에게 주라고 명했지만 그리스도는 구하는 모든 자에게 주라고 명했으니 이것이 새롭고 다른 것이라고 논증하려 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창조주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 되게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명한 것은 창조주가 형제들에게 명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게 행하는 선함이 더 크다 해도, 이웃에게 먼저 빚진 선함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낯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 선함의 둘째 단계가 낯선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이고 첫째 단계가 이웃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둘째 단계는 첫째 단계도 지닌 이의 것이 되기가 첫째 단계가 없었던 이의 것이 되기보다 더 쉽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본성의 순서를 따라 먼저 이웃에게 인자함을 가르쳤고 나중에 그것을 낯선 사람들에게도 내보내려 했으며, 자기 경륜의 이치를 따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나중에는 모든 인류에게 그렇게 했다. 그래서 신비가 이스라엘 안에 있던 동안에는 그는 마땅히 형제들에게만 자비를 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땅끝을 소유로 주고, 호세아를 통해 말한 다음의 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내 백성이 아닌 자가 내 백성이 되고, 자비를 얻지 못한 자가 자비를 얻었다” - 곧 이방 민족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데 - 그때부터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인자함의 율법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하여, 부르심에서처럼 긍휼에서도 아무도 제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더 가르쳤다 해도, 이것 역시 이방 나라들의 유업으로 받은 것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서 받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 이 명령에는 물론 그 다른 한쪽도 함께 들어 있다. “너희가 사람들에게서 받기를 원하지 않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 이것을 새롭고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은 신이 명했다면, 그는 그 전에 어떤 가르침으로도 나를 형성하여 내가 나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래서 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고 내가 나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한 적이 없는 신이므로, 내 판단이 제멋대로 되도록 허락한 것이며, 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고 내가 나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않도록 의지와 행위의 일치에 나를 묶어 놓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내가 나와 남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아야 하는지 규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행위를 의지의 법에 맞추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남에게서 내게 베풀어지기를 원하는 것, 곧 사랑, 섬김, 위로, 보호와 그런 종류의 선한 것들을 남에게 베풀지 않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남에게서 내게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곧 폭력, 불의, 모욕, 사기와 그런 종류의 악한 것들을 남에게 행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직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의지와 행위의 이런 불일치 가운데 살아간다. 본성으로 선과 악이 알려져 있다 해도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으며, 그 가르침을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의지와 행위의 일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의 신은 이제 막 드러났으면서 - 과연 드러났다면 말이지만 - 지금 다루고 있는 이 명령에 대해 그토록 압축되고 모호하고 아직 눈먼, 그리고 오히려 내 뜻대로 더 쉽게 해석될 요약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구별도 미리 세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창조주는 오래전부터 어디에서나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고아들과 과부들을 보호하고 돕고 쉬게 하라고 명했다. 이사야를 통해서도 그렇다. “네 떡을 구걸하는 자들에게 떼어 주고, 집 없는 자들을 네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라.” 또 에스겔을 통해 의인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자기 떡을 굶주린 자에게 주고 벗은 자를 덮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그때에 내가 나에게 행해지기를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라고 충분히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내가 나에게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있는 그 명령은, 이전에 그것을 미리 세우고 구별하고 자기 가르침의 뜻에 따라 배치했으며 이제 마땅히 요약으로 압축한 바로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주, 곧 그리스도가 땅에서 간추린 말씀을 행할 것이라고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16.1 “그러나 듣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는 누가복음 6:27의 도입부다. 개역개정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로 옮긴다. 2. 16.2 “듣는 자들의 귀에 말하라”는 사사기 7:3(칠십인역 “백성의 귀에 말하라”)과 제4에스라 15:1(“내 백성의 귀에 말하라”)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인용은 누가복음 6:27-28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로, 개역개정의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에 있는 ‘선대하라’가 없고 축복의 대상이 미워하는 자들이다. 3. 16.3 이사야 66:5의 칠십인역 본문이다. 칠십인역은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우리 형제다’라고 말하라”로 읽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따른 개역개정은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로 되어 있어 화자와 청자가 다르다. 4. 16.5 따옴표 안의 문장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마르키온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출애굽기 21:24, “다른 뺨”과 “속옷 위에 겉옷”은 누가복음 6:29와 마태복음 5:39-40이다. 누가복음 6:29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순서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의 순서(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도)를 따랐다. uicem iniuriae(불의를 되갚는 것)와 ultio(보복)를 구별하여 옮겼다. 5. 16.6 (…이 아니라면)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보충 없이 읽으면 “그렇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이것들을 창조주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보충으로 덧붙였다”는 뜻이 되며, 보충을 넣으면 16.5 끝의 ‘그렇다, 분명히’가 조건절로 제한된다. 보충된 말을 < > 안에 두었다. 6. 16.7 Kroymann은 여기의 an을 nonne의 뜻으로 읽는다. “인내의 가르침이 창조주에게서도 선포되고 있지 않은가?”로 옮겼다. 16.7-16.9는 하나의 긴 문장이다. “스가랴를 통해 명했다면”(16.7)이 조건절이고, 16.8의 인용과 16.9 앞부분의 인용이 그 내용이며, 16.9의 “망각을 명한 이는 … 훨씬 더 명한 것이다”가 주절이다. Kroymann은 16.8의 “그뿐 아니라 이웃의 악도”부터 16.9의 인용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7. 16.8 스가랴 7:10의 칠십인역 본문이다(“각 사람은 자기 형제의 악을 마음에 기억하지 말라”). 개역개정은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이다. 8. 16.9 스가랴 8:17의 칠십인역 본문이다(“각 사람은 자기 이웃의 악을 마음에 헤아리지 말라”). 개역개정은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이다. 9. 16.10 신명기 32:35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로마서 12:19와 히브리서 10:30의 인용 형태와 같다. uindicta는 ‘응징’으로, ultio는 ‘보복’으로 옮겨 구별했다. 10. 16.11 사본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순서로 전하지만 Kroymann은 출애굽기 21:24의 순서에 맞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바로잡았다. 이 순서를 따랐다. 11. 16.12 [그가 금지했던](quam prohibuerat)은 Kroymann이 앞 구절에서 잘못 반복된 삽입으로 보아 괄호 안에 넣은 말이다. 번역하여 [ ] 안에 두었다. talio는 가해자에게 같은 해를 되돌려 주는 처벌로, ‘동해보복’으로 옮겼다. 사본 M은 opposito talione, R의 후대 교정은 talione opposita로 읽으며 뜻은 같다. 12. 16.13 sciit는 Kroymann의 교정이다(F comprimiscit, R comprimi scit, M comprimescit). 주어는 하나님(창조주)이다. 13. 16.14 legis taliones(율법의 동해보복들)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talionis로 읽는다. Kroymann은 이를 율법이 명한 보복 규정, 곧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14. 16.15 “안식일의 주”는 누가복음 6:5(마태복음 12:8)를 반영한다. “다른 뺨”은 누가복음 6:29이다. dispositio는 하나님이 역사를 단계별로 배치한 질서를 뜻하여 ‘경륜’으로 옮겼다. compotem fecit는 율법의 뜻이 목적에 도달하게 했다는 뜻으로 ‘이루어지게 했다’로 옮겼다. 15. 16.17 “재판관을 제공하는”(qui iudicem praestat)은 창조주가 불의를 심판할 재판관으로 자신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16. 16.18 disciplinae interest는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 도덕 질서의 유지에 중요하다는 뜻이어서 여기서는 disciplina를 ‘규율’로 옮겼다. 이 장의 다른 곳에서 창조주와 하나님의 disciplina는 ‘가르침’으로 옮겼다. praestare는 Rigaltius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praestaret로 읽는다. 17. 16.19 excitatura(쳐서 빼낼)는 사본의 읽기이며 Latinius는 excussura로 고쳤다. 뜻은 같다. 18. 16.21 누가복음 6:30이다. 개역개정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모든’(omni)이 있다. 19. 16.22 indigeat datorem은 사본 M과 R의 읽기로, indigere가 목적격을 취하여 ‘주는 자를 아쉬워하다’, 곧 줄 사람이 없어 궁핍하다는 뜻이다. Pamelius는 datorem을, R의 후대 교정은 datori를 제안했다. forma는 창조주가 미리 정해 둔 규정을 뜻한다. 20. 16.23 신명기 15:4이다. 개역개정은 4-5절을 한 절로 묶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로 옮긴다. “복 주고 또 복 주려”(benedicens benedicat)는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강조 어법을 그대로 옮긴 형태다. 21. 16.24 non sit indigens in te는 16.23의 non erit indigens를 테르툴리아누스가 명령으로 바꾸어 다시 말한 것이다. 작은따옴표 안의 ‘먼저 나서서 없도록 돌보라’는 그의 해설이다. 22. 16.25 신명기 15:7이다. 개역개정은 “가난한 형제가 있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이다. 23. 16.26 신명기 15:8이다. 개역개정은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이다. fenus fenerabis는 ‘빚으로 빌려 주다’라는 뜻이어서 ‘꾸어 주라’로 옮겼다. 24. 16.27 “꾸어 주는 일에 관해서는 뒤에”라는 말은 17장에서 누가복음 6:34-35의 꾸어 주라는 명령을 에스겔 18:8과 비교하여 다루는 것을 가리킨다. de fenore는 R의 후대 교정이며 사본 M과 R의 원래 읽기는 dato fenore다. erit와 in Christo 사이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으로, 그는 adimpleta(이루어진) 또는 suppleta(보충된)가 빠졌다고 본다. 그 자리에 **를 두었다. 25. 16.30 “사랑할 수 있겠는가” 뒤의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이다. 그는 nisi qui ante dilexerit proximos(먼저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면)가 빠졌다고 보며, Ursinus는 quis enim poterit(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 할 수 있겠는가)로 보충했다. 어느 쪽이든 뜻은 이웃 사랑이 낯선 사람 사랑에 앞선다는 것이다. secundus는 R의 읽기이며 M과 F는 secundum으로 읽는다. 26. 16.31 benignitas는 ‘인자함’으로, bonitas는 ‘선함’으로, misericordia는 ‘자비’로, miseratio는 ‘긍휼’로 옮겨 구별했다. 27. 16.32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땅끝을 소유로”는 시편 2:8이다. sacramentum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뜻에서 ‘신비’로 옮겼다. 28. 16.33 호세아 2:23과 1:10(칠십인역 2:1)을 로마서 9:25의 인용 형태로 옮긴 것이다. 호세아의 원문은 이스라엘에 관한 말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를 따라 이방 민족(natio)에 적용한다. 29. 16.35 누가복음 6:31이다. 개역개정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이다. 30. 16.36 부정형 황금률은 누가복음에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긍정형 명령에 함께 들어 있는 다른 한쪽으로 본다. 31. 16.37 passiuitas는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상태를 뜻하여 ‘내 판단이 제멋대로 되도록’으로 옮겼다. 문장의 구조는 조건절 “새로운 신이 … 명했다면”에 신의 성격을 설명하는 관계절 “그 전에 어떤 가르침으로도 나를 형성한 적이 없는”이 이어지고, 주절은 “내 판단이 제멋대로 되도록 허락한 것이며 … 묶어 놓지 않은 것이다”이다. 32. 16.38 uoluntatis parem은 R의 후대 교정이며 M과 R의 원래 읽기는 uoluntati sperem이다. 33. 16.39 <이제>(iam)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들은 possim으로 읽는데 Kroymann은 possum 으로 고쳤다. 보충된 말을 < > 안에 두었다. obsequium은 상대의 뜻을 따라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섬김’으로 옮겼다. 34. 16.40 아직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ethnici)에 대한 서술은 로마서 2:14를 반영하며, 16.41의 “본성으로 선과 악이 알려져 있다”도 같은 구절과 닿는다. a deo는 M의 읽기이며 R은 ab eo로 읽는다. 35. 16.42 reuelatus, si tamen reuelatus(드러났으면서 - 과연 드러났다면 말이지만)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들은 reuelatus sit, tamen으로 읽는다. compendium은 긴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줄인 요약을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지는 마르키온의 신이 미리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았으므로 황금률이라는 요약이 그 신에게서는 뜻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36. 16.44 이사야 58:7이다.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이다. mendicis(구걸하는 자들)는 칠십인역의 ‘굶주린 자’에 해당한다. 37. 16.45 에스겔 18:7(18:16 참조)이다.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이다. 38. 16.47 출애굽기 20:13-16과 신명기 5:17-20의 십계명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순서 살인-간음-도둑질-거짓 증언은 개역개정 출애굽기 20장의 순서와 같다. 39. 16.48 “간추린 말씀을 땅에서 행할 것”(recisum sermonem facturus in terris)은 이사야 10:22-23의 칠십인역(로마서 9:28)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간추린 말씀’을 그리스도가 율법을 황금률로 요약한 것으로 읽는다. compendio substrinxit는 긴 명령들을 하나의 요약 명령으로 묶었다는 뜻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6 17 이제 여기서는 대부에 관한 것인데, 그가 “너희가 받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빌려 준다면 너희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는가?”라고 끼워 넣으니, 같은 의인에 관한 에스겔의 이어지는 말을 훑어보라. 그는 “자기 돈을 대부로 주지 않고 넘치는 것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넘치는 것이란 곧 대부의 과잉, 즉 이자다. 그러므로 대부의 열매를 뿌리째 뽑는 일이 먼저 있었으니, 이는 그 열매를 잃어버리는 법을 배운 사람이 혹시 그런 경우가 생기면 대부 자체도 잃어버리는 데 더 쉽게 익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을 위해 길을 준비한 율법의 일이었다고 말한다. 율법은 그때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아직 말을 더듬는 선의의 첫 가르침들로써 그리스도교 규율의 완전한 광채를 향해 조금씩 빚어 가고 있었다. 또 앞에서도 그는 “그는 빚진 자에게 담보물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 물론 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경우의 일이다. 갚을 사람에게 [물론] 담보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어느 사람이 글로 쓰겠는가? - 신명기에서는 훨씬 더 분명하다. “너는 그의 담보물을 덮고 자지 말고 해 질 무렵에 그에게 겉옷을 반드시 돌려주어라. 그러면 그는 자기 겉옷을 덮고 잘 것이다.” 그보다 앞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네 이웃이 네게 빚진 모든 빚을 면제하여 주고 네 형제에게 다시 요구하지 말라. 네 주 하나님의 면제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가 빚을 면제하라고 명할 때, 물론 갚지 못할 자에게 면제하라는 것인데, - 갚을 자에게라면 지나친 일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시 요구하기를 금할 때, 그가 가르치는 바는 다음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부에 그토록 큰 손실을 부과한 그가 갚지 못할 자에게 빌려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혼인을 없애 버림으로써 우리가 자식을 낳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그가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는다면, 이보다 더 뻔뻔스러운 일은 없다. 그가 이미 지워 버린 그 이름으로 어떻게 자기 사람들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나는 고자의 아들일 수 없다. 더구나 나는 만물이 가진 것과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 우주를 지은 자가 만물의 아버지인 것과 똑같이, 아무 실체도 짓지 않은 자는 고자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지 않았더라도, 또 모든 동물들에게까지 자식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낙원 이전에, 범죄 이전에, 추방 이전에, 둘이 다시 하나가 되기 이전에 그에게 이미 이것이었다. 그가 손으로 나를 낳아 내던 그 즉시, 자기 숨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던 때에 나는 아들이었다. 그가 이제 나를 다시 아들이라 부르는데, 이제는 영혼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낳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이 감사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잘했다, 마르키온. 그대는 그가 창조주로 보이지 않도록 그에게서 비와 해를 아주 재치 있게 떼어 냈구나.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지지도 않은 이 인자한 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인자하다는 것인가? 그에게서는 이런 종류의 인자함, 곧 해와 비로 베푸는 인자함이 담긴 은혜가 하나도 앞서 있지 않았고, 그는 창조주가 한 것처럼 인류에게서 되받을 생각 없이 빌려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창조주는 원소들을 그토록 아낌없이 베풀었는데도 그 감사의 빚을 자기보다 우상들에게 더 쉽게 갚는 사람들을 지금까지도 참아 주고 있으며, 영적인 혜택에서도 참으로 인자하다. 주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지 않은가? 그러므로 감사를 모르는 자들을 꾸짖은 이는 감사하는 자들을 경험할 자격이 있던 그이니, 마르키온, 그대 역시 감사도 모르면서 그의 해와 비를 누렸다. 그러나 그대의 신은 아직 감사하는 자들을 마련하지도 않았으니, 감사를 모르는 자들에 대해 벌써 불평할 수 없었다. 또 자비를 명하면서 그는 “너희 아버지가 너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굶주린 자에게 빵을 떼어 주고, 지붕 없는 <자>를 네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라”는 것이며, 또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의롭다 하라”는 것이다. 나는 제사보다 자비를 더 원하는 이의 옛 가르침을 알아본다. 아니면 이제 다른 신이 자비를 명했다면, 그 자신도 자비롭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그는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자비롭지 않았는가?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좋은 되로 눌러서 넘치도록 하여 너희 품에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재는 그 되로 너희에게도 되어 줄 것이다.” 내 생각에 이 말들은 공과에 따라 불러온 보응을 뜻한다. 그러면 누구에게서 오는 보응인가? 사람들에게서만 온다면, 그는 인간적인 규율과 보수를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는 전적으로 사람들에게 순종하게 될 것이다. 창조주에게서, 곧 공과의 심판자이자 결산자에게서 온다면, 그는 우리의 순종을 그 창조주에게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각 사람이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용서하거나 되어 준 대로 붙잡아야 할 혹은 두려워해야 할 보응을 그가 창조주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에게서 온다면, 그 역시 이제 심판하는 것이니, 이는 마르키온이 부인하는 바다. 그러므로 마르키온파는 선택하라. 스승의 규칙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사람들을 위해서나 창조주를 위해서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가지는 일과 같은 값으로 매겨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구덩이로 이끈다. 어떤 자들은 마르키온을 고친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 위에 있지 않다. 마르키온의 제자였다가 그를 교정한 아펠레스는 이것을 기억했어야 했다. 이단자는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인의 눈에 티가 있다고 여기면 그것을 입증하라. 마찬가지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내지 않듯이 - 진리도 이단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내지 않듯이 - 이단도 진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게 마르키온도 케르돈의 나쁜 보고에서 아무 좋은 것도 내지 못했고 아펠레스도 마르키온의 보고에서 내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걸림돌대로 두 신을 두고가 아니라 사람들을 두고 비유로 말한 이 말들을, 우리는 바로 그들에게 적용하여 훨씬 더 적절하게 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선을 경솔하게 고집해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선으로써 나는 그리스도가 다른 신을 어디에서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고 규정한다 - 마르키온의 변조하는 손이 오직 이 점에서만 멈춰 버렸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운데, 다만 강도들조차 두려워하는 법이다. 어떤 악행도 두려움 <없이> 있지 않으니, 자기에 대한 의식 없이 있는 악행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때까지 유대인들도 그 외에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던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못했고, 자신들이 유일하게 알던 그 외에 다른 이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느냐?”라고 말한 이는 누구로 보이겠는가? 아직 어디에도 나타난 적이 없어서 결코 이렇게 불린 적이 없던 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알려졌기에 언제나 주로 여겨지던 이, 곧 유대인들의 하나님인가? 또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라고 덧붙일 수 있었던 이는 누구인가? 바로 그때에야 가르치려고 시도하던 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에게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맡겨 둔 이인가? 설령 다른 때에는 결코 책망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불순종을 책망할 수 있었을 이가 아닌가? 더 나아가 그리스도 이전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사랑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선언한 이는 분명히 그들에게 오래된 완고함을 탓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신, 새로운 그리스도, 겨우 새로운 종교를 비추기 시작한 자가 자기가 경험해 볼 수도 없었던 자들을 완고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번역 주석 1. 17.1 누가복음 6:34. 개역개정은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gratia를 ‘감사’로 옮겨 17.17-21의 ingrati(감사를 모르는 자들)/grati(감사하는 자들)/debitum gratiae(감사의 빚)와 같은 말로 이었다. fenus는 ‘대부’, usura는 ‘이자’로 구별하였다. 2. 17.2 에스겔 18:8. ‘같은 의인’은 16장에서 인용한 에스겔 18장의 의인이다. dede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dedit, Engelbrecht는 dederit로 읽었다. 3. 17.5 에스겔 18:7. ‘reddet debenti’는 사본의 reddes beati를 칠십인역 ἐνεχυρασμὸν ὀφείλοντος ἀποδώσει에 맞춰 Kroymann이 고친 것이다(Oehler는 reddes dati). [utique]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중복어이다. ‘utrum homo scriberet’는 Kroymann의 설명대로 비선택 의문문(num quisquam scriberet)으로 옮겼다. 4. 17.6 신명기 24:12-13. ‘redditione reddes’는 히브리어 강조 어법을 그대로 옮긴 고대 라틴어 표현으로, ‘반드시 돌려주어라’로 옮겼다. 5. 17.7 신명기 15:2. 6. 17.8 ‘plus’는 Engelbrecht를 따라 ‘지나침’(zu viel)으로 이해하였다. ‘esset, si’는 Engelbrecht의 수정이며 사본은 est, et si이다. 7. 17.9 누가복음 6:35. 개역개정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에 해당하는 구절을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아들들’(filii dei)로 인용한다. 8. 17.10 마르키온은 혼인을 금하였다(1권 29장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한 신이 사람을 아들로 삼는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9. 17.14 창세기 2:24. ‘ante duos unum denuo factos’는 Kroymann의 수정으로, 사본은 ‘unum. denuo factus’이다. 10. 17.15 창세기 2:7. 11. 17.17 누가복음 6:35. ‘비와 해’는 마태복음 5:45의 말이며 누가복음에는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부재를 마르키온의 삭제로 돌린다. 12. 17.19 은 Kroymann의 보충이며 ‘빌려 주지 <않>았으니’로 옮겼다. 13. 17.20 시편 19:10(칠십인역 18:11). ‘ingratus’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gratos이다. 14. 17.21 ‘tuus’에 Engelbrecht는 를 보충하려 하였다. 문맥에 따라 ‘그대의 신’으로 옮겼다. 15. 17.22 누가복음 6:36.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 아버지가 너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misertus est uestri)으로 과거형이며, 개역개정의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와 다르다. 16. 17.23 이사야 58:7. 는 Leopoldus의 보충이며(Oehler는 ), 관계대명사에 해당하는 ‘<자>를’로 표시하였다. 17. 17.24 이사야 1:17과 호세아 6:6. 18. 17.26 누가복음 6:37. 19. 17.27 누가복음 6:38.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개역개정의 ‘흔들어’(concussam)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20. 17.28 누가복음 6:38. 21. 17.32 ‘quanti’는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quam이다. Engelbrecht는 ‘creatori docentem’으로 보충하여 ‘창조주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는’으로 읽으려 하였다. 사본대로 ‘사람들을 위해서나 창조주를 위해서 가르치는’으로 옮겼다. 22. 17.33 누가복음 6:39-40. ‘Corrigunt’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credunt이다. 아펠레스가 마르키온의 가르침을 고친 일을 가리킨다. 23. 17.34 누가복음 6:41-42. 아펠레스(Apelles)는 마르키온의 제자였으나 뒤에 스승을 떠나 신은 하나이고 그리스도는 실제 육신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M 사본은 Appelles로 쓴다. 24. 17.35 누가복음 6:43-45. 케르돈(Cerdo)은 로마에서 마르키온이 따른 스승이다(1권 2장, 3권 21장 참조). thesaurus는 누가복음 6:45의 ‘쌓은 것’을 가리키며 ‘보고’로 옮겼다. 25. 17.37 ‘huic’는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huc이다. Kroymann은 ‘in hoc solo’부터 17.38 끝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하였고, ‘in hoc solo’는 복음서 어딘가에 다른 신을 끼워 넣는 일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26. 17.38 은 Kroymann의 보충이다. M과 F는 nec formidine, R은 sine formidine이다. 27. 17.39 ‘domin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eum이다. 뒤에 오는 누가복음 6:46의 ‘주여, 주여’에 맞춘 것이다. 28. 17.40 누가복음 6:46. 는 Engelbrecht의 보충이고, uocatis는 Pamelius의 수정이며 사본은 uocas이다. 29. 17.42 누가복음 6:46. 30. 17.44 이사야 29:13.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입술로는 나를 사랑하나’(labiis diligit)로, 개역개정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와 다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7 18 그러므로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칭찬하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믿음이 자기와 상관없는 자가 그런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그 믿음이 그에게 상관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검증되거나 비교되기에는 아직 설익은, 아니 아직 없다고까지 해야 할 믿음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남의 믿음을 예로 드는 것이 왜 허용되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그런 믿음이 이스라엘에 결코 없었다고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자기가> 이스라엘에서 찾았어야 했다고 말함으로써 ** 또한 바로 그것을 찾기 위해 온 자,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이다. 그 믿음을 요구하고 추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것을 꾸짖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적수라면 오히려 그 믿음이 그런 상태로 발견된 것을 더 바랐을 것이다. 그는 그 믿음을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키고 파괴하기 위해 왔을 테니 말이다. 그는 과부의 죽은 아들도 다시 살렸다. 새로운 증거는 아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예언자들도 보여 준 일인데, 아들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런데 그 순간까지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신도 들여오지 않았으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큰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어느 하나님인가? 물론 그 백성이 그의 것이고 예언자들이 그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은 창조주를 찬양했는데 그리스도는 듣고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다면 - 더구나 죽은 자를 살린 그토록 큰 증거 앞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창조주에게 기도하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면 -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자기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서 공경받도록 용인한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들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들의 오류를 고치려고 온 자가 그들이 그토록 오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그냥 두었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일들을 듣고서 다른 이의 일인 줄로 알고 실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먼저 그 실족의 이유를 풀어 놓겠다. 그래야 이단자의 걸림돌을 더 쉽게 쫓아낼 수 있다. 이제 능력의 주 자신, 곧 아버지의 말씀이요 영인 그가 땅에서 일하고 선포하고 있었으므로, 예언자적 분량의 형식에 따라 요한 안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행하던 성령의 몫이 이제 요한에게서 떠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것은 물론 주에게로, 곧 자기 본래의 덩어리인 전체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제 보통 사람이요 무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실족하기는 했으나, 사람으로서 그러했을 뿐이고, 다른 그리스도를 바라거나 생각하는 자로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것을 바랄 근거조차 <가지지> 못했으니, 그리스도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거나 행하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존재하지 않는 줄로 아는 동안에는 그를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니, 그런 이에 대하여는 아무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창조주 외에 어떤 신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유대인으로서도 그러했으니, 예언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그러했다. 분명히 사람이 더 쉽게 망설이는 것은,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바로 이 사람이 그인지는 모르는 이에 대해서다. 그러므로 요한도 이런 염려에서 말했다. “오시는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는 자기가 기다리던 이가 바로 왔는지를 단순하게 물은 것이다. [“오시는 이가 당신입니까?” 이는 “오시게 될 이가 당신입니까?”라는 뜻이다.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는 곧 이런 뜻이다. “오시기로 되어 우리가 기다리는 이가 당신이 아니라면, 우리가 기다리는 이는 다른 이입니까?”] 그가 그렇게 물은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여겼듯이, 증거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동안 한 예언자가 보내졌을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른 이, 곧 더 큰 이, 오기로 되어 기다리던 이, 다름 아닌 주 자신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한의 실족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그이, 예언된 일들로 알아보았어야 할 그이가 왔는지를 그가 의심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주가 바로 그 일들을 통해 자기를 알아보아야 한다고 요한에게 알려 준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 일들은 우리가 하나하나 보여 준 대로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된 것임이 확실하므로,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오히려 강하게 요구하는 바로 그 일들을 통해 자기가 창조주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회답했다는 것은 심히 뒤틀린 생각이다. 요한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증언까지 해 주었다면, 그를 예언자로, 아니 그 이상인 천사로까지 확증하고 그에 관하여 기록된 말씀까지 들이댔다면, 그것은 훨씬 더 뒤틀린 일이다. “보라, 내가 내 천사를 네 얼굴 앞에 보내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그는 앞서 말한 요한의 실족의 의미에 맞추어 이 예언을 적절히 상기시킴으로써, 선구자 요한이 이미 왔음을 확증하여 저 질문의 의혹을 없애려 한 것이다. “오시는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선구자가 이미 직무를 다하여 주의 길이 준비되었으므로, 선구자가 섬긴 그이가 바로 그 자신임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에게서 난 모든 사람보다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작은 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게 될 그 나라는 다른 신의 것이고, 여자에게서 난 모든 사람보다 큰 요한은 또 다른 신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가 아무 작은 자에 대하여 말했든, 아니면 겸손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했든 - 그는 요한보다 작은 자로 여겨졌는데, 모두가 그리스도보다 요한에게로 광야에 몰려갔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 - 결과는 똑같다. 여자에게서 난 자들보다 큰 요한이 창조주 자신의 것이라는 것도, 그리스도든 그 <누구>든 작은 자로서 -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 <하나님의> 나라에서 요한보다 크게 될 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실족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큰 예언자보다 더 큰 자가 창조주의 것이라는 것도 창조주에게 알맞다. 그 실족이 그때 요한을 작게 만들었던 것이다. 죄 사함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그런데 저 죄인인 여자의 이야기는 이 점을 가리킨다. 그 여자가 주의 발에 입 맞추고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향유를 바를 때, 그가 만진 것은 견고한 몸의 실재였고 헛된 환영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죄인인 여자의 뉘우침이, 뉘우침을 늘 희생제보다 앞세우는 창조주를 따라 용서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뉘우침의 자극이 믿음에서 온 것이라면, 그 여자는 믿음에서 나온 뉘우침으로 의롭다 인정받아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을 한 이는 하박국을 통해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로 그였다. 번역 주석 1. 18.1 누가복음 7:1-10의 백부장 이야기를 다룬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은 누가복음 7:9에 있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면 이스라엘의 믿음이 그와 무관하므로 이 말을 할 수 없었다는 논증이다. 2. 18.2 Kroymann은 sed nec부터 adhuc nulla까지가 후대 삽입일 수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본문에 두었다. poterat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의 뜻으로 읽었다. 주어는 앞 단위의 “이스라엘의 믿음”이며,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는 그때부터도 그 믿음이 상관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3. 18.3 는 R3(Rhenanus 제3판)의 보충이다. M과 R1에는 동사가 없다. 4. 18.4 는 Oehler의 보충이다. **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락으로, 그는 “그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자기에게 속하는 자임을 입증했다”(eum se probauit, ad quem pertineret fides Israhelis) 같은 말이 떨어져 나갔다고 본다. 전해진 말만 옮겼으므로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Oehler는 quique를 qui quidem으로 읽었다. 5. 18.6 누가복음 7:11-17의 나인 과부의 아들 이야기이다. 창조주의 예언자들이 죽은 자를 살린 일은 엘리야(열왕기상 17:17-24)와 엘리사(열왕기하 4:32-37)를 가리킨다. 6. 18.7 “다른 어떤 신도”(nullum alium deum)의 deum은 Kroymann의 수정이며, 사본은 dominus로 전한다. 7. 18.8 누가복음 7:16 인용이다. 개역개정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와 내용이 같고,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나타났다”(prodiit)로 되어 있다. prophetes는 다른 곳과 같이 예언자로 옮겼다. 8. 18.9 uirtutes는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적 능력을 가리키므로 능력으로 옮겼다. “다른 신을 들고 다녔다”(alium circumferebat deum)는 다른 신을 선포하며 다녔다는 뜻이다. 9. 18.10 scandalum은 요한이 의심에 걸려 넘어진 것과 이단자가 그 의심을 근거로 내세우는 반론을 함께 가리킨다. 요한의 경우는 실족으로, 이단자의 경우는 걸림돌로 옮겼다. 마르키온파는 누가복음 7:18-23에서 요한이 그리스도의 일을 듣고 의심한 것을,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다른 신의 그리스도였다는 증거로 삼았다. M과 R1의 addecorationem 대신 R3의 at ego rationem을 따랐다. 10. 18.11 dominus uirtutum은 시편 24:10(칠십인역 23:10) 등의 “만군의 주”를 옮긴 옛 라틴어 표현이다. 앞뒤의 uirtutes(능력)와 이어지도록 “능력의 주”로 옮겼다. M과 R1의 domino 대신 R3의 dominum을 따랐다. massalis summa는 성령의 몫이 되돌아가는 본래의 전체, 곧 성령 자신을 뜻한다. 11. 18.12 사본은 scandalizabatur quidem qua homo, sed non qua alium Christum sperans으로 전하며, Kroymann이 sed의 위치를 옮겨 quidem, sed qua homo, non qua로 읽었다. 번역은 Kroymann의 본문을 따랐다.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2. 18.14 은 Kroymann의 보충이다. 13. 18.15 사본의 quasi haesitauit를 Kroymann이 quis haesitabit로 고쳤다. 14. 18.16 누가복음 7:19-20 인용이다. 개역개정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metus는 여기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염려를 뜻하므로 염려로 옮겼다. 15. 18.17 [ ] 안의 글(18.17 “오시는 이가 당신입니까?”부터 18.19 “다른 이입니까?”까지)은 Kroymann이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이 아닌 후대의 설명으로 보아 괄호로 묶은 부분이다. 그는 18.19의 enim이 18.17의 simpliciter inquirens에 바로 이어진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16. 18.19 Kroymann은 사본의 어순 ipse scilicet dominus, qui uenturus expectabatur를 qui uenturus expectabatur, ipse scilicet dominus로 바꾸고 et를 ex로 고쳤다. 번역은 이를 따랐다. 사람들이 예수를 예언자로 여겼다는 것은 누가복음 9:7-8 참조. 17. 18.20 사본의 debuerant를 Kroymann이 debuerat로 고쳤다. 주어는 요한이다. 18. 18.21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주가 바로 그 일들로 자기를 알아보게 요한에게 전한 것은 누가복음 7:22-23을 가리킨다. 19. 18.23 요한을 예언자 이상으로 부른 것은 누가복음 7:26-27을 가리킨다. angelus는 말라기 3:1의 “사자”(ἄγγελος)를 옮긴 말이며, 용어의 일관성을 위해 천사로 옮겼다. M과 F의 iohannes 대신 R의 Iohanni를 따랐다. 20. 18.24 누가복음 7:27 인용이며 말라기 3:1을 끌어온 것이다. 개역개정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네 얼굴 앞에”(ante faciem tuam)로 되어 있고 “네 앞에서”는 한 번만 나온다. praeparet는 R의 읽기이며 M은 praepararet, Pamelius는 praeparabit로 읽는다. 21. 18.26 누가복음 7:28 참조. 개역개정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작은 자”를 그리스도 자신 또는 아무 작은 자로 해석한다(18.27-28). 22. 18.2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는 누가복음 7:24-26을 가리킨다. 23. 18.28 quemque와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의 quemque(각각)를 quemcumque(누구든)로 읽은 것이며 “<누구>든”으로 표시했다. “그토록 큰 예언자보다 더 큰 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실족하지 않은 작은 자이며, 요한의 실족(18.20)이 그때 요한을 그 작은 자보다 낮아지게 했다는 뜻이다. 24. 18.29 죄 사함은 4권 10장의 중풍 병자 단락에서 다루었다. 누가복음 7:36-50의 죄인인 여자 이야기이다. 뉘우침을 희생제보다 앞세우는 창조주는 호세아 6:6, 시편 51:16-17 등을 가리킨다. phantasma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에 맞선 말이므로 환영으로 옮겼다. 25. 18.31 누가복음 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와 하박국 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인용이다.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자기 믿음으로”(ex fide sua)는 히브리어 본문과 같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8 19 부유한 여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붙어 따랐고 자기 재산으로 그를 섬겼으며, 그 가운데 왕의 청지기의 아내도 있었다는 것은 예언에서 나온 일이다. 그는 이사야를 통해 그 여자들을 이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부유한 여자들이여,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으라.” 먼저는 제자로, 그다음에는 일꾼과 섬기는 자로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소망 안에 있는 딸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그 해의 날을 수고와 함께 소망 안에서 기억하라.” 그들은 실제로 수고와 함께 그를 따라다녔고 소망 때문에 섬겼기 때문이다. 비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말하기가 창조주에게서 약속되었다는 것은 한 번 입증한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제 백성을 향한 그의 저 선언 “너희가 귀로 듣겠으나 듣지 못할 것이다” 역시 그리스도가 다음 말을 자주 되새기게 만들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는 창조주가 빼앗아 간 들음을 그리스도가 반대 입장에서 허락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위협 뒤에 권고가 따랐기 때문이다. [먼저 “너희가 귀로 듣겠으나 듣지 못할 것이다”, 그다음 “귀 있는 자는 들으라”이다.] 귀를 가진 자들이 스스로 듣지는 않았고, 오히려 마음의 귀가 필요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그들이 그 귀로는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렇게 덧붙인다. “너희가 어떻게 듣는지 보라.” 곧 귀로 듣고도 듣지 못하는 일, 다시 말해 마음으로는 듣지 않고 귀로만 듣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그대가 그 선언에, 들으라고 일깨우던 이의 뜻에 맞는 합당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도 “너희가 어떻게 듣는지 보라”, 듣지 않을 자들을 위협한 것이다. 물론 지극히 온유한 신은 위협하지 않는다. 그는 심판도 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뜻도 이를 입증한다. “있는 자에게는 주어질 것이고, 없는 자에게서는 그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무엇이 주어질 것인가? 믿음이나 이해의 보탬, 혹은 구원 자체이다. 무엇이 빼앗길 것인가? 물론 주어질 그것이다. 누가 주고 누가 빼앗을 것인가? 창조주가 빼앗을 것이라면 그가 또한 줄 것이고, 마르키온의 신이 줄 것이라면 그가 또한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목으로 빼앗음을 위협하든, 그것은 위협할 줄 모르고 분노할 줄 모르는 그 신의 것일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놀랍다. 그토록 오랜 세대 동안 자기 자신, 곧 더 크고 더 필요한 빛을 숨겨 왔던 이가 등불은 숨기는 법이 없다고 말하고, 지금까지도 자기 신을 그늘에 가려 두는 이가, 내 생각에는 마르키온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숨겨진 모든 것이 밝은 데로 드러나리라고 약속하니 말이다. 우리는 주의 탄생을 논쟁에 끌어들이는 모든 이들의 가장 확고한 논거에 이르렀다. 그들은 말한다. “그 자신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인가?’라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이처럼 이단자들은 언제나 벌거벗은 단순한 말들을 추측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쪽으로 끌어가거나, 거꾸로 조건이 붙고 이유가 있는 말들을 단순함이라는 조건으로 해체해 버린다. 이 자리에서처럼 말이다. 우리는 반대로 말한다. 첫째, 그에게 어머니도 없고 형제들도 없었다면,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보기를 청하며 밖에 서 있다는 것이 그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한 사람은 분명히 그들을 알고 있었으니, 이전부터 알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를 보기를 원하는 동안 혹은 그들 스스로 전갈을 부탁하는 동안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이 첫째 명제에 대해 반대편에서는 흔히 이렇게 대답한다. “그를 시험하려고 그에게 전한 것이라면 어떠한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무엇이 시험에서 행해졌을 때 그것을 늘 밝혀 주는 만큼 - “보라, 율법 교사가 일어나 그를 시험하였다”, 또 세금에 관한 문의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시험하며 그에게 나아왔다” - 시험을 언급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만큼 시험이라는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덧붙여 시험의 이유도 묻겠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이름을 들어 그를 시험했다면 무엇을 위해서였겠는가? 그가 태어났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였다면, 이 시험으로 따져 보아야 할 그런 문제가 언제 있었는가? 그런데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태어났음을 누가 의심했겠는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을 들었던 이를 누가 의심했겠는가? 모든 인간적 성질이 눈에 보이는 탓에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는 망설이면서, 어떤 위대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태어난 예언자로 여기기를 더 쉽게 했을 이를 누가 의심했겠는가? 설령 탄생을 탐색하기 위해 그를 시험해야 했다 하더라도, 태어났더라도 가지지 않을 수 있는 인물들을 언급하는 것보다는 다른 어떤 논거라도 시험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내게 말해 보라. 태어난 모든 이에게 어머니가 살아 있는가? 태어난 모든 이에게 형제들도 함께 태어나는가? 오히려 아버지와 자매들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그때 유대에서 아우구스투스 치하에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를 통해 호구 조사가 시행된 것은 확실하니, 그들은 거기서 그의 혈통을 조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이라는 설명은 어떤 식으로도 성립하지 않으며,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실제로 밖에 서 있었다. 남은 일은 단순하게 선언한 것이 아닌 이의 뜻을 살피는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 또는 형제들인가?” 이는 혈통과 탄생을 부정하려는 듯한 말이 아니라, [또한] 상황의 필연성과 이유 있는 조건에서 나온 말이다. 그토록 가까운 사람들이 밖에 서 있고 낯선 이들은 안에서 그의 말에 못 박힌 듯 몰입해 있는데, 더 나아가 그를 거룩한 일에서 불러내려고 † 들었으니, 그가 마땅히 분개하여 그들을 부인했다기보다 내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인가?”라고 먼저 말한 뒤에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이들이 아니면”이라고 이어 붙이면서, 혈연의 이름들을 다른 이들, 곧 믿음 때문에 더 가깝다고 판단한 이들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자기가 옮기는 그것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에게서] 아무도 무엇을 옮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형제가 아니었던 이들을 어머니와 형제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어머니와 형제였던 이들을 부인한 것이겠는가? 오히려 그가 그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더욱 고백한 것이니, 이는 물론 공적의 조건에 따른 것이고 가까운 이들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통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자는 합당한 제자가 아님을 가르친 것이다. 그가 다른 이들을 양자로 삼았다는 것은 노여움 때문에 부인한 이들을 확인해 준 것이다. 그는 그들 대신 다른 이들을 더 참된 자로서가 아니라 더 합당한 자로서 세웠다. 결국 자기에게 없던 혈연보다 믿음을 앞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번역 주석 1. 19.1 누가복음 8:2-3. “왕의 청지기의 아내”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누가복음 8:3)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롯을 왕(rex)이라 부른다. 2. 19.2 이사야 32:9. 칠십인역 “부유한 여자들이여”(γυναῖκες πλούσιαι)를 따른다. 개역개정은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3. 19.3 이사야 32:9-10(칠십인역). <내>(meos)는 Pamelius의 보충이다. “그 해의 날”(diei anni)은 Kroymann이 칠십인역 ἡμέρας에 따라 MR의 dei를 고친 것이며, Oehler는 die, Pamelius는 dies로 읽었다. 개역개정 32:10은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4. 19.4 prosequebantur는 Junius의 수정이다(MR quo sequebantur). 비유가 창조주에게서 약속되었다는 논증은 제11장에서 시편 78:2를 근거로 이미 다루었다. 5. 19.5 이사야 6:9. 개역개정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6. 19.6 누가복음 8:8. 7. 19.7 [ ] 안의 문장은 Engelbrecht가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ostendebant는 Kroymann의 수정이며(MR ostendebat), 그 결과 “귀를 가진 자들”이 주어가 된다. 8. 19.8 누가복음 8:18. “곧 귀로 듣고도 듣지 못하는 일”(id est: ne aure audiatis)은 M에만 있고 R와 다른 판본들에는 없다. 9. 19.10 누가복음 8:18. “위협하지 않는다”(non minatur)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nominatur, Oehler minatur). 마르키온의 신이 심판도 분노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이다. 10. 19.11 누가복음 8:18. 11. 19.14 인쇄본의 israci는 irasci로 읽었다. 12. 19.15 누가복음 8:16-17. obumbrat에 대해 Engelbrecht는 obumbrarat를 추정했다. 13. 19.16 Venimus는 R의 읽기이다. MF는 uenimus enim, Engelbrecht는 uenimus nunc. 14. 19.17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인가”는 마태복음 12:48(마가복음 3:33)의 형태이다. 누가복음 8:21에는 질문이 없고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로 되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질문을 마르키온의 복음서 본문으로 다룬다. 15. 19.18 인쇄본의 ita sem. per는 ita semper로 읽었다. 16. 19.19 누가복음 8:20. 17. 19.21 누가복음 10:25. 18. 19.22 Kroymann은 마태복음 16:1을 지시한다. 세금 질문은 마태복음 22:15-18(누가복음 20:20-23 참조)이다. 19. 19.24 인쇄본의 ex ist는 ex ista로 읽었다. 20. 19.25 filius hominis를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칭호를 사람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읽어, 그가 태어났음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다는 논거로 삼는다. 21. 19.26 existimans는 Kroymann의 수정이다(MR existimantes). Engelbrecht는 existimantes를 유지하고 19.25의 dubitaret를 dubitarent로 읽는다. 22. 19.27 explorationem은 Kroymann의 수정이다(MR exploratione). 23. 19.30 누가복음 2:1-2는 구레뇨(Quirinius)를 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C. Sentius Saturninus(기원전 9-6년경)를 든다. tunc는 Junius의 수정(MR nunc), Iudaea는 Latinius의 수정이다(MR iudaeam). 24. 19.32 [또한](et)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25. 19.33 †: quaerentes merito indignatus est non tam negauit는 전승 본문이 어긋난다. Kroymann은 quaerentes와 est를 삭제하기를 원했고, Engelbrecht는 indignatus, eas non으로 읽었다. 번역은 quaerentes를 “불러내려고 들었으니”로 살리고 est 없이 읽었다. abdicauit(내쳤다, 의절하다)에 대해 N과 Pamelius는 abnegauit. 26. 19.34 인쇄본의 praemisiss et는 praemisisset으로 읽었다. quis(MR)는 19.17의 quae와 다르며 Pamelius와 N은 qua로 읽었다. 27. 19.35 누가복음 8:21. 인쇄본의 quiaudiunt는 qui audiunt로 읽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내 말”(uerba mea)이며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prae fide는 M의 읽기이다(R pro fide). 28. 19.36 [그에게서](ab eo)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29. 19.38 “오히려 그가 그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더욱 고백한 것이니”(ceterum ex hoc ... agnoscere)는 MR에서는 dignum discipulum 뒤에 있으나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인쇄본의 ex boc는 ex hoc으로 읽었다. 마태복음 10:37; 누가복음 14:26 참조. F는 in semet ipso부터 한 장이 없다. 30. 19.39 offensa를 노여움으로 옮겼다. 그리스도가 혈육을 부인한 것은 그들이 그를 거룩한 일에서 불러낸 데서 생긴 노여움 때문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19 20 그런데 바람과 바다에 명령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이미 굴복당하고 쫓겨난 창조주의 원소들을 새로 다스리고 소유하는 자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실체들이 자기들을 지은 이를 알아본 것이다. 그것들은 그의 종들에게도 순종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출애굽기를 살펴보라, 마르키온. 유대의 모든 호수보다 더 넓은 홍해에 명령하는 모세의 지팡이를 보라. 그 명령으로 바다는 밑바닥까지 갈라져 양쪽에서 갈라진 틈이 똑같이 굳은 채 멈추어 백성을 마른 발로 그 속길을 지나 건너가게 했고, 다시 같은 지팡이의 신호에 따라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며 물결을 합쳐 이집트 군대를 뒤덮었다. 이 일에는 남풍들도 복무했다. 또한 † 나누어야 할 가족의 몫으로, 그가 건널 때 요단의 칼이 있었음을 읽어 보라. 그 강의 세찬 물살과 흐름은 예언자들이 건너갈 때 멈추어 서도록 여호수아도 분명히 가르쳐 두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무슨 상관이냐?” 그리스도가 그대의 것이라면, 그는 창조주의 종들보다 더 강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바다 원정에 대한 선포도 그리스도에 앞서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례들만 사용했을 것이다. 그가 바다를 건널 때 시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는 많은 물 위에 있다”고 시편은 말한다. 그가 해협의 물결을 흩어 버릴 때 하박국이 성취된다. “물을 길로 흩뿌리며”라고 하박국은 말한다. 그의 위협에 바다가 꺾일 때 나훔도 완결된다. “바다를 위협하여 그것을 마르게 하며”라고 나훔은 말하는데, 물론 바다를 뒤흔들던 바람들과 함께 그렇게 한 것이다. 그대는 내가 그리스도를 내 것이라고 어디에 근거해 주장하기를 바라는가? 창조주의 사례들에 근거해서인가, 아니면 창조주의 예언자들에 근거해서인가? 자, 이제, 전투적이고 무장한 전사가 선포되었다고 생각하며, 영적인 적들에 맞서 영적인 군대와 영적인 무기로 영적인 전쟁을 영적으로 치러 낼 이가 비유로나 알레고리로 선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대여, 한 사람 안에서 다수의 귀신들이 스스로를 군대라고 밝힌 것을, 그것도 분명히 영적인 군대임을 발견했으니, 그리스도 역시 영적인 적들을 정복하는 자로서 영적으로 무장하고 영적으로 호전적인 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가 바로 귀신들의 군대와도 싸우게 될 그 사람이며, 따라서 시편이 이 전쟁에 대해서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배우라. “강한 주, 전쟁에 능한 주.” 그는 마지막 적인 죽음과 싸우러 나서서 십자가의 전승비를 통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예수를 어느 신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이 알고 두려워하던 고통과 무저갱을 지닌 신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다. 그들이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신의 능력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모를 수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으니 말이다. 창조주가 한때 자기 위에 있는 다른 신을 몰랐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하늘 아래에서 활동하는 그 신을 이제는 분명히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이 알아낸 것은 이미 온 집안에도 알려졌을 것이다 ** 그 집안은 같은 세계 안에서, 낯선 신성이 머무는 바로 그 하늘의 둘레 안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도 그 신성을 알았을 것이고 그의 실체들도 알았을 것인 만큼, 만약 그것이 존재했다면 말이지만, 그만큼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귀신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조주에게 청해야 한다고 기억하고 있던 것, 곧 창조주의 무저갱을 면하게 해 달라는 것을 다른 이에게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청을 얻어 냈다. 무슨 공로로? 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를 잔혹한 신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거짓말한 자들을 도와주고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을 참아 준 이는 어떤 자이겠는가? 아니, 사실은 그들이 거짓말하지 않았고 무저갱의 하나님이자 자기들의 하나님을 알아보았기에, 예수 자신도 귀신들이 알아본 그대로의 자기, 곧 심판하고 보복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보라, 그리스도 안에도 창조주의 저 사소함과 연약함에 속하는 것이 있다 - 나도 그에게 무지를 돌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단자에 맞서는 일이니 여러분은 내게 허락하라 -. 그는 피를 흘리던 여자에게 만져졌는데, 누구에게 만져졌는지 알지 못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그는 말한다. 제자들이 해명하는데도 그는 무지의 말을 고집한다. “누군가 나를 만졌다.” 그리고 그는 이를 증거로 뒷받침하여 단언한다. “내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단자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가 그 사람을 알고 있었는가? 그러면 왜 모르는 것처럼 말했는가? 분명히 고백을 끌어내기 위해서, 두려움을 <책망>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창조주>도 한때 모르는 듯이 아담에게 물었다.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그대는 여기서 창조주가 그리스도와 함께 변호되는 것과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동등하게 되는 것을 함께 얻는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율법의 적대자로서 한 일이다. 율법이 피 흘리는 여자와의 접촉을 금하기에,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 여자의 접촉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치유까지 베푸는 일을 열망한 것이다.” 오, 본성으로가 아니라 질투로 선을 베푸는 신이여!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여자의 믿음이 그러한 상을 받을 만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주 자신이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나온 것이라고 밝힌 이 행위에서 율법에 대한 질투를 읽어 내는가? 그러나 그대는 이 여자의 믿음을 그 여자가 율법을 멸시한 믿음으로 세우려 한다. 그런데 아직 어떤 <새로운> 신도 알지 못하고 아직 어떤 새로운 율법에도 입문하지 않은 여자가 자기가 여전히 묶여 있던 율법을 깨뜨렸다는 것이 누구에게 믿을 만하겠는가? 결국 어떤 믿음으로 깨뜨렸는가? 어느 신을 믿으면서? 누구를 위해 창조주를 업신여기면서? 분명히 그 여자는 믿음으로 만졌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알지 못한 그 여자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만졌다면, 어떻게 창조주의 율법을 깨뜨렸는가? 그 여자가 깨뜨렸다면,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 확실한 만큼 깨뜨린 것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율법을 깨뜨렸다는 것과, 그 때문에 깨뜨리지 말았어야 할 바로 그 믿음으로 깨뜨렸다는 것, 이 둘이 어떻게 양립하겠는가? 내가 말하겠다. 이 믿음은 첫째로, 자기 하나님이 제사 자체보다 자비를 더 원한다고 확신하는 믿음이었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으로 그를 만졌다면, 거룩한 사람이나 예언자로서 만진 것이 아니다. 그런 이는 인간 실체 때문에 더럽혀질 수 있다고 그 여자가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으로서 만졌으니, 어떤 더러움도 하나님을 더럽힐 수 없다고 그 여자는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율법을, 더럽혀질 수 있는 것들이 더럽혀진다고 뜻하는 것이지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있던 하나님이 더럽혀진다고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해석한 것은 경솔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 여자는 율법에서 규정되는 것이 월경이나 출산으로 인한 통상적이고 정기적인 피의 흐름, 곧 건강의 결함이 아니라 자연의 직무에서 나오는 흐름임을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의 흐름은 건강의 결함에서 넘쳐 나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기간의 제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율법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분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이해까지 가져다준 그 믿음일 것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오직 창조주만을 믿던 그 여자의 이 믿음을 인정하면서, 자기가 그 믿음의 하나님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그 믿음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다음 사실도 빠뜨리지 않겠다. 그의 옷, 곧 분명히 환영이 아니라 몸에 입혀진 옷이 만져지는 동안 몸도 함께 입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다시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현재의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만약 몸의 실재가 없었다면, 환영은 공허한 것인 만큼 당연히 더럽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체의 공허함 때문에 더럽혀질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율법을 질투하는 자로서 그것을 원했겠는가? 참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자라면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주석 1. 20.1 누가복음 8:22-25(풍랑을 잠잠하게 한 사건)를 다룬다.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파가 할 법한 주장을 테르툴리아누스가 대신 꾸며 말한 것이다. 2. 20.2 substantiae는 바람과 바다라는 원소적 실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창조주의 종들, 곧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에게도 순종했다는 뜻이다. 3. 20.3 출애굽기 14:16, 21-22, 27을 가리킨다. 남풍(austri)은 칠십인역 출애굽기 14:21의 νότος를 따른 것이며,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큰 동풍”으로 옮긴다. 사본의 mari rubro, uastior는 어색하지만 뜻은 ‘유대의 모든 호수보다 넓은 홍해’이므로 그렇게 옮겼다. 4. 20.4 사본(M, R)의 et sorte familiae dirimendae는 훼손된 본문으로 Kroymann이 †로 표시했다. 전승된 낱말을 그대로 옮겨 ‘나누어야 할 가족의 몫으로’라고 썼다. Kroymann은 이 대목이 열왕기하 2:8, 14(엘리야와 엘리사가 겉옷으로 요단을 가른 사건)를 가리킨다고 보고 lege et, sodes, pallium Eliae를, Engelbrecht는 lege et pellem ouillam Eliae dirimendae 를 제안했으며, Oehler는 extorri로 고쳤다. 뒤의 Iesus는 여호수아 3:15-17에서 요단을 멈춘 여호수아이며, 라틴어 성경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은 Iesus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제3권 16장에서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이 같다는 점을 논한다. machaera(칼)는 요단을 가르는 엘리야의 겉옷을 비유한 말로 읽힌다. 5. 20.5 따옴표 안의 ‘이것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마르키온파의 반문이다. 6. 20.7 시편 29:3(칠십인역 28:3)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를 인용한다. 7. 20.8 하박국 3:10을 칠십인역(σκορπίζων ὕδατα πορείας)에 따라 인용한다. 개역개정 3:10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창수가 넘치고”로 옮겨 표현이 다르다. 8. 20.9 나훔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를 인용한다. 9. 20.11 누가복음 8:26-39(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를 다루며, ‘군대’(legio)는 누가복음 8:30에서 귀신이 밝힌 이름이다. daemones는 개역개정 누가복음의 용례를 따라 ‘귀신들’로 옮겼고, diabolus(마귀)와 구별했다. 마르키온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무장한 전사라고 보았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전쟁이 영적인 전쟁이라고 답한다. 10. 20.12 시편 24:8(칠십인역 23:8)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를 인용한다. ‘마지막 적인 죽음’은 고린도전서 15:26을 가리킨다. tropaeum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적의 무기를 걸어 세운 기념물로, ‘전승비’로 옮겼다. 11. 20.13 ‘군대’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은 누가복음 8:28, 무저갱(abyssus)으로 보내지 말라는 간청은 누가복음 8:31이다. Kroymann은 사본 M, R1의 testatus(남성)를 그리스어 ὁ λεγεών의 성에 맞춘 것으로 보아 그대로 두었다. 12. 20.16 Kroymann은 innotuisse 뒤에 debuisset, ut quae 정도의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결락을 보충하면 ‘주인이 알아낸 것은 그 집안에도 알려졌어야 했을 것이니, 그 집안은 같은 세계 안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dominus는 집안(familia)의 주인이라는 비유 속의 창조주이므로 ‘주인’으로 옮겼고, familia는 창조주에게 속한 영들, 곧 귀신들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식솔을 가리킨다. 13. 20.17 Kroymann은 사본의 quia nulla fuit 어순을 nulla fuit, quia로 바꾸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읽었다. 번역은 이 교정을 따랐다. 14. 20.18 depeterent, ab alio는 Kroymann의 교정이다. 사본은 depetunt ab alio, Ursinus는 peterent ab alio로 읽는다. uenia abyssi는 무저갱에 떨어지는 벌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15. 20.20 iudicis는 Kroymann이 사본의 iudicem을 고친 것으로, ‘심판자이며 보복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요점은 귀신들이 창조주의 아들을 알아보았고 예수가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6. 20.21 20.21의 ‘나도 그에게 무지를 돌리고 싶기 때문이다’부터 20.22의 ‘내게 허락하라’까지는 Engelbrecht가 지적한 삽입구다. permittite는 복수형으로 마르키온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한 말이다. 사소함과 연약함(pusillitates et infirmitates)은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돌린 결점들, 특히 모르고 묻는 무지를 가리킨다. 17. 20.22 누가복음 8:43-48(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다룬다. 18. 20.23 누가복음 8:45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를 인용한다. 제자들의 해명은 같은 절에서 베드로가 무리가 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 20.24 누가복음 8:46 “어떤 사람이 내게 손을 대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를 인용한다. 20. 20.26 probaret는 Kroymann의 교정이다. 사본은 probaret(시험하기 위해서)로 읽으며, 교정에 따라 ‘책망하기 위해서’로 옮기고 접두어만 보충된 부분을 <책망>으로 표시했다. <창조주>도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21. 20.27 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인용한다. 22. 20.28 따옴표 안의 말은 마르키온파의 주장이다. 피 흘리는 여자와의 접촉 금지는 레위기 15:19-27을 가리킨다. 23. 20.29 aemulatio는 다른 곳과 같이 ‘질투’로 옮겼다. 이 문맥에서는 율법에 맞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경쟁심을 뜻하며, 20.45의 aemulus legis(율법을 질투하는 자)도 같은 뜻이다. 24. 20.30 누가복음 8: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를 인용한다. 25. 20.31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Engelbrecht는 대신 앞의 nullius 뒤에 를 보충하려 했다. 26. 20.32 cui spernens creatorem은 사본 M의 읽기로, Kroymann은 cui를 ‘누구를 위하여’로 이해한다. R과 통행본은 quem spernens? creatorem(누구를 업신여기면서? 창조주를)으로 읽는다. 27. 20.35 ‘제사 자체보다 자비를 더 원한다’는 호세아 6:6을 가리킨다. 28. 20.38 월경과 출산으로 인한 출혈의 규정은 레위기 15:19-24와 12:1-8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율법이 정한 기간(modus temporis)이 자연적인 출혈에 적용되는 것이고, 병으로 인한 출혈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자가 분별했다고 말한다. 29. 20.41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는 칠십인역 이사야 7:9(ἐὰν μὴ πιστεύσητε, οὐδὲ μὴ συνῆτε)를 인용한 것이다. 개역개정 7:9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뒷부분을 “굳게 서지 못하리라”로 옮긴다. 30. 20.42 quam probauit는 앞 단위의 ‘이 믿음’을 받는 관계절이어서 ‘그는 그 믿음을 인정한 것이다’로 옮겼다. 옷이 만져진 것은 누가복음 8:44이다. 31. 20.43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이 아니라는 논의는 제3권 8-11장에서 다루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0 21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한다. 여기서라도 그가 누구의 나라인지 밝혔는가? 그는 그들에게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위하여 아무것도 길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한다. 까마귀를 먹이고 들의 꽃을 입히는 이, 곡식을 밟는 소에게도 일하는 중에 먹이를 물어 가도록 입을 자유롭게 허락하라고 먼저 명령한 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명령했겠는가? 일꾼은 자기 삯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키온이 이것들을 지워 버려도 좋다, 그 뜻만 온전히 남는다면. 그러나 그는 자기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명하면서, 이것이 증언으로 행해지도록 명한다. 아무도 심판에 넘겨지지 않을 일을 증언하지 않는다. 무자비함을 증언으로 남기라고 명하는 이는 심판자를 들어 위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새로운 신도 입증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저 의견도 밝혀 주었다. 그 의견에 따라 사람들은 헤롯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두고 어떤 이들은 요한이라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였든지, 그가 부활한 뒤에 다른 신을 선포하려고 일으켜졌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인다. 물론 옛 방식을 따라서다. 아니면 그 위엄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제 창조주보다 못한 자다. 창조주는 하루가 아니라 사십 년 동안, 빵과 물고기라는 더 낮은 재료로가 아니라 하늘의 만나로, 약 오천 명이 아니라 육십만 명을 먹여 살렸다. 그런데 그 위엄은 <같은> 것이어서, 그는 옛 선례를 따라 적은 양식이 충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넘치기까지 하기를 원했다. 엘리야 때의 흉년에도 그렇게 사르밧 과부의 적고 마지막 남은 양식이 예언자의 축복으로 흉년 기간 내내 넘쳐 났던 것이다. 그대는 열왕기 셋째 권을 가지고 있다. 넷째 권도 펼쳐 보면,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 모든 순서를 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발견할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바쳐진 보리빵 열 개를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고, 그의 시종은 이에 무리의 수와 양식의 적음을 견주어 보고 대답했다.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이것을 백 [천] 명의 사람들 <앞에> 내놓으란 말입니까?” “주어라.” 그가 말한다. “그들이 먹을 것이다. 주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먹고 남길 것이다.” 주의 말대로다. 오, 새로운 일들 가운데서도 옛 그리스도여! 그러므로 이런 일들을 보았고 옛일들과 비교했으며, 그 일들이 지난날에 행해진 것일 뿐 아니라 그때 이미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본 베드로는, 주가 자기가 그들에게 누구로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모두를 대신하여 대답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으니, 그는 그를 [다름 아닌] 자기가 성경에서 알고 있던 그리스도로 알아보았을 수밖에 없다. 그 그리스도를 그는 이미 행적들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자신도 확증한다. 지금까지도 그것을 그냥 두고, 아니 오히려 침묵까지 명함으로써 말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를 창조주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 고백할 수 없었는데도 그가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면, 그는 분명 베드로가 깨달은 바가 널리 퍼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말한다. “아니, 베드로가 옳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의 다른 이유를 밝혔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도, 우리가 각각 제자리에서 입증하겠지만,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고된 것들이므로, 이렇게 해서도 그는 자신이 바로 그것들이 예고된 그 대상임을 보여 준다. 확실히, 설령 예고된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베드로의 오류를 보여 주지 않는 침묵 명령의 이유를 내놓았다. 곧 겪어야 할 수난의 필연성이다. 그가 말한다. “자기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그것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이다.” 확실히 사람의 아들이 이 선언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그대도 바벨론 왕과 함께 그의 타오르는 풀무불을 살펴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곳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 그는 아직 참으로 그렇지 않았고, 곧 아직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므로 - 이미 그때에 이런 결말들을 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영혼을 잃기로 함께 결심한 세 형제의 영혼을 구하고, 반대로 우상 숭배로 자기 영혼을 구하기를 택한 갈대아 사람들의 영혼은 잃게 했다. 그 증거들이 옛것인 이 새로운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더구나 순교가 장차 있을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고들도 이미 전해 내려왔다. 이사야가 말한다. “보라, 의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런데 아무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로운 사람들이 거두어지는데 아무도 살피지 않는다.” 언제 이것이 박해 때보다 더 일어나는가? ** 그의 성도들의 것은 물론 단순한 것도 아니고 자연의 법에 따른 보통의 것도 아니며, 믿음을 위한 저 두드러진 군사적인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 때문에 자기 영혼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지킨다. 그래서 그대는 여기서도 역시 심판자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영혼의 나쁜 이득에는 영혼의 멸망으로, 영혼의 좋은 손실에는 영혼의 구원으로 갚을 자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질투하는 하나님을, 악을 악으로 되갚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누구든지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 부끄러움의 소재는 나의 그리스도에게가 아니면 맞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행로는 더욱 부끄러운 것이어서 이단자들의 욕설에까지 열려 있으니, 그들은 탄생과 양육의 온갖 더러움과 육신 자체의 품위 없음을 할 수 있는 한 쓰라리게 떠벌린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가 어떻게 부끄러움에 처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처녀의 것이긴 하나 어쨌든 여인의 것인 자궁에서 ** 응결되지 않았다. 씨에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법칙에 따라, 곧 피와 체액에서 이루어지는 몸의 실체의 법칙에 따라서 말이다. 그는 형태를 갖추기 전에 육신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모습을 갖춘 뒤에 짐승이라 불리지도 않았고, 열 달의 고통 끝에 풀려나지도 않았고, 갑작스런 진통의 충격으로 그 오랜 시간의 오물과 함께 몸의 하수구를 통해 땅으로 쏟아지지도 않았고, 제 탯줄의 첫 상처로 곧바로 울음으로 빛을 맞이하지도 않았고, 많이 씻기지도 않았고, 소금과 꿀로 손질되지도 않았고, 이미 매장의 싸개인 배내옷으로 입문하지도 않았고, 그 뒤로 품 안에서 더러운 것들 속에 뒹굴지도 않았고, 젖가슴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오래 아기였다가 겨우 소년이 되고 늦게야 어른이 되지도 않았다. 그는 하늘에서 내버려졌고, 한 번에 컸고, 한 번에 온전했고, 곧바로 그리스도였으며, 영이요 능력이요 신일 뿐이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던 그가 참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십자가의 저주 때문에 부끄러워할 대상도 아니다. 몸이 없는 그에게는 십자가의 실재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든지 나를 부끄러워하면”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의 그리스도가 이것을 선언해야 마땅했다. 그는 아버지에 의하여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낮추어졌고,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사람의 치욕이요 백성의 멸시거리였으니, 그의 상함으로 우리가 낫고 그의 수치로 우리의 구원이 서도록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마땅히 자기 사람을 위하여, 다른 이의 것이 아닌 자기 형상과 모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었다. [그때] 그것은 사람이 돌과 나무를 숭배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므로>, 똑같은 꿋꿋함으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우상 숭배의 뻔뻔함에 대하여 믿음의 뻔뻔함으로 하나님에게 보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르키온, 이 가운데 무엇이 그대의 그리스도에게 부끄러움의 근거로 들어맞는가? 분명 그대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대 자신이 그를 꾸며 냈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21.1 누가복음 9:1-2. 마지막 물음 cuius는 선포된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묻는 말이다. 2. 21.2 누가복음 9:3. 까마귀와 들꽃은 누가복음 12:24, 27, 곡식 밟는 소는 신명기 25:4, 일꾼의 삯은 누가복음 10:7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ad ueniam pabuli ex opere summouendi는 소가 일하는 중에 곡식을 입으로 집어 가도록 허락한다는 뜻으로 옮겼다. Ursinus는 summouendi 대신 sumendi로 읽는다. 3. 21.3 누가복음 9:5. 발의 먼지를 떨어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in testimonium)는 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심판의 증언으로 읽는다. 4. 21.5 누가복음 9:7-9. 누가복음에서는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라는 세 의견이 헤롯에게 전해지고, 헤롯은 요한을 자기가 목 베었다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의견들을 모두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으로 묶어 새로운 신을 들고 온 자로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논거로 쓴다. 5. 21.7 누가복음 9:10-17.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은 출애굽기 16:35, 장정 육십만 명은 출애굽기 12:37. 6. 21.8 ea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 M, R는 ea로 읽는다. 보충을 받으면 21.7의 “같은 위엄”(eadem maiestas)과 이어진다. 7. 21.9 열왕기상 17:7-16. 개역개정은 열왕기상에서 “사르밧”, 누가복음 4:26에서 “사렙다”로 쓴다. Sareptensis는 사본 M의 속격이고, R와 통용본은 Sareptensi로 읽는다. 8. 21.10 “열왕기 셋째 권”과 “넷째 권”은 칠십인역과 옛 라틴 성경의 구분으로, 개역개정의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다. 열왕기하 4:42-44의 엘리사 이야기다. 열왕기하 4:42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되어 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열 개라고 쓴다. ordiacios는 사본 M의 표기이고 R는 hordeaceos로 쓴다. 9. 21.11 열왕기하 4:43. centum [milibus] hominum의 milibus는 Pamelius가 삭제 표시한 말이다. 그 말이 없으면 열왕기하 본문대로 “백 명”이고, 사본대로 읽으면 “십만 명”이 된다. in spectu는 Rigaltius의 보충으로 “눈앞에”라는 뜻이다. 사본 M은 inspectu, R는 inspectum으로 읽는다. 10. 21.12 열왕기하 4:43-44. “주의 말대로”(secundum dictum domini)는 열왕기하 4:44에서 사람들이 먹고 남긴 사실을 서술하는 말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엘리사의 말에 바로 이어 붙였다. 11. 21.13 누가복음 9:18-20. 12. 21.14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는 마가복음 8:29의 형태다.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마태복음 16:16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다. [nisi]는 Latinius가 삭제 표시한 말로, ‘[다름 아닌]’으로 옮겼다. 그 말이 없으면 “베드로는 그를 자기가 성경에서 알고 있던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가 되고, 그 말을 살리면 “성경에서 알고 있던 그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없었다”가 된다. 어느 쪽이든 베드로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결론은 같다. 13. 21.15 누가복음 9:21. 침묵 명령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둔 것으로 읽는다. 14. 21.17 누가복음 9:22. 개역개정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의 순서이고, “사흘 뒤에”(post tertium diem)로 읽는다. 15. 21.20 누가복음 9:24. anima는 이 장 전체에서 “영혼”으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목숨”으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1.22와 21.25에서 같은 말을 순교자의 영혼에 적용한다. 16. 21.21 다니엘 3:92(칠십인역과 불가타, 개역개정 3:25). 개역개정은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tamquam filium hominis)로 읽는다. 바벨론 왕은 느부갓네살이다. “이런 결말들”(istos exitus)은 21.20의 영혼을 잃는 자와 구하는 자의 결말을 가리킨다. 21.17의 filius hominis는 ‘인자’로, 21.21의 filius hominis는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여기서 그가 아직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므로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이 칭호를 낱말 뜻대로 따지기 때문이다. 17. 21.22 다니엘 3:19-23. 세 “형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다. 갈대아 사람들의 죽음은 다니엘 3:22와 칠십인역 다니엘 3:48에서 불꽃이 집행자들을 태운 것을 가리킨다. 18. 21.24 이사야 57:1. 개역개정은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이다. 19. 21.25 ** 자리에 Kroymann은 시편 116:15(칠십인역 115:6)를 근거로 를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그러나 다윗이 말하듯 그의 성도들의 죽음은 또한 귀중하니”가 되고, 이어지는 “단순하지 않고 자연의 법에 따른 보통의 것도 아니며 믿음을 위한 군사적인” 수식어는 그 죽음을 꾸미는 말이 된다. 번역은 보충 없이 “그의 성도들의 것”으로 두었다. “군사적인”(militaris)은 순교를 믿음을 위한 군인의 죽음으로 보는 말이다. 20. 21.26 remuneraturus sit et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 사본은 remuneraturus. sed et로 읽어 새 문장을 시작한다. “질투하는 하나님”(zeloten deum)은 출애굽기 20:5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돌리는 특징이다. 21. 21.27 누가복음 9:26. 개역개정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로 1인칭으로 읽는다. mei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me다. 인용 뒤 ** 자리에 Kroymann은 를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도 그는 나의 그리스도다”가 되고, 이어지는 quando 절이 그 근거가 된다. 번역은 보충 없이 quando 절을 “…이니 말이다”로 옮겼다. 22. 21.29 ** 자리에 Kroymann은 prolatus, non이 빠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자궁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응결되지도 않았다”가 된다. Engelbrecht는 iaculatus, non을 제안한다. coagulatus는 R3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1은 coagulatum으로 읽는다. “씨에서는 아니더라도 법칙에 따라”는 동정녀 탄생이 남자의 씨 없이, 그러나 피와 체액으로 몸이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 일어났다는 뜻이며, 21.30 첫머리의 substantiae corporalis가 이 lege에 걸린다. 23. 21.30 열 달은 로마의 음력 계산에 따른 임신 기간이다. “소금과 꿀로 손질되다”는 신생아의 피부를 소금으로 문지르고 입에 꿀을 발라 주던 관습이다. “이미 매장의 싸개인 배내옷”은 배내옷을 수의의 예행으로 보는 말이다. “하늘에서 내버려졌다”(de caelo expositus)의 expositus는 버려진 아이에게 쓰는 말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탄생 없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조롱이다. “영이요 능력이요 신일 뿐”의 deus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므로 “신”으로 옮겼다. 24. 21.31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보이지 않았던 그”(qui non uidebatur)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몸이 없어 참으로 보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저주는 갈라디아서 3:13과 신명기 21:23을 가리킨다. 25. 21.32 시편 8:5(칠십인역 8:6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개역개정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이사야 53:5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noster는 “우리의 그리스도”로 옮겼다. 26. 21.33 “자기 형상과 모양”은 창세기 1:26. [tunc]는 편집자가 삭제 표시한 말이고, 은 편집자의 보충이다. 보충 없이 읽으면 “사람이 돌과 나무를 숭배하면서 부끄러워했으므로”가 되어 뒤따르는 “똑같은 꿋꿋함으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맞지 않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1 22 이제 그대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부끄러워해야 했다. 곧 그대는 그가 산의 외딴 곳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보이는 것을 용인하는데, 그는 바로 그들을 파괴하는 자로서 왔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난 저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가 바로 이 점을 이해시키려 했다는 것이리라. 곧 이제는 모세와 엘리야의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 주지 않고 음성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규정함으로써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못하게 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가 보여 준 자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금했다면, 보여 주지 않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그 밖의 사람들의 말은 듣도록 허락했다는 말인가? 이제 그들의 임재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친밀함의 표시인 대화 가운데 보여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존중과 은혜의 본보기인 영광의 공유 가운데 보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파괴의 증거인 어떤 더러운 차림새로, 아니 그가 흩어 버리도록 보내진 창조주의 어둠 속에서, 그들의 음성과 글 자체를 자기 복음에서 떼어 놓을 그리스도의 영광에서도 멀리 떨어진 채 보여졌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을 자기와 함께 두면서 그들이 낯선 자임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자기에게 결합시키는 자들을 이렇게 버려야 마땅하다는 말인가? 자기 광채로 세워 주는 자들을 이렇게 파괴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들의 그리스도라면 무엇을 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 비뚤어진 논리를 따르자면,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그래야 했을 그런 모습으로 그들을 드러냈을 것이고, 아니면 자기 예언자들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자기와 함께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선포한 자들을 자기와 함께 보여 주는 것만큼 창조주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계시 가운데서 그가 자기를 보여 주었던 자들과 함께 보이는 것만큼 어울리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를 말하였던 자들과 함께 말하는 것만큼은? 그를 영광의 주라고 불렀던 자들에게 자기 영광을 나누어 주는 것만큼은? 자기의 으뜸 되는 자들, 곧 하나는 일찍이 백성을 세운 자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백성을 다시 세울 자이며, 하나는 옛 언약을 시작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을 완성하는 자인 그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만큼은? 그러므로 베드로도 자기 그리스도의 합당한 동반 관계를 알아보고, 그 관계가 나뉘지 않게 하는 것<을 위하여> 한 가지 제안을 내놓는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물론 좋다,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곳이니 - “우리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알지 못했는가? 단순한 착오로 그랬는가, 아니면 우리가 새 예언을 옹호하는 논쟁에서 은혜에는 탈혼, 곧 정신을 벗어남이 따른다고 주장하는 그 이치로 그랬는가? 사람이 영 안에 놓이면,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나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할 때에는, 신적 능력에 가려져 반드시 감각을 잃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와 영혼적인 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지만, 당장은 베드로가 정신을 벗어났음을 입증하기는 쉽다. 그가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겠는가, [영 안에서가 아니라면?] - 백성은 그들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가진 적이 없고, 율법이 금하므로 모양도 가진 적이 없으니 - 영 안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한 말을, 곧 감각이 아니라 영 안에 놓인 상태였으므로,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착오를 일으킨 것처럼 알지 못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속한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앞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자기를 누구로 여기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했음이 이미 확실하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만일 그때 그를 다른 신의 그리스도로 알았다면, 여기서도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도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에 여기서도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대는 다음을 확신하는 셈이다. 곧 그날까지도 그리스도가 어떤 새로운 신성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그때까지 그런 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그때까지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그 동안은 그리스도를 창조주 외에 다른 자의 그리스도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도 창조주의 모든 질서를 표현해 냈다. 그는 제자들 중 세 사람을 장차 있을 환상과 음성의 증인으로 데리고 간다. 이것도 창조주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세 증인으로 모든 말이 설 것이다.” 그는 산으로 물러간다. 나는 그 장소의 양식을 알아본다. 창조주는 옛 백성도 산에서 자기 환상과 음성으로 입문시켰기 때문이다. 옛 언약이 기록되었던 그 높은 자리에서 새 언약이 확증되어야 마땅했고, 또한 같은 구름의 둘레 아래에서 그래야 했다. 그 구름이 창조주의 공기로 뭉쳐진 것임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저 신 역시 자기 구름을 끌고 내려온 것이<라면> 모르지만 - 그 자신도 창조주의 하늘을 뚫고 길을 냈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는 창조주의 구름도 마찬가지로 빌려서 썼는가? 그러므로 이번에도 구름은 말이 없지 않았고, 하늘에서 늘 나던 음성과 아들에 관한 아버지의 새 증언이 있었다. 그 아들에게 두 번째 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그에 관해 이사야를 통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는 그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지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를 눈앞에 내보이면서 - “이는 내 아들이다” - 분명히 다음 말을 함께 뜻한다. “내가 약속했던 그 아들.” 만일 언젠가 약속했고 나중에 “이가 그다”라고 말한다면, 약속한 것을 가리켜 보일 때 내보이는 자의 음성을 쓰는 것은 언젠가 약속한 자에게 속하는 일이지, 다음과 같이 반문받을 수 있는 자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그대 자신은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 관해서도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 누구의 말인가? 그가 처음부터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그 말을 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그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는 백성에게 예언자로도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말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자손 가운데서” - 물론 육신에 따른 출신을 따라서 - “한 예언자를 일으킬 것이니, 너희는 나를 들은 것처럼 그의 말을 들으라.” “그런데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그 영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멸절될 것이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는 그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지니라.” 그 음성을 아버지 자신도 추천할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자기 아들의 말을 세우면서”,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고 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어야 할 대상이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신에게서 옮겨진 것도 아니고 다른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것도 아니며, 창조주에게서 그의 그리스도에게로, 옛 언약의 물러감과 새 언약의 이어짐에 따라 옮겨진 것이다. 이사야는 말한다. “사절도 아니고 전령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 자신이 이제 율법과 예언자들을 선포하고 성취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제자들을 넘겨주었다. 먼저 모세와 엘리야를 그와 함께 영광의 특권 가운데 보여 준 뒤에, 마치 이제 직무와 명예를 다 마친 자들처럼 그렇게 떠나보냈으니, 이는 마르키온 때문에 바로 이 점,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한다는 것이 확증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환상의 전체 모습을 우리는 하박국에서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영은 때로 사도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내가 주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였나이다.” - 그 소문이란 하늘의 저 음성에 대한 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사람의 말을 들으라.” - “내가 주의 일을 살펴보았<고> 정신을 잃었나이다.” - 베드로가 그의 영광을 보고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했던 때보다 더한 때가 언제이겠는가? - “두 생물 사이에서 주는 알려지시리이다.” 곧 모세와 엘리야 사이에서인데, 그들에 관해서는 스가랴도 두 감람나무와 두 감람나무 가지의 예표로 보았다. 그에게 “기름짐의 두 아들이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다”고 말해진 자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또 같은 하박국이 다시 말한다. “능력이 하늘을 덮었고” - 분명 저 구름으로 - “그의 광채는 빛과 같을 것이다” - 분명 그의 옷도 그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또 우리가 모세에게 한 약속을 떠올린다면, 그 약속은 여기서 이행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모세가 주를 보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했을 때, “그러므로 내가 주 앞에서 은혜를 입었으면 주 자신을 내게 나타내사 내가 주를 알아보며 보게 하소서” - 그는 주가 사람으로 행하게 될 그 모습을 보기를 바란 것이고, 예언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 한편 하나님의 얼굴은 “어떤 사람도 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들었다 - 주는 말한다. “네가 말한 이 말대로 내가 네게 행하리라.” 모세는 다시 말한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주도 마찬가지로 미래에 관해 말한다. “내가 내 영광으로 앞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의 말들. 그리고 마지막에 “그때 너는 내 뒤를 볼 것이다.” 허리나 장딴지가 아니라, 그가 바라던 영광, 곧 뒤의 때에 드러날 영광을 보리라는 것이다. 주는 그 영광 가운데 얼굴을 마주하여 모세가 자기를 볼 수 있게 하리라고 약속했고, 아론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예언자가 있으면 나는 환상으로 그에게 알려지고 환상으로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입과 입을 맞대어, 모습으로” - 분명 그가 지니게 될 사람의 모습으로 - “말할 것이고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마르키온은 모세가 주와 대화하는 모습으로 보여진 것이 아니라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졌다고 하려 했지만, 그래도 서 있으면서 그는 입과 입을 맞대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서 있었으니 - “그와 함께”라고 하지 “그 바깥에”라고 하지 않는다 - 그의 영광 가운데 서 있었고, 그가 보는 앞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영광으로 빛나게 된 모세는 창조주에게서 물러날 때 늘 그러했던 것과 다름없이 그리스도에게서 물러났으니, 그때 이스라엘 자손의 눈을 쏘았던 것처럼 지금은 눈먼 마르키온의 눈을 쏘고 있다. 마르키온은 이 논거 또한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번역 주석 1. 22.1 누가복음 9:28-36의 변모 기사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장면이 마르키온의 복음서에도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파괴자로 왔다고 하면서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2. 22.2 누가복음 9:35.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dilectus(사랑하는)로, 개역개정 누가복음의 “택함을 받은 자”(ἐκλελεγμένος)가 아니라 마가복음 9:7과 마태복음 17:5의 형태와 같다. 22.37, 22.43에서도 같은 형태로 인용된다. 3. 22.5 in sordibus aliquibus는 영광의 광채와 대비되는 “어떤 더러운 차림새”다. in tenebris creatoris, quibus discutiendis erat missus는 마르키온이 창조주의 영역을 어둠으로, 자기 그리스도를 그 어둠을 흩어 버리러 온 자로 묘사한 것을 전제한다. 4. 22.7 Christus ipsorum은 직접적으로는 앞 문장들의 illos, 곧 모세와 엘리야에게 속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마르키온파의 그리스도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다. 번역은 “바로 그들의 그리스도”로 두어 두 가지 이해가 모두 가능하게 했다. 5. 22.8 는 Kroymann이 22.9의 ostendere를 근거로 보충한 말이다. 6. 22.9 Christi creatoris의 Christi는 Kroymann이 사본 MR의 Christus를 고친 것이다. 7. 22.12 informator와 reformator는 모세가 백성을 처음 세운 자, 엘리야가 말라기 4:5-6에 따라 백성을 다시 세울 자임을 가리킨다. testamentum은 두 사람이 각각 옛 언약을 시작하고 새 언약을 완성한다는 뜻이므로 “언약”으로 옮겼다. 22.27, 22.38도 같다. 8. 22.13 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은 indiuiduitate, Engelbrecht는 indiuiduitati로 읽는다. 뜻은 어느 쪽이든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의 동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초막 셋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9. 22.14 누가복음 9:33. 개역개정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hic(여기에)가 두 번 들어 있다. 10. 22.15 누가복음 9:33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더라.” noua prophetia(새 예언)는 몬타누스 운동의 자칭 명칭이고, causa nouae prophetiae는 테르툴리아누스가 그 운동을 옹호하며 쓴 논쟁을 가리킨다. 그는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exstasis(탈혼)가 따른다고 주장했다. exstasis는 “탈혼”, amentia는 “정신을 벗어남”으로 옮겼다. 11. 22.17 psychici(영혼적인 자들)는 고린도전서 2:14의 ψυχικός에서 온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새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른 명칭이다. 영적인(spiritales) 자들과 대비된다. 구두점은 Kroymann을 따라 앞 문장을 diuina에서 끊었다. 12. 22.18 [nisi in spiritu?]는 Kroymann이 22.19의 nisi quia in spiritu uiderat와 겹친다고 보아 괄호에 넣은 말이다. 형상과 조각상과 모양의 금지는 출애굽기 20:4를 가리킨다. 13. 22.22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는 마가복음 8:29의 형태다.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짧은 형태를 인용하고, 베드로가 이 고백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 것으로 논증한다. 14. 22.25 신명기 19:15. 개역개정은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세 증인만 들어 베드로, 야고보, 요한(누가복음 9:28)에 맞춘다. 15. 22.26 출애굽기 19:16-20의 시내산 사건이다. formam loci는 변모의 장소가 산이라는 점이 시내산의 양식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16. 22.27 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번역에서는 조건을 나타내는 어미에 괄호를 두었다. ille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키고, per caelum creatoris uiam ruperat는 마르키온의 신이 창조주의 하늘을 뚫고 내려왔다는 마르키온파의 주장을 비꼰 말이다. 구름은 출애굽기 19:16과 누가복음 9:34를 잇는다. 17. 22.28 in secundo psalmo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은 in primo로 되어 있다. 인용은 시편 2:7이다. ad quem도 Kroymann이 사본의 atque를 고친 것이다. 18. 22.29 시편 2:7. 개역개정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이다. 19. 22.30 이사야 50:10. 칠십인역은 “그의 종(παῖς)의 음성”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filii(아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이다. 22.36에서 같은 구절이 다시 인용된다. 20. 22.31 quem repromisi는 하늘의 음성 “이는 내 아들이다”에 숨어 있다고 테르툴리아누스가 보는 말이다. 미리 약속한 자만이 “이가 그다”라고 가리켜 보일 수 있다는 논증이다. 21. 22.32 이 반문은 마르키온의 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그는 아들을 예고한 적도 없고 자기 자신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적도 없으므로, “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eras는 Ursinus의 교정이고 사본은 erat이다. 22. 22.33 누가복음 9:35. 은 Kroymann의 보충이다. in nomine prophetae는 신명기 18:15에서 하나님이 장차 올 자를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미리 가리켰다는 뜻이다. 23. 22.34 신명기 18:15과 사도행전 3:22.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x filiis uestris(너희 자손 가운데서)로, 개역개정의 “네 형제 중에서”와 다르다. secundum carnalem censum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24. 22.35 사도행전 3:23. 신명기 18:19에 해당하는 말을 사도행전의 형태로 인용한다. 개역개정 사도행전은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이다. 25. 22.36 이사야 50:10. 은 Kroymann의 보충이다. 26. 22.37 이사야 44:26. 칠십인역은 “그의 종(παῖς)의 말을 세우며”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filii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이다. sistens uerba는 아들의 말을 확고하게 세운다는 뜻으로, 하늘의 음성이 그 일을 했다고 본다. 27. 22.38 translatio auditionis는 들어야 할 대상이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이전이 다른 신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점을 강조한다. 28. 22.39 이사야 63:9 칠십인역 “사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주 자신이 그들을 구원했다.” 개역개정은 히브리 본문을 따라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로 되어 있어 뜻이 다르다. implens legem et prophetas는 마태복음 5:17을 가리킨다. 사본의 deus를 Pamelius는 dominus로 고쳤다. 29. 22.40 모세와 엘리야가 “직무와 명예를 다 마친 자들처럼”(officio et honore dispunctis) 물러난 것은 그들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영광을 함께 누린 뒤 임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30. 22.41 하박국 3:1-2. 개역개정 하박국 3장은 히브리 본문을 따르므로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칠십인역 문장과 상당히 다르다. ex persona apostolorum은 예언자의 말을 사도들의 입장에서 발설된 것으로 읽는 방식이다. 31. 22.42 하박국 3:2 “주여, 내가 주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였나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이다. auditum tuum은 “주에 관해 들린 것”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그것을 하늘의 음성으로 본다. 32. 22.43 하박국 3:2 칠십인역 “내가 주의 일을 살펴보고 정신을 잃었나이다”(κατενόησα τὰ ἔργα σου καὶ ἐξέστην). 개역개정에는 이 문장이 없다. 는 Rigaltius의 보충이다. 사본 M은 excedi, R은 excidi로 읽는다. excidi mente를 베드로가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 것(누가복음 9:33)과 연결한다. 33. 22.44 하박국 3:2 칠십인역 “두 생물 사이에서 주는 알려지시리이다”(ἐν μέσῳ δύο ζῴων γνωσθήσῃ). 개역개정에는 이 문장이 없고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가 있다. 두 감람나무는 스가랴 4:3, 11-12를 가리킨다. 34. 22.45 스가랴 4:14. 칠십인역은 “기름짐의 두 아들”(οἱ δύο υἱοὶ τῆς πιότητος)이고 개역개정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이다. 35. 22.46 하박국 3:3-4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능력이 하늘을 덮었다”를 변모 때의 구름에, “광채”를 누가복음 9:29의 빛나는 옷에 적용한다. 36. 22.47 commemoremur는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promissio Moysi는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에게 한 약속이고, expuncta는 변모에서 그 약속이 이행되었다는 뜻이다. 37. 22.48 출애굽기 33:13 칠십인역 “주 자신을 내게 나타내사 내가 주를 알아보며 보게 하소서”(ἐμφάνισόν μοι σεαυτόν, γνωστῶς ἴδω σε). 개역개정은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내가 주를 알고”이다. “어떤 사람도 보고 살 수 없다”는 출애굽기 33:20, “네가 말한 이 말대로 내가 네게 행하리라”는 출애굽기 33:17이다.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을 따랐다. 38. 22.49 출애굽기 33:18. 39. 22.50 출애굽기 33:19와 33:23. posteriora(뒤, 뒷모습)와 posterioribus temporibus(뒤의 때, 후대)의 말놀이로, 모세가 볼 것은 몸의 뒷부분이 아니라 후대에 드러날 영광이라는 뜻이다. 개역개정 33:23은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이다. 40. 22.51 민수기 12:6-8. 테르툴리아누스는 ad Aaronem(아론에게)이라고 하지만 민수기 12:4-8에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한 말이다. 41. 22.52 민수기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칠십인역의 στόμα κατὰ στόμα(입과 입을 맞대어), ἐν εἴδει(모습으로), οὐ δι’ αἰνιγμάτων(수수께끼로 아니고)을 따른 라틴 본문이다. in specie의 species를 그리스도가 입을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42. 22.53 누가복음 9:30-32. 누가복음 9:30은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거늘”(conloquebantur)이라 하고, 9:32는 “함께 선 두 사람”(stantes cum illo)이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대화 부분을 지우고 서 있는 모습만 남겼다고 전한다. cum illo는 누가복음 9:32의 말이다. 43. 22.54 출애굽기 34:29-35. 하나님과 말한 뒤 모세의 얼굴이 빛나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한 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변모 때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물러난 모세를 같은 모습으로 보고, 그 빛이 지금은 마르키온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7, 13을 배경으로 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2 23 나는 이스라엘의 역할을 떠맡는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나서서 외쳐 보라: “오 믿지 않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겠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겠느냐?” 그는 곧바로 나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누구이든, 오 청지기여, 먼저 밝혀라. 그대가 누구이며 누구에게서 왔으며 우리에 대해 그대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지를. 지금까지 그대에게 있는 것은 모두 창조주의 것이다. 물론 그대가 그에게서 왔고 그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그 질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서 왔다면 말해 주기 바란다. 그대 자신의 것 가운데 무엇을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맡겼기에,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했다고 하여, 그대 자신을 우리에게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는 그대가 우리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는가? 그대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기 시작했기에 시간을 두고 불평하는가? 그대가 어떤 일에서 우리를 참아 주었기에 인내를 공로로 내세우는가? 그대는 이솝의 우물에서 나온 나귀처럼 이제 막 왔는데 벌써 외친다.” [나는 더 나아가 제자들의 역할도 떠맡는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달려들었다: “오 믿지 않는 족속아, 내가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 얼마 동안 너희를 참아 주겠느냐?” 그의 이런 폭발을 나는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가장 정당하게 되받아칠 것이다. “그대가 누구이든, 오 청지기여, 먼저 밝혀라. 그대가 누구이며, 누구에게서 왔으며, 우리에 대해 그대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가? 지금까지는, 내 생각에, 그대는 창조주의 사람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대 안에서 그의 것을 모두 알아보고 따랐다. 그러니 그대가 그에게서 왔다면 우리는 질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이를 위해 일한다면, 청하노니 말해 보라. 그대 자신의 것에 한정하여, 그대는 무엇을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맡겼기에>, 우리가 그것을 이미 믿었어야 했다고 하여, 지금까지도 그대를 세운 이를 밝히지 않는 그대가 우리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는가? 그런데 그대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기 시작했기에 시간까지 들이대는가? 그런데 그대가 어떤 일에서 우리를 참아 주었기에 인내까지 자랑하는가? 이솝의 우물에서 나온 나귀가 이제 막 여기에 나타났는데 벌써 외친다.”] 만일 그를, 아직 불평할 자격이 없었을 그 신의 사람이라고 믿었다면, 누가 이처럼 질책의 부당함을 되받아치지 않았겠는가? 다만 그 역시, 오래전부터 그들 가운데 율법과 예언자들과 능력과 은혜 안에 머물면서 그들이 언제나 믿지 않는 자들임을 겪어 보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리스도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여, 언제나 더 큰 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그런 아이들 같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창조주는 아이들에게 곰들을 보내어 예언자 엘리사가 그들에게서 당한 욕을 갚았다”고 한다. 참으로 뻔뻔한 안티테시스다. 그토록 다른 것들을, 곧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을, 아직 무죄한 나이와 이미 판단력을 갖추어 욕할 수 있었던, 아니 모독까지 할 수 있었던 나이를 맞붙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의로운 하나님인 한에서는 불경한 소년들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더 많은 나이에 대한 존경을, 그것도 당연히 더 어린 쪽에서 더욱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하나님인 한에서는 어린아이들을 몹시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바로의 명령으로 위험에 처한 히브리인의 신생아들을 보호한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애정도 창조주의 편에 있다. 그러면 이제 혼인을 반대하는 마르키온의 신이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사랑하는 자로 보일 수 있는가? 어린아이들이 생기는 원인은 전적으로 혼인인데? 씨를 미워하는 자는 열매도 저주하기 마련이다. 참으로 그는 이집트 왕보다 더 잔혹한 자로 여겨져야 한다. 바로는 유아들이 양육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자는 태어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아, 태 속에서 열 달을 지낸 생명까지 그들에게서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그의 것으로 돌리는 편이 얼마나 더 믿을 만한가. 그는 인류의 번성을 위해 혼인을 축복하면서 혼인의 열매 자체도 축복받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열매는 유아기에서 처음 시작한다! “창조주는 엘리야가 요구하자 저 거짓 예언자에게 불의 재앙을 즉시 내렸다.” 나는 심판자의 엄격함을 인정하며, 반대로 사마리아인들의 저 작은 마을에 같은 징벌을 내리려 하던 제자들을 그리스도가 <꾸짖은 온유함>도 인정한다. 이단자도 바로 그 가장 엄격한 심판자가 그리스도의 이 온유함을 약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그는 말한다. “그는 다투지 않을 것이며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며> 그의 목소리가 거리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라면 사람들을 불태우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도 엘리야에게 “주는 불 가운데 있지 않고 온화한 영 가운데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극히 자애로운 주가 왜 자기를 그토록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 그에게 내어 놓는 자를 거절하는가? 만일 그가 교만하게 또는 위선으로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 나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교만이나 위선은 거절해야 한다고 판단함으로써 심판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거절한 자를 정죄했으니, 곧 그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거절하지 않는 자, 더구나 자기가 먼저 나서서 부르는 자를 구원으로 부르는 것과 같이, 거절하는 자는 멸망으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를 핑계로 내세운 자에게 “죽은 자들이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고 대답할 때, 그는 창조주의 두 율법을 분명히 확증했다. 곧 레위기에 있는 제사장직에 관한 율법으로, 이는 제사장들이 부모의 장례에도 참여하는 것을 금한다 - “제사장은 어떤 죽은 자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며, 자기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 더러워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그리고 민수기에 있는 서원에 관한 율법이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서원한 자에게도 다른 명령들 가운데서, 어떤 죽은 자에게도 가까이 가지 말고,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입문시킨 자를 서원과 제사장직에 지정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의 어떤 근거도 개입하지 않는데 아들들에게 부모의 장례를 무시하라고 명하던 자는 참으로 불경하다고 선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먼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준비하던 저 세 번째 사람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금할 때, 그는 창조주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 역시 소돔에서 구해 낸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번역 주석 1. 23.2 누가복음 9:41. 개역개정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패역한’이 없다. 그는 이 말을 이스라엘에게 한 질책으로 읽는다. 2. 23.3 ‘오 청지기여’(o oeconome)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 M은 o ęchonome, F는 eperchomene이고 R 이하 통행본은 그리스어 ἐπερχόμενε(‘다가오는 자여’)로 읽는다. 23.9도 같다. Kroymann은 근거로 누가복음 12장을 참조하게 하는데(apparatus의 표기는 Luc. 12, 24), 청지기(οἰκονόμος)가 나오는 곳은 누가복음 12:42다. 3. 23.6 ‘인내’(patientiam)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aenitentiam(뉘우침)으로 읽는다. 23.14의 patientiam iactes에 맞춘 것이다. 4. 23.7 ‘이솝의 우물에서 나온 나귀’는 느닷없이 나타나 큰 소리를 내는 자를 가리키는 속담식 표현이다. 이 우화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5. 23.7 [ ] 안의 23.7 후반부터 23.14 전반까지는 Kroymann이 삽입문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그는 마가복음 9:19(‘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여’)에 따라 이 질책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한 후대 필사자가 23.1-23.7의 내용을 제자들 쪽으로 되풀이해 적어 넣었다고 본다. 6. 23.12 <맡겼기에>(commisisti)는 Gelenius가 보충한 말이다. 23.5의 같은 구문을 근거로 한다. ‘그대를 세운 이’(auctorem tuum)는 사본 R3의 읽기이고 MR1은 auditorem(듣는 자)으로 읽는다. 7. 23.14 ‘이처럼 ... 않았겠는가’(non ita)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nouit로 읽는다. 8. 23.16 누가복음 9:46-48의 어린아이 본문과 열왕기하 2:23-24의 엘리사와 아이들 이야기를 맞세운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다. 열왕기하 2:24에서는 암곰 두 마리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는다. 9. 23.17 테르툴리아누스는 paruuli(어린아이, 누가복음 9:47-48)와 pueri(소년, 열왕기하 2:23)를 구별한다. 열왕기하 2:23의 히브리어 ‘작은 아이들’(네아림 케탄님)은 판단력이 있는 젊은이를 포함할 수 있는 표현이다. 10. 23.18 ‘용서하지 않았으니’(parsi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은 psit, R 이하 통행본은 pepercit로 읽는다. 의미는 같다. 11. 23.19 출애굽기 1:15-21. 바로의 명령을 거슬러 히브리 남아를 살린 산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푼 일이다. 12. 23.20 마르키온파는 혼인과 출산을 거부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29장에서도 같은 논점을 든다. 13. 23.21 ‘참으로’(ne)는 Kroymann이 긍정의 감탄사 nae로 읽은 것이다. 사본 MR1은 nec, R3 이하 통행본은 nae로 읽는다. 14. 23.22 ‘열 달’은 고대의 태음월 기준 임신 기간이다. 15. 23.23 창세기 1:28. ‘축복받을 것이라고’(benedicendum)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benedicendo로 읽는다. ‘그 열매는 유아기에서 처음 시작한다’(qui de infantia primus)는 M의 읽기이며 R은 primus est, Engelbrecht는 primus 로 보충한다. Kroymann은 ‘유아기부터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16. 23.24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가리키는 사건은 열왕기하 1:10-12로 보인다. 엘리야의 말에 따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을 태운 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 대상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른다. 뒷부분은 누가복음 9:51-56의 사마리아 마을 사건이다. 몇몇 사본의 누가복음 9:54에는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 덧붙어 있다. 17. 23.24 <꾸짖은 온유함>(lenitatem increpantis)은 Pamelius의 보충이다. ‘내리려 하던 제자들’(destinantes discipulos)도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estinantis로 읽는다. 18. 23.26 이사야 42:2-3, 마태복음 12:19-20.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며>(clamabit nec)는 Kroymann이 이사야 본문과 『유대인 반박』 9장을 근거로 보충한 말이다. 19. 23.28 열왕기상 19:12. 개역개정은 ‘세미한 소리’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온화한 영 가운데’(in spiritu miti)로 인용한다. ‘주’(dominu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deus로 읽는다. 20. 23.29 누가복음 9:57-58. 테르툴리아누스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대답을 거절로 읽는다. 21. 23.32 누가복음 9:59-60.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이다. 22. 23.33 레위기 21:11. 대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고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지 말라는 규정이다. 라틴어 anima defuncta는 히브리어 네페쉬(죽은 사람)를 옮긴 말이어서 ‘죽은 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는 편집자의 보충이다. ‘민수기’는 라틴어 Arithmi(그리스어 책 이름)를 옮긴 것이다. 23. 23.34 민수기 6:6-7. 나실인 서원자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규정이다. 24. 23.37 누가복음 9:61-62. 25. 23.38 창세기 19:17, 26. 소돔에서 나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과 롯의 아내 이야기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3 24 그는 열둘에 더하여 다른 일흔 사도도 뽑는다. 일흔도 그만한 수의 종려나무를 따른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열둘이 엘림의 그만한 수의 샘을 따랐겠는가? 『안티테시스』(Antitheses)를 만들어 낸 것은 대부분 사정의 다름이지 권능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사정의 다름을 돌아보지 않은 자는 그것을 쉽게 권능의 다름으로 여겼다. “창조주는 이스라엘 자손의 행진을 반죽 짐 외에도 금그릇과 은그릇과 옷가지라는 저 탈취물까지 가득 짊어지게 하여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지만,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길에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저들은 광야로 나아가고 있었고, 이들은 도시들로 보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의 차이를 살펴보라. 그러면 그대는 하나의 같은 권능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 권능은 부족과 풍족에 따라 자기 사람들의 원정을 안배했으니, 도시들을 지나며 넉넉할 원정은 그에 맞게 덜어 냈고, 광야를 지나며 궁핍할 원정은 채비를 갖추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신발을 가지고 가는 것도 금했다. 그 많은 세월 광야에서도 백성이 신발을 닳아 없애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의 다스림 아래에서였기 때문이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오, 예언자들을 파괴하는 그리스도라니! 그는 이것마저 그 예언자들에게서 받았다. 엘리사는 자기 종 게하시를 수넴 여인의 아들을 죽음에서 되살리도록 길에 보낼 때, 내 생각에, 그에게 이렇게 명했다.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그를 축복하지 말고”, 곧 인사하지 말라는 것이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대답하지 말라”, 곧 답례로 인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길에서 하는 축복이란 마주쳐서 서로 건네는 인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주의 이 말도 그러하니,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집에 평안을 빌<라고 한 것도> 같은 본보기에서 나온 것이다. 엘리사도 이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수넴 여인에게 들어가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네 남편에게 평안이, 네 아들에게 평안이 있으라.” 이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안티테시스가 될 것이니, 그리스도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견주어 맞추는 것들이다. 그런데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심판자 하나님보다 더 잘 선언할 이가 누구인가? 일꾼을 삯 받기에 마땅한 자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도 심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판결에서 비롯되지 않은 보상은 하나도 없다. 이제 여기서도 창조주의 율법이 확증된다. 창조주는 일하는 소들마저 삯 받기에 마땅한 일꾼으로 판결하는 이다. “곡식 떠는 소의 입을 묶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짐승들에게도 그러한 이가 아니면 누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후하겠는가? 그런데 그리스도도 일꾼들이 삯 받기에 마땅하다고 선언한다면, 그는 이집트 사람들의 금그릇과 은그릇을 가져가라는 창조주의 저 명령을 변호한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을 위해 농장과 도시들을 지어 준 이들은 분명히 삯 받기에 마땅한 일꾼들로서, 사기를 치라고 부추겨진 것이 아니라 삯을 보상받으라고 부추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삯은 다른 방법으로는 지배자들에게서 받아 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지도 않고 들어 본 적 없는 것도 아님을 그는 이렇게도 확증했다.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명하면서 말이다. 언젠가 멀리 있었던 것은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 오기 전에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멀리 있었던 적이 전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것은 모두 갑작스러운 것이다. 갑작스러운 것은 모두 전해질 때에야 그때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그때 처음 시간을 얻는다. 더구나 그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던 동안 이전에 지체하고 있었을 수도 없고, 전해지기 시작한 때부터 가까이 왔을 수도 없다. 그는 또한 자기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라.” 그가 이것을 위협의 뜻으로도 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지극히 헛되게 명하는 것이다. 나라가 가까이 온다 해도, 심판과 함께 가까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곧 그 나라가 전해짐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구원으로 **. 이렇게 하여, 위협이 집행 없이 있을 수 없다면, 그대는 위협하는 자 안에서 집행자 하나님을, 그 둘 안에서 심판자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티끌도 그들에게 떨어 버리라고 명하는데, 이는 그들의 땅까지 절연되었음을, 하물며 그 밖의 교제는 말할 것도 없음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몰인정과 손님 박대가 그에게서 아무 보복도 받지 않을 것이라면, 그는 무엇을 위해, 분명히 위협을 예고하는 증언을 앞세우는가? 더 나아가 창조주도 신명기에서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이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했으니,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을 몰인정하게 박대하며 양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제 금지가 그 본을 가진 곳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흘러 들어왔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자다.” 창조주도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모세도 사도이고 사도들도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두 직무의 권위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하나의 같은 주에 의해 동등하게 되어야 했다. 이제 뱀과 전갈을 밟을 권능을 누가 줄 것인가? 모든 동물의 주인가, 아니면 도마뱀 한 마리의 신도 아닌 자인가? 그런데 다행히도 창조주는 이 권능을 이사야를 통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약속했으니, 독사의 굴과 독사 새끼들의 잠자리에 손을 넣고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안다 - 성경의 단순한 뜻은 그대로 살려 두니,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짐승들 자체도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갈과 뱀은 비유적으로 악의 영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그들의 우두머리 자신도 창조주에게서는 뱀과 용과 가장 두드러진 짐승마다의 이름으로 헤아려지며, 창조주는 이 권능을 먼저 자기 그리스도에게 베풀어 주었다. 제90편 시편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네가 독사와 바실리스크 위를 걸으며 사자와 용을 발로 밟을 것이다.” 이사야도 이와 같이 말한다. “그날에 주 하나님이 거룩하고 크고 강한 칼을”, 곧 자기 그리스도를, “저 용, 크고 꼬불꼬불한 뱀 위에 끌어와 그날에 그를 죽일 것이다.” 또한 같은 예언자가 “깨끗한 길, 거룩한 길이라 불릴 것이며, 부정한 것이 그곳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부정한 길이 없을 것이다. 흩어진 자들은 그 길로 가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거기에는 더 이상 사자가 없고 가장 사나운 짐승 가운데 어느 것도 그 길에 올라오지 않으며 거기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길”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를 믿음임을 보여 주므로, 이미 그때에 그 같은 길에, 곧 믿음에, 짐승들의 이러한 무력화와 굴복을 약속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약속의 때도 들어맞음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니, 앞서는 구절들을 읽어 보면 그렇다. “힘을 내라, 늘어진 손과 풀린 무릎이여. 그때에 맹인의 눈이 열리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다. 그때에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맑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치료의 은혜들을 베푼 그때에 전갈과 뱀도 자기 성도들에게 굴복시켰으니, 곧 그는 다른 이들에게도 주기 위해 이 권능을 먼저 아버지에게서 받았고 선포의 순서에 따라 그것을 나타낸 이다. 번역 주석 1. 24.1 누가복음 10:1의 일흔 제자 파송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열두 사도와 일흔 제자를 엘림의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출애굽기 15:27; 민수기 33:9)에 대응시킨다. 2. 24.3 인용부호 안의 문장은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가 창조주와 그리스도를 대조한 내용을 테르툴리아누스가 옮긴 것이다. 출애굽 때의 반죽 짐과 이집트 사람들의 금은 패물과 옷(출애굽기 12:34-35)을,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는 지시(누가복음 9:3; 마태복음 10:10)와 대조한다. 누가복음 10:4에는 지팡이가 없어서 Pamelius는 uirgam을 peram(전대)으로 고쳤으나 Kroymann은 사본의 uirgam을 유지했고 번역도 이를 따랐다. 3. 24.5 circumcidens(덜어 내다)는 Latinius의 추정이다. 사본 MR은 circumiens(돌아다니며)이다. 번역은 Kroymann이 채택한 circumcidens를 따랐다. 4. 24.6 누가복음 10:4의 신발 금지를 광야 사십 년 동안 신발이 해지지 않았다는 신명기 29:5와 연결한다. 5. 24.7 누가복음 10:4. “예언자들을 파괴하는 그리스도”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반어다. 6. 24.8 열왕기하 4:29. 라틴어 Gezin은 개역개정의 게하시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축복하다’(benedicere)를 쓰고 그가 이것을 ‘인사하다’(salutare)로 풀이하는데, 개역개정은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로 옮긴다. 7. 24.12 누가복음 10:5. <라고 한 것도>는 Engelbrecht의 보충 dicere를 옮긴 것이다. 사본은 dicere. exemplo로 끊긴다. 사본 MR의 dominus ut는 Kroymann이 domini istud로 고쳤다. 8. 24.13 열왕기하 4:26. 개역개정에서는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맞아 그와 남편과 아이가 평안한지 물으라고 한다. 라틴어 본문은 이를 “평안이 있으라”는 인사로 읽는다. 9. 24.14 안티테시스는 마르키온 저서의 제목을 받아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을 ‘갈라놓는’(separant) 대조 대신 ‘견주어 맞추는’(comparant) 대조를 제시하는 말이다. 10. 24.15 누가복음 10:7(“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11. 24.18 신명기 25:4(“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12. 24.19 출애굽기 12:35-36(참조: 3:22; 11:2). 이집트 사람들의 금은 패물을 가져간 일을 이스라엘이 받지 못한 품삯의 보상으로 보는 해석이다. 마르키온은 이 일을 창조주의 부도덕한 명령으로 비판했다. 13. 24.21 누가복음 10:9(“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이어지는 논증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그 나라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마르키온의 신이 새롭고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는 주장을 겨냥한다. 14. 24.23 speciem(모습)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spem(희망)이다. accipit(얻는다)는 Rigalt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accepit이다. 15. 24.24 potuer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oterit이다. 16. 24.25 누가복음 10:11. 17. 24.27 Kroymann은 ‘구원으로’ 다음에 대응 구절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 표시를 했다. 그가 추정한 빠진 내용은 et in perditionem eorum, qui non recepissent(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멸망으로)이고, 번역에서는 그 자리에 **를 두었다. 이어지는 non potest에 대해 Oehler는 non을 삭제했으나 Kroymann은 이것이 저자의 어법이라고 보아 유지했다. 판본에 따라 이 문장 끝을 의문문(utroque?)으로 읽기도 한다. 18. 24.28 누가복음 10:11. eieratae etiam(절연되었음을)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은 M ei; hęret etiam, R et haeret etiam이며 Oehler는 et haerentia로 고쳤다. 19. 24.30 신명기 23:3-4. 개역개정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고, 그 이유로 그들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않았음을 든다. ecclesia는 이 구절에 맞추어 ‘총회’로 옮겼다. 20. 24.31 앞 문장은 누가복음 10:16이고, 창조주가 모세에게 한 말은 사무엘상 8:7이다. 사무엘상 8:7에서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사무엘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모세에게 한 말로 인용한다(참조: 민수기 14:11; 출애굽기 16:8). 21. 24.33 누가복음 10:19(“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 22. 24.34 이사야 11:8. 23. 24.35 ‘악의 영들’(spiritalia malitiae)은 에베소서 6:12의 표현이다. ‘제90편 시편’은 라틴어 번호이고 개역개정의 시편 91편이다. eminentissimae(가장 두드러진)는 사본의 읽기다. Ciacconius는 immanissimae(가장 사나운)로, Engelbrecht는 imminentissimae로 고쳤다. scimus는 R의 읽기다. M은 sciemus이고 Engelbrecht는 sciamus를 제안했다. 삽입구 안의 poterunt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potuerunt이다. 24. 24.36 시편 91:13(라틴어 번호 90:13). 라틴어 basiliscus를 ‘바실리스크’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이다. 25. 24.37 이사야 27:1. 칼을 ‘그의 그리스도’로 풀이한 것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안에 끼워 넣은 해석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다. 26. 24.38 이사야 35:8-9. sed et cum idem 다음에 동사가 없어 Engelbrecht는 idem 를 의심했다. 번역은 문장 끝(24.39)의 “라고 말할 때”로 이 구문을 완결했다. 27. 24.41 이사야 35:3, 5. 24.42는 이사야 35:6이다. 28. 24.43 ‘선포의 순서’(ordo praedicationis)는 이사야 35장의 순서를 가리킨다. 거기서 치유의 약속(35:5-6)이 짐승의 제거(35:9)보다 앞서듯, 그리스도도 치유를 먼저 베풀고(누가복음 9-10장) 그 뒤에 뱀과 전갈을 밟을 권능을 주었다(누가복음 10:19)는 것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4 25 먼저 하늘을 만든 이로 드러나지 않는 자 가운데 누가 하늘의 주로 불리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주님,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셨으니, 감사하며 찬미합니다.” 그것들은 무엇인가? 누구의 것인가? 누가 감추었고, 누가 드러냈는가? 그것들이 마르키온의 신에게서 감추어지고 드러났다는 말인가? 그는 무엇인가 감추어질 수 있었을 만한 것을 전혀 미리 내놓은 적이 없다. 예언도, 비유도, 환상도, 알레고리와 예표나 수수께끼의 안개로 가려진 사물이나 말이나 이름의 어떤 암시도 내놓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대함 자체를 감추어 두었다가, 바로 그때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불공평하다.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 신이 그들에게 감추어졌단 말인가? 그들의 지혜와 슬기는 그를 알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그 자신은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이 이끌려 갈 만한 길을, 자기가 한 일들의 어떤 선포나 흔적을 통해서도 하나도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기야 그들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은 알려진 그 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창조주와 다른 자로 소개되는 그를 질투하는 신으로 겪어야 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인가를 숨겨 둘 재료를 미리 내놓지도 않았고, 숨길 상대인 죄 지은 자들을 두지도 않았으며, 설령 그런 자들이 있었다 해도 숨겨서는 안 되었다면, 감추는 자가 아니었던 그는 이제 드러내는 자도 아닐 것이다. - 따라서 하늘의 주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도 아니다 - 드러내는 자는 이 모든 것이 들어맞는 저 하나님이다. 실제로 그는 예언의 모호함이라는 문서를 미리 내놓아 감추었고, 그것을 깨닫는 일은 믿음이 얻어 내도록 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또 그는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을 죄 지은 자들로 두었다. 그들은 그토록 많고 큰 그의 일들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거나, 그에 관해 그릇되게 철학하며 이단들에게 재주를 대 주었다. 끝으로 그는 질투하는 이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가 감사하는 바로 이 일을 오래전에 이사야를 통해 공포했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슬기로운 자들의 슬기를 가리리라.”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이> 감추었을 뿐 아니라 드러낼 것임을 이렇게 알린다. “내가 숨겨진 보화들을 그들에게 주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들에게 열어 주리라.”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나 말고 누가 복화술사들의 징조와 마음에서 지어낸 점술을 흩어 버리고, 지혜로운 자들을 뒤로 물러가게 하며 그들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겠는가?” 또 그가 자기 그리스도를 민족들을 비추는 이로 지정했다면 -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삼았다” - 우리는 그 민족들을 ‘어린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전에는 분별이 어린아이 같고 슬기가 없어 갓난아이 같았으며, 이제는 믿음의 겸손으로 작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감추었고 그리스도를 통한 드러남을 약속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어린아이들에게도 드러냈다고 우리는 분명 더 쉽게 믿을 것이다. 아니면 마르키온의 신이 창조주가 이전에 감추어 두었던 것들을 밝혔다면, 그는 창조주의 것들을 풀어 설명함으로써 이미 창조주의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셈이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그것들을 무너뜨리려고, 곧 그것들을 폭로하려고 그랬다.” 그렇다면 그는 창조주가 감추었던 상대, 곧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 그것들을 폭로했어야 했다. 그가 호의로 그렇게 했다면, 앎을 거부당했던 자들에게 앎을 베풀었어야 했지, 창조주가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던 어린아이들에게 베풀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생각에,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파괴보다는 오히려 세움이 발견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자기에게 넘겨졌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면 그대는 그 말을 믿어도 좋다. 모든 것이 창조주의 것이고, 창조주는 자기보다 못하지 않은 아들에게, 그를 통해, 곧 자기 말씀을 통해 지은 모든 것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저 관리인이라면, 아버지에게서 그에게 넘겨진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창조주의 것들인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넘겨준 것들은 좋은 것들이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인 창조주는 이제 선하며,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아들에게 넘겨주려고 남의 좋은 것들을 침탈한 저 신은 이제 선하지 않다. 남의 것에서가 아니면 아들을 부유하게 해 줄 것조차 갖지 못했으니, 그는 분명 더없이 가난한 거지다. 아니면 창조주의 것 가운데 아무것도 아버지에게서 그에게 넘겨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는 어떻게 창조주의 사람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가? 아니면 오직 사람만 그에게 넘겨졌다면, 사람은 ‘모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이 아들에게 넘겨졌다고 선언한다.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람의 종족들, 곧 모든 민족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도 창조주의 일이다. “내가 민족들을 네 유업으로, 땅 끝을 네 소유로 너에게 주리라.” 아니면 그 신 자신도 창조주의 사람과 함께 아들에게 넘겨줄 자기 나름의 ‘모든 것’을 얼마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모든 것’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를 믿을 근거로, 본보기로 보여 보라. 그래야 내가 그의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는 그 신에게 ‘모든 것’이 속한다고 믿지 않는 것이, 내가 보는 만물이 속한 이에게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 속한다고 믿는 것만큼 정당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들 외에 아무도 모르고,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른다.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아들이 드러내 주는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신을 선포했다”고 한다. 다른 이단들도 바로 여기에 기대어, 창조주는 모든 이에게, 곧 이스라엘에게는 친밀함에 따라, 민족들에게는 본성에 따라 알려져 있었다고 맞선다. 그런데 그 자신은 어떻게 자기가 이스라엘에게도 -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하였고 내 백성은 나를 깨닫지 못하였다” - 민족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증언하는가? 실로 그는 “보라, 민족들 가운데서도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민족들을 통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로 여겼고, 시온을 포도원에 버려진 망대처럼 여겼다. 그러니 이것이 아들에게 이르기까지 이어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꾸짖는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은 아닌지 보라. 그가 아들이 드러내 주는 자에게 아버지가 알려진다고 덧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가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고 전해진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 민족들은 분명 하나님에 관해 비추임을 받아야 했고, 이스라엘도 그러했으니, 분명 하나님에 대한 더 충만한 앎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창조주에게 들어맞을 수 있는 논거들은 다른 신을 믿게 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창조주에게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라야 다른 신을 믿게 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어지는 말씀도 살펴본다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예언자들은 너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그만큼 앞의 뜻에서 그대로 이어져 나온다. 곧 하나님을 마땅한 만큼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조차 그리스도 아래에서 보이던 것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예언자들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토록 오랜 세월 뒤에야 드러난 신의 일들을 보지 못했다면, 그들이 한 번도 선포한 적 없는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놀라운 일이겠는가? 또 그때 [다른 이들이 마땅히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던 자들의 복이 무엇이었겠는가? 자기 하나님의 일들, 그것도 자신들이 선포하기까지 했던 일들을 <실로> 볼 수 있었던 자들이 그럼에도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복이 될 것이니, 다른 이들은 선포하기만 했던 것들을 그들은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로 우리는 선포되었으나 예언자들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였다는 것을 앞으로 보여 줄 것이며 이미 보여 주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도 감추어지도록 그렇게 감추어져 있었다. 진리의 복음서에서는 율법교사가 주에게 다가와 말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단의 복음서에는 ‘영원한’이라는 말 없이 ‘생명’만 놓여 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율법에서 창조주가 약속하는 장수하는 생명에 관해 물은 것처럼, 주는 그 때문에 율법에 따라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가 율법의 생명에 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율법의 생명을 어떤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그 규칙들까지 가르치던 생명에 관해 물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죽은 자들도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나고 있었고, 되살아난 생명의 본보기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소망으로 일으켜진 그는 ** 더 높은 소망이 무엇인가 더 많은 준수를 요구하지는 않을까 하여, 그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관해 물었다. 그래서 주는, 자신도 다른 이가 아니고, 모든 구원과 두 생명 모두에 근본적으로 이바지하는 계명 외에 다른 새 계명을 들여오지도 않는 이로서, 율법의 머리 자체, 곧 주 자기 하나님을 모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그에게 내놓았다. 끝으로, 그 율법교사가 묻고 그리스도가 대답한 것이 창조주의 소관인 장수하는 생명에 관해서였고 마르키온의 신의 소관인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가 아니었다면,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얻게 되는가? 분명 장수하는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은 방식은 아닐 것이다. 상이 다르면 행위에도 차이가 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파는, 창조주를 사랑하는 자가 장수하는 생명을 얻듯이 자기 신을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수하는 생명을 약속하는 이를 사랑해야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이를 더 사랑해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그러므로 두 생명은 모두 같은 이의 것이다. 두 생명을 얻는 규율이 같기 때문이다. - 창조주가 가르치는 것, 곧 베풀기 위해 사랑받는 일이 그리스도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 - 여기에서도 저 원칙이 끼어든다. 더 작은 것들이 앞서 주어진 이에게서 더 큰 것들을 믿는 편이, 어떤 더 작은 것도 더 큰 것들에 대한 믿음을 마련해 주지 않은 이에게서 믿는 편보다 더 쉬워야 한다는 원칙이다. 우리 쪽 사람들이 ‘영원한’을 덧붙였는지는 이제 따지지 않겠다. 내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이이지 <장수하는> 생명으로 초대하는 이가 아닌 저 그리스도가, 자기가 허물고 있던 장수하는 생명에 관해 질문을 받고도, 자기가 들여오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라고> 오히려 그 사람을 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묻노니, 창조주의 것이 아닌 사람을 창조주를 사랑하도록 세워 주었다면,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무엇을 했겠는가? 아마 창조주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겠지. 번역 주석 1. 25.1 누가복음 10:21.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형태는 ‘domine caeli’(하늘의 주님)로 ‘아버지’와 ‘땅’이 없고, ‘감추셨다’ 대신 ‘감추어져 있던 것들’(quae erant abscondita)이라는 수동형이다. 개역개정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이다. Harnack은 이 형태를 마르키온 본문으로 재구성하며, 첫 문장의 논증은 ‘하늘의 주’라는 호칭에 기대고 있다. confiteor는 ‘고백하다’와 ‘찬미하다’를 함께 뜻하며 여기서는 ‘찬미하다’로 옮겼다. 2. 25.5 ‘자기가 한 일들의 선포’(operum praedicatio)는 창조된 세계가 창조주를 알리는 일을 가리키며, 로마서 1:20을 떠올리게 한다. 3. 25.6 Kroymann은 ‘ignotum pone, nunc notum’으로 읽고 pone를 retro(이전에)의 뜻으로 본다. MR은 ‘ignotum, pone nunc’(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 지금 가정해 보라 -)로, Rigaltius는 ‘pone tunc’로 읽는다. ‘질투하는 신’(zelotes)은 출애굽기 20:5, 신명기 5:9의 창조주 칭호다. 4. 25.7 ‘저 하나님’(ille)은 숨길 재료(예언)와 죄 지은 자들을 실제로 가졌던 창조주를 가리키며, 25.8이 그 세 조건을 하나씩 창조주에게 적용한다. 5. 25.8 “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는 이사야 7:9의 칠십인역 형태(ἐὰν μὴ πιστεύσητε, οὐδὲ μὴ συνῆτε)다. 개역개정은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이다. ‘그의 일들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하나님’은 로마서 1:20을 반영한다. instrumentum은 법률 문서이자 성경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문서’로 옮겼다. 6. 25.9 이사야 29:14(고린도전서 1:19 참조). 개역개정 이사야 29:14는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로 3인칭 수동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는 하나님이 1인칭 주어다. ‘<자신이>’는 Kroymann이 보충한 se를 옮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감사하는 일’(gratulatur)은 25.1의 누가복음 10:21을 받는다. 7. 25.10 이사야 45:3. 개역개정은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네게 주어”이다. 8. 25.11 이사야 44:25. ‘복화술사들’(uentriloqui)은 칠십인역의 ἐγγαστρίμυθοι, 곧 배에서 소리를 내어 신탁을 전하던 자들이다. 개역개정은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 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이다. 9. 25.12 이사야 49:6(개역개정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어린아이 같고’의 paruulos는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은 paruos, R3는 paruas다. 10. 25.14 traducere는 ‘폭로하다’와 ‘조롱거리로 만들다’를 함께 뜻한다.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창조주의 비밀을 드러내 무력화하는 일로 설명했다는 반론이며, ‘폭로하다’로 옮겼다. 11. 25.16 마태복음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을 반영한다. extructio(세움)와 destructio(파괴)의 대구를 살려 옮겼다. 12. 25.17 누가복음 10:22 상반절. ‘자기보다 못하지 않은’은 R3의 ‘non minori se’를 따른 것이고, MR1은 ‘minorum si’, Gelenius는 ‘et quia’ 대신 ‘qui’로 읽는다. ‘말씀’(sermo)은 요한복음 1:3의 창조 중보자로서의 말씀을 가리킨다. 13. 25.18 ‘관리인’(oeconomus)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eperchomenus, R3와 통행본은 ἐπερχόμενος(덮쳐 온 자, 침입자)로 읽는다. Kroymann은 ille를 마르키온의 신이 보낸 그리스도로 본다. 통행본을 따르면 ‘그가 저 침입자라면’이 된다. 14. 25.19 bona는 ‘좋은 것들’과 ‘재산’을 함께 뜻한다. 창조된 ‘모든 것’이 좋다(창세기 1:31)는 점과 남의 재산을 침탈한다는 점을 한 단어로 묶은 말장난이어서 ‘좋은 것들’로 옮겼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출애굽기 20:17을 가리킨다. 15. 25.21 [그리고]는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본 et다. Engelbrecht는 et를 살리고 앞의 si를 삽입으로 본다. Oehler는 ‘ecquomodo’로 읽는다. 16. 25.24 시편 2:8. 개역개정은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이다. 17. 25.25 Kroymann은 사본의 ‘quae omnia’와 ‘habet’를 ‘omnia, quae’와 ‘habebat’로 고쳐 읽었고, ‘하나’(aliquod)는 Ciacconius의 수정이다(사본 aliquem). 18. 25.26 누가복음 10:22.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들 외에 아무도 모른다’가 앞에 오고, 개역개정(“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느니라”)과 순서가 반대다. 이 어순은 아들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알린다는 마르키온파의 논증을 뒷받침한다. [ ] 안의 문장은 마태복음 11:27의 형태로, Gelenius가 삭제했고 Kroymann도 삽입으로 본다. 19. 25.27 ‘본성에 따라’는 Gelenius의 naturam을 따른 것이고, 사본은 naturalem이다. Kroymann은 naturalem (본성적 <앎>)일 가능성도 제시한다. 20. 25.28 이사야 1:3. 개역개정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로 목적어 ‘나를’이 없다. 21. 25.29 “보라, 민족들 가운데서도 아무도 없다”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Kroymann은 이사야 55:5를 의문부와 함께 제시한다. ‘통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은 이사야 40:15(개역개정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포도원에 버려진 망대’는 이사야 1:8(개역개정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이다. 22. 25.31 ‘민족들의 빛으로’(in lumen nationum)는 이사야 49:6에 맞춘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inluminatio nationum(민족들의 비춤), Engelbrecht는 inluminationi nationum이다. 23. 25.33 누가복음 10:23. 24. 25.34 누가복음 10:24.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에는 개역개정의 ‘많은’, ‘임금’, ‘보고자 하였으되’가 없고 “예언자들은 너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로만 되어 있다. 문장 끝의 ‘곧’은 adeo가 25.35의 내용을 이끄는 구문을 옮긴 것이다. 25. 25.37 Kroymann은 사본에서 25.38의 ‘merito uidisse non poterant’ 뒤에 있던 ‘si non erant consecuti ... quae numquam praedicarant’를 이 자리로 옮겼다. 26. 25.38 [ ] 안의 구절은 Kroymann이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원래 자리를 잃은 구절을 대신해 누군가 끼워 넣은 것으로 판단한 부분이다. ‘<실로>’는 사본의 qui를 Kroymann이 qui으로 보충한 것을 옮겼다(Oehler는 aeque). nisi quoniam qui는 ‘ei, qui’의 뜻으로 읽었다. 27. 25.39 ‘바로’(enim), ‘그들의’(illorum, Engelbrecht), ‘~라는 점’(quia)은 모두 사본의 autem, aliorum, qui를 고친 읽기이며, Kroymann은 이 문장을 ‘그들의 복은 다른 이들이 선포만 한 것을 그들이 보았다는 데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28. 25.41 누가복음 10:25. ‘진리의 복음서’는 교회가 쓰는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29. 25.42 ‘장수하는 생명’(uita longaeua)은 출애굽기 20:12(개역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처럼 율법이 약속하는 긴 수명을 가리킨다. 사본 M에는 longaeua 뒤에 aeterna가 덧붙어 있다. 30. 25.43 누가복음 10:27(신명기 6:5). 테르툴리아누스의 형태에는 개역개정의 ‘뜻을 다하고’가 없고, 이웃 사랑 계명도 인용하지 않는다. ‘율법의 생명’(legis uita)은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은 lege uitae, Engelbrecht는 lege uitam이다. 31. 25.45 ** 자리는 Kroymann이 표시한 탈문이다. 그는 ‘et incertus’(그리고 확신하지 못하여)와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며, 번역의 ‘~않을까 하여’는 그 뜻에 맞춰 ne 절을 옮긴 것이다. ‘소망’(spes)은 Lati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spei다. ‘일으켜진’(suscitatus)은 앞의 ‘살아나고’(suscitabantur)와 같은 동사로, 죽은 자를 살림과 소망을 일깨움을 겹쳐 쓴다. 32. 25.51 praescriptio는 소송 본안에 앞서 제기하는 법적 항변을 가리키는 말로, 테르툴리아누스가 반복해 쓰는 판단 기준을 뜻하여 ‘원칙’으로 옮겼다. 더 작은 것(창조와 율법의 약속)을 먼저 준 창조주가 더 큰 것(영원한 생명)도 준다고 믿기가 더 쉽다는 논리다. 33. 25.52 ‘<장수하는>’은 사본의 longae를 Kroymann이 longae로 보충한 것이고, ‘<으로 나아가라고>’는 그가 보충한 전치사 ad를 옮긴 것이다. 문장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온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기회를 놓쳤다는 모순이 생긴다는 논증이다. 34. 25.53 ‘세워 주었다면’(aedificauerat)의 주어는 드러나 있지 않으며, 문맥상 마르키온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로 읽힌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 사랑을 가르쳤다면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그와 반대로 가르쳤어야 한다는 반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5 26 그가 어떤 곳에서 저 더 높은 아버지에게 기도했을 때 - 꽤나 뻔뻔하고 무모한 눈으로 창조주의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말이다. 창조주는 그토록 거칠고 사나우니 우박과 벼락으로 그를 쳐부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창조주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그에게 다가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곧 “그가 다른 신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는 사람이 먼저 할 일은 그리스도가 다른 신을 드러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배우기 전에 기도할 줄 알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제자가 다른 신을 배웠다면 증명하라.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가 창조주를 향한 기도의 형식을 청했다는 것을 알라. 요한의 제자들도 그 창조주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도 어떤 새로운 기도의 질서를 들여왔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이것을 그리스도에게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부당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기 스승 고유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앎보다 먼저 기도에 대한 앎을 제자에게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도 제자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가르쳤다. 요컨대 기도의 문구들이 어떤 신을 드러내는지 살펴보라. 나는 누구에게 “아버지”라고 말하겠는가? 나를 전혀 만들지 않았고 내가 그에게서 기원을 얻지도 않은 이에게인가, 아니면 나를 만들고 갖추어 줌으로써 낳은 이에게인가? 나는 누구에게 성령을 구하겠는가? 세상의 영조차 베풀지 않는 이에게인가, 아니면 천사들도 영으로 만들고 태초에 그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던 이에게인가? 내가 한 번도 영광의 왕이라고 들어 본 적 없는 이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겠는가, 아니면 왕들의 마음까지 그 손에 있는 이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겠는가? 누가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겠는가? 내게 기장 한 알도 지어 주지 않은 이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천사들의 양식을 날마다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준 이인가? 누가 내 죄를 용서하겠는가? 심판하지 않으므로 죄를 붙들어 두지도 않는 이인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으면 심판하려고 죄를 붙들어 둘 이인가? 누가 우리를 시험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게 하겠는가? 시험하는 자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인가, 아니면 태초부터 시험하는 천사를 미리 정죄한 이인가? 이 순서대로 창조주가 아닌 다른 신에게 간구하는 사람은 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받기 위해 누구에게 구하겠는가? 찾아내기 위해 누구에게서 찾겠는가? 나에게 열리도록 누구의 문을 두드리겠는가? 모든 것이 그의 것이고 구하는 나 자신도 그의 것인 이가 아니라면, 누가 구하는 사람에게 줄 것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저 신에게서 무엇을 잃었기에 그에게서 찾고 찾아내겠는가? 지혜와 슬기라면, 이것들은 창조주가 숨겼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서 찾겠다. 구원과 생명이라면, 이것들도 창조주에게 있다. 무엇이든 찾아내려면, 그것이 드러나도록 숨어 있던 곳 말고 다른 곳에서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나는 내가 쫓겨난 곳 말고 다른 곳을 두드리지도 않을 것이다. 요컨대 받는 것, 찾아내는 것, 들어가게 되는 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에게 수고와 끈기의 열매라면, 이것들이 창조주에게서 명령되고 약속된다는 것을 깨달으라. 저 지극히 선한 신은 자기 것이 아닌 인간을 돌보려고 스스로 오는 신이니, 그 인간에게 어떤 수고도 끈기도 부과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주지 않고, 찾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내게 해 주지 않으며, 두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열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지극히 선한 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것들을 부과할 수 있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자기 하나님을 노엽게 했으므로, 구하는 수고와 끈기로 받고, 찾는 수고와 끈기로 찾아내고, 두드리는 수고와 끈기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앞에 놓인 비유도 밤중에 빵을 청하는 사람을 낯선 사람이 아니라 친구로 그리며,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런데 친구는, 비록 노엽게 했더라도, 마르키온의 신보다는 창조주에게 속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청할 권리가 있었던 사람, 그 문을 알고 있던 사람, 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의 문을 두드린다. 그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기를 원했던 아이들과 함께 이미 누워 있었다. 늦은 시각에 문을 두드리는 것도 창조주에게 속한다. 때도 늦은 시각도, 시대와 시대의 저묾을 소유한 그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빛나기 시작한 새 신에게는 아무도 늦은 시각에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도 창조주의 것이다. 그는 예전에 민족들에게 그 문을 닫아 두었고, 그 문은 예전에는 두드려지지 <않았다>. 오, 이 하나님! 그는 일어나서 준다. 이제는 친구에게 주듯이 주지 않더라도, 낯선 인간에게 주듯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가신 사람에게 주듯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생긴 신은 그렇게 빨리 누군가를 성가신 사람으로 겪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가 부르기까지 하는 아버지도 창조주라고 인정하라. 자녀들이 무엇을 청하는지 아는 이는 바로 그다. 그는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주었고, 고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냈으며, 생선 대신 뱀을 주거나 알 대신 전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선한 것 대신 악한 것을 주지 않는 일은 둘 다를 가진 이에게 속할 것이다. 반면 마르키온의 신은 전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전갈도 가지고 있으면서 주지 않는 이다. 그래서 성령도, 거룩하지 않은 영도 가지고 있는 이가 줄 것이다. 그가 귀먹은 귀신을 쫓아냈을 때 - 이런 종류의 치유에서도 이사야와 맞아떨어지려는 것이었다 -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말을 듣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라고 말했다. 이 말로 그가 나타낸 것은, 그들의 아들들도 힘입는 바로 그것, 곧 창조주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도 쫓아낸다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대가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느냐?”라는 말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곧 그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내는 그들을 꾸짖은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사탄이 자기 자신을 거슬러 나뉠 수 없다는 앞의 말뜻이 그대에게 맞설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했듯이 창조주의 능력을 힘입어 쫓아냈다. 그는 이 능력을 깨닫게 하려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온 것이 아니냐?” 바로의 면전에서 모세에게 맞서도록 불려 온 저 요술사들이 창조주의 능력을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다” - 이것은 작은 것이라도 그럼에도 지극히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리스도도 이것을 보여 주면서 - 그는 옛것들, 곧 자기 자신의 옛것들을 지우는 자가 아니라 상기시키는 자였다 -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렀다. 그 능력은 그 이름으로 불렸던 바로 그 하나님 말고 다른 이의 것으로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이 손가락이라고 불렸던 이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더 강한 다른 자에게 제압된 무장한 저 강한 자의 비유를 귀신들의 우두머리에게 적용한 것은 정당하다. 그는 앞에서 그 우두머리를 바알세불이며 사탄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손가락에 제압된 것이 그 우두머리이지, 다른 신에게 굴복당한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나라가 아직도 자기 경계와 법들 안에 서 있겠는가? 또 자기 직무들 안에도 말이다. 마르키온의 저 더 강한 신은, 세상이 온전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렇게라도 그를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마르키온파마저 그의 법에 따라 흙으로 녹아 돌아가며 죽지 않고, 종종 전갈에게서도 창조주가 패하지 않았음을 배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그를 품었던 태가 복되다고, 또 젖가슴도 복되다고 외친다. 그를 먹여 기른 그 젖가슴이 말이다. 그러자 주가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한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앞에서도 그는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앞세우면서 이렇게 어머니를, 그리고 형제들도 물리쳤다. 여기서도 어머니가 그의 곁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그는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다루려 하면서 그는 마찬가지로 복을 자기 어머니의 태와 젖가슴에서 제자들에게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어머니가 없었다면 그 어머니에게서 복을 옮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26.1 누가복음 11:1. ‘저 더 높은 아버지’는 마르키온이 창조주 위에 둔 신을 가리키는 반어다. 그리스도가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서 창조주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마르키온파의 전제를 비꼬아, 그런 그리스도라면 창조주가 우박과 벼락으로 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의 ad는 Kroymann의 보충이다. suffigi(못 박히다)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suffugi를 전한다. 2. 26.2 누가복음 11:1. scilicet 뒤의 인용(‘다른 신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인용한 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6.6에서 이를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non alium, sed aliter)로 뒤집는다. 3. 26.3 praesumpserit(전제하는)는 Ursinus의 수정이고, M과 R은 praesumpserat를 전한다. 4. 26.9 누가복음 11:2. 26.9-26.15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있던 주기도의 청원을 아버지, 성령, 나라,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의 순서로 다룬다. sensus orationis는 기도를 이루는 개별 문구들의 뜻을 가리키므로 ‘기도의 문구들’로 옮겼다. 5. 26.11 성령을 구하는 청원은 개역개정 누가복음 11:2-4에 없다. 이 구절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누가복음 11:2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자리에 성령을 구하는 청원을 두었다는 근거로 흔히 읽힌다. 누가복음 11:2에는 ‘당신의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라는 이문이 있으며, Gregorius Nyssenus와 Maximus Confessor가 이를 전하고 소문자 사본 162와 700은 이를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리에 둔다. ‘세상의 영’은 고린도전서 2:12, ‘천사들도 영으로 만들고’는 시편 104:4(라틴어 시편 103:4 qui facit angelos suos spiritus; 개역개정은 ‘바람을 자기 사자로 삼으시며’), ‘물 위에 움직이던’ 영은 창세기 1:2를 가리킨다. 6. 26.12 누가복음 11:2. ‘영광의 왕’은 시편 24:7-10, ‘왕들의 마음까지 그 손에 있는’은 잠언 21: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을 가리킨다. 7. 26.13 누가복음 11:3. milium은 기장(좁쌀)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을 비꼰다. ‘천사들의 양식’은 시편 78:24-25(개역개정은 ‘힘센 자의 떡’)와 지혜서 16:20을 가리킨다. panis는 주기도 문구에서는 개역개정을 따라 ‘양식’으로, 26.26 이하의 비유와 26.35에서는 ‘빵’으로 옮겼다. 8. 26.14 누가복음 11:4. 마르키온의 신은 심판하지 않으므로 죄를 ‘붙들어 둘’ 일도 없고, 따라서 용서할 일도 없다는 논리다. retinere는 용서하지 않고 남겨 둔다는 뜻이며 요한복음 20:23의 표현과 같다. 9. 26.15 누가복음 11:4. 테르툴리아누스의 문구 non sinet nos deduci in temptationem은 ‘시험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개역개정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와 표현이 다르다. ‘시험하는 천사를 미리 정죄한’ 일은 창세기 3:14의 뱀 저주를 가리킨다. 10. 26.17 누가복음 11:9-10. 26.17-26.25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차례로 다룬다. 11. 26.20 이사야 29:14(‘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욥기 17:4 참조. 12. 26.22 fugatus(쫓겨난)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functus를 전한다. 인간이 쫓겨난 곳은 낙원이다(창세기 3:23-24). 13. 26.23 ad praestandum non suo homini에서 praestare를 Kroymann의 비평 각주가 설명하는 대로 ‘돌보다, 보호하다’(그리스어 προστατεῖν)의 뜻으로 보아 ‘자기 것이 아닌 인간을 돌보려고’로 옮겼다. 마르키온의 신이 자기가 만들지 않은 인간을 구하러 왔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indixisse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duxisset를 전한다. 14. 26.24 <않는>은 R3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구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주지 않는다면’이 되어 논리가 서지 않는다. 15. 26.25 labore(수고로)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M과 R은 laboraret를 전한다. 16. 26.26 누가복음 11:5-8. 누가복음에서 밤중에 빵을 청하는 친구의 비유는 11:9-10보다 앞에 있으므로 praemissa(앞에 놓인)라고 했다. 17. 26.28 누가복음 11:7(‘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비유에서 문 안에 누워 있는 친구를 창조주로, 아이들을 창조주가 태어나게 한 사람들로 읽는다. 18. 26.29 누가복음 11:5의 ‘밤중에’를 시대의 저묾, 곧 세상의 끝 무렵으로 읽어, 시대 전체를 소유한 창조주에게 속한다고 논증한다. 26.30의 ‘이제 막 빛나기 시작한 새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 최근에야 나타났다는 1권의 논점을 되받는다. 옛 판본들은 est tempus. illius로 끊는다. 19. 26.31 creatoris est et ianua, qui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creator est, qui et ianuam(창조주는 문도 … 닫아 둔 이다)을 전한다. cluserat는 Ursinus의 수정이며(M과 F는 cluserit, R과 이전 판본들은 clauserit), <않았다>는 Kroymann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민족들에게 문이 닫혀 있던 때는 그리스도 이전 시기를 가리킨다. 20. 26.32 누가복음 11:8. o deus iste는 M과 R1의 읽기로 Kroymann이 채택했다. R3과 옛 판본들은 Iudaeis, is et로 읽어 ‘그 문은 유대인들이 두드렸고, 그는 일어나서 준다’는 뜻이 되며, Engelbrecht는 a Iudaeis를 제안했다. 누가복음 11:8은 친구이기 때문에 주지는 않더라도 강청함 때문에 일어나 준다고 말한다. 21. 26.33 ‘성가신 사람’(molestus)은 누가복음 11:7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와 11:8의 ‘강청함’을 받는다. 마르키온의 신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가 오래 졸라 댈 시간도 없었다는 반박이다. inquit의 주어가 밝혀져 있지 않아 ‘고 한다’로 옮겼다. 22. 26.34 누가복음 11:11-13. 23. 26.35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출애굽기 16:4, 16:15, 메추라기는 민수기 11:31-32를 가리킨다. ortygometra는 칠십인역이 메추라기를 가리키는 데 쓴 말이다. 생선과 뱀, 알과 전갈은 누가복음 11:11-12다. 24. 26.37 전갈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은 전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전갈을 주지 않겠다’는 말 자체가 그에게는 무의미하다는 논증이다. 25. 26.38 누가복음 11:13. ‘거룩하지 않은 영’은 사무엘상 16:14의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처럼 창조주가 부리는 영을 가리킨다. 26. 26.39 누가복음 11:14-15. 테르툴리아누스는 surdum(귀먹은)이라고 쓰는데, 그리스어 κωφός는 ‘말 못하는’과 ‘귀먹은’을 모두 뜻하며 개역개정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으로 옮긴다. 이사야 29:18(‘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참조. Belzebul은 개역개정의 ‘바알세불’로 옮겼다(Oehler는 Beelzebub로 표기한다). 27. 26.40 누가복음 11:19. 28. 26.43 누가복음 11:17-18. 26.42-26.43은 한 문장이며, 26.42의 sic accipiendum(이렇게 받아들여야)이 가리키는 내용이 26.43의 quasi 절이다. 29. 26.45 누가복음 11:20.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rgone adpropinquauit(그렇다면 … 가까이 온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문으로,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와 다르다. adpropinquauit는 M, F, R3의 읽기이고, R1은 adpropinquabit(가까이 올 것이다)를 전한다. 30. 26.46 출애굽기 8:19(히브리어 성경 8:15). 개역개정은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로 옮기지만 히브리어, 칠십인역, 라틴어 본문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다. uenefici는 개역개정의 용어를 따라 ‘요술사들’로 옮겼다. 31. 26.47 uetustatum, scilicet suarum은 구약의 옛 일들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32. 26.49 누가복음 11:21-22. 테르툴리아누스는 강한 자를 창조주로, 더 강한 자를 마르키온의 신으로 보는 해석을 물리치고, 강한 자를 바알세불, 곧 사탄으로 본다. 33. 26.50 26.50-26.51은 한 문장의 의문문이다. ‘그’는 창조주다. ‘흙으로 녹아 돌아가며 죽는’ 일은 창세기 3:19의 창조주의 법을 가리키고, 전갈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서 마르키온파도 그 독에 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34. 26.52 누가복음 11:27-28. 26.52-26.53은 한 인용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faciunt(행하는)이고, 개역개정은 ‘듣고 지키는 자’다. 35. 26.54 앞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물리친 장면은 누가복음 8:19-21이며 4권 19장에서 다루었다. 마르키온은 이 장면을 그리스도가 탄생을 부인한 증거로 썼다. 36. 26.55 nec hic mater adsistebat illi는 여기서도 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를 직접 물리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id rursus habiturus는 앞의 일(누가복음 8장)을 여기서 다시 다룰 참이었다는 뜻으로 보아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다루려 하면서’로 옮겼다. 복을 어머니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옮겼다는 것은 그에게 어머니가 있었음을, 따라서 실제로 태어났음을 전제한다는 논증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6 27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에게서 비난하는 점들은 다른 곳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런 점들이 그리스도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보라, 그 자신도 한결같지 않고, 일관성 없고 경솔하며,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 그는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고 명하면서도, 자신은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는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빛을 사람들에게서 감추었으면서도, 등불을 숨겨 두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추게 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맞받아 저주하는 것을 금하고, 먼저 저주하는 것은 물론 더욱 금하면서도,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를 퍼붓는다. 내 하나님을 이토록 닮은 <이>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누구의 그리스도이겠는가? 그가 다른 신을 공포했다면 결코 율법의 파괴자로 지목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정했다. 그러므로 그때에도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은, 율법의 하나님을 전하고 다니는 이가 왜 율법에 따라 상에 기대어 앉기 전에 먼저 씻지 않았는지 속으로 따져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기까지 하여, 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들의 속은 약탈과 불의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그릇의 깨끗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깨끗함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타냈다. <또> 바리새인도 씻지 않은 잔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속으로 따져 보았기 때문에, 그는 너희가 잔의 겉 곧 육신은 씻으나 너희의 속 곧 영혼은 깨끗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겉 곧 육신을 만든 이가 속 곧 영혼도 만들지 않았느냐? 이 말로 그는 겉사람의 깨끗함과 속사람의 깨끗함이 둘 모두를 소유한 같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 하나님은 사람의 씻음보다, 나아가 제사보다도 자비를 앞세운다. 그가 이어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가진 것을 구제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다른 신도 자비를 명령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알려지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한 여기서도 그들이 하나님 문제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규율 문제로 책망받았음이 드러난다. 그들에게 예표로는 그릇의 깨끗함을, 드러내어서는 자비의 행위를 명령한 이가 바로 그 하나님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채소의 십일조는 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지나쳐 버리는 자들을 꾸짖는다. 그것이 어느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이겠는가? 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운향과 박하까지 십일조로 바치던 바로 그 하나님의 것이 아니겠는가? 책망의 요지는 전부, 그들이 사소한 것들은 챙기면서도 정작 그것을 받는 그 하나님에게 더 큰 것들은 바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온 마음과 네 온 영혼과 네 온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는 너를 이집트에서 불러낸 이다.” 게다가 시기상으로도, 그리스도가 새롭고 갓 생겨난 신, 아직 공공연히 드러나지도 않은 신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신을 위해, 그토록 이르게 익은, 아니 아직 그토록 덜 익어 떫은 사랑을 요구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높은 자리와 문안받는 영예를 탐하는 자들을 고발할 때, 그는 창조주의 노선을 그대로 따른다. 창조주는 그런 통치자들을 소돔의 관원들이라고 불렀고, 지도자들을 의지하는 것도 금했으며, 더 나아가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전적으로 지극히 비참하다고 선언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자랑하려고 높은 자리를 탐한다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의지하는 것을 그와 같이 <금지하여> 그런 섬김을 금한 이가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들도 꾸짖은 것이다. 그는 율법교사들 자신도 공격한다. 그들이 남에게는 질 수 없는 짐을 지우면서,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도 감히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혐오하는 자로서 율법의 짐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때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 곧 구제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지나쳐 버리는 자들을 고발하고 있던 그가 어떻게 율법을 혐오하는 자이겠는가? 이것들조차 무겁지 않은데, 하물며 운향의 십일조와 대접의 깨끗함이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질 수 없는 것을 지지 못한 것이라면, 그는 오히려 그들을 용서받을 만한 자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문제 삼는 짐은 어떤 것인가? 그들 자신이 제멋대로 쌓아 올린 짐들이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치고, 이웃의 것을 빼앗으려고 집에 집을 잇대며, 백성을 짓밟고, 뇌물을 사랑하며, 보수를 좇고, 가난한 자들에게 내려진 판결을 약탈하여, 과부를 자기들의 탈취물로, 고아를 자기들의 노략물로 삼았다. 이들에 대해 같은 이사야가 “이스라엘에서 힘 있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고, 또다시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요구하는 자들이 너희를 다스린다.” 율법교사들보다 더 그러한 자가 누구이겠는가? 이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면, 자기 사람들로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다른 이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다면 그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조상들에게 죽임당한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웠다는 이유로도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듣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은 이 경건한 일로 조상들의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했으니 오히려 칭찬받을 만했다. 그가 마르키온파가 비난하는 그런 질투하는 이, 곧 조상들의 죄를 아들들에게 넷째 대까지 갚는 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율법교사들이 가진 열쇠가 율법의 해석 말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들은 율법을 이해하는 데에 자신들도 나아가지 않았다. 곧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 - 또 다른 사람들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사람의 계명과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지 않는 자들을 꾸짖은 이는 율법을 깎아내리는 자로 여겨야 하는가, 아니면 율법을 지지하는 자로 여겨야 하는가? 깎아내리는 자라면 율법을 가로막는 자들이 그의 마음에 들었어야 했고, 지지하는 자라면 그는 더 이상 율법의 경쟁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말을 창조주를 깎아내리려고, 곧 그에게 죄짓는 자들이 ‘화’를 당하게 될 잔인한 이로 드러내려고 퍼부은 것이다.” 그렇다면 잔인한 이를 떠나 그를 노하게 하는 일을 누가 오히려 더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해야 할 이로 내세운 그 하나님을 그만큼 더 섬겨 그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다. 번역 주석 1. 27.1 et는 Engelbrecht의 읽기를 따랐다(MR은 ea).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의 성품에서 찾는 모순을 그리스도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논증이 이 장 전체의 틀이다. 2. 27.2-5 『안티테시스』가 창조주에게 돌리던 비난(한결같지 않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을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에 그대로 적용한 목록이다. 27.3은 누가복음 6:30과 11:29, 27.4는 누가복음 11:33, 27.5는 누가복음 6:28과 11:42-52를 가리킨다. 3. 27.4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빛을 감추었다’는 말은 티베리우스 시대에 처음 드러났다는 마르키온의 신을 겨냥한다. abstrudendam은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abstruendam). 4. 27.5 maledicere는 R의 읽기다. M은 benedicere로 읽는다. 5. 27.6 <이>는 Kroymann이 보충한 is를 옮긴 것이다. ‘내 하나님’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믿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6. 27.7 fiximus는 Latinius의 읽기를 따랐다(MR은 finximus). 7. 27.8-13 누가복음 11:37-41. 누가복음 11:38은 예수가 식사 전에 씻지 않은 것을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겼다고 전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의문 자체가 예수를 율법의 하나님을 전하는 이로 여긴 증거라고 본다. 8. 27.9 누가복음 11:39. rapina et iniquitate를 ‘약탈과 불의’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탐욕과 악독’이다. 9. 27.10 <또>는 Kroymann이 보충한 et를 옮긴 것이다. ‘곧 육신’, ‘곧 영혼’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누가복음 11:39의 잔의 겉과 속에 덧붙인 해석이다. emundastis는 M의 읽기이며 R은 emundatis로 읽는다. 10. 27.11 누가복음 11:40. 개역개정은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이다. 11. 27.12 quo dicto는 R의 교정 읽기를 따랐다(M과 R의 원래 읽기는 quod digito, ‘손가락으로’). 자비를 제사보다 앞세운다는 말은 호세아 6:6과 잠언 21:3을 반영한다. 12. 27.13 누가복음 11:4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가 가진 것을’(quae habetis)이고, 개역개정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이다. 13. 27.16-17 누가복음 11:42.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리스어 κρίσιν(‘공의’) 대신 κλῆσιν(‘부르심’)에 해당하는 uocationem을 읽는다. 개역개정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dilectionem dei는 27.19의 신명기 인용에 맞추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옮겼다. 27.17의 ex decimis는 M의 읽기이고, offerebant는 R의 교정 읽기다(MR의 원래 읽기는 offerebat). 14. 27.19 신명기 6:5에 6:12의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을 ‘불러낸’(uocauit)으로 결합했다. 이 동사로 누가복음 11:42의 ‘부르심’(uocatio)을 창조주에게 연결한다. <네>는 Pamelius가 보충한 tuo를 옮긴 것이다. 15. 27.20 praecocam(이르게 익은)과 acerbam(덜 익어 떫은)은 과일의 익음에 빗댄 표현으로, 갓 알려진 마르키온의 신에게 이스라엘이 사랑을 바칠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praecocam은 M의 읽기이고, nouo는 R의 교정 읽기다(MR의 원래 읽기는 nouam). 16. 27.21 누가복음 11:43. ‘소돔의 관원들’은 이사야 1:10, 지도자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금지는 시편 118:9(불가타 117:9),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자에 대한 선언은 예레미야 17:5를 가리킨다. archontas는 라틴어 문장 안에 쓰인 그리스어 낱말이다. appellantis와 prohibentis는 R의 교정 읽기를 따랐다. 17. 27.22 <금지하여>는 Kroymann이 보충한 interdictione를 옮긴 것이다(adu. Marc. V 19의 interdictio를 근거로 든다). officia는 피후견인이 유력자에게 바치는 문안과 수행 같은 섬김을 뜻한다. 18. 27.23 누가복음 11:46. 19. 27.24 ‘이것들조차 무겁지 않다’는 요한일서 5:3(‘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을 반영한다. cum maxime는 ‘바로 그때’로 옮겼다. 20. 27.26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치고’는 마태복음 15:9와 이사야 29:13, ‘집에 집을 잇대며’는 이사야 5:8, ‘백성을 짓밟고’는 이사야 3:15, ‘뇌물을 사랑하며 보수를 좇고’는 이사야 1:23, 가난한 자의 판결과 과부와 고아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10:2를 반영한다. doctrinas praecepta는 Kroymann이 어순을 바꾼 읽기다(MR은 praecepta doctrinas). calcantes는 이사야 3:15를 근거로 한 Kroymann의 추정이며 MR은 clamantes(‘외치며’)로 읽는다. auferrent는 R의 교정 읽기다. 21. 27.27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이사야에게 돌리지만, Kroymann의 인용 지시는 아모스 6:1이다. Pamelius는 Israhele를 Hierusalem으로 고쳤다. 22. 27.28 이사야 3:12의 칠십인역 본문(‘너희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자들이 너희를 다스린다’)을 따른다. 개역개정은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이다. 23. 27.29 hi si는 R의 읽기다(M은 in si). pulsasset는 ‘공격하다’로 옮겼다. 24. 27.30 누가복음 11:47-51. 누가복음 11:48에서 예수는 무덤을 세우는 일이 조상들의 행위에 동의한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들을 꾸짖는 그리스도가 조상의 죄를 자손에게 갚는 창조주(출애굽기 20:5)와 같은 질투를 지녔다고 논증한다. natiuitas는 여기서 세대를 뜻하므로 ‘대’로 옮겼다. 25. 27.31 누가복음 11:52. 삽입된 인용은 이사야 7:9의 칠십인역(‘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이다. 개역개정은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이다. ‘사람의 계명과 교훈’은 골로새서 2:22와 이사야 29:13을 반영한다. uti qui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utique, Engelbrecht는 utique ). 26. 27.33 ei는 Kroymann의 추정이다(MR은 et). aemulus는 ‘경쟁자’로 옮겼다. Engelbrecht는 iam non 대신 non est를 선호한다. 27. 27.34 따옴표 안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그리스도가 ‘화 있을진저’를 퍼부은 것은 창조주를 잔인한 신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infuscandum은 ‘깎아내리다’로 옮겼다(원뜻은 ‘검게 물들이다’). 28. 27.35 demerendum은 섬김으로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섬겨 그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7 28 그러므로 그가 바리새인들의 위선, 곧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위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그것은 위선이다”라고 말한다. 창조주의 선포가 그 누룩인 것은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거역하는 자들을 미워하며, 자기 사람들이 그를 향해 - 다른 이가 아니라 -, 곧 위선이 있었고 또 저질러진 바로 그 대상을 향해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그 위선의 본을 경계해야 했다. 이처럼 그가 바리새인들의 본을 금할 <때>, 그는 바리새인들이 위선을 저지른 바로 그 대상에게 그것이 저질러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위선, 곧 마음의 숨은 것을 감추고 불신의 은밀한 생각을 겉치레 의무로 가리며,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도 자신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 위선을 이미 꾸짖었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덮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으로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이는 그가 예전부터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던 신의 계시와 인식을 꾀한다고 누구도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속으로 수군거리거나 서로 의논하던 것들, 곧 그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하던 것까지 덧붙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이 말들은 복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밝은 데로 나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말한다. “그러나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를 죽일 수만 있고 그 후에는 너희에게 아무 권능도 갖지 못하는 자들을 겁내지 말라.” -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사야의 예고가 해당될 것이다. “보라, 의인이 어떻게 제거되는가. 그런데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 “그러나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후에 지옥에 던질 권능을 가진 이를 두려워하라.” - 그는 분명히 창조주를 가리킨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를 두려워하라.” 이 대목에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두려워하라고 명하는 대상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금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고 금하는 대상의 호의를 얻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명하는 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노엽게 하지 않고 섬겨 호의를 얻도록 그가 애써 주는 바로 그 대상에게 속한다. 그러나 나는 뒤따르는 말에서도 가져올 수 있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두고>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두고 시인할 것이다.” -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두고 시인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나, 죽임을 당한 뒤에는 분명히 그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그가 앞에서 단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한 자들일 것이다.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죽음을 먼저 말하여, 견뎌 내야 할 시인을 이어서 말하려 한 것이다. -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그가 시인했다면 그를 시인했을 바로 그에게서 부인당할 것이다. 그가 시인하는 자를 시인할 것이라면, 부인하는 자를 부인할 자도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죽임을 당한 뒤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가 시인하는 자라면, 죽은 뒤에도 두려워해야 할 자는 부인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 두려워해야 할 것, 곧 지옥의 형벌이 창조주에게 속하므로, 따라서 부인하는 자도 창조주에게 속한다. 그런데 부인하는 자가 그렇다면 시인하는 자도 그렇다. 그는 죽임을 당한 뒤에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당하지 않겠지만, 만일 부인한다면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창조주의 지옥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보여 주는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이처럼 부인을 겁주어 막은 뒤에, 두려워해야 할 모독에 대한 경고도 이어진다.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는 일과 붙들어 두는 일이 둘 다 이미 심판자인 하나님의 면모를 드러낸다면, 모독해서는 안 되는 성령<도> 그에게 속할 것이다. 곧 모독을 용서하지 않을 이에게 속한다. 앞에서 부인해서는 안 되는 이가 죽여서 지옥에까지 던질 이에게 속했던 것과 같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창조주를 향한 모독까지 막는다면, 그가 어떻게 창조주의 적대자로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면 그가 이 말로도 그의 엄격함, 곧 모독을 용서하지 않고 죽여서 지옥에까지 던질 그의 엄격함을 어둡게 칠한다면, 남는 결론은 이렇다. 저 다른 신의 영은 처벌 없이 모독을 받고 그의 그리스도는 처벌 없이 부인을 당하며, 그 신을 섬기든 멸시하든 아무 차이가 없고, 멸시에 아무 형벌이 없듯이 섬김에도 아무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는 권세자들 앞에 끌려간 자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지 말라고 금한다. “성령이 바로 그 시간에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이런 실례가 창조주의 것이라면, 계명도 그 본이 앞서 있었던 이의 것일 것이다. 민수기에서 예언자 발람은 발락 왕에게 불려 가 왕이 맞서 싸우려던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영으로 충만해지자마자 그가 하러 왔던 저주가 아니라 바로 그 시간에 영이 그에게 일러 준 축복을 선포했다. 그는 앞서 왕의 사자들 앞에서, 곧이어 왕 자신 앞에서도 자기가 그것을 선포하겠다고 공언했었다. 곧 하나님이 자기 입에 넣어 준 것을. 이것들이 새 그리스도의 새 가르침인데, 창조주의 종들이 오래전에 이미 시작한 것들이다. 보라, 모세와 그리스도의 본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모세는 다투는 형제들 사이에 스스로 나서서 중재하고 잘못한 자를 꾸짖는다. “어찌하여 네 이웃을 치느냐?” 그러자 그는 그자에게 거절당한다. “누가 너를 우리 위에 다스리는 자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에게서 그와 그의 형제 사이에 유산을 나누는 일<에 관해> 조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토록 정당한 일이었는데도 자기 도움을 거절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모세가 그대의 그리스도보다 낫다. 형제들의 화평을 위해 애쓰고 불의에 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극히 선하고 재판관이 아닌 신의 그리스도는 ‘누가 나를 너희 위에 재판관으로 세웠느냐?’라고 말한다”라고 하는가? 그는 불의한 사람이자 도리를 저버린 형제가 올바름과 도리의 옹호자를 내쫓을 때 썼던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다른 거절의 말을 찾아낼 수 없었는가? 결국 그는 그 악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 말을 인정했고, 형제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 주는 일을 피함으로써 악한 행위도 인정했다. 아니면 혹시 그는 모세가 이 말로 쫓겨난 것을 분하게 여겼고, 그래서 형제들이 다투는 같은 종류의 사건에서 같은 말을 상기시켜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 한 것인가? 분명히 그렇다고 하자. 그때 모세 안에 있었던 이가 바로 그 자신이었고, 그런 말을 들은 이는 곧 창조주의 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부의 영광이 우리 하나님에게 정죄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밝혀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권세자들마저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가난한 자들을 거름 더미에서 일으켜 세운다. 그러므로 자기 밭의 소출을 두고 스스로 우쭐해하는 부자의 비유도 그에게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그들이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한 것들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바로 이처럼 <히스기야> 왕도 자기 보물과 사치품 창고를 두고 페르시아인들 앞에서 자랑하다가 이사야를 통해 책망을 들었다. 번역 주석 1. 28.1 이사야 29:13(마태복음 15:8)과 누가복음 12:1을 반영한다. hypocrisis는 ‘위선’으로 옮겼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12:1은 같은 말을 ‘외식’으로 옮긴다. 동사는 M의 placet를 따른 본문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placebat로 읽는다. 2. 28.2 누가복음 12:1. “그것은 위선이다”(quod est hypocrisis)까지가 누가복음의 문구이고, “창조주의 선포가 아니다”(non praedicatio creatoris)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다. 3. 28.3 fuit et는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fuisset로 읽는다. 관계대명사 cuius는 Kroymann의 설명대로 hypocrisis를 받으므로 ‘그 위선의 본’으로 옮겼다. ‘그를 향해’(in illum)와 ‘바로 그 대상’은 아버지,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4. 28.4 (‘때’)은 Kroymann이 보충했다. 사본 R은 prohibet 대신 perhibet로 읽는다. 5. 28.5 누가복음 11:52(‘지식의 열쇠’)를 반영한다. superficialib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superficii talibus로 적는다. [in]은 Junius가 ipsa만 읽고 사본 MR이 in ipsa로 적은 데 따른 것으로, in이 없으면 ipsa는 위선 자체를 주어로 받아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가 된다. 6. 28.6 누가복음 12:2. 개역개정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와 같은 뜻이다.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던 신’은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신을 가리킨다. intra(‘속으로’)는 Engelbrecht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inter로 읽는다. inter se tractarent(‘서로 의논하던’)는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본들은 tractarent만 적는다. dinoscetur는 R, MF는 diuosceretur다. 7. 28.7 따옴표 안의 말은 마태복음 12:24(누가복음 11:15 참조)이며, 이어지는 문장은 누가복음 12:3(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밝은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한 말이 지붕 위에서 전파된다는 말씀)을 풀어 쓴 것이다. Belzebule는 R의 읽기이고 M은 belzebulem, Oehler는 Beelzebub로 적는다. 개역개정 표기에 따라 ‘바알세불’로 옮겼다. 8. 28.8 누가복음 12:4. 개역개정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를 죽일 수만 있고 그 후에는 너희에게 아무 권능도 갖지 못하는 자들’이다. N과 Pamelius는 amicis meis로 읽는다. 9. 28.9 첫 대시 사이의 문장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덧붙임이며, 이사야 57: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을 인용한다. his는 M의 읽기이고 Gelenius와 이후 판본들은 iis로 적는다. 이어지는 따옴표는 누가복음 12:5 앞부분이다. 10. 28.10 누가복음 12:5. gehenna는 개역개정을 따라 ‘지옥’으로 옮겼다. 대시 사이의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이다. 11. 28.11 누가복음 12:5 끝부분. mihi sic: quem은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R은 mihi, si quem으로 읽는다. 이 읽기에 따라 28.12 전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의 내용이 된다. 12. 28.12 demereri는 섬김으로 상대의 호의를 얻는다는 뜻이어서 ‘호의를 얻다’로 옮겼다. offendi는 offensa(노여움)와 맞추어 ‘노엽게 하다’로 옮겼다. cui는 R의 읽기이고 MF는 cuius로 적는다. 13. 28.13 누가복음 12:8. 개역개정은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일인칭 ‘나도’이고 ‘사자들’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다. confiteri in me는 그리스어 ὁμολογεῖν ἐν ἐμοί를 옮긴 표현이어서 ‘나를 두고 시인하다’로 옮겼고, 보충된 은 ‘두고’에 해당한다(R3). Kroymann은 coram hominibus의 위치를 사본(occidi habebunt coram hominibus)과 달리 옮겼다. 끝의 대시부터 28.14의 대시까지는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다. 14. 28.14 누가복음 12:9.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다. hi는 R의 읽기이고 M은 hic로 적는다. sustinendam 대신 substruendam으로 읽은 판본(Pamelius)도 있다. 15. 28.20 누가복음 12:10. 개역개정은 성령에 대해 ‘모독한 자’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인자와 성령 두 경우 모두 dixerit in(‘거슬러 말하다’)을 쓴다. 이 장에서 filius hominis는 이 인용에만 나오므로 ‘인자’로 옮겼다. qui autem은 Rigaltius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autem qui로 적는다. 16. 28.21 (‘도’)는 Kroymann이 보충했다. hui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cuius로 적는다. 사본 MR1은 이 문장 앞의 remissio를 앞 문장 끝에 붙여 읽는다. ‘앞에서 부인해서는 안 되는 이’는 28.13-14에서 시인하고 부인하는 대상인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7. 28.23 ‘저 다른 신’(illius diuersi dei)은 마르키온이 창조주와 구별하는 신이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엄격함을 깎아내리려고 이 말을 했다고 보는 해석을 따라갈 때 마르키온의 신에게 남는 결과를 서술한다. 18. 28.24 누가복음 12:11-12. 개역개정 12:11의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는 potestates만 언급하므로 ‘권세자들’로 옮겼다. 28.8과 28.10의 potestas(‘권능’)와는 다른 뜻이다. 19. 28.25 누가복음 12:12 끝부분(‘마땅히 할 말을’). quid eloqui debeatis 대신 quid loquamini로 읽은 판본(N, Pamelius)도 있다. documentum은 앞선 실례나 교훈이라는 뜻이어서 ‘실례’로 옮겼다. 그 실례가 28.26-27의 발람 이야기다. 20. 28.26 민수기 22-24장, 특히 22:6(저주 요청), 22:18-19(사자들에게 한 말), 22:38(발락에게 한 말), 23:5-10(축복)을 요약한다. in Arithmis는 민수기의 그리스어 제목 Ἀριθμοί를 따른 이름이다. Balac은 M의 표기이고 R과 이전 판본들은 Balach로 적는다. professus는 R의 읽기이고 MF는 professum으로 적는다. Kroymann은 ipsa hora로 보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21. 28.27 민수기 22:38. 23:5도 하나님이 발람의 입에 말씀을 두었다고 서술한다. ‘새 그리스도의 새 가르침’은 마르키온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으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어다. 22. 28.28 출애굽기 2:13. iniuriosum은 동족을 친 사람을 가리켜 ‘잘못한 자’로 옮겼다. 이 문장은 마르키온파가 두 인물을 대조하는 논법을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대로 제시한 것이다. 23. 28.29 출애굽기 2:13-14. 개역개정은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이웃’(proximum)이고, magistrum은 칠십인역 ἄρχοντα에 맞추어 ‘다스리는 자’로 옮겼다. 24. 28.30 누가복음 12:13-14. (‘에 관해’)는 Pamelius가 보충했다. 25. 28.32 누가복음 12:14. 개역개정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물건 나누는 자’가 없다. 28.29의 모세 인용과 같은 iudicem이므로 두 곳 모두 ‘재판관’으로 옮겼다. 문장 전체는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며, ‘재판관이 아닌 신’은 마르키온이 자기 신을 심판하지 않는 신으로 규정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26. 28.33 pietas와 impius는 신에 대한 경건과 혈육에 대한 도리를 함께 뜻한다. 여기서는 형제 사이의 일이 문제이므로 ‘도리’로 옮겼다. probitas는 ‘올바름’으로 옮겼다. 27. 28.34 declinatione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eclinationem으로 적는다. denique는 앞 문장의 수사 의문에 대한 결론을 이끈다. 28. 28.36 plane ita sit. ipse는 Engelbrecht의 읽기다. 사본 MR1은 si ipse로 적고 R3은 si를 지웠다. 29. 28.37 ‘다른 곳’은 이 책 14-15장을 가리킨다. 14장은 시편 72:12와 사무엘상 2:8(시편 113:7)을, 15장은 부자들에 대한 화와 히스기야의 예를 다룬다. 권세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린다는 말은 누가복음 1:52와 같은 내용이고, 가난한 자들을 거름 더미에서 일으킨다는 말은 시편 113:7과 사무엘상 2:8이다. detrahente-adleuante는 R의 읽기이고 MF는 detrahentes-adleuantes로 적는다. 30. 28.38 누가복음 12:16-20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 31. 28.39 누가복음 12:20. reposcent는 삼인칭 복수여서 ‘그들이’로 옮겼다. 개역개정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32. 28.40 이사야 39:2, 5-7(열왕기하 20:12-18). <히스기야>(Ezechias)는 Kroymann이 보충했다. 성경 본문에서 히스기야가 보물을 보여 준 사람들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15장에서와 같이 ‘페르시아인들’이라고 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8 29 누가 우리가 먹을 것 때문에 영혼을 염려하고 입을 것 때문에 몸을 염려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이것들을 사람을 위해 미리 마련해 두었고 그때부터 계속 베풀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염려를 자기 너그러움과 겨루는 것처럼 여겨 마땅히 금하는 이, 영혼의 실체 자체를 음식보다 귀하게 갖추고 몸의 재료 자체를 옷보다 귀하게 빚은 이,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들이지도 않는데도 그에게서 먹이를 얻는 까마귀들이 그에게 속하고, 짜지도 잣지도 않는데도 그에게서 옷을 입는 백합과 풀이 그에게 속하며, 지극히 영화로웠으나 어떤 작은 꽃보다도 더 잘 차려입지 못한 솔로몬이 그에게 속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겠는가? 게다가 한 신은 베풀고 다른 신은 그가 베푸는 것을 믿고 염려 없이 지내라고 명하는 것, 그것도 베푸는 이를 깎아내리는 자가 그렇게 명하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없다. 그런데 그가 창조주를 깎아내리는 자로서, 까마귀도 백합도 애쓰지 않는 이런 하찮은 것들, 곧 값싼 만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는 조금 뒤에 드러날 것이다. 우선, 그는 왜 그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는가? 곧 어떤 믿음이 작다는 것인가? 그들이 바로 그를 배우고 있던 터라 막 <계시된> 신에게 아직 온전하게 보일 수 없었던 그 믿음인가, 아니면 바로 이 명목으로 창조주에게 마땅히 드려야 했던 믿음, 곧 그가 이것들을 인류에게 스스로 공급한다고 믿고 그것들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믿음인가? 실제로 그가 “이것들은 세상의 민족들이 구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일 때에도, 곧 만물을 지은 이요 공급하는 이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구한다는 것이니, 그는 이방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은 이들을, 그가 이방인들을 믿지 않는 자들로 지목한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작다고 꾸짖은 것이다. 나아가 그가 “그러나 아버지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을 아신다”라고 덧붙일 때, 나는 먼저 그리스도가 어떤 아버지로 이해되기를 바라는지 묻겠다. 그들 자신의 아버지라면, 그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이가 선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만일> 자기의 아버지인 저 다른 신을 가리킨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 가운데 아무것도 베풀지 않은 그 신이 사람에게 그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가 알았더라면 베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는데도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악의 때문이든 무능 때문이든 베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들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공언했으니 분명히 이것들이 좋은 것임을 확증했다. - 악한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는 이제 창조주의 작품과 선물을 깎아내리는 자가 아닐 것이니, 앞에서 미루어 둔 문제를 나는 이로써 처리한 셈이다. 나아가 사람에게 필요한 줄 그가 아는 것들을 다른 이가 미리 마련했고 지금 베풀고 있다면, 어떻게 그 자신이 이것들을 약속하는가? 아니면 그는 남의 것으로 선한가? 그가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것들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에게서 더해진다는 것이다. 만일 그 자신에게서라면, 남의 것을 베풀 그는 어떤 자인가? 만일 이것들의 주인인 창조주에게서라면, 그는 누구이기에 남의 것을 약속하는가? 이것들이 둘째 순서로 주어질 것으로서 나라에 덧붙여진다면, 첫째 순서가 속한 이에게 둘째 순서도 속하고, 나라가 속한 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속한다. 그러므로 약속 전체가 창조주의 것이다. 비유들의 요지와 비유의 대응 관계가 모든 점에서 들어맞는 대상 말고 다른 이를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종이라면 -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한다. 곧 치렁치렁하고 얽힌 삶의 거치적거리는 것들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야 한다. 또 등불을 켜 두어야 한다. 곧 믿음으로 불붙고 진리의 행위로 빛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주인, 곧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어디에서 돌아오는 주인인가? 혼인 잔치에서라면, 그는 혼인이 속한 창조주의 것이다. 창조주의 것이 아니라면, 마르키온 자신도 혼인을 혐오하는 자기 신을 바라보아 초대를 받았더라도 혼인 잔치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혼인이 어울리는 이가 아니라면, 비유는 주인이라는 인물에서 무너졌다. 다음 비유에서도, 집주인이 그 시각을 알았다면 자기 집이 뚫리도록 두지 않았을 그 도둑을 창조주의 인물로 배정하는 자는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사람 전체의 주인인 창조주가 어떻게 도둑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자기 것을 훔치거나 뚫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것에 내려와 사람을 그 주인에게서 떼어 놓는 자가 그렇게 한다. 나아가 그는 우리에게 도둑이 마귀임을 보여 주는데, 사람이 태초에도 그 시각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에게 뚫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준비하고 있으라고 명한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자 자신이 도둑이라는 뜻이 아니라, 물론 자신을 준비하지 않고 도둑을 경계하지 않은 자들의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인자라면 나는 심판자를 확보한 것이고, 심판자라는 점에서 그가 창조주의 아들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대목에서 인자라는 이름으로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 언제 올지 우리가 모르는 그를 도둑으로 예고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아무도 자기 소유의 도둑이 아니라는, 앞에서 <규정해 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가 창조주를 두려워할 이로 내세우는 그만큼 그는 창조주를 위해 일하는 자로서 창조주의 사람이라는 점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비유를 그들에게 하는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도 하는 것인지 묻자, 그는 청지기들의 비유를 내놓는다. <곧> 그들과 장차 교회들을 맡아 이끌 모든 사람을 향한 비유다. 그들 가운데 주인이 없는 동안 동료 종들을 잘 대한 자는 주인이 돌아오면 모든 소유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 행한 자는, 그가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한 시각에 주인, 곧 저 인자,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도둑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돌아오면, 갈라내어지고 그의 몫이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서도 가르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심판자인 주를 내세우는 것이거나, 지극히 선한 신을 내세우는 것이라면 이제 그 신도 심판자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이단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이 의미가 그의 신에게 돌려질 때 그들이 이 의미를 누그러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내기만 하고 그의 몫을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두는 것은 평온함과 온유함에 속하는 일이라는 듯이, 마치 그 종이 부름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 본래 상태로 돌려보내질 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마치 바로 이 일도 판결이 내려져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어리석다! 갈라내어진 자들의 결말은 무엇이겠는가? 구원을 잃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은 구원을 얻을 자들에게서 갈라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믿지 않는 자들의 처지는 무엇인가? 정죄 아니겠는가? 아니면 갈라내어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것도 겪지 않는다면, 반대편에서 남겨진 자들과 믿는 자들도 똑같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겨진 자들과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면, 반대편에서 갈라내어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을 잃는다. 이것이 심판일 것이며, 이 심판으로 위협하는 이는 창조주의 사람이다. 종들을 적게 또는 많이 때리고, 그들에게 맡긴 만큼 그들에게서 요구하는 이를, 보응하는 하나님 말고 다른 누구로 이해하겠는가? 그는 보상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순종하라고 나를 가르치는가? 그대의 그리스도가 외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지극히 선한 그, 어떤 지옥의 주인도 아닌 그, 조금 전에는 지극히 박정한 작은 마을에 불을 내려 달라고 청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제지했던 그가 말이다. 그가 언제 소돔과 고모라를 불비로 태웠는가? 언제 <그에 대해> 이렇게 노래되었는가? “불이 그 앞에서 나아가 그의 원수들을 태울 것이다.” 언제 그가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위협했는가? “내가 유다의 성읍들에 불을 보낼 것이다.” 또는 언제 이사야를 통해 “내 분노로 불이 타올랐다”라고 했는가? 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낸 그 이가 아니라면, 그로 하여금 거짓말을 [못] 하게 하라. 그대가 어떤 불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든 상관없다. 그것이 비유적 표현이라 해도, 그가 바로 내 원소에서 자기 생각을 위한 논거를 취한다는 점에서, 내 것을 쓰는 그는 나에게 속한다. 불의 실재가 속한 이에게 불의 비유도 속할 것이다. 그 자신이 이렇게 덧붙여 이 불의 성격을 더 잘 해석해 줄 것이다. “너희는 내가 땅에 평화를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오히려 ‘분리’다.” “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르키온이 고친다. 마치 분리도 칼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러므로 평화를 부정한 이는 파멸의 불로도 위협한다. 싸움이 어떠하면 불도 그러하고, 칼이 어떠하면 불꽃도 그러하다. 둘 다 <그대의> 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갈라설 것이다.” 친족 사이의 이 싸움을 예언자의 나팔이 바로 이 말로 울렸다면, 미가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위해 미리 선포한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그래서 그는 하늘과 땅의 모양은 분간하면서도 그때는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선언했다. 그때란 곧 그가 자기에 대해 예언된 모든 것을 이루고 그와 다르게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알려졌어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때를 입증할 근거를 갖지 못했는데, 누가 그의 때를 알 수 있었겠는가? 그는 그들이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마땅히 꾸짖기도 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에스겔을 통해 이렇게 명했다. “의롭고 평화를 이루는 재판을 하라.”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라고 명했고, 이사야를 통해서는 이렇게 명했다.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의롭다 하라.” 또 그는 소렉 포도나무가 정의를 맺지 않고 부르짖음을 맺었다고 책망했다. 그러므로 계명에 따라 행하라고 가르쳤던 그 이가 자기 판단으로도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계명을 뿌렸던 이가 그것이 넘치게 맺히기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제 의로운 심판자 하나님을 무너뜨리던 자가 의롭게 판단하라고 명한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실제로 그들은 사람을 옥에 넣고 마지막 한 푼까지 갚기 전에는 거기서 꺼내 주지 않는 재판관을 창조주의 인물로 보아 비방하는 뜻으로 해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같은 방식으로 맞서야 한다. 창조주의 엄격함이 내세워질 때마다, 그리스도는 그때마다 그가 두려움을 통해 순종을 바치도록 강제하는 그 창조주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29.1 누가복음 12:22-27. 누가복음 12:24는 마태복음 6:26의 ‘새’와 달리 ‘까마귀’라고 한다. ‘풀’(foenum)은 누가복음 12:28에서 왔다. 2. 29.3 ‘조금 뒤에 드러날 것이다’라고 미루어 둔 문제는 29.11에서 다룬다. 3. 29.4 누가복음 12:28의 “믿음이 작은 자들아”를 가리킨다. 4. 29.5 사본 M과 R은 uelato(‘가려진’)라고 읽는다. Oehler가 re-를 보충하여 reuelato(‘계시된’)로 읽었고, 그 보충을 < > 안에 옮겼다. ‘막 계시된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5. 29.6 누가복음 12:30. 개역개정은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옮긴다. 6. 29.7 누가복음 12:30 후반부. 7. 29.9 사본 M에는 si가 없고 R은 sin으로 읽는다. Kroymann이 를 보충했다. 8. 29.10 사본은 scit(현재)로 읽고, Kroymann은 sciit(완료)로 고쳤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9. 29.13 누가복음 12:31. 개역개정은 “그의 나라”라고 하나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regnum dei(‘하나님의 나라’)이고, 개역개정의 “더하시리라”는 여기서 수동형(adicientur)이다. 10. 29.16 누가복음 12:35-36. dominus는 비유 속에서는 종의 ‘주인’이고 동시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르는 ‘주’이다. 비유와 직결된 자리에서는 ‘주인’으로 옮겼다. 사본은 id sumus로 읽고, Engelbrecht가 et sumus로 고쳤다. 11. 29.17 누가복음 12:36 “혼인 집에서 돌아와”. nec ipse Marcion ... isset의 Marcion은 주격으로, 마르키온 자신도 초대받은 혼인 잔치에 가지 않았으리라는 뜻이다. Latinius는 intuens(바라보아) 대신 metuens(두려워하여)로 읽는다. 마르키온은 신도들에게 혼인을 금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근거로 마르키온의 신을 ‘혼인을 혐오하는 자’라고 부른다. 12. 29.19 누가복음 12:39. 13. 29.21 누가복음 12:40. 이 장에서는 filius hominis를 개역개정을 따라 ‘인자’로 옮겼다. 마귀가 태초에 사람을 ‘뚫었다’는 것은 창세기 3장의 유혹을 가리킨다. 14. 29.22 사본은 creatorem(‘창조주를’)으로 읽는다. Kroymann은 creatoris로 고치고 filium(‘아들’)을 생략된 말로 보았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15. 29.23 사본 M과 R은 scriptum(‘위에 기록한’)이다. Oehler가 praescriptum(‘앞에서 규정한’)으로 보충했다. 가리키는 원칙은 29.20의 “아무도 자기 것을 훔치거나 뚫지 않는다”이다. 16. 29.24 누가복음 12:41-42. 사본 M과 R1은 dicit et로 읽고, R의 교정(R3)과 이전 판본들은 dixisset로 읽는다. Engelbrecht가 diceret, est로 고쳤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비유의 청지기들을 교회의 지도자들로 적용한다. 17. 29.25 누가복음 12:42-46. 개역개정 12:46의 “엄히 때리고”(그리스어 ‘둘로 쪼개고’)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segregabitur(‘갈라내어질 것이다’)이다. ‘믿지 않는 자들’(infideles)은 개역개정의 “신실하지 아니한 자”에 해당한다. 18. 29.26 사본 M은 et illic, R은 et illi로 읽는다. Engelbrecht는 ut illic, Kroymann은 et illic으로 읽었다. ‘거기에서’는 심판자인 인자가 나오는 앞의 도둑 비유(29.21-22)를 가리킨다. 19. 29.27 마르키온파는 마르키온의 신이 벌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갈라냄’을 형벌 없이 원래 상태로 돌려보내는 일로 해석했다. 20. 29.32 누가복음 12:47-48. 21. 29.33 누가복음 12:49. 제자들을 제지한 일은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리자고 한 누가복음 9:54-55의 일이다. docet는 사본 M과 F의 읽기이고, R은 decet(‘마땅하다’)로 읽는다. 22. 29.34 창세기 19:24. ‘그에 대해’(de eo)는 Kroymann의 보충이다. 23. 29.35 시편 97:3(불가타 96:3). 24. 29.36 호세아 8:14. 이사야의 것으로 인용된 말은 이사야서에 그대로 나오지 않고 예레미야 15:14(신명기 32:22 참조)에 가깝다. 25. 29.37 출애굽기 3:2-4. 사본과 이전 판본들은 non mentiatur로 읽고 그 뒤에서 문장을 끊어 si 절을 29.38의 uiderit에 붙인다. Kroymann은 non을 삽입된 말로 보아 [ ] 안에 두고 si 절을 mentiatur에 붙이며, mentiatur 뒤에 esse가 생략되었다고 설명한다(scil. esse, si non uere est; tunc enim fortasse ei credatur). 이 읽기에서 문장은 ‘떨기나무에서 말한 그 이가 참으로 아니라면 그 이라고 거짓으로라도 주장하게 하라, 그러면 혹시 믿어 줄지도 모른다’는 반어다.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말한 창조주의 말이라는 논점이다. Engelbrecht는 29.38 앞에 를 보충한다. 26. 29.38 figura는 여기서 유형론적 예표가 아니라 불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뜻으로 쓴 표현을 가리키므로 ‘비유적 표현’으로 옮겼다. Kroymann은 qui de meis utitur를 군더더기로 본다. 27. 29.40 누가복음 12:51. 개역개정은 “화평을 주려고”,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보내다’(mittere)를 써서 12:49의 ‘불을 던지다’(ignem mittere)와 맞물리고, 마지막 말은 separatio(‘분리’)이다. 28. 29.41 테르툴리아누스는 원래 본문이 ‘칼’(machaera)이었는데 마르키온이 ‘분리’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칼’은 마태복음 10:34의 표현이고, 누가복음 12:51의 그리스어 본문은 ‘분열’(διαμερισμός)이다. 29. 29.43 누가복음 12:53. ‘그대의’(tuo)는 Kroymann의 보충이다. Engelbrecht는 neutra congruens domino를 삽입된 말로 본다. 30. 29.44 미가 7:6. 사본은 praedicaret로 읽고, Rigaltius가 praedicarit로 고쳤다. 31. 29.45 누가복음 12:56. 32. 29.47 누가복음 12:57. 에스겔의 것으로 인용된 말은 스가랴 8:16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에 가깝다(에스겔 45:9 참조). 33. 29.48 예레미야 22:3. iudicium을 ‘정의’, iustitia를 ‘공의’로 하여 개역개정의 표현을 따랐다. 34. 29.49 이사야 1:17과 5:7. ‘과부를 의롭다 하라’는 칠십인역 이사야 1:17(δικαιώσατε χήραν)과 같다. ‘소렉’(Sorech)은 칠십인역 이사야 5:2가 히브리어 ‘극상품 포도나무’를 음역한 말이다. 35. 29.52 누가복음 12:58-59. quadrans는 마태복음 5:26의 ‘고드란트’에 해당하고, 누가복음 12:59의 그리스어 본문은 ‘렙돈’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29 30 그는 안식일에 행한 치유에 관한 물음을 다시 어떻게 풀었는가?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 나귀나 소를 구유에서 풀어 물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조건에 따라 일함으로써 율법을 굳게 세웠지 폐하지 않았다. 율법은 모든 생명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생명을 위한 일이랴? 나는 어디서나 비유들이 들어맞기를 요구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자기 밭에 뿌렸다.” ‘사람’이라는 인물로는 누구를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그리스도다. 그는 비록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렸고, 아버지에게서 나라의 씨, 곧 복음의 말씀을 받아 밭에, 분명 이 세상에 뿌렸다. 이제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자기’ 밭에라고 말했고, 세상도 사람도 그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것이므로, 자기 밭에 뿌린 이는 창조주에게 속한 자로 드러난다. 혹은 그들이 이 올가미를 빠져나가려고 ‘사람’이라는 인물을 그리스도에게서 돌려, 나라의 씨를 받아 자기 마음의 밭에 뿌리는 사람으로 바꾼다 해도, 그 재료 자체가 창조주 말고 다른 이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다음 비유에 대해서는, 혹시 그것이 다른 신의 나라를 가리키지 않을까 정말 걱정스럽다. 그가 그 나라를 누룩에 비유했지, 창조주에게 더 친숙한 무교병에 비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측도 논거를 구걸하는 자들에게는 어울린다. 그러므로 나도 헛소리를 헛소리로 물리치겠다. 발효도 창조주의 나라에 어울린다고 말하겠다. 그 뒤에 게헨나의 화덕이나 풀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온화한 신의 나라가 심판의 열기마저 눈물겨운 혹독함으로 뒤따르는 그런 것<이라니>,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아직도 얼마나 자주 자신을 심판자로, 그리고 심판자 안에서 창조주로 드러내는가! 얼마나 자주 물리치며, 물리침으로써 정죄하는가! 여기서도 그렇다. 그는 말한다. “집주인이 일어나” - 무엇을 하려고? 이사야가 “그가 땅을 부수려고 일어날 때”라고 말한 그 일을 하려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 “문을 닫으면” - 분명 불의한 자들을 내쫓으려고 닫는 것이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그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그가 자기들의 거리에서 가르쳤다고 늘어놓으면, 그는 다시 [덧붙일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너희 모든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어디서인가? 물론 바깥이다. 문이 닫혀 쫓겨난 자들이 있을 곳이다. 그러므로 형벌로 내쫓는 일을 하는 이에게서 형벌도 올 것이다. “의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자신들은 밖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볼 때.” 누구에게 붙잡혀 있는가? 창조주에게라면, 그렇다면 안에서 의인들을 나라로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인가? 선한 신인가? 그렇다면 창조주는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그의 적수가 내쫓은 자들을 형벌에 처하려고 바깥에 붙잡아 두는 것인가? 무엇이든 하겠다면 그는 오히려 적수의 속을 뒤집으려고 그들을 자기에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 신도 불의한 자들을 내쫓으려 할 때, 창조주가 그들을 형벌에 붙잡아 둘 것을 분명히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지 않는데도 그들이 붙잡혀 있게 된다면, 그는 그들을 붙잡아 두는 이보다 못하며 마지못해 그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 자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니, 창조주의 악명을 만든 장본인인 그 자신이 창조주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한 신은 벌하고 다른 신은 풀어 준다고 믿는 이런 생각이 어떤 이치로도 성립하지 않는다면, 심판도 나라도 한 이의 것이다. 그리고 둘 다 한 이의 것인 이상, 그것은 심판도 하는 이, 곧 창조주의 것이다. 번역 주석 1. 30.1 누가복음 13:15. 13:10-17에서 안식일에 허리 굽은 여자를 고친 일을 두고 회당장이 항의하자 한 대답이다. ‘안식일에’(sabbati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은 sabbati, R은 sabbato로 읽는다. 2. 30.2 출애굽기 12:16. 무교절 첫날과 일곱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되 각 사람이 먹을 것만은 준비하라는 규정이다. omni animae의 anima는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을 뜻하므로 ‘생명’으로 옮겼다. 짐승의 생명을 위해서도 일이 허용된다면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는 논증이다. 3. 30.3 ‘알려져 있다’(recognoscor)는 사본 MR의 읽기로 Kroymann이 그대로 두었다. Latinius는 recognosco te, Engelbrecht는 te cognosco로 고쳐 ‘그대가 비유들의 부합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로 읽는다. 인용은 누가복음 13:18-19이며, 개역개정의 ‘채소밭’(hortus)을 여기서는 ‘밭’으로 옮겼다. 4. 30.4 ‘비록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라 하더라도’(licet Marcionis)는 마르키온의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로 불린다는 점을 겨냥한다. 비유의 ‘사람’(homo)을 그리스도로 읽는 근거가 이 칭호 안의 ‘사람’이라는 낱말이므로 filius hominis를 ‘인자’ 대신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그는’(qui)은 Kroymann이 사본 MR의 quia를 고친 것이다. ‘이 세상에’(isto)는 M과 R1의 읽기이고 R3은 suo(‘자기 세상에’)로 읽는다. 5. 30.5 ‘창조주에게 속한 자’(creatori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creator로 읽는다. 사본대로라면 ‘자기 밭에 뿌린 이는 창조주로 드러난다’가 된다. Engelbrecht는 ‘자기’(suo)가 본문에 속하는지 의심했다. ‘그의 것’(illius)은 마르키온의 신 쪽을 가리킨다. 6. 30.6 ‘사람’(hominis)과 ‘그리스도에게서 돌려’(a Christo)는 R3의 읽기이다. 사본 M과 R1은 각각 homines, personam Christi(R1은 in personam Christi)로 읽는다. ‘그 재료 자체’는 나라의 씨를 가리킨다. 7. 30.7 누가복음 13:20-21의 누룩 비유. ‘나라’(regnum)는 Kroymann이 사본의 regno를 고친 것이다. 30.7-30.8은 누룩이 무교병과 대비된다는 이유로 이 비유를 다른 신의 나라로 읽는 해석을 비꼬는 말이다. 8. 30.9 ‘게헨나의 화덕’(clibanus)은 말라기 4:1(칠십인역 κλίβανος, 개역개정 ‘용광로’)을, ‘풀무’(furnus)는 마태복음 13:42의 ‘풀무 불’을 떠올리게 한다. 누룩 반죽 뒤에 화덕이 오듯 나라 뒤에 심판이 온다는 반어적 대응이다. 9. 30.10 이 문장은 사본 MR에서는 조금 앞, 30.8의 ‘창조주에게’(creatori) 바로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이라니>(sit)는 Oehler가 보충한 말이다. 10. 30.11 ‘물리치며’(reicit)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iecit(‘내쫓았다’)로 읽는다. 11. 30.12 누가복음 13:25. 30.12-30.15의 줄표는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이다. 주문장은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으면 …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이고, 그 사이에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과 13:25-27의 인용이 끼어 있다. 12. 30.13 ‘그가 땅을 부수려고 일어날 때’는 이사야 2:19(2:21도 같다)의 칠십인역 형태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이다. 13. 30.14 누가복음 13:25-26. 누가복음의 ‘우리의 길거리에서’가 간접화법이라 ‘자기들의 거리에서’(in plateis eorum)로 되어 있다. [덧붙일 것이다](adiciet)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14. 30.15 누가복음 13:27-28. 개역개정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이다. 15. 30.16 인용은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있던 누가복음 13:28의 형태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인데, 마르키온의 본문에는 족장들과 예언자들 대신 ‘의인들’이 있었다. 에피파니우스, 『파나리온』 42, scholion 40도 이 변경을 전한다. ‘바깥이다. 문이 닫혀 … 곳이다. 그러므로’의 구두점은 Kroymann의 것이다. 16. 30.18 ‘거기서’(illic)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lluc로 읽는다. 17. 30.20 ‘창조주의 악명’(infamia creatoris)은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에게 씌우는 형벌하는 신이라는 오명이다. 선한 신이 불의한 자들의 형벌을 원한다면 그 오명의 원인이 선한 신 자신이 된다는 논증이다. ‘혹은’(aut)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an으로 읽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0 31 그는 점심이나 저녁에 어떤 사람들을 부르라고 명하는가? 그가 이사야를 통해 보여 준 그런 사람들이다. “네 빵을 굶주린 자에게 떼어 주어라. 그리고 거지들과 집 없는 자들을 네 집에 들여라.” 곧 이런 인정에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가 이 보답을 노리지 말라고 금하면서 그것을 부활 때에 다시 약속한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본보기다. 창조주는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좇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는다. 초대하는 이의 비유도 어느 쪽에 더 들어맞는지 따져 보라. “어떤 사람이 만찬을 베풀고 많은 사람을 불렀다.” 분명 만찬의 준비는 영원한 생명의 배부름을 예표한다. 먼저 나는 말한다. 낯선 자들, 아무 권리로도 연결되지 않은 자들은 보통 만찬에 초대받지 않으며, 집안사람들과 가까운 이들이 확실히 더 쉽게 초대받는다. 그러므로 초대한 것은 창조주의 일이다. 초대받은 자들은 아담을 통해서는 사람으로서, 조상들을 <통해서는> 유대인으로서 그에게 속했다. 본성으로도 특권으로도 그들이 속하지 않은 이의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만찬을 준비한 이가 손님들에게 사람을 보낸다면, 이 점에서도 만찬은 창조주의 것이다. 그는 손님들을 일깨우려고 사람을 보냈다. 손님들은 이미 앞서 조상들을 통해 부름을 받았고, 예언자들을 통해 일깨움을 받았다. 아무도 일깨우러 보내지 않았고 부르려고 앞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갑자기 내려와서, 알려지자마자 벌써 초대하고 초대하자마자 벌써 잔치에 들어오라고 강권하며 만찬 시각과 만찬 초대 시각을 같은 때로 만든 이의 만찬이 아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핑계를 댄다. 다른 신에게서 초대받았다면 그럴 만하다. 갑자기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그럴 만하지 않다면 갑자기 초대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면 창조주에게서 초대받은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바로 그때 그의 부름을 거절했다. 처음에는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앞에 갈 신들을 우리에게 만들어 달라.” 그 뒤로는 귀로 듣고도 듣지 않았다. 곧 하나님의 부름을 그렇게 대했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 비유에 아주 꼭 맞게 말한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러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모든 길로 걸을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초대다 -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 이것이 백성의 거절이다 - “오히려 자기 악한 마음으로 욕심낸 것들을 좇아 떠나갔다.” “밭을 샀다”, “소를 샀다”,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또 몰아붙인다.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너희에게 보냈다” - 이것이 손님들을 일깨우는 성령일 것이다 - “낮에도 동트기 전에도. 그러나 내 백성은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자기 목을 굳게 했다.” 이 일이 집주인에게 알려지자 그는 그때 격동했다. - 격동하기까지 했다니 잘된 일이다. 마르키온은 자기 신이 격동한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그는 나의 하나님이다. - 그는 도시의 광장과 골목에서 사람들을 보충하여 뽑으라고 명한다. 이것이 그가 다시 예레미야를 통해 말한 그 뜻인지 보자. “내가 이스라엘 집에 광야가 되었느냐, 혹은 버려져 갈지 않은 땅이 되었느냐?” - 곧, 내게 뽑아 들일 사람이 없거나 뽑아 들일 곳이 없느냐는 것이다. - “내 백성이 ‘우리는 당신에게 가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 같은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보냈다. 다음으로 자리가 넉넉히 남자 그는 길과 울타리에서도 사람들을 모아 오라고 명했다. 곧 이제 이방 민족들에게서 우리를 모으는 것이며, 분명 신명기에 나오는 그 질투로써 하는 일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얼굴을 돌리고 마지막에 그들에게 무엇이 있을지 보여 주겠다” - 곧 다른 이들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그들은 비뚤어진 세대요 믿음이 없는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 아닌 것으로 나를 질투하게 했고 자기 우상들로 나를 분노하게 했다. 나도 민족이 아닌 것으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할 것이다.” 곧 우리로써 그렇게 한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소망을 두고 탄식하지만, 주는 그들이 그 소망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처럼, 참외밭의 원두막처럼 버려졌다. 시온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마지막 초대마저 거절한 뒤의 일이다. 이 순서를 창조주의 경륜과 선포에 따라 되짚어 볼 때, 그 가운데 무엇이 저 신에게 들어맞을 수 있는가? 그의 순서도 경륜도 비유와 어우러지게 되어 있지 않고, 그는 모든 일을 단번에 해치웠다. 또 그의 첫 번째 부름은 무엇이고, 두 번째 단계의 일깨움은 무엇이겠는가? 먼저 어떤 이들이 핑계를 대고, 나중에 다른 이들이 모여들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는 도시에서도 울타리에서도 두 무리를 똑같이 초대하러 온다. 비유라는 거울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는 이전에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고 지금에야 막 다가가는 자들을 까다롭게 거절하는 자들로 심판할 수도 없다. 혹은 그가 그들이 앞으로 부름을 업신여길 것이라고 하여 심판한다면, 그들의 자리를 이방인들에게서 보충하는 일도 앞으로의 일로 예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아직 두 번째로 올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려고. 그리고 만일] 그러나 그는, 내 생각에, 여전히 손님들을 부르려는 이로서가 아니라 이미 자리에 앉히려는 이로서 올 것이다. 그동안 이 만찬의 부름을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의 하늘 잔치로 해석하는 그대는,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과 도성 자체에 대한 땅의 약속들도 창조주가 똑같이 영적인 것들의 예표로 삼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번역 주석 1. 31.1 누가복음 14:12-14. 2. 31.2 이사야 58:7. 개역개정은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이다.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은 누가복음 14:14의 말이다. ‘이런 인정’(humanitatis)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et humanitatis로 읽는다. 3. 31.3 ‘부활 때에 다시 약속한다’는 누가복음 14:14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를 가리킨다.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좇는 자들’은 이사야 1:23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에서 왔다. 4. 31.4 누가복음 14:16. 개역개정은 ‘큰 잔치’이지만 cena를 이 장에서는 일관되게 ‘만찬’으로 옮겼다. 31.4-31.27은 14:16-24의 비유를 차례로 다룬다. 5. 31.6 <통해서는>(per)은 Gelenius가 보충한 말이다. 6. 31.7 누가복음 14:17. ‘스스로 갑자기 내려와서’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앞선 준비 없이 티베리우스 치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마르키온의 주장(1권 19장)을 겨냥한다. 7. 31.9 출애굽기 32:1. Kroymann은 uocationem tunc, primo로 끊어 ‘그때 거절했다 … 처음에는 말했다’로 읽고, 통행본은 uocationem, tunc primo로 끊어 ‘그때 처음으로 말했다’로 읽는다. 8. 31.10 출애굽기 32:1. 개역개정은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이다. ‘귀로 듣고도 듣지 않았다’는 이사야 6:9를 떠올리게 한다. 9. 31.11 예레미야 7:23-24. ‘하나님’(deum)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주’)으로 읽는다. 10. 31.12 누가복음 14:18-20의 세 핑계이다. 개역개정은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나는 장가 들었으니”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핑계들을 예레미야 7:24의 ‘악한 마음으로 욕심낸 것들’의 내용으로 엮는다. 11. 31.13 예레미야 7:25-26. ‘낮에도 동트기 전에도’는 칠십인역 ἡμέρας καὶ ὄρθρου에 해당하고 개역개정은 “끊임없이 보내었으나”이다. 삽입구의 ‘이것’은 누가복음 14:17에서 손님들에게 보낸 종을 가리키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종을 예언자들을 통해 말한 성령으로 읽는다. 12. 31.14 누가복음 14:21 “집 주인이 노하여”. 31.14의 motus와 31.15의 moueri를 모두 ‘격동하다’로 옮겨, 마르키온의 신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맞선 말놀이를 살렸다. 줄표 사이의 말은 Kroymann이 표시한 삽입구이다. 13. 31.15 누가복음 14:21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보충하여 뽑다’(sublectio)는 빈자리를 채우려고 새 사람을 뽑는 일을 가리킨다. ‘나의 하나님’(meus)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믿는 하나님, 곧 감정을 지닌 창조주를 말한다. 14. 31.16 예레미야 2:31. 개역개정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칠십인역(γῆ κεχερσωμένη)을 따라 ‘버려져 갈지 않은 땅’으로 되어 있다. 15. 31.18 예레미야 2:31 끝부분. 개역개정은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이다. 사본은 uenimus로 읽고, Kroymann은 미래형 ueniemus일 가능성을 적었다.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보냈다’는 누가복음 14:21이다. 16. 31.19 누가복음 14:22-23. ‘자리가 넉넉히 남자’(loco abundante)는 14:22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를 가리킨다. 17. 31.20 신명기 32:20. 18. 31.21 신명기 32:21. <민족으로>(in natione)는 R3의 보충이다. ‘탄식하지만’(gemunt)은 Semler의 수정이고 사본 MR과 다른 편집본들은 gerunt로 읽어 ‘유대인들이 지니는 소망’이 된다. Latinius는 spem 대신 speciem으로 읽었다. ‘맛보지 못할 것’은 누가복음 14:24, ‘포도원의 망대 … 참외밭의 원두막’은 이사야 1:8이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는 M과 R1의 읽기이고 R3과 통행본은 in Christum으로 읽는다. 19. 31.22 ‘순서’(ordo)와 ‘경륜’(dispositio)은 Kroymann이 사본 MR의 ordinem, dispositionem을 고친 것이고, habet를 se habet(‘어떤 상태에 있다’)의 뜻으로 읽었다. ‘저 신에게’(illi)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llic으로 읽는다. 20. 31.24 ‘비유라는 거울’(speculum parabolae)은 비유가 그려 보이는 순서, 곧 먼저 부름받은 자들이 거절한 뒤에 다른 이들이 불려 오는 순서를 가리킨다. 21. 31.27 [ ] 안의 말은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이를 빼면 ‘물론 그는 아직 두 번째로 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 이미 자리에 앉히려는 이로서 올 것이다’로 이어진다. 22. 31.28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의 약속은 신명기 7:13, 요엘 2:19 등에 나온다. ‘도성 자체’는 회복될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1 32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누가 찾아 나서는가? 잃어버린 이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잃어버렸는가? 가지고 있던 이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의 주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람이 창조주 말고 다른 이의 소유가 아니라면, 사람이 속해 있던 이가 그를 가지고 있었고, 가지고 있던 이가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이가 찾아 나섰고, 찾아 나선 이가 찾아냈고, 찾아낸 이가 기뻐했다. 그러므로 두 비유의 논지는 양도 드라크마도, 곧 사람도 자기 것이 아닌 이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잃어버리지 않았고,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찾아 나서지 않았고, 찾아 나서지도 않았으니 찾아내지 않았고, 찾아내지 않았으니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인의 뉘우침, 곧 잃은 것을 되찾음을 두고 기뻐하는 일은, 오래전에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더 바란다고 공언한 이의 것이다. 번역 주석 1. 32.1 누가복음 15:4-10의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 2. 32.5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더 바란다’는 에스겔 18:23, 32; 33:11을 가리킨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두고 기뻐한다는 말은 누가복음 15:7, 10에 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2 33 한쪽은 노여움을 사고 다른 쪽은 두둔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그가 부정하는 두 주인이 누구인지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맘몬을 내세워 밝힌다. 그러므로 그가 맘몬을 누구로 이해하기를 바라는지는, 그대에게 해석자가 없다면 그 자신에게서 배울 수 있다. 실로 그는 청지기 직에서 물러나게 된 그 종이 주인의 채무자들의 증서를 줄여 주어 그들의 짐을 덜어 줌으로써 자기에게 도움이 되게 한 본보기를 따라, 세상의 것들로 우리를 위해 우정의 후원을 마련해 두라고 우리에게 권하면서, “그리고 나도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의 맘몬으로 너희를 위하여 친구를 사귀라”고 말한다. 곧 돈으로 사귀라는 것이며, 그 종도 돈으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모두 돈이 불의의 장본인이며 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탐욕이 이 돈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 말씀을 그들에게 겨누어 던졌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섬길 수 없다.” 그러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 물론 그들은 맘몬이 돈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도 맘몬을 창조주로 이해해야 한다고, 또 그리스도가 그들을 창조주를 섬기는 종살이에서 불러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제 어떠한가? 오히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가 한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배우라. 그는 두 주인, 곧 하나님과 맘몬, 창조주와 돈을 일컬었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분명 그들이 섬기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이고, 맘몬은 그들이 오히려 더 매여 있던 맘몬이다. 만일 그 자신이 자신을 다른 이로 내세웠다면, 그는 두 주인이 아니라 세 주인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 창조주도 하나님이므로 주이고, 분명 맘몬보다 더 주이며, 더 주인 만큼 사람이 더 받들어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 맘몬을 주라고 부르고 그것을 참된 주와 나란히 놓은 이가 정작 그 주, 곧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이겠는가? 아니면 그가 오직 자기 자신과 맘몬만은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부정했다면, 창조주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창조주는 섬겨야 한다고 인정한 것인가? 이처럼 그는 한 하나님을 내세우는데, 만일 그 자신이 다른 이였다면 창조주도 함께 일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컬은 것은 창조주였고, 그는 창조주를 [주로] 다른 이 없이 세웠다[, 다른 신 없이는 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음 말씀이 어떤 뜻으로 말해졌는지도 환히 드러날 것이다. “<만일> 너희가 불의한 맘몬에 충성하지 않았으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곧 불의한 돈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마르키온도 정의롭다고 하는 창조주에게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말씀도 그러하다.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았으면, 누가 내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불의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남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고유한 하나님인 창조주가 어떻게 바리새인들에게 남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들이 창조주가 아니라 맘몬에게 해당한다면, “누가 너희에게 더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누가 내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그가 <낯선> 이로서 다른 신의 은혜에 관해 말했을 수는 없다. 실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였을 경우는, 그가 그들을 맘몬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불충한 자들로 지목하면서 창조주를 언급하여, 창조주에게 불충한 자들에게 자기의 진리를 맡기지 않을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자신을 구별해 드러냈을 때일 것이다. † 그때에야 그것이 다른 신의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만일 그것이 다루어지는 사안에서 분리되도록 제시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 또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상의 소망을 사람에게 두었다면, 그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꾸짖은 바로 그 뜻으로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비참하다.” 또 그가 이렇게 덧붙인다면,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안다”, 그는 그 하나님, <곧> 자신을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 등불이라고 선언한 하나님의 권능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가 교만을 건드려 “사람들 가운데서 높여진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는 이사야를 눈앞에 세우는 것이다. “만군의 주의 날이 모든 모욕하는 자와 교만한 자, 모든 높은 자와 높아진 자에게 이를 것이니, 그들이 낮아질 것이다.” 이제 나는 마르키온의 신이 왜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숨어 있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짐작하건대 그는 이 모든 것을 창조주에게서 배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요한의 시대까지 배웠고, 그렇게 하여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러 나서서 말했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이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전해진다.” 마치 우리도 요한이 옛것과 새것 사이에 세워진 어떤 경계, 곧 거기까지 유대교가 그치고 거기서부터 그리스도교가 시작되는 경계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율법과 예언자들의 멈춤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있는 복음의 시작이 다른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다.] 왜냐하면 옛것들은 지나가고 새것들이 뒤를 이을 것이 창조주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했다면, 또 요한이 복음을 이끌어 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공포할 주의 길의 선구자이자 예비자로 드러난다면, 요한이 왔다는 이 사실로부터 이미, 요한을 선구자로서 뒤따를 그 이가 바로 그리스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을 사이에 두고 옛것들이 그치고 새것들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이 창조주의 경륜에서 나온 일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든> 더 잘 증명되도록 ** 율법과 예언자들이 요한에게서 저물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떠오른 사실에서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러하듯, 주의 말씀의 한 획보다 더 빨리 없어지라 - 이사야가 말하듯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 때문이다 -. 실로 이미 그때 이사야서에서 그리스도, 곧 창조주의 말씀이자 영이 요한을 선포했으니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주의 길을 예비하라” - 요한은 이 일을 위해, 곧 그때부터 율법과 예언자들의 질서가 폐지가 아니라 성취를 통해 그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에 의해 전해지도록 올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소들이 자기 말씀보다 더 쉽게 지나갈 것이라고 덧붙여, 요한에 관해 말했던 이것도 지나가 버리지 않았음을 확증했다. 번역 주석 1. 33.1 누가복음 16:13. 개역개정의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를 테르툴리아누스는 offendi(노여움을 사다)와 defendi(두둔을 받다)의 대구로 요약한다. 2. 33.2 mamona는 개역개정에서 ‘재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이 낱말이 창조주가 아니라 돈을 가리킨다는 것을 논증하므로 음역 ‘맘몬’을 유지했다. 사본 M은 mamona, R과 이전 판본들은 mammona로 쓴다. 3. 33.3 누가복음 16:1-9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가리킨다. ‘증서를 줄여 주어’는 Latinius의 추정 diminutis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diminuit로 읽는다. ab actu summotus의 actus는 청지기의 관리 직무를 뜻한다. 4. 33.4 누가복음 16:9. 개역개정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로 옮긴다. 5. 33.6 누가복음 16:13, 16:14 참조. ammentare는 투창에 가죽끈(amentum)을 매어 던진다는 뜻의 동사여서 ‘겨누어 던졌다’로 옮겼다. 6. 33.7 누가복음 16:14. Kroymann은 dictum 뒤에 쉼표를 두어 ne quis existimet를 앞 문장에 잇지만 이전 판본들은 마침표를 두고 새 문장으로 읽는다. 번역은 이 절을 금지의 뜻으로 독립시켰다. 7. 33.11 alium se ageret는 그리스도가 창조주와 다른 신에게 속한 이로 행세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더 받들어 섬겨야’는 Kroymann의 추정 homini obseruandus를 따른 것이며, MR1은 non obseruandus, R3는 obseruandus로 읽는다. 줄표로 묶은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의 것이다. 8. 33.12 ‘참된 주와 나란히 놓은’과 ‘창조주 하나님’은 Kroymann의 추정 cum domino iunxerat uero와 deum creatorem을 따른 것이다. 사본 MR은 deo iunxerat, uere ipsorum과 de creatore로 읽는다. Kroymann은 ‘참된 주’를 마르키온파의 가정에서 말하는 마르키온의 신으로 해석한다. 9. 33.14 Kroymann은 dominum과 deo non을 삽입으로 보아 괄호로 묶었다. 이 둘을 빼면 “그는 창조주를 다른 이 없이 세웠다”가 되고, 전승된 본문 quem dominum sine alio deo non posuit는 “그를 다른 신 없이는 주로 세우지 않았다”로 읽혀 논지와 어긋난다. 10. 33.15 누가복음 16:11. <만일>은 Kroymann이 보충한 si이며, Pamelius는 sit 대신 si로 읽었다. 옛 라틴어 본문의 credere는 ‘믿다’가 아니라 ‘맡기다’의 뜻이다. 11. 33.17 누가복음 16:12. 개역개정은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meum(내 것)으로 읽으며, 일부 그리스어 사본도 ‘내 것’으로 읽는다. 12. 33.19 alienus는 ‘남의 것’과 ‘낯선 이(남)’를 모두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6:12의 ‘남의 것’을 마르키온의 해석처럼 창조주에게 적용하면 유대인들의 고유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이 된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13. 33.19 ‘그러나 어떻게’는 R3의 autem quomodo를 따른 것이며, MR1은 alio modo로 읽는다. M에는 후대의 손이 여백에 autem을 더했다. 14. 33.21 <낯선>은 Kroymann이 alius를 alius로 고친 데 따른 것으로, 다른 신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본 MR은 alius(다른 이)로 읽는다. 15. 33.22 ‘자신을 구별해 드러냈을’은 Kroymann의 추정 distinctione se fecisset을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distinctiones fecisset로 읽는다. † 이하 quoniam tunc alterius uideri potest, si non ad hoc proponatur, ut a re, de qua agitur, separetur는 Kroymann도 뜻을 풀 수 없다고 밝힌 부분이다. 번역은 전승된 낱말을 그대로 옮겼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quoniam 대신 quomodo, Engelbrecht는 quomodo autem으로 읽으며, Kroymann은 si non ad hoc을 si nomen adhuc로 고쳐 ‘그 이름이 여전히 다루어지는 사안에서 분리되도록 제시될 때’로 읽기를 제안한다. 16. 33.23 누가복음 16:15. iustificantes se는 개역개정의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에 해당하며 ‘의롭다고 하는’으로 옮겼다. 17. 33.24 예레미야 17:5. 개역개정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miser(비참하다)로 읽는다. 18. 33.25 누가복음 16:15. ‘등불’은 잠언 20:27(“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에서,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은 시편 7:9, 예레미야 11:20, 요한계시록 2:23에서 온 표현이다. 잠언에서 등불은 사람의 영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하나님 자신의 말로 읽는다. <곧>은 Pamelius가 보충한 qui이며, M은 pronuntiarat, R과 이전 판본들은 pronuntiabat로 읽는다. 19. 33.26 누가복음 16:15 후반. 개역개정은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로 옮긴다. 20. 33.27 이사야 2:12. 개역개정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로 옮긴다. 21. 33.29 마르키온의 신이 창조주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점을 들어, 그 신이 오래 숨어 있다가 창조주에게서 다 배운 뒤에야 나타났다고 비꼬는 반어이다. 22. 33.30 누가복음 16:16.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로 옮긴다. 인용은 앞부분에서 끝난다. 23. 33.31 [그리스도 자신이다.]는 Kroymann이 앞의 ‘하나님의 나라’에 붙은 난외 주석이 본문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 괄호로 묶은 말이다. uirtus는 ‘능력’으로 옮겨 potestas(권능)와 구별했다.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이사야 40:3과 말라기 3:1을 가리킨다. 24. 33.32 unde의 뒤 음절은 Kroymann의 보충이며 ‘어디<에서든>’으로 옮겼다. Kroymann은 probetur와 quam 사이에 탈락을 표시했다. 남은 본문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요한에게서 저물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떠오른 사실보다 더 잘 증명되는 곳은 없다’는 뜻의 비교로 보인다. occasus와 ortus는 해가 지고 뜨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5. 33.33 누가복음 16:17. 개역개정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다루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율법의 한 획’ 대신 ‘주의 말씀들의 한 획’으로 읽는다. 33.35의 ‘자기 말씀보다’도 같은 본문을 가리킨다. 이사야 인용은 40:8이다. 26. 33.34 이사야 40:3. 개역개정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누가복음 3:4의 그리스어 구문을 따라 ‘광야에서’를 ‘외치는 자’에 붙인다.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sermo(말씀)이자 spiritus(영)라 부르며 예언자의 말을 그리스도의 말로 본다. 27. 33.35 elementa(원소들)는 앞에서 인용한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 ‘폐지가 아니라 성취를 통해’는 마태복음 5:17을 반영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3 34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혼을 금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을 범할 것이요, <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마찬가지로 간음하는 자이다.’ 이렇게 해서도 이혼을 금하려고 그는 버림받은 여자의 혼인을 불법으로 만든다. 반면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혼을 허락한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맞아 그와 함께 살다가, 그 여자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어 그 여자가 그의 눈에 은혜를 얻지 못하게 되면, 그는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여자의 손에 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다.’ 그대는 율법과 복음, 모세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보지 않는가?” 물론 보일 것이다. 그대는 같은 진리와 같은 그리스도에 속한 저 복음서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이혼을 금하면서 이혼에 관한 물음 자체에 답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이혼 증서를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곧 남자와 여자를 만든 이가 “둘이 한 육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 그는 이 대답으로 모세의 규정을 자기 것으로서 보호했고, 창조주의 제도를 창조주 자신의 그리스도로서 바로 세웠다. 그러나 그대가 받아들인 것들로부터 논박되어야 하는 만큼, 나는 마치 나의 그리스도가 <그대의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대에게 맞서겠다. 그 그리스도 역시 이혼을 금하면서,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결합한 이의 맞수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모세의 규정을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변호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보라, 이 그리스도가 모세와 창조주에게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그대의 그리스도라고 하자. 다만 내가 그것이 반대가 아님을 보여 준다면 그는 나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조건에서 그렇게 하자. 나는 그가 지금 조건을 붙여 이혼을 금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누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려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이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을 범한 것이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마찬가지로 간음하는 자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이 여자는, 다른 여자를 맞으려고 버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바로 그 이유로 버림받은 여자이다. 불법으로 버림받은 여자를 맞아들이는 자는 버림받지 않은 여자를 맞아들이는 셈이므로 간음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정당하게 해소되지 않은 혼인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인이 유지되는 동안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은 간음이다. 그러므로 그가 조건을 붙여 아내를 버리는 것을 금했다면 전적으로 금한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금하지 않은 것은 그가 금한 이유가 없어지는 다른 경우에는 허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모세에게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모세의 계명을 어떤 경우에는 지킨다. 확증한다고까지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혹은 그대가 그리스도가 이혼을 허락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그대는 남자와 여자를 결합하지도 않고, 다른 곳에서 결합한 사람들은 그들이 혼인의 열매에 맞서, 곧 창조주 자신에게 맞서 서로 맹세하지 않는 한 세례와 성찬의 성례에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혼인을 갈라놓는가? 적어도, 아내가 간음을 범하면 그대 쪽에서 남편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살 것인가?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사도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창녀와 결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혼의 정당함은 그리스도도 옹호자로 가진다. 이제 여기서, 그리스도와 같은 명목으로 이혼을 내세우는 모세가 그리스도에게 확증된다. “여자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마태의 복음서에서도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음한 이유 없이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하여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자로 판정된다. 그 밖에, 간음의 이유가 아니면 창조주도 물론 자신이 결합한 것을 나누지 않는다. 같은 모세가 다른 곳에서, 여자를 강제로 범하여 혼인하게 된 자는 평생 아내를 버릴 수 없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강요된 혼인도 유지된다면, 합의로 자원한 혼인은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예언의 권위에서 나온 말과 같이, “너는 네 젊어서 맞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러므로 그대는 그리스도가 이혼을 허락하는 데에서도 금하는 데에서도 어디서나 스스로 창조주의 발자취를 밟아 가는 것을 본다. 또한 그대가 어디로 숨으려 하든, 그대는 그가 혼인을 돌보는 자임을 본다. 그는 이혼을 금함으로써 혼인이 갈라지기를 원하지 않고, 그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함으로써 혼인이 오점을 지닌 채 유지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대의 그리스도도 결합한 사람들을 결합하지 않는 그대는 부끄러워하라. 그대의 그리스도도 나누기를 원했던 그 사유도 없이 나누는 그대는 또한 부끄러워하라. 이제 나는 주가 이 말씀을 어디에서 끌어냈는지, 또 어디로 향하게 했는지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가 갑자기 끼워 넣은 이혼의 언급으로 모세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그 언급은 갑자기 끼워 넣은 것도 아니며, 바로 그 요한에 대한 언급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헤롯이 율법을 거슬러, 죽은 자기 형제의 아내, 곧 그 여자에게서 딸을 둔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였다고 꾸짖었기 때문에 같은 헤롯에게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는 죽임까지 당했다. 율법은 형제가 자식 없이 죽은 경우가 아니면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 경우에는 오히려 그의 형제를 통하여 그 자신의 갈빗대에서 그에게 후손을 이어 주라고 명령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요한이 언급되자, 주는 물론 그의 그러한 죽음에 격분하여 불법 혼인과 간음의 모습들을 헤롯에게 화살처럼 던졌다.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자라고 선포하여 헤롯의 불경을 더 무겁게 했다. 헤롯은 죽음 못지않게 이혼으로도 남편에게서 놓인 여자를 맞아들였고, 그 형제가 그 여자에게서 딸을 두었으므로 그 명목으로도 불법이었으며, 율법의 충동이 아니라 정욕의 충동으로 그렇게 했고, 그 때문에 율법의 옹호자인 예언자까지 죽였던 것이다. 내가 이것을 논한 것은 음부에서 고통받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는 가난한 자에 대한 이어지는 논증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실로 그 이야기도 성경의 표면으로 보면 갑자기 제시되었지만, 의미의 의도로 보면 그것 역시 학대받은 요한과 잘못 혼인하여 꾸짖음을 받은 헤롯에 대한 언급에 이어져 있다.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의 결말, 곧 헤롯의 고통과 요한의 위로를 그려 보여 주어, 헤롯이 이제 이 말을 듣게 한다. “그들에게는 거기에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그러나 마르키온은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간다. 곧 그는 고통의 보상이든 위로의 보상이든 창조주의 두 보상을 모두 음부에 정해 두고, 그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순종한 자들에게 놓인 것이라고 하며, 그리스도와 자기 신의 보상은 하늘의 품과 항구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도 답할 것이다. 성경 자체가,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품을 음부에 배정하는 그의 눈을 논박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구렁이 이 영역들 사이에 가로놓여 양쪽에서 건너가는 것을 막는다고도 말한다. 또 부자가 위쪽을 향하여, 높은 곳의 먼 거리에서, 높음과 깊음 사이의 저 엄청난 간격을 가로질러 본 것이 아니라면, 그는 눈을 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것도 멀리서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시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상의 구획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자녀들, 곧 이방인 가운데서 나왔더라도 아브라함의 호적에 올려질 자녀들의 영혼을 받아들이기 위한 곳이다. 그는 곧 많은 민족의 아버지이다. 그 영혼들은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과 같은 믿음으로,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도 않고 할례의 표지 안에 있지도 않은 채 그렇게 올려진다. 그러므로 그 영역, 곧 아브라함의 품은 하늘에 있지는 않으나 음부보다는 높으며, 그동안 의인들의 영혼에게 위로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 이는 만물의 완성이 모든 사람의 부활을 보상의 충만함으로 매듭지을 때까지이다. 그때에는 하늘의 약속이 나타날 것이다. 마르키온은 이 약속이 창조주가 공포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자기 <신>에게 돌리지만, 그리스도는 호세아에 따라 이 약속을 향해 하늘로 오르는 자기 길을, 물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세운다. 그곳에는 영원한 처소도 있는데, 이사야는 그 처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희에게 영원한 처소를 알려 주겠느냐?” 물론 그리스도 말고 누구이겠는가? 그는 의 가운데 걸으며 바른 길을 말하고 불의와 불법을 미워한다. 영원한 처소가 약속되고 하늘로 오르는 길이 창조주에 의해 세워지며,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될 것이라고도 약속한다면, 물론 이는 하늘의 약속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그대로 두면서, 신실한 영혼들의 어떤 일시적인 거처, 곧 이미 장래의 형상이 그려지고 두 심판에 대한 어떤 환한 전망이 미리 보이는 거처를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찌 성립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또한 너희 이단자들에게, 너희가 살아 있는 동안 ** 모세와 예언자들을 경고한다. 그들은 창조주를 한 하나님으로, 그의 그리스도를 한 그리스도로 선포하며, 형벌과 영원한 구원이라는 두 심판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유일한 하나님에게 놓여 있다고 선포한다. “아니다.” 그는 말한다. “우리 신이 하늘에서 내린 훈계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했다. ‘그의 말을 들으라.’” 마땅한 일이다. 그때 사도들은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이다. 베드로도, 그때까지 오직 그들만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믿기 전에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믿음은 하늘의 음성으로 확증받을 만했다. 그 음성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했는데, 그들은 이미 그를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좋은 것의 복음을 전하며 영원한 처소를 알려 주는 이로, 그들에게 하늘로 오르는 자기 길을 세워 주는 이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반면 음부에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는 거기에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이는 전혀 믿지 않았던 자들이나, 죽은 뒤에 재물의 교만과 쾌락의 영광에 형벌이 있다고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것을 그렇게까지는 믿지 않았던 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그 형벌은 권세 있는 자들을 왕좌에서 내리치고 가난한 자들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는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이렇게 두 선고의 차이가 창조주에게 들어맞으므로, 신성들 사이의 거리를 세울 것이 아니라 사안들 자체 사이의 거리를 세워야 할 것이다. 번역 주석 1. 34.1 누가복음 16:18.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옛 라틴어 본문은 둘째 구절을 “마찬가지로 간음하는 자이다”(aeque adulter est)로 쓴다. 첫 구절의 committet(MR의 미래형)는 Oehler가 committit, Pamelius가 commisit로 고쳤다. <또>는 Kroymann이 보충한 et이다. “이렇게 해서도 … 불법으로 만든다”는 Engelbrecht가 삽입구로 표시한 대목이다. 2. 34.2 신명기 24:1. 34.1-34.3 전체는 마르키온파 반론자의 말이다. 3. 34.3 “저 복음서”는 마태복음이다. 마르키온은 누가복음을 줄인 자기 복음서만 받아들였으므로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마태복음 19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4. 34.4 마태복음 19:8. 5. 34.5 마태복음 19:4-5; 창세기 1:27; 2:24. 6. 34.6 마태복음 19:6. 사본에 없는 non은 Engelbrecht가 보충했고, 그 부정을 <나누지 말라>로 옮겼다. 7. 34.7 <그대의 그리스도인>은 Kroymann이 보충한 tuus이다. Engelbrecht는 ac si를 삭제하고 meus Christus nonne로 읽자고 제안했다. ‘맞수’는 Kroymann의 추정 parem(그는 aduersarium의 뜻으로 설명한다)을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patrem, Latinius는 gestans 대신 testans로 읽는다. 사본대로 읽으면 ‘남자와 여자를 결합한 이의 아버지 역할을 지니면서도’가 된다. 8. 34.10 누가복음 16:18을 다시 인용한다. 여기서는 첫 동사가 완료형 commisit이다. 9. 34.12 <그런데>는 Kroymann이 보충한 autem이다. Engelbrecht는 manente-est(“혼인이 … 간음이다”)를 삭제하려 했다. alias ubi(“다른 경우에는”)는 Rigaltius의 교정이다. 10. 34.13 et iam(“그러므로 이제”)은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etiam이다. 11. 34.14 [아니라고]는 R3(Rhenanus 제3판)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non이다. 이 non을 살리면 이중 부정이 되어 문맥과 맞지 않는다. 마르키온파가 혼인한 사람들에게 금욕을 서약하게 한 뒤에야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은 1권 29장에서도 다룬다. sacramentum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의식을 가리키므로 ‘성례’로 옮겼다. 12. 34.15 faciet는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facit이다. 13. 34.16 고린도전서 6:15. 마르키온도 바울 서신을 받아들였으므로 ‘그대의 사도’라고 부른다. <안다>는 Ursinus가 보충한 scis이다. 14. 34.17 iustitia diuortii는 이혼이 정당하게 허용되는 근거를 뜻하므로 ‘정의’ 대신 ‘정당함’으로 옮겼다. ‘내세우는’은 Kroymann의 교정 perhibens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prohibens(‘금하는’)이다. 15. 34.18 신명기 24:1. 16. 34.19 마태복음 5:32. 개역개정은 ‘음행한 이유 없이’로 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causa adulterii(간음의 이유)이다. 17. 34.20 atque ita는 사본 M의 읽기이며, R3과 대부분의 판본은 aeque(‘마찬가지로’)로 읽는다. 18. 34.21 신명기 22:28-29. feceri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fecerat이다. 19. 34.23 말라기 2:15. 개역개정은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이다. Kroymann은 이 인용문이 앞 문장과 문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아 탈락이 있거나 후대 삽입일 가능성을 제기했고, Engelbrecht는 앞 문장과 묶어 ‘예언의 권위에서도 … 버리지 말라고 하듯이’라는 의문문의 일부로 읽자고 했다. 번역은 전해진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20. 34.24 quoquo(‘어디로 … 하든’)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quoque이다. ‘오점’은 R3의 macula를 따른 것이며, MR1은 masculo이다. 21. 34.27 누가복음 16:16-18. 마르키온의 복음서에서도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까지라는 말(16:16)과 율법의 한 획에 관한 말(16:17)에 이어 이혼에 관한 말씀(16:18)이 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순서를 근거로 이혼 말씀이 요한 언급에 이어져 있다고 본다. eum non spectasse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eadem expectasse이다. 22. 34.28 마태복음 14:3-10; 누가복음 3:19-20; 신명기 25:5-6(형사취수). ‘자식 없이’는 R3의 inliberis를 따른 것이며, MR1은 illecebris이다. ‘그 자신의 갈빗대’는 창세기 2:21-22를 따라 죽은 형제의 아내를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 죽은 것으로 서술하지만, 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5.4)는 헤로디아가 살아 있는 남편과 갈라선 뒤 헤롯 안티파스와 혼인했다고 전한다. 23. 34.29 누가복음 16:18. ‘물론 그의 그러한 죽음에 격분하여’는 Kroymann의 교정 eo utique succensus exitu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et utique successus exitus이다. ‘죽음 못지않게 이혼으로도’는 Engelbrecht가 어순을 바꾼 repudio quam morte를 따른 것이며, 사본 MR은 morte quam repudio(‘이혼 못지않게 죽음으로도’)이다. figuras는 유형론적 예표가 아니라 헤롯을 겨냥한 말의 형상을 뜻하므로 ‘모습들’로 옮겼다. 24. 34.30 누가복음 16:19-31. inferi는 개역개정 누가복음 16:23의 표현에 맞추어 ‘음부’로 옮겼다. 25. 34.31 refrigerium은 개역개정 누가복음 16:25의 ‘위로’에 맞추어 옮겼다. ‘잘못 혼인하여’는 R3 난외의 maritati를 따른 것이며, MR은 meritati이다. 26. 34.32 누가복음 16:29. 개역개정은 ‘선지자들’이다. 27. 34.33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보상과 형벌을 모두 음부 안에 두고, 자기 신을 믿는 자들의 보상만 하늘에 둔다. 아브라함의 품은 이 해석에서 음부 안의 장소가 된다. 28. 34.34 <대해서>는 Kroymann이 보충한 ad이다. qui는 Engelbrecht의 교정이며, 사본 MR은 quae이다. quae로 읽으면 ‘음부와 관련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브라함의 품을 따로 구별하는 성경 자체가 그의 눈을 논박한다’가 된다. 29. 34.35 누가복음 16:26. ‘그’는 비유 속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이다. 30. 34.36 누가복음 16:23. 31. 34.37 엘리시움(Elysium)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복된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저승의 낙원이다. 창세기 17:4; 로마서 4:3, 11-13, 17. [그리고]는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et이다. 32. 34.38 Kroymann은 iustorum 뒤에 contendimus(‘우리는 주장한다’) 같은 주동사가 빠졌다고 보아 탈락 표시를 했다. ‘제공하는’은 Kroymann의 교정 praebere를 따른 것이며, MR1은 praeterea, R3과 이전 판본은 praebituram이다. <신>은 Kroymann이 보충한 deo이며, Ciacconius는 Christo를 보충했다. ‘하늘로 오르는 자기 길을 세운다’는 구절은 칠십인역 아모스 9:6에 나오며, 사본은 호세아(Osee)라고 하지만 Pamelius는 아모스(Amos)로 고쳤다. 33. 34.39 이사야 33:14-15.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누가 너희에게 영원한 처소를 알려 주겠느냐’로 읽는다. 개역개정 33:14는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이다. 33:15의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를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34. 34.40 창세기 22:17; 15:5. candida quaedam은 ‘밝은 어떤 것’이라는 뜻이어서 두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밝은 윤곽으로 해석하여 ‘환한 전망’으로 옮겼다. ac는 R의 읽기이며 MF는 ad, quaedam은 R의 읽기이며 MF는 quadam이다. 35. 34.41 dum in uita estis 뒤의 탈락 자리에는 문맥상 ‘들으라고’(audire)와 같은 동사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6:29의 ‘그들의 말을 들으라’를 이단자들에게 적용하는 문장이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은 신명기 32:39; 사무엘상 2:6이다. 36. 34.42 마르키온파의 반론이다. monella는 ‘훈계’를 뜻하는 드문 낱말이다. 37. 34.43 누가복음 9:35(변화산의 음성). 38. 34.44 누가복음 9:20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한 형태는 마가복음 8:29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와 같다. 39. 34.45 이사야 52:7; 로마서 10:15. ‘영원한 처소’는 34.39의 이사야 33:14를 다시 가리킨다. 40. 34.46 아모스 9:6을 다시 가리킨다(34.38 참조). 34.45의 분사구가 이 단위까지 이어진다. 41. 34.47 누가복음 16:29. 42. 34.48 누가복음 1:52; 사무엘상 2:8; 시편 113:7. dynastas는 그리스어에서 온 낱말로 ‘권세 있는 자들’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4 35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실족하게 하는 일을 일으키는 자에게 “화”를 말한다. 그런 자는 저 작은 자들, 곧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거나 목에 맷돌을 매달고 깊은 곳에 던져졌더라면 나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형벌로 위협하는지 헤아려 보라. 그의 제자들의 실족을 다른 이가 보복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판관을 알아보고, 또 창조주가 예전에 말했던 바로 그 애정으로 자기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해 선언하는 이를 알아보라. “너희를 건드리는 자는 내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같은 이에게서 같은 생각이 나온다. 그는 죄짓는 형제를 꾸짖으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미움 때문에 형제가 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거나, 사람을 차별하여 그를 봐주기 때문이다. 그대에게는 레위기가 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이웃에는 물론 형제도 포함된다. “그러면 너는 그로 말미암아 죄를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길에서 헤매는 형제의 가축을 만나거든 못 본 체하여 형제에게 돌려보내지 않는 일을 금하는 이가 이렇게 가르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하물며 형제 자신을 그 자신에게 돌려놓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그는 그대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라고,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한다. 분명 적다. 창조주에게는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한계를 정하지도 않고 끝없이 이렇게 선언한다. “네 형제의 악의를 기억하지 말라.” 그리고 그는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만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이에게도 베풀라고 명령한다. 그는 그대가 받은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병 환자에 관한 율법이 그 병의 여러 형태와 대제사장의 검사에 관해 얼마나 깊은 해석을 담고 있는지는 우리가 알 일이다. 마르키온이 할 일은 율법의 까다로움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여기서도 그리스도를 율법의 경쟁자로 주장하려 한다. 그리스도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칠 때에도 율법의 정해진 의식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만 하고, 이제는 손을 대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리 없는 권능과 뜻만으로 길을 가는 도중에 그들을 깨끗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질병과 장애를 고치는 이로 한번 전해지고 그 결과로 입증된 뒤에도 치유의 방식을 다시 따져야 하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주가 율법에서 정한 것과 다르게 무엇을 행했다고 해서 그를 율법 앞으로 불러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는 분명 자기 자신을 통해서나 아들을 통해서 일할 때와 자기 종인 예언자들<을 통해> 일할 때 다르게 일한다. 특히 능력과 권능의 증거들이 그러하다. 이 증거들은 그 자신의 것이므로 더 분명하고 더 강력하며, 따라서 대리자들이 행한 것과 다른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미 앞선 논증의 다른 곳에서 말했다. 이제 그가 앞서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았으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말고는 아무도 깨끗하게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숫자 또한 결코 두 신을 구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한 사람을 고친 창조주를 무너뜨리고 열 사람을 깨끗하게 한 이를 더 높이는 근거도 되지 못한다. 사실 예전에 한 사람도 고친 적이 없는 저 신이 열 사람을 고치기보다는, 한 사람을 고친 이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고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오히려 그는 바로 이 선언으로 이스라엘의 불신 또는 교만을 친다. 그곳에 나병 환자가 많았고 예언자도 없지 않았는데,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아무도 예언자 안에서 일하는 하나님에게 달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참된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율법의 비밀에 따라 그들을 검사했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가 사람의 얼룩을 참으로 가려내고 씻어 내는 이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 드러나 있던 것도 명령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들을 미리 깨끗하게 할 작정이었다면 왜 그렇게 했는가? 아니면 율법을 조롱하는 자처럼, 길에서 고침받은 이들을 통해 율법이 제사장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님을 보이려 한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가 그토록 변덕스러운 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볼 것이다] 알아서 볼 일이다. 오히려 더 합당하고 믿음에 더 맞는 해석을 해야 한다. 그들이 고침을 받은 것은, 율법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에게서 치유를 얻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전의 나병 환자에게는 이런 명령을 하지 않았는가? 엘리사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그런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창조주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충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여기서 더 깊은 것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 이유도 배우라. 이 일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일어났고, 나병 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곳 출신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사마리아는 아홉 지파에서 비롯된 저 분열을 안고 있었다. 이 지파들은 예언자 아히야를 통해 갈라져 나왔고, 여로보암이 이들을 사마리아에 자리 잡게 했다. 게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른 점에서도 늘 조상들의 산과 우물을 내세우며 스스로 만족했다. 요한복음에서 저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가에서 주와 대화하며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네가 더 크냐?” 등등. 그리고 다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이사야를 통해서도 사마리아 산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화”를 말했던 그가 이제 스스로 기꺼이 사마리아를 회복시키면서, 일부러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한다. - 제사장들은 물론 성전이 있는 곳에만 있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을 유대인 아래 둔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사마리아 사람이라 해도 그렇다. 약속 전체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예루살렘에 제사장들과 성전과 종교의 근원이 있고, 우물이 아니라 구원의 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율법은 예루살렘에서 완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이제 율법의 절차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그들을 고쳤다. 그러므로 그는 깨끗하게 된 열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저 사마리아 사람 한 명에게 놀라면서도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써 이미 충분히 드렸기 때문이다. 주도 율법을 이렇게 해석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어느 신에게 감사를 드렸는가? 이스라엘 사람조차 그때까지 다른 신을 배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예전에 그리스도에게 고침받은 모든 이가 감사를 드린 그 하나님 말고 다른 누구에게 드렸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 말을 들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전능한 하나님에게 드릴 참된 제물, 곧 감사를 참된 성전에서 그 하나님의 참된 대제사장 그리스도 앞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다른 신의 나라에 관해 그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주에게 물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가 아직 다른 신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주가 질문받은 그 나라가 아닌 다른 이의 나라에 관해 대답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고 말하지도 않는다.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희 안에 있다’를 이렇게, 곧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듣는다면, 행한다면 너희 손에, 너희 권능 안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계명 안에 있다면, 우리 나름의 안티테시스에 따라 모세를 맞세워 보라. 그러면 생각은 하나다. 그는 말한다. “계명은 높지 않고 너에게서 멀지도 않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 않으니, 너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우리가 듣고 그것을 행하게 하겠는가?’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으니, 너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누가 바다를 건너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우리가 듣고 그것을 행하게 하겠는가?’ 그 말씀은 너에게 가까이, 네 입에, 네 마음에, 네 손에 있어서 너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단의 대담함이 주가 그들에게 질문받은 창조주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에 관해 대답했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뒤따르는 말씀이 가로막는다. 그는 인자가 ‘자기’ 오심 전에, 곧 그 나라도 실체로 드러날 그 오심 전에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받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대답한 그 나라도 자기 나라임을 보였다. 그 나라는 그의 고난과 버림받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버림받고 그 뒤에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높여질 운명이었으므로, ‘버림받다’라는 바로 그 낱말까지도 다윗에게서 따왔다. 다윗에게서는 돌이라는 수수께끼 안에서 그의 두 번의 드러남이 노래되었다. 첫째는 거부당할 만한 드러남이고, 둘째는 영예로운 드러남이다. 그는 말한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부싯돌의 모욕이나 영광에 관해 선포했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그가 반석과 산의 예표로도 미리 보여 준 이를 돌의 예표로는 미리 보여 주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오심에 관해 말한다면, 온화하고 부드러운 신이 왜 그 오심을 음울하고 잔혹했던 노아와 롯의 날에 비기는가? 창조주의 명령을 업신여기다가 벌을 면하지 못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왜 경고하는가? 그가 자기 명령들을 보복하기 위해 심판을 가지고 오지 않을 것이라면 말이다. 그가 심판한다면 저 신처럼 보복한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무너뜨리는 신의 본보기들을 통해 나를 빚어서는 안 되었다. 저 신이 나를 빚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도 자기 오심이 아니라 유대인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해 말한다면, 그가 자기 오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는 셈이니 우리는 지금도 기다리자. 그동안 우리는 그를 그가 모든 곳에서 선포하는 <저 신에게 속한> 이로 믿는다. 번역 주석 1. 35.1 누가복음 17:1-2. 누가복음 17:2에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것”이라는 구절이 없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26:24와 마가복음 14:21의 표현이고, “깊은 곳에 던져졌더라면”은 마태복음 18:6(“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에 가깝다. scandalum/scandalizare는 개역개정 누가복음 17:1-2를 따라 ‘실족’, ‘실족하게 하다’로 옮겼다. 2. 35.4 스가랴 2:8(개역개정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하나님이 1인칭으로 “내 눈동자”라고 말한다. 3. 35.5 누가복음 17:3. ex acceptione personae는 성경의 ‘외모로 사람을 취함’(προσωποληψία)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사람을 차별하여’로 옮겼다. 4. 35.6 레위기 19:17. 사본 MR은 habens이고 Kroymann은 habes로 고쳤다. traduces는 M의 읽기이고 R은 non traduces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레위기의 ‘이웃’에 형제도 포함된다는 말을 인용 사이에 끼워 넣었다. 5. 35.7 출애굽기 23:4(원수의 소나 나귀)와 신명기 22:1(형제의 소나 양)을 아우르는 암시다. ‘형제의 가축’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22:1에 더 가깝다. 6. 35.8 누가복음 17:4. 7. 35.10 레위기 19:18(개역개정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형제의 악의를 기억하지 말라”로, 칠십인역의 οὐ μηνιεῖς(원한을 품지 말라)에 가깝다. 뒤의 nec petenti … sed et non petenti는 ‘구하는 이에게만이 아니라 구하지 않는 이에게도’로 옮겼다. Kroymann은 petenti 뒤에 이 빠졌을 가능성을 apparatus에 적었다. 8. 35.11 offensa는 여기서 남에게서 받은 잘못을 뜻하므로 ‘잘못’으로 옮겼다. 나병 환자에 관한 율법은 레위기 13-14장, 열 명의 나병 환자는 누가복음 17:11-19이다. morositas는 율법의 ‘까다로움’, 곧 세세한 규정을 가리킨다. 9. 35.12 는 사본 R의 읽기로, M과 F에는 없다. retractari와 prouocari는 수동 부정사로 옮겼다. Kroymann은 능동형 retractare, prouocare를 가능성으로 적었다. 10. 35.13 앞선 논증은 같은 권 9장에서 다룬 나병 환자 치유(누가복음 5:12-14)를 가리킨다. 11. 35.14 누가복음 4:27. Kroymann은 시리아 사람의 이름을 Neman으로 인쇄했다(M neaman, R3와 통행본 Naamann). 개역개정을 따라 ‘나아만’으로 옮겼다. 12. 35.15 는 Engelbrecht가 보충했다. 13. 35.17 ‘율법의 비밀’(legis arcanum)은 레위기 13-14장에서 제사장이 나병을 검사하는 규정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읽는 해석이다. disceptator는 ‘가려내는 이’로 옮겼다. Kroymann은 dispectatorem(살펴보는 이)을 가능성으로 적었다. elimator는 줄로 갈아 내듯 얼룩을 없애는 이라는 뜻으로 ‘씻어 내는 이’로 옮겼다. 14. 35.18 누가복음 17:14. 15. 35.20 [uideret]는 뒤의 uiderit를 중복해 쓴 것으로 보아 R3 이래 삭제되었다. Engelbrecht는 rideret? uiderit로 읽기를 제안했다. si cui tam은 R의 읽기이고 M은 sic uitam이다. uiderit는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는 관용 표현이다. opiniosus는 제멋대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을 가리켜 ‘변덕스러운’으로 옮겼다. 16. 35.22 obseruatores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obsecratores(간청하는 자들)이다. 17. 35.23 ‘이전의 나병 환자’는 누가복음 5:12-13의 나병 환자다. 누가복음 5:14에서도 예수는 그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지만, 이는 고친 뒤에 한 명령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런 명령’은 치유 전에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보낸 명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했다(열왕기하 5:10). 18. 35.24 ‘그’는 엘리사를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엘리사가 제사장에게 보내지 않았는데도 창조주의 예언자였듯이,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도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논리다. credit id는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credidit이다. 19. 35.25 누가복음 17:11, 16. 개역개정은 예수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갔다고 한다. 20. 35.26 열왕기상 11:29-39. 사본 MR은 ‘아홉 지파’(nouem)이고 Pamelius는 성경을 따라 ‘열 지파’(decem)로 고쳤다. 열왕기상 11:31에서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준다고 말한다. 북왕국의 수도로서 사마리아는 여로보암이 아니라 오므리 때에 세워졌다(열왕기상 16:24). 21. 35.28 요한복음 4:12(개역개정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와 4:20. 사본 MR의 ne는 의문 소사로 읽었고, Pamelius는 nae로 고쳤다. 22. 35.29 [그,]는 Kroymann이 삭제 표시한 qui이다. “사마리아 산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화를 말한 본문은 아모스 6:1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사야를 통해 말했다고 쓴다. Pamelius는 Esaiam을 Amos로 고쳤다. dixerat는 Kroymann의 수정(MR dixerit), confiderent는 Latinius의 수정(MR confident), ipse eam은 Kroymann의 수정(MR ipsam)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요한복음 4:22다. licet Israhelitae et Samaritae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북쪽 지파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제사장들은’에서 시작하는 줄표 삽입구는 35.30의 tota enim promissio … fuit까지 이어진다. 23. 35.30 [그리스도]는 ‘약속 전체’를 풀이한 주석이 본문에 들어온 것으로 Kroymann이 보고 삭제 표시한 낱말이다. 유다 지파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49:9-10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한 ‘우물’(요한복음 4장)과 대비하여 예루살렘을 구원의 ‘샘’(fons)이라고 부른다. 24. 35.31 expungere는 ‘지우다, 폐지하다’와 ‘완수하다, 이행하다’를 모두 뜻한다.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어 끝난다는 두 뜻이 겹치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가 아니라는 앞의 논지에 맞추어 ‘완수되어야 한다’로 옮겼다. 25. 35.32 누가복음 17:15-18. 깨끗하게 된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돌아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26. 35.35 누가복음 17:19(개역개정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를 참된 제물로 보는 생각은 시편 50:14, 23에 근거한다. 27. 35.37 누가복음 17:20-21. 옛 라틴어 본문의 cum obseruatione(개역개정 “볼 수 있게”)를 ‘지켜보는 가운데’로 옮겼다. 개역개정의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와 달리, 옛 라틴어 본문은 nec dicunt(사람들이 말하지도 않는다)이다. 28. 35.38 누가복음 17:21. 테르툴리아누스는 intra uos를 ‘너희 손에, 너희 권능 안에’, 곧 계명을 듣고 행하는 일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35.43의 신명기 30:14 “네 손에”와 연결한다. 29. 35.39 secundum nostras antithesîs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Antitheses)를 비튼 표현이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복음을 서로 대립시켰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모세를 그리스도 맞은편에 세워 두 말이 같은 뜻임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 나름의 안티테시스에 따라’로 옮겼다. 30. 35.40 신명기 30:11-14(35.40-43). 개역개정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excelsum non est(높지 않다)이다. 개역개정의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을 따라 “네 손에”를 더 가진다. ascendet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ascendit이다. 31. 35.45 누가복음 17:24-25. ‘자기’ 오심은 누가복음 17:24의 “자기 날에”를 받는 말이다. reuelabitur는 R의 읽기이고 M은 reuelabatur이다. substantialiter는 substantia(실체)에 맞추어 ‘실체로’로 옮겼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실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32. 35.46 누가복음 17:25의 ‘버림받다’(reprobari)를 시편 118:22의 ‘버린’(reprobauerunt)과 연결한다. ‘두 번의 드러남’은 고난받는 첫 번째 오심과 영광 가운데 오는 두 번째 오심을 가리킨다. 33. 35.47 시편 118:22-23(개역개정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a domino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대로 ‘주로 말미암아’로 옮겼다. 34. 35.48 ‘반석’의 예표는 고린도전서 10:4나 이사야 28:16, ‘산’의 예표는 다니엘 2:34-35, 45(산에서 뜨인 돌이 큰 산을 이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35. 35.49 누가복음 17:26-30. ‘온화하고 부드러운 신’은 마르키온의 선한 신을 비꼬는 표현이다. 36. 35.50 누가복음 17:32와 창세기 19:26. 37. 35.51 ‘저 신’(ille)은 창조주를 가리키며, ‘그’는 마르키온이 말하는 그리스도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처럼 심판하고 보복한다 해도, 창조주의 본보기로 사람을 가르쳐서는 안 되었다는 논리다. 38. 35.52 illum은 Kroymann의 보충이다. 사본의 illum만으로는 ‘그를 그가 모든 곳에서 선포하는 이로 믿는다’가 되고, 보충을 따르면 ‘그를 그가 모든 곳에서 선포하는 저 신(창조주)에게 속한 이로 믿는다’가 된다. ne quid de suo praedicet는 ‘그가 자기 오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는 셈이니’라는 비꼬는 뜻으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5 36 실로 그는 기도의 끈기와 간절함도 명하면서, 과부의 간청이 간절하고 끈질겨서 그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재판관의 비유를 든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를 받아야 할 이가 재판관인 하나님임을 보여 준 것이지, 그 자신이 재판관이 아니라면 자기를 보여 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줄 것이라고 <또한> 덧붙였다. 그러므로 재판관인 이가 곧 원한을 풀어 주는 이일 것이라면, [만일] 그는 창조주를 더 나은 하나님으로 입증한 것이니, 그가 밤낮으로 자기에게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이로 보여 준 이가 바로 창조주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가 창조주의 성전을 무대로 삼아 서로 다른 마음으로 경배하는 두 사람, 곧 교만한 바리새인과 겸손한 세리를 묘사하고, 그 때문에 하나는 버림받고 하나는 의롭다 함을 받아 내려갔다고 말할 때, 그는 어떤 법도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침으로써 분명히 여기서도 그 이를 기도의 대상으로 정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그 이에게서 기도의 법도를, 곧 교만을 정죄하는 법도든 겸손을 의롭다 하는 법도든, 받아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다른 신의 성전도, 기도하는 자들도, 심판도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지 못하며, 오직 창조주의 것만 찾는다. 그는 그 이를 낮은 자들을 일으키는 이로 여겨 겸손하게 경배하라고 명하고, 교만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이로 여겨 교만하게 경배하지 말라고 명한다. 그가 내게 경배하라고 보여 주는 다른 이가 누구인가? 어떤 법도로? 어떤 소망으로? 내 생각에는 아무도 없다. 실로 그가 가르친 기도도 창조주에게 맞는다는 것을 우리는 입증하였다. 만일 그가 지극히 선한 신이며 자발적으로 선한 신이라는 이유로 경배받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 외에 누가 지극히 선하냐?”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두 신 가운데 하나를 지극히 선한 신으로 보여 준 것이 아니라, ‘한 분’만이 지극히 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니, 그는 홀로 하나님인 만큼 그렇게 홀로 지극히 선하다. 그리고 분명히 지극히 선한 이는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게 비를 내리고 자기 해를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위에 떠오르게 하는 이이며, 마르키온파까지도 붙들어 주고 먹이고 돕는 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지극히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소유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사람이 창조주의 계명들을 아는지, 곧 행하는지를 따져 물었다. 이는 창조주의 계명들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더 중요한 계명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지켜 왔다고 단언하자, 그가 말했다. “네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너는 하늘에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자, 마르키온이여, 그리고 이제 그의 모든 ‘함께 비참한 자들’과 ‘함께 미움받는 자들’, 이단자들이여, 그대들은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리스도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라는 이전 계명들을 폐기하였는가? 아니면 그것들도 지키면서 부족한 것을 덧붙여서 - 비록 궁핍한 자들에게 베풀라는 이 계명도 율법과 예언자들 곳곳에 퍼져 있지만 - 계명을 지킨 지극히 자랑스러운 저 사람이 돈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길 자임을 드러냈는가? 그러므로 여기서도 복음서에는 이 말이 온전히 살아 있다. “나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지극히 선한 이’라는 이름, ‘영생’과 ‘하늘의 보화’가 같은 한 존재에게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신도 그 존재, 곧 그가 계명들을 보충함으로써 지키기도 하고 늘리기도 한 그 계명의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머지 것들도 의심에서 풀어 주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미가의 말에 따라서도 알아볼 수 있는 이니, 미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네게 무엇이 선한지 전하였다면? 아니면 주가 네게서 요구하는 것이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외에 무엇이냐?” 실로 무엇이 선한지 전하는 ‘사람’도 그리스도이며, 그가 전한 선은 율법에 대한 앎이다. “너는 계명들을 안다”라고 그는 말한다. ‘공의를 행하는 것’: “네가 가진 것을 팔아라”라고 그는 말한다. ‘긍휼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궁핍한 자들에게 주어라”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말한다] 주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그는 말한다. 유대 민족은 처음부터 지파와 족속과 가문과 집안으로 매우 뚜렷이 나뉘어 있었으므로, 누구도 자기 혈통이 쉽게 알려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마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을 최근의 아우구스투스 인구 조사 기록으로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마르키온의 예수는 - 사람으로 보였으므로 <비록> 태어났다는 것이 의심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 분명히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기 혈통에 관하여 공적으로 아무것도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지 않은 자들로 여겨지던 이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맹인이 그가 지나간다는 것을 들었을 때,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는가? 그가 다윗의 자손, <곧> 다윗의 가문 출신으로 여겨진 것이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통해서였고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 어머니와 형제들은 언젠가, 분명 그들이 알려져 있었기에, 그에게 전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가는 자들이 맹인을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지, 다윗의 자손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면 그 꾸짖은 자들이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보라. 그래야 그들이 그 때문에 맹인에게 잠잠하라고 명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주가 자기에 관한 거짓 선포를 참을 수 있었다고 전제하기보다 그들이 몰랐다고 전제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주는 참을성이 있다.” 그렇다 해도 오류를 굳혀 주는 이는 아니다. 오히려 창조주를 폭로하는 이이기도 한데, 그 사람이 더 이상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지 않도록 먼저 그 사람의 이 눈멂을 걷어 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대들이 그의 참을성을 비방하지 못하도록, 또 그에게 어떤 묵인의 이유도 덧씌우지 못하도록, [그대들이 다윗의 자손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그는 치유라는 보상 자체와 믿음에 대한 증언으로 맹인의 선포를 아주 분명하게 확증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대는 맹인이 무엇을 믿었다고 하려는가? 예수가 창조주를 폭로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을 파괴하려고 다른 신에게서 내려왔다는 것인가? 그가 이새의 뿌리와 다윗의 허리의 열매에서 나기로 정해진 이, 맹인들에게도 보상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러나 내 생각에 그때에는 맹인들이 아직 마르키온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 맹인의 믿음은 이러한 것이었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부르는 말로 믿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자신이 그러한 이임을 알았고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알려지기를 원한 그는, 그 사람의 믿음이 비록 이미 더 잘 보는 눈을 가졌고 비록 참된 빛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믿음에 바깥의 시력까지 선물로 주었다. 이는 우리도 믿음의 규범과 함께 믿음의 보상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보기를 원하는 자는 처녀의 호적을 통해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믿지 않을 자는 그에게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고, 그리하여 맹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안티테시스 속으로 떨어지는데, 그 안티테시스 자체도 안티테시스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맹인은 실로 이렇게 맹인을 인도하곤 한다. 사실 만일 맹인들이 일찍이 다윗이 시온을 되찾을 때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서서 다윗을 거슬렀기 <때문에> - 이는 마찬가지로 눈먼 백성, 곧 언젠가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백성의 예표였다 - 그리스도가 반대 방향에서 맹인을 도와, 이로써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보여 주고, 마음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윗이 치라고 명했던 맹인들에게 선한 이임을 보여 주려 한 것이라면, 그는 왜 이것을 믿음에, 그것도 그릇된 믿음에 베풀었다고 말했는가? 그런데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도 그 안티테시스를 자기 쪽에서 되받아 꺾을 근거를 <준다>. 실로 맹인들이 다윗을 거슬렀으나, 이제는 같은 † 육신을 지닌 사람이 다윗의 자손에게 스스로 탄원자로 나아왔으므로, 다윗의 자손은 이렇게 사죄하는 그에게 어느 정도 누그러져 믿음에 대한 증언과 함께 시력을 돌려주었다. 그는 바로 이것, 곧 다윗의 자손에게 간청해야 한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내 생각에 다윗을 거스른 것은 사람들의 무모함이었지, 그들의 병이 아니었다. 번역 주석 1. 36.1 누가복음 18:1-8(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2. 36.3 누가복음 18:7. Kroymann은 사본의 iudex qui et uindex를 uindex qui et iudex로 바꾸어 읽었다. [만일]로 옮긴 si는 Rhenanus 제3판(R3)이 삭제한 말이다. ‘더 나은 하나님’은 심판하지도 원한을 풀어 주지도 않는 마르키온의 신과 견준 표현이다. 3. 36.4 누가복음 18:9-14. et tamen은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어쨌든’으로 옮겼다. relaturi essent ... orandi disciplinam은 두 사람이 성전에서 내려가며 각자 받아 간 판정(누가복음 18:14)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기도의 법도를 ... 받아 돌아가게 될 것’으로 옮겼다. iam은 R3와 이후 판본들에서 eam으로 읽는다. adorare는 ‘경배하다’, orare는 ‘기도하다’로 옮겼다. 4. 36.6 시편 113:7과 사무엘상 2:8(낮은 자를 일으킴), 이사야 13:11(교만한 자를 낮춤)을 반영한다. 5. 36.8 주기도문이 창조주에게 맞는다는 논증은 이 책 26장에 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며, 경배조차 받으려 하지 않는 신이라는 반어이다. 6. 36.9 누가복음 18:19. 고대 라틴어 역본은 그리스어 agathos를 optimus(지극히 선한)로 옮긴다. 개역개정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unus를 두 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으로 읽는다. 7. 36.10 마태복음 5:45. 8. 36.11 누가복음 18:18. 개역개정 “선한 선생님이여”에 해당하는 말이 여기서는 optime(지극히 선한)이다. 9. 36.12 누가복음 18:20-21. R3는 사본의 praeceptoris를 praeceptis로, cumque illi를 cumque ille로 고쳤다. 10. 36.13 누가복음 18:22. 11. 36.14 commiserones와 coodibiles는 ‘함께 비참한 자들’, ‘함께 미움받는 자들’이라는 뜻의 조어이며, 마르키온이 자기 추종자들을 부른 말로 보인다. Kroymann은 이 책 9장의 해당 대목을 함께 참조하도록 제시한다. 12. 36.15 출애굽기 20:12-16, 누가복음 18:20. diligendi patrem et matrem은 ‘공경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여서 그대로 옮겼다. gloriosissimus는 ‘지극히 영광스러운’과 ‘자랑하는’의 두 뜻을 모두 지니며, 계명을 지켰다고 내세운 관원에 대한 반어여서 ‘지극히 자랑스러운’으로 옮겼다. an e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ante et이다. 13. 36.16 마태복음 5:17. 누가복음에 없는 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부자 관원 대목이 이 말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논증한다. ‘여기서도 복음서에는’은 M 사본의 hic euangelio를 따른 것이며, R 판본은 hoc in euangelio로 읽는다. 14. 36.17 cuius 앞에 선행사가 없어 Kroymann은 같은 말이 필사 중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 자신도 그 존재, 곧 ... 그 계명의 주인에게 속한다’로 풀어 옮겼다. 15. 36.18 미가 6:8(칠십인역 계열). 개역개정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homo를 부르는 말(사람아)이 아니라 ‘전하였다’의 주어로 읽고, 36.19에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마지막 구절은 여기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sequi), 36.21에서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ire cum domino)으로 달리 인용된다. iudicium은 미가서의 맥락에 따라 ‘공의’로 옮겼다. 16. 36.20 누가복음 18:20, 22. diligere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ilige이다. 17. 36.21 누가복음 18:22. 테르툴리아누스는 pauperibus(36.13) 대신 egenis(궁핍한 자들)로 인용한다. [그가 말한다](inquit)는 R3가 삭제한 말이다. Pamelius는 domino를 deo로 고쳤다. 18. 36.22 누가복음 18:22. ‘최근의 아우구스투스 인구 조사’는 누가복음 2:1-5의 호적 등록을 가리킨다. populos는 그리스어 dēmoi에 해당한다는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족속’으로 옮겼다. potuisset은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potuit sed이다. 19. 36.23 <비록>은 Kroymann이 보충한 si(et)이고, ‘어떤 <식으로든>’은 Ursinus가 quo를 quoquo로 보충한 것이다. Engelbrecht는 quo으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호적에 오를 혈통이 없다는 논증이다. 20. 36.24 누가복음 18:35-38.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에게 전해진 일은 누가복음 8:19-20을 가리킨다. <곧>은 R3가 보충한 id이다. 21. 36.25 누가복음 18:39. 22. 36.27 praesumeres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praesumeret, R3 praesumeretur). fals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palam이다. 23. 36.28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라 immo 이하를 하나의 의문문으로 옮겼다. 이전 판본들은 erroris, immo ... creatoris, ut ...로 끊는다. ‘창조주를 폭로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창조주를 드러내 무너뜨리려고 왔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받는다. 24. 36.29 [그대들이 다윗의 자손을 부인하지 못하도록,]은 Kroymann이 삽입문으로 의심하여 괄호에 넣은 구절이다. Pamelius는 이 구절의 ne를 nec으로 읽는다. 25. 36.30 누가복음 18:42. 26. 36.31 ‘다른 신에게서’는 Ursinus의 alio를 따른 것이다(사본 illo). Ursinus는 detectionem(폭로)을 deiectionem(무너뜨림)으로 고친다. 27. 36.32 이사야 11:1, 열왕기상 8:19(“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시편 146:8(“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을 반영한다. Junius는 remunerator를 remuneratorem으로 고친다. 28. 36.34 누가복음 18:42-43. simulque는 R3의 읽기이고 사본은 simulquam이다. 29. 36.35 census는 36.22의 인구 조사(census)와 같은 낱말로, 예수가 처녀 마리아를 통해 다윗 가문의 호적에 오른다는 뜻이다. 이전 판본들은 qui uult uidere Iesum Dauid filium, credat로 끊어 ‘다윗의 자손 예수를 보려는 자는 처녀의 호적을 통해 믿어야 한다’로 읽는다. 30. 36.36 ‘안티테시스’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Antitheses)에 실린 대립, 곧 맹인들을 치라고 한 다윗과 맹인을 고친 그리스도의 대조를 가리킨다. 그 대립 자체가 다시 테르툴리아누스의 반대 논증(36.38)에 부딪힌다는 뜻이며, <속으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이다. 31. 36.37 누가복음 6:39, 사무엘하 5:6-8. <때문에>는 Kroymann이 보충한 quia이다. ‘선한 이임을 보여 주려 한’의 ut는 Oehler의 읽기이며(사본 et, Engelbrecht는 삭제), ‘그는 왜 이것을’의 id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caedi. et). ‘그릇된 믿음’은 마르키온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킨다. Oehler는 et quidem을 equidem으로 읽는다. 32. 36.38 <준다>는 Kroymann이 보충한 dat이다. 33. 36.39 †는 eiusdem carnis(같은 육신)에 붙은 표시이다. Kroymann은 condicionis(같은 처지)를 추정하고, R3는 indecoris로 읽는다. Engelbrecht는 사무엘하 5:1(“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을 암시한다고 보아 carnis를 옹호하지만 Kroymann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본의 낱말대로 ‘같은 † 육신을 지닌’으로 옮겼다. 문장 첫머리의 quia는 Kroymann의 수정이다(사본 qui). 34. 36.40 ualitudo는 맹인들의 몸 상태, 곧 눈먼 상태를 가리키며 ‘병’으로 옮겼다. offenderat는 M과 F 사본의 읽기이고, R과 이후 판본들은 offenderit로 읽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6 37 삭개오의 집도 구원을 얻는다. 무슨 공로로? 그도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신>에게서 왔다고 믿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모든 사람의 귀에는 아직 저 맹인의 외침,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가 남아 있었고, 또 “온 백성이 하나님에게 찬양을 돌렸다”라는 말도 남아 있었다. 마르키온의 신이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에게였다. 과연 삭개오는 이방인이었지만 아마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경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어들었을 것이고 - 그러나 <만일> 이사야를 모르고서 그리했다면 더 대단하다 - 이사야의 계명들을 이루었다. 그는 말한다. “네 빵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 주고, 집 없는 자들을 네 집에 들여라.” - 그는 바로 이것을 하고 있었으니, 주를 자기 집에 맞아들여 먹이고 있었다 - “헐벗은 자를 보면 덮어 주어라.” 그는 바로 그때 이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모든 자비의 일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놓고, 지나치게 가혹한 계약의 결박을 풀고, 시달리던 자들을 놓아주어 숨을 돌리게 하며, 모든 불의한 증서를 찢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만일 내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속여 빼앗았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그래서 주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창조주의 예언자가 명한 것들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로 인자는 멸망한 것을 구원하러 왔다”라고 말할 때, 그가 구원하러 온 것이 본래 그의 것이었고 그가 잃어버린 것이었으며 바로 그 멸망한 것을 구원하러 그가 왔다는 점을, 나는 이제 따로 논증하지 않는다. 나는 논의를 다른 질문의 단계로 이끈다. 다루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심이 없다. 사람은 두 실체, 곧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가 어느 실체의 측면에서 멸망한 것으로 보이는지 물어야 한다. 만일 몸으로 멸망하였다면 몸이 멸망한 것이고 영혼은 아니다. 인자는 멸망한 것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육신도 구원을 얻는다. 만일 영혼으로 멸망하였다면, 영혼의 멸망이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 멸망하지 않은 육신은 온전하다. 만일 사람 전체가 두 실체 모두로 멸망하였다면 사람 전체가 구원받아야 하며, 육신의 구원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의 견해는 무너졌다. 이제 창조주의 그리스도도 확증된다. 그는 창조주를 따라 사람 전체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주인의 돈을 이자 놓은 셈에 따라 판정받는 종들의 비유도 <그대의> 신을 엄격함의 측면에서까지 재판관으로 보여 준다. 그 신은 책망할 뿐 아니라 누가 가진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 빼앗는다. 아니면 이 비유 또한 창조주를 “엄하여,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이”로 그려 낸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도 나를 가르치는 이는 바로 그이니, 이 비유는 내가 그의 돈을 이자 놓도록 가르친다. 번역 주석 1. 37.1 누가복음 19:1-10. ‘마르키온의 <신>에게서’는 Kroymann의 보충이며, 사본은 a Marcione(마르키온에게서)이다. 2. 37.2 누가복음 18:38. 3. 37.3 누가복음 18:43. Pamelius는 복수 동사 referebant를 단수 referebat로 고친다. allophylus는 ‘이방인’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삭개오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본다. <만일>은 R3가 주석에서 보충한 si이다. 4. 37.4 이사야 58:7. 개역개정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이다. ‘주를 자기 집에 맞아들여’는 누가복음 19:6을 가리킨다. 5. 37.5 누가복음 19:8과 이사야 58:6의 칠십인역 표현(“폭력적인 계약의 매듭을 풀고, 억눌린 자들을 놓아 자유롭게 하며, 모든 불의한 증서를 찢으라”)을 엮었다. Kroymann은 이사야 58:9-10도 참조로 든다. substantia는 여기서 실체가 아니라 재산을 뜻한다. contractuum은 Pamelius의 수정(사본 contractum)이고, obnexus(결박)는 M 사본과 Pamelius의 읽기다. Engelbrecht는 promittebat 대신 promebat(내놓고 있었다)를 추정한다. 6. 37.6 누가복음 19:8. 7. 37.7 누가복음 19:9. 고대 라틴어 본문 hodie salus huic domui에는 동사가 없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있다’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이다. ‘창조주의 예언자’는 이사야를 가리킨다. 8. 37.8 누가복음 19:10. 개역개정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이며, 고대 라틴어 본문에는 ‘찾아’가 없다. perire는 ‘잃어버린 바 되다’와 ‘멸망하다’를 모두 뜻하는데, 37.9-12에서 몸과 영혼 가운데 어느 쪽이 멸망했는지를 따지므로 ‘멸망하다’로 옮기고, cui perierat만 ‘그가 잃어버린’으로 옮겼다. 9. 37.14 누가복음 19:11-27, 특히 19:22-23, 26. <그대의>는 Kroymann이 보충한 tuum이다. 그리스도가 마르키온의 신에게 속한다면 이 비유가 그 신을 엄격한 재판관으로 보여 준다는 논증이다. ‘책망할’은 Kroymann이 사본의 honorantem(높이는)을 onerantem(= criminantem)으로 고친 것을 따랐다. 10. 37.15 누가복음 19:21-22. 비유 속 ‘엄한’ 주인을 창조주로 보는 해석을 가정한 문장이며, ille(그이)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7 38 그리스도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모르는 사람처럼 물었는가? 그는 바리새인들이 자기에게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헛되이 물었는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입으로, 또는 마음으로 그들을 심판하려는 것이었는가? 그러므로 이것들도 창조주를 변호하는 데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견주어 보는 데에 적용해 보라. 그리고 이제 바리새인들이 그 물음에 무언가를 대답했더라면 어떤 일이 뒤따랐을지 생각해 보라. 그들이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했다고 가정해 보라. 그들은 곧바로 돌에 맞아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면 마르키온을 거슬러 어떤 마르키온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 지극히 선한 신이여, 오, 창조주의 선례들과는 다른 신이여! 사람들이 곤두박질쳐 떨어질 것을 알면서 그 자신이 그들을 벼랑 위에 올려놓았구나!” 창조주에 대해서도 나무에 관한 율법을 두고 바로 이렇게 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찌하여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요한을 믿기를 바랐고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을 꾸짖으려 했던 그는, 요한이 그 성례를 집행하던 이에게 속한 자였다. 분명히, 자기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대답하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자신도 앙갚음으로 맞서며 “나도 무슨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할 때, 그는 악을 악으로 갚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가이사의 데나리온과 닮은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의 형상과 모양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창조주에게 바치라고 명한다. 사람은 창조주의 형상과 모양과 이름과 재료로 찍혀 나왔기 때문이다. 마르키온의 신은 자기 주화를 스스로 찾아보라. 그리스도는 사람이라는 데나리온을 자기의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명한다. 낯선 이에게가 아니다. 다만 자기 데나리온을 갖지 못한 자는 어쩔 수 없이 ** 수밖에 없다. 모든 질문에서 대답의 뜻은 물음의 취지에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합당한 원칙이다. 그렇지 않고 어떤 것을 묻는 사람에게 다른 것을 대답하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하는 일이다. 사람에게조차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그리스도에게서는 더욱 멀어야 한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물음을 품고 주에게 율법에서 가져온 한 여자의 사례를 내놓았다. 그 여자는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자 율법의 계명에 따라 그들과 혼인했는데, 부활 때 그 여자를 어느 남편의 아내로 여겨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질문의 내용이었고, 이것이 물음의 실체였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이것에 대답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질문을 피했다거나, 질문을 기회 삼아 다른 때에는 공공연히 가르치지 않던 것을 슬며시 내비쳤다고 여겨질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장가들지만 - 그대는 이것이 얼마나 사안에 들어맞는지 본다. 오는 세대에 관해 물었으므로, 그는 그 세대에는 아무도 장가들지 않는다고 규정하려고, 여기, 곧 죽음도 있는 곳에서는 혼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먼저 깔아 두었다 - 하나님이 저 세대의 소유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긴 자들은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더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답의 뜻은 물음의 취지 이외의 다른 것을 향해서는 안 되므로, 만일 이 대답의 뜻으로 물음의 취지가 해결된다면, 주의 대답이 뜻하는 바는 질문을 해결하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혼인이 허락되는 때와 거부되는 때를 얻는다. 그것도 혼인 자체에 관한 질문에서가 아니라 부활에 관한 질문에서 얻는다. 그대는 또한 부활 자체에 대한 확증과 사두개인들이 캐묻던 것 전체를 얻는다. 그들은 다른 신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혼인의 고유한 권리에 관해 캐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질문받지 않은 것들에 대답한 자로 만든다면, 그대는 그가 질문받은 것들에 대답할 수 있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곧 그가 사두개인들의 지혜에 걸려들었다는 말이 된다. 이제 나는 넉넉히 덧붙여, 이 원칙을 세운 뒤에도 이 대목에 얽힌 그들의 논증들을 반박하여 다시 다루겠다. 실로 그들은 성경 본문 “그런데 하나님이 합당하게 여긴 자들은 저 세대의”를 손에 넣자, 읽을 때 이렇게 내리달려 <‘저 세대의’를> ‘하나님’에 붙여서 저 세대의 다른 신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렇게 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합당하게 여긴 자들은”으로 읽어, 여기 ‘하나님’ 뒤에서 끊고 ‘저 세대의’가 뒤따르는 말에 속하게 해야 한다. 곧 “하나님이 저 세대의 소유와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긴 자들은”이다. 하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저 세대의 상태에 관해서, 곧 부활 후 저 세대에서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에 관해 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혼인 자체에 관한 대답도 뒤집는다. 곧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말은 혼인을 허락하는 창조주의 사람들에 관해 한 말이고, 그들 자신은 저 세대의 신, 곧 다른 신이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긴 자들이므로 이미 여기서도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는 이 세대의 혼인이 아니라 저 세대의 혼인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질문받은 그 혼인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자체와 그 발음과 끊어 읽기의 힘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질문의 내용에 관련된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아듣지 않았다. 실제로 서기관들도 “선생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부활을 [통하여] 확증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두개인들의 견해에 맞서 부활의 형태를 밝혀 보였다. 끝으로 그는 자기가 그런 뜻으로 대답했다고 받아들인 이들의 증언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고 다윗 자신은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이것이 다윗의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가 서기관들의 오류를 두들기고 있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윗의 그리스도에게 영예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그는 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기보다 주라고 확증했다. 이것은 창조주를 파괴하는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얼마나 잘 들어맞는 해석인가! 실로 일찍이 저 맹인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렸던 그는, 그때에는 서기관들이 곁에 없었으므로 잠잠히 넘어갔던 것을, 이제는 그들 앞에서 일부러 스스로 꺼내었다. 맹인이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만 선포했던 자기가 다윗의 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그는 맹인이 그를 [향해]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던 그 믿음에는 상을 주었고, 그를 주로도 알지 못했던 서기관들의 전승은 쳤다. 창조주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누구도 이렇게 지켜 주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38.1 누가복음 20:1-8의 요한의 세례에 관한 물음이다. 누가복음 20:1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질문자로 들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들을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른다. 2. 38.2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한다”는 누가복음 19:22의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고대 라틴어 본문 ex ore tuo te iudico)를 떠올리게 한다. 라틴어 문장은 interrogabat가 생략된 형태이므로 “심판하려는 것이었는가?”로 옮겼다. 3. 38.3 ‘창조주를 변호하는 데에’는 마르키온파가 창조주의 물음(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을 무지의 증거로 삼은 데 대해 제2권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를 변호한 논증을 가리킨다. ad comparationem Christi는 Kroymann의 설명에 따라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견주어 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4. 38.4 누가복음 20: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니”를 반영한다. 5. 38.5-6 마르키온파가 창조주를 비난하던 논법을 그들의 신에게 되돌린 가상의 발언이다. ‘나무에 관한 율법’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창세기 2:16-17)이다. 마르키온파는 창조주가 아담의 타락을 미리 알면서도 그 명령을 주었다고 비난했다. 수사본 M에는 ‘오, 지극히 선한 신이여’가 없다. 6. 38.7 누가복음 20:5.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했을 경우를 가정한 말이다. 7. 38.8 sacramentum은 요한이 베푼 세례를 가리키므로 ‘성례’로 옮겼다. 8. 38.9-10 누가복음 20:8. 고대 라틴어 본문의 in qua uirtute를 ‘무슨 능력으로’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무슨 권위로”이다. ‘악을 악으로 갚았다’(malum malo reddidit)는 그리스도의 대응을 창조주의 보복 원칙과 같은 것으로 제시한다. Rigaltius는 malo reddit로 고쳐 읽었으나 뜻은 같다. 9. 38.11 누가복음 20:25. ‘가이사’는 Caesar의 개역개정 표기이다. Kroymann은 sunt를 삭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통행본은 quae erunt dei? 뒤에 물음표를 두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겠는가? 가이사의 데나리온과 닮은 것들이다”로 읽는다. 10. 38.12 형상과 모양은 창세기 1:26-27을 가리킨다. expressus est는 주화를 찍어 내는 말이어서 ‘찍혀 나왔다’로 옮겼다. 11. 38.13 ‘자기의 가이사’는 데나리온에 찍힌 형상의 주인,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12. 38.14 Kroymann은 necesse est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mutuetur ab alio(남에게서 빌려야)가 빠졌다고 추정했다. 이 추정을 따르면 “자기 데나리온이 없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남에게서 빌릴 수밖에 없다”가 된다. 수사본 M과 F는 qui 대신 quid로 읽는다. 13. 38.17 누가복음 20:27-33.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와 혼인하는 율법은 신명기 25:5-10이다. 14. 38.20 누가복음 20:34-36. 고대 라틴어 본문은 “하나님이 합당하다고 여긴 자들”로 하나님을 행위자로 명시하며, 개역개정은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줄표 사이의 부분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R과 통행본은 둘째 sint 대신 fiant로, Gelenius와 통행본은 resurrectionis로 읽으며, Kroymann은 누가복음 20:36에 따라 sint dei를 제안했다.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는 마태복음 22:30과도 겹친다. 15. 38.22 ‘혼인의 고유한 권리에 관해’는 사두개인들의 물음이 혼인 제도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부활을 다룬 것이었다는 뜻이다. 16. 38.23 MF는 respondisse, R과 통행본은 respondere로 읽는다. 17. 38.25 라틴어 quos autem dignatus est deus illius aeui에서 deus 바로 뒤에 illius aeui가 오므로 이 소유격을 deus에 붙여 ‘저 세대의 신’으로 읽을 수 있다. 마르키온파는 이렇게 읽어 창조주와 다른 ‘저 세대의 신’을 끌어냈다. 한국어 인용은 이 어순을 살려 ‘저 세대의’를 끝에 두었다. ita-decurrunt는 수사본에서 조금 앞, 본문 인용 뒤에 있던 것을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고, decurrunt(수사본 decucurrerunt)와 는 Kroymann의 교정과 보충이다. R3와 통행본은 만 보충한다. 18. 38.26-27 테르툴리아누스는 deus 뒤에서 끊고 illius aeui를 뒤의 possessione et resurrectione에 걸어 “저 세대의 소유와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긴”으로 읽는다. 누가복음 20:35의 그리스어 본문도 ‘저 세대’를 얻는 일에 걸려 있다. 19. 38.28 누가복음 20:34. 마르키온파는 세례받은 신자에게 혼인을 금했으며(제1권 29장), 이 구절을 근거로 자신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혼인하지 않는 ‘저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20. 38.29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atquin non potest uideri respondisse dominus de nuptiis huius aeui(그러나 주가 이 세대의 혼인에 관해 대답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Engelbrecht는 탈문 없이 quando ... eas negauerat, de quibus consulebatur?로 복원하자고 했다. negauerit는 Kroymann의 교정이며 수사본은 negauerat이다. 21. 38.30-31 누가복음 20:39. Kroymann은 R3를 따라 per를 삭제할 말로 표시했다. per를 읽으면 “부활을 통하여 확증했다”, 빼면 “부활을 확증했다”가 된다. 22. 38.33 누가복음 20:41-44, 시편 110:1(불가타 109:1). Kroymann은 ad Christum non Dauid?로 이어 읽어 ‘다윗의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 곧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했다. 통행본은 ad Christum? non Dauid로 끊는다. filius Dauid는 누가복음 20:41의 개역개정 표현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옮겼다. 23. 38.34 <아니다>()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창조주를 파괴하는 자’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4. 38.35 누가복음 18:35-43의 여리고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친 일을 가리킨다(이 책 36장). Kroymann은 in illum의 in을 삭제할 말로 표시했다. in을 읽으면 “그를 향해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다”, 빼면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었다”가 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8 39 이름들의 소유권에 관해서는 이미 확정되었다. 그 소유권은 먼저 자기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예수라는 이름도 바꾸어 붙인 이에게 **.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자의 뻔뻔함도 확정될 것이다. 그는 많은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이름들의 소유권을 가진 창조주의 그리스도이자 예수가 아니라면 그 이름은 그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그런 자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금하는데, 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처지다. 그 역시 남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름의 소유권을 통해 그 이름의 진실을 지니고 있던 그가 이름을 사칭하는 거짓에서 제자들을 미리 지키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결국 그 자들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대는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는 그들과 아주 닮은 자를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이 자도 자기 이름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는 어떤가? 이름들의 주인, 곧 창조주의 그리스도이자 예수인 그가 몸소 올 때, 그대는 그를 물리칠 것인가? 남을 그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그대가 자기 이름으로 오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얼마나 불의하며 지극히 선한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그가 그 때들에 어떤 표징을 두는지도 살펴보자. 내 생각에는 전쟁들,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는 일, 역병과 기근과 지진, 공포와 하늘에서 오는 징조들이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하고 잔혹한 신에게 어울린다. 그가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까지 덧붙일 때, 그는 자신을 어떤 자로 드러내는가? 창조주를 파괴하는 자인가, 아니면 인정하는 자인가? 그는 창조주의 경륜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증한다. 그 경륜들이 그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극히 선한 자로서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잔혹한 그것들을 세우기보다 오히려 없애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들보다 먼저 그는 그들에게 박해와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선포한다. 물론 그것들은 순교와 구원에 이른다. 스가랴서에 선포된 것을 들어 보라. 그는 말한다. “전능한 주가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삼키고, 물맷돌로 돌을 던질 것이며, 그들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시고, 제단의 대접처럼 대접들을 채울 것이다. 그날에 주가 그들을, 곧 자기 백성을 양처럼 구원할 것이다. 거룩한 돌들이 구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그토록 많은 전쟁의 이름으로 이방 민족들에게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고난을 두고 선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 세부 모습들을 살펴보라. 정규 무기로 치를 전쟁을 예고하면서, 군중의 모임과 무장하지 않은 소요에 더 익숙한 돌팔매질을 열거하는 사람은 없다. 전쟁에서 흐르는 그토록 큰 피의 강을 대접의 용량으로 재거나, 제단 하나를 피로 적시는 일에 견주는 사람은 없다. 전쟁에서 무장하고 자기들도 같은 사나움으로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을 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기 본성과 인내를 지키며 스스로 보복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내어 주다가 도살당하는 이들을 양이라고 부른다. 끝으로 그는 “거룩한 돌들이 구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군인들이 싸우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돌들은 또한 우리가 그 위에 세워지는 기초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지어졌고, 이 사도들은 거룩한 돌들로서 모든 사람의 공격 앞에 놓인 채 굴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법정에서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을 금하는 이는 바로, 발람에게 그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아니 그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일러 주었고, 혀가 둔하다고 핑계 대던 모세에게 입을 약속했던 그 이다. 그리고 아무도 맞설 수 없는 그 지혜 자체도 그는 이사야를 통해 보여 주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또 <이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짖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새겨질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인 “하나님과 함께 강해지는 자”라는 순교자의 이름으로 하는, 단순하고 숨김없는 고백보다 더 지혜롭고 더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기 자신도 아버지에게서 때에 맞게 말할 능력을 공급받은 이가 미리 생각하는 것을 막았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주가 내게 가르침의 혀를 준다. ** 내가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를.” 마르키온이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가까운 이들에게서도 박해가 오고, 물론 미움에서 비롯된 그 이름에 대한 모독도 있으리라고 예고된 것을 내가 다시 보여 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너희는 인내로 너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시편은 이 인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의인들의 인내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의인들의 죽음은 존귀하다”라고 하기 때문인데, 의심할 것 없이 인내에서 나온 죽음이다. 스가랴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고 견딘 이들에게는 면류관이 있을 것이다.” 사도들이 다른 신의 전령이어서 유대인들에게 시달렸다고 감히 논증하지 말라. 예언자들도 유대인들에게서 같은 일을 당했지만 창조주 말고 다른 신의 사도는 아니었음을 기억하라. 그런데 그다음에 멸망의 때, 곧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기 시작할 때를 보여 준 뒤, 그는 이제 마지막 종말의 표징들을 차례로 말한다.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들, 그리고 땅에서는 세상에 닥칠 재앙들을 기다리며 마치 물결치는 바다의 소리에 놀라듯 아연실색하는 민족들의 곤경이다. 하늘의 권능들 자체도 흔들리게 되어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요엘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하늘에는 징조들을, 땅에는 피와 불과 연기 기운을 줄 것이다. 주의 크고 빛나는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 변할 것이다.” 그대에게는 하박국의 말도 있다. “강물로 땅이 갈라질 것이며, 백성들이 주를 보고 해산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 걸음으로 물을 흩으시니 깊은 물이 제 소리를 내었고, 그 두려움의 높이가 치솟았다. 해와 달이 제 질서 안에 멈추어 섰다. 주의 번쩍임은 빛 속으로, 주의 방패인 번개는 광채 속으로 나아갈 것이다. 주께서는 주의 위협으로 땅을 줄이시고, 주의 진노로 민족들을 끌어내리실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세계와 땅, 원소들과 민족들의 흔들림에 관해 주의 선언들과 예언자들의 선언들이 서로 일치한다. 이 일들 다음에 주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때에 그들은 인자가 매우 큰 능력으로 하늘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너희는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들 것이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의 때에 그렇다. 그 나라에 관해서는 바로 그 비유가 뒤에 덧붙여질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라.” 이것이 주의 크고 빛나는 날, 곧 다니엘에 따라 하늘에서 오는 인자의 날일 것이다. “보라,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온다” 등등. “그리고 그에게 왕의 권능이 주어졌다” - 그는 비유에서 이 권능을 청하러 떠나면서 종들에게 돈을 남겨 이자를 불리게 했다 - “또 모든 민족과” - 아버지는 시편에서 그에게 이 민족들을 약속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민족들을 네 유업으로 주겠다.” - “모든 영광이 그를 섬기며, 그의 권능은 영원하여 빼앗기지 않고, 그의 나라는 썩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죽지도 않고 장가들지도 않으며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자의 오심과 그 열매에 관해서는 하박국에 이렇게 나온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셨다.” 그들은 물론 나라의 때에 속량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들 자들이다. 그러므로 약속에 속한 이것들도 흔들림에 속한 저것들과 똑같이 일치하므로, 예언자들의 선언과 주의 선언이 서로 화음을 이루는 이상 그대는 여기에 어떤 구분도 끼워 넣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지극히 선한 신이라면 허락해서도 안 되고 하물며 기다려서는 더욱 안 될 흔들림은 창조주, 말하자면 잔혹함의 신에게 돌리고, 창조주가 그 신을 몰랐으므로 예언하지 않았을 약속은 지극히 선한 신에게 돌리는 구분 말이다. 또는 창조주가 자기 약속들을 예언했다면, 그것들은 <그대의> 그리스도의 약속들과 다르지 않다. 그는 <너그러움>에서 지극히 선한 신과 대등할 것이고, 그대의 그리스도가 나의 인자보다 더 많이 약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무화과나무 비유에 이르기까지 복음서 본문의 흐름 자체가 의미의 맥락상 이쪽저쪽에서 인자에게 밀착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그 흐름은 슬픈 일과 기쁜 일, 흔들림과 약속을 모두 그에게 결합시키고, 그대는 어느 한쪽도 그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오직 한 인자의 오심이 흔들림과 약속이라는 두 결말 사이에 놓여 있으므로, 민족들의 재난과 성도들의 소망은 반드시 한 인자에게 속한다. 그는 두 결말 모두에 공통<이 되>도록 가운데 놓여 있어서, 자기 오심으로 하나, 곧 민족들의 재난은 끝내고 다른 하나, 곧 성도들의 소망은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인자의 오심을 나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정하여 그의 오심에 앞서는 임박한 악들을 그에게 돌린다면, 그의 오심에서 생겨나는 선한 것들도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 악들도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곧 그의 오심에 앞서는 그 악들 말이다. 악들이 앞서 옴으로써 인자의 오심에 붙어 있는 것과 똑같이 선한 것들도 뒤따라옴으로써 그 오심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그리스도 가운데 누구를, 두 경륜이 모두 귀속되는 한 인자라는 인격에 세울지 따져 보라. 그대는 본성상 창조주도 지극히 선하다고 인정했거나 그대의 신도 가혹하다고 인정한 셈이다. 끝으로 그 비유 자체의 예를 살펴보라.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그것들이 열매를 맺으면 사람들은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알라.” 사실 나무들의 열매 맺음이 여름철에 앞서 옴으로써 그 표징이 된다면, 마찬가지로 세상의 격변들도 나라에 앞서 옴으로써 그 표징을 미리 알린다. 그런데 모든 † 표징의 경우, 사물은 그 표징의 주인에게 속하며,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의 주인이 표징을 붙인다. 이처럼 열매 맺음이 여름의 표징이듯 격변들이 나라의 표징이라면, 따라서 나라도, 나라의 표징인 격변들이 돌려지는 창조주의 것이다. 지극히 선한 신은 이렇게 잔혹하고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이것들은 분명 예언자들과 율법이 선포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포한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확증하니 말이다. 그는 더 나아가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기 전에는 하늘과 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모든 일이란 어떤 것인가? 창조주가 <선포한> 것들이라면, 원소들은 자기 주의 정해진 질서가 다 이행되기를 마땅히 참고 기다릴 것이다. 지극히 선한 신이 정한 것들이라면, 하늘과 땅이 경쟁자가 세운 것이 성취되기를 참고 기다릴지 나는 모르겠다. 창조주가 이것을 참는다면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자, 이제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좋다 - 그것들의 주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 그의 말씀만 영원히 남는다면 말이다 - 이사야도 그렇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 제자들도 경고를 받게 하라. 그들의 마음이 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 염려로 무거워지고,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물론 배부름과 세상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잊은 그들에게 닥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 이것은 모세의 경고일 것이다 -. 그러니 그날의 덫에서 건져 줄 이는 바로 일찍이 이 경고를 내렸던 이다. 예루살렘에는 가르치기에 알맞은 다른 장소들도 있었고, 예루살렘 밖에는 물러가 있을 장소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쳤다.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예고했던 이답게 말이다. “그들이 내 성전에서 나를 만났고, 거기서 그들에게 말이 전해졌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는 감람산으로 물러가곤 했다. 스가랴가 이렇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이 감람산 위에 설 것이다.” 청중에게 알맞은 시간도 있었다. 새벽에 모여야 했다. 그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주가 내게 가르침의 혀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가 아침에 내게 들을 귀를 더해 주었다.” 이것이 예언들을 폐하는 것이라면, 성취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번역 주석 1. 39.1 Kroymann은 “ei illam” 뒤에 탈문을 표시했다. Ursinus는 competere, Engelbrecht는 , Oehler는 deberi를 보충하는데, 모두 ‘이름들의 소유권이 그에게 속한다’는 뜻이 된다. 동사는 사본 MR의 adnuntiaret, transnominaret 대신 Kroymann의 adnuntiarit, transnominarit를 따랐다. 2. 39.1 “예수라는 이름도 바꾸어 붙인 이”는 창조주가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꾼 일(민수기 13:16)을 가리킨다. 라틴어 성경에서 여호수아는 Iesus로 표기되며, 이 논증은 제3권 16장에 나온다. 3. 39.2 누가복음 21:8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를 인용한다. 4. 39.3 Kroymann은 “alieno: si non, ipsius erat”로 끊고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로 읽는다. 통상 본문은 “alieno, si non ipsius erat”로 끊어 ‘그것이 그의 몫이 아니었다면’의 조건절이 된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5. 39.4 누가복음 21:8. 개역개정은 “내가 그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태복음 24:5처럼 “내가 그리스도다”(ego sum Christus)이다. 6. 39.5 첫 문장의 nec는 사본 MR의 et를 Kroymann이 고친 것이고, quando는 MR의 quod를 Engelbrecht가 고친 것이다. 7. 39.7 누가복음 21:9-11. 8. 39.8 누가복음 21:9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의 oportet를 근거로 삼는다. 9. 39.10 누가복음 21:12-13. 누가복음 21:13의 “증거가 되리라”(εἰς μαρτύριον)를 테르툴리아누스는 in martyrium으로 옮겼다. martyrium은 ‘증언’과 ‘순교’를 모두 뜻하는데, in salutem과 짝을 이루고 앞의 박해와 이어지므로 ‘순교’로 옮겼다. passiones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제자들이 겪을 일이므로 ‘고난’으로 옮겼다. 10. 39.11 스가랴 9:15-16 칠십인역.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를 삼키고 피를 마셔 제단 모퉁이처럼 피가 가득하게 되며, 9:16 후반은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이다. 칠십인역은 “거룩한 돌들이 구른다”(λίθοι ἅγιοι κυλίονται)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돌팔매질과 피 흘림을 성도들이 당하는 박해로 읽으므로(39.12-15), 번역은 삼키고 돌을 던지는 주어를 밝히지 않았다. quia는 MR의 qui를 Pamelius가 고친 것이다. 11. 39.12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블레셋 사람을 비롯한 이민족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이방 민족들’로 옮겼다. 12. 39.17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동사 uolutant는 MR의 uolutabant를 Engelbrecht가 고친 것이다. 13. 39.18 누가복음 21:14-15. 발람 이야기(민수기 22-24장)와 모세가 입이 둔하다고 핑계 대자 하나님이 입을 약속한 일(출애굽기 4:10-12)을 끌어온다. Balaae는 발람을 가리킨다(Pamelius는 Balaam으로 고쳤다). 14. 39.19 누가복음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를 받는다. 15. 39.20 이사야 44:5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불리리라”이다. <이 사람은>은 Kroymann이 보충한 hic이다. dice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icent이다. Engelbrecht는 inscribetur 대신 inscribet를 추정했으나 Kroymann은 사본대로 두었다. 16. 39.21 창세기 32:28.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과 함께 강해지는 자’(cum deo inualescens)로 풀이한다. martyr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증인을 뜻하며 ‘순교자’로 옮겼다. 17. 39.23 이사야 50:4 칠십인역. 개역개정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이다. Kroymann은 disciplinae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ut sciam(‘내가 알도록’) 또는 ad cognoscendum을 제안했다. 마지막 문장은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서 말할 능력을 받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그리스도라는 점을 전제한다. 18. 39.24 누가복음 21:16-17. rursu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usus이다. 19. 39.25 누가복음 21:19. 개역개정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는 인내로 너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saluos facietis uosmetipsos)이다. 20. 39.26 첫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9:19(개역개정 9:18 “가난한 자들의 희망이 영원히 실망되지 아니하리로다”)로, 칠십인역의 ‘가난한 자들의 인내’ 대신 ‘의인들의 인내’로 되어 있다. 둘째 인용은 칠십인역 시편 115:6(개역개정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이다. Rigaltius는 periet 대신 peribit로 읽었다. 21. 39.27 스가랴 6:14 칠십인역 “면류관은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개역개정에서는 면류관이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헨을 기념하여 성전에 두어진다. 22. 39.28 누가복음 21:20. “멸망의 때, 곧 ... 시작할 때”는 R3의 excidii cum coepisset를 따른 것이다(MR1 excidium ... coepisse). 23. 39.29 누가복음 21:25-26. “땅에서는”(in terra)은 MR의 inter를 Gelenius가 고친 것이다. 24. 39.30 누가복음 21:26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를 받아 요엘 2:30-31을 인용한다. 25. 39.32 39.32-35는 하박국 3:9-12 칠십인역이며 개역개정과 문구가 많이 다르다(예: 3:10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이므로 인용 안에서 ‘주께서’, ‘-시-’를 썼다. 26. 39.33 dispergens(흩으시니)는 MR1의 분사 읽기이고, R3는 dispergent, Pamelius는 disperges로 읽었다. 27. 39.37 누가복음 21:27. 28. 39.38 누가복음 21:28.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의 adpropinquabit는 미래형(가까이 올 것이다)이고, 개역개정은 “가까웠느니라”이다. ‘그 비유’는 39.39와 39.52-53에 인용되는 무화과나무 비유(누가복음 21:29-31)이다. 29. 39.39 누가복음 21:31. 30. 39.41 다니엘 7:13-14를 인용하면서 두 차례 삽입구를 넣는다. 첫째는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로 간 귀인의 비유(누가복음 19:11-27), 둘째는 시편 2:8이다. 31. 39.42 시편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그 나라에서는 죽지도 않고 장가들지도 않으며”는 누가복음 20:35-36에서 온 말이다. 32. 39.44 하박국 3:13 칠십인역은 복수형 ‘기름 부음 받은 자들’(τοὺς χριστούς)이고, 개역개정은 단수형 “기름 받은 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들을 누가복음 21:28의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드는 자들과 연결한다. erecturos, leuaturos, redempto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단수형이다. 33. 39.45 nedum(‘하물며’)은 MR의 necdum을 Pamelius가 고친 것이다. 34. 39.46 <그대의>는 Kroymann이 보충한 tui이다. 35. 39.47 <너그러움>은 Kroymann이 사본 MR의 libertate(‘자유’)를 libertate로 고친 것이다. 36. 39.48 ‘제자들의 질문’은 누가복음 21:7, ‘무화과나무 비유’는 누가복음 21:29-31이다. 37. 39.49 <이 되>는 Kroymann이 보충한 sit이다. 문장 끝의 ** 자리에는 siue에 짝하는 둘째 조건이 빠져 있다. Rigaltius는 “siue tui malueris, quo bona ei adscribas, quae ab aduentu eius oriuntur”를 보충했다. 이를 따르면 ‘또는 그대가 그 오심을 그대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 그의 오심에서 생겨나는 선한 것들을 그에게 돌린다면, 그의 오심에 앞서는 악들도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가 된다. 38. 39.51 Rigaltius는 in quam 대신 in quem으로 읽었다. 39. 39.52 누가복음 21:29-31. adspicite는 MR의 adspice를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개역개정 21:30은 “싹이 나면”인데,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열매를 맺으면”(cum fructum protulerint)이다. 40. 39.55 Kroymann은 이 문장을 훼손된 것으로 보아 †를 붙였다. 전승된 본문(omne autem signum eius est res, cuius est signum)을 직역하면 ‘모든 표징의 경우, 사물은 그 표징이 속한 이의 것이다’가 된다. Kroymann은 omnis autem [signum] eius est res(‘모든 사물은 그 표징이 속한 이의 것이다’)를, Ursinus는 omne autem signum eius est, res(‘모든 표징은 사물이 속한 이의 것이다’)를 제안했다. 어느 쪽이든 표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이 같은 주인에게 속한다는 뜻이며, 번역은 전승된 본문을 이 뜻으로 옮겼다. 41. 39.57 누가복음 21:9의 “먼저 있어야 하되”(oportet)를 다시 받는다. ‘지극히 선한 신’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반어적 표현이다. 42. 39.58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를 반향한다. 43. 39.59 누가복음 21:32-33. 누가복음 21:32에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기 전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대’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21:33의 ‘하늘과 땅’을 주어로 삼아 두 절을 합쳐 진술한다. 44. 39.60 <선포한>은 Kroymann이 보충한 praedicata이다. M은 sunt만, R은 fiunt(‘일어나는’)로 전하며, Engelbrecht는 sunt를 지우고 앞 문장의 peragantur를 이어 읽자고 했다. 45. 39.61 aemulus(‘경쟁자’)는 창조주 편에서 본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46. 39.62 ‘질투하는 하나님’(zelotes deus)은 출애굽기 20:5; 34:14의 표현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말씀은 남는다는 말은 누가복음 21:33과 이사야 51:6; 40:8을, 제자들에 대한 경고는 누가복음 21:34-35를 인용한다. 배불러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경고는 신명기 8:11-14이다. 줄표로 묶은 삽입구는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른 것이고, 통상 본문은 “mundi. Moysi ...”로 끊는다. 47. 39.63 liberabit(‘건져 줄 것이다’)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완료형 liberauit이다. 48. 39.65 누가복음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49. 39.66 호세아 12:4 칠십인역(12:5). 개역개정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인데, 테르툴리아누스 본문은 “내 성전에서”(in templo meo)이다. elaeon은 그리스어 τῶν ἐλαιῶν(올리브 나무들)을 옮긴 말로 ‘감람산’으로 옮겼다. 50. 39.67 스가랴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in monte elaeon은 Engelbrecht의 읽기이고 MR은 elaeone이다. 51. 39.68 누가복음 21: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quia는 Migne판의 읽기이고 MR은 qui이다. 52. 39.69 이사야 50:4 칠십인역. 개역개정 후반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다. 53. 39.70 39.58과 같이 마태복음 5:17의 ‘폐하다’와 ‘완전하게 하다’를 반향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39 40 마찬가지로 그는, 율법이 그 수난을 예표<했던> 그 자신이 언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유대인들의 그 많은 절기 가운데 그가 유월절 날을 택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바로 이 날에 대해 이렇게 신비를 선포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의 유월절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갈망도 드러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오, 유월절마저 지키기를 갈망했던 율법의 파괴자여! 과연 유대[식] 양고기가 그의 입맛을 즐겁게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는, 희생 제물로 끌려가야 할 양처럼, 그리고 털 깎는 자 앞의 양처럼 그렇게 입을 열지 않을 바로 그 사람으로서, 자기의 구원하는 피의 예표를 성취하기를 갈망했던 것인가? 그는 아무 외부인에게나 넘겨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나는 이 일에서도 다음 시편이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다.” 그는 대가 없이 넘겨질 수도 있었다. 사실 백성 앞에서 공공연히 그들의 노여움을 사고 있어서 넘겨질 것도 없이 곧바로 붙잡힐 수 있었을 그를 두고, 배반자가 무슨 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다른 그리스도에게나 어울렸을 것이고, 예언들을 성취하던 그리스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인을 팔았기 때문이다.” 실로 그 값의 액수와, 나중에 유다가 뉘우쳐 되돌려 주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쓰인 그 값의 결말을, 마태의 복음서에 담긴 대로 예레미야가 미리 노래했다. “그리고 그들은 값이 매겨진 자 - 또는 존귀하게 여겨진 자 - 의 값인 은 삼십을 받아 그것을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내주었다.” 그래서 그는 유월절을 자기 것으로서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밝힌 다음 - 하나님이 남의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빵을 자기 몸으로 삼았다. 곧 “내 몸의 예표”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몸이 참된 몸이 아니었다면 예표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빈 것, 곧 환영은 예표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몸의 실재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빵을 자기 몸으로 꾸며 냈다면, 그는 우리를 위해 빵을 넘겨주었어야 했다. 빵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편이 마르키온의 허망함에 들어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빵을 자기 몸이라 부르고, 차라리 마르키온이 심장 대신 지니고 있던 멜론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마르키온은 그 빵이 그리스도의 몸의 오래된 예표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꾀를 꾸미며 말했다. ‘자, 그의 빵에 나무를 던져 넣자.’” 곧 그의 몸에 십자가를 던져 넣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일들을 밝히는 이는 빵을 자기 몸이라 부름으로써, 그때 그가 빵으로 무엇을 뜻하려 했는지 충분히 밝혔다. 이처럼 그는 잔을 언급할 때에도 자기 피로 인친 언약을 세움으로써 몸의 실체를 확증했다. 육신의 몸이 아니라면 어떤 몸의 피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육신이 아닌 어떤 성질의 몸을 누가 우리에게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 몸은 육신이 아니라면 분명 피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증명은 육신의 증언에서, 육신의 증명은 피의 증언에서 성립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포도주 안에서 피의 오래된 예표도 알아보도록 이사야가 나설 것이다. 그는 말한다. “에돔에서 오는 자, 그 옷의 붉은빛이 보스라에서 온 자는 누구인가?” “옷차림이 이처럼 아름답고, 힘과 함께 맹렬함을 지닌 자인가? 어찌하여 네 옷이 붉고, 네 의복이 가득 차서 밟힌 포도즙 틀 바닥에서 나온 것 같은가?” 사실 예언의 영은 마치 이미 주가 수난을 향해, 곧 그 안에서 고난받도록 육신을 입고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듯이, 옷의 붉은빛으로 육신의 피투성이 모습을 가리킨다. 그 육신은 포도즙 틀 바닥에서처럼 수난의 힘에 밟히고 짜였다. 사람들도 그곳에서 포도주의 붉은빛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듯한 모습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훨씬 더 분명하게, 장차 그 지파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의 혈통이 나올 유다를 축복하는 대목에서 이미 그때 유다 안에 그리스도를 그려 보였다. “그는 포도주에 자기 옷을 빨고 포도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빨 것이다”라고 한다. 옷과 겉옷으로는 육신을, 포도주로는 피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그때 포도주를 피의 예표로 삼았던 이가 이제는 포도주 안에서 자기 피를 거룩하게 구별했다. 번역 주석 1. 40.1 누가복음 22:1 참조. sciit는 M과 R의 sci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figurat는 전승된 figurat(현재)에 Kroymann이 ra를 보충해 과거완료로 만든 읽기이므로, 보충된 시제 어미를 “예표<했던>”으로 표시했다. 2. 40.2-3 “이는 주의 유월절이다”는 레위기 23:5(개역개정 “여호와의 유월절”)이다. 이어지는 인용은 누가복음 22:15이며, concupiscentia concupii는 그리스어 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를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의 “원하고 원하였노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에는 개역개정의 “이” 유월절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없다. 3. 40.4 반어다. 율법을 파괴하러 왔다는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유월절을 지키려 갈망한 것을 두고, 유대식 양고기(uerbecina)가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라고 조롱한다. M과 F는 Iudaica 앞에 in을 전하고 R은 이를 지웠으며 Kroymann은 [in]으로 묶었다. in을 살리면 ‘유대 방식으로’라는 뜻이 되므로 “유대[식]”의 “식”을 괄호에 넣었다. delectarat는 사본의 delectare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4. 40.5 이사야 53:7. 5. 40.6-7 인용은 시편 41:9(칠십인역·불가타 40:10)이며, 개역개정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이다. expunctum은 예언이 ‘채워져 끝났다’는 뜻으로 “성취되었다”로 옮겼다. leuauit는 Latinius의 읽기이고 M과 R은 미래형 leuabit를 전한다. Kroymann은 tradi 뒤에 쉼표를 두어 ne dicerem을 목적절로 읽는다.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였다면 낯선 자에게, 대가 없이 넘겨져도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6. 40.8 마르키온의 그리스도가 백성 앞에서 공공연히 그들의 노여움을 샀다면 배반자 없이도 곧바로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inuadi는 배반을 거치지 않고 직접 덮쳐 붙잡히는 것을 뜻한다. 7. 40.10 “그들이 의인을 팔았기 때문이다”는 아모스 2:6이다. 유다가 뉘우쳐 돈을 돌려주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일은 마태복음 27:3-8에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태복음 27:9를 따라 예언을 예레미야에게 돌리지만, 인용의 내용은 주로 스가랴 11:12-13과 일치한다. 8. 40.11 마태복음 27:9-10. “또는 존귀하게 여겨진 자”(uel honorati)는 그리스어 τοῦ τετιμημένου의 라틴어 번역 adpretiati가 맞는지 테르툴리아누스가 의문을 품고 덧붙인 대안 번역으로 Kroymann은 본다. Latinius는 이 말을 지우려 했고, Engelbrecht는 uel honorarii를 추정했다. 9. 40.12 누가복음 22:19. “이것은 내 몸이다”를 ‘내 몸의 예표’(figura corporis mei)로 풀이하는 이 대목에서 figura는 실재하는 몸을 가리키는 표상이라는 뜻이다. 다음 문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예표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이 아니라 참된 몸이었다고 논증한다. 삽입구의 deus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으로 옮겼다. 10. 40.15 pepo는 멜론이나 호박 같은 박과 열매다. “마르키온이 심장 대신 지니고 있던 멜론”은 마르키온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말이며, 심장(cor)은 지성의 자리를 뜻한다. uanitas는 ‘허망함’과 ‘빈 것’을 함께 뜻하여 40.13의 “빈 것, 곧 환영”을 받는다. 11. 40.16 예레미야 11:19를 칠십인역(Δεῦτε καὶ ἐμβάλωμεν ξύλον εἰς τὸν ἄρτον αὐτοῦ)에 따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로 옮긴다. R은 crucem을, M과 F는 tamen을 전하며 Kroymann은 crucem을 채택했다. 12. 40.18 누가복음 22:20. testamentum은 잔의 말씀에 나오는 “새 언약”이므로 “언약”으로 옮겼다. 13. 40.22-23 이사야 63:1-2를 칠십인역에 따라 인용한다. Bosor는 보스라다. uiolentia는 M과 R의 uiolenta를 Engelbrecht가 고친 읽기로, 칠십인역 βίᾳ μετὰ ἰσχύος에 해당한다. “가득 차서 밟힌 포도즙 틀”은 개역개정 63:2-3의 “포도즙 틀을 밟는 자”에 해당한다. 14. 40.25-26 창세기 49:10-11,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이다. “포도의 피”(sanguine uuae)는 칠십인역 αἵματι σταφυλῆς를 따른 것이며 개역개정은 “포도즙”으로 옮긴다. Kroymann은 processurus 앞에 erat가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15. 40.27 consecrauit는 성찬의 잔에서 포도주를 자기 피로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뜻으로, “거룩하게 구별했다”로 옮겼다. in sanguinem(피의 예표로)은 M과 R의 in sanguine을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40 41 그는 말한다.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화”는 저주와 위협의 외침으로 이해해야 하며 분노하고 노여워하는 이의 것으로 돌려야 함이 분명하다. 유다가 그토록 큰 죄를 저지르고도 벌받지 않고 넘어갈 것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벌받지 않는다면 “화”는 헛된 말이다. 벌받는다면, 그는 분명 자기가 배반의 죄를 저지른 그 상대에게서 벌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가 자기 일행으로 몸소 불러들인 사람이 그토록 큰 죄에 빠져드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다면, 이제 아담과 관련하여 창조주를 두고 따지던 것들을 다시 꺼내지 말라. 그것들은 그대의 신에게도 되돌아간다. 곧 죄를 지으려는 자를 미리 내다보아 막지 않았으니 그는 몰랐다는 것, 몰랐던 것이 <아니라면> 막을 수 없었다는 것, 알기도 했고 할 수도 있었다면 원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자기 사람이 범죄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악의적인 자로 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권한다. 그대의 주장을 거슬러 지극히 선한 신을 창조주와 대등하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이 일에서도 창조주를 알아보라. 실제로 그는 주제넘게 무언가를 말한 베드로를 오히려 부인하도록 정해 둠으로써 그대에게 질투하는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입맞춤으로 넘겨져야 했다. 그는 곧 예언된 그리스도이며, 곧 백성이 입술로 사랑하던 이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회로 끌려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심문을 받는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어떤 그리스도에 대해 물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왜 그때만이라도 그들에게 다른 그리스도를 밝히지 않았는가? 그대는 “고난받을 수 있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곧 그 지극히 선한 자가 아직 모르는 자들을 죄 속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했더라도 그는 고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믿지 않을 자들이었으니 그들은 그를 죽이려는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그래서 창조주의 대적자로 드러냈다면, 왜 더더욱 고난받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그때에도 자신을 다른 그리스도로 드러내기를 삼간 것은 고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의 입에서 고백을 억지로 받아 내려 했지만, 그가 고백하더라도 믿지 않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을 성취하는 그의 행적으로 그를 알아보았어야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보아야 마땅했던 이가 자기를 숨긴 것은 그에게 걸맞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들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제부터 인자는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인자”이며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이”임을 넌지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과 성경을 맞대어 보고, 그가 자신을 누구로 이해받기를 바라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들이 유일하게 알던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떤 신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들이 시편에서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기억하던 그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떤 신이란 말인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으라.” “그러나 그는 ‘너희가 말한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니다’라는 듯이.” 그러나 그들이 다시 물을 때 그는 자신이 그들이 말한 바로 그것이라고 확증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음 말을 의문의 어조로 했을 뿐, 그들 <역시> 단언의 어조로 한 것이 아님을 그대는 무엇으로 증명하겠는가?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곧 그가 성경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에둘러 보여 주었으므로 그들이 이런 뜻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가 드러내 놓고 말하려 하지 않는 그것 말이다. 그리하여 그도 “너희가 말한다”라고 단언하는 뜻으로 대답했다. 그의 말이 정말 그런 어조였기에, 그들은 그 말이 풍기던 뜻을 끝까지 붙들었다. 번역 주석 1. 41.1 누가복음 22:22(마태복음 26:24, 마가복음 14:21 참조).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이며, 개역개정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이다. 화를 선언하는 것은 분노하는 신의 일이므로,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마르키온의 선한 신과 맞지 않는다는 논증이다. 2. 41.2 at는 M과 R의 aut를 Kroymann이 고친 읽기다. 3. 41.3-4 아담의 범죄를 막지 않은 창조주는 무지하거나 무능하거나 악의적이라는 마르키온의 논증(제2권 5장 이하에서 다룬 것)을 유다를 막지 않은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에게 되돌린다. 41.4의 은 Kroymann이 보충했다. 4. 41.6 누가복음 22:33-34.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를 음역한 말로, 출애굽기 20:5와 34:14의 “질투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옮겼다. 5. 41.7 입맞춤으로 넘겨진 일은 누가복음 22:47-48에 있다. “백성이 입술로 사랑하던 이”는 이사야 29:13(“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을 가리킨다. 6. 41.8 누가복음 22:66-67. consessum은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킨다. Junius는 Perductus 대신 productus를 제안했고, Oehler는 quaesissent 대신 quaesisset를 추정했다. 7. 41.9 alium은 41.8의 “자기들의 그리스도”와 대비되는 다른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다른 그리스도”로 옮겼다. 41.12의 alium se도 같은 뜻으로 옮겼다. 8. 41.10 누가복음 22:67. 9. 41.11 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자신을>”으로 옮겼다. alterius dei는 ‘다른 신에게 속한 자’라는 소속의 속격으로 옮겼다. 10. 41.14 누가복음 22:69. uirtus dei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옮겼다. 11. 41.15 “인자”는 다니엘 7:13(개역개정 “인자 같은 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이”는 시편 110:1을 가리킨다. 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에 나오는>”으로 옮겼다. 12. 41.17-19 누가복음 22:70과 시편 110:1(개역개정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41.19의 작은따옴표 부분은 마르키온파의 해석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개역개정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은 uos dicitis뿐이어서 마르키온파는 이 대답을 부인으로 읽었다. 13. 41.21-23 는 편집자의 보충이며 “<역시>”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공회원들의 말 ergo tu dei filius es를 의문문이 아니라 평서문으로 읽을 수 있다고 보고, 그렇다면 예수의 “너희가 말한다”도 그 평서문을 확인하는 대답이 된다고 논증한다. 14. 41.24 “그 말이 풍기던 뜻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공회가 더 이상 증언이 필요 없다고 결론지은 누가복음 22:71을 가리킨다. confirmatiue는 “단언하는 뜻으로”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41 42 실제로 그들은 그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그가 자기를 왕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며 고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다른 죄목으로 그를 무겁게 고발했을 것이다. 그가 “너희가 말한다”라는 말을, 자기가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선언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빌라도가 “네가 그리스도냐?” 하고 물었을 때에도 그는 똑같이 “네가 말한다”라고 <대답했다>. 권력이 두려워 그 이상을 대답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는 재판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재판에 세웠다.” “주 자신이 백성의 장로들과 관원들과 함께 재판에 들어왔다.” 이사야가 말한 대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 수난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했다. “그곳에서 민족들이 소동했고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꾸몄다. 세상의 왕들이 나섰고 관원들이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함께 모였다.” ‘민족들’은 빌라도와 함께 있던 로마인들이고, ‘백성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이다. ‘왕들’은 헤롯에게서, ‘관원들’은 대제사장들에게서 드러났다. 사실 그는 빌라도가 보내는 선물처럼 헤롯에게도 보내져, 호세아의 말이 참됨을 입증했다. 호세아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묶어 왕에게 선물로 끌고 갈 것이다.” 과연 헤롯은 예수를 보고 기뻐했지만, 그에게서 한마디 말도 듣지 못했다. 그가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처럼 그렇게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주가 그에게 가르침의 혀를 주어 언제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시편에서 그의 목구멍에 붙어 있다고 한 그 혀이며, 그는 그때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가장 악한 죄인 바라바는 선한 사람인 양 목숨을 선물로 받았고, 가장 의로운 그리스도는 살인자인 양 죽음에 넘겨지도록 요구되었다. 게다가 두 범죄자가 그의 양편에 못 박혔다. 곧 그가 불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마르키온은 그의 옷이 군인들에 의해 일부는 나뉘고 <일부는> 제비에 맡겨졌다는 대목을 삭제했다. 시편의 예언을 의식한 것이다. “그들이 내 옷들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내 의복을 두고 제비를 던졌다.” 그렇다면 십자가 자체도 없애 버려라. 같은 시편이 그것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손과 발을 찔렀다.” 그 시편에서는 그의 최후 전체를 읽을 수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쌌다. 나를 보는 모든 자가 코웃음 치며 나를 비웃었다.” “그들은 입술로 말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었으니 하나님이 그를 건지게 하라.’” 이제 옷에 관한 증언이 무슨 소용인가? 그대의 위조로 얻은 전리품을 가져라. 시편 전체가 그리스도의 옷이다. 그런데 보라, 원소들도 흔들린다. 그것들의 주가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적대자가 해를 입었다면, 하늘은 빛들로 꽃피었을 것이고, 해는 더욱 빛살을 뽐내며 뛰놀았을 것이며, 낮은 더 오래 멈추어 서 있었을 것이다. 형틀에 매달린 마르키온의 그리스도를 기꺼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이런 것들은 설령 미리 선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논증만으로도 내게 유효했을 것이다. 이사야는 “내가 하늘을 흑암으로 입히겠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아모스도 다음과 같이 말한 그날일 것이다. “그날에 이렇게 될 것이다. 주가 말한다. 해가 정오에 질 것이고” - 그대는 여기서 제육시를 가리키는 표시도 얻는다 - “땅 위가 캄캄해질 것이다.” 성전의 휘장도 찢어졌다. 천사가 딸 시온을 포도원의 망대처럼, 참외밭의 원두막처럼 버려두고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오, 그리스도는 시편 30편에서까지 얼마나 끝까지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던가! 그는 아버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 죽어 가면서도 마지막 목소리로 예언자들을 성취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을 하고 그는 숨을 내쉬었다. 누가? 영이 자기 자신을 내쉬었는가, 아니면 육신이 영을 내쉬었는가? 그러나 영은 자기 자신을 내쉴 수 없었다. 내쉬는 것이 따로 있고 내쉬어지는 것이 따로 있다. 영이 내쉬어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해 내쉬어져야 한다. 만일 그가 영뿐이었다면, 숨을 내쉬었다기보다 떠나갔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아니라면 누가 영을 내쉬겠는가? 육신은 영을 가지고 있을 때 숨을 쉬고, 그렇게 영을 잃을 때 그것을 내쉰다. 결국 육신이 없었고 육신의 환영만 있었는데, 그 환영은 영이었으며, 그 영이 자기 자신을 내쉬고 내쉬면서 떠나갔다면, 환영이던 영이 떠났을 때 의심할 여지 없이 환영도 떠났고, 환영은 영과 함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숨을 내쉰 뒤에도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으며, 빌라도에게 아무것도 요청되지 않았고, 형틀에서 아무것도 내려지지 않았으며, 세마포에 아무것도 싸이지 않았고, 새 무덤에 아무것도 안치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환영이었다면, 따라서 그 안에 아직 영도 있었던 것이다. 영이 떠났다면, 따라서 영은 환영도 가지고 가 버렸다. 이제 이단의 뻔뻔함에 남은 일은 그곳에 환영의 환영이 남아 있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물론 요셉은 자기가 온 정성을 다해 다룬 것이 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요셉은 범죄에서 유대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았던 사람이며,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해악을 끼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은 복 있는 사람”이다. 번역 주석 1. 42.1 누가복음 23:2. 개역개정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앞 공회 심문 장면의 누가복음 22:69-70을 묶은 표현으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왕 그리스도’라는 고발을 이 고백과 같은 내용으로 본다. 2. 42.2 <않>: Kroymann은 R3의 nisi를 따르고, M과 R1은 si로 읽는다. ‘너희가 말한다’는 누가복음 22:70(개역개정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이며, sic를 41.24의 sic에 대한 Engelbrecht의 설명대로 긍정의 어조(confirmatiue)로 보고 ‘자기가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라고 옮겼다. 3. 42.3 누가복음 23:3. 개역개정에서 빌라도의 물음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네가 그리스도냐?”로 인용한다. <대답했다>는 Kroymann이 보충한 respondit이다. potestas는 여기서 빌라도의 권한을 가리키므로 ‘권력’으로 옮겼다. 4. 42.3 이사야 3:13-14를 칠십인역 형태로 따르되 미래 시제를 과거로 바꾸어 그리스도의 재판에 적용한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이다. 5. 42.4 archontes는 칠십인역의 그리스어 ἄρχοντες를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대로 쓴 말이며, 42.5-6에서도 같은 낱말을 ‘관원들’로 옮겼다. 6. 42.5 시편 2:1-2. 개역개정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의문사 대신 ibidem(‘그곳에서’)을 넣어 시편을 빌라도 앞의 장면에 바로 적용한다. 7. 42.6 같은 시편을 헤롯, 빌라도, 이방인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하는 해석은 사도행전 4:25-27에 있다. 8. 42.7 누가복음 23:7-11.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일을 ‘선물’로 보는 것은 다음 단위의 호세아 인용과 연결된다. 9. 42.8 호세아 10:6(칠십인역). xenium은 그리스어 ξένια, 곧 손님이나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개역개정은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져서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로, 묶여 가는 대상이 우상 송아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칠십인역의 ‘그를’을 그리스도로 읽는다. 10. 42.9 누가복음 23:8-9. 11. 42.10 이사야 53:7, 이사야 50:4, 시편 22:15(불가타 21:16). lingua disciplinae는 칠십인역 γλῶσσαν παιδείας에 해당하여 ‘가르침의 혀’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학자들의 혀”이다. ‘언제’는 Kroymann이 칠십인역의 ἡνίκα에 맞추어 M과 R의 quomodo(‘어떻게’)를 quando로 고친 읽기를 따른 것이다. tondentem도 M과 R의 tondent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이다. 시편 22:15 개역개정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이다. 12. 42.11 누가복음 23:18-25. 13. 42.12 누가복음 23:32-33; 이사야 53:12; 누가복음 22:37(개역개정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14. 42.13 누가복음 23:34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를 마르키온이 자기 복음서에서 뺐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전한다. <일부는>은 Latinius가 보충한 partim이며, sorti는 M과 R의 sort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이다. 15. 42.14 시편 22:18(불가타 21:19). 개역개정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이다. 라틴어는 uestimenta와 uestitum으로 겉옷과 속옷을 구별하지 않아 ‘옷들’과 ‘의복’으로 옮겼다. 16. 42.15 crucem ipsa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tamen ipsam이다. de ea는 M과 R의 de eo를 고친 Engelbrecht의 읽기로, ‘그것’은 십자가를 가리킨다. 17. 42.16 시편 22:16 후반(개역개정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exitus는 생의 끝, 곧 죽음을 뜻하여 ‘최후’로 옮겼다. 18. 42.17 시편 22:16 전반, 22:7. synagoga maleficorum은 개역개정의 “악한 무리”에 해당한다. synagoga는 ‘회당’을 뜻하는 낱말이기도 하여 유대인 회중을 떠올리게 하지만, 시편 본문의 뜻을 따라 ‘무리’로 옮겼다. naso inridebant는 ‘코로 비웃었다’는 뜻이어서 ‘코웃음 치며’로 옮겼다. 19. 42.18 시편 22:7-8. 개역개정 22:8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이다. 20. 42.19 군인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어 가진 일에 빗대어, 마르키온이 옷 구절을 지운 것을 ‘위조로 얻은 전리품’이라 부른다. 시편 22편 전체가 수난을 예언하므로 옷 구절 하나를 지워도 증언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지이다. 21. 42.20 누가복음 23:44-45. elementa는 하늘, 해, 낮처럼 세계를 이루는 요소를 가리킨다. ‘적대자’는 창조주의 적대자로 상정된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이다. 원소들이 창조주의 것이므로, 고난받는 이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면 원소들이 함께 흔들리고 창조주의 적대자라면 기뻐했으리라는 논증이다. 22. 42.21 argumentata는 M의 읽기이고, R은 argumenta이다. 23. 42.22 이사야 50:3(개역개정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24. 42.23 아모스 8:9; 누가복음 23:44. 개역개정 아모스 8:9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이다. 정오는 유대식 시간으로 제육시이다. contenebrabit는 M과 R의 contenebrauit를 고친 Pamelius의 읽기이며, Kroymann은 super terram 뒤에 ‘대낮에’에 해당하는 말이 빠졌을 가능성을 적어 두었다. 25. 42.24 누가복음 23:45; 이사야 1:8(개역개정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성전을 지키던 천사가 떠났다는 생각과 비슷하게,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 6.299-300에서 성전 파괴 전에 제사장들이 “우리가 여기서 떠나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26. 42.25 시편 31:5(칠십인역과 불가타 30:6)와 누가복음 23:46. 라틴어 시편 번호 tricesimus psalmus를 그대로 ‘시편 30편’으로 옮겼으며 개역개정으로는 31편이다. Christus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과 R은 Christum이다. ipsum reddere는 ‘그 말 자체를 되풀이하다’로 보고 옮겼다. Engelbrecht는 42.26의 결락을 인정하지 않고 를 넣고 ipsum을 spiritum으로 고쳐 ‘다윗이 시편 30편에서까지 그리스도가 영을 내어 주는 것을 얼마나 끝까지 그려 냈던가’로 읽고, uociferatur를 uociferabatur로 고치기를 제안한다. 27. 42.26 Kroymann은 시작 부분에 결락(**)을 표시했다. 뒤따르는 ‘이 말을 하고’로 보아 누가복음 23:46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틴어 in manus tuas commendo spiritum meum)가 빠진 것으로 추정한다. ‘예언자들을 성취하려는’은 마태복음 5:17을 반향한다. 28. 42.26 expirauit는 누가복음 23:46의 고대 라틴어 역본 낱말로 그리스어 ἐξέπνευσεν에 해당하며, 개역개정은 “숨지시니”이다. 42.26-33의 논증은 spiritus가 ‘숨’과 ‘영’을 모두 뜻하고 expirare가 ‘숨을 내쉬다’와 ‘숨지다’를 모두 뜻하는 데 기댄다. 논증을 따라가도록 expirare는 ‘내쉬다’, spiritus는 ‘영’으로 일관되게 옮겼다. 29. 42.30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가 참된 육신 없이 육신의 모습만 지녔다고 보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환영이 영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제하고, 영이 떠나면 환영도 함께 사라졌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30. 42.31 누가복음 23:50-53. sindon은 개역개정의 ‘세마포’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은 무덤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라 하고, ‘새 무덤’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27:60과 요한복음 19:41에 있다. 31. 42.34 누가복음 23:50-51(개역개정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시편 1:1. 라틴어 cathedra pestium은 ‘해로운 자들의 자리’라는 뜻이어서 ‘해악을 끼치는 자들의 자리’로 옮겼다. 개역개정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42 43 주를 장사한 사람도 예언되고 이미 그때에 마땅히 복되다고 일컬어져야 했다. 예언이 동트기 전에 향료를 준비해 가지고 무덤으로 모여든 저 여인들의 봉사조차 지나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일에 관해서는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얼굴을 찾을 것이다. 동트기 전에 그들은 나를 향해 깨어 일어나 말할 것이다. ‘가자, 주에게로 돌아가자. 그가 빼앗아 갔으나 [그가 말했다] 우리를 고쳐 줄 것이요, 그가 쳤으나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 뒤에 그가 우리를 낫게 할 것이요, 셋째 날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실로 이 말들이 저 여인들의 생각 속에서, 주에게 맞았다고 여기게 만든 눈앞의 상실의 고통과, 자기들이 회복되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그의 부활의 소망 사이를 오갔다는 것을 누가 믿지 않겠는가? 그런데 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사야의 말대로 그의 무덤이 그 가운데서 치워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 두 천사가 나타났다. 두 증인 위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대개 이만큼의 수행원을 곁에 두곤 했다. 무덤에서, 그리고 천사들의 저 환상에서 돌아오는 여인들도 이사야는 미리 내다보았다. “여인들아,” 그가 말한다. “[오라.] 환상에서 오는 이들아, 오라.” 곧 주의 부활을 알리러 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불신이 계속된 것은 잘된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예언자들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우리의 변론이 끝까지 성립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주가 그들에게 다가와 동행했는데, 그는 자신이 그임을 드러내지 않았고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는 것까지 모르는 체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생각했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자기들의 그리스도, 곧 창조주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다른 이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를 창조주의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창조주의 그리스도로 여겨지고 있었을 때, 그가 사람들이 여기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신에 대한 이런 생각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이 오류의 장본인이요, 지극히 선한 신이라는 칭호를 거스르는 진리의 배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 뒤에도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그들이 그렇게 여겼었다고 말한 그 사람과 다른 이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는 그들을 꾸짖었다. “오 어리석고 마음이 더디어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아.” 그가 무엇을 말했다는 것인가? 자기가 다른 신에게 속한다는 것인가? 증명해 보라. 그러면 나는 손을 들겠다. 아니면 천사들도 여인들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가 갈릴리에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하라. 그는 인자가 넘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했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꾸짖은 것은, 그들이 오직 수난 때문에 걸려 넘어졌고 여인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부활을 믿는 데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그들은 그가 자기들이 여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겼던 것이 믿어지기를, 곧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믿어지기를 원하여, 자신이 그들이 여겼던 그 사람, 곧 창조주의 그리스도요 이스라엘의 구속자임을 확증했다. 그런데 몸의 실재에 관해서 무엇이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가 환영이 아닐까 망설이고, 아니 오히려 환영이라고 믿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찌하여 너희가 당황하느냐?” <그가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생각들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라. 바로 나다. 영은 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보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마르키온은 자기에게 불리한 몇몇 대목을, 짐작건대 바로 그런 술책으로, 자기 복음서에서 지우려 하지 않았다. 지울 수 있었는데도 지우지 않은 이 대목들을 근거로, 그가 지운 대목들에 대해서는 그가 지웠다는 사실이 부인되거나 그가 마땅한 이유로 지웠다고 말해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겨 두는 것은, 지워 버리는 것 못지않게 달리 해석함으로써 뒤엎어 버리는 대목들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이 “영은 뼈를 가지고 있지 않다, 너희가 보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라고 말해진 것으로 보려 한다. 마치 ‘너희가 보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가 영에 관련되는 것처럼, 곧 내가 영과 마찬가지로 뼈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은 뼈를 가지고 있지 않다, 너희가 보듯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비틀어 말한 까닭은 무엇인가? 또 뼈가 없었다면, 왜 그는 뼈로 이루어진 지체인 자기 손과 발을 그들이 살펴보도록 내밀었는가? 왜 그는 “그리고 내가 그인 줄 알라”라고 덧붙이는가? 곧 그들이 이전부터 몸을 지닌 이로 알고 있던 그 사람 말이다. 또 만일 그가 철저히 환영이었다면, 왜 자신을 환영이라고 믿는 그들을 꾸짖었는가? 더구나 그들이 아직 믿지 않자, 그는 자신에게 치아도 있음을 보여 주려고 음식을 청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약속을 이행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자들의 가르침, 견해, 감정, 생각, 능력, 수난에 의해, 그리고 부활에 의해서도 창조주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가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라고 보내면서,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나가도록 명령하여 시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마르키온이여, 나는 그대가 가엾다. 그대는 헛수고를 했다. 그대의 복음서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는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43.1 ‘주를 장사한 사람’(sepultor)은 아리마대 요셉이다(누가복음 23:50-53). ‘마땅히 복되다고 일컬어져야 했다’는 앞 장 끝에서 요셉에게 적용한 시편 1: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누가복음 23:51 참조)을 가리킨다. 여인들의 일은 누가복음 23:55-24:1이다. 2. 43.2-43.3 호세아 5:15-6:2를 칠십인역에 가까운 라틴어로 인용한다. ‘동트기 전에 나를 향해 깨어 일어나’(ante lucem uigilabunt ad me)는 칠십인역 ὀρθριοῦσι(새벽에 일어나다)를 옮긴 것으로, 개역개정 5:15의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와 다르다. ‘그가 빼앗아 갔으나’(eripuit)는 칠십인역 ἥρπακεν, 개역개정 6:1의 ‘찢으셨으나’에 해당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miserebitur)는 개역개정의 ‘싸매어 주실 것’과 다르다. ‘셋째 날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resurgemus)는 개역개정 6:2의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에 해당한다. 3. 43.3 [dixit](‘그가 말했다’)는 R(Rhenanus 판)이 삭제한 낱말이다. 4. 43.4 restitutuiri는 Engelbrecht의 추정으로 restitutum iri(회복되리라)를 뜻하며, M과 R은 restitui rite이다. arbitrabantur는 M과 R의 arbitrantur를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destitutio는 주를 잃은 상태를 가리키므로 ‘상실’로 옮겼다. 5. 43.5 ‘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는 누가복음 24:3을 가리킨다. ‘그의 무덤이 그 가운데서 치워졌다’는 칠십인역 이사야 57:2(ἡ ταφὴ αὐτοῦ ... ἦρται ἐκ τοῦ μέσου)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 57:2(‘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와 문구가 다르다. 6. 43.6 누가복음 24:4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 하고 24:23에서 이들을 천사로 부른다. ‘두 증인’은 신명기 19:15(‘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를 가리킨다. laterenses는 곁에서 수행하는 호위자들을 뜻하므로 ‘수행원’으로 옮겼다. 7. 43.7-43.8 이사야 27:11 칠십인역(γυναῖκες ἐρχόμεναι ἀπὸ θέας, δεῦτε, ‘구경거리에서 오는 여인들아, 오라’)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27:11(‘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은 내용이 다르다. 첫 번째 [uenite](‘오라’)는 Pamelius가 삭제한 반복어이다. 여인들이 소식을 전하는 장면은 누가복음 24:9이다. 8. 43.10-43.1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누가복음 24:13-33)이다. 43.11은 누가복음 24:21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putabamus(‘우리는 생각했다’)는 개역개정의 ‘바랐노라’(ἠλπίζομεν)와 다르다. redemptor Israhelis는 개역개정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에 해당하며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옮겼다. 9. 43.12 existimabatur는 Latinius의 수정이며 M과 R 및 다른 판들은 existimatur이다. 과거 시점의 서술이므로 수정된 읽기를 따랐다. 10. 43.15 누가복음 24:25이다. 개역개정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지만, 따옴표로 표시된 ‘그가 너희에게 말한’(quae locutus est ad uos)은 마르키온의 복음서가 예언자들을 빼고 바꾼 문구다. Epiphanius(Panarion 42)도 마르키온 본문이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으로 읽었다고 전한다. 이어지는 ‘그가 무엇을 말했다는 것인가?’는 이 바뀐 문구를 받아 묻는 말이다. 11. 43.15-43.16 quaenam locutus? alterius se dei esse? proba, et manus dedo. an eadem은 Kroymann의 추정 본문이다. M과 R1은 se dei esse probat et manus de deo. an eadem, R3와 통행본은 quae locutus alterius se dei esse probat, sed eiusdem dei. nam eadem(‘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다른 신의 것임을 증명하지 않고 같은 신의 것임을 증명한다. 천사들도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이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고, manus dare(손을 내주다)는 항복을 뜻하므로 ‘손을 들겠다’로 옮겼다. an은 Kroymann의 설명대로 ‘아니면 ... 이 아닌가?’로 옮겼다. 12. 43.17 누가복음 24:6-7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개역개정의 ‘죄인의 손에’가 없다. 13. 43.20 사본 M에는 itaque부터 다음 existimauerant까지가 빠져 있고, credi se eum은 R3의 읽기다(R1은 credidisse eum). 문장 구조가 매끄럽지 않아 ‘그들이 여겼던 것이 믿어지기를, 곧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믿어지기를’로 두 요소를 함께 살려 옮겼다. 14. 43.21 누가복음 24:37은 개역개정에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πνεῦμα)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phantasma(환영)로 읽는다. 베자 사본(D)도 이 자리에서 φάντασμα로 읽는다. 마르키온이 그리스도의 몸을 환영으로 본 데 맞서는 대목이므로 phantasma는 ‘환영’으로 통일했다. 15. 43.22 (‘그가 말한다’)는 Pamelius가 보충한 말이다. 인용은 누가복음 24:38이며, 개역개정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와 문구가 조금 다르다. 16. 43.23 누가복음 24:39이다. 인용에는 개역개정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의 ‘살’이 없다. sicut me habentem uidetis는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로도, 마르키온의 해석처럼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 없는 영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로도 읽힐 수 있다. 43.26-43.27의 논증이 이 중의성에 달려 있으므로 ‘가지고 있는’의 목적어를 밝히지 않고 옮겼다. 17. 43.24 Kroymann은 illa ... industria를 ‘바로 그런 술책으로’라는 탈격구로 읽고 credo를 삽입구로 끊는다. 통행본은 illa, credo industria로 끊어 illa를 지우지 않은 대목들의 목적어로 읽는다. 18. 43.25 Engelbrecht는 parcit 대신 완료형 parsit를 의심했다. non minus는 subuertit와 이어 ‘지우는 것 못지않게 ... 뒤엎는다’로 옮겼다. 19. 43.26 quasi는 M과 R에서 조금 앞 dictum 뒤에 있는데, Kroymann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Kroymann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sicut me uidetis habentem을 ‘너희가 보듯이 내가 뼈 없는 영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으로 이해한다. 20. 43.28-43.29 누가복음 24:40과 24:39이다. ‘그리고 내가 그인 줄 알라’(et scitote, quia ego sum)는 그리스어 24:39의 ὅτι ἐγώ εἰμι αὐτός(개역개정 ‘나인 줄 알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서는 ‘알라’(scitote)가 독립된 명령이지만, 그리스어 본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고 ὅτι절이 ‘보라’(ἴδετε)에 이어진다. 21. 43.31 누가복음 24:41-43이다. 22. 43.32 ‘약속’(sponsio)은 4권 앞부분(6장)에서 마르키온 자신의 복음서로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그리스도임을 보이겠다고 한 계획을 가리킨다. prophetarum은 이어지는 가르침, 견해, 감정, 생각, 능력, 수난을 모두 꾸미는 속격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이 예언자들이 미리 말한 것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사도 파송은 누가복음 24:47이고,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는 시편 19:4(칠십인역 18:5)이며, 개역개정은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33/tertullian-marcion-4/index.html#p-43 출처·이용 조건 이 저장소의 한국어 AI 번역 시제품; Codex AI 생성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AI 한국어 번역에 프로젝트가 보유할 수 있는 권리의 범위. 저작권 성립을 단정하지 않음 Tertullian; Emil Kroymann (ed.), CSEL 47 (1906); University of Leipzig (2014), OpenGreekAndLatin/csel-dev.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TEI 헤더에 이용허락을 명시한 라틴어 전자 원문과 인쇄면 대조·교정 가공물 Claude 한국어 번역·메모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한국어 번역·메모에 보유 가능한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