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논박 아타나시우스 자료 판본: alpha-0.28 수록 범위: PTA Savvidis 예비 교감 전자판의 1-47장 전체. 기록한 전자 중복·삽입 오류를 PG 25의 해당 인쇄면으로 확인하여 교정. 고정판: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 원자료 SHA-256: 38384649c863136c533a173093c429922f53bdb437b996ec419b2e4d2ed58df7 형식: 한국어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만물의 진리에 관한 지식은 사람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기보다 그 자체로 알려질 수 있다. 날마다 그 행위로 소리 높여 외치다시피 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햇빛보다 더 밝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대가 이 지식에 관해 듣기를 원하니, 복된 이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조금 설명해 보자.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이 믿음을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좋은 것을 사랑하여 다른 이들에게서도 듣기를 원한다.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은 진리를 알리는 데 스스로 충분하다. 이 일에 관해 우리의 복된 스승들이 지은 글도 많이 있다. 누구든 그 글들을 읽으면 성경의 해석을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얻기를 갈망하는 지식에도 이를 수 있다. 지금은 스승들의 저술을 손에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에게 전하고 써 주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구주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이다. 아무도 우리 말씀의 가르침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근거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비방하며 우리를 조롱하고 크게 비웃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의 무감각을 특히 가엾게 여길 만하다. 십자가를 비방하면서 그 능력이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일을 이루는 행위들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것도 보지 못한다. 그들도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마음을 기울였다면 이토록 큰 일을 조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분을 만물의 구주로 알아보고, 십자가가 피조물을 해친 것이 아니라 치료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십자가가 세워진 뒤 모든 우상 숭배가 무너졌고, 귀신들의 온갖 환영도 이 표징으로 쫓겨난다. 그리스도만이 경배를 받으시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된다. 반대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며, 그분은 반대하는 이들의 영혼을 날마다 보이지 않게 설득하여 바꾸신다. 그러니 누군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일을 여전히 인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 오르신 분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만물의 구주라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겪는 일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비난하면서 그 빛에는 감탄하는 사람의 경우와 같아 보인다. 그는 온 피조물이 그 빛으로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본다. 빛도 아름답고 그 빛의 근원인 태양은 더 아름답다. 이와 같이 온 세상이 그분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하게 된 일이 신적인 일이라면, 그러한 성취의 근원이며 인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믿지 않는 이들의 무지를 밝혀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하겠다. 거짓이 드러난 뒤에는 진리가 스스로 빛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대도 진리를 믿었으며 그리스도를 알고 속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대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그분에 관한 지식과 믿음을 모든 것보다 귀하게 여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Μακάριε는 ‘복된 이여’라는 호칭과 마카리오스라는 이름의 호격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호칭으로 옮겼다. 이 장의 전자판에 반복 삽입된 διδασκάλων과 ταῦτα는 PG 25, 4열을 대조하여 제거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 2 처음에는 악이 없었다. 지금도 거룩한 이들 가운데에는 악이 없으며, 그들에게 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중에 악을 생각해 내고 스스로에게 그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며, 우상에 관한 생각도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 냈다. 만물의 창조자이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선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신 그분은 자신의 말씀, 곧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자신과 닮게 하심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알도록 지으셨다. 또 자신의 영원함을 생각하고 아는 능력을 주셨다. 인간이 이 같은 상태를 지켜 하나님에 관한 생각에서 결코 떠나지 않고 거룩한 이들과 사는 삶에서도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은혜를 주신 분의 은혜를 간직하고, 아버지의 말씀에게서 받은 자신의 능력도 간직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 없이 복되고 참으로 죽지 않는 삶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데 아무 장애가 없는 인간은 자신의 깨끗함을 통해 아버지의 형상이신 하나님 말씀을 늘 바라본다. 인간은 그 말씀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또 말씀을 통해 온 우주에 미치는 섭리를 깨닫고 크게 놀란다. 감각으로 느끼는 것들과 육체에 관한 온갖 생각 위로 올라서, 정신의 능력으로 하늘의 신적인 것들,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들과 연결된다. 인간의 정신이 육체적인 것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 그것들에서 생기는 욕망이 외부에서 들어와 섞이지 않고, 처음 지어졌을 때처럼 온전히 위에 머물며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감각적인 것들과 모든 인간적인 것을 지나 높이 오른다. 말씀을 보고 그분 안에서 말씀의 아버지도 본다. 그분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그분을 향한 갈망으로 새로워진다. 처음 생겨난 인간도 그러했다. 히브리 말로 아담이라 불린 그 사람에 관해 거룩한 성경은, 처음에는 부끄럼 없이 담대하게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거룩한 이들과 함께 살며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들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그가 이런 관상을 누리던 곳을 거룩한 모세도 비유적으로 낙원이라 불렀다. 영혼의 깨끗함만으로도 하나님을 거울처럼 비추어 볼 수 있다. 주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복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번역 주석 1. κατ’ εἰκόνα와 ὁμοίωσις는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에 관한 표현이다. 인간의 정신이 말씀을 바라보는 논증의 출발점이다. 끝의 인용은 마태복음 5:8이다. 2. 전자판에서 persName 요소 안과 뒤에 두 번 적힌 Ἀδὰμ은 PG 25, 8열을 대조하여 한 번으로 교정했다. ‘낙원’의 τροπικῶς는 비유적인 명명을 가리킨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 3 앞서 말했듯이 창조자는 인류를 그렇게 지으셨고, 그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셨다. 사람들은 더 좋은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그것을 깨닫는 데 게을러져, 자신들에게 더 가까운 것들을 찾았다. 그들에게 더 가까운 것은 몸과 몸의 감각이었다. 그래서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들에서 자신의 정신을 돌렸다. 그들은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을 살피며 몸과 다른 감각적인 것들을 알아보고, 마치 자기 것에 속은 듯 자신을 향한 욕망에 빠졌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일보다 자기 것들을 앞세웠다. 거기에 몰두하여 가까운 것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욕망으로 어지럽고 혼탁해진 영혼을 육체의 쾌락 속에 가두었고, 처음에 하나님에게서 받은 능력을 완전히 잊었다. 이 일이 사실임은 거룩한 성경이 처음 빚어진 인간에 관해 말하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도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몸을 바라보는 일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뱀의 권유로 하나님을 향하던 생각에서 떠나, 자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은 육체의 욕망에 빠졌고,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했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달은 것은 옷이 없어서라기보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바라보던 관상을 잃고 생각을 반대되는 것들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이며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 곧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갈망하는 일에서 떠나, 육체의 여러 개별 욕망에 빠졌다. 흔히 그러하듯 각각의 것과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된 그들은 그 욕망에 매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버리는 일마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혼에 비겁함과 두려움, 쾌락과 죽을 것들에 관한 생각이 생겨났다. 욕망에서 떠나려 하지 않으므로 죽음과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또 욕망하면서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하자 살인과 불의를 배웠다. 어떻게 이런 일까지 하게 되었는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 4 영혼은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데서 떠나 몸의 개별 작용을 잘못 사용했다. 몸을 바라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쾌락이 자신에게 좋다고 보자, 미혹되어 좋은 것이라는 이름을 잘못 적용하고 쾌락 자체가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칼을 요구하면서 그것이 제정신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영혼은 쾌락을 사랑하여 여러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본성상 쉽게 움직이므로 좋은 것들에서 돌아섰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덕을 따라 움직이지도,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자기 능력을 다른 용도로 바꾸고, 스스로 생각해 낸 욕망을 위해 그 능력을 잘못 사용한다. 영혼은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좋은 것들을 향할 수 있듯이 좋은 것들에서 돌아설 수도 있다. 좋은 것에서 돌아서면 반드시 그 반대되는 것들을 생각한다. 앞서 말한 대로 본성상 쉽게 움직이므로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알고, 몸의 지체를 두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본다. 존재하는 것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좋은 것들은 존재하며, 나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그 본보기를 얻기 때문이다. 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몸에는 피조물을 보는 눈이 있고, 그 완전히 조화로운 질서를 통해 창조자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듣는 귀도 있으며, 필요한 일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뻗는 손도 있다. 그런데 영혼은 좋은 것들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활동하던 데서 떠나, 미혹되어 반대되는 것들을 향해 움직인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 능력을 보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몸의 지체를 반대되는 일로 움직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피조물을 보는 대신 눈을 욕망으로 돌려, 자신이 그 일도 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움직이기만 하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라 마땅한 대상을 향해 움직이도록 지어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도의 목소리도 이렇게 권한다.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 번역 주석 1. τὰ μὴ ὄντα(존재하지 않는 것들)는 악을 독립된 창조 실체로 보는 주장을 거부하는 논증에 쓰인다. 이 표현을 인간의 악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으면 뒤의 논증과 맞지 않는다. 끝의 인용은 고린도전서 6:12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 5 인간의 대담함은 유익하고 합당한 것을 살피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바라보다가 반대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을 반대되는 일로 움직여 살인을 하게 만들고, 귀를 불순종으로 이끌며, 다른 지체들도 합당한 자녀 출산 대신 간음을 행하게 했다. 혀는 좋은 말을 하는 대신 신성모독과 욕설과 거짓 맹세에 사용하고, 손은 다시 도둑질하고 같은 인간을 때리는 데 사용했다. 후각은 욕정을 자극하는 여러 향기에, 발은 피를 흘리는 데 재빨리 움직이도록 사용했다. 배는 술에 취하고 끝없이 탐식하는 데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은 영혼의 악이며 죄다. 이 일들의 원인은 더 좋은 것들에서 돌아선 것뿐이다. 경기장에서 말을 모는 사람이 달려가야 할 목표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목표에서 돌아서,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몰아간다. 원하는 대로 몰 수 있으므로, 때로는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돌진하고 때로는 벼랑으로 달리며, 말의 속도에 자신을 맡겨 어디든 간다. 그러면서 이렇게 달리면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달리는 일만 보고 자신이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혼도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서 돌아서 몸의 지체를 합당하지 않게 몰아간다. 더 정확히는 영혼 자신도 지체들과 함께 스스로에게 몰려가 죄를 짓고 자신을 위해 악을 만들어 낸다. 길을 잃고 진리의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 복된 바울은 그 목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로부터 부르신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거룩한 이는 좋은 것을 바라보았으므로 결코 악을 행하지 않았다. 번역 주석 1. 목표를 향해 달린다는 인용은 빌립보서 3:14이다. 전자판의 문장 시작에 잘못 삽입된 μέλη는 PG 25, 12열을 대조하여 제거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5 6 그리스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길을 잃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악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 창조자가 존재하는 것들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그들의 말대로 악이 그 자체의 실체와 본질을 지닌다면, 창조자는 존재하는 것들의 주인이 아닐 것이다. 혹은 그분을 만물의 창조자라고 하려면, 악도 그분이 지으셨다고 반드시 인정하게 된다. 그들에 따르면 악도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하고 불가능하다. 악은 선에서 나오지 않으며 선 안에 있지도, 선을 통해 생기지도 않는다. 본성이 악과 섞이거나 악의 원인이 된다면 더는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단에 속하여 교회의 가르침에서 떨어지고 믿음에서 파선한 이들도, 정신을 잃고 악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아버지 외에 다른 신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 신은 생겨난 적이 없으며 악을 지은 자이고 악의 근원이며 피조물의 창조자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경과 인간의 생각 자체로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그들이 이 같은 것을 지어내며 미쳐 있는 것도 그 생각을 사용해서다. 우리의 주이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모세의 말씀을 확증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또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이시라면, 어떻게 이분 외에 다른 신이 있겠는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전체에 걸쳐 모든 것을 채우시는데, 그들이 말하는 신은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구주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 곧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주인이신 것들을 다른 누가 지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마치 세력의 균형 속에서 악한 신도 선한 신에게 속한 것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심한 불경에 빠지는지 보라. 능력이 같은 둘 사이에서는 더 높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다. 한쪽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쪽이 존재한다면, 둘의 능력도 같고 무능도 같기 때문이다. 존재함으로 서로의 뜻을 이기므로 능력이 같다. 또 원하지 않는 일이 자기 뜻을 거슬러 일어나므로 둘 다 무능하다. 선한 신은 악한 신의 뜻에 반하여 존재하고, 악한 신도 선한 신의 의지에 반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여기서 ὑπόστασις는 악이 독립된 실재를 갖는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실체’로 옮겼다. 한 분 주에 관한 말은 신명기 6:4(마가복음 12:29), 하늘과 땅의 주인 아버지에 대한 감사는 마태복음 11:25와 누가복음 10:21의 말씀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6 7 그들에게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보이는 것들이 악한 신의 작품이라면 선한 신의 작품은 무엇인가? 창조자의 피조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한 신을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이 없다면, 그 신이 존재한다는 표지는 무엇인가? 창조자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알려진다. 또 어떻게 서로 대립하는 둘이 존재할 수 있는가? 둘을 서로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은 서로를 없애므로 같은 곳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본성이 섞일 수 없고 서로 다르므로, 한쪽이 다른 쪽 안에 존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둘을 갈라놓는 것이 셋째 신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 셋째는 어떤 본성을 지니겠는가? 선한 신의 본성인가, 악한 신의 본성인가?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양쪽의 본성을 모두 지닐 수는 없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이 무너지는 이상, 교회가 아는 진리는 반드시 밝게 빛난다. 악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도 하나님 안에 있지도 않으며, 처음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어떤 실체를 가진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선에 관한 생각을 잃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 내고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이 빛나고 온 땅이 그 빛으로 환한데, 누군가 눈을 감아 존재하지 않는 어둠을 자신을 위해 생각해 내는 것과 같다. 그는 마치 어둠 속에서 헤매듯 돌아다니며, 자주 넘어지고 벼랑으로 떨어진다. 빛은 없고 어둠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다고 생각하면서 전혀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감고 자신을 위해 악을 생각해 냈다. 그 안에서 움직이며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처음 지어진 모습대로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더럽힌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빛을 받도록 지어졌다. 그런데 하나님 대신 썩을 것들과 어둠을 찾았다. 성령께서도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올바르게 만드셨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궁리를 찾아냈다.” 이렇게 인간에게 처음 악이 발견되고 생각되어 만들어졌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향한 광기에까지 내려갔는지 설명해야 한다. 우상이라는 발명 전체가 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악에서 나왔음을 그대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시작이 악한 것은 전부 나쁘므로, 어느 점에서도 결코 좋다고 판단될 수 없다. 번역 주석 1.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르게 만드셨다는 인용은 전도서 7:29이다. 악이 스스로 존재하는 본질이 아니며 인간의 잘못된 생각과 선택에서 생긴다는 앞의 논증을 잇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7 8 인간의 영혼은 악을 생각해 낸 데 만족하지 않고, 조금씩 자신을 더 나쁜 것들로 이끌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쾌락을 배우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잊는 일을 몸에 두른 채, 육체의 욕정도 즐겼다. 현재의 것들과 그 평판만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일시적이며 육체적인 것들만 좋다고 생각했다. 돌아서서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을 잊었다. 자신 안의 능력으로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말씀을 더는 보지 못하고, 자기 밖으로 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형상을 만들어 냈다. 육체적 욕망의 얽힘으로 자기 안의 거울 같은 것을 가렸다. 오직 그 거울을 통해 아버지의 형상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영혼이 깨달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며 감각에 부딪히는 것들만 본다. 온갖 육체적 욕망으로 가득하고 그 생각들에 어지러워져, 마음으로 잊어버린 하나님을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것들 안에서 만들어 낸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원하며 즐겁다고 보는 것들만 높인다. 그러므로 악이 먼저 우상 숭배의 원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스스로 생각해 내는 법을 배운 뒤, 존재하지 않는 신들도 스스로 만들어 냈다. 깊은 물속으로 내려간 사람과 같다. 그의 눈은 아래를 향하고 물이 그 위를 덮으므로, 빛도 빛 속에서 보이는 것들도 더는 보지 못한다. 깊은 물속의 것들만 느끼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고,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옛사람들 가운데 정신을 잃은 이들도 육체의 욕망과 상상 속으로 내려가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영광을 잊었다. 흐릿한 이성, 더 정확히는 무분별을 사용하여 보이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지으신 분보다 피조물을 높이고, 그것들을 지으신 원인이며 창조자이신 주 하나님보다 그 작품들을 더 신격화했다. 앞서 든 비유에서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더 내려갈수록 더 어둡고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인류도 그렇게 되었다. 우상 숭배의 형태가 한 가지였던 것도 아니고 처음 시작한 것들에 머문 것도 아니다. 처음 것들에 오래 머물수록 더 새로운 미신을 만들어 냈다. 처음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여 다른 악으로 다시 자신을 채웠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나아가며 자신의 불경을 더 크게 넓혔다. 하나님의 성경도 이를 증언한다. “불경한 자가 악의 깊은 곳에 이르면 멸시한다.” 번역 주석 1. 악의 깊은 곳에 이르면 멸시한다는 인용은 잠언 18:3의 그리스어 표현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8 9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생각과 추론에서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은 먼저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에게 하나님의 영예를 돌렸다. 그것들이 신일 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다른 것들의 원인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어 어두운 생각을 따라 더 내려가, 에테르와 공기와 공기 속의 것들을 신이라 불렀다. 악 가운데 더 나아가서는 원소들과 몸을 구성하는 원리들, 곧 뜨겁고 차갑고 건조하고 습한 실체들까지 신으로 찬양했다. 완전히 쓰러진 사람들이 땅에 있는 달팽이처럼 진흙 속을 기어다니듯, 가장 불경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생각에서 쓰러지고 추락하여,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 또 사람의 형상까지 신으로 세웠다. 더 나쁜 일을 궁리하고 생각하며, 돌과 나무와 기는 것들, 물속과 땅 위의 것들, 사나운 짐승들에게까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고 세상을 초월한 이름을 옮겨 붙였다. 하나님의 모든 영예를 그것들에 돌리면서 참으로 존재하시는 참 하나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서는 돌아섰다. 어리석은 이들의 대담함이 거기에서라도 멈추고, 더 나아가 자신을 불경으로 더럽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 그토록 추락하고 정신이 어두워져, 어떤 방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지어진 것들 가운데 보이지도 않는 것들까지 스스로 생각해 내고 신격화했다. 이성 있는 존재와 이성 없는 존재를 섞고, 본성이 다른 것들을 서로 꿰어 붙여 신처럼 섬긴다. 이집트인들의 개 머리, 뱀 머리, 당나귀 머리 형상과 리비아인들의 숫양 머리를 한 암몬이 그런 것들이다. 다른 이들은 몸의 부분들, 곧 머리와 어깨와 손과 발을 각각 따로 떼어, 하나하나를 신으로 세우고 신격화했다. 마치 온몸 전체를 섬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이들은 불경을 더 심하게 하여, 이런 발명과 자신의 악의 계기인 쾌락과 욕망까지 신격화하여 경배한다. 그들의 에로스와 파포스의 아프로디테가 그런 경우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더 나쁜 일을 경쟁하듯, 자기들의 통치자나 그 자녀까지 신으로 세우는 대담함을 보였다. 통치자를 존경하거나 그 폭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크레타에서 그토록 유명한 제우스와 아르카디아의 헤르메스가 그런 경우다. 인도인들의 디오니소스, 이집트인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와 호루스, 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애인이었던 최근의 안티노오스도 그렇다. 사람임을, 점잖은 사람이 아니라 방종으로 가득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명령을 내린 자가 두려워 그를 섬긴다. 하드리아누스는 이집트에 머물 때 자신의 쾌락을 위해 시중들던 안티노오스가 죽자, 그를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 청년이 죽은 뒤에도 사랑하면서, 자신을 책망할 증거이자 모든 우상 숭배에 관한 표지를 제공했다. 우상 숭배는 그것을 만든 이들의 욕망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도 이를 미리 증언한다. “우상을 생각해 낸 것이 음행의 시작이다.” 이 말을 놀라워하거나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얼마 전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로마 원로원은 처음부터 그들을 다스린 황제들 전부, 혹은 자신들이 원하고 판단한 이들을 신들 가운데 있다고 결정하며, 신으로 숭배하라고 공포한다. 그들이 미워하는 이들은 본성상 적이라고 인정하고 인간이라 부른다. 마음에 드는 이들은 훌륭한 업적 때문에 숭배하라고 명령한다. 자신들도 인간이며 죽을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드는 권한이라도 가진 듯 행동한다. 신을 만드는 이들이라면 자신들이 먼저 신이어야 한다. 만드는 이는 만들어지는 것보다 나아야 하며, 판단하는 이는 반드시 판단받는 이를 다스리고, 주는 이는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푼다. 모든 왕도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며, 받는 이들보다 더 높고 더 크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이들을 신이라고 선언한다면, 자신들이 먼저 신이어야 한다. 놀라운 일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죽음으로, 자신들이 신격화한 이들에 관한 자기 결정이 거짓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번역 주석 1. 우상을 생각해 낸 것이 음행의 시작이라는 인용은 지혜서 14:12이다. 안티노오스와 황제 신격화에 관한 서술은 저자가 우상 숭배의 인간적 기원을 논증하는 부분이다. 전자판에서 반복되거나 잘못 삽입된 단어들은 기록한 PG 25, 17-21열의 판면과 대조하여 교정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9 10 이 관습은 새롭지도 않고 로마 원로원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생겨나 우상에 관한 생각을 위해 준비되어 왔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옛날부터 유명한 신들,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아폴론과 헤파이스토스와 헤르메스, 그리고 여신들인 헤라와 데메테르와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도, 그리스인들이 전하는 테세우스의 명령으로 신이라 불리게 되었다. 명령한 이들은 인간으로서 죽어 애도를 받으며, 그들이 지정한 이들은 신으로 경배를 받는다. 얼마나 모순되고 어리석은 일인가! 명령한 이를 알면서도 그가 지정한 이들을 더 높인다. 그들의 우상을 향한 광기가 남자들에게서라도 멈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여자들에게까지 옮겨 붙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공적인 일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에 참여시키는 것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여자들을, 그들은 하나님의 영예로 숭배하고 섬긴다. 앞서 말한 테세우스가 지정한 여신들, 이집트인들의 이시스와 코레와 네오테라, 다른 이들의 아프로디테가 그런 경우다. 다른 신들의 이름은 말하는 것조차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온갖 조롱거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옛날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형제와 친척과 아내를 잃은 많은 사람들, 남편을 잃은 많은 여자들은 큰 슬픔 때문에 그들의 모습을 그려 바치고 제사를 마련했다. 자연은 그들이 모두 죽을 인간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그 형상과 장인의 정성 때문에 그들을 신으로 숭배하여, 자연에 어긋나는 일을 겪었다. 부모들이 애도한 이들은 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신인 줄 알았다면 사라진 이들처럼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신이 아니며 아예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형상으로 그들을 나타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형상을 통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위로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들은 그들에게 신처럼 기도하며 참 하나님의 영예를 돌린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지금도 오시리스와 호루스와 티폰 및 다른 이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도도나의 청동 기구들과 크레타의 코리반테스도 제우스가 신이 아니라 사람이며, 날고기를 먹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사람임을 입증한다. 놀라운 일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매우 지혜롭고 하나님을 생각했다며 크게 자랑한 플라톤마저 소크라테스와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가,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 아르테미스를 경배한다는 것이다. 번역 주석 1. 여성이 공적인 논의에 참여하는 일을 낮추는 문장은 저자의 이교 여신 비판에 들어 있는 고대의 성별 평가다. Κόρη와 Νεωτέρα는 각각 코레와 네오테라로 옮긴 여신의 호칭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0 11 성경은 오래전부터 이런 우상 숭배의 발명들을 미리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우상을 생각해 낸 것이 음행의 시작이며, 그것을 발명한 것은 삶의 부패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영원히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헛된 자랑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때문에 그것들의 빠른 끝이 정해졌다. 때 이른 슬픔에 시달리는 아버지가 일찍 빼앗긴 자녀의 형상을 만들고, 그때 죽은 인간을 이제는 살아 있는 이처럼 공경했다. 또 자기 아래 있는 이들에게 신비 의식과 입문 예식을 전했다. 시간이 흐르며 굳어진 불경한 관습은 법처럼 지켜졌다. 폭군들의 명령으로 조각상들이 숭배를 받았다. 사람들은 멀리 살아 그들을 직접 보며 공경할 수 없었으므로, 멀리 있는 모습을 본떠 존경하는 왕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었다. 부지런히 그 형상을 섬겨, 없는 이를 있는 이처럼 아첨하려 했다. 장인의 야심도 모르는 이들을 더 강한 숭배로 이끌었다. 그는 아마 통치자를 기쁘게 하려고, 자신의 기술을 힘껏 발휘하여 닮은 모습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작품의 매력에 이끌려, 조금 전까지 존경받던 인간을 이제 경배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삶의 덫이 되었다. 재난이나 폭정에 종속된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없는 이름을 돌과 나무에 붙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듯 우상의 발명이 인간에게 이렇게 시작되고 만들어졌으므로, 이제 그것에 대한 논박을 그대에게 밝힐 때다. 밖에서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우상에 관해 생각하는 내용 자체에서 증거를 얻겠다. 먼저 아래에 있는 것들부터 시작하겠다. 그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들의 행위를 살피면, 신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인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인들이 전하는 제우스의 연애와 방종을 보면 어떠한가? 그가 가니메데스를 납치하고 몰래 간음을 저지르면서, 트로이의 성벽이 자기 뜻을 거슬러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겁을 낸다는 이야기는 어떠한가?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괴로워하며 도우려 해도 돕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테나와 헤라와 포세이돈이라는 다른 신들의 음모에 시달리며, 여자인 테티스와 백 개의 손을 지닌 아이가이온에게 도움받는 모습은 어떠한가? 쾌락에 굴복하고 여자들에게 종속되어, 그들을 위해 네발짐승과 새의 모습으로 변하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어떠한가? 또 아버지의 음모 때문에 숨는 모습, 그가 크로노스를 결박하는 모습, 크로노스가 자기 아버지를 거세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보통 사람에게조차 로마의 일반 법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그토록 많이 저질러 비난받는 자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번역 주석 1. 장 앞부분은 지혜서 14:12-21을 길게 인용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1 12 너무 많으므로 많은 일 가운데 조금만 말하겠다. 누가 세멜레와 레다와 알크메네와 아르테미스와 레토와 마이아와 에우로페와 다나에와 안티오페에게 그가 저지른 불법과 타락을 보고, 또 자기 누이를 범하려 한 시도와 대담함, 그 누이를 아내로 삼은 일을 보고 조롱하며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겠는가? 그는 간음만 한 것이 아니다. 간음으로 얻은 자녀들도 신격화하여 세우고, 신을 만든다는 모습을 자기 불법의 가리개로 삼았다. 그 자녀들에는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와 디오스쿠로이와 헤르메스와 페르세우스와 소테이라가 있다. 그리스인들과 트로이인들 때문에 일리온에서 서로 화해할 수 없게 다투는 이른바 신들을 보고, 누가 그들의 무능을 책망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인간들까지 부추겼다. 디오메데스에게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상처 입고, 헤라클레스에게 헤라와 지하의 신이라 부르는 아이도네우스가 상처 입는 모습을 보라. 페르세우스에게 디오니소스가, 아르카스에게 아테나가 상처 입고, 헤파이스토스가 내던져져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고, 누가 그들의 본성을 책망하며 더는 신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그들이 썩을 수 있고 고통받는다고 듣는다면, 약한 인간들임을 알아보고 상처 입은 자들보다 상처 입힌 자들에게 더 감탄하지 않겠는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간음, 그 둘을 겨냥해 꾸민 헤파이스토스의 덫을 보라. 헤파이스토스가 다른 이른바 신들을 간음의 구경꾼으로 불러, 그들이 와서 두 사람의 방종을 보는 것을 보고 누가 웃으며 그들의 비열함을 책망하지 않겠는가? 헤라클레스가 술에 취해 옴팔레 앞에서 정신을 잃고 방탕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누가 웃지 않겠는가? 그들이 쾌락을 위해 한 일들, 분별없는 연애, 금과 은과 청동과 철과 돌과 나무로 신을 빚는 일은 애써 논박할 필요도 없다. 그 일들은 그 자체로 더러우며 스스로 미혹의 증거를 드러낸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것들에 속는 이들을 특히 가엾게 여길 만하다. 자기 아내를 범하는 간음한 자는 미워하면서, 간음의 스승들을 신으로 만드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은 누이와 관계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한 자들을 경배한다. 아이를 성적으로 타락시키는 일이 악하다고 인정하면서, 바로 그 일로 비난받는 자들을 숭배한다. 법이 인간에게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들을 자신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돌리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2 13 그들은 돌과 나무를 경배하면서, 같은 재료는 발로 밟고 태우며 그 일부는 신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조금 전까지 도구로 쓰던 것을 정신을 잃고 조각하여 섬긴다. 신들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한 사람의 기술을 경배함을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돌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고 재료가 가공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을 밟고 자기 일을 위한 도구로, 흔히 더 천한 용도로도 사용한다. 장인이 자신의 지식에 따른 비례를 적용하고 재료에 남자나 여자의 모습을 새기면, 그때는 장인에게 감사하고, 값을 주고 그에게서 산 것들을 이제 신으로 경배한다. 조각상을 만든 사람 자신도 자기가 한 일을 잊은 듯 자기 작품에 기도하는 일이 자주 있다. 조금 전까지 깎고 잘라 내던 것을 기술로 완성한 뒤에는 신이라 부른다. 그것들에 감탄한다면, 숙련된 사람의 기술을 인정해야지 그가 빚은 것들을 만든 사람보다 높여서는 안 된다. 재료가 기술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재료를 꾸미고 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만든 것들보다 장인을 경배하는 것이 훨씬 더 합당했을 것이다. 그는 기술로 만든 신들보다 먼저 존재했고, 그것들은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생겨났다. 그런데 그들은 합당한 판단을 밀쳐 두고 지식과 기술을 업신여기며, 지식과 기술로 생긴 것들을 경배한다. 만든 인간은 죽는데 그가 만든 것들은 죽지 않는다고 공경한다. 그것들도 날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본성 때문에 시간이 지나 반드시 사라진다. 이 점에서도 어떻게 그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겠는가? 자신들은 보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경배하고, 자신들은 들으면서 듣지 못하는 것들에게 기도한다. 본성상 생명과 이성을 지닌 인간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생명도 없는 것들을 신이라 부른다. 놀랍게도 자신들이 지키며 권한 아래 둔 것들에게 주인처럼 종속된다. 내가 근거 없이 이런 말을 하거나 그들에 관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눈앞에서도 이 일들의 증거를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은 이들은 직접 볼 수 있다. 번역 주석 1. 전자판의 ἕως 앞에 뒤 문장의 일부가 중복 삽입되어 있고, σχῆμα 뒤에도 앞 구절이 반복되어 있다. PG 25, 28열을 대조하여 그 중복만 제거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3 14 이 일들에 관한 더 나은 증언은 오래전부터 미리 가르치는 하나님의 성경에서도 나온다. “이방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소리 내지 못한다. 그것을 만드는 자들도 그것들과 같아지기를.” 예언자의 책망도 그것들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여기에도 그것들을 논박하는 말이 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신을 빚고 헛된 것을 조각하는 자들은 모두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이 나온 모든 것은 말라 버렸다. 사람들 가운데 귀먹은 자들이 모두 모여 함께 서서 부끄러워하고 함께 수치를 당하게 하라. 장인은 쇠를 날카롭게 하고 도끼로 다듬으며 송곳으로 모양을 잡아, 힘센 팔로 그것을 세웠다. 그는 배고프고 지치며 물도 마시지 못할 것이다. 장인은 나무를 골라 치수를 재고 풀로 모양을 잡아, 남자의 형상과 사람의 아름다움처럼 만들고 집 안에 세웠다. 그는 주께서 심고 비가 자라게 한 숲의 나무를 잘랐다. 그것은 사람들의 땔감이 되어, 그 일부로 몸을 덥히고 불을 피워 빵을 구웠다. 남은 것은 신들로 만들어 경배했다. 그 절반은 불에 태웠다. 그 절반으로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렀으며, 몸이 따뜻해져서 말했다. ‘따뜻해지고 불을 보니 좋다.’ 그러고는 남은 것에 경배하며 말했다. ‘나를 구해 달라. 당신은 내 신이다.’ 그들은 생각할 줄 몰랐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능력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마음으로 헤아리지도, 자기 영혼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절반을 불에 태워 숯 위에서 빵을 굽고 고기를 구워 먹었으며, 남은 것으로 역겨운 것을 만들어 경배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은 재이며 그들은 헤맨다는 것을 알라. 아무도 그들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 보라. 그래도 ‘내 오른손에 거짓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마저 불경하다고 고발하는 이들을 모든 사람이 하나님 없는 이들이라고 판단하지 않겠는가? 진리 대신 생명 없는 것을 숭배한다고 이토록 분명히 책망받는 이들이 어떻게 불행하지 않겠는가? 참 하나님 대신 이성도 움직임도 없는 것들을 믿고 섬기는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며, 어떤 용서가 있겠는가? 번역 주석 1. 우상의 감각 기관에 관한 인용은 시편 115:4-8(그리스어 시편 113:12-16)과 대응한다. 뒤의 나무 우상에 관한 긴 인용은 이사야 44:10-20이다. 저자가 채택한 인용의 배열과 표현을 따라 번역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4 15 장인이 차라리 모습 없는 신들을 빚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이 없다는 분명한 증거라도 없었을 것이다. 우상들에게 감각이 있다는 생각으로 순진한 이들을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눈과 코와 귀와 손과 입 같은 감각의 표지들을 지니고도, 감각을 사용하고 감각 대상을 알아보는 데 전혀 움직이지 않는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 그것들은 가지고 있어도 가지지 못하고, 서 있어도 서지 못하며, 앉아 있어도 앉지 못한다. 그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빚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놓여 있을 뿐, 하나님의 표지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완전히 생명 없는 것들이 인간의 기술로 놓인 모습만 나타낸다. 이런 거짓 신들의 전파자와 예언자, 곧 시인들과 저술가들이 그들을 신이라고만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과 수치스러운 삶을 입증할 그 행위들까지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진리를 가로챌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많은 사람을 진리에서 미혹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우스의 연애와 방종, 다른 이들의 아동을 타락시킨 행위, 여자의 쾌락을 두고 벌이는 질투, 두려움과 비겁함과 다른 악행들을 이야기하므로 자신들을 책망할 뿐이다. 그들은 신들은 물론 점잖은 인간들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고, 수치스럽고 선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에 관해 신화를 지어내기 때문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5 16 불경한 이들은 이 일에 관해 시인의 특성을 핑계로 삼을지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고 듣는 이들을 즐겁게 하려고 신화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시인의 고유한 특징이라며, 그래서 신들에 관한 이야기도 지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변명은 그들이 이 일들에 관해 품고 제시하는 생각 자체로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무효임이 드러날 것이다. 시인들의 이야기가 꾸며 낸 거짓이라면, 제우스와 크로노스와 헤라와 아레스 및 다른 이들의 이름 자체도 거짓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름도 꾸며졌고, 제우스도 크로노스도 아레스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시인들이 듣는 이들을 속이려고 그들이 존재하는 듯 꾸며 낸 것이다. 시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 낸다면, 어떻게 그들을 존재하는 이들로 숭배하는가? 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이름은 꾸며 내지 않았고 그 행위에 관해서만 거짓말했다고. 이것도 그들의 변명을 안전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행위에 관해 거짓말했다면, 그 행위를 했다고 이야기한 이들의 이름에 관해서도 반드시 거짓말한 것이다. 혹은 이름에 관해 진실을 말한다면, 행위에 관해서도 반드시 진실을 말한다. 그들을 신이라고 신화를 지은 이들은 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참으로 알고 있을 것이며, 인간의 생각을 결코 신들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불의 작용을 물에게 돌리지 않는 것과 같다. 불은 태우고 물은 반대로 차가운 본질을 지닌다. 따라서 그 행위들이 신들에게 합당하다면, 그것을 행한 이들도 신일 것이다. 그러나 간음과 앞서 말한 일들이 인간, 그것도 선하지 않은 인간의 일이라면, 그것을 행한 이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일 것이다. 행위는 본질에 어울려야 한다. 그래야 작용을 통해 행위자가 확인되고, 본질을 통해 행위를 알 수 있다. 물과 불의 작용을 설명하는 사람이 물은 태우고 불은 식힌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해와 땅을 설명하면서 땅이 빛을 비추고 해에 풀과 열매를 심는다고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모든 광기를 넘어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저술가들, 특히 가장 뛰어난 시인도 제우스와 다른 이들이 신인 줄 알았다면, 그들이 신이 아니라 분별없는 인간임을 입증하는 행위들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시인이기에 거짓말했다고 하고 그대도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인다면, 왜 영웅들의 용맹에 관해서도 거짓말하지 않았는가? 왜 용맹 대신 나약함을, 나약함 대신 용맹을 꾸미지 않았는가? 제우스와 헤라에게 한 것처럼, 아킬레우스에게도 겁쟁이라는 거짓말을 붙이고 테르시테스의 힘에 감탄했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어리석다고 비방하고 네스토르가 정신을 잃었다고 꾸며야 했다. 디오메데스와 헥토르에게는 여성적인 행위를, 헤카베에게는 용맹을 신화로 붙여야 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시인들은 모든 일에 관해 꾸미고 거짓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에 관해서는 진실을 지키면서, 이른바 신들에게는 거짓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신들의 방종한 행위에 관해서는 거짓말하지만, 제우스를 신들의 아버지, 지극히 높은 분, 올림포스의 신, 하늘에서 다스리는 분이라고 찬양할 때는 꾸미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고. 그러나 이 말이 그들 자신을 겨냥한다는 사실은 나뿐 아니라 누구나 밝힐 수 있다. 처음에 든 증명으로 진리는 다시 그들을 겨냥할 것이다. 행위는 그들이 인간임을 입증하고, 찬사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선다. 이 둘은 서로 맞지 않는다. 하늘에 있는 이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을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번역 주석 1. 시인의 이야기가 모두 허구라는 변명과, 신들의 행위만 허구라는 변명을 차례로 논박한다. 전자판에 중복된 ὥσπερ, 테르시테스 앞의 삽입 구절, 문장 끝 동사는 PG 25, 33-36열의 해당 판면으로 확인하여 교정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6 17 그러면 찬사는 거짓이며 아첨이고, 행위들은 그들에 관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일상적인 관습에서도 이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찬양하는 사람은 그 삶을 함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위가 수치스러운 이들을, 그 행위에 따른 비난 때문에 찬사로 높인다. 지나친 칭찬으로 듣는 이들을 속여 그들의 불법을 가리려는 것이다. 누군가를 찬양하려는 사람이 그 삶이나 영혼의 덕에서 찬양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고 하자. 거기에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 이상의 것을 아낌없이 붙여 그들을 높인다.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시인들도 이른바 신들의 수치스러운 행위 때문에 난처해져, 인간을 넘어서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을 초월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인간적인 것을 가릴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신에 관한 생각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입증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고통과 행위가 시인들의 뜻을 거슬러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듯 다른 이에게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를, 신이 아닌 죽을 인간들에게 돌리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행한 일이 크고 불경했으므로, 원하지 않아도 진리에 강요되어 그들의 고통을 설명했다. 후대의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신이 아님을 입증할 그 고통이 관련 기록에 나타나도록 된 것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7 18 이런 것들을 미신적으로 섬기는 이들은 그것들이 신이라는 어떤 변명이나 증명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조금 전의 설명으로 이들이 인간이며 점잖지 않은 인간임을 밝혔다. 그들은 아마 다른 주장으로 돌아서, 그들이 발명한 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크게 자랑할 것이다. 인간에게 유익을 주었기에 신으로 여긴다고 말할 것이다. 제우스는 조형 기술을, 포세이돈은 조타 기술을 지녔다고 한다.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 기술을, 아테나는 직조 기술을, 아폴론은 음악을, 아르테미스는 사냥을 지녔다고 한다. 헤라는 옷을 꾸미는 기술을, 데메테르는 농업을, 다른 이들은 다른 기술을 지녔다고 그들의 역사를 전하는 이들이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지식을 그들만의 것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공통된 본성에 돌려야 했다. 사람들은 그 본성을 살피며 기술을 발명한다. 많은 사람도 기술이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힘쓴 기술에 숙련되었다고 해서 신으로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 여겨야 한다. 기술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 기술에서 자연을 모방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자신들에게 정해진 한계에 따라 본성상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고 그것을 알아 기술을 생각해 냈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혹은 기술을 발명했기에 신이라고 선언할 만하다고 한다면, 다른 기술의 발명자들도 같은 이유로 신이라 선언할 때다. 페니키아인들은 문자를, 호메로스는 영웅 서사시를, 엘레아의 제논은 변증법을, 시라쿠사의 코락스는 수사학을 발명했다. 아리스타이오스는 벌의 산물을, 트립톨레모스는 곡식 파종을,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아테네의 솔론은 법을 발명했다. 팔라메데스는 문자 배열과 수와 길이 단위와 무게 단위를 발명했다. 기록을 남긴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이들도 인간의 삶에 유용한 여러 다른 것을 전했다. 지식이 신을 만들고 그 때문에 조각된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 뒤에 다른 것을 발명한 이들도 그들의 논리에 따라 반드시 신이어야 한다. 혹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예가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제우스와 헤라와 다른 이들도 신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인간이었으며, 더구나 점잖지도 않았다고 믿어야 한다. 조각상 자체의 모습도 그들이 인간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8 19 그들이 조각하며 붙이는 모습은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의 모습, 또 그보다 낮고 본성상 이성 없는 온갖 새들, 길든 짐승과 사나운 네발짐승들, 땅과 바다와 모든 물이 내는 기는 것들의 모습뿐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욕정과 쾌락의 무분별에 빠져, 쾌락과 육체의 욕망 외에는 더는 보지 못했다. 생각을 이성 없는 것들에 두었으므로, 자기 욕정의 여러 형태에 따라 신적인 것도 이성 없는 것들로 만들어 그토록 많은 신을 조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네발짐승과 기는 것들과 새들의 형상이 있다. 참된 하나님 경외를 해설하는 이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생각이 헛되어졌고 분별없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며 어리석게 되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인간과 새와 네발짐승과 기는 것들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주셨다.” 앞서 말했듯이, 먼저 영혼이 쾌락의 무분별을 겪고 나서 이런 신을 빚는 일로 추락했다. 추락한 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심으로 내버려진 것처럼 그 안에서 뒹굴며, 말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이성 없는 것들로 본뜬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철학자와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 점을 지적받아도,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신들이 인간과 짐승의 모양이며 형상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들을 통해 신적인 것이 응답하고 나타나도록 그것들을 둔다고 변명한다. 이런 조각상과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들보다 더욱 철학적이며 더 깊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것들이 신적인 천사와 능력들을 부르고 나타나게 하려고 제작되고 형상화되었다고 말한다. 그것들을 통해 나타난 존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글과 같아서, 그것을 읽으면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는 신적인 천사들의 현현으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신화를 말한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장을 주의 깊게 살피면 그들의 생각이 앞서 밝힌 것들 못지않게 거짓임을 알게 된다. 번역 주석 1. 서두의 인용은 로마서 1:21-26과 대응한다. 뒤의 ‘천사와 능력’은 이교 조각상을 통해 신적인 존재가 나타난다는 반론의 용어다. 여기서는 그 반론의 화자를 구별해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19 20 진리가 판단하는 자리로 나아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고 알려지는가? 그것들을 둘러싼 재료 때문인가, 그 안에 있는 형상 때문인가? 재료 때문이라면 형상이 왜 필요한가? 그것들을 빚기 전부터 모든 재료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신전에 벽을 두르고 돌이나 나무나 금의 일부를 가둔 것도 헛되이 했다. 온 땅에 그 재료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붙여진 형상이 신적인 현현의 원인이라면 금과 다른 재료는 왜 필요한가? 조각상들이 본뜬 살아 있는 자연의 생명체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논리에 따르면, 생명과 이성을 지닌 존재나 이성 없는 생명체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는 편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더 나아졌을 것이다. 생명도 움직임도 없는 것들에서 그분을 기대하는 것보다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자신을 향해 불경을 행한다. 자연의 네발짐승과 새와 기는 것들은 사납거나 더럽다고 역겨워하며 피하면서, 그 모양을 돌과 나무와 금에 새겨 신격화한다. 그 형상을 이런 재료에 만들어 경배하기보다 살아 있는 것들 자체를 숭배했어야 한다. 혹은 형상도 재료도 하나님이 계시는 원인이 아니며, 지식을 동반하는 기술만이 신적인 것을 불러낸다고 할지 모른다. 기술이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 때문에 신적인 것이 조각상에 찾아온다면, 지식이 인간 안에 있는데 재료는 또 왜 필요한가? 기술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래서 조각상을 신으로 숭배한다면, 기술의 창시자인 인간들을 경배하고 숭배했어야 한다. 그들이 이성을 지니고 지식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0 21 그들의 두 번째 변명, 더 깊다고 하는 변명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여, 이것들을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시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거기 있게 하려고 만들었다면, 왜 능력들을 부르는 데 쓰는 조각상을 불러낸 능력들 자체보다 더 높게 만드는가? 그대들의 말대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형상을 조각하면서, 하나님 자신의 영예와 이름을 조각상 자체에 돌리니 경건하지 못한 일을 겪는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조각상의 작음을 넘어선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감히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더 작은 능력들을 부른다. 그러고는 스스로 그 능력들을 넘어, 임재를 두려워했던 그분의 이름을 돌과 나무에 붙였다. 돌과 인간의 기술을 신이라고 부르며 경배한다. 그대들이 거짓으로 주장하듯 이것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글과 같다 해도, 가리키는 표지를 가리켜지는 대상보다 높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왕의 이름을 쓴다 해도, 그 글자를 왕보다 높인다면 위험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죽음으로 처벌받는다. 글자는 쓴 사람의 지식으로 새겨진 것이다. 그대들도 생각이 건전했다면, 그토록 큰 신성의 표지를 재료로 끌어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각상을 그것을 조각한 인간보다 높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글처럼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키고,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이유로 신격화할 만하다 해도, 그것을 조각하고 새긴 이, 곧 장인을 훨씬 더 신격화했어야 한다. 그는 그것들보다 더 능력 있고 더 신적이다. 그것들은 그의 뜻에 따라 다듬어지고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글이 감탄할 만하다면, 쓴 사람은 기술과 영혼의 지식 때문에 훨씬 더 감탄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 이유로 이것들을 신이라고 생각할 만하지 않다면, 그들에게 우상을 향한 광기에 관해 다시 물으며 그런 형태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해야 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1 22 신적인 것이 인간의 모습을 지녔기에 그렇게 형상화했다면, 왜 짐승들의 모습도 붙이는가? 그 모습이 이성 없는 생명체의 모습이라면, 왜 이성 있는 존재의 조각도 붙이는가? 그 둘을 합친 것이며 짐승과 인간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나님을 파악했다면, 왜 결합된 것을 나누어 짐승과 인간의 조각을 분리하는가? 왜 신화의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와 히포켄타우로스, 이집트인들의 개 머리를 한 아누비스처럼 늘 두 모습을 합쳐 조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두 본성을 지닌 모습으로만 그려야 했다. 혹은 한 모습을 지녔다면 다른 모습까지 그들에게 붙여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또 그 모습들이 남성이라면 왜 여성의 모습도 붙이는가? 여성의 모습이라면 왜 남성의 모습까지 거짓으로 붙이는가? 둘을 합친 것이라면 나누지 말고 결합하여 이른바 양성의 모습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그들의 미신은 불경과 거짓 비방뿐 아니라 구경하는 이들에게 웃음거리도 제공할 것이다. 그들은 신적인 것이 몸의 형태를 지녔다고 생각하여, 배와 손과 발과 목과 가슴, 또 인간의 출생에 필요한 다른 지체들도 생각해 내고 만들어 낸다. 신적인 것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할 만큼 그들의 정신이 얼마나 불경과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추락했는지 보라. 그렇다면 신도 반드시 몸의 다른 상태들을 겪어, 잘리고 나뉘며 마침내 전체가 썩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고유한 일이 아니라 땅에 있는 몸들의 일이다. 하나님은 몸이 없고 썩지 않으며 죽지 않으시고, 어떤 것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반면 이것들은 썩을 수 있고 몸의 형상이며,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우리는 낡은 것들이 자주 새로 보수되고, 시간이나 비나 땅 위의 다른 생명체가 훼손한 것들이 다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다. 자신들이 만든 것을 신이라 선언하는 이들의 광기를 이 점에서 책망할 만하다. 자기 기술로 꾸미고 썩지 않게 보살피는 것들에게, 오히려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그것들에게 자기 필요를 채워 달라고 요구한다. 작은 집에 가두는 것들을 온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부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번역 주석 1. 전자판의 장 시작에 앞 장의 구절이 반복 삽입되어 있고,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도 앞 문장이 다시 들어 있다. PG 25, 44열에서 확인하여 그 중복을 제거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2 23 이 점들뿐 아니라, 우상들 자체에 관해 그들의 생각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말하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듯 이것들이 신이라면, 어느 것에 의지하고 어느 것을 더 높은 주인이라고 판단해야 하는가? 그래야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확신하거나, 그들의 말대로 그 안에서 신적인 것을 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같은 것들을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체로 민족의 수만큼 신들이 만들어진다. 어떤 곳에서는 한 나라나 한 도시도 우상에 관한 미신 때문에 내부에서 다툰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인들이 신이라 부르는 것들을 알지 못하고, 이집트인들도 페니키아인들과 같은 우상을 경배하지 않는다.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의 신들을, 페르시아인들은 시리아인들의 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펠라스고이인들은 트라키아의 신들을 비방하고, 트라키아인들은 테베인들의 신들을 알지 못한다. 인도인들과 아라비아인들, 아라비아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 에티오피아인들과 그들도 우상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시리아인들은 킬리키아인들의 것을 섬기지 않는다. 카파도키아인들은 이들과 다른 것들을 신이라 부르고, 비티니아인들은 또 다른 것들을 신이라 부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다른 것들을 만들었다. 많은 예를 들 필요가 있겠는가? 대륙 사람들은 섬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경배하고, 섬사람들은 대륙 사람들과 다른 것들을 숭배한다. 각 도시와 마을은 이웃의 신들을 알지 못하고, 자기 신들을 앞세워 그것들만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의 역겨운 일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도시들이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숭배를 한다는 사실을 모두 눈으로 본다. 이웃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과 반대되는 것을 섬기려고 늘 애쓴다. 어떤 이들이 신으로 경배하는 악어를 그 이웃들은 역겨운 것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사자를 이웃 도시 사람들은 숭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발견하면 맹수라며 죽인다. 다른 이들이 신으로 세운 물고기를 또 다른 이들은 먹을 음식으로 삼는다. 여기에서 전쟁과 내분과 온갖 살인의 계기, 욕정의 온갖 쾌락이 그들에게 생긴다. 놀라운 일은, 역사를 전하는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펠라스고이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신들의 이름을 배웠으면서도 그들의 신들을 모르고 다른 신들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우상 때문에 정신을 잃은 모든 민족의 생각과 숭배는 서로 다르며, 같은 사람들에게서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이 이런 일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한 분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서 떨어져, 많고 다양한 것들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참된 말씀, 모든 이의 구주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섰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많은 것들 사이를 헤매는 것도 당연하다. 태양에서 돌아서 어두운 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나갈 길 없는 여러 길을 빙빙 돈다.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없는 사람들을 있는 듯 상상하며, 보아도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 영혼이 어두워진 이들은 정신이 헤매며, 취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3 24 이것들은 그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적지 않은 증거다. 도시와 나라별로 신들이 여럿이고 서로 다르며, 한쪽이 다른 쪽의 신을 없애므로 결국 모든 신이 모든 사람에게 부정된다. 어떤 이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들이 다른 이들이 신이라 부르는 것들에게 바치는 희생 제물과 전제가 된다. 어떤 이들의 제물이 반대로 다른 이들의 신이다. 이집트인들은 소와 송아지인 아피스를 섬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들을 제우스에게 바친다. 그들이 세운 바로 그 개체를 바치지 않더라도, 같은 종류를 바치므로 같은 것을 바치는 셈이다. 리비아인들은 암몬이라 부르는 양을 신으로 삼는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많은 이들에게 바칠 제물로 잡는다. 인도인들은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며 상징적으로 포도주라 부른다. 다른 이들은 그 포도주를 다른 신들에게 전제로 붓는다. 어떤 이들은 강과 샘을 높이며, 특히 이집트인들은 물을 귀히 여겨 신이라 선언한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 그것들을 숭배하는 이집트인들 자신도, 물로 다른 이들과 자신의 때를 씻고 남은 물을 천하게 버린다. 이집트인들이 만든 우상 거의 모두는 다른 이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그래서 그 다른 이들마저 이집트인들을 조롱할 만하다. 그들이 신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자기들 사이에서도 부정을 물리치려고 바치거나 희생으로 드리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4 25 어떤 이들은 불경과 광기에 그토록 깊이 끌려가, 그 형상과 모습의 원형인 인간들 자체를 자기들의 거짓 신들에게 죽여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다. 불행한 이들은 죽이는 희생 제물들이 자신들이 빚고 경배하며 인간을 바치는 그 신들의 원형임을 보지 못한다. 같은 것을 같은 것에게, 더 정확히는 더 나은 것을 더 못한 것에게 바치는 셈이다. 생명 있는 것을 생명 없는 것에게 바치고, 이성 있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게 드린다. 타우리오이라 불리는 스키타이인들은 난파된 이들과 붙잡은 그리스인들을 자기들이 파르테노스라 부르는 존재에게 제물로 바친다. 같은 인간들에게 그토록 불경을 저지르며 자기 신들의 잔인함을 입증한다. 섭리가 바다의 위험에서 구한 이들을 자신들이 죽여, 그 은혜를 자기의 짐승 같은 영혼으로 가리니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면, 사로잡은 사람들을 백 명씩 나누고 각 무리에서 한 명씩 골라 그 수만큼 죽여 아레스에게 바친다. 이런 역겨운 행위를 하는 것은 야만인들에게 타고난 거칠음 때문에 스키타이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행위는 우상과 귀신의 악에 고유한 것이다. 이집트인들도 옛날에는 헤라에게 이런 희생 제물을 바쳤다. 페니키아인들과 크레타인들은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바쳐 크로노스를 달랬다. 옛 로마인들은 이른바 라티아리오스 제우스를 인신 제사로 숭배했다.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모두가 더럽히며 더러워졌다. 살인을 행하여 자신들이 더러워졌고, 그런 제사의 연기를 피워 자기 신전들을 더럽혔다. 이 때문에 인간의 악은 수없이 많아졌다. 자기들의 귀신들이 이런 일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곧 이런 범죄로 자기 신들을 모방했다. 그들이 더 높은 존재라고 여기는 것들을 본뜨는 일이 자신의 훌륭한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살인과 자녀 살해와 온갖 방종에 굴복했다. 거의 모든 도시가 온갖 방종으로 가득한 것도 그들의 신들과 같은 성품을 본뜨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 가운데 분별 있는 이는 없다. 있다면 방종 때문에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이뿐이다. 번역 주석 1. 마지막의 ‘분별 있는 이’ 문장은 방종으로 인정받는 이만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σώφρων의 범위와 εἰ μὴ가 연결하는 대상은 압축된 문장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번역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에 관한 말로 읽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5 26 옛 페니키아의 우상 숭배에서 여자들은 앞에 앉아, 몸으로 번 돈을 그곳의 신들에게 첫 몫으로 바쳤다. 매춘으로 자신의 여신을 달래며 이렇게 호의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본성을 부인하고 더는 남자이기를 원하지 않아 여성의 본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일로 그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들의 어머니에게 기쁨과 공경을 드린다고 한다. 모두가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살며 더 나쁜 일에서 서로 경쟁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일꾼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관계를 자연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다. 남자들도 여자와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버리고 서로를 향한 욕망에 불타, 남자가 남자와 함께 수치스러운 일을 행했다.”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들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인정하고 입증한다. 제우스에게서는 아이를 성적으로 타락시키는 일과 간음을, 아프로디테에게서는 음행을, 레아에게서는 방종을, 아레스에게서는 살인을, 다른 이들에게서는 그 밖의 이런 일들을 배웠다. 법은 이런 일들을 처벌하고, 분별 있는 모든 사람은 피한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을 여전히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성품이 방종하므로 이성 없는 짐승들보다 더 무분별하다고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숭배하는 이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짐승들보다 무분별하고 생명 없는 것들보다 생명 없는 듯한 이들로 가엾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영혼의 정신을 헤아렸다면, 이런 것들에 완전히 엎어져 추락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관한 인용은 로마서 1:26-27이다. 앞뒤에서는 이교 신화와 제의를 본뜨는 행위를 비판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6 27 이것들보다 위로 올라가 피조물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역겨운 것들에 대한 논박으로 난처해져,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이 쉽게 비난하고 논박할 수 있음을 자신들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와 우주의 부분들을 숭배하는 자신들의 생각은 안전하고 반박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다. 돌과 나무와 인간이나 짐승, 새와 기는 것과 네발짐승의 모습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과 하늘의 온 질서, 또 땅과 모든 물의 본성을 섬기고 숭배한다고 자랑할 것이다. 이것들도 본성상 신이 아님을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생명 없거나 이성 없는 것들이 아니며, 하늘에 거주하는 것들이 땅에 사는 인간의 본성을 초월함을 모두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도 살피고 조사해야 한다. 설명은 반드시 여기에서도 그들을 겨냥한 참된 논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피며 증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조물 자체가 그들을 향해 외치며 자기의 조성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분은 피조물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그분에게서 돌아서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신으로 삼는다. 그러나 피조물 자신도 그들이 피조물 때문에 부인하는 그 주를 경배하고 고백한다. 피조물의 부분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신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각 부분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부끄러움을 줄 것이다. 피조물은 그분을 향한 순종의 확고한 명령으로 자신들의 주인이며 창조자인 말씀의 아버지도 알리고 가리킨다. 하나님의 법도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의 손으로 지은 것을 알린다.” 이것들의 증거는 숨겨져 있지 않다. 생각의 눈이 완전히 손상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매우 분명하다. 피조물의 부분들을 따로 떼어 하나씩 생각해 보라. 해를 홀로, 달을 따로, 땅과 공기와 뜨겁고 차갑고 건조하고 습한 실체를 서로의 결합에서 나누어 각각 살피면, 어느 것도 스스로 충분하지 않음을 반드시 알게 된다. 모든 것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며 서로에게서 도움받아 유지된다. 해는 온 하늘과 함께 돌며 그 안에 포함되어, 그 회전 밖으로 결코 나갈 수 없다. 달과 다른 별들도 해에게서 도움받음을 증언한다. 땅은 비 없이 열매를 내지 못한다. 비도 구름의 도움 없이 땅에 내릴 수 없으며, 구름 역시 공기 없이 홀로 나타나고 형성될 수 없다. 공기는 스스로가 아니라 에테르에 의해 뜨거워지고, 해가 비추므로 밝아진다. 샘과 강도 땅 없이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땅도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물의 실체 위에 서 있으며, 만물의 가운데에 결합되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바다와 온 땅의 바깥을 둘러 흐르는 큰 대양도 바람에 움직이며, 바람의 힘이 부딪혀 미는 대로 흘러간다. 바람들 자신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일에 관해 설명한 이들에 따르면, 에테르가 공기를 뜨겁게 하는 열 때문에 공기 안에서 생겨나며, 공기를 통해 모든 곳으로 분다. 몸들의 본성을 구성하는 네 원소, 곧 뜨겁고 차갑고 건조하고 습한 실체를 생각해 보라. 누가 생각이 그토록 비뚤어져, 이것들이 결합되어야 유지되며 분리되어 홀로 되면 우세한 것의 힘에 따라 서로를 없앤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차가운 것이 많아지면 뜨거운 것을 없애고, 뜨거운 것의 힘은 차가운 것을 없앤다. 습한 것은 건조한 것을 적시며, 건조한 것은 습한 것을 말린다. 번역 주석 1. 하늘과 창공에 관한 인용은 시편 19:1(그리스어 시편 18:2)이다. 땅이 물 위에 놓였다는 서술과 에테르·네 원소에 관한 설명은 이 논증이 사용하는 고대 자연관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7 28 다른 것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런 것들이 어떻게 신일 수 있는가? 이것들도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이것들에 무엇을 요청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에 관한 설명은 그분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하며 자신으로 충만하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유지되며 그분 자신이 오히려 모든 것에 주신다는 것이다. 해와 달과 피조물의 다른 부분들은 그렇지 않으며,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을 채운다. 어떻게 그것들을 신이라 선언하는 것이 합당한가? 혹은 분리하여 각각 보면 부족하다는 사실은 그들도 인정할 것이다. 증거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두 결합하여 하나의 큰 몸을 이룬다고 하고, 그 전체가 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체가 이루어지면 더는 외부에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전체는 모든 일에 스스로 충분하고 자족한다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이 주장에서도 그들은 논박받게 된다. 이 주장은 그들의 불경과 큰 무지를 앞선 주장들 못지않게, 오히려 더 크게 드러낼 것이다. 각각의 것이 결합하여 전체를 채우며 전체가 개별적인 것들로 이루어진다면, 전체는 부분들로 이루어지고 각각은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생각에서 아주 멀다. 하나님은 전체이시며 부분들이 아니시고, 여러 다른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으셨다. 그분 자신이 모든 것의 구성을 지으신 분이다. 이런 말로 신적인 것에 관해 얼마나 불경한 설명을 하는지 보라. 부분들로 이루어졌다면 반드시 자신 안에서도 서로 다르며, 다른 것들을 모아 완성한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 해라면 달이 아니고, 달이라면 땅이 아니며, 땅이라면 바다가 아닐 것이다. 각각을 이렇게 살피면 그들의 주장이 불합리함을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의 몸을 보아도 그들을 책망할 수 있다. 눈은 귀가 아니고 귀는 손이 아니며, 배는 가슴이 아니고 목은 발이 아니다. 각각은 고유한 작용을 지니며, 서로 다른 것들에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진다. 그 부분들은 필요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모은 자연이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것들을 나누어 분리한다. 더 높으신 분께서 이 설명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피조물의 부분들을 한 몸으로 결합하여 신이라 선언한다면, 앞서 밝혔듯 그 신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 서로 다르며, 부분들이 나뉠 수 있는 본성에 따라 다시 분리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8 29 진리를 바라봄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다른 방식으로도 논박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본성상 몸이 없고 보이지 않으며 만질 수 없으신데, 어떻게 하나님을 몸으로 생각하고 눈에 보이며 손으로 만지는 것들을 하나님의 영예로 숭배하는가? 또 하나님이 모든 일에 능하시고 아무것도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며 그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는 설명이 옳다면, 피조물을 신으로 만드는 이들은 피조물이 하나님에 관한 이런 규정 밖에 있음을 왜 보지 못하는가? 해가 땅 아래에 있으면 땅은 그 빛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다. 낮에는 해가 빛의 찬란함으로 달을 가린다. 우박은 자주 땅의 열매를 해치며, 물이 넘쳐흐르면 불은 꺼진다. 봄은 겨울을 밀어내고, 여름은 봄이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한다. 여름 자신도 가을의 제지를 받아 자기 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신이라면 서로에게 지거나 가려지지 않고, 늘 함께 있으며 동시에 공동으로 작용해야 했다. 낮과 밤에 해와 달과 다른 별들의 무리가 같은 빛을 지녀, 모두에게 비추고 모든 것을 밝게 해야 했다. 여름과 겨울과 봄과 가을이 변함없이 같은 때에 존재해야 했다. 바다는 샘들과 섞여 인간에게 공통의 마실 물을 주어야 했다. 바람 없는 고요함과 바람의 불음이 같은 때에 있어야 했다. 불과 물이 함께 인간에게 하나의 공통된 도움을 주어야 했다. 그들의 말대로 그것들이 신이라면, 아무도 그것들에게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신들은 해치려고 일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일을 유익을 위해 하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면, 서로 반대하고 싸우며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여전히 신이라 부르고 하나님의 영예로 숭배할 수 있는가? 서로 본성이 조화롭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기도하는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주고 화합을 이끌겠는가? 그러므로 해도 달도 피조물의 다른 어떤 부분도 참 신일 수 없다. 돌과 금과 다른 재료의 조각상이나, 시인들이 신화로 전하는 제우스와 아폴론과 다른 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앞서 증명했듯 어떤 것은 피조물의 부분이며, 어떤 것은 생명이 없고, 어떤 것은 죽을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숭배하고 신격화하는 일은 경건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와 온갖 불경을 가르친다. 한 분이시며 유일한 참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아는 데서 크게 미혹되었음을 입증한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의 우상 숭배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가득하며, 인간의 삶에 유익이 아닌 파멸을 주려고 들어왔음이 드러났다. 그러니 처음 약속했듯 미혹을 논박한 뒤 이제 진리의 길을 걸으며, 만물의 인도자이며 창조자인 아버지의 말씀을 바라보자. 그분을 통해 그 아버지 하나님도 깨닫고, 그리스인들이 진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29 30 앞서 말한 것들은 삶의 미혹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그 길을 알고 정확히 파악하려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필요하다. 하나님 자신은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그분께 이르는 길까지 우리에게서 멀리 있거나 우리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모세도 이렇게 가르쳤다. “믿음의 말씀이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 구주께서도 이를 가리키고 확증하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대들 안에 있다.” 우리 자신 안에 믿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지니므로, 만물의 왕이신 아버지의 구원하는 말씀을 빠르게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인들은 핑계를 대지 말라.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길이 없다며 스스로 속이고, 그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신의 상태를 변명하지 말라. 우리 모두 그 길에 서 있으며 그 길을 지닌다. 모두가 걷기를 원하지는 않고, 삶의 쾌락이 밖에서 끌어당기므로 벗어나 다른 길로 가려 한다. 이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각 사람의 영혼과 그 안의 정신이라고 답하겠다. 하나님은 오직 그 정신을 통해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다. 불경한 이들이 하나님을 부인했듯 영혼을 가진다는 사실도 부정한다면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다른 주장들보다 이것부터 말하는 편이 당연하다. 영혼의 조성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정신을 지닌 이들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인간에게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이 이성적이라는 사실도 순진한 이들을 위해 조금 설명해야 한다. 특히 이단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것마저 부인하며, 인간이 눈에 보이는 몸의 모습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혼이 밝혀지면 그들 자신을 통해 우상에 대한 논박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번역 주석 1. 믿음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다는 말은 신명기 30:14를 로마서 10:8과 같은 믿음의 표현으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안에 있다는 말씀은 누가복음 17:21이다. 전자판에서 그 말씀 앞에 잘못 삽입된 εὑρεῖν τὴν과 중복된 ταχέως는 PG 25, 60열을 대조해 교정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0 31 먼저 인간의 영혼이 이성적이라는 적지 않은 표지는, 이성 없는 생명체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인류가 이성적이므로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이성 없는 것들이라고 부른다. 인간만이 자기 밖의 것들을 생각하고, 현재 없는 것들을 떠올리며, 다시 숙고하여 여러 생각 중 더 나은 것을 판단하여 선택한다는 점도 중요한 증거다. 이성 없는 생명체들은 현재 있는 것들만 보고, 뒤에 해를 입더라도 눈앞의 것들만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인간은 보이는 것들을 향해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을 이성으로 판단한다. 자주 충동을 일으켰다가도 이성으로 억제하며, 생각한 뒤 다시 숙고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정신이 몸의 감각과 다름을 알아본다. 다른 것이므로 감각들 자체의 판단자가 된다. 감각들이 알아보는 것을 분별하고 상기시키며, 무엇이 더 나은지 감각들에게 드러낸다. 눈은 볼 뿐이며, 귀는 듣고, 입은 맛보고, 코는 냄새를 맡고, 손은 만진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아야 하는지 분별하는 일은 감각의 일이 아니라 영혼과 그 정신의 일이다. 손은 칼을 잡고 입은 독약을 맛볼 수도 있지만, 정신이 분별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를 비유로 살피면, 잘 만들어진 리라와 그것을 숙련되게 다루는 음악가의 관계와 같다. 리라의 줄들은 각각 자기 소리를 지닌다. 어떤 것은 낮고, 어떤 것은 높으며, 어떤 것은 중간이고, 어떤 것은 날카로우며, 어떤 것은 다른 소리를 낸다. 그러나 숙련된 사람 없이는 그 조화도 분별되지 않고 그 구성도 알려지지 않는다. 리라를 잡은 이가 줄을 튕기고 각각을 알맞게 건드릴 때 비로소 조화와 올바른 배열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몸의 감각들도 리라처럼 조율되어, 숙련된 정신이 그것들을 이끌 때, 영혼은 분별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실행하는지 안다. 이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일이며, 인간 영혼의 이성적 능력이다. 영혼은 이것을 사용하여 이성 없는 생명체들과 달라지고, 몸 안의 눈에 보이는 것과 참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몸은 땅에 놓여 있어도 인간은 자주 하늘의 것들을 상상하고 바라본다. 몸이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을 때도, 인간은 안에서 움직이며 자기 밖의 것들을 바라본다. 다른 나라로 여행하고 걸으며 아는 이들을 만나고, 자주 이를 통해 낮에 할 자기 행동을 예감하고 미리 안다. 인간이 자신을 넘어선 것들을 생각하고 깨닫는 이 능력은 이성적 영혼 외에 무엇이겠는가?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1 32 아직도 무분별을 뻔뻔하게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이것도 정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몸은 본성상 죽을 것인데, 인간은 어떻게 불멸에 관해 생각하며 자주 덕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가? 몸은 일시적인데 어떻게 인간은 영원한 것들을 상상하며, 방해되는 것들을 멸시하고 영원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몸은 자신에 관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자기 밖의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죽을 것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몸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는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다시 이성적이며 죽지 않는 영혼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 영혼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몸에 더 좋은 것들을 울려 준다. 음악가가 리라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또 눈은 본성상 보고 귀는 듣는데, 어떻게 어떤 것은 피하고 어떤 것은 선택하는가? 누가 눈을 보지 않도록 돌리는가? 누가 본성상 듣는 귀를 듣지 못하도록 닫는가? 누가 본성상 맛보는 미각을 자주 그 자연스러운 충동에서 멈추게 하는가? 누가 본성상 활동하는 손을 무엇인가 만지지 못하게 붙잡는가? 누가 냄새 맡도록 지어진 후각도 돌려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가? 누가 몸의 자연스러운 작용을 거슬러 이런 일을 하는가? 몸은 어떻게 자기 본성에서 돌아서 다른 이의 권고를 따르며, 그 신호에 따라 이끌리는가? 이것들은 이성적 영혼이 몸을 이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몸은 본성상 스스로를 몰아가지 않고 다른 것에 이끌려 움직인다. 말이 스스로에게 멍에를 씌우지 않고 다루는 사람에게 몰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선을 행하고 악에서 돌아서라고 하는 법도 있다. 그러나 이성 없는 생명체들에게 악한 일들은 숙고되지도 판단되지도 않은 채 머문다. 그것들은 이성과 이성에 따른 생각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이성적 영혼이 있음은 앞서 말한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2 33 영혼이 죽지 않도록 지어졌다는 사실도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알아야 한다. 우상들을 무너뜨리는 논박을 위해서다. 몸에 관해 알고 영혼이 몸과 다름을 살피면, 이 일에 관한 지식을 더 가까이 얻을 수 있다. 설명은 영혼이 몸과 다름을 증명했다. 몸은 본성상 죽을 것이므로, 몸과 같지 않은 영혼은 반드시 죽지 않아야 한다. 또 앞서 증명했듯 영혼이 몸을 움직이고 자신은 다른 것들에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움직이는 영혼은 몸을 땅에 내려놓은 뒤에도 다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따른다. 죽는 것은 영혼이 아니다. 영혼이 떠나므로 몸이 죽는다. 영혼도 몸에 의해 움직여진다면, 움직이는 것이 떠날 때 영혼도 죽는다는 결론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몸도 움직인다면, 영혼은 더욱더 자신을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움직이므로 몸이 죽은 뒤에도 반드시 산다. 영혼의 움직임은 곧 그 생명이기 때문이다. 몸도 움직일 때 살아 있다고 하고, 움직임을 멈출 때 죽었다고 말한다. 영혼이 몸 안에서 행하는 작용 전체를 통해서도 이것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몸에 머물며 결합되어 있을 때도 영혼은 몸의 작음에 따라 줄어들거나 측정되지 않는다. 몸이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않고 죽은 듯 잠들 때도, 영혼은 자기 능력에 따라 깨어 있으며 몸의 본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몸 안에 머물면서도 거기서 여행을 떠난 듯 땅 위를 넘어선 것들을 상상하고 바라본다. 자주 땅의 몸들 밖에 있는 거룩한 이들과 천사들을 만나고, 정신의 깨끗함으로 담대하게 그들에게 이른다. 그렇다면 영혼을 결합시키신 하나님이 원하실 때 몸에서 풀려나면, 불멸에 관한 지식이 훨씬 더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몸과 결합되어서도 몸 밖의 삶을 살았다면, 몸이 죽은 뒤에는 훨씬 더 살 것이며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지 않으므로 불멸과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고 헤아린다. 몸이 죽을 것이므로 그 감각도 죽을 것들을 바라보듯, 불멸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영혼 자신도 반드시 죽지 않으며 늘 살아야 한다. 불멸에 관한 생각과 관상은 영혼 안에 머물며 결코 떠나지 않는다. 영혼 안에서 불씨처럼 타올라 불멸을 확증한다. 그래서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생각도 지니며 스스로 자기의 길이 된다.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과 파악을 얻는다. 번역 주석 1. 이 장은 영혼의 움직임과 불멸, 몸을 떠난 뒤에도 영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3 34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 하나님을 부인하고 생명 없는 것들을 숭배하며 자신에게 이성적 영혼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광기의 책망을 받아 이성 없는 생명체들 가운데 헤아려진다. 그래서 생명 없는 듯이 생명 없는 것들에 미신을 품는 그들은, 긍휼과 인도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영혼이 있다고 인정하며 이성적 능력을 크게 자랑한다면, 그 자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영혼이 없는 듯 이성을 거슬러 대담하게 행동하고,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을 신적인 것보다도 더 높이는가? 죽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지니면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고 죽을 것들로 본뜬다. 또 하나님에게서 떠났듯이, 왜 다시 그분께 피하지 않는가? 그들은 생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영혼의 정신으로 올라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설 수도 있다. 자신을 덮은 온갖 욕망의 더러움을 벗고 씻으면 돌아설 수 있다. 영혼에 덧붙은 모든 낯선 것을 버리고 영혼만 처음 지어진 모습대로 드러낼 때까지 씻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 말씀을 따라 지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지고 그분을 닮도록 지어졌다. 하나님의 성경도 하나님의 목소리로 말하며 이를 가리킨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게 인간을 만들자.” 그러므로 영혼이 자신에게 쏟아진 죄의 더러움을 모두 버리고 형상을 따른 것만 깨끗하게 지키면, 그것이 밝아져 거울처럼 아버지의 형상이신 말씀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또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깨닫는다. 구주는 그 아버지의 형상이다. 밖에서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들 때문에 영혼이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하여 영혼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보이는 것들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 피조물은 질서와 조화로, 마치 글처럼 자신의 주인이며 조성자를 가리키고 외친다. 번역 주석 1. 우리의 형상과 닮음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는 인용은 창세기 1:26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아버지의 형상이신 말씀을 바라보는 논증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4 35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자신이 지으신 영혼들을 돌보신다. 본성상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 없으며 모든 생성된 실체를 넘어 계신다. 그래서 인류는 그분을 아는 데 이르지 못할 처지였다. 생성된 것들은 존재하지 않던 것에서 생겼지만 그분은 생겨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피조물을 이처럼 질서 있게 꾸미셨다. 본성상 보이지 않으셔도 적어도 작품들로 인간에게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장인은 자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작품들을 통해 알려진다. 조각가 페이디아스에 관해서도, 그의 작품은 비례와 부분들의 상호 관계로 그가 없을 때도 보는 이들에게 그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몸의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우주의 질서를 통해 그 조성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본성을 잘못 사용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알려지지 않게 버려두셨다는 핑계는 아무도 대지 말라. 앞서 말했듯 그분은 피조물을 그렇게 질서 있게 꾸미셔서, 본성상 보이지 않으셔도 작품들을 통해 알려지게 하셨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이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쓴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지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져 분명히 보인다.” 리카오니아인들에게는 담대하게 말한다. “우리도 그대들과 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이다. 이 헛된 것들에서 돌아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향하라고 그대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자기 길로 가게 두셨다. 그러나 선을 행하여 자신을 증거 없이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늘에서 그대들에게 비와 열매 맺는 계절을 주시며, 그대들의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채우셨다.” 하늘의 둥근 궤도와 해와 달과 다른 별들의 운행을 보라. 그 위치와 회전은 서로 반대되고 다르지만, 그 차이 속에서도 모두 함께 같은 질서를 지킨다. 누가 이것을 보고,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조성자가 그것들을 질서 있게 다스린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해는 날마다 떠오르고, 달은 밤에 나타나 늘 같은 날수에 따라 기울고 차오른다. 어떤 별은 빠르게 달리며 여러 방식으로 궤도를 바꾸고, 어떤 별은 흔들림 없이 움직인다. 이를 보고 누가 반드시 그것들을 이끄는 창조자가 계시다는 생각을 얻지 않겠는가? 번역 주석 1. 보이지 않는 것을 피조물을 통해 안다는 인용은 로마서 1:20이다. 리카오니아인들에게 한 말은 사도행전 14:15-17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5 36 본성상 반대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라. 불은 차가운 것과, 건조한 것은 습한 것과 섞여 서로 대립하지 않고, 마치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듯 하나의 몸을 이룬다. 누가 이것을 보고 그것들을 결합한 분이 그것들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겨울은 봄에, 봄은 여름에, 여름은 가을에 자리를 내준다. 이것들은 본성상 서로 반대된다. 어떤 것은 식히고 어떤 것은 뜨겁게 하며, 어떤 것은 기르고 어떤 것은 시들게 한다. 그런데 모두 인간에게 균형 있고 해롭지 않은 도움을 준다. 누가 이것을 보고, 보이지 않더라도 그보다 높으며 모든 것에 균형을 주고 만물을 이끄는 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공기 중에 구름이 떠 있고 구름 안에 무거운 물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고, 누가 이것들을 묶고 그렇게 되라고 명령한 분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본성상 매우 무거운 땅이 물 위에 놓여, 본성상 움직이는 것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무는 모습을 보고, 누가 이것들을 정하고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땅이 때에 따라 열매를 맺고, 하늘에서 비가 오며, 강이 흐르고 샘이 솟는 모습을 보라. 생명체는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며, 이런 일들이 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때에 일어난다. 서로 다르고 반대되는 것들이 균형 있고 같은 질서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누가 이것들을 질서 있게 꾸미고 자기 뜻대로 다스려 잘 유지하는 하나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본성이 서로 반대되므로 그것들 스스로는 결코 유지되거나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물은 본성상 무겁고 아래로 흐르지만, 구름은 가볍고 위로 올라가는 것에 속한다. 그런데 더 무거운 물이 구름 안에 실린 모습을 우리는 본다. 땅은 매우 무겁고 물은 그보다 가볍다. 그런데 더 가벼운 것이 더 무거운 것을 지탱하며, 땅은 내려가지 않고 움직임 없이 서 있다. 수컷은 암컷과 같지 않지만 하나로 모여, 둘에게서 같은 종류의 생명체가 하나 태어난다. 한데 모아 말하면, 차가운 것은 뜨거운 것과 대립하고 습한 것은 건조한 것과 싸운다. 그런데 모이면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하여 하나의 몸과 모든 것의 생성을 이룬다. 번역 주석 1. 땅이 물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명은 앞의 고대 자연관을 잇는다. 전자판에서 개별 사본의 전승 경계와 공백으로 나뉜 κινού μενον은 PG 25, 72열에서 확인하여 κινούμενον으로 결합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6 37 본성상 싸우고 대립하는 것들은 그것들을 묶은 분이 더 높고 주인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모이지 못했을 것이다. 원소들 자체도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 그분께 굴복하고 따른다. 각각은 자기 본성을 바라보며 다른 것과 싸우지 않고, 자신들을 묶은 주를 알아 서로 화합한다. 본성상 대립하지만 다스리는 분의 뜻으로 서로 우호적이다. 더 높은 명령으로 이것들이 하나로 섞이지 않았다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건조한 것과 습한 것, 둥근 것과 곧은 것, 불과 차가운 것, 바다와 땅, 해와 달, 별들과 하늘, 공기와 구름이 어떻게 섞이고 모였겠는가? 각각의 본성은 다른 것과 다르다. 그들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을 것이다. 어떤 것은 태우고 어떤 것은 식히며, 무거운 것은 아래로 끌고 가벼운 것은 반대로 위로 끌며, 해는 밝히고 공기는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별들도 서로 다투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더 위에, 어떤 것은 더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밤도 낮에 자리를 내주지 않고, 반드시 계속 낮과 싸우며 다투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주는 보이지 않고 무질서가 보였을 것이다. 질서 대신 혼란, 유지되는 전체 대신 유지되지 못하는 전체, 적절한 척도 대신 불균형이 있었을 것이다. 각각이 다투고 싸우므로 모든 것이 사라지거나 우세한 것만 나타났을 것이다. 이것도 다시 만물의 무질서를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만 남으면 다른 것들의 도움이 부족하여 전체를 조화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발만 혹은 손만 남는다면 몸 전체를 보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해만 비추거나 달만 돌거나 밤만 있거나 언제나 낮이라면, 어떤 우주가 되겠는가? 별들 없이 하늘만 있거나 하늘 없이 별들만 있다면 어떤 조화가 있겠는가? 바다만 있거나 물과 피조물의 다른 부분들 없이 땅만 놓여 있다면 무엇이 유용하겠는가? 원소들이 서로 다투고 우세한 하나만 있어 몸을 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인간이나 어떤 생명체가 어떻게 땅 위에 나타났겠는가? 뜨거운 것만, 차가운 것만, 습한 것만 혹은 건조한 것만으로 만물 중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질서하고 결합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세해 보이는 것 자체도 다른 것들의 도움 없이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7 38 그러나 만물에는 혼란 대신 질서가 있고, 불균형 대신 비례가 있으며, 무질서 대신 우주와 우주의 완전히 조화로운 배열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모으고 단단히 묶어 서로 조화하게 하시는 주인을 반드시 생각하고 깨달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반대되는 것들의 질서와 조화에서 그것들의 통치자이며 질서를 주시는 분이며 왕을 깨달을 수 있다. 많고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본다고 하자. 작은 이들과 큰 이들,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 노인들과 젊은 이들, 남자들과 여자들이 질서 있게 살고 있다. 서로 다르면서도 화합하며, 부자가 가난한 이를, 큰 이가 작은 이를, 젊은 이가 노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두 공평한 몫에 따라 평화롭게 산다. 이를 보면 통치자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의 존재가 화합을 이루어 준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는다. 무질서는 통치자가 없다는 표지이고, 질서는 이끄는 이를 드러낸다. 몸의 지체들도 서로 조화한다. 눈은 귀와 싸우지 않고 손은 발과 다투지 않으며, 각각 다툼 없이 자기 역할을 다한다. 이를 보고 우리는 영혼이 보이지 않더라도, 몸 안에서 이 지체들을 이끄는 영혼이 반드시 있음을 깨닫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질서와 조화 속에서 만물을 이끄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여럿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이 질서 있는 배열과 만물이 화합하는 조화도, 그 통치자이며 인도자인 말씀이 여럿이 아닌 한 분임을 드러낸다. 피조물의 통치자가 여럿이었다면 이런 만물의 질서가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각각 모든 것을 자기 뜻으로 끌며 다른 이와 싸워, 많은 통치자 때문에 다시 모든 것이 무질서했을 것이다. 다신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라고 했듯, 많은 통치자가 다스리는 것도 반드시 통치자 없는 상태가 된다. 각각 다른 이의 통치를 없애므로 결국 다스리는 이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것에 통치자 없는 상태가 생겼을 것이다. 통치자가 없으면 반드시 무질서가 생긴다. 반대로 많고 다양한 것들의 하나인 질서와 화합은 통치자도 한 분임을 드러낸다. 누군가 많은 서로 다른 줄로 이루어진 리라 소리를 멀리서 듣고, 그 소리의 조화에 감탄한다고 하자. 낮은 줄만, 높은 줄만, 중간 줄만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균형을 이루며 함께 울린다. 그는 이로부터 리라가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고 여러 사람이 연주하지도 않음을 반드시 깨닫는다. 각 줄의 소리를 조화롭게 섞은 한 음악가가 숙련되게 연주함을 안다. 그 음악가를 보지 못해도 그렇다. 온 우주의 질서는 완전히 조화롭다. 위의 것들과 아래의 것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만물의 하나인 질서를 이룬다. 그러므로 온 피조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자신의 빛으로 만물을 비추고 움직이시는 분도, 여럿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8 39 피조물의 통치자와 조성자가 많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확한 경건과 진리에 따라 그 창조자가 한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피조물 자체가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만물의 조성자가 한 분이라는 확실한 표지는 우주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신이 여럿이었다면 우주도 여러 개이며 서로 달라야 했다. 여럿이 한 우주를 제작하는 것도, 하나의 우주가 여럿에게 만들어지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여기에서 불합리한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우주가 여럿에게 만들어졌다면, 만든 이들의 무능을 뜻한다. 여러 이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각각이 만드는 데 지닌 지식이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한 명으로 충분했다면, 여럿이 서로의 부족을 채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할 뿐 아니라 금지된 모든 일의 한계까지 넘어선다. 인간의 장인도 홀로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한 작품을 완성한다면, 완전하다고 하지 않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각각 전체를 완성할 수 있지만 생기는 것을 공유하려고 모두 일했다면 어떠한가? 무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려고 각자가 평판을 위해 일했다면 우스운 일이 된다. 신들에게 헛된 자랑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매우 불합리하다. 또 각각 전체를 창조하기에 충분했다면, 한 명으로 모든 것에 충분한데 여럿이 왜 필요한가? 작품은 하나이고 만든 이들은 서로 다른 여럿이라면, 불경하고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다. 하나이며 완전한 것은 서로 다른 것들보다 낫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설명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도 알아야 한다. 우주가 여럿에게 만들어졌다면 그 움직임들도 다양하며 서로 달랐을 것이다. 만든 이들 각각을 바라보므로 움직임도 다양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차이 속에서 다시 만물의 무질서와 혼란이 생겼을 것이다. 배도 여럿이 조종하면 똑바로 항해하지 못한다. 한 조타자가 키를 잡아야 한다. 리라도 여럿이 연주하면 조화로운 소리를 내지 못한다. 연주하는 숙련자가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하나이고 우주가 하나이며 그 질서가 하나이므로, 그 왕과 창조자도 한 분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창조자 자신이 온 우주를 하나로 만드셨다. 여러 우주가 있다는 이유로 창조자도 여럿이라 생각하지 않고, 작품이 하나이므로 그 조성자도 한 분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창조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주도 하나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우주들도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생겨난 우주가 하나이므로 그 창조자도 한 분이심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39 40 이분은 누구인가? 이것을 밝히고 말하는 것은 특히 필요하다. 누군가 그분을 몰라 미혹되어 다른 이를 생각하고, 앞선 이들처럼 다시 하나님을 모르는 같은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에 관해 아무도 생각이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설명은 시인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들이 신이 아님을 드러냈고, 피조물을 신으로 만드는 이들의 미혹을 논박했다.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 전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이며 불경임을 증명했다. 이것들이 부정된 이상, 경건한 숭배는 우리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경배하고 전하는 분만 참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반드시 따른다. 그분은 피조물의 주이며 모든 실체의 창조자이시다. 이분은 온전히 거룩하고 모든 생성된 실체를 넘어 계신 그리스도의 아버지 외에 누구이겠는가? 가장 훌륭한 조타자처럼 자신의 지혜와 말씀, 우리 주이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로 모든 곳의 것들을 구원하도록 이끄신다. 자신이 좋다고 여기시는 대로 질서 있게 꾸미고 만드신다. 만들어진 것들과 우리가 생겨나는 모습을 보는 것들은 좋다. 그분도 그렇게 원하시므로, 아무도 이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피조물의 움직임이 이성 없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무작정 흘러간다면, 이런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만물이 말씀과 지혜와 지식으로 유지되고 온갖 질서로 꾸며졌다면, 그것을 다스리며 질서를 주신 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말씀은 생성된 각각의 것 안에 얽혀 타고난 원리, 어떤 이들이 흔히 씨앗의 로고스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없고 생각하거나 깨닫지도 못하며, 적용하는 이의 지식에 따라 외부의 기술로만 작용한다. 이성 있는 존재들이 사용하는, 음절들로 이루어져 공기 중에서 나타나는 말도 아니다. 선하시며 만물의 하나님이신 분의 살아 있고 활동하시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말한다. 그분은 생성된 것들과 온 피조물과 다르시며, 선하신 아버지의 고유하고 유일한 말씀이시다. 이 만물을 질서 있게 꾸미셨고 자신의 섭리로 밝히신다. 선하신 아버지의 선하신 말씀이시므로, 그분 자신이 만물의 배열을 질서 있게 꾸미셨다. 반대되는 것들을 서로 결합하여 그것들에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분은 하늘을 회전시키고, 땅을 매달아 아무것도 위에 놓이지 않은 땅을 자신의 명령으로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 빛을 받은 해는 온 세상을 밝히며, 달은 정해진 양의 빛을 지닌다. 그분 때문에 물도 구름 위에 매달리고 비가 땅에 내리며, 바다는 경계가 정해지고 땅은 온갖 식물로 무성하고 푸르게 자란다. 믿지 않는 이가 이 말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그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증거를 얻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유지되며, 앞서 말했듯 말씀, 곧 신적인 말씀으로 생기지 않았다면 지어진 어떤 것도 굳게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 주석 1. λόγος는 이 장에서 피조물에 내재한 원리, 음절로 이루어진 인간의 말, 아버지의 살아 계신 말씀을 구별하는 데 쓰인다. σπερματικός는 ‘씨앗의 로고스’로 옮겼으며,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말씀을 그 원리와 구별한다. αὐτολόγος는 ‘말씀 자체’로 옮겼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0 41 말씀이신 그분은 앞서 말했듯 인간의 말처럼 음절들로 이루어지지 않으셨다. 자신의 아버지를 변함없이 나타내는 형상이시다. 인간은 부분들로 이루어지고 존재하지 않던 데서 생겨났으므로, 그 말도 결합되고 흩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합성된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도 존재하시며 합성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한 분이며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선한 샘 같은 아버지에게서 선하게 나오셔서 만물을 질서 있게 꾸미고 유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어진 것들에 머무시는 이유는 참으로 놀랍다. 지금 존재하는 이런 방식 외에는 합당하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생성된 것들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던 데서 실재하게 되었으므로, 그 자체로 살피면 유동적이고 약하며 죽을 것이다. 만물의 하나님은 본성상 선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시므로 인간을 사랑하신다. 선하신 분에게는 어떤 것에 관해서도 시기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존재함을 시기하지 않고, 모두 존재하기를 원하여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려 하신다. 그분은 생성된 모든 본성이 그 자체의 원리에 따르면 유동적이고 흩어짐을 보셨다. 전체가 그런 일을 겪고 다시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해체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영원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시고 피조물에 실체를 주신 뒤, 그것이 자기 본성대로 휩쓸리고 흔들리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다시 존재하지 않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선하신 분으로서, 그 자신도 하나님이신 자신의 말씀으로 전체를 이끌고 굳게 세우신다. 피조물이 말씀의 인도와 섭리와 질서로 빛을 받아 확고히 머물게 하신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참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에 참여하고 그분의 도움으로 존재하여, 말씀이 지키지 않으셨다면 겪었을 일을 겪지 않게 하신다. 그 일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가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유지되며,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시다.” 진리의 일꾼들이 거룩한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번역 주석 1.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고 교회의 머리라는 인용은 골로새서 1:15-18이다. 앞의 ‘독생하신 하나님’은 채택 그리스어 μονογενὴς θεός를 따른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1 42 전능하고 온전히 완전하며 거룩하신 아버지의 말씀 자신이 만물에 머무시고 모든 곳에 자신의 능력을 펼치신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밝히시며, 자신 안에 유지하고 단단히 묶으신다. 아무것도 자신의 능력 없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통해 각각 따로 또 만물 전체를 한꺼번에 살리고 지키신다. 감각적 실체의 원리들인 뜨겁고 차갑고 습하고 건조한 것을 하나로 섞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의 조화로운 화음을 이루게 하신다. 그분과 그 능력 때문에 불은 차가운 것과 싸우지 않고 습한 것은 건조한 것과 싸우지 않는다. 각각은 반대되지만 벗이며 형제처럼 함께 모여 보이는 것들을 살리고, 몸들이 존재하게 하는 원리들이 된다. 이 하나님 말씀께 순종하여 땅의 것들은 생명을 얻고 하늘의 것들은 유지된다. 그분 때문에 온 바다와 큰 대양은 자기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온 육지는 앞서 말했듯 푸르게 자라며 온갖 서로 다른 식물로 무성하다. 분명한 것들을 하나씩 이름 붙이느라 오래 머물지 않겠다. 존재하거나 생겨나는 것 중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생겨나고 서지 않은 것은 없다.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이도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음악가가 리라를 조율하고 기술로 낮은 소리와 높은 소리, 중간 소리와 다른 소리들을 모아 하나의 선율을 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지혜도 만물을 리라처럼 잡아, 공기의 것들과 땅의 것들을, 하늘의 것들과 공기의 것들을, 전체와 개별 부분들을 결합하신다. 자신의 명령과 뜻으로 그것들을 움직여 하나의 우주와 그 하나의 질서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이루신다. 자신은 아버지 곁에서 움직임 없이 머무시면서, 자신의 확고한 존재로 아버지께서 각각에 대해 원하시는 대로 만물을 움직이신다. 그 신성의 놀라움은 하나의 같은 명령으로 모든 것을 동시에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간격을 두지 않고 전체를 한꺼번에 다스리신다. 곧은 것과 둥근 것, 위와 가운데와 아래의 것, 습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각각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고 질서 있게 꾸미신다. 그분의 같은 명령으로 곧은 것은 곧게, 둥근 것은 둥글게 동시에 움직인다. 가운데 있는 것은 자기 상태대로 움직이고, 뜨거운 것은 뜨거워지며 건조한 것은 건조해진다. 만물은 그분께 각각의 본성대로 생명을 받고 유지된다. 그분을 통해 놀랍고 참으로 신적인 조화가 이루어진다. 번역 주석 1. 말씀에 관한 인용은 요한복음 1:1, 3이다. 뒤의 리라 비유는 인용문에 합치지 않고 저자의 설명으로 구별했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2 43 이토록 큰 일을 비유로 이해하도록, 설명을 큰 합창단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자. 합창단은 아이들, 여자들, 노인들, 젊은 이들 같은 서로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한 지휘자가 신호를 주면 각각 자신의 본성과 능력에 따라 소리 낸다. 남자는 남자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노인은 노인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소리 내며, 모두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 우리 영혼이 우리 안의 감각들을 각각의 작용에 따라 동시에 움직이는 것과도 같다. 하나의 대상이 앞에 있으면 모두 함께 움직여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손은 만지고, 후각은 냄새를 알아보고, 미각은 맛본다. 자주 몸의 다른 지체들도 움직여 발도 걷는다. 세 번째 비유로도 설명하겠다. 아주 크게 건설된 도시가, 그 도시를 지은 통치자이며 왕이 있는 가운데 관리되는 것과 같다. 그가 그곳에 있으면서 명령하고 모든 것에 눈을 돌리면, 모두 따른다. 어떤 이들은 농사를 향해, 어떤 이들은 물을 길으려고 수도로 서둘러 간다. 다른 이는 음식을 얻으러 나아가고, 어떤 이는 의회로 가며, 어떤 이는 시민 집회에 들어간다. 재판관은 재판하러 가고, 통치자는 법을 제정하러 간다. 장인은 즉시 일에 나서고, 뱃사람은 바다로 내려간다. 목수는 목수 일로, 의사는 치료하러, 건축가는 건축하러 간다. 어떤 이는 밭으로 가고 어떤 이는 밭에서 올라온다. 어떤 이들은 도시 안에서 활동하고, 어떤 이들은 도시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 모든 일은 한 통치자의 존재와 그의 지시에 따라 일어나며 유지된다. 온 피조물도 이와 같다. 비유는 작지만 더 큰 생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한 번의 명령으로 모든 것이 동시에 질서 있게 배열된다. 각각 고유한 일을 행하며, 모두가 동시에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번역 주석 1. 도시 비유의 ἐκκλησία는 시민 집회다. 교회라는 뜻으로 옮기면 의회·재판관·장인들이 나오는 도시의 문맥과 어긋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3 44 만물을 감독하고 이끄시는 신적인 아버지 말씀의 명령과 능력으로 하늘은 회전하고 별들은 움직인다. 해는 빛나고 달은 운행하며, 공기는 그분께 밝아지고 에테르는 뜨거워진다. 바람이 불고 산들은 높이 솟아 서 있으며, 바다는 물결치고 그 안의 생명체들은 길러진다. 땅은 움직임 없이 머물며 열매를 맺고, 인간은 빚어져 살다가 다시 죽는다. 모든 것이 생기를 얻고 움직인다. 불은 태우고 물은 식히며, 샘은 솟고 강은 넘쳐흐르며, 계절과 때가 온다. 비가 내리고 구름이 차며 우박이 생기고 눈과 얼음이 언다. 새는 날고 기는 것들은 다니며 물속의 것들은 헤엄친다. 바다에서는 항해하고 땅에는 씨를 뿌린다. 땅은 자기 때에 푸르게 자라며, 식물은 성장하고 어떤 것은 어려지고 어떤 것은 익는다. 자라다가 늙고 시들며,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태어나 나타난다.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과, 너무 많아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더 많은 것을 밝히고 살리신다. 자신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질서 있게 꾸미며 하나의 우주를 이루신다. 보이지 않는 능력들도 자신 밖에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 능력들의 조성자이시므로 그것들도 만물 안에 포함하여 자신의 명령과 섭리로 유지하고 살리신다. 이것을 믿지 않을 구실은 없다. 그분의 섭리로 몸들은 자라고 이성적 영혼은 움직이며 생각하고 산다. 이에 관해서는 많은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들을 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자신이 하나의 단일한 명령과 자신의 능력으로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능력들을 움직이고 유지하며, 각각에 고유한 작용을 부여하신다. 그 결과 신적인 능력들은 더 신적으로 움직이고,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방식대로 움직인다. 그분 자신은 만물 위에서 만물의 인도자이며 왕이며 유지하는 분이 되신다. 모든 일을 자신의 아버지의 영광과 그분을 아는 지식을 위해 행하시며, 생겨나는 작품들을 통해 가르치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피조물의 크기와 아름다움에서 그것들을 낳으신 분을 유추하여 바라볼 수 있다.” 번역 주석 1. 피조물의 크기와 아름다움에서 창조자를 바라본다는 끝의 인용은 지혜서 13:5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4 45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질서와 별들의 빛을 보면, 이것들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말씀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그 아버지 하나님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말씀은 그분에게서 나오시므로 자신의 아버지를 해설하는 분이며 전하는 분이라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있는 일들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서 말이 나오면 우리는 그 근원이 정신임을 생각한다.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성으로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을 본다. 그렇다면 훨씬 더 큰 이해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말씀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선하신 아버지도 깨닫는다. 구주 자신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내 아버지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모든 성경도 이것들을 더 분명하고 크게 선포한다. 우리도 그것들에 확신을 얻어 그대에게 이 글을 쓴다. 그대도 성경을 읽으면 이 말들에 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더 큰 것들로 확증되는 설명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전부터 우상들을 없애는 일에 관해 유대 백성에게 미리 경고했다. “그대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며,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어떤 것의 모양도 만들지 말라.”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이유도 다른 방식으로 가리킨다. “이방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한다.” 피조물에 관한 가르침도 잠잠히 두지 않았다. 그 아름다움을 잘 알기에, 누군가 그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의 작품이 아닌 신으로 숭배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미리 경고한다. “눈을 들어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질서를 보고 미혹되어 그것들을 경배하지 말라. 그대의 주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모든 민족에게 나누어 주신 것들이다.” 그것들을 그들의 신으로 삼으라고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작용을 통해 민족들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옛 유대 백성은 더 풍성한 가르침을 지녔다. 피조물의 작품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경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인간들을 우상에 관한 미혹과 무분별한 상상에서 전체적으로 이끌어 내며 이렇게 말한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이 그대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신들이 존재하기에 그것들을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참 하나님에게서 돌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스스로 신으로 만들기 시작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시인들과 저술가들이 이름 붙였으나 신이 아님이 밝혀진 것들이 그런 경우다. 표현 자체도 그것들이 신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이 그대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미래에 관해 말한다. 앞으로 생길 것은 이 말이 주어질 때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 주석 1.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본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14:9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출애굽기 20:4, 우상의 감각 기관은 시편 115:4-7, 해와 달을 경배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명기 4:19과 대응한다. 다른 신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출애굽기 20:3이다. 저자는 그리스어 미래형 ἔσονται의 형태를 논증에 사용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5 46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방인들과 우상들의 하나님 없는 상태를 없앤 뒤 잠잠히 있었는가? 인류가 신적인 지식에 참여하지 못한 채 흘러가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생각을 미리 맞이하여 말씀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그대의 주 하나님, 주는 한 분이시다.” 또 “그대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대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그대의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며 그분께 붙어 있으라.” 모든 것을 통하며 모든 것에 미치는 말씀의 섭리와 질서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모든 성경이 증언한다. 지금 말하는 내용만으로도 이 설명의 확신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이들이 말한다. “주께서 땅을 기초 놓으셨고 땅은 머문다. 주의 명령에 따라 낮은 머문다.” 또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땅에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을 내시고 인간이 쓰도록 푸른 풀을 내시며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누구를 통해 주시는가? 모든 것이 생겨난 바로 그분을 통해서가 아닌가?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므로, 만물의 섭리도 마땅히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분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누구이겠는가?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그분에 관해 말한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굳게 세워졌고, 그 입의 영으로 하늘의 온 무리가 세워졌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고 설명하며, 우리도 이렇게 설득한다. “그분이 말씀하시니 생겨났고, 명령하시니 창조되었다.” 모든 면에서 위대한 모세도 세상 창조의 시작을 설명하며 이 말을 확증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게 인간을 만들자.” 하늘과 땅과 모든 것의 생성을 이루실 때도 아버지께서 그분께 말씀하셨다. “하늘이 생겨나라. 물들이 모이고 마른땅이 드러나라. 땅은 풀을 내라. 또 모든 생명체를 내라.” 이 말들로 유대인들이 성경에 참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논박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와 이야기하시며 명령하여 말씀하셨는가? 생겨나는 것들에 명령하고 이야기하셨다면 그 말씀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 생길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 말하지 않으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에게 생겨나라고 명령하며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앞으로 존재할 것들에 명령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했다. “하늘아, 생겨나라. 땅아, 생겨나라. 풀아, 나오라. 인간아, 만들어져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인간을 만들자”, “풀이 나오라”고 명령하신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있는 누군가와 이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심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이 이야기하면서 만물을 만들게 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 외에 누구이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외에 누구와 이야기하신다고 말하겠는가? 생성된 모든 실체를 만드실 때, 그분의 지혜 외에 누가 함께 있었겠는가?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다.”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에는 하늘과 땅에서 생성된 모든 것이 포함된다. 지혜로서 함께 계시고 말씀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질서 있게 꾸미셨다. 아버지의 능력이시므로 만물이 존재하도록 강하게 하신다. 구주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내가 보는 대로, 나도 모든 것을 똑같이 한다.” 그분의 거룩한 제자들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생겨났다고 가르친다. 선하신 분에게서 나오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낳으신 아들로서 아버지의 능력과 지혜와 말씀이시다. 참여하여 그렇게 되거나 밖에서 이것들이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 참여하여 그분을 통해 지혜로워지고, 그분 안에서 능력과 이성을 얻는 이들과 다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고유한 지혜 자체, 말씀 자체, 능력 자체이시며, 빛 자체, 진리 자체, 의 자체, 덕 자체이시다. 또 새겨진 모습이며 광채이며 형상이시다. 한데 모아 말하면, 아버지의 온전히 완전한 열매이며 유일한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함없이 나타내는 형상이시다. 번역 주석 1. 한 분 주와 하나님 사랑에 관한 말은 신명기 6:4-5, 경배와 섬김에 관한 말은 신명기 6:13과 10:20을 잇는다. 땅과 낮의 지속은 시편 119:90-91, 수금과 비와 풀은 시편 147:7-9, 말씀으로 세워진 하늘은 시편 33:6, 9와 대응한다. 2. 인간을 만들자는 말과 피조물을 내라는 말은 창세기 1장의 표현들이다. 저자가 인용을 묶어 자신의 질문에 사용하는 배열을 유지했다. 지혜의 함께 있음은 잠언 8:27-30,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행함은 요한복음 5:19과 대응한다. 3. αὐτοσοφία·αὐτολόγος·αὐτοδύναμις 등은 참여하여 지혜나 능력을 얻는 피조물과 아들의 고유한 존재를 구별한다. 각각 ‘지혜 자체’, ‘말씀 자체’, ‘능력 자체’로 옮겼다. ‘새겨진 모습’과 ‘광채’는 히브리서 1:3의 용어와 대응한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6 47 그렇다면 누가 아버지를 온전히 헤아려 이 말씀의 능력들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과 지혜이시며, 생성된 것들에게 낮추어 오셔서 자신을 낳으신 분을 알고 깨닫게 하신다. 거룩하게 함 자체와 생명 자체, 문과 목자와 길과 왕과 인도자가 되신다. 무엇보다 만물의 구주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빛이며 섭리가 되신다. 아버지는 자신에게서 나온 이처럼 선하고 창조하시는 아들을 생성된 것들에게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을 통해 만물이 유지되고 살도록 하여, 날마다 그분을 모두에게 드러내신다. 또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자신도 드러내신다. 구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 그러므로 말씀은 반드시 자신을 낳으신 분 안에 계시며, 태어나신 분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 이 일이 그렇고 아무것도 그분 밖에 있지 않으며,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그분께 의존하는데도, 정신을 잃은 사람들은 그분을 아는 지식과 경건을 밀쳐 두었다. 존재하는 것들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높이고,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대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창조자보다 피조물을 섬기며 무분별하고 불경한 일을 겪는다. 장인보다 작품에 감탄하고, 도시의 작품들을 보고 놀라면서 그것들을 만든 이를 짓밟는 사람과 같다. 혹은 악기는 칭찬하면서 그것을 만들고 조율한 이는 내쫓는 사람과 같다. 어리석고 눈이 크게 손상된 이들이다. 배를 만드는 이의 작업 없이, 건축가의 건축 없이, 음악가의 제작 없이 건물이나 배나 리라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정신을 잃어 모든 광기를 넘어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 만물의 구주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지 않는 이들도 생각이 건전하지 않다고 나는 본다. 아버지는 그분을 통해 만물을 질서 있게 꾸미고 유지하며 전체를 돌보신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그분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 경외를 지니고 기뻐하며 희망을 가져라. 영혼이 그분의 법에 따라 질서 있게 꾸며진다면, 그분을 향한 믿음과 경건의 열매는 불멸과 하늘나라다. 그분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상인 것처럼, 덕의 길 대신 반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에 큰 수치와 용서받을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진리의 길을 알고서도 자신이 안 것과 반대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번역 주석 1.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에 관한 인용은 요한복음 14:10-11이다. 문·목자·길 등의 호칭을 나열하는 문장은 각각의 성경 구절 번호가 없는 저자의 설명이다. 인용 주소: https://patristics.missionalbible.org/releases/alpha-0.28/athanasius-gentes/index.html#p-47 출처·이용 조건 Codex 한국어 번역·메모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한국어 번역·메모에 보유 가능한 권리 Athanasius; Kyriakos Savvidis; Patristische Arbeitsstelle Bochum / Patristic Text Archive.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개별 TEI에 이용허락을 명시한 그리스어 전자판과 추출·교정 가공물 이 저장소의 한국어 AI 번역 시제품; Codex AI 생성 CC-BY-SA-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AI 한국어 번역에 프로젝트가 보유할 수 있는 권리의 범위. 저작권 성립을 단정하지 않음